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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가져가라면서 그가 손에 든 가죽을 들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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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가져가라면서 그가 손에 든 가죽을 들어보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2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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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두 사람은 짐을 정리했다. 점례는 경쾌했다. 몸놀림도 그렇고 입도 가만히 있지 않고 흥얼거렸다. 홀가분했다. 다 두고 떠나도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황성 옛터에 봄이 오니 월색만 고요해. 당신 그렇게 좋아. 나쁠 게 없잖아요. 어디론가 간다는 건 무조건 좋은 거에요. 그곳이 익숙한 곳이고 마음에 드는 곳이라면 더 그렇죠. 더구나 이번 여행길에는 아버님도 만나니 이 아니 기쁠수가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워. 나도 날아가고 싶어. 그곳이 여기보다 마음이 편하니 나 역시 반기는 마음이 자꾸 꺼져. 이심전심이군요. 이렇게 앞으로도 한 마음 한 뜻으로 쭉 통해요. 룰루 랄라. 불쾌한 기억으로부터의 도피. 점례가 일부러 더 즐거운 척 한 이유였다. 휴의와 접선 비슷하게 만난 어색한 기억, 완용의 저주 어린 눈빛과 모욕의 말. 잊고 싶다. 가고나면 그만이다. 흔적없이 가고 마는 거야. 내 인생에서 죽마을의 추억을 송두리째 묻는 거야.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는 한이 있어도. 그 말을 하고 나서 점례는 취소했다. 님을 두고는 그렇게 못할 것이다. 유마가 가니 즐거운 것이지 유마 없이 나홀로 여행이라면 이렇게 들뜨지는 않다. 

유마도 마찬가지였다. 똑 같은 마음. 조선에서의 짧은 시간은 그에게 애정보다는 짜증으로 다가왔다. 한 마디로 별로였다. 총독이라는 자의 아부하는 꼴도 그 아래에 있는 자의 비굴한 모습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휴의라는 자 하나 처치 못하는 완용이라는 자의 꼴이나 돈 욕심만 챙기는 삼촌도 이제는 작별할 시간이다. 유마에게 식민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골칫 덩어리였다. 그의 눈에 벌써 자유로운 프랑스가 눈에 어른거렸다. 여보, 이것도 챙겨야지. 유마가 옷을 정리하는 점례를 보고 말했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손에 든 호랑이 가죽을 들고 그가 난감한 듯이 망설였다. 자신도 딱히 마음에 드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이니 그냥 두고 가기도 아까웠다. 아무에게나 줄 수도 없었다. 망설이고 있자니 점례가 한마디 했다. 아버님께 선물로 드리면 어때요. 그거 좋은 생각이야. 진작에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내가 깔고 앉기에는 녀석의 기세가 너무 세. 아버지라면 모를까.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이니 충분히 이겨 내시겠지. 강한 분이잖아. 기를 받으실 거에요. 조선호랑이는 두려움을 모르는 강한 짐승이잖아요. 호랑이 종류중 조선범이 가장 크고 가장 힘이세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 일본엔 없어. 단 한마리도. 그래서 진귀한 대접을 받는 거야. 그나 저나 이렇게 마구 잡다보면 씨가 마를텐데. 뒷말은 점례가 들을 수 없을 정도의 혼잣말 같은 것이었다. 유마는 그것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씨가 마르면 더 이상 번식이 어렵다는 말이고 나중에는 멸종되는 것이다. 적당히 좀 잡으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 지금이라도 총독 각하에게 전화해서 호랑이 사냥을 멈추라고 할까. 에이, 만사가 귀찮아. 그 놈하고 목소리를 섞기도 싫고. 

호랑이 가죽은 경무총감이 보내준 것이었다. 총독과 내심 경쟁 관계에 있는 조선의 이 인자 경무총감은 해군 후배이지만 먼저 승진한 총독을 제끼고 싶어했다. 그 위에 올라서서 그동안 부하로 겪은 수모를 값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황실과 일본 귀족들은 자신보다 총독을 더 아꼈다. 그래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다음 조선 총독 자리는 자신이 하기 위해 갖은 꾀를 썼다. 연임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어 골머리를 앓던 그는 내무대신 아들을 로비 창구로 쓰기로 했다. 그래서 보내온 것이 조선 범의 껍데기 호피였다. 지금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귀한 물건입니다. 십여 년 전에 묘향산에서 잡은 것이지요. 그 뒤로 호랑을 봤다거나 잡았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어요. 이 놈이 조선 범의 마지막 종자에요. 보세요. 얼마나 큰지. 볼수록 대단한 놈입니다. 그때 보현사 스님이 절 마당 앞으로 황소만한 범을 끌고 가는 사냥꾼에게 호통을 쳤다지요. 산신령을 잡았으니 네놈들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러자 포수 중의 한 명이 왜놈이 총 들고 시키는데 살기 위해 죽인 우리가 짐승인 범보다 못하냐고 따지더랍니다. 그래서 그럼 네 놈의 목숨 대신 시킨 왜놈을 작살 내겠다고 했답니다. 이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총질을 했느냐. 조선을 지켜주는 산신령이시다. 그런데 이렇게 됐으니 이제 조선은 끝났다. 스님이 목놓아 울더랍니다. 그 노스승이 지팡이를 던지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때 내는 소리는 꼭 호랑이 울음 소리와 같았다고 합니다. 어흥. 어흥하고 말이지요. 경무총감이 호랑이 울음 소리를 흉내냈다. 말 그대로 되고 있지 않습니까. 스님이 영험하긴 한 가 봅니다. 앞날을 잘 예견했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님이 살생을 대놓고 얘기하다니요. 그런 미개한 나라가 조선이지요. 그러니까 스님의 탈을 쓴 영규 사명대사 휴정 서산대사 등이 총칼을 들지 않았습니까. 전쟁 중이라고 스님이 산사람을 죽이다니요. 그러니 아직도 만해 같은 것들이 날뛰고 있어요. 이게 조선 스님들의 실체입니다. 경무총감이 벌레 씹은 얼굴로 조선을 비하했다. 사냥은 누가 시켰는데요. 바로 접니다. 경무총감이 유마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했다. 입에 침을 흘리기라도 한 듯이 소매로 입술 주위를 닦은 경무총감은 칭찬을 기다리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면서 유마 앞으로 손에 펼친 것을 내밀었다.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가장 아끼는 물건을 어쩔 수 없이 줄 때 난처한 표정과 이것을 받았으니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기대감이 경무총감이 얼굴에 서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마 각하. 조선말은 반대로 들어야 할 때도 있지요. 왜놈을 작살낸다고요.  죽이겠다고요.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보현사 큰 스님은 자신의 입을 통해 일본 제국의 완성을 예견하고 있어요. 스님의 말씀은 이 호랑이가 조선을 확실히 멸망시키고 일본 세상을 만드는 부적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뜻으로 받아 들여야지요. 꿈보다 해몽이 좋군요. 경무총감은 그 말 뜻을 알아 듣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서 저는 내 방으로 그들을 초대해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렸지요. 생각해 보세요. 제 신분에 그런 식민지 천민을 마주하고 상을 내줬으니 제가 생각해도 너무 오버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 호피값은 넉넉히 주었나요. 호피값이라는 말이 나오자 경무총감은 그동안 가졌던 자신감 대신 뒷머리를 긁으면서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조선 무지렁이들은 후한 값을 줘도 제가 정한 값보다 많다 싶으면 사양하는 바보같은 행동을 해요. 절반을 딱 자르더니 이거만 충분합니다요. 하고는 뒷걸음질 치면서 물러납디다. 버선발로 쫓아가서 더 주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거절 할 텐데요. 조센징 빠가의 거절을 이 경무총감이 받는다면 그것은 모욕이지요. 그래서, 다음에도 이런 놈으로 잡아오면 이번 것 까지 합쳐서 주겠다고 했어요. 아마 그놈들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기 집으로 가는 대신 묘향산으로 갔을 겁니다. 조선 종자들으 그런 놈들입니다. 우리 일본인들과는 아주 씨가 다른 놈들이지요. 그런데 강산이 한 번 훌쩍 지났어도 영 소식이 없어요. 범에게 잡혀 먹혔던지 아니면 범이 멸종 됐던지 둘 중의 하나겠지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유마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그런데요. 이것은 제가 갖고 있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이 노란 눈을 보고 있으면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금이 저려요. 그릇이 작다는 얘기지요. 이 놈은 이제 막 기상을 펴는 유마 각하에게 어울리는 선물입니다. 각하는 이 놈을 보는 순간 맨 주먹으로 대적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지요. 

경무총감이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비굴했다고 여겼는지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경무총감은 금세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던 아부를 계속했다. 그런 일화를 가진 범이지요. 보통 범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기운이 얼마나 센지 총알을 여덟 발 맞고도 십 리를 도망쳤다고 해요. 피를 흘리면서도 쫓아온 사냥개 네 마리를 물어 죽였지요. 길이가 무려 오 미터가 넘어요. 여러 마리 사냥한 경험이 있는 강원도 포수들이 이 놈을 잡고는 이렇게 큰 놈은 난 생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지요. 황소보다 무겁고 더 크다면서 어른 네명이 나서서 겨우 끌고 왔다고 합니다. 양팔을 옆으로 벌린 경무총감이 이것을 두 번 하고도 남는다고 호랑이 크개를 재는 제스처를 썼다. 경무총감은 호피를 건네면서 자신이 마치 도포수가 된 양 총 쏘는 시늉을 했다. 유마는 찜찜한 기분으로 그걸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완강히 거절했으면 했으나 이미 받은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스토리가 있는 호피 가죽이니 더 가치가 있네요. 거기다가 당신 이야기도 좀 넣으면 아버지가 좋아하시겠어요. 점례가 이때다 싶어 말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생각해 당신. 아니면 무슨 얘기가 있겠어요.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지요. 이 까짓 범 가죽 하나로 신경쓸 일은 아니지요. 점례가 대단치 않다는 식으로 나오자 유마는 안심했다. 내가 잡았다고 할까. 내가. 이것으로 점례가 놀라서 돌아봤다. 유마가 일어나서는 짐꾸러미 옆에 있는 장검을 들고 겨누는 시늉을 했다. 멀리서 소총으로 잡은 게 아니라 바로 오 미터 앞에서 이것으로 잡았다고. 일본도로 범을 잡은 최초의 사람이 당신이군요. 점례가 웃었다. 그러나 점례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호랑이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황토배기 넘어 성황당에는 호랑이를 타고 가는 수염이 긴 신선이 그려져 있었다. 함부로 잡는 짐승이 아니었다. 마을을 지켜주고 조상을 보호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큰 놈은 나라를 지켜 준다고 했다. 그런 영물의 가죽을 앞에 놓고 점례는 유마와 값을 매기는 장사꾼 처럼 흥정하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점례는 범가죽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어서 치우세요. 시간 없어요. 하면서 범이나 일본도가 자신의 눈 앞에서 어른 거리는 것을 막아보려고 애썼다. 

