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3-04 02:40 (월)
뒷모습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그 모습을 의식했다
상태바
뒷모습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그 모습을 의식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22 07: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7.

화장을 다 마쳤을 때까지도 유마는 일어나지 못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어 점례는 유마의 얼굴을 살폈다.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보다는 잠든 남자의 평온한 모습만이 가슴이 새겨졌다. 마치 아이처럼 세상모르고 자는 곤한 얼굴이었다. 사람은 천성이라는 게 있어. 이 사람은 천상 예술가야. 전쟁과는 거리가 멀어. 더군다나 사람을 죽이다니. 군인은 잠시 외도한 거야. 한눈을 판 거지. 본래로 돌아오고 나서야 확실한 제 모습을 찾았어. 푹 자는 군. 이런 사람에게 군화는 어울리지 않아. 신은 군화를 벗지도 못하고 그냥 잔 적도 많아. 오분 대기조라나 뭐라나. 오분 만에 출동하려면 군화를 벗어서는 안 되지. 지금 이 남자가 그 남자라는 게 상상이 돼. 안 되지. 그래 이 남자는 잠을 사랑하지. 잠을 사랑하는 사람은 군인과는 거리가 멀어. 그래, 당신에겐 더 밤이 필요해. 더 자요. 어디서나 잘 자는 나의 잠꾸러기. 이런 점은 군인의 장점을 물려 받았다고 해야 하나. 뭐든 다 나쁜 것은 없다더니. 군인의 유산으로 가져온 것이 어디서나 잘 자고 잘 먹는 것이라면 대 만족이다. 그것만 얻을 수 있는 군인 체험 같은 게 있다면 입소하고 싶다. 점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었다. 

난 등대면 바로 잘 수 있어. 심지어 서서도 자. 서서도 잔다고요. 안 믿겨지지. 걸으면서 잔다면 놀라 자빠지겠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정말로 놀라 자빠지는 시늉을 점례가 했다. 당신은 예민을 덜어낼 필요가 있어. 밤새 뒤척이더라. 안 자고 있었어요. 푹 잤지. 꿈에서 봤어. 뭔 고민이 그렇게 많아. 인생을 즐기자 우리. 당신은 그림만 신경쓰라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야한다고 주문을 걸어봐. 자지 않으면 못 그린다고 자신을 압박해봐. 상황은 예민함도 고칠 수 있지. 절박하면 인간은 거기에 따라가게 되거든. 몸은 언제나 정신에 압도당해. 그러니 자자고, 자야 한다고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 거역하면 큰 벌을 받는 그런 명령. 그러다 보면 나처럼 잘 잘 수 있어. 절박함이 불면을 이겨내는 힘이야. 점례는 유마가 이런 비슷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해 냈다. 서서도 자고 걸어가면서도 자는 그가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에서 누었는데 그 잠이 얼마나 달고 꿈같을까. 자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으로 점례는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준비는 다 됐다. 가져갈 그림 몇 점과 입을 옷과 가볍게 적을 만한 펜과 종이도 있다. 점례는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조선의 아침은 이제 밝아오고 있었다. 행상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흰 옷입은 저들은 먹고 살 만은 할까.  불현듯 점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남들이 자고 있을 때 일어나서 일하는데, 가능하겠지. 저 남자, 달려나가는 저 남자, 힘차게 수레를 끄는 저 남자에게 행운이. 복을 빌어주는 점례는 여유가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살아가는데 이곳에서 못할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점례는 죽마을 고향을 떠올리자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소작쟁의로 끌려간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하게 행상의 모습과 겹쳐졌다. 수확하고도 먹지 못하는 쌀을 보고 얼마나 사무쳤던가. 쌀은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했다. 말이 수출이지 다 뺏기는 것이다. 지주에게 뺏기나 왜놈에게 뺏기나 뺏기는 것은 아버지에게 매한가지였다. 수확한 것을 빼앗을 길 때는 자식을 뺏기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내 것을 가져갔다. 일년 농사 지은 것을. 새벽별 보고 논에 나가 밤별 보고 돌아오는 고된 노동 끝에 얻은 결실인데. 아버지는 울화통이 터져 죽을지 모른다는 절박감에 농사를 포기했다.

그리고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얼굴에 검정 칠을 하고 광산에 다녔다. 집 근처 성주탄광은 유명했다. 석탄을 캐면 농사짓는 것보다 수입이 좋았다. 얼굴은 물론 옷까지 온통 까맣게 칠해서 서너 달에 한 번 집에 오지만 그때는 돈을 앞에 놓고 식구들이 모여앉아 웃음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더 돈이 되는 일본인 소유 금광으로 갔다. 거기서 떨어진 낙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절뚝 거리며 고향땅에 왔을 때 아버지는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 한 동안 꼼짝도 못했으나 타고난 골격의 힘으로 아버지는 견뎌냈고 버텼으며 다시 소작일을 할 수 있었다. 죽마을 사정은 나아졌을까. 조선에 오니 고향이 어른거렸다. 파리에 있을 때는 기억나면 애써 지웠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잘되지 않았다. 장소가 바뀌면 사람의 생각도 바뀌기 마련이다. 의식까지도 변한다. 점례는 자신이 조선땅에서 맡는 흙냄새가 다르다고 느꼈다. 어깨에 닿은 유마의 손길을 느껴졌다. 내 나라에 오니 기분이 다르지. 여기서 눌러 살고 싶은 생각에 빠졌던 거야. 점례는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이렇게 변명했다. 그럴리가요. 점례가 어깨위로 손을 뻗어 유마의 손을 맞잡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언제 세수를 하고 왔는지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결이 물에 젖어 있었다. 이 차림으로 그냥 내려가면 되는 건가. 뭐 안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다 챙겨 놨거든요. 갈아 입을 시간은 충분해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냥가지 뭐. 유마가 주춤 거리다 나가려는 시늉을 했다. 점례가 따라 나왔다. 떨리나요. 떨리지. 당신도 그러니까 묻는거지. 난 조금요. 아주 조금. 점례는 엄지와 검지를 조금 벌리면서 별거 아니라는 시늉을 했다. 사실은 아니지만. 하지만 막상 닥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상시처럼 진정됐다. 참 이상하죠. 걱정했던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되고 말아요. 그것이 당신의 몸이야. 적응을 잘 한다고나 할까. 아니면 언제나 색다른 것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이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하고는 다른 거지. 칭찬이죠.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하지 못해. 

회견장에는 열 명 정도 기자가 와 있었다. 조선에 상주하는 외국 통신사 기자도 눈에 띄었다. 사진 기자는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질문은 예상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유마는 당당하고 자신감있는 태도였다. 점례는 겸손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을 설명할 때는 열성적이었다. 자부심이 묻어났다. 사진을 찍을때는 웃었고 그림을 보여줄 때는 진지했다. 질문이 더 없으면 일어나도 되겠느냐고 유마가 물었다. 매일신보 기자는 질문을 한 터이라 조선인이 운영하는 신문사 기자에게 눈짖으로 양보 의사를 밝혔다. 다른 질문 없나요. 유마가 한 번 더 물었다. 침묵. 유마는 일부러 조선 신문사 기자들 가운데 꼭 찍어서 질문의 기회를 주겠다고 했으나 끝내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장 분위기였다. 유마가 일어나 정리하려고 할 때 뒤쪽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례는 만연필을 쥔 손을 들고 있는 삼촌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림이나 글과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점잖게 물었다. 기자들은 그가 인사동의 유명한 화랑을 운영하는 화상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기자가 아닌데도 질문을 하는 것이 어색한지 그는 그림과 상관없는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한 번 더 물었다. 그럼요. 하세요.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상이지잖아요. 유마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하지요. 유마 호사카님은 작전 대장으로 만주 전선에서 공을 세우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프랑스는 얼마전에 해방됐고요. 태평양 전쟁은 진행중인데요. 결과가 어떻게 끝나리라고 보시나요. 그리고 지금 조선에서는 독립에 대한 소규모의 반발이 있어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극소수 인사들이 식민정첵에 반대하고 있어요. 유마님의 식견이 궁금합니다. 

