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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먼지의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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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먼지의 세상에서
  • 의약뉴스
  • 승인 2007.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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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리뷰] 김훈 장편소설,『남한산성』(학고재, 2007)
   
▲ 『남한산성』은 한겨울밤 편전을 울리는 신하들의 울음에서 시작, 봄볕아래 사공의 딸 나루를 쌍둥이자식 중 누구에게 시집보낼까 생각하는 서날쇠의 혼자웃음으로 끝맺는 소설이다.
김훈은 어디선가 주격조사 ‘은/는’과 ‘이/가’의 식별 불가능해 보이는 차이가 결정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자가 사실 대신 의견을 기술할 때 쓰는 조사라면, 후자는 의견 대신 사실을 기술할 때 쓰는 조사라고 한다. 그것들을 구별하지 않을 때, 말은 실체의 가면을 쓴 헛것, 헛것의 가면을 쓴 실체가 되기 십상이라고 말한다.

김 훈은 조사(助詞)의 용례에 민감하지만, 통사론이 전공인 언어학자는 아니다. 김 훈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대신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칼의 노래』)로 소설의 첫 문장을 쓰는 소설가다.

김 훈은 ‘버려진 섬인데도 꽃은 여전히 피고 있구나’라는 감상의 미문이 아니라, ‘꽃이 피었다’는 계절의 주기와 순환의 사실을 적는 건조한 기록으로『난중일기』가 시작한다는 데에 주목한다. 생각해보면, 7년의 전란을, 아귀지옥의 세상을 사실의 언어로 끝끝내 기록하는 자의 내면은 헤아릴 길 없는 것이다.

김훈은 무엇보다도 말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말이 사람들을 다루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소설가다. 말을 다루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말은 실체다. 그러나 김훈은 사람들이 말의 주인이라고 생각할 때, 실체인 말이 헛것으로 바뀌는 과정을 응시한다.

말은 발화되는 순간, 주관이냐 객관이냐를 떠나 욕망에 붙들린다. 말하는 자는 욕망하는 자요, 욕망에 사로잡힌 자다. 말은 욕망이기에 사람들은 말한 것보다 적게 말하며, 말한 것보다 많이 말한다. 말은 결핍이고 과잉이다. 여기서 세상은 사람이 말을 다루는 세상이 아니라 말이 사람을 다루는 세상이다.

말이 사람의 주인인 세상에서 헛것인 말은 세상을 조종하고 사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헛것일까 싶었는데, 말은 어느새 효력 있는 실체가 된다. 사람은 사라지고 말들만 남는다. 말은 실체고 헛것이며, 헛것인가 싶으면 실체다. 가히, 어지러운 말(言)먼지의 세상이다.

김 훈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칼의 노래』에는 헛것이자 실체인 말이 현실과 맺는 이데올로기적 관계에 대한 통감(痛感)할만한 성찰이 담겨있다. 임진년전란이 일어날 무렵, 길삼봉이라는 이름이 출현한다. 길삼봉은 혹세무민하여 군사를 양성하고 조정을 위협하는 도당(徒黨)의 중심인물이라고들 한다.

들은 사람은 많은데, 본 사람은 없다. 허깨비인지 실체인지, 실명(實名)인지 허명(虛名)인지도 알 수 없다. 몇몇 사람들을 잡아왔고 실토를 하게했다. 처음의 심문은 “길삼봉은 누구냐?”였다. 시간이 지나자 질문의 구조가 바뀐다. “누가 길삼봉이냐?”『칼의 노래』는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질문의 구조가 바뀌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설에는 여덟 살, 다섯 살짜리에게 길삼봉의 실체에 대해 물었고 자백하지 못하자 무릎을 으깨어 죽였다고 써 있다. 비평가 서영채도 지적했지만, ‘길삼봉은 누구냐’와 ‘누가 길삼봉이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후자는 이데올로기적 질문으로 동지와 적을,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질문이다.

‘길삼봉은 누구냐’에서 길삼봉은 한 명이지만, ‘누가 길삼봉이냐’에서는 모두가 길삼봉일 수 있다. 2001년 9. 11테러 직후, 미국언론은 ‘아랍인 테러리스트’라고 썼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의 깃발이 뉴욕시내를 뒤덮었을 즈음, ‘아랍인 테러리스트’는 ‘테러리스트 아랍인’으로 둔갑해 있었다.

『남한산성』의 첫 문장은『칼의 노래』의 첫 문장과는 정반대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말이’가 아니라, ‘말은’이다. 사실이 아니라 의견의 언어이고, 욕망의 언어이다. 의견과 의견이, 말과 말이 칼과 칼 대신 부딪치고 대립한다.