별로 인가. 이 칼. 어서 넣어요. 난 칼이 싫어요. 금세 풀이 죽은 유마가 꺼낸 칼을 칼 집에 넣었다.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면 되겠어요. 점례는 서둘러 말을 막았다. 그러면서 바닥에 널부러진 호피를 둘둘 말기 위해 머리부분을 잡았다. 손이 떨렸다. 죽은 자의 영혼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머리를 몸통 속으로 밀어 넣고는 아래로 굴렸다. 굴거가던 머리는 중간쯤에서 멈췄다. 점례는 다시 굴리기 위해 이제는 원의 형태를 갖춘 범의 가죽 가운데 부분을 잡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손에 닿는 감촉이 머리를 잡았을 때와는 달랐다. 매우 보드라웠다. 어린아이의 살처럼 누르면 바로 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손끝의 감촉은 그것 외에도 어떤 살기가 느껴졌다. 얼른 점례는 호피에서 손을 뗐다. 바로 어흥하고 달려들면서 한 잎으로 삼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산속 군주가 일개 포수에게 잡혀 껍질이 벗겨진 채로 있는 것이 마음 아팠다. 호랑이는 산신령이다. 어릴 때부터 호랑이는 줄곳 신이었고 악귀를 물리치는 신령스런 동물이었다. 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이제는 가죽으로 남아 처리하는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조선 최고의 전리품이라고 내미는데 사양하기 어려웠소. 그 말은 아까 했잖아요. 호피가 여기 있는 것이 당신 책임은 아니에요. 그렇지, 내가 죽인 게 아니지. 당신은 그럴 마음도 전혀 없었어요. 그렇게 하자. 당신 제안대로. 아버님께 드려야겠어. 아버님도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겠지. 대왕의 가죽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됐을 때 전화가 울렸다. 점례는 움찔했다. 혹시 완용이라는 자가 출국 전에 어떤 음모를 꾸몄나 해서였다. 그러나 총독이라는 것이 금세 밝혀졌다. 삼 일 후 자신과 같이 본국에 들어가자는 제의였다. 내일 가기로 한 군용기가 급히 필리핀 해전에 투입된다고 했다. 배편도 마땅치 않다. 반도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저와 함께 이동 하는 게 각하의 안전에도 유리할 거라고 했다.

총독은 그런 이유를 댔으나 사실상 네가 조선을 떠나는 방법은 나와 함께 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일방적 통보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유마는 화를 냈다. 총독이라는 자가 본국행 전용기 하나 따로 마련하지 못하다니. 그리고 굳이 자신과 함께 가자고. 유마는 머리를 굴렸다. 이 시국에 왜 조선 총독을 본국에서 호출하지. 이곳 사정도 그리 편하지는 않은데. 한편 전화기를 내려놓은 총독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유마와 헤어지고 나서 본국으로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를 해임하려고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총독은 안절부절못했다. 경무총감, 이 자식이 미리 손을 썼나. 아니면 내무대신의 아들이 환대에 불만을 품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었나. 돈이 부족했나. 공 하나를 더 넣을걸 그랬나. 그는 거기까지 밖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미련한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제법 세게 때렸는지 골이 띵했다. 그 덕분인지 총독에게 갑자기 무슨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유마가 타고갈 내일 비행기를 취소시키고 자신과 함께 삼일 후에 가기로 일정을 짠 것이다. 이것은 극비리에 이뤄졌다. 총독은 그 결정이 그렇게 잘한 결정이라고 스스로에게 칭찬했다. 때린 머리가 미안했던지 몇 번 쓰담 듬었다. 이 놈아,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한다. 총독은 그 말을 하면서 마사지 하듯이 머리를 두 어번 더 이리저리 눌렀다. 

헌병대사령관을 불러 태평양 상황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급하게 군에서 차출됐다는 핑계를 댄 것은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잘됐다. 무척. 같이 비행하면서 하지 못한 은밀한 이야기도 하자. 지상에서 못다 한 로비는 하늘에서 하면 되는 것이고. 그나저나 이 경무총감이라는 자식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뭐, 호피를 나 몰래 유마에게 주었다고. 괘씸한 놈. 그런다고 각하가 넘어갈까. 이 기회에 아주 작살을 내자. 조선을 떠나기 전에 처리하자. 그러면 혹시 아나. 호출 이유로 나를 해임하기로 했어도 그가 사라지면 어쩔 수 없이 나를 더 사용할지도 모른다. 총독은 그를 어떤 식으로 사라지게 할지 방법을 고민했다. 이런 고민은 다른 누구와도 상의하기가 어렵다. 방법을 정해놓고 기습적으로 통보하는 것이 비밀 유지에 가장 좋다. 총독부 내에도 그자의 편이 제법 있다. 자칫 비밀이 새면 내가 먼저 골로 갈 수도 있다. 제독의 경험을 살려 총독은 해전을 하는 지휘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완용이, 그렇지 이 조센징 놈을 써먹자. 이 자를 이용해 먹는거지. 그도 자리가 불안할 것이다. 한때 승승장구해 백작 칭호를 받는 등 신임을 얻었으나 최근에는 이렇다 할 실적이 없다. 휴의를 체포하지도 못했다. 번번히 실패했다. 엊그제는 경찰과 장교 한 명이 어이없게도 주모의 식칼에 죽었다. 종로서 관할이니 서장인 그자에게 책임을 묻자면 굳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궁지로 몰고 가자면 이유는 손가락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들 수 있다. 그래, 이런 일에는 조센징이 제격이지. 그런데 어떻게 지시하지. 대놓고 죽이라고 할 수는 없고. 함정을 파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야 하는데.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래, 내일 허수아비 조선왕과 만남이 있지. 그렇지 않아도 귀찮은데 잘됐다. 이참에 로스케놈, 양키놈도 조선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그 과정에서 죽은 죽음은 순국이 되겠지. 그래 경무총감 너는 순국을 하고 나는 애국할 일이 더 많으니 이곳에서 더 있어야겠다. 총독은 일이 다 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유마에게 어떤 뇌물을 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점례는 짐을 정리하다 말고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삼 일을 더 보내야 하는구나. 조선 구경이나 하자고 할까. 궁궐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일전에 유마가 말한 그런 여행도 괜찮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가 어떤 일을 할지 두고 보자. 그에게도 다 생각이 있겠지. 시간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그냥 호텔에서 뒹굴지는 않을거야. 여보, 삼 일이 덤으로 생겼군요. 공것이라고 해야 하나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말이 있어요. 나도 알아. 하지만 이건 공짜가 아니야. 비싼 돈 내고 받는 수업이지. 조선이 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가 봐. 나를 끌어당기고 있네. 사귀자고 하니 어쩌겠어. 밀당을 하더라도 해야지. 그래요, 좋은 거면 하세요. 잘 모르겠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런 어정청한 상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지금 방금 생각이 떠올랐어. 모레 쯤 조선 문인들과 대화를 좀 했으면 해. 내가 영감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점례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인이라고. 글 쓰는 사람인가. 그래 조선에도 천재 문인들이 있다는 소식은 많이 들었다. 역시 글쟁이는 못말려. 굿 아이디어에요. 기왕이면 문인들 사이에 화가들도 끼워 넣으면 어때요. 흥을 돋구기 위해 회견 뒤에는 가수들이 노래를 했으면 좋겠어요. 점례가 판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지 뭐, 못할 게 뭐 있어. 그런 제의라면 나도 오케이야. 조선 천재 작가들이 처음에는 식민지에 너도 나도 반대했잖아. 오장육부를 뒤흔드는 조선독립에 관한 글을 써서 흰옷 입은 백성들을 자극했지. 시를 쓰고 연설을 하고 아주 대단했던 건 당신도 알지.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작가는 한 명도 없어. 눈씻고 찾아보면 한 두 명은 있을까 몰라. 목숨이 중한 걸 안 거야. 똑똑한 그들이 눈치 챘어. 그런 거지. 다 일본 쪽으로 돌아섰잖아. 조상이 지어준 제 이름 버리고 일본식 창씨개명은 물론이고 앞장서서 출병을 호소하고 있어. 여류 작가들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아들을 전선에 내보내는데 가관이야. 볼만해. 그런 극적인 변화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궁금해. 

점례는 뜨끔했다. 바늘 하나가 손가락 끝을 찔러 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유마가 조선 문인들을 평가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한 번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겠다. 나보다 유마가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어. 대단한 나의 유마. 점례는 이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자신도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변절의 이유, 조선을 위한 변명같은 게 있을거야. 여보, 나도 가도 되지요. 그럼 안 가려고 했어. 나 혼자만 보낼려고 한거야. 유마가 가 가벼운 딴지를 걸었다. 조선 화가도 부를 거야. 당연히 당신이 가야지. 그러려면 시간이 없네. 기자들도 수소문해야 하고 어디서 술독에 빠져 나라걱정, 세상걱정 다 하고 있는 글쟁이들을 찾아나서야지. 아쉬워도 총독 손을 한 번 더 빌려야겠어. 아니 그런 일에 까지 총독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아. 경무총감을 써야겠군. 그 자는 내가 자신에게 무얼 부탁하지 않는다고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내 말이라면 목숨이라도 내 줄 듯이 달려들거야. 하루면 충분해. 조선팔도가 큰 것도 아니고. 다 불러 들이지 뭐. 혹시 초대하고 싶은 문인이 있어. 딱 집어서 말이야.전 그쪽 세계는 잘 모르잖아요. 그래도 이광수나 최남선 등은 알고 있겠지. 그럼요. 조선사람 치고 그런 조선 천재를 몰라 볼 수 있나요. 오케이. 유마는 바로 경무총감을 대 달라고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이틀 후면 시간이 없다. 경무총감이 바로 나왔는지 유마는 바로 경무총감님께 부탁할 일이 있다고 정중히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 붙들어 매세요. 내가 죄다 불러 모으지요. 특히 친일에 적극적인 인사들, 그러니까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돌아선 문인들 말이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요, 유마 각하. 조선 대신들도 넣으면 어떤가요. 완용이나 덕영이 같은 이들을 대표주자로 하고요. 왜 조선인들이 말하는 그 을사오적을 죄다 초청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그런데 너무 많으면 대화가 안 되요. 내가 생각한 건데 그 다섯 명과 내가 지목하는 작가 10명은 꼭 넣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결같이 각하가 원하는 답변을 할 겁니다. 아니라면 대화는 재미있겠네요. 글쎄요. 동류는 상구아닐까요. 세모나 신춘이나 같고요. 그럴 걱정 없습니다. 경무총감이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유마는 호랑이가 짖는 어흥하는 소리로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유마는 되레 출국이 늦어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가운데 아지트에 도착한 휴의 일행은 덕영산장에 설치한 다이너마이트를 안전하게 빼돌리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난관이 따랐다. 주모가 저지른 일 때문이다. 당장 폭약을 제거하는 일은 잠시 뒤로 미뤄졌다. 지금은 아니야. 짭새들이 서성일 거야. 군대도 복귀하지 않고 산장 주위에 있을 거고. 시기가 안좋아. 휴의가 디데이를 정하기 위해 미리 어떤 밑밥을 놓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다른 대원 하나가 말했다.