잠시 술렁였다. 그러나 유마는 그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일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평소생각하던 거라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파리에서 느낄 수 있고 여기와보니 더 그런 확신이 선다고 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점례에게 양보했다. 조선독립에 관한 내용은 저보다는.하고 점례에게 하라는 듯이 마이크를 넘겼다. 좋은 생각이네요. 조선 사람이 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매일신보 기자가 점례를 보고 말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점례가 입을 뗐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일본 아니고 어디겠어요. 점례가 반문했다. 너무 당연한 걸 물으시네요. 여기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 있나요. 그런 사람 있으면 손 한 번 들어 보세요. 유마가 웃었다. 답변에서도 점례는 상대를 꺾었다. 비록 삼촌이라고 해도 말이다. 생각해 보니 질문만 받았네요. 제가 여러분에게 같은 질문을 드려 볼게요. 전쟁의 최종 승자는 누구인가요. 기자 분 중 누구 용기있는 분 대답해 보세요. 조금 웅성 거림이 있었다. 시간이 좀 지체됐더라면 분명 누군가 답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틈을 주지 않았다. 질문 다음에 바로 답변을 이었다. 여기 조선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조선과 일본은 하나지요. 아닌가요. 질문자도 소규모나 극소수라고 단서를 달았어요. 어떤 나라에서도 어떤 정책도 백프로 집권자의 의사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조선에서 그런 일들이 간혹 일어난다고 해서 식민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다들 혀를 내둘렀다. 똑부러졌다. 유마는 점례에 존경을 느꼈다. 삼촌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자신의 질문으로 유마와 점례의 위상이 높아진 것에 만족했다. 기자회견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끝났다. 

저녁에 삼촌 집에 초대받은 유마와 점례는 집이 삼층으로 개축된 것을 보고 놀랐다. 삼층 전체는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는데 삼촌은 여기서 점례의 그림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하겠지. 네, 백점도 걸 수 있겠는데요. 점례가 말했다. 점례 그림이 여기 첫 전시회 작품이 될 거다.  정말 축하한다. 삼촌이 유마를 향해 말했다. 제가 아니라 축하를 받을 사람은 이 사람이에요.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 일부러 내가 그러려고 다른 작품은 걸지 않았어. 대단한 영광이네요. 점례가 응수했다. 여기가 메인 작품이 걸릴 장소로 어때. 삼촌이 의견을 묻는다기보다는 이미 정해 놓고 통보하는 식으로 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들어오면 정면에서 보이고 공간도 크고 넓어서 딱 들어 맞는 장소에요. 이번에도 점례가 말했다. 유마는 팔짱을 끼고 듣고만 있었다. 가서 저녁 먹자. 그래요. 전 국밥요. 유마가 발빠르게 대답했다. 또 국밥이에요. 점례가 나무랐다. 조선 국밥이 최고야. 따뜻한 국물에 고기가 있고 익은 무나 김치는 국물과 궁합이 잘 맞아. 씹는 맛이라고나 할까. 식감이 최고야. 뭐가요. 고기요, 아니면 무나 김치나. 다야. 내 입맛에 다 맞아. 건강에도 좋고. 그걸 먹으면 소화가 잘돼. 잠도 잘오고.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잔다면 그것은 무교동에서 국밥을 먹었기 때문이야. 유마가 입가를 훔치는 시늉을 했다. 못말려. 당신은. 점례가 가볍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면 자신도 국밥을 먹겠다고 거들었다. 국밥 하나 추가요. 삼촌이 웃었다. 

그런데 삼촌, 왜 그런 질문을 했어요. 어울리지 않게. 그냥 해본 건가요. 아니면 조선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한 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겉은 조용한데 안에서는 펄펄 끓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조만간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지난번 총독부 공격 때문에 경을 쳤잖아. 다행히 총독님이나 형님은 무사했으니 망정이니. 언론도 잘 틀어 막아서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조차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런데 왠일인지 총독이나 총감 등의 신변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감이 와. 참, 삼촌도. 감으로 그런 판단을 한다고요. 삼촌, 예지몽이라도 꾸었나요. 그림에나 신경쓰지 왠 정치에요. 유마가 막걸리를 벌꺽 들이키면서 말했다. 입맛을 다시면서 유마는 그렇잖아도 아버지 편지 때문에 고심했어요. 삼촌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우리는 오직 예술입니다. 자, 잔을 듭시다. 나의 동지여. 그가 점례를 쳐다보면서 빛바란 노란색 양은 잔을 들어 올렸다. 점례가 들자 삼촌도 따라 들었다. 셋은 간바이 하면서 잔을 부딪쳤다. 삼촌은 예술도 정치가 있은 다음에 하는 말이야. 정치가 무너지면 예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러더니 화제를 급하게 다른데로 돌렸다. 천상 장사꾼이었다. 전시회가 모레니 사흘 후에는 총독님이 한 번 방문했으면 싶다. 총독부에서 어제 사람이 왔더라. 유마님이 오면 방문 날짜를 알려 달라고. 아마 내일 쯤이면 호텔로 사람이 갈거야. 찾아 뵙는게 도리지. 형님이 미리 연락을 해 놓으셔서 네 조선행을 총독부가 다 알고 있어. 형님이 내무대신으로 승진하시고 다음 수상의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니 총독도 형님을 깎듯이 모시는 분위기야. 참의원 당시와는 또 달라.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 알았어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또 전쟁이니 조선독립이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겠어요. 저는 오로지 예술만 말하고 싶은데. 유마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설마 거기서 그런 질문으로 난처하게 하지는 않겠죠. 한 번은 봐줘도 두 번은 안 됩니다.