『칼의 노래』가 칼을 든 주인공이 있고 그의 언어가 세상과 부딪히는 소설이라면,『남한산성』은 말(言語)이 주인공이고 말에 들린 자들이 세상을 만드는 소설이다. 40여 일치의 식량, 바닥 난 탄약, 배고픔과 추위로 헐벗은 군사들이 성 안에 있다. 백성들이 있고, 임금이 있고, 신하들과 사대부들이 있다. 말하는 자들은 주로 신하들, 사대부들이다. 성 안에 갇힌 임금의 신하들은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그들은 성 밖에서 청(淸)의 이십만 대군을 맞아 칼과 총, 대포로 전투를 벌이는 대신에 성 안에서 말싸움을 벌인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말하지만, 나중에는 누가 말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청을 치고 명(明)을 도와 이백년 동안 지켜온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구하자는 크고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한편, 치욕을 감내하더라도 살 길을 도모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하자는 작고 낮은 목소리가 후벼 판다. 대의를 밝히는 목소리가 화(和), 전(戰), 수(守)는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 사세를 살피는 목소리는 그 셋은 다르다고 말한다.

대의를 말하는 자는 죽음이 가볍다 말하고, 사세를 살피는 자는 죽음이 가볍지 않다고 말한다. 최명길을 죽여 사직의 앞날을 보존하자 하는 김상헌과 척화파의 말이 있고 성문을 열면 날 죽여도 좋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최명길의 말이 있다. 다들 옳은 말이고, 옳은 사람들이다.

   
▲ 김훈은 무엇보다도 말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말이 사람들을 다루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소설가다.
성 안에 갇힌 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렬해지고 격렬해질수록 아름다워지며 아름다워질수록 허무해진다. 그런데 치욕의 날이 가까워올수록 말들은 서로 부딪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뒤섞여 알아볼 수 없게 변하기도 한다. 치욕을 감내하자는 신하는 자신의 말이 곧 길이라고 하고, 치욕은 안 된다는 신하는 말은 길과 다르다고 말한다.

또다른 자는 말은 길이 아니지만 글을 밟는다면 글과 길은 곧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말은 의미를 잃고 공허 속으로 떨어진다. 그렇기에 임금은 말한다. 말이 아름답다, 준열하다, 어지럽다, 괴이하다, 어렵다. 임금은 말들의 안팎에 있다. 임금은 성문을 열고 치욕의 길을 밟지만, 그것은 누구의 뜻을 따랐다기보다 주어진 길을 간 것뿐이다. 칸이 오줌을 누는 동안에는 임금도 하던 절을 멈춰야한다.

사람이 말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람을 소모한다. 말이 바닥난 곳에서 임금이 울고 조정대신들이 운다. 말이 끝나고 소멸된 자리에 울음이 있고 울음이 끝난 자리에서 말이 시작된다.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수어사 이시백처럼 울지 않는 자가 더러 있고 말과 울음,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사관 또한 울지 않는 자로 잠깐 비친다. 그럼 성곽 안쪽의 말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성 바깥에는 20만 대군을 호령하고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는 칸의 말이 있고 이쪽저쪽을 넘나드는 통역관 정명수의 말이 있다. 정복자의 화포처럼 펴 내지르는 말이 있고, 일찌감치 “말의 신기루”를 터득하여 말의 안팎을 넘나드는 말이 있다. 이들의 삶과 말의 물질성 편에서 보면, 성안의 말은 헛것이다.

말이 그 실체를 드러나는 자리에 백성의 삶이 있다.『남한산성』은 성 안팎의 나라 잃은 백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청병을 건너게 하고 그 대가로 식량을 마련하겠다는 사공은 “나를 따르지 않겠느냐?”는 김상헌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오. 소인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소.” 김상헌은 사공을 칼로 벤다.

이 놀라운 장면의 끝을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날 새벽에 강은 상류부터 먼 하류까지 꽝꽝 얼어붙었다.” 김상헌은 청병을 건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공을 벤 것이고, 사공은 먹고살기 위해 돌아가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백성인가”라고 김상헌은 물었던 것이고, 이것이 백성이라고 죽은 사공은 아마도 대답했을 것이다.

대장장이 서날쇠도 있다. 연장을 다루는 자, 장인에 대한 김훈의 외경감이 엿보이는 인물설정이다. 서날쇠는 쇠를 녹여 갖가지 연장을 만들고, 좋은 흙을 골라내며, 똥을 삭혀 저장해둔다. 물, 불, 공기, 흙 모두를 다룬다. 말의 현란함과 삶의 단순성이 교차하고, 비상사태와 일상이 맞물린다. 대의냐, 치욕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자들이 있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과 자식을 돌보기 위해 살아야하는 백성들이 있다.

『남한산성』은 한겨울밤 편전을 울리는 신하들의 울음에서 시작, 봄볕아래 사공의 딸 나루를 쌍둥이자식 중 누구에게 시집보낼까 생각하는 서날쇠의 혼자웃음으로 끝맺는 소설이다. 김훈에게 던지는 세간의 질문, 당신은 누구편이냐에 대한 김훈의 묵시적 대답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웃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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