역공을 하는 건 어때요. 방비하고 있는 틈을 타는 것이지요. 방비와 틈이라. 역공이라니. 뭔가 앞뒤가 안 맞아. 알맹이가 빠진 기분이야. 노. 난 반댈세. 휴의가 어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소나기는 피해야 할 시기야. 그렇다고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구한 폭약인데요. 늦기 전에 서둘러야지요. 내 생각도 그래. 그 폭약이 어떤 폭약인데 지붕 위에 방치할 수는 없는 거고. 빨리 수거해서 다음 작전에 써먹어야해. 그때가 언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런 걱정은 다음 날 쏙 들어갔다. 시내에 나갔다가 신문을 구한 한 대원이 휴의에게 건네면서 유마가 내일 일본으로 가지 않는다고 하네요. 일정이 변경됐는데 조선 대신들과 문인들을 초청한다고 이렇게 났어요. 격려 차원에서요. 이걸 보에요. 덕영산장에서 13일 정오에 모인다고 하네요. 어디보자. 덕영산장이라고. 그래, 그렇다면 그것 참 잘됐군. 덕영산장이라고. 아무 일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로 일부러 그곳을 낙점했을수도 있고요. 아니면 유마가 일부러 한옥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고. 어쨌든 우리에게는 나쁠 게 없잖아. 휴의에게는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참석자 명단은. 발표 된것 없는데 대신과 문인이라면 아마도 다섯 도적놈과 요즘 맹위를 떨치고 있는 천재 문인들이 아닐까요. 여류라고 하는 그런 작자들도 아마 참석 명단에 들었겠지요. 다리 사이에 박았던 머리를 들고 휴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폭탄은 그대로 둔다. 제거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용하자. 터트리자. 이번만큼은 신이 우리편 인가 보다. 불벼락을 그들에게 내리자. 꿩 대신 닭이라고 총독대신 도적놈이다. 모르지. 총독이 참석할 지도. 아니면 이인자인 그 악질 경무총감이 올지도. 한꺼번에 쓸어 버리는 거야. 알량한 지식으로 입신에만 열을 올리는 자들의 최후를 보여주자. 휴의는 새로운 전의에 불타올랐다. 유마가 즉석에서 결정했듯이 휴의도 즉석에서 결정했다. 이것은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상하이 임정도 환영하겠지. 미리 알리지 않겠다. 그럴 시간도 없다. 사후 보고로 충분하다.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른다는 미군에게서 배운 전략을 이런 때 써먹는구나.

휴의는 만주의 은밀한 산속에서 펼쳐졌던 폭파 교육을 상기했다. 그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마지막 결전은 시작됐다. 임정에 보고하지 않아도 될까요. 새로운 작전인데요. 대원 하나가 걱정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시간이 없어. 이번에는 우리 단독 결정이다.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동지들은 나만 믿고 따르면 된다. 휴의는 가지고 있던 가방에서 미리 작성한 우리들의 선언문을 꺼냈다. 선명한 붉은 지장이 눈에 띄었다. 조선총독 제거 결단을 앞두고 작성한 것이었다. 이것은 며칠 전에 한 것 아닙니까. 그래. 이번에는 문구 하나만 더 넣자. 다행히 여기 여백이 있구나. 휴의는 먹을 간 붓을 들었다. '우리는 적성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합니다.' 라고 끝난 다음에 또한 적국에 적극 협조하는 왜국 앞잡이를 척살하기로 했습니다. 1944년 11월 13일. 대한애국단 앞 전휴의, 갈길동, 도민청 일동. 그리고 직인 옆에 손바닥에 먹을 입혀 찍었다. 안중근 열사나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뒤를 잇는다는 명백만 표식이었다. 그래 폼 한 번 잡아보자. 제대로 한 번 해보는 거야.

한편 점례는 파리 일정이 늦어지자 완용의 처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새로운 고민거리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판단이 섰으나 방법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유마에게 부탁하면 안 될 일이 없다. 허나 무슨 이유를 대지. 점례는 초조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마음은 그래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은 심사도 있었다. 곧 파리로 가는 마당에 각자 자기 길을 가면 그만이다. 그가 나를 귀찮게 하려고 파리까지 쫓아올 이유 없다. 살아생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인간이다. 놓아주자. 운명에 맡기자. 점례는 자신이 홀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마음먹었다.그때 유마가 그런 마음에 변화를 주었다. 종로서장을 어찌 평가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갑작스런 질문에 점례가 당황했다. 어떻게라니요. 그냥 능력이 있는지, 관상은 어떤지 물어본 거요. 배신할 상인가. 점례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유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시건방을 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능력에 비해 과대평가하는 부분도 있고. 백작 칭호까지 받으면서 녹을 먹고 있는데 성과가 제대로 나오고 있지 않잖아. 그리고 나를 잡고 이것저것 묻지를 않나, 아주 건방을 떨어. 유마 호사카가 점례를 슬쩍 보았다. 미심쩍은 부분을 이번에는 확실히 털고 가려는 작정인듯 싶었다. 내가 나설 부분은 아닌 것 같지만. 능력은 잘 모르겠고요. 관상이라면, 좋은 관상은 아니에요. 좀 거칠고 야욕을 숨기는 스타일 같아요. 일할 때는 물불 가리지 않는 성질이 있으나 두뇌회전은 둔한 것 처럼 보이고요. 짝짝이 눈은 배신할 상이라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고. 배신한다면 누구에게. 글쎄요. 조국아닐까요. 대일본 제국을 위해 일하다가 총구를 반대로 돌리겠지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어제 보니까 내가 총독과 따로 얘기하려고 구석에 있을 때 완용하고 이야기를 제법 길게 하던데 무슨 애기를 했어. 유마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총독이 주는 봉투를 받을 때 보았던 점례의 손길이 움직이는 것과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 거렸던 완용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 별것 있겠어요. 공개된 장소에서 그냥 서로 덕담했지요. 점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 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할 듯 싶었다. 알고 물어보는 것에 대답이 미흡하면 신뢰에 금이간다. 내 옷차림을 칭찬해 주길래 고맙다고 했고 얼굴에 파리가 붙었는데도 체면 때문에 그대로 있어 내가 손바닥으로 딱 쳐 냈지요. 그랬군. 난 또 무슨 소린가 했지. 그렇다고 손바닥으로 칠 것까지야 있었나. 철썩 소리를 들었다니까.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사내 얼굴을 그렇게 세게 쳐. 나도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손이 올라갔어요. 아프기야 했겠지만 그 덕분에 파리를 쫓았으니 감사해야 마땅하지요. 다른 얘기는 없었고. 다른 애기라니요. 아,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군요. 보령의 죽마을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서해안 보령은 잘 안다고 자기도 그 쪽 출신이라고 반가운 척하더라고요. 그랬지. 참. 둘이 같은 고향 친구라고. 그럴지도 모르죠. 시간이 흘렀으니 죽마을 출신이라도 나를 모를수도 있고요. 벌써 십 년이 넘었어요. 

그랬군. 난 녀석이 당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줄 알았지 뭐야. 추파라니. 당신 앞에서요. 원래 그런 상은 공개된 장소를 노골적으로 이용하거든. 그래야 더 안심이 되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설마 어떤 자리인데 그렇게 행동해/ 그런데 그런자들은 그런 허점을 노리지.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악수를 하는데 가운데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을 긁지 않겠어요. 그냥 웃어넘겼는데 기분이 좋을리야 없지요. 유마의  얼굴이 어그러졌다. 총독에게 전화할까. 저놈을 당장 잘라 버리고 감옥에 처넣으라고. 그런데 그런 이유를 댈 수야 없지 않은가. 뭐가 있지. 더러운 조센징놈. 감히 내 여자에게 손을 대. 유마는 어떤 식으로든 그자를 엮어 조선을 떠나기 전에 처리하고 싶었다. 내 여자를 넘 보다니. 그래 내일 조선문인들과의 만남에서 어떻게든 건수를 만들어 보자. 경호 책임을 물어야지. 그러면 그자도 어쩌지 못할거야. 그것이 자연스럽고. 내가 선수를 치지. 총독에게 전화해서 저런 자하고 일을 하니 조선이 이 모양 이 꼴이 아닙니까. 좀 제대로 하세요. 한마디 하면 끝나겠지. 좋아, 그렇게 하자. 유마가 이런 꿍꿍이를 쓰고 있을 때 완용은 완용대로 점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쓴 웃음을 지었다. 서에 돌아와 자기 책상 앞에 발을 뻗고는 상념에 잠겼다. 따귀를 맞은 얼굴이 아직 얼얼한 지 한 번 만져 보았다. 따귀를 때렸어. 그 년이. 완용이 화를 참지 못하고 그것을 겉으로 드러냈다. 지나가던 부하가 힐끗거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완용은 평소와는 달리 그가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 년이 제 서방에게 나를 고자질할까. 머리 좋은 것이 그럴 리 없다. 제 허물도 드러날 텐데 제 무덤을 팔까. 휴의가 걸리겠지. 그러기 전에 과거가 들통나겠고. 유마의 심사를 긁어 낼 방도가 없을까. 최초의 서방은 네가 아니고 휴의다. 알고 있었느냐고. 과거 일이라고. 그런 일은 지나갔다고 신경 안 쓴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식은 어떤가. 과거는 과거라고 해도 현재도 그렇다면. 몸뚱이는 너에게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휴의 것이라고. 이래도 유마가 가만히 있을까. 내무대신의 아들이 마음이 그렇게 넓어. 하늘처럼 높고 넓냐고.완용은 어떻게 하면 유마 호사카와 점례를 갈라 놓을까 궁리했다. 그 년이 믿고 있는 게 왜놈 자식 말고 더 있어. 끈 떨어지면 네 년은 내 밥거리도 안돼. 분해 빠진 완용이 벌떡 일어났다. 제 화를 이기지 못해서였다. 그나저나 휴의란 놈은 조선땅을 벗어났을까. 신출귀몰해. 내가 못잡은 놈이 없는데 찍고도, 여러 번 찍고도 놓쳤어. 분해 분하다고. 내가 그런 건 그런 거고 참 난 놈이야. 그래 좋아. 한꺼번에 해치우자. 네 놈도 잡고 네 년도 잡아야지. 그러나 모든 계획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계획은 틀어지기 마련이다. 점례의 완용 제거와 완용의 갈라치기는 좀 더 기다려 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부러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작가 자신도 그들의 운명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마는 완영의 건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조선문들을 만나는 일로 관심이 옮겨갔다. 바로 모레로 다가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런 정보 없이 불쑥 만나는 것보다는 사전에 어느 정도 알고 가면 대화가 더 진지해 질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각 개인의 정보를 원했다.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행적이 궁금했던 것이다. 한때는 열렬한 독립파였다가 지금은 친일파로 활약하고 있는 그들의 구체적인 변신 과정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조선인들이 떠드는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들의 행적은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 대충해도 될 것인데 문인들은 도통 알수가 없었다. 그들의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고 관심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완용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용할 때까지 이용하는 거지. 유마는 속편하게 생각했다. 그자라면 파일을 다 갖고 있을 것이니 정리해서 가져오라고 하면 만나기 전에 쉽게 그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만찬에서 주도권을 쥐고 말할 수 있겠다. 굳이 정무총감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도 부탁이라고 생색을 내는 꼴이 보기 싫다. 그걸 용인한다고 해도 한 다리 걸치는 것이다. 경무 총감 역시 완용을 불를 것이고 그러면 시간만 지체된다.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직접하는 것이 낫다. 