점례가 동지의 편을 들었다. 이 사람은 정치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아해요. 인생은 오로지 예술이다. 이런 신조를 갖고 있거든요. 둘이 짤떡 궁합이군. 그런데 아버지 생각은 다를 걸. 할아버지 지역구를 아버지가 받았고 다음은 너라고 생각하고 있을텐데. 아닙니다. 분명히 말씁드렸어요. 지난번 뵈었을 때 아버지는 그럼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이렇게 허락했거든요. 하지만 정치는 움직이는 생물이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 아버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또 그 정치로 넘어왔군요. 삼촌 그 말씀이라면 전 호텔로 돌아갈게요. 알았다, 알았어. 그나저나 네 결혼은 어떻게 되가니. 동료 의원의 참한 딸 사진을 네게 보냈다고 형님이 지난 번에 말씀하시더라. 도쿄대 영문과에 다니는 재원이라고. 나도 그 집안을 안다. 우리 집안 만큼 대단해. 천황의 신임을 받는 것도 그렇고. 점례는 못 들은척 아니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은 듯이 식사에 열중했다. 아이, 삼촌도. 난 결혼 생각 없어요. 삼촌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어요. 어려운 질문을 그렇게 쉽게 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요. 배우다니. 고약하구나. 다 너를 아니 우리 집안을 위해 하는 말이다. 집안의 뼈대를 형님이 잇고 뒤는 네가 받쳐야지. 난 장사꾼이다. 나이도 있고. 정치나 이런 것은 내 체질이 아냐. 삼촌 체질이 아닌 것을 저에게 떠밀면 어떻해요. 저도 그쪽은 아니거든요. 결혼도 마찬가지고요. 그 문제도 아버지 한테도 말씀드렸고요. 삼촌은 저를 불편하게 해요. 점례에게도요. 아까 기자회견장에서 조선독립 같은 질문을 하다니요. 놀랐다니까요. 다행이 점례가 잘 대답해서 잘 넘어갔지만요. 이젠 식사자리에서 까지. 밥이 넘어가겠어요. 유마야,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현안이 어디 있니. 밥은 뒤로 미룰 수 있지만 그건 미룰 수 없어. 너도 알다시피 정치가 없으면 예술도 다 끝장이야. 전쟁터에서 무슨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니. 그리고 여기 조선 상황도 그래. 삼촌이 조금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정치인이 있고 군인이 있잖아요. 모든 사람이 정치인이나 군인일수는 없어요. 분업을 하는 거지요. 저는 저대로의 삶이 있고요. 전시회가 끝나면 바로 출국할 겁니다. 잠깐 부모님을 뵙고 바로 파리로 가려고요. 삼촌은 머뭇거렸다. 전시에는 모든 국민이 다 군인처럼 싸워야 한다. 자기 몫이 따로 있는 게 아니냐. 유마나 점례는 대꾸하지 않았다. 말 꼬리를 잡고 이어가는 대화 분위기에 쓸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나오니 대화는 자연히 다른 주제로 옯겨 가는게 맞다. 본국에 가면 그 여학생을 만나봐라. 또 그애기 예요. 그만해요. 삼촌. 점례 때문이냐. 점례가 화들짝 놀라 입에 있던 밥풀이 몇 개 튀어 나와 맞은 편 삼촌의 얼굴에 붙었다. 괜찮다, 애야. 점례가 황급히 삼촌의 얼굴에 묻은 밥풀을 떼어내려고 하자 스스로 얼굴을 빗자루로 쓸듯이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면서 삼촌이 말했다. 저라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저는 언제든 결혼에 찬성입니다. 저도 그 여학생 사진을 봤거든요. 천생 배필로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여보, 당신까지 이러기요. 유마가 나머지 잔을 건배 제의도 없이 싹 비웠다. 한 잔 더. 내민 잔에 점례가 가득 술을 부었다. 조선 막걸리는 입에 딱 맞아. 걸쭉한 것이 들어갈 때는 목에 무언가 걸리는 듯 하면서도 시원하거든. 걸죽한 것은 묵은 때도 씻고 시원한 것은 기가막혀 좋고. 삼촌, 당사자 앞에 놓고 그러시다니요. 술이야 조선 술도 좋아. 하지만 사케만 하겠니. 삼촌이 무안한지 술평가에 가세했다. 아니에요. 사케도 사케지만 조선 술이 난 좋아요. 너 조선여자와 살더니 조선에 푹 빠졌구나. 삼촌이 입맛을 다셨다. 다투고 싶다는 언사로 들렸으나 삼촌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방이 넉넉해. 일하는 여자는 신경쓰지 말고. 유마가 점례를 쳐다봤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삼촌이 그렇게 말씀 하시니 자고 가도 좋겠지요. 아니요, 삼촌. 우린 호텔에 가서 좀 할 일이 있어요. 오늘 밥값은 제가 낼게요. 무슨 소리. 아니에요. 이 사람 책 팔아서 돈이 많아요. 점례가 삼촌의 팔을 잡는 시늉을 했다. 내 버려두라는 뜻이었다. 이른 저녁이었다. 시계를 보니 여 섯시가 조금 넘었다. 삼촌을 떼어낸 유마가 속 시원하든 듯이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우리 걸어가 볼까. 차가 준비됐다는 삼촌의 제의를 유마가 뿌리치고 나오면서 말했다. 그래요. 당신 팔짱을 끼고 인사동을 걷는 기분이 남다르죠. 파리에 가면 이 순간을 떠올리고 싶어요. 점례가 유마의 팔을 잡았다. 미안해, 삼촌은 아버지보다 더해. 자식이 없거든. 그래서 나를 아들처럼 다뤄. 아니 그 이상으로. 그러니 기분 상했어도 풀어, 원래 삼촌이 그런 사람아니라는 것 알잖아. 알다 마다요. 일년을 같이 살았는데요. 그래도 오늘은 좀 심했어. 점례는 그렇게 말해주는 유마가 고마웠다. 남산여관의 불빛이 졸린 듯이 깜박였다. 저기가 독립군들이 자주 묵는 여관이라더군. 저기요. 점례가 유마가 가리키는 쪽을 보며 물었다. 남산여관이라. 당신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신문에 간혹 나오거든. 형사들이 인사동 남산여관을 급습해 불량선인 셋을 체포했다. 이런 기사가 나와. 전 몰랐어요. 주인이 아마 여자라고 들었어. 여자도 독립운동을 하나요. 여자라고 깔보지 말아. 조선 여자들 독한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잖아. 전 몰라요. 어서 지나가자요. 우릴 독립운동하는 부부로 보고 어둠 속에서 형사들이 뛰어 나올지 몰라. 형사라는 말에 점례는 잠깐 몸을 움츠렀다. 난 쫓기는 몸이야. 휴의가 말했었나. 형사에게 쫓기고 있어. 틀림없어, 그가 말했어. 어서 지나가요. 기분이 으시시해요. 공동묘지에 온 느낌이랄까. 뭘 그렇게 놀래. 독립운동 하는 여자처럼. 그런 비유가 어디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다 운동하는 사람들인가요. 둘이 종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행인이 줄어든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들을 따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휴의였다. 그는 점례와 단둘이 있을 짧은 시간을 얻기 위해 기자회견 장 근처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점례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어떻게든 조선에 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총독 일행의 일정을 확보해야 한다. 휴의는 그러나 그런 임무 수행보다는 점례의 팔이 다른 남자의 팔을 끼고 있는 모습에 신경이 더 쏠렸다. 뒷모습 만으로도 충분히 점례를 인식한 휴의는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색을 자신에게도 숨겼다. 이번 일이 끝나면 모든 것과 작별하리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영원히 이별이다. 점례도 완용도 여순도 다 잊자, 잊어 버릴꺼야.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이렇게 다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내가 죽든 살든 이번일이 마지막이다. 점례와도 그렇다. 휴의는 러시아를 염두에 두었다. 러시아라면 괜찮아. 내가 어려울때 숨어 지낸 곳이니까. 그곳에 계신 페치카가 그리웠다. 난로. 언 손을 녹여주던 인자한 눈빛. 그는 동포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따뜻한 내장탕을 주었다. 최재형 선생님, 잘 지내시죠. 벌써 죽은 목숨이지만 여전히 내 가슴속에는 살아 있어요. 학교를 무려 32개나 세우셨지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쓰라고 내셨고요. 왜 그랬어요. 독립이 뭐라고. 그러지 않았으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도망다니시고 우스리스트에서 잡혀 순국할 일도 없었잖아요. 조국이 뭐라고. 태어나면서부터 두 어깨에 지고 나셨어요. 저는 선생님의 반에 반도 미치지 못해요. 그리고 저는 선생님처럼 죽을 때까지 이 짓은 못하겠어요. 누차 말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선생님, 이번 작전을 끝으로 선생님을 한 번 뵈러 갈게요. 운동이 아닌 여행자로요. 그리고 막걸리 한 잔 따라 올릴게요. 그럴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세요. 

휴의가 그런 상념에 빠진 것은 어떤 운명의 힘 같은 것이 자신을 다른 곳으로 끌고 있다는 확신때문이었다. 왜, 감이 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 감은 자신은 이제 이 일로 부터 떨어져 있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심신의 피로나 안전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소임은 이것으로 끝났다. 완전히. 높은 곳에 사는 제우스의 신탁 같은 것이고 하느님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다.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의 사명이었다. 이 일만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완전히. 휴의는 마지막 임무 수행을 위해 점례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리라고 하니 왠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라스트 댄스는 화려해야 한다. 춤을 잘 추고 싶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끝이 좋으면 시작과 중간의 과정이 험란했어도 행복하다고.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휴의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을 끌어 들였다. 자신을 도와 달라고. 딱 한 번 남았다고. 그래서 인지 기자회견 장에서 점례가 한 말이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되레 이해한다는 심정이었다. 조선독립을 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물론 있다. 당연히 한 사람 이상이고 그 이상에 자신도 포함돼 있다. 그녀의 다부지고 똑부러진 대답을 듣고 역으로 휴의는 조선독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반증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그는 회견장에 조금 늦게 들어와 점례가 그 말을 마치자 마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마터면 듣지 못할 그 말이 왠지 어떤 좋은 징후로 다가왔다. 그런 마음으로 호텔에 도착한 그는 바로 엘리베이터 대신 회견장 옆의 계단을 이용해 윗층으로 몸을 숨겼다. 그도 조선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삼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피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비상 계단의 푯말이 보였고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엘리베이터로 가던 걸음을 틀었을 뿐이다. 계단을 오르면서 휴의는 이러기를 잘했다고 자신에게 칭찬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 밀착하다 보면 못보던 것까지 볼 수 있고 변장한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완용도 그 자리에 있었다.  완용은 오늘 일진이 좋지 않았다. 서둘렀으나 기자회견 끝무렵에 호텔에 도착했다. 오후에는 헌병대사령관이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 찾아서 갔다왔다. 사령관의 질책을 생각하고 완용은 인상을 치푸렸다. 그렇게 잘 났으면 네가 체포하지, 왜 날 야단쳐. 왜놈들은 남에게 핑계를 잘된다고. 완용은 씩씩 거렸다. 일층 커피숍은 적당하게 사람들로 붐볐다. 완용은 휴의의 존재를 가까이서 느꼈다. 기자회견장에도 놈은 분명 왔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둘은 또다시 만나는 것을 뒤로 미뤘다. 체포당하거나 빠져 나가는 것을 만난다고 표현하니 죽마을 옛친구의 해후 같다는 느낌이 완용에게 들었다. 어쨌든 체포든 아니든 만나는 것은 만나는 것이다. 만나지는 못했어도 완용도 휴의처럼 얻은게 있었다. 점례가 마지막으로 한 말 조선독립에 대한 그의 확고한 태도 다시 말해 조선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 있나요. 하는 대목이었다. 휴의와 완용은 동시에 그 말을 들었으나 움직임은 휴의가 한 발 빨랐다. 늦게 왔으니 조금 늦장을 부린 것이 휴의를 놓친 이유인데 완용이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그렇지, 점례라면 그럴거야하는 기대가 들어 맞은 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만족한 것은 완용뿐만이 아니었다.

