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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은 교통사고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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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은 교통사고 같은 것
  • 의약뉴스
  • 승인 2007.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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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보수주의자 김수현이 한국 좌파에게 축복인 것은
▲ <내 남자의 여자>가 쿨하게 보이는 건, 김수현이 드러내는 냉정한 현실주의 때문이지,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쿨하기 때문이 아니다.

불륜드라마에 대해 말해보자. 대개 불륜드라마는 ‘대리만족’을 주기 때문에 시청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대리만족이 아닌 대중문화가 있나? 스포츠로부터 댄스뮤직에 이르기까지 사실 모든 대중문화는 대리만족이다.

내가 탤런트 K양이나 J양처럼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을 숭배하는 팬이라도 되는 거다. 안티팬도 마찬가지다. 안티팬은 팬보다 더 열렬한 팬이 되고자 하는 것뿐이다. 팬은 팬인데, 더 광적인 팬이 안티팬이다. 그래서 좀 무섭기도 하다.

불륜드라마라는 게 시청률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일까?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초코파이라는 상표 때문에 모든 초코파이가 잘 팔리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불륜드라마라는 레이블 때문에 시청률이 높다는 건 이래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대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 논리적인 걸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욕망의 빈 공간을 뭔가로 실컷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불륜드라마는 시청률이 높다는 진술 자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 거다. 도대체 그게 뭘까?

<내 남자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종영되고 난 뒤에 이에 대한 분석이 봇물을 이루었다. 대체로 의견은 ‘쿨’한 불륜드라마라는 쪽으로 모아졌고, 더불어 진부한 소재를 세련되게 요리한 작가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찬사가 덧붙여졌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이 드라마의 결론이 그렇게 ‘쿨’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쿨하다는 말로 무마할 수 없는 어떤 은밀한 비밀이 이 드라마에 숨어 있다. 사랑이 허망하다는 걸 깨닫고, 각자 갈 길을 간다는 게 멋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여기에서 중요한 건 각자 길을 간다는 게 아니라 ‘사랑이 허망하다’는 거다. 여기에서 내 궁금증이 발생한다.

누구도 대중문화가 시대의 관습을 앞서나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건 예술의 몫이지 시청률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의 임무가 아니다. 그러니 <내 남자의 여자>를 놓고 예술성을 논하는 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꼴이다.

물론 이 말은 대중문화는 예술이 아니라거나, 뭔가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문화는 예술성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다. 오히려 대중문화는 판타지를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진리를 드러낸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특정 시대에 새겨진 집단의 열망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이다.

이 드라마의 작가 김수현은 한 일간지와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남편에게 젊은 여자가 생기는 것’을 일러 ‘교통사고’와 같은 거라고 비유했다. 이 말에 모든 게 들어있다. <내 남자의 여자>는 사고를 당해 풍비박산이 난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한 거다.

물론 이런 구태의연한 ‘재난’ 이야기가 <리더스 다이제스트>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은 건 김수현이라는 작가의 재능 덕분이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건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서 그런 게 아니다. 구태의연한 걸 참신한 구성과 언어로 다시 포장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프랑스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건 반복이되, 그 속에 언제나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김수현은 뛰어난 작가이다. 그가 뛰어나다는 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많은 이들이 이미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그 뛰어난 면모는 많은 이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잘 빚은 형식성’ 때문이 아니다.

김수현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는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냥 드라마 작가”일 뿐이다. 이 말은 김수현에 대한 모욕이 아니다. 김수현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다. 보통 불륜이라고 일컬어지는 일에 대해 그는 아무런 선악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불륜은 그냥 ‘사고’일 뿐이다.

따라서 <내 남자의 여자>가 쿨하게 보이는 건, 김수현이 드러내는 냉정한 현실주의 때문이지,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쿨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드라마의 메시지는 사실 보수적인 한국사회의 문화코드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사랑보다 밥이 우선이라는 설정은 낭만주의조차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냉혹한 한국의 ‘먹고사니즘’을 드러낸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내팽개치고 욕정에 눈이 머는 의사와 교수라는 인물상은 전문가에 대한 냉소와 지성에 대한 저항을 무의식적으로 암시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암시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를 여과 없이 투영하고 있는 거다. 자유주의에 대한 경멸과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가 교묘하게 침윤되어 있는 이런 메시지는 확실히 이 드라마에 대한 대중의 매혹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시청자들은 화영의 캐릭터에서 더욱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지수로 분한 배종옥보다 화영을 연기한 김희애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걸 보면 말이다. 이건 이 드라마가 은연중에 내장하고 있는 보수주의를 넘어서버린 그 무엇의 표현이다.

대중은 무엇을 보고 화영에게 지지를 보낸 걸까? ‘불륜’이라는 금지가 거세해버린 그 주이상스를, 그 잉여향락을 이 드라마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처럼 <내 남자의 여자>가 괜찮은 건, 이 드라마가 불륜이야기를 참신하게 엮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차갑게 불륜드라마의 실체를 해명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중은 불륜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 불륜이라는 금지의 명령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쾌락을 재발견하고 싶은 거다. 이 쾌락은 결코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다.

김수현은 이 괴물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남자의 여자>를 중간계급의 불안을 드러내는 심리극으로 만든 거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김수현은 김훈보다 훨씬 더 위대한 보수주의자이다.

김훈이 판타지의 강화를 통해 중간계급의 정체성을 봉합시키려고 한다면, 김수현은 그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판타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가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무엇의 자리야말로 중간계급의 판타지가 끝나는 지점인 셈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 김수현은 한국의 좌파에게도 보기 드문 축복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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