호텔 로비에 내려가니 완용이 먼저 와 있었다. 부하 하나가 가방에서 꺼낸 서류철에는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 적나라한 내용이 있었다. 마치 이력서처럼 사진이 왼쪽 상단에 붙고 그 옆에 생년월일부터 시작해 학력이 적혀 있고 졸업 후 내용은 그 다음줄 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안경을 쓴 파일 속의 젊은이를 유마는 잠깐 훑어보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내용을 읽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방으로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도 될 일이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행적의 괘도를 그려오고 있는지 살펴볼 참이다. 따로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자료에는 문인들의 생활습관, 인간관계 특히 남자 문인의 경우 여자관계 등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여자문인의 남자관계도 있었고 그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까지 있어 유마는 놀랐다. 슬쩍 봤는데도 그 양이 방대하고 세세했다. 그래, 이렇게까지 파악하고 있단 말이오. 종로서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군요. 유마의 칭찬에 완용은 어쩔 줄 몰라했다. 저희도 놀고만 있지 않습니다. 놀더라도 할 일을 하고 난 후 해야 지요. 만족한다는 표정이 완용의 얼굴에 가득 뱄다. 근래들어 누군가의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이 자들은 어디로 튈지 몰라 항상 경계의 대상입니다. 한마디로 요주의 인물이지요. 지금은 아니라면서요. 우리 일본에 충성한다고 들었어요. 마음을 다 잡고. 네 그렇지요. 저들이 생각하기에도 조선은 끝났다고 보는 거지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으니까요. 자칭 타칭 천재라는 자들이니 그만한 머리는 돌아가고요. 그러니 나머지 백성들은 당기면 그냥 따라오는 밧줄 신세지요. 그런데 사생활까지 이렇게 적은 이유가 뭐요. 대충봐도 누구의 첩이니 이런 말들이 눈에 보입디다. 배꼽 아래의 일을 그렇게 상세하게 적어 놓다니 민망하군요. 아, 뭐 그건 우리 남자들끼리 이야기인데. 완용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약점을 잡아놔야 나중에 도움을 청하거나 추궁할 때 도움이 되지요. 여러모로 쓸모가 있어요. 그때 써먹기 위해 잡아둔 기록들입니다. 완용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딴 맘을 먹을지 모르거든요. 그건 그렇고 그런데 종로서장은 결혼했나요.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아직 미혼입니다만 같이 사는 여자는 있어요. 아무래도 미혼이 좀 편하지요. 잔소리도 없고요. 참, 같이 사는 여자가 일본인 이어서 고분고분합니다. 조센징은 바가지가 심해서 싫어요. 일본여자라서 좋다고요. 그것도 말을 잘 들어서요. 그렇지. 우리 일본인은 조선인과 달라. 달라도 한 참 다르지요. 비꼬는 투로 유마가 말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돌았다. 아차 싶었던 완용은 이때다 싶어 분위기도 바꿀 겸 호사카님 내외 분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특히 마사코 님은 세련됐어요. 조선에서 따라 하려는 여자들이 이화여전 등에서 나오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모자를 쓰고 머플러를 두르고 귀거리나 목걸이를 하는 신여성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마사코님은 조선 모던 걸의 상징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완용이 정말 궁금해서 못 견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것까지 말해야 되나. 그런 건 신경쓸 거 없고.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유마가 반말을 하면서 완용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닙니다. 각하. 그저 궁금해서 여쭤봤을 따름입니다. 네가 내 정보까지 수집하겠다 이거지. 그래서 여기에 있는 인물들 처럼 철로 해서 묶어 놓겠다. 아닙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완용이 납작 엎드렸다. 아냐, 아냐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투철한 직업정신은 비난보다는 칭찬이 앞서야죠. 이 서류철들은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요. 네, 내일 만찬 후 돌려주시면 됩니다. 그래 여기 있는 이자들에게는 다 연락을 취했소. 국내에 있는 문인 8명은 모두 참석하기로 약속을 받았고요. 여류 문인 두 명도 나오기로 했어요. 대신들은요. 내무대신 등 세 명은 참석이 가능하나 한 명은 아파서 병치레 중이고 다른 한 명은 군산으로 내려가 있다고 해서 참석이 어려울 듯합니다. 음악인과 미술인도 참석하라고 알렸어요. 매일신보에는 나왔어요. 오전에 보도자료를 냈으니 내일 나올 것 같습니다. 알았소. 유마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고집을 부려 나머지들도 수소문해 다 참석시키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유마가 담배를 권했다. 완용이 받기위해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완용이 머뭇거렸다. 아까 된통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선을 넘지는 말아야지. 그런데 선을 넘는 것인지 걸쳐 있는지 알수가 없다. 그래도 물어 보자. 당하면 당하는 것이고. 무슨 말인지 말해 보시오. 기탄없이 하세요. 아닙니다. 각하. 말해 보래두. 유마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실수할까 봐 겁이 나고요. 아닙니다. 유마님과 관련된 사안이라 말하기가 여간. 그래, 내 일이라면 더 말해야지. 무슨 말이든 오늘 이 자리서 나온 말이라면, 내가 거두어 두지요. 그러면서 유마는 이자 역시 참으로 나약자라고  판단했다. 남의 목숨은 하루에도 수 십명씩 죽이지만 제 목숨 하나에는 이렇게 애걸목걸하고 있다. 넌 임마,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물이다. 유마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저 마사코님 말입니다. 그래, 뭐가.  뭐가 옷에 묻어 있드냐. 네, 그게 아니라요. 우리가 쫓는 휴의라는 자 있지 않습니까. 독립운동하는. 하도 유명하니 나도 그 이름은 듣고 있소. 상하이 임정의 선생보다도 몸값이 높다면서요. 신출귀몰하는 그 조선청년인가 하는 수배자보다도 높고. 맞습니다. 바로 그자와 마사코님이 아는 사이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유마가 구미가 당긴다는 듯 이번에는 완용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너는 나가 있어. 완용이 서류철을 들고 있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어서. 부하가 벌떡 일어섰다. 저쪽 문밖에 기다리고 있어라. 부하가 하이를 외치며 잽싸게 눈에서 사라졌다. 그게 말입니다. 이건 순전히 감입니다만 마사코님이 휴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증거는 있느냐.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감입니다. 오랜 형사 생활이 가져온 촉이라고나 할까요. 감 말고 다른 건 없느냐. 증거 말고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아주 작은 거라도 말해봐요. 글쎄요. 제가 인사동 삼촌 집을 늘 감시하고 있는데요. 감시가 아니라 경호하고 있습니다만. 완용이 말을 급히 바꾸면서 그때 휴의란 자가 화랑 근처를 배회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사코님이 나오면 뒤를 따르고요. 전에는 잠깐 길에서 만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전이라니. 아마 이 삼년 전쯤 일 겁니다. 그때 유마님은 전선에 있었고요. 마사코님이 먼저 와 있었을 때요. 만난 시간은 얼마나 되느냐. 유마는 만났다는 사실을 팩트 체크하기도 전에 이렇게 물었다. 글쎄요. 워낙 순식간이라서요. 한 삼십 초쯤 됐을까요. 삼십 초. 그 정도 시간이면 길가는 사람이 장소를 물어봤을 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이 스쳐 갈 수 있는 정도밖에 더 되느냐. 그런 걸 아는 사람끼리 만났다고 단정할 수 있어. 그게 아니고요. 확실히 멈춰 서서 두 눈을 보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두 눈으로 그것을 똑똑히 봤습니다. 완용은 그런 자세로 그들이 잠시 껴앉았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게 무얼 말하는지 그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럼 왜 체포하지 않았으냐. 이번에는 완용이 멈칫했다. 왜 그랬어. 잡지 않고 왜 그대로 두었냐고. 조선에서 제일로 몸값이 높은 일급 수배자라며. 보고도 나둔 거야.

당황한 기색이 완용의 얼굴에 역력했다. 알고도 잡지 않다니. 서장이 직무유기 한것 아니요. 당장 파면감이다. 아니 영창에 집어넣어도 상관없다. 완용이 목소리를 낮추고 강하게 말했다. 눈에서는 어떤 살기가 느껴졌다. 적을 제압할 때 보이는 그런 눈이었다. 내가 이놈아 이래 봬도 대일본 제국 태평양 전쟁의 작전 최고 책임자였다. 네 놈 하나 못 해볼 줄아느냐. 유마가 만족한 듯 등을 뒤로 젖혔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각하. 그때는 생각이 짧았습니다. 상하이에서 온 불순 불자가 휴의 말고도 일당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뒤를 캐서 일망타진하려고 체포를 늦춘 것 뿐입니다. 일부러 놔준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자를 포함해 일당들은 일망타진 됐나요. 유마가 점잖게 물었다. 그 뒤로 놈들이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경성부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놓쳤습니다. 정말 순식간이었고 바람과도 같아서 도저히 행적을 캘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호사카님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 거고요. 정보를 줘서 내가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니. 그것도 고급정보라서. 아닙니다. 각하. 그래, 너를 어떻게 해주면 은혜를 갚을래.  네 죄는 네가 실토했으니 거짓은 없을 것이고. 자백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너도 알겠지. 유마가 부하 다루듯이 함부로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때 체포하지 않은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래, 죽여 주래. 이거 기억하지. 네가 준 거니 기억에 없다고는 못할 거다. 호사카가 주머니속의 권총을 꺼냈다. 네가 준 이 총으로 너를 죽여줄까. 여기 이 호텔 로비에서. 아니면 총독부에서 발행하는 매일신보에 네 비위를 대문짝만하게 실어줄까. 상판대기와 함께. 총독님도 좋아하시겠지. 뭐 알고도 일부러 놔줬다고. 매국노가 따로 없다고 노발대발 하시겠지. 종로서장 할 사람은 조선천지에 널려있다. 모르지. 모레 만나는 문인 가운데서 시켜만 주면 하겠다고 나서는 작가가 있을지도. 아마도 당신보다 못하지는 않겠지. 각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모두, 전부 다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눈이 삐었습니다. 그때 제가 본것은 마사코 님도 휴의도 아니었어요. 그저 잡고 싶은 욕망이 헛것을 본 것이지요. 알았다. 알았어. 네 충성심은 내가 알지. 그나저나 문인 모임에 차질 없도록 준비 철저히 하고. 특히 여류 문인들은 차를 보내 깍듯이 모셔와라. 하이. 완용이 감격해서 말했다. 호사카님을 위해 죽도록 일하겠습니다. 완용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경례를 올려 붙였다. 됐어요. 그만. 난, 곧 떠나니 나 대신 충성을 사람을 찾아 보시오. 유마는 그 말을 하고는 호텔방으로 올라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어, 이거. 사람들에 대한 기록물. 당신도 한 번 읽어 봐요. 아무래도 예술은 사람들 이야기니까 도움이 될 거야. 점례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군요. 미리 정보를 알고 가면 도움이 되겠지. 총독에게 감사할 일이 생겼네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일정이 예정대로 됐으면 지금쯤 우린 파리에 거의 도착해 있을 거야. 이런 인생 대화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세상일이란 참 묘해요. 어긋난 약속이 뜻밖의 선물을 주니까요. 세옹지마라니까요. 어, 그거. 간단하게 설명해 주면 안 될까. 지금 흥미로운 부분에 도달했거든요. 인생사 돌고 돈다는 뜻이지요. 완전한 기쁨이나 완전한 슬픔은 없는 법이고요. 그런 거지, 나도 대충 그렇게 짐작했어. 유마 호사카가 조금 건들거리는 몸짓으로 말했다. 맞아 떨어진 것에 대한 만족감의 표시였다.