공개석상에서 한 그 말은 다음날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조선 제일의 여류화가 귀국 일성, 조선 독립 필요 없다였다. 굵은 글자로 세로 두 줄로 밝힌 신문을 유마가 보았다. 이것 좀 봐, 역시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그는 점례에게 신문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점례가 받아들고는 예술이 주가 아니라 정치가 그 자리를 차지했네요. 다행히 우리 사진 밑에 그림이 실려 있어요. 점례가 만족한 듯이 말했다. 잘됐어. 이 정도면 만족이야. 그런데 모레 있을 총독님과 만찬에 당신도 참석할 거지. 당연하지요. 당신만 좋다면요. 아니면 불편한 자리라고 생각되면 저는 빠질게요. 아냐, 무슨 소리. 유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없는 만찬은 의미가 없을 거요. 당신은 그 자리에서도 주인공이 틀림없어. 당신만한 미모가 어디 조선땅에서 찾을 수 있겠어. 총독도 보고 싶어할 거야. 미모 때문이라면 사양할 게요. 그렇다면 취소. 미모가 아니란 말인가요. 그래, 알아서 판단하시고. 조선 최고의 여류 화가의 귀국 첫 일성이라. 과연. 기자들의 야마 솜씨는 대단해. 당신도 그에 못지 않아요. 기자질 해보시는 것 어때요. 매일신보 정치부장으로. 시험 같은 건 필요 없잖아요. 특채로 들어가서 필명 한 번 날리시지요. 그만. 거기서 그만. 난 기자질 관심없어요. 소설 쓰기도 바쁘다고. 조선 제일 여류화가의 귀국 첫 일성이라. 유마가 점례의 기자회견장 말투를 흉내내면서 다시 추어 올렸다. 거기다가 미모까지. 나라면 반드시 미모를 넣었을 거야. 그러지 말아요. 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다만 당신이 사준 모자를 쓰고 간다면 부족한 면이 조금은 커버 되겠지요. 좋을대로. 그런데 장소는 어디에요. 응, 아직 통보받지 못했어.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총독부에서 연락이 오겠지. 준비하는데 아무래도 신경쓰겠지. 높으신 분들이 다 참석하는 모양이야.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아니 당신 때문이지, 다 당신을 보려고 몰려드는 거야. 그 얘기라면 그 정도면 됐고요. 그나저나 당신 오늘 뭐, 일정이 있어요. 없다면 화신백화점에 들러볼까하고요. 당신 양복 좀 하나 사게요. 조선 날씨가 좀 쌀쌀하네요. 동복이 필요해요. 그에 어울리는 코트가 있어야 하고요. 그러지, 뭐. 간 김에 당신 옷도 하나 사구려. 조선 옷 품질이 어떻지 모르지만. 본국에서 수입한 것도 많이 있을 거에요. 서양옷도 있을거고. 조선에서도 모던 걸들이 많이 생겨나거든. 모르지요. 여기서 파리의 옷을 구입하게 될른 지도요. 조선에서 보는 메인드 인 프랑스라. 기분이 어떨까. 이런 말들이 오고 갈 때 휴의는 3층 자기 방에서 미리 준비한 변장품으로 몸을 조금 더 바꿨다. 흰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모자를 벗고 대신 안경을 썼다. 어두운 풀테 안경은 그를 더 늙은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지팡이를 챙기고 신문을 들었다. 누가 봐도 노신사였다. 거울 앞에서 휴의는 가진 게 엄청 많아 죽기 전에 다 쓰고 가겠다는 부자 다운 거드름을 보였다. 이 정도면 조선호텔에서 지낼만 했다. 어제는 점례를 만나지 못했다. 둘이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어 좀처럼 틈을 내기 어려웠다. 그는 다시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뒤적였다. 묵직한 커피향이 목에서 멈추더니 입안으로 가득퍼져 나갔다. 신문을 놓고 다시 잔을 들었다.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것은 몸을 타고 뜨거운 기운을 남겼다. 점례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앞에 앉아 점례와 커피맛을 서로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부터 휴의는 그것을 꿈꿔왔다. 누구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점례 아닌가. 오래전부터 점례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에 휴의는 빠졌다. 목울대를 타고 내려간 검은 액체가 인사동에서 입맞춤 할 때처럼 뜨겁게 달아 올랐다. 아, 어쩌란 말인가. 흩어지는 이 마음을. 휴의는 동요했다. 그러나 다시 신문을 들고 점례의 기사를 읽었다. 읽고 또 읽어 아예 문장을 외울 정도가 됐다. 그는 완용 패거리와는 다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변절한 것과 살기 위해 하는 단순한 말과는 다르다. 그는 이미 점례를 이해했다. 감히 용서할 자격은 없다. 용서라니 가당치도 않다. 점례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민초들의 그런 말은 나라를 팔아 먹은 조선의 고위 관료들과는 다르다. 여기서 잠깐, 점례는 민초인가. 조선 최고의 여류화가가. 더구나 그 옆에 앉은 이는 만주군 대장 출신이며 일본 내무대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점례가 민초이면. 휴의는 고민을 접고 점례를 그 범주에 넣고 있다. 팔은 역시 안으로 굽고 있었다. 

