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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처는 허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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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처는 허구가 아니다
  • 의약뉴스
  • 승인 2007.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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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화려한 휴가

   
▲ <화려한 휴가>의 매력은 27년 전에 발생했던 사건을 마치 한 편의 액션 장르영화를 만들듯이 극화 시켰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마침내 영화로 재현되었다. 물론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이정국 감독이 <부활의 노래>라는 영화를 통해서 당시 투쟁의 중심에 섰던 몇몇 실존인물을 조명한 적이 있다. 이어 장선우 감독이 <꽃잎>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5.18’이 남긴 비극적 상흔(傷痕)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일정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부활의 노래>의 경우 사건을 일으킨 주요 당사자들이 현직에 있었던 터라 검열의 제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꽃잎>의 경우는 5.18을 하나의 모티브로 삼아 폭력성 일반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는 바람에 사건 자체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컨대 영화(픽션)라는 매체를 통해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에 제대로 접근한 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가 제작되어 개봉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화려한 휴가>는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한 시점부터 시민군의 항쟁이 막을 내리는 시점까지를 때로는 냉철한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때로는 강렬한 드라마투르기로 풀어가는 일종의 팩션영화(faction film)다.

이 작품의 곳곳에서 보이는 많은 장면들이 이미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현장의 사진 또는 영상기록물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다분히 다큐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 의미의 다큐멘터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는 당시 사건을 충실히 재현하려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당시 사건을 현재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27년 전에 발생했던 사건을 문자 그대로 재생(再生)시키려는 게 아니라 마치 한 편의 액션 장르영화를 만들듯이 극화(劇化)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미화(美化)는 아니다. 나는 바로 이점이 <화려한 휴가>가 갖는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내용부터 살펴보자.

광주에서 택시기사를 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 민우(김상경 분)가 극의 주인공이다. 민우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는 바람에 동생 진우(이준기 분)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오로지 동생이 잘 되기만을 바란다.

다행스럽게도 동생 진우는 모범생이라 민우는 그에 대한 기대감이 자못 크다. 어느 날 민우는 동생 진우가 다니는 성당에서 진우가 누나처럼 따르는 한 여자를 보고 한눈에 빠져들게 된다. 간호사로 일하는 신애(이요원 분)는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다감하여 사랑에 빠져들고 싶은 아름다운 처녀다.

그녀의 아버지인 흥수(안성기 분)는 공수부대 출신의 퇴역 장교로 택시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사주답지 않게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종업원)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주의 형 인물이다.

이처럼 다소 전형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이들 네 사람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을 이룬다. 여기에 자칫 무거울 수 있는 극의 내용을 상쇄시켜주는 감초 같은 캐릭터로 민우의 직장 동료인 인봉과 건달출신이었다가 얼떨결에 시민군에 가담한 직후 개과천선하는 용대가 등장하여 잔잔한 웃음을 선사한다.

   
▲ 내일에의 작은 꿈을 키워가는 이들 소시민들 앞에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저 오늘도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면서 보다 나은 내일에의 작은 꿈을 키워가는 이들 소시민들 앞에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진다. 백주 대낮의 광주 시내에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치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잡아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졸지에 황당한 일을 당한 광주 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발적으로 금남로 등지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 및 군대와 대치하게 된다. 그리고 하오 5시가 되면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기 하강식이 거행되는데, 대치중이던 시민들은 너도나도 가슴 벅차게 애국가를 따라 부르면서 사태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을 품게 된다. 그

러나 그 것은 너무나도 커다란 착각이었다. 애국가 소리가 절정을 이루는 순간을 틈타 군인들의 조직적인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현장은 졸지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하고 계속되는 군인들의 발포로 연도에 가득 들어차 있던 시민들이 마치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간다.

이 영화를 보고 난후 동료 및 후배 평론가들과 사적인 토론을 하는 가운데, 한 후배가 바로 그 장면을 문제 삼고 나왔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군인들이 발포를 한다는 설정이 과연 팩트에 입각한 것일까? 하는 문제제기였다.

물론 그 친구의 우문(愚問)은 작품의 진정성에 대한 이의제기라기보다는 그러한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음을 통탄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지 27년이나 지나고 그동안 숱한 청문회도 열렸지만, 끝내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수차례의 시사회를 통해서 당시 참혹했던 사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증폭되자, 그 당시 학살의 배후에 있었던 전통(全統)은 자위권 발동을 지시했다는 변명을 은근슬쩍 흘리기도 했다. 자위권 발동이라니?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자위권이란 “외국으로부터 불법적 침해에 대해서 자기 나라 국민을 위해 국가가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권리”라고 나와 있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각종 화기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맨손의 시민들을 상대로 자위권을 발동했단다. 자위권 발동이란 오히려 목숨에 위협을 느낀 시민들이 무기고를 탈취하여 스스로 무장하고 시민군으로 나섰을 때 써야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니던가?

요점은 발포는 있었지만, 그 발포를 명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인데, 군대 조직 및 기율 상 위로부터의 명령 없는 발포는 불가능하며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문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반론은 이랬다.

헌정질서를 무시하고 총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 명명백백한 발포 명령서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남길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을 것인가? 군대 조직에 충실하여 명령이 담긴 문건에 살고 문건에 죽는 참된 군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하극상의 극치인 쿠데타에도 참여하지 않았을 터이다.

극중 특이한 캐릭터인 흥수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공수부대 출신으로 유망한 장교였지만, 정치군인들의 작태에 신물이 나서 퇴역을 자청하고 운수사업을 하던 중 결국 시민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된다.

   
▲ 민우의 슬픔과 좌절,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행보를 보면서 이 영화가 순전히 허구의 산물이었더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했다.
민우의 운명은 더 기구하다. 그는 민주화 운동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운전기사에 불과했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 진우가 군인이 쏜 총탄에 맞아 절명하자, 스스로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민우는 리얼리티하고는 다소 거리가 먼 인물인데, 그는 계엄군들한테 붙잡혀 호송되던 중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나름대로 무술실력을 발휘하여 계엄군한테 잡힐 위기에 처한 신애를 구해주기도 한다.

한 때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던 <인간시장>에서 주인공 장총찬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듯 했던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김상경이 장총찬 역을 맡았었는데, 이 같은 캐릭터의 겹침은 결코 우연의 산물은 아닌 듯 보인다. 김지훈 감독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런 효과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나는 바로 그 점에 주목하고 싶다.

나는 민우 캐릭터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 작품의 옥의 티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민우의 슬픔과 좌절,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행보를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만약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허구의 산물이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상념이기도 했다.

민우(혹은 장총찬) 같은 멋진 캐릭터가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인면수심의 악당들로부터 위기에 처한 선량한 시민들을 구해내고 마침내 아리따운 처녀 신애를 아내로 맞으면서 해피엔딩으로 종결되는 그런 ‘액션영화’가 다름 아닌 <화려한 휴가>였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극중 여주인공인 신애는 얼떨결에 군인을 향해 총을 쏘고는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하고 울먹인다. 그것은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모든 광주 시민들의 한결같은 소망이기도 했을 터이다.

하지만 엄연한 ‘팩트’로서의 광주 5.18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우리 현대사의 깊은 상처이므로, 그것을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는 그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터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과거를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화려한 휴가>의 존재의미는 절대로 과소평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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