조선 남자치고는 잘 생겼는걸. 훤칠한 이마에 두상이 스님을 해도 괜찮겠어. 더구나 눈썹도 중눈썹으로 볼만해. 뿔테 너머 눈빛은 얼마나 또렷한지. 얼굴이 증명한다니까. 나 조선 천재요 하고. 그런데 이자의 이름이 향산광랑이군. 가야마 미츠로. 창씨개명 하라고 하기도 전에 서둘러 조선 이름을 버렸네. 이유가 그럴싸해. 조선식 이름 세글자로는 천황의 신민으로 부족해서 천황에 좀 더 가까이 가야한다는 핑계를 댔군. 내선일체 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일본 이름이 좋다나. 그건 맞는 말이지.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결정이라고. 얼씨구나 좋구나. 유마가 어깨를 들썩였다. 박자가 척척 맞았다. 대동아 일주년을 맞은 나의 결의라 제목이 좋군. 폐하의 성업에 감사 또 감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 한 몸 천황에게 바치네. 유마는 적극적으로 친일로 돌아선 그가 한 때 2.8 조선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멜레온이 따로 없군. 글도 참 많이 썼네. 문인 가운데 압도적으로 친일을 찬양했어. 이 정도면 광신적 친일파네. 어쩔 수 없이 친일한 자가 아니군. 참으로 친일한 자가 있다면 이 자일세. 그러니 임정 활동을 하고도 귀국한 후에 체포되지 않았지. 아마도 우리 일본의 첩자나 스파이로 활동한 거로군. 그래 총독부 기관지에 이름을 본 거 같아. 연재 소설을 썼지 아마. 조선인들이 그 소설에 열광했어. 이제 기억 나는군. 정나미 떨어지는 그 소설. 열광할 정도는 아닌데, 초대형 베스트셀러 라니. 문장도 그렇고 과정이나 결말도 세계적 작품과는 질이 많이 떨어져. 이 자는 세상 물을 더 먹어야지. 파리로 데려갈까. 귀찮아. 생각하기도 싫어. 난 지조 있는 인간이 좋아. 이 자는 점례의 발끝도 못따라가. 그렇고 말고. 그녀는 배신을 안 해. 왔다 갔다는 하는 인간은 난 딱 질색이야. 어쨌든 글도 수준 이하야. 하지만 이 정도도 어디야. 이런 자들이 가득 넘쳐야지.

유마의 입이 가소롭다는 듯이 옆으로 벌어졌다. 민족 개조론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조선민들은 일본인에 비해 열등하지. 타고나기를 그렇게 한 거야. 열악한 민족정신으로 쇠퇴 또 쇠퇴라고. 게으르고 머리도 나빠. 음, 이걸 친일이라고해야 할까. 아니면 민족개조를 넘어선 동족 혐오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 인물이라면 조선문인협회장을 하는 건 당연하겠지. 또 흥미로운 게 있네. 이혼을 했어. 난 놈은 난 놈이야. 신여성과 재혼을 했네. 조선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라고. 그런데 또 여류 화가와 바람을 피웠네. 시인, 조각가, 조선 최초의 페미니스트 등 직업도 다양한 여성과. 볼 만해. 요일을 정해서 만나고 있어. 수 금과 화 목 이렇게. 그러면 토일월은 누구를 만나지. 여자들 만나는데 시간 다 쓰면 글은 언제 쓰나. 펜을 굴리던 손을 놓고 유마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기묘한 생각이 났는지 이마를 가볍게 쳤다. 그래 그동안 어떤 걸 썼소. 작품말이오. 쓸 시간이 부족해 겨우 안경을 썼나요. 하하하. 이런 대화가 오가면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겠지. 조선 최고의 셀럽이 있다면 아마 이 자 일거야. 연말 연예 대상은 경쟁자가 없어. 독보적이니까. 여기까지 읽고 나서 호사카는 완용에게 나머지 요일은 누굴 만나 무얼 하는지 왜 기록하지 않았으냐고 따져 물어 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보 활동이 게을러서야 어디에 써먹겠소. 형사들도 주말에는 쉬는 모양이군. 그래 쉬면서 적당히 일해. 어깨를 두들겨 줘야겠군. 이 대목에서 말이야. 당황하는 그자의 모습이 보이는군. 너도 이놈아, 이 작자와 같은 부류야. 약점이 많은 자들, 특히 사욕이 있는 자들은 독립 같은 자기를 희생하는 일에는 서툴지. 그것조차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니 왔다리갔다리, 여자에게 하듯이 양다리를 걸치는 거지. 조선인들은 좋겠네. 조선 최고의 천재 작가의 이런 행태를 알고나 있을까. 알면 나도 그러고 싶어 배우려고 돈을 내겠지. 사는 길은 조선을 버리고 친일하는 것이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하면서도 부러워하는 게 조센징의 특징 아냐.

유마 호사카는 서류철의 다음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시인이다. 눈초리가 매섭다. 촌철살인. 돌아가지 않고 핵심을 치는 자 답군. 과연 시인의 기질을 타고 났어. 하늘에서 내렸다는 시인이 바로 이 자군. 조선말을 이리도 아름답게 쓴다고. 그렇지, 마쓰이 오장에게 보내는 송가라고. 운율이 살아있어. 내 작품 속에 한 번 인용해 먹어야지. 그래 이름이 뭐더라. 달성정웅이라. 타츠시로 시즈오. 근사한 이름이군. 일제가 적어도 천만년을 간다고 하네. 조선 역사가 오천 년인데 천만년이라. 그런 생각이니 당연히 친일을 해야지. 이 자에게는 무슨 질문을 하지. 유마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는 듯이 왼손을 턱에 기댔다. 정말 네 아비가 머슴이었니. 이건 좀 그래. 이런 질문은 못 하지. 점잖게 하자. 그래 네 몸뚱이는 얼마나 슬픔에 젖었길래 이토록 징그럽게 생겼니. 이것도 좀 그렇지. 이자에게는 즉석 시나 하나 읆으라고 해야지. 혹시 아나. 날 보고 세상을 구제할 미륵의 미소를 지녔다고 칭송할지. 그러고도 남은 인간이야.  그것이 끝나면 고향이나 물어볼까. 이 자에게는 궁금한 것이 너무 많네. (목을 가다듬고)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인가. 일그러질까. 아니면 환하게 펴질까. 참말로 재미있는 인물이야. 조선 천재들은 과연 대단해. 

대신들은 제쳐놓자. 익숙한 얼굴 앞에서 호사카는 그들과는 형식적인 인사치레만 하기로  미리 마음 먹었다. 정치인들은 뻔하지. 그들은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지. 방금 들통날 것도 천연스럽게 부인해. 그걸 보려고 내가 초대한 건 아냐. 그냥 들러리지. 내 관심은 오직 글쟁이들에게 쏠려 있어. 글은 정신이 중요하거든. 어떤 정신으로 쓰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어. 문인들 뒷바라지가 필요한 대목이 나오도록 유도해야지. 아예 떠먹여 줄까. 뭐, 내게 부탁할 말 있으면 기탄없이 하세요. 다 들어 주겠어요. 눈치 없으면 내가 이렇게 물어보지 뭐. 나서는 자가 없으면 그 안경잡이와 하늘이 낸 시인을 호명하지. 너, 그래 너. 일어나. 그리고 말해. 돈이 필요해. 아니면 첩질할 기생은. 유마는 거기까지 가다가 그만 멈추었다. 이런 놀이도 짜증이 났다. 정말 구역질 나는 면상들이다. 프랑스가 대단한 거야. 그러고 보면. 독일에 협조한 자들은 가차없이 단두대로 날렸거든. 그런 기상이 있어야지. 그들에게는 자존심이 있어. 민족도 있고. 조센징은 그게 없어. 가장 중요한 그거. 호사카가 얼굴을 치뿌렸다. 슬슬 여류 문인들로 넘어갈 때가 됐나. 얼굴 좀 펴자. 예상이 빗나가는군. 첫장부터 이거 왜이래. 남자처럼 기골이 장대하군.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고 하는 신조가 이럴 때면 흔들려. 이 얼굴이면 물불 가리지 않아. 여자지만 남자의 기세를 뚫고 지나가. 아, 그만 읽자. 답답해. 지금 태평양 전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다니.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어. 그런데도 가미까제 특공대를 찬양하고 학도병 모집에 열을 올려. 신의 위력으로 일어난 바람이 잦아들고 있는 이때에. 아들 가진 엄마도 울면서 보낼 만한 문장으로 피를 끓게 하는군. 어쩜 좋아. 일본은 패망이고 곧 조선 땅을 떠나게 될 거야. 그래도 이럴래. 숨고 싶을까. 아니면 내가 뭐 못할 말 했어. 하고 되레 따지고 들까.  호사카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걱정 스러운 얼굴을 했다. 새로운 조선이 들어서던지 왕조가 이어지던지 하겠지. 그럴리야 없어.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조선은 우리가 가져야지. 아버지가 미국과 협상할 거야. 양보할게요. 그럼요. 찬성합니다.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선요. 그래요. 조선만 주세요. 그리고 필리핀이든 인도네시아든 다 가지세요. 아버지는 협상가야. 틀림없어.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어. 그걸 가정해 볼까. 조선이 독립한 상황을. 그러면 이 자들은 또 뭐라고 할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할까. 아니면 다 조작된 것이라고 부인할까. 아무튼 천부적인 기회주의자들이니 독립된 곳에서 또 다른 부와 명성을 얻겠지. 어떤 말의 잔치, 어떤 비상한 행동을 보일지 그려지는군. 권세 앞에서는 무조건 엎드린다 그것이 내 신조요. 그렇다면 할 말 없다. 복종은 이런 때 하는 것이오. 우리 같은 천재들은 범인들과 달리 이런 생각을 철두철미하고 있소. 기회주의가 왜 나쁘지요. 입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그래, 이 자들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그렇게 살았어. 그럴 줄 몰랐소. 일본이 이렇게 쉽게 망할 줄은. 그걸 알았다면 내가 친일을 하겠소. 이제 조선 독립은 물 건너갔소. 일본 지배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일본인으로 살아갑시다. 안 그렇소. 그러면서 대들고 성을 내겠지.

너희들 중에 친일 아닌 자 있으면 당당하게 나와서 나에게 돌을 던져라. 너희들 말대로 내가 친일이면 너희들도 다 친일분자다. 죽지 않고 숨만 쉬고 있었어도 친일이다, 되레 고함을 치겠지. 죽지 않고 일본놈 땅에서 산 것이야말로 친일이 아니고 무엇이냐. 조선 오백년 동안 가르킨 선비 정신도 모르느냐. 이 겁쟁이들아. 왜 숨은 쉬니. 들었던 돌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돌아가는 가엾은 흰옷 입은 백성들이 보이는군. 그래, 내가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다만 나는 그걸 소설로 쓰기 위해 스토리를 구성하는 중이고. 나스메 소세끼를 능가할 거야. 그 정도로는 성이 안차. 나를 과소 평가할 필요없지. 위고나 모파상, 에밀 졸라 급은 돼야지. 이런 소재라면 세계인의 마음을 울릴 거야. 감동을 줄 만하지. 딴 생각 그만 하고 에험 여류 문인 읽다 말았지. 계속하자. 여류 문인이라, 이름 참 호감이 가네. 한 눈에 팍 들어와. 호사카는 혼잣말을 하면서 파일을 점례의 손에 넘겼다. 정신을 집중했더니 눈이 아파왔던 것이다.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내가 이런 걸 해야 하나, 귀찮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적합한 일이었다. 사실 이것은 좀 과장된 것이고. 내가 뭐 조선을 이해한다고 해서 역사학자가 될 것도 아니고. 다만 스토리 구성에는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인간의 대처 방법은 제각각이고 특히 주류 인사들의 처신은 구미에 당기는 일이었다. 그들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바람보다 먼저 눞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세에 밝고 어떤 게 자신의 안위에 도움이 되는 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봐두면 나중에 분명히 써먹을 데가 있다. 도덕이나 양심 혹은 민족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신하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다. 자신도 전선에서 많은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유마 호사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점례에게 파일을 넘겨 주고 나서 창가로 가 밖을 내다 봤다. 창가에서 밖을 내다 보는 습관은 점례 때문에 자연히 얻어진 것이다. 창아래 보이는 풍경에 소가 끄는 달구지에 짐이 잔뜩 실려 있었다. 먼지를 날리며 차가 그 옆을 지나간다. 전차의 육중한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란 소가 잠시 비틀댔으나 다시 원래로 돌아왔다. 조선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쨌든 돌아간다니까. 세상은 돌아간다고. 독립이든 친일이든 수레바뀌처럼 저렇게 굴거가는게 세상이라고. 하여튼 점례는 어떤 느낌이 들까. 파일을 보고 나서 서로 의견을 교환해 보자. 그러기 전에 내가 느꼈던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지. 그들에게서 받은 인상을 가감없이 말해보자.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나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점례는 조선 사람을 대표한다고 치고.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통과 의례같은 토론이 아닌가. 굳이 토론이 아니어도 좋다. 의견을 가볍게 이야기 하는 정도라도.