기득권 세력은 일본인이며 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조선인들이다. 그에 비하면 점례는 어떤가. 그는 정치나 제 백성을 억압하는 다른 분야의 하수인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점례는 조선에서 녹을 먹은 게 없다. 되레 그를 팔아 먹은 것은 조선이다. 지금은 일제로 부터 보호를 받고 있지만. 내가 점례를 판단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자 점례가 더 그리웠다. 죽마을 해당화 핀 하얀 백사장을 다시 걸을 날이 올까. 달려나갈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면 좋겠지만 그걸 지금은 기대할 수는 없다. 그녀가 내려오면 좋겠다.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으로 가뿐하게 걸어와서 내 앞에 앉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녀는 오지 않고 있다. 내 가슴은 이렇게 타들어 가는데 점례는 그걸 모른다. 휴의가 휴우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웠다. 그래 모자, 그 모자가 어울렸다. 파리에서 살아도 그녀는 부족함이 없다. 말은 또 얼마나 잘하는가. 무대위의 주인공이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글자에 박힌 눈을 휴의는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눈을 아래로 돌렸다. 흑백으로 흐릿했으나 아래의 여자와 위의 남자는 행복해 보였다. 하늘을 날고 있는 듯이 아니면 꿈속을 여행하는 듯이 두 사람은 순결했다. 남자가 그가 아니고 나였으면, 휴의는 점례가 그린 그림 감상에 빠져들었다. 폭파 전문가의 강인함은 어디가고 여인을 사랑하는 심약한 남자가 바로 휴의였다. 내게 폭파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점례다. 생각은 더 앞서 나갔다. 삼엄한 감시의 현장보다 더 삼엄해진 머릿속이 어지럽다. 가슴이 아프다. 이 아픈 가슴을 어쩌란 말인가. 휴의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인데 나는 어찌하여 이리 살고 있는가. 왜 이리도 위험한 일에 끼어들었는가. 조상이, 나라가 내게 준 것이 있고 그래서 내가 갚아야 할 빚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도 없다. 아무리 기억해도 없는 건 없다. 아버지는 밭을 갈았다. 돌 밭을 일궜다. 한 겨울 얼은 땅을 팠다. 곡괭이가 튀어 올라도 아버지는 그렇게 일했다. 그런데도 굶주렸다. 아버지는 왜놈 광산에서 허리한 번 펴지 못하고 곡괭이질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 휴의는 애통했다. 따뜻한 밥 그릇 대접하고 싶다. 나는 왜. 불구덩이에서 빠져 나오질 못하나. 난 러시아의 페치카가 아니다. 그 많은 재산을 다 독립자금에 쓸 수 없다. 나에게는 그런 강인함이 없어. 안중근 선생이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지. 배후를 대라. 불 달군 쇠붙이 앞에서도 그는 끝내 최재형이 뒷배다라고 불지 않았다. 그 분만큼은 지켜 주고 싶었을까. 그만큼 인격자였을까. 발끝만큼도 난 그분들을 따라갈 수 없어. 난 흔들려. 늘 그렇다고. 이러는 나를 부모님은 이해하실까. 칭찬할까. 꾸중할까. 아니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할 만큼 성장했다. 가는 길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다. 마지막이다. 이번이. 이 일로 나는 은퇴한다. 독립운동을 떠난다. 그와 동시에 운동을 할 필요없는 독립된 나라가 온다면 좋겠다. 그러면 나아질까. 일본이 물러가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면 우리같은 서민들의 삶은 좋아질까. 배부르고 등 따뜻할까. 오늘 따라 휴의는 마음이 구부정해졌다. 감출 필요없다.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을 굳이 숨길 이유없다. 나에게 조차 그런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따지지 말자. 그러다가 나를 때리고 싶을 지도 몰라. 그냥 내 욕망을 간직하자. 드러내지는 말고. 그건 나쁜 게 아냐. 그게 나야. 나 아닌 나를 내가 생각할 수 없다. 이는 결코 왜곡된 시선이 아니다. 그러니 성공해야 해. 꼭. 나의 집념은 집요해. 지난번엔 살았어. 하지만 이번에도 그러지 못할거야. 총독의 운명은 끝난 거야. 안 그래. 안 그렇다고. 그럴리 없어. 그런 의문을 가질수록 휴의는 간절한 마음이 깊어졌다. 반드시 성공하리라. 점례가 내려온다. 그것도 혼자다. 여기로 온다. 바라던 바다. 커피를 시킨다. 지금이 기회다. 다가간다. 아니다. 완용이다. 시커먼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권총을 잡는다. 아니다, 아냐. 눈에 보이는 것은 뿌연 담배 연기뿐이다. 점례는 어디 있는가. 왜놈 완용은. 휴의가 일어선다. 너무 오래 앉았다. 남들 눈에 띈다. 지팡이를 짚고 안경을 고쳐 섰다. 허리를 펼 일은 없다. 걸음걸이도 석연치 않다. 그러나 옆에서 누가 부축할 정도는 아니다. 덕수궁이나 들러볼까. 시간을 좀 죽이다 점심을 먹고 다시 들어와서 커피를 먹자. 삼일간 방을 예약한 손님 처럼 행동하자. 여기저기 궁금한 곳이 있나 두리번 거리면서.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부자아들과 조선나들이를 한 차림으로 내 모습 어때요. 독자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다. 이 정도면.  의심살 만 한 것은 없지요. 휴의는 오후에는 대원 한 명을 만나기로 했다. 바로 부자 아들이다. 그러기 전에 점례가 왔으면 좋겠다. 바로 이순간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녀가 온다면, 그것도 혼자 온다면 더 없는 기회다. 할 말은 이미 준비됐다. 점례야, 나 휴의다. 총독 일정을 말해줘. 그것이면 충분하다. 딱 두마디. 혹 유마가 본다해도 길을 물어봤다고 둘러대면 의심살 만한 행동은 아니다. 누구야. 처음보는 늙은이가 길을 묻네요. 참 어리석기도 하지. 내가 경성에 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신경쓰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자. 그래요. 오늘 재수가 어쩔려나.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약속장소를 아는 것이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이다. 폭약을 설치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눈치채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 전에는 아니면 10시간 전 쯤에는 알아내야 한다. 정보가 늦을 수록 어렵다. 경계는 더 강화된다. 작전실패. 아찔한 현기증에 휴의는 머리에 손을 댔다. 모자를 고쳐썼다. 무도한 일제, 합병은 강제로 이뤄진 것으므로 불법이다. 전쟁에서 지지도 않았는데. 서류 한장으로 끝이라고. 광복군 사령관의 임무는 그 서류를 찢는 것이다. 광복군 사령관. 휴의는 조선 파병시 임정 선생에게서 받은 광복군 사령관이라는 직책이 마음에 들었다. 더 올라갈 수 없는 곳. 그래서 책임이 더 막중하다. 행동은 물론 마음도 진중해야 하는 이유다. 종이쪽지를  찢지 못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를 처단하면 된다. 이리 찢으나 저리 찢으나 찢는 것은 마찬가지다. 들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휴의는 마치 자신이 이순신 장군 다음가는 인물과 같은 무거움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영웅인가. 나는 소영웅인가. 아니면 그것이 되려고 안달하는 관심종자인가. 아니다. 나는 그냥 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존재하지만 금방 사라질 운명이다. 운이 좋으면 나는 러시아에 간다. 언젠가 보았던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나의 마음은 포근한 것이었다. 거기라면 잊을 수 있다. 그나저나 조선청년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지린성에서 군사훈련을 한다는데 잘 되고 있을까. 살아서 돌아오면 폭파 요원을 훈련 시켜 달라고 조선청년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었다. 그래야지요. 꼭 살아서 돌아와야지요. 그때까지 단장님도 건강하시고요. 사령관님, 무운을 비오. 그는 자신의 다음 작전은 일본 왕궁에 대한 폭파 공격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놀랐다. 일본 왕궁이라고. 조선이나 대만 총독부도 아니고 일본 왕궁이라고. 정말 배포가 크군. 그 큰 배포가 가만히 방구석에만 눌러 있지 않는다. 나라면. 내 사랑하는 아내가 적에게 능욕을 당하고 쓰러졌다면. 그의 분노를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본은 이빨 빠진 호랑이요. 운이 다했다는 말이요. 그런 자들에게 우리가 당했고,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시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합니다. 미국이 일류고 일본은 이류로 전락했어요. 지금이 적기요. 일본이 무적함대가 아니라는 말이요. 깨트려야 합니다. 적의 본거지, 왜놈들의 아지트를 아작내자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이오. 조선청년은 그 말을 하고는 제법 그럴듯하게 말했다는 듯이 흡족한 얼굴로 휴의를 바라봤다. 일본왕궁을 까야지요. 마음에 드는 표현을 썼다는 만족함이 묻어났다. 휴의는 짧은 시간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와 함께 동경에 갈 생각은 없다. 거기까지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조선청년도 제의하지 않았다. 그 임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야 하고 조선청년이 기꺼이 나선 것이다. 그래서 폭파 교육을 원했구나. 나의 일은 조선총독 하나로 족한데, 이 일을 어쩌나. 손을 떼야 하는데 일거리가 하나 있으니. 에라 모르겠다. 성공하고 나서 판단하자. 휴의는 조선청년과 약속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내 임무는 거기까지고 임정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더 이상 없다고 못박았다. 조선청년의 폭파 훈련은 임정의 명령과는 다른 것이다. 조선청년과 나와의 사적인 약속이다. 그러니 안지켜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때 가서 하자. 임정이 없으면 일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자, 내생각은 일의 성공이후 러시아로 가는 것이다. 거기서 다른 생을 살고 싶다. 누군가 내가 아니라도 남은 일을 할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말을 따르는 복종은 더이상 내 임무가 아니다. 나는 그런 의무를 지지 않겠다. 그나저나 점례는 오는가, 안 오는가. 휴의가 초조함으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8층 특실에서는 점례가 늦잠을 자는 유마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11시에요. 일어나서 커피 한 잔해요. 그리고 국밥 먹으러 무교동으로 가요. 좀 더 자고 싶어. 유마가 평소답지 않게 몸을 틀면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당신 커피 좋아하잖아요. 대답이 없자 점례는 여보, 나보고 혼자 가라고요. 이 낯선 땅에 나를 혼자 두고요. 당신네 나라잖아. 어이없군요. 유마가 다시 이불을 끌어당기더니 곧 다시 내리고는 어젯밤에 내가 무리했어, 당신도 아는 일이고. 점례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런 핑계 말고요. 정말 혼자 갈까요. 그래, 난 당신을 울타리에 가둬 놓는 사람 아냐. 좋아요. 그러면 삼십 분 더 자요. 딱 그 시간 지나면 군말 없기요. 안 내려오면 내가 올라갑니다. 유마 호사카를 남겨 두고 점례는 로비로 내려왔다. 커피숍은 한산했다. 그러나 텅 빈 것은 아니었다. 창가 자리로 열 명 남짓이 띄엄띄엄 앉아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이미 만난 사람들은 담소에 열중이었다. 커피 향은 파리의 기억을 떠올렸다. 맛보기 전에 코로 스며드는 산미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조선에서 프랑스를 느끼다니. 이대로도 괜찮아. 점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볍게 한 모금이 마셨다. 기분이 좋았다. 상쾌한 오전이 오후를 향해 느리게 이동했다. 그녀는 모자에 손에 댔다. 고쳐 쓰려고 하기보다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이 전해지면서 파리 골목길에서 유마와 쇼핑하던 모습이 떠올라 가볍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누구도 그녀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모자를 쓰고 오길 잘했어. 편했다. 얼굴을 다른 사람게 보이지 않으니 여간 편하지 않아. 그래서인지 점례는 마치 이국의 낯선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여행지에서의 기분이 이럴까.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으면 마음이 이처럼 편한 것이다. 점례는 일부러 느긋했다. 기자회견도 무사히 마쳤다. 모레 전시회 준비는 삼촌이 할 것이다. 그림은 다 넘겼다. 자신은 개막식에 참석해 귀빈들을 가볍게 접대하면 된다. 이미 어떤 단어를 쓰고 어떤 표현을 할지 나름대로 구상했다. 그릴 때의 분위기도 머릿속에 다 들어있다. 메인 장소에 걸 작품은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 삼촌과 정한 것이다. 가볍게 스케치한다는 생각으로 했다가 마음에 들어 유화를 여러 번 덧칠한 바로 그 그림. 하늘을 나는 나와 그리고 당신. 점례는 싱긋이 웃었다. 나머지는 삼촌이 배열할 것이다. 전시회가 끝나고 총독 면담도 마무리되면 나는 다시 자유인이다. 기다려라 파리, 내가 간다. 그러나 총독면담이 일정에 걸리자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다가왔다. 유마가 같이 가자고 두 어 차례 말했으니 빈말은 아니다. 총독이라. 기자회견이나 그림 전회와는 다른 분위기다. 엄숙함. 노련한 정치가들과의 환담. 조선 여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점례는 이겨낼 자신이 있었으나 부담감을 떨칠수는 없었다. 난 악세사리였으면 싶다. 그 자리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유마의 옆구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점례는 자신이 입고 갈 옷을 미리 머릿속으로 골라보았다. 분홍색 브라우스. 아니다. 너무 튄다. 보라색에 호박 단추가 장식된 셔츠가 어울릴까. 이것도 그렇고. 치마는, 구두는. 점례는 머릿속에 있는 옷을 객실에서 확인해 볼 작정이다. 입어도 봐야지. 유마에게 어느게 어울릴지 물어도 보고. 옷장 문을 열고 펼친 옷을 들여다 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기자회견장에 입고 간 옷이나 전시회 때 입은 옷을 또 입을 수는 없다. 이리저리 생각해도 옷이 없다. 가방에 다른 것을 챙겨 오느라 옷 넣을 공간이 없었다. 유마가 깨면 화신백화점으로 갈 생각에 점례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불과 로비에 내려온 지 10분 정도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서두르지 말자고 다독였다. 십 분 쯤 후에 올라가도 충분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어떤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유마 호사카 말고 삼촌말고는. 완용이라면. 혹시 모른다. 그 자가 왜. 그러면 자신에게 다가올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있었다. 바로 휴의였다. 그의 첫마디는 점례야, 였다. 점례야, 점례야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점례는 놀라 뒤를 돌아보기 전에 한 번 생각했다. 그리고 몸은 그대로 두고 고개만 약간 돌렸다. 소리나는 쪽에 왠 노인이 구부정한 허리로 서 있었다. 그러나 눈만은 젊은이처럼 초롱초롱했으며 입은 급하고 거칠게 움직였다. 점례야, 그가 다시 한번 점례를 불렀다. 조선총독과 언제 만나니. 빨리 말해줘. 나 여기 떠나야 해. 쫒기고 있는 거 알지. 오래 있었다. 잡힐지 몰라. 점례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어깨에 손을 댔다. 휴의 오빠. 점례는 저도 모르게 가늘고 낮은 소리로 오빠를 불렀다. 그래 나다. 총독은 언제, 어디서 만나니. 점례는 말문이 막혔다. 어서 떠나요. 완용에게 잡혀요. 여기 호텔에 일경이 쫙 깔렸어요. 나도 알아. 그러니 어서 말해. 휴의의 눈빛이 흔들렸다. 호롱불이 창호 문을 여닫을 때 흔드리는 것처럼 초점을 잡지 못했다. 몰라요. 점례는 단호했다. 점례야. 휴의가 다시 애타게 불렀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 널 위험에 빠트리려고 하는 건 아냐.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정말 죽을 죄를 졌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그러니 점례야. 점례가 입을 열었다. 모레 덕영산장 11시 50분요. 고맙다. 점례야. 점례가 일어섰다. 휴의가 손을 잡았다. 우리 저쪽으로 가요. 점례가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구부정한 노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리게 커피숍을 나와 계단으로 오르는 비상구 앞에 섰다. 점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그들 일에만 열중했다. 점례는 노인이 비상구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례가 오자 휴의는 비상구 문을 열고 점례를 먼저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신도 열린 문 사이로 물처럼 조용히 스며들었다.

