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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감추어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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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감추어둔 비밀
  • 의약뉴스
  • 승인 2007.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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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밀양
   
▲ <밀양>은 구원과 용서라는 민감하고 유서 깊은 주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지난 5월1일 <밀양>을 보았다. 벌써 두 번째다. 이창동 감독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준 영화 <밀양>. 밀양(密陽)은 비밀스런 햇빛이란다. 시사회 직후 동료 평론가들과 영화에 대해서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주제의식이 너무 무거워서 작품을 제대로 소화하기가 힘들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나름대로 기독교적 신앙을 갖고 있는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대목도 많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분법적 논리로 기독교를 희화화시킨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마디로 영화가 너무 어둡다는 것이었다. 나도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한 사람으로 어느 정도 동감할만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한 평론가는 남녀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와 종찬(송강호 분)의 진한 러브씬이 한번쯤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오고간 대화들은 평론가의 입장에서 정색을 하고 본격적으로 비평을 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밀양>을 논하는 자리에서 위의 사적인 얘기들을 화두(話頭)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5월24일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관객들 사이에서 터져 나올법한 논란의 일단을 미리 선취(先取)하고 있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대단히 논쟁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요컨대 구원과 용서라는 무척이나 민감하고 유서 깊은 주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사실이지 무척이나 간단하다. 남편과 사별한 한 젊은 부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이사를 왔다가 그 아들마저 유괴범에 의해 변을 당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의 몸부림이 부가된다.

   
▲ 신애는 아들과 함께 밀양을 찾지만, 예상지 못한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단 두 줄로 요약될 수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이창동 감독은 140분이 넘는 그야말로 밀도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신애는 하필이면 다른 많은 곳을 놔두고 밀양으로 이사를 왔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남편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애는 사랑했던 남편의 고향에서 아들의 뼈를 묻어야만 했다.

다 아는 얘기들은 스쳐지나가자.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의 억장 무너지는 심정을 전도연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는 얘기는 오히려 진부할 정도다. 올해로 60회를 맞는 칸느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은 따 논 당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적어도 그들(외국심사위원들)이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전도연의 격정적 연기를 넘어서 우리만의 미묘한 정서까지를 포착할 수 있다면, 실현 불가능한 기대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처럼 멜로물에 출연하여 표시나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색깔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송강호의 조용한 연기도 일품이다. 두 최강 남녀배우의 연기가 앙상블을 이루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일단 두 연기자의 불꽃 튀는 연기대결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140분은 오히려 짧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이제부터니까.

졸지에 생때같은 아들을 잃을 어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차라리 대신 죽었으면 이런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으련만. 죽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이제 신이 개입을 하기 시작한다. 어쨌든 하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인 신애는 차츰 마음의 평정(平靜)을 찾기 시작하고, 주님의 은혜를 사랑으로 실천하기 위해 아들을 죽인 큰 죄인까지 용서하려한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첫 번째 논쟁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한테는 당연히 가능한 일이 될 터이다. 하나님의 뜻이 그 어디에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쯤 불가능할 게 어디 있겠는가? 반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신의 독선(獨善)으로 받아들인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 될 터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밀양>이 신의 존재여부를 묻는 단순한 종교영화가 아님을 알게 된다.

   
▲ 영화가 제기한 '햇빛이 감추어둔 비밀'은 이제 관객의 몫이다.
어쨌든 신애도 역시 하나님이 존재함을 믿고, 그에 대항하여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내가 알기로 성서 속에 등장하는 위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나님과 겨루었던 전력이 있었다. 요나가 그랬고, 야곱이 그랬다. 그래서 신애가 자기보다 한발 앞서 죄인을 용서해준 신의 월권(越權)에 항의하는 처절한 몸부림을 칠지라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적이니까 말이다. 신애는 성녀(聖女)가 아니잖은가?

그녀가 처절한 사투를 지속하는 한, 그러니까 그녀가 여전히 살아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아가 분노를 삭히기 위한 투쟁을 감행하는 한,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따사로운 햇빛이 여전히 내리쬐고 있을 것이므로. 그런데 그 햇빛이 비밀스럽다는데, <밀양>의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지적했던 첫 번째 논쟁이 생산적인 결말로 귀결될지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또 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할 터이니 말이다. 아직 개봉전이라 세세한 것을 언급할 수는 없다. <밀양>을 삼세번 쯤 감상하고 나면, 햇빛에 감추어진 비밀을 제대로 해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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