호사카가 이런 마음을 하고 있을 때 점례는 넘겨받은 파일에 눈을 박았다. 준 것을 아니 읽을 수도 없어서 그는 범죄자의 신상명세처럼 정리된 노트를 눈으로 따라갔다. 왼쪽 상단에 해당 인물의 사진이 눈에 띈다. 그다음에 간단한 약력과 압축된 소개 글, 그리고 구체적인 작품 활동이 나열돼 있었다. 형식은 남자 문인들과 거의 같았다. 서류 작성에 능숙한 관청에서 나온 파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개인의 신상과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서류는 이렇게 정리해야지. 정리된 파일을 한 번 그려볼까. 점례는 파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파일 속의 인물과 함께. 재미는 없을지 몰라고 내용은 괜찮아. 일단 지금은 그림보다는 글이니 읽어보자고. 그러기 전에 관상을 좀 한 번 더보고. 얼굴이 두툼하네. 함경도 원산이 고향이고 이화여전을 나왔군. 그래 엘리트라 이거지. 이화여전이라면 나도 수학한 적 있어 익숙하군. 삼촌이 소개해 줬어. 그래서 반년 정도 청강을 했었지. 점례가 호기심이 인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어디 꼼꼼히 볼까. 이화여전을 졸업하고는 경성제국대 법문학부 영문과를 다녔네. 얼씨구, 학벌이 장난이 아니야. 이런 여자가 조선에 몇 명이나 될까. 점례가 뒷머리를 매만졌다. 이 정도 배웠으면 뭘 써내도 그럴싸하지. 잠깐 남자 이름은 뭐더라. 점례는 읽다가 다시 앞장으로 돌아갔다. 파일의 여자가 앞선 장에 있던 남자와 연인관계여서 남자의 신상 파악이 궁금했던 것이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맨 앞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1번으로 기록될 정도로 그 남자는 중요도가 높았다. 후후, 이 남자와 자주 어울렸네. 이 여자. 그럴수도 있지. 문인은 문인끼리 통하는 법이잖아. 남자도 잘 생겼고. 그런데 그녀는 나이가 좀 들어 보여. 점례는 남자와 여자의 생년월일을 비교해 보았다. 무려 이 십년이나 벌어져 있었다. 부녀 지간이라고 해야 어울리겠군. 허나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어쭈, 여자가 일방적으로 따라 다녔다는 뉘앙스가 풍기네. 그 남자는 이제 이 여자가 지겨워 졌나 보지. 완용의 정보는 정확한가. 일단은 믿어야지. 아닐수도 있지만.  

점례는 나름대로 상상했다. 여자가 따라다녔다고. 그래서 귀찮아 했나. 여자가 그러면 남자는 멀어지는 이치를 이 여자는 모르고 있었나 보군. 내가 코치라도 해줄까. 남자는 멀리해야 한다고. 그래야 가까워 질 수 있다는 섭리를. 그 남자는 여자를 떼내기 위해 다른 남자를 소개해 줬군. 나 말고 다른 남자 만나. 그 것 먹고 떨어져라 이 심사인가. 어라, 여자는 던져준 곶감을 덥썩 물었군. 제대로 물었어. 그 남자와 합이 맞았던 거지. 그러니 딸을 낳았잖아. 그런데 일년을 가지 못했어. 역시 대단한 여자야. 데리고 놀다가 가차없이 차 버렸군. 여자가 남자를 다룰때는 이렇게 하나 봐. 이게 조선 신여성이 가는 방향인가. 배운 여자들은 이렇게 하는 군. 조선 오백년 역사가 무너진 건 이런 이유 때문인가. 가부장제는 다 어디로 간 거야. 이 정도면 파리지엥은 저리 꺼져, 그 수준이야. 공자왈 맹자왈하는 유교는 치마폭에 싸여 싸그리 사라졌어. 이 여자만 보면. 점례는 억지로라도 웃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오므리고 웃음기 있는 표정을 만들었다. 잘 한 결혼이 일 년도 안돼 어그러 졌다. 여자가 떠나가자 떠난 여자를 그리워 그 아버지 같은 남자가 다시 여자를 끌어 들였다. 여자는 못 이기는 척 옛 애인을 만났고. 다 들통났네, 들통났어. 아이구 참, 말이 아니군. 그렇잖아도 좁은 바닥에 문인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겠지. 술자리에서 이리 찧고 저리 찧고 난장판이 따로 없네. 그러면서 부러워하겠지. 소문의 주인공을 손가락질 하면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 탓하겠지. 이렇게 된 마당에 다음 수순은 바로 이혼이지. 그러고 나서 양다리 걸치면 좀 좋아. 점례는 소설을 썼다. 삼각 관계는 언제나 흥미진진해. 조선 연애사를 한 번 써볼까. 유마 호사카에게 소재를 줘야지. 이거 어때. 조선 신여성의 연애 이야기. 더 들어가 볼까. 이혼한 여자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마음도 정리됐다. 몸도 가벼워 졌다. 그런 기운을 받아 총독부 기관지 고정 필진으로 선발됐다. 대단한 활약이 이어지네. 쉴 새 없이 글을 쓰네. 사생활은 이 쯤에서 그만두어한다고 판단했나. 그렇지. 사람은 유한해도 기사는 영원히 남으니까. 

오케이, 나도 그런 생각이었어. 나무라기보다는 칭찬해야 마땅해. 펜이 거침이 없군. 한 마디로 겁이 없어. 어라, 이건 또 뭐지. 어머니의 마음으로 아들들을 전쟁터로 보냈군. 독려 글이 마음에 들어. 지원병에게. 지원병이라고. 끌려간 거 아니었어. 역시 천재는 천재야. 아 다르고 어 다르잖아. 가긴 갔어도 자발적으로 간 거랑 끌려 간 건 다르거든. 여성도 전사다. 맞아 틀린 말이 아니지. 여성도 얼마든지 전사가 될 수 있어. 어쩌면 이렇게 딱 맞는 말만 하지. 어디 한 번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한 번 해보고 싶군. 당신 아들에게도 손에 총을 쥐어 주면서 나가서 싸워라, 싸우다 장렬하게 죽어라. 천황을 위해 대일본 제국을 위해, 그렇게 등 떠밀고 나서 잘했다고 난 정말 좋은 엄마라고 스스로 칭찬하려나. 내 자식은 열외지. 왜냐고. 좀 아프거든.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가 엄지보다 가늘거든. 그런 점에서 그녀는 유부남과 잘 맞아. 둘은 선전 선동이 능하다는 공통점도 있고. 부끄러움이 없고 당당한 것은 그 남자와 이 여자의 주특기지. 이 여성 문인의 다음 인생이 궁금하군. 일본이 물러나면 어떻게 변신할까. 새로운 왕에게 그를 찬양하는 글을 하루 종일 쓰겠지, 당신은 조선의 천황이오. 만백성이 우러러 보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우리의 왕이시어. 대대손손 만수무강 하옵소서. 점례는 자신이 글을 써서 신문에 투고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왕은 아니다. 조선은 망했으니 대신 외국 군대가 들어와서 섭정을 하겠지. 그러려면 영어가 능통해야 해. 검증된 그것을 바탕으로 사교 클럽을 만들어 코쟁이들의 환심을 사겠지. 낙랑클럽은 어떤까. 좋아, 제목은 이 정도는 돼야지. 일단 명랑해야해. 그래야지 암, 그렇고 말고. 그들에게 군대에 협력하지 않으면 부모 형제라도 용서하지 말라고, 가차없이 처단하라고 부추기겠네. 내 예상이 맞아 떨어지네. 기분이 좋냐고. 당근. 중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본색을 여지 없이 드러냈군. 어린 날개들을 전선으로 끌어들였네. 소년 학도병에게, 천황을 위해 과감하게 나가서 싸워라. 하여튼 대단한 여성이야. 점례는 읽다 말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보나마나 뻔한 것 이기도 했지만 다음 사람이 더 궁금했다.