둘은 격하게 끌어안았다. 누구의 심장이 더 세게 뛰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요동쳤다. 지팡이가 떨어져 구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만요. 그만 해요. 점례가 겨우 입을 떼면서 말했다. 오빠, 이러면 나도 죽어요. 알아. 내가 그걸 왜 모르겠니.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도 그만둘 거야. 네 행복 깨트리지 않아. 너는 네 인생이 있어. 네 인생 살아. 방해하지 않을게. 모레라고. 모레 일본각 확실하지. 알았다. 고마워. 난 간다. 점례가 비상구 손잡이를 잡는 휴의의 손을 잡았다. 내일 전시회가 있어요. 화랑 삼층에서 열리는데 누구나 올 수 있게 개방했어요. 혹시 일정이 바뀔지 몰라요. 아까 말한 장소와 시기는 변경될 수 있어요. 내일 오시면 확실하게 알 거예요. 알았어. 한 번 더 운에 맡기자. 휴의가 가고 나서 한동안 점례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옳은지 나쁠지도 몰랐다. 그러나 점례는 점례였다.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야지, 점례야. 정신, 그래 정신일도하사불성이다. 그녀는 주문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로 계단을 타고 8층까지 올라갔다. 혹여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운동 삼아 올라왔다는 핑계를 댈 생각해 내면서 어느새 숙소 문간에 섰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은 걸어 올라오면서 누그러졌다. 평정심을 찾은 점례는 열쇠를 구멍에 넣기 전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서두를 필요없다.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어찌 이리도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가. 어쩌자고 나는 말했는가. 어쩌자고 나는 그를 돕는가. 당장 유마 호사카에게 이 일을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비밀로 묻어야 하나. 이렇게 생각의 끈이 이어졌으나 점례는 말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신념을 믿었다. 대신 끝나지 않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저주했다. 가련한 내 운명이여. 점례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운명을,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나의 운명을 나직이 불렀다. 유마 호사카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뒤척였다. 나갔다 들어온 점례라고 생각했는지 신경쓰지 않고 다시 이불을 끌어 올렸다. 내버려 두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애써 냉정한 척 해 보았지만 머리털이 쭈뼛하고 올라선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점례는 팔뚝을 쓸어 내렸다. 닭살 돋은 피부가 눈에 띌까 두려웠다. 요동치는 심장이야 감출 수 있지만 몸의 소름은 들킬 수 있다. 창가로 가서 점례는 밖을 내다 보았다. 세상은 무심한 듯이 흘러가고 있다. 강물처럼 그렇게 낮은 곳으로 가는데 어느 순간 범람한다. 역류한다. 내가 지금 반역을 꾀하고 있다. 점례는 그 단어를 생각하고 몸이 더 오싹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판가름이 서지 않는다.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왜 나타나서 내 가슴을 찢어 놓는가. 찢은 것을 다시 꿰맬 재간도 없으면서 왜 그러는지. 점례는 휴의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고 깨진 유리컵이다. 점례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감은 눈은 되레 조바심만 불러 일으켰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점례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나는 쪽으로 갔다. 그런데 벌서 유마가 받고 있다. 그는 몇 마디 하고는 알았다면서 일어났다. 누구 전화예요. 총독부에서 보낸 사람인가 봐. 전화로 해도 될 것을 커피숍에 있다고 잠깐 보자고 하네. 여보, 잠깐 나갔다 올게. 세수라도 해야지요. 아냐, 됐어. 유마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점례는 얼른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아 주었다. 눈곱은 떼고 가야지요. 아무래도 총독부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는데요. 유마 호사카는 찬 물기를 느끼며 인상을 치푸렸다. 됐거든.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싫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금방 올라 올 거지요. 어, 당신은 외출 준비나 하고 있어. 나가서 점심 먹고 화신백화점 가야지. 그의 등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유마가 나가자 점례는 안도의 안숨을 쉬었다. 그게 안도할 일인가. 어쨌든 그가 마주친 내 눈에서 흔들리는 기색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행이다. 아직은. 살면서 그에게 처음으로 속였다. 처음인가. 어쨌든 속이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배신이다. 안도는 커녕 되레 걱정이 앞섰다. 총독부 사람이라고. 처음에는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용이 불러낸 것일까. 아니면 헌병대사령부에서 휴의를 체포했나. 별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유마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나. 이럴수록 침착해야지. 점례는 막사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겨냈다. 이겨냈다고. 점례야, 정신 차리자 응.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려웠던 경험은 새로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이 된다. 허둥대지 말자. 소인배처럼 당황하다가는 일을 망친다. 그림이고 뭐고 다 끝장이다. 그녀는 옷장을 열었다. 좀약 냄새가 밀려 나왔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바로 손을 들이 밀어 옷을 꺼내 들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몸에 대봤다. 어울렸으나 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다른 색깔의 옷이 필요하다. 어제 입은 옷말고 다른 옷. 화신백화점은 어떤 모습일까.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다. 고급지다고 했다. 서양의 어떤 백화점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유마는 줄곳 조선에 가면 그곳에 가서 쇼핑을 하자고 노래 불렀다. 점례는 다시 옷을 걸어 두고 옷장 문을 닫았다.