이 여류 문인도 만만치 않군. 앞서 나온 이혼녀와 둘이 친구 지간이라고.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하는 짓이 똑같아. 아니 서로 누가 더 앞서가나 친일 경쟁이라도 하는군. 일본을 위해 하는 일이니 더 보기 좋군. 이 여성도 남성 편력이 있는 편인가. 그렇군. 유부남에 관심이 있어. 그걸 탓할 이유는 없지. 남이 떡이 더 크고 좋아 보이는 건 여자의 눈으로 봐도 마찬가지 아냐. 난 앞선 여성의 그것도 나쁘다고 생각 안했어. 되레 둘의 행복을 빌어 줬지. 이번에도 그럴거야. 이 분 역시 그를 위해 시를 짓는군. 역시 시인다운 발상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짓는 시는 걸작이 많아. 기린 말이야. 이 동물은 목아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란 말이지. 그 짐승이 그 남자란 말이지. 그래 그 남자는 어떻게 화답했나. 파일이 있을까. 없네. 여자와는 달리 출세에 관심이 없었나 보군. 오로지 내 사전에는 사랑뿐이다 이 건가. 좋아,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라고 해서 배꼽 아래의 일을 까발리면서 손가락질 할 필요는 없어. 그런 것은 보기 좋은 풍경은 아냐. 남의 사랑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끼어들 필요없지. 내가 중매쟁이도 아니잖아. 시비하는 자들은 자기들은 못하니 일부러 과장하는 거지. 너희들은 더해. 그렇지.안 그렇다고. 아니요. 맞아요. 수긍해야지. 자, 이 일은 일단 여기서 그만두자. 그리고 흠. 점례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다음장을 넘겼다. 침을 바르니 잘 넘어가네. 누굴까. 너무 궁금해. 이 여성 역시 친일을 하는군. 입에 문 나팔을 뗄 시간이 없군.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사랑을 할 때도 나팔을 불고 있어. 할려면 제대로 해야지. 맞아. 이런 문제라면 짚고 넘어갈 수 있지.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올거니. 제목한 번 좋고. 통통한 입술.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낭송하면 볼 만 할거야. 살짝 웃으면서 말이야. 더구나 이 분은 미인상이야.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라. 그렇지, 암 그렇고 말고. 영국과 미국을 쳐라. 그래야지. 그들은 우리의 원수 대일본 제국의 적 아닌가. 적을 확실히 구분하는 판단력이 좋아. 그래 이 여류 문인에게는 어떤 질문을 하지. 목록을 뽑아 보자. 그럴 즈음 호사카의 식사하러 내려가자는 목소리가 들였다. 여보, 아무리 흥미진진해도 먹고 나서 해요. 그럴까요.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배 고픈 줄도 모르고 내가 너무 열심이었나 봐요.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금강산 구경보다 더 재미있었나 봐요. 대충보니 어때. 대충 아니거든요. 좀 자세히 봤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도 사람이지 뭐 별수 있나요. 그러게, 내 말이 그 말이야. 뒷장에는 노래부르는 가수들도 있어. 화가도 있고. 구미가 당길 대목이 있을지 모르겠네. 모르겠네라니. 지금까지 보고도 몰라. 완용이 대단해. 일단 칭찬부터 하자고. 이런 정보를 다 어디서 구했을까. 신문에 다 낫어요. 아닌 것도 있잖아. 그냥 마구잡이로 그러 모은 것 뿐인데요. 그렇다고 해도 여간 정성을 기울인 게 아니잖아. 그건 인정해요. 당신이 완용을 다 칭찬하는군요. 할 건 해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않아.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런말을 한 후 점례는 습관처럼 장을 여러 장 넘겼다. 거기에 뭐가 들어 있어. 혹 현금 같은 건 없나. 완용이 숨겨 둔 거 말이야. 아니면 애인에게 보내는 행운의 엽서 같은 것이라도. 그런 건 없네요. 그런데. 그런데 뭐야. 이 장 부터는 색깔이 달라요.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어네요. 마치 현상수배범을 찾는 것처럼. 어, 그 자들은 현상수배범 맞아. 거기 읽어봤어. 유마가 유까다를 걸치며 말했다. 거기까진 아직 가지 못했어요. 당신이 보고 말해 주면 안 되요. 몇 사람을 읽으니 어질어질 해요. 이 장은 그냥 안 보고 싶어요. 갑자기. 점례가 이건 내일이 아니라는 듯이 무관심한 투로 말했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문인들 파일 말고 독립운동하는 자들의 기록도 있어. 당신도 알잖아. 총독부에서 목숨 걸고 잡으려는 그 휴의라는 자 말이야. 그 자의 파일은 못본 거지. 그것만이라도 당신이 먼저 보고 말해 주면 안돼. 난 오늘 이상하게 눈이 아프네. 너무 피곤했나봐.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면 난 늘 이렇거든. 조금 신경 덜 쓰면서 살아요. 벌써 몸에 무리가 오잖아요. 눈이 구백냥이라고 했는데 조심해야지요. 우리 나이에는요. 그런가. 문인들 기록을 너무 꼼꼼하게 봤나봐. 유마 호사카가 정말로 눈이 아픈지 손을 눈가로 가져가서 비벼댔다. 그래요, 당신이 원하면 보고 보고 드릴게요. 보고라니. 귀에 익은데, 오랜만이네. 습관이 됐나 봐요. 보고해. 당신이 늘 부하들에게 말했잖아요. 그랬나. 내가. 전장에서 하던 말인데 당신이 그걸 귀에 담았군. 식사하러 갑시다. 그래요. 둘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무얼 먹을까. 그게 늘 고민이지요. 우선 메뉴판을 볼까요. 그래 오늘 식사는 당신이 골라봐. 국밥만 먹었더니 입에서 소가 음메하는 것 같아. 당신은 비유의 천재에요. 그 말 다음에 꼭 문장으로 써먹어요. 점례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오랫만에 먹는 양식이었다. 포크와 칼을 잡으니 점례는 다시 파리로 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불안하다. 여기 조선은 여전히 불안해. 빨리 떠나자. 이제 이틀 남았다. 내일 모임이 끝나면 끝이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길 하나를 건너 근처의 덕수궁에 들렀다. 멀리서 완용이 그들을 미행했다. 알고 있었으나 호사카는 모른 척 했다. 고궁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둘은 손을 잡고 걸었다. 간혹 힐끗 거리며 사람들이 곁눈질 했다. 세련된 남녀가 손잡고 걸으니 구경거리였다.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고 둘은 건물의 외관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봤다. 나무로 만든 조선식 건물이 유려한 곡선을 뽐내며 궁궐을 장식했다. 여기 조선 건물은 우리 성들과는 모양이 달라. 규모도 그렇고. 일본에 가면 오사카 성에 한 번 들르자. 온천도 하고. 그가 가볍게 어깨를 잡았다. 두 건물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에요. 건축가는 아니지만. 양식의 변화라든가 뭐 그런것도 살펴볼 수 있겠지요. 언제 그런 책도 읽었어. 아니 잠깐 신문에서 봤어요. 서양식 건출과 동양식 건축의 차이인가 하는 특집 기사요. 참, 부지런도 해. 다음엔 이탈리아 여행 어때. 그래요, 여행은 사람을 살찌게 하지요. 안돼, 당신 더 찌면 보기 흉해. 미안해요. 마음만 찔게요. 마음만 살찐다. 그 표현 좋은데. 내가 써먹을 거야. 그러면 영광이지요. 이탈리아 말을 하니 정말 이탈리아식 건물이 있네. 그러게요. 완전 서양식 건물이에요. 무엇에 쓰는 걸까요. 다 쓸모가 있겠지. 저쪽으로 돌아 나갑시다. 그들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조금 걷자 북악산에 어둠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호사카는 피곤한지 호텔로 돌아와 이내 쇼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점례의 손에 다시 파일이 들어왔다.

휴의, 그래. 이제 마지막이다. 네 눈을 보는 것이 이제 마지막이다. 비록 사진 속의 작은 눈이지만. 그 생각을 하자 점례는 손을 떨었다. 술잔을 잡았다면 흘러 넘쳤을 것이다. 떨리는 것을 보고는 그래 이렇게 더 떨어보자 하면서 일부러 파일을 표가 나게 흔들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심하게 떤다고 여겼는지 그녀는 누워 있는 호사카를 슬쩍 보고는 침대 모서리에 걸쳤던 엉덩이를 들고 창가 의자로 갔다. 파일 속의 휴의는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몰라보는 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콧수염도 그려져 있고 눈에는 안경까지 썼다.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 아니라 사십대의 중년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말끔히 면도된 얼굴에 맨 얼굴이었다. 변장을 예상하고 알아보기 쉽게 찍은 두 장 사진이었다. 사진을 갖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점례는 휴의가 체포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봤다. 곧 체포되겠지. 고문에 못이겨 점례를 만났다고 시인할까. 그녀에게서 총독 만찬 장소와 일시를 빼냈다고 실토할까. 하든 말든. 아니라고 난 이 자를 알기는 알지만 만난 적도 어떤 말을 섞은 적도 없다고 버텨야지. 다 완용이 짠 거짓말이라고. 이 상황이 오면 바로 완용을 처치해야지. 생기기는 잘 생겼어. 이마가 훤칠하고 눈이 선해. 눈썹고 무성하고 가지런한 것이 이마를 잘 받쳐주고 있어. 이런 인상은 한 번 보면 기억이 남지. 넓은 이마와 오똑한 콧날은 인중까지 길게 이어졌다. 고집이 세다기보다는 자기 주장이 있고 집념이 있어 보였다.

귀는 넓고 길게 볼을 타고 내려왔고 눈은 적당히 크면서도 너무 크다 싶지 않고 적당했으며 동공이 빛나는 것이 지능형 인간의 이미지를 주었다. 이건 청년 휴의 모습 그대로 였다. 점례는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걸 찍었지. 잡혔었나. 그때 찍어 논 걸까. 고문해서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최근 일이라면 내가 알 수 있었을텐데. 오래 전 일인가. 적어도 7,8년 전. 그 옆의 변장 모습은 사진이 아니군. 그 이후로는 잡히지 않았다는 증거군. 상당한 실력이네. 이 정도면 당장 파리 화단에 서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세밀화가 되레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일본에서 온 화가가 그렸을까. 일본의 화풍이 이 정도 수준이었나. 맞아 삼촌이 보여준 쓰모하는 일본 남자의 그림을 보고 놀랐었지. 거구들이 한 판 승부를 벌이는 모습이라니, 마치 호랑이와 사자 싸움 같았어. 유럽 화단에 충격을 줄 만큼 대단했지. 마치 눈앞에서 싸우는 듯이 생생했어. 고함소리, 땀냄새가 들리는 듯 했으니까. 아니면. 설마, 그 여류 화가가 그린 걸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회부터 5회까지 내리 입선한 조선 최고의 신식 화가가 점례의 눈에 어른 거렸다. 자신이 뒤를 이어 입선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지. 중년의 미모와 기품이 있었고 난 조금 주눅이 들었고. 조선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던. 아니야. 그분은 친일파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야. 변절한 적이 없어. 수배된 독립운동가의 사실화를 그려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자. 파일에 궁금증을 풀어줄 비밀이 숨어 있는지. 보령 출신. 맞아. 보령 출신. 그 건 나도 알아. 나와 같은 고향 친구니 모를리 없지. 그건 당연한 거고. 어라, 그리고 여자관계라고. 순간 점례는 거기에 눈이 빨려 들어갔다. 휴의에게 애인이, 애인이 있다면. 동굴 속으로 떨어지는 듯이 아득했다. 애인 이름: 그 다음은 지워져 있었다. 왜. 누가. 지웠을까. 그리고 대여섯 문장에 달하는 그 다음 글귀는 아예 검은 먹으로 칠해져 있어 도저히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글이 적혀 있을까. 설마 내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점례는 뛰는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유마 호사카도 이 부분을 봤을까. 봤다면 아마도 궁금해서 완용을 불러 지워진 부분을 복제하겠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점례는 잡고 있던 종이를 땅에 떨어트렸다. 호사카가 다 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을까. 점례는 그러나 당황하지 않기로 했다. 알면 아는 것이고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물으면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어릴 적 같은 마을에서 자랐다고 지난번 얘기 했잖아요. 그때가 아마도. 세월이 한 번은 족히 지났을 거에요. 이거 말고 이건 어떤까. 죽마을 떠난지 10년이 넘었고 그 후로 만난 적이 없으니 모른다고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워낙 요즘 핫한 인물이라. 그러게요. 그런 작은 마을에서 골칫거리가 생겨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더구나 내가 아는 인물이라니. 죽마을인가 뭔가 정말 인물 났군. 어쨌든 난 불쾌해요. 그 자와 엮이는 게 싫거든요. 그래도 난 그렇게 말했어요. 이름이 같은가. 사진을 보면 정확히 알텐데. 당신은 그래 하고 말했고요. 그걸 다 기억해. 당신이 휴의의 존재를 알았다고 했을 때 내가 알던 그 휴의와 동일인지 아닌지 몰라서 놀랐던 거고요. 그런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아요. 그래서 아직도 머릿속에 있어요. 곧 지워지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소재도 모르고 생사도 몰라요. 내 이십사 시간은 당신과 함께 하고 있잖아요. 그건 그래.  괜한 걱정을 했어. 이 정도로 끝날 사안이다.  유마는 그런 것에 관심 없다. 설사 관심이 있다고 해도 추궁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어서 조선을 떠나고 싶다. 잠시 좋았다가 또다시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다. 내일이 어서 지나갔으면. 지나가겠지. 모든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점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다독였다. 여보 몇 시야. 호사카가 선잠에서 깼는지 기지개 켜는 소리를 내자 점례가 물었다 .응, 그거. 안 자는 당신이 알지 내가 어찌 알아. 손목을 들어 보세요. 내원 참. 귀찮은 듯이 호사카가 손목시계에 눈을 주고는 퍽이나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잠깐 자려고 했는데 두 시간을 잤네. 그러게요.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더 자요. 가뿐해, 몸이. 잠은 다 잤는걸.