쇼핑에 집중하자. 아니다. 그녀는 전화기 옆으로가 메모지와 연필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창가에 앉았다. 슥슥 그려 나갔다. 거침이 없었다. 어느 새 유마의 얼굴이 그려지고 수건을 든 점례가 다가가 그의 물기 묻은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이 완성됐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유마가 들어왔다. 그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점례는 그의 표정에서 무슨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나가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누구에요.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레 일정은 전에 말한 일본각 있지. 거기서 정오에 하기로 했어.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오라가라 해. 그래도 전화로 하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총독님이 신경 쓴 것이니 고맙게 받아요. 그러면 자기들이 올라와야지. 그게 더 피곤해요. 치장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나까지. 그렇다는 듯이 유마가 빙그레 웃으며 여보, 어서 준비해. 나갑시다. 오늘은 돈 좀 써야지. 당신 옷도 사고. 내 옷은 됐어요라고 말했으나 점례는 자신도 사야겠다고 이미 마음속으로 굳혔다. 유마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소리는 웃었지만 실제로는 웃지 않았다. 그가 만난 사람은 점례가 예측 범위에 두었던 종로서장 완용이었다. 그는 휴의가 점례와 내통할 거라는 첩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조심하시고요. 그런 낌새가 보이면 즉시 알려 주세요. 유마님의 안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일본 제국에 관한 일이니까요. 난데없이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려다 유마는 그만두었다. 아버지의 편지가 떠올랐다. 사실이구나. 그러면 어쩌지. 다른 내용은 파악된 게 있나요. 내가 모르는 다른 정보를 갖고 있다면 말해주시오. 아는 것은 것은 숨기지 말고. 그리고요. 종로서장이 몸을 앞으로 움직여 호사카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다. 총독님의 만찬 장소나 시간을 혹시 사모님이 알고 계신가요. 글쎄요. 내가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에 안나요. 잘 더듬어 봐요. 말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안 되겠어요. 장소가 새어 나가면 위험합니다. 휴의 일당이 알아채고 무슨 짓을 꾸밀지 몰라요. 일단 그 일은 다른 전달이 있을 때 까지 함구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나를 만난 것은 아까 전화에서 말씀 드린 대로 총독부에서 왔다고 둘러 대세요. 절대로 종로서를 거론하면 안 됩니다. 조선 이름인 완용역시 금물이고요. 감이 안좋아요. 잡힐 듯이 안 잡히니 애가 타요. 아니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천하의 종로서에서 휴의가 뭔가 하는 독립운동한다는 놈팽이 하나 행방을 모른다니 말이 됩니까. 호사카가 벌컥 화를 냈다. 종로서장이 납작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각하. 그만 두시오. 호사카가 입맛을 다시면서 이럴 시간 있으면 나가서 빨리 그 자를 체포하라고 눈을 부라렸다. 마치 상관이 부하에게 하는 듯한 말투며 행동이었다.

군인 시절로 잠깐 유마 호사카는 돌아갔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찾고는 장소를 그 자가 사전에 안다고 해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톤을 낮춰 물었다. 출입하는 사람의 신원 검사를 철저히 하고 미리 안전 장치를 해 놓으면 될 거 아니오. 총독님이 초대하는 인원은 우리 둘을 포함해 겨우 10명 정도인데요. 그 정도 인원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한다면 종로서 존재 이유가 뭔가요. 따지듯이 묻는 말에 완용은 시선을 피하면서 휴의라는 자는 미군 폭파 교육을 받은 자로 단순한 암살범과는 다르다고 했다. 알았어요. 그건 됐고요.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비밀을 지키라는 것 말고 또 있어요. 없습니다, 각하. 이제는 내 마누라까지 의심하라는 말이군. 이거 참. 유마가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완용이 명령을 받은 부하처럼 똑부러지게 말했다. 그러더니 자신도 목소리를 낮춰서 조용히 말했다. 정보쪽에 있었으니 잘 아시겠지만 혹 사모님이 수상한 행동을 하면 다그치지 말고 연락을 주시거나 뒤를 좀 봐주세요. 아무래도, 뭐요. 이제는 어, 나보고 휴의를 체포하라는 말인가요. 아예 서장 완장을 나에게 넘기고 말하시오. 일거리를 주겠다. 노는 꼴을 못 보겠다가 이 말씀인가요. 그건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리다. 내가 잡아서 갔다 드리지요. 이제 됐소. 화가 난 호사카는 빈정거리면서 완용과 헤어졌다. 유마는 많은 생각을 했으나 하나의 원칙만은 분명했다. 오늘의 일을 일절 함구할 것. 그러나 걸리는 게 있었다. 아까는 했는지 안했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생각해 보니 분명히 약속장소를 말했다. 호사카는 점례처럼 이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의 오후 일정은 변하지 않았다. 둘은 화신 백화점에서 각자 두어 벌의 옷을 샀다. 호사카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거듭된 점례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했다. 저를 봐서라도 좀 사세요, 네. 그래, 알았어. 당신의 기품에 맞춰야지. 조선 최고의 화가. 그 말은 아니고요. 어쨌든 그렇다면 그래야 겠어. 그리고 당신은. 저는 됐어요. 여보 나를 봐서라도 좀 사. 내가 누군지 알잖아. 내부대신의 아들이라고. 유마 호사카가 나야. 난 전직 일본 대장이라고. 당신 체면만 있고 내 체면은 없나. 알아 모시겠어요.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휴의는 인파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덕영산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명의 동지들이 멀찍이서 따랐다. 인왕산 아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그러나 그걸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 산 아래에 우뚝 선 프랑스 식의 건물은 바로 눈에 띄었다. 한 눈에 보아도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친일파 중 친일파가 쓰는 별장이었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 궁궐보다 큰 집을 지었군. 이 자는 왕실 외척으로 이왕가를 호위하다 조선을 배신했어. 그 대가로 일제로 부터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까지 해먹었어. 좋아. 총독의 옆자리에 앉거라. 내가 한 방에 날려주지. 휴의는 앞서갔다. 두 명의 대원이 따로 따로 따라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지리 파악에 나섰다. 주변의 허름한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을 더 가자 그야말로 대궐같은 한옥이 줄지어 나타났다. 세어 볼 필요도 없다. 99칸이다. 그 자의 첩이 사는 집이었다. 첩이 이 정도 살림이면. 휴의는 입을 벌렸다가 이를 갈면서 다물었다. 이것도 날려줄까. 아니 이건 불을 확 질러 버려야지. 폭약이 아깝다 아까워. 덕영산장이라, 이름값을 하는군. 산장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박았어. 대단한 놈이야. 부끄러운 줄을 몰라. 점례는 믿어야지. 덕영 산장이라. 일본각의 다른 이름이라고. 거짓말은 아닐거야. 확실해. 내가 보았거든. 거짓말 하는 눈은 흔들려. 그녀는 고정했거든. 나를 향한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어. 아냐, 거짓일지도 몰라. 그간 세월이 많이 흘렀어. 예전의 점례가 아니라고. 그 정도 연기를 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덕영산장을 지나칠 순 없어. 한데 이 많은 건물중 어느 건물에서 만찬이 열릴지 알 수 없었다. 모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야 하나. 그건 불가능해. 들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너무 많아. 발각될 거야. 불행의 그림자가 뒷목을 강하제 잡아 당기고 있어. 전진은 죽음이다. 일단 철수하자. 분위기를 알았으니. 