점례 옆으로 다가온 그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여보, 근데 말이야. 그래 말해봐. 아니 됐어요. 말해 보래두. 뭔데. 내가 여자대학에 다녔잖아요. 당신이 오기 전에 한 육개월 정도. 그 애긴 오래전에 했잖아. 삼촌이 배려해 줘서 청강을 들었다고. 그래서. 그때 그 선생님이 생각나요. 노선생님. 학감을 하셔서 나와도 조금 사적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나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어요. 그 당시 미국 유학을 갔다 오셨어요. 난 열등감을 느꼈어요. 대단한 분이군. 노선생이라면 선생이 아니란 말인가. 점례는 무슨말인가 잠시 있었다. 노, 선생. 노와 선생을 따로 유마가 불렀다. 조크 그만 하고요. 조선 사람인가. 네, 불행히도 여성분이고요. 불행이라니. 아마 남자 선생이었으면 내가 빠졌을지도 몰라요. 허허 그 정도로 인격자였나. 잘 생겼고. 키도 크고. 그럼요. 모두 존경했으니까요.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도 깊어서 저도 그분을 만나면 두 손 모아 기도부터했어요. 성경책도 선물로 주셨고요. 그렇군. 그런데. 호사카가 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듯이 물었다.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냐는 투였다. 파일에 선생님이 있어요. 아, 그렇군. 당연하겠지. 그런 정도의 인품이라면 우리 일본 편에서 조선인들을 교화해야겠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그가 어, 나 좀 씻고 올게. 눈곱은 떼고 커피를 마셔야지 하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례는 호사카의 체온이 남아 있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다시 서류철로 눈을 돌렸다. 할 일이 없어 마지 못해 본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눈길이 닫자 다시 호기심이 발동했다. 다부진 얼굴이었다. 여자에게는 그렇지만 남자로 태어났다면 장군이 됐을까. 여장부가 따로 없다. 광대뼈도 나왔고 눈이 매섭다. 출세욕이 보인다. 콧대도 높다. 완용은 그녀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녀의 실체를 알기 위해 점례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파일철을 눈 앞으로 당겼다. 휴의를 보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왔는데도 점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같은 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부러움의 대상 그 자체였다. 인천에서 태어났군. 세례명이 헬렌코마이고 창씨개명한 이름이 천성충성마라기네. 미국 이름으로 불러도 들어서 좋은 이름이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활약했군. 그래 그만큼 배우고도 이런 직책 하나 없다면 욕심이 없는 거지. 군자라 해도 자리 하나는 있어야 체면이 서는거 아니겠어. 이름이 긴 걸 보니 거기서 중요한 일을 했나 보군. 안경을 썼네. 여자가 안경을 쓰면 재수 없다는 욕을 먹어도 신경을 안 쓰는 스타일이니 벗을 이유도 없겠지. 어울려. 이 여자는 안경을 벗어도 마찬가질 거야. 정말 당당해. 보는 사진은 그것 말고는 다른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당당한 조선 여성.  글을 보다 점례는 다시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두꺼운 입술이 벌어지며 역시 두꺼운 이빨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 사이로 붉은 혀가 들락이면서 말이 새어 나왔다. 마치 뱀처럼 나온 혀는 좀처럼 들어가지 않고 계속해서 일장연설을 이어갔다. 점례는 교정에서 있었던 일을 더듬었다. 봄바람이 불었고 사쿠라 꽃이 바람에 날리는 그런 화창한 날이었다. 그래, 배꽃도 날렸지. 맞아 하얀 배꽃. 흰옷 처럼 잘 어울렸지. 제국의 학생 여러분, 배꽃 높이 높이 휘날리며 우리는 전선으로 가야 합니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정신대 모집에 앞서 지원합시다. 애국합시다. 우리 하얀 꽃 여러분에게 특별히 제공되는 것입니다. 봄날 돌담에 나타나는 말 그대로 화려한 화사였다. 꽃뱀처럼, 마치 징그러운 그것처럼 그녀의 입은 거침 없었다.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나는 감히 학생 여러분에게 명령한다. 이것이 선생이 제자에게 하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고 무조건 따라야 한다. 대일본 제국을 위해 전선으로 가자. 가서 지친 병사들을 위안하자. 정신대 깃발을 높이 올리자.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느님 아버지. 천황의 승리를 위해 사랑하는 나의 제자를 싸움터로 보냅니다. 우리 제자들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성도 전사입니다. 총 들지 않았어도 총 든 남자를 위안하면 그것이 바로 전사 다름아닙니까. 여기 배워서 똑똑한 처녀들이 있습니다. 공물로 하느님께 바칩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가 너도나도 지원해 전선으로 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지원이 없으면 제비뽑기로 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모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 듭시다. 아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흘리는 학생이 있는 것 같았다. 감동적이라서 점례도 따라 하고 싶었다. 억지로 안 되자 점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도 어느 덧 눈물이 고였고 정신대로 가자 정신대로, 하는 구호를 따라했다. 태평양 전선. 그리고 나의 위안 행위. 그래 거기 있는 조선 처녀들은 모두 애국자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애국을 했다. 그렇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떠들고 자랑해야 마땅한가. 점례는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자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선생님은 알고 있었을까. 그것이 여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는지를. 몸이 떨렸다. 독감에 든 것처럼 이마에 열이 났다. 막사의 모포를 머리까지 덮어쓰고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지원서에 서명하는 이들은 알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정신이 무엇이고 위안이 무엇인지. 애국하는 일인데 왜 그렇게. 점례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그러나 멈춘다고 멈춰질 수 없었다. 나는 모르고 선생은 알까. 아는 선생을 모르는 나는 존경한다. 학생들이 치는 박수가 들린다. 열렬하다. 머리가 좋은 학생들이다. 그들은 곧 이해했으니 행동하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기필코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점례는 뒷문으로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교정을 달렸다. 책가방을 앞에 끼고 마구 달렸다. 서러움이, 무엇 때문인지 모를 서러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먹구름은 사방에서 쳐들어왔다.

점례는 화들짝 놀랐다. 화장실 문이 열리며 유마 호사카가 나왔다. 그는 기침을 하면서 혼자 있는 점례가 무안해 하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여보 화장대에 로션 있어요. 날이 좀 쌀쌀하네요. 얼굴 트지 않도록 발라요. 점례는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물방울 하나가 서류에 떨어져 잉크가 번져 났다. 여보, 여기서 털면 어떻해요. 당신이 좀 발라 주면 여간 좋지 않소. 손이 좀 아파. 호사카가 수건을 털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여기가 아파. 그래요, 알았어요. 우리 착한 아들. 점례는 일어섰다. 그리고 로션을 손바닥에 따랐다. 그사이 자리는 바뀌어 있었다. 의자에 앉은 호사카의 시선이 번진 잉크 활자 부근에 멈춰 있었다. 이리 와요. 얼굴을 앞으로. 그래 이렇게 돌격 앞으로. 좋아요.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자요. 눈 감아요. 점례는 정성스럽게 그의 얼굴에 화장품을 발랐다. 골고루 퍼지게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얼굴 마사지를 했다. 시원해, 당신은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호사카 싫지 않은 소리를 내면서 몸을 맡겼다. 내 손은 약손이지요. 아프면 문지르면 나아요. 배도 아파. 피. 너무 띄우지 말아요. 그러다가 금방 실망할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알았어. 난 좀 저녁 산책 좀 하고 올게. 이 시각에요. 아니 산책이라기 보다는 로비에서 차 한잔 하고 싶어. 당신도 갈래. 이것 마져 읽고요. 그러던지. 내려올 거면 내려와. 다른 데 안 가고 거기 있을 게. 알았어요. 옷 잘 입고 나가세요. 하오리 끈을 잡고 있는 그에게 점례가 말했다. 감색 코트 그거 입고 가요. 점례는 하오리를 밀어 넣고 자신이 말한 옷을 손에 걸치고 나가는 유마 호사카의 등을 보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망한 나라 조선왕이 죽었다. 허수아비 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조선왕이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집단 곡을 금지했다. 모여서 하는 곡이 시위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누구도 감히 서슬 퍼런 일제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그때 그 학교 그 선생이 나섰다. 학교를 설득해 사백여 명의 학생들을 끌고 나와 덕수궁 앞에 모였다. 흰 광목옷을 입은 학생들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일제는 선생의 행동을 주시했다. 주시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종로서는 그녀를 체포해 옥에 가뒀다. 그들이 보기에 시건방을 떤 결과는 이렇게 참혹했다. 그 이전에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해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독립투사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깨어 있는 지식인의 참모습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적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창씨개명에 이어 관제 단체에 가입하는가 하면 매일신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번 쓰기 시작한 글은 멈출 줄 모르고 이어졌다. 정신대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물론 내선일체를 앞장서 외쳤다. 말로만 하지 않고 글을 써서 제자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조선처녀를 전장으로 내몰았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했다. 징병제에 나서는 반도 여성의 각오는 대단했다. 그녀의 일제 협력은 변절이 아니라 조선과 조선민을 위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이 용감한 것처럼 친일도 용감한 행위였다. 그녀같은 지식인이, 깨우친 여성이 글을 쓰지 않고 연설을 하지 않고 교육을 하지 않고 숨어서 지냈다고 가정해 보자. 조선의 손해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누군가 엄청이라고 쓴 부분에 붉은 색으로 원을 그려 강조했다. 완용의 짓인가. 매우 심각하게 조선이 손해를 본다는 거지. 알았어. 나도 그쯤은 안다고. 그래, 나의 스승은 또 어떤 일을 했어. 오호 그렇군. 나중에 낙랑클럽을 만들어 제자들을 미군에게 소개했구나. 잘했어. 박수 짝짝. 외교전략의 일환이었던 거지. 이 모든 것은 국익을 위한 것. 결코 매국행위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험하고 나쁜 일은 독립운동, 맞아 독립운동은 나쁜거야. 나쁜 거라고. 점례는 거기서 읽기를 멈추었다. 동점심이 일었다. 아니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녀는 결코 왜소하지 않았다.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까. 마치 나의 고통처럼 다가왔다. 점례는 종이를 넘겼다. 다른 장이 궁금했다기보다는 더는 흥미가 없었다. 그냥 습관처럼 눈은 따라갔지만 내용을 읽지는 못했다. 정신이 든 것은 한 참이 지난 후였다. 다시 파일에 눈이 가자 거기에도 여성 지식인이 반갑게 맞았다. 웃는 얼굴이 퍽 정감이 갔다. 성은 박이고 이름은 외국식이었다. 세글자가 아니고 네 글자의 여성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점례는 악수하려고 뻗었던 손을 거두고 대신 파일을 아예 덮었다. 무엇이 중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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