그러기를 잘했다. 뒷목을 당기는 것은 바로 종로서나 총독부 요원들의 매서운 눈초리였다. 그들은 안전 점검을 위해 덕영산장을 살피고 있었다. 괴한들이 침입한다면 침투로가 어디일지 가늠했다. 그리고 퇴주로는. 군경이 합동 훈련을 짜고 있을 때 휴의는 올라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내려왔다. 수상한 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그는 변장한 옷차림을 살피면서 길을 걸었다. 옷 색깔로만 본다면 산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어디갔다 오느냐고 물으면 산에서 방금 내려왔어요, 하면 될 것이다. 왜경은 수상하다 싶으면 이유 불문 체포하고 있다. 이 정도면 안심이지. 오늘은 행운이 내 편이야. 마음이 평온해. 뒷목을 당기는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어. 이제 걱정 대신 작전을 짜야지. 평지에 도착한 휴의는 들어가기로 작정한 건물을 앞 뒤로 둘러 봤다. 그리고는 곧장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통의 소란한 소음이 조금 잦아 들었다. 두 대원과 함께 그들은 점심으로 순대국밥을 시켜 놓고 앉았다. 그래, 동지들 보기에 어느 건물에서 만찬이 이뤄질 것 같소. 글쎄요. 서양 건물일 것 같기도 하고 한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대장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도 감이 잘 안와. 어떤게 맞을지 모르니 두 군데에 할까. 모험은 성공하기 어려워요. 다른 대원이 말했다. 확률이 낮은 게임은 안하느니만 못해요. 그걸 누가 모르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휴의는 든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대원은 믿을만 했다. 그 때 주모가 막걸리를 들고 나왔다. 안주는 필요없으신가요. 밥하고 먹으면 됩니다. 김치 조각 몇 개를 내놓으면서 주모가 사정하듯이 말했음에도 휴의가 이렇게 말했다. 원래 우리는 낮 술은 안해요. 그런대도 형편을 봐서 팔아주는 겁니다. 대원 중 키가 작은 하나가 받았다. 세분이니 안주를 시키시면. 푸짐하게 주신다고요. 힘없는 표정의 주모 얼굴이 확 펴졌다. 그래, 하나 주시오. 알아서 주시오. 젊은이들 고맙소. 선행을 베풀었으니 복 받을 만 해요. 주모가 덕담을 했다. 그러면서 아들 하나 있는 것이 병이 났는데 치료비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알았어요. 대신 푸짐하게 주시오. 네, 어련하겠어요. 아들말에 풀이 죽었다가 팔아준다는 말에 또 생기가 돌았다. 메밀 전도 하나 추가요. 신사분들, 정마로. 속아서 살았나요. 그게 아니라. 신이 난 주모는 순대를 싹뚝싹뚝 소리가 나게 잘랐다. 그리고 끓는 기름에 미리 준비한 반죽을 집어 넣으면서 흥얼 거렸다.

기왕이면 맛나게 해주시오, 주모. 음식 솜씨는 내가 시장통에서 최고지요. 저기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간혹 온다니까요. 목을 빼고 주모가 총독부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이틀 후에는 가게를 못 열어요. 먹고 싶어도 내 음식 맛 못본다니까요. 글쎄 덕영 산장으로 오라고 하지 않겠어요. 일본각이라고도 하는. 그곳에서 음식 준비를 하는데 제가 뽑혔지 뭐예요. 무슨 말인가요. 덕영산장이라니. 대원 하나가 그 말에 반색하면서 물었다. 아, 글쎄 총독님이 간혹 사람을 초대해 만찬을 하는데 그날이 바로 이틀 후 라고요. 돈은 떼먹지 않아요. 넉넉히 주지는 않지만. 그것만 해도 황송하지요. 그렇군요. 거기라면 건물이 두 개인데 주로 식사는 어디서 해요. 왜, 그 서양식의 멋들어진 건물있잖아요. 거기서 만나 커피 먹도 일본 과자 먹고 자기들끼리 무슨 회의 같은 것을 하고요. 그런 다음 식사는 한옥 집으로 옮겨서 해요. 그곳에서 먹어야 맛이 있다나요. 그럴 테지요. 내가 총독이라도 한옥에서 먹지요. 휴의는 방금전에 자신들이 염탐하고 온 덕영산장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런 우연이 있나 하고 귀를 기울였다. 거기라면 나도 알고 있소하려다가 얼른 멈췄다. 어디서 연락을 받았어요. 쉿, 이건 비밀인데요. 총독부 사람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주책없이. 주모는 자신의 입을 주먹으로 치는 시늉을 했다. 어제 저녁에 와서는 열명 분 정도 주문을 넣었어요. 그리고 선불도 조금 주고 갔어요. 그렇다면 행사는 틀림없이 열리겠군요. 그럴 테지요. 참 맛있네요. 주모, 여기 있소. 우린 또 돈을 벌러 가야해요. 좀 여유있게 드시지 하고 만류하는 주모의 등뒤로 휴의는 말했다. 노가다 하는 사람들이 여유가 어디 있나요. 잠깐 앉아서 먹고 그러지요. 여기 잔돈은 아들 치료비에 보태 쓰시고. 아유 그 쪽도 형편이 어려울 텐데. 그 말을 하면서도 주모는 손을 뻗어 받은 돈을 얼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대원들은 신속히 시장을 빠져 나왔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전망이다. 한옥이라면 폭약도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설치도 쉽다. 전선 처리도 어렵지 않다. 휴의는 신이 내편이라도 된 듯이 흡족한 마음이 됐다. 정리가 되자 점례가 떠올랐다. 그녀를 만나고, 첫사랑 점례를 만난 것이 신의 한수가 된 것이라고, 그녀는 내 사랑이며 삶의 은인이라고 휴의는 거듭 감사했다. 행운의 여신. 그녀의 손, 그녀의 입술 그리고 가련한 그 눈빛,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지금은 비록 유마와 같이 있지만 언젠가 당신에게 달려 갈게요. 휴의는 점례의 그렁그렁한 눈에서 그런 말뜻을 읽었다. 자, 장소도 알았으니 할일을 해야지. 디데이 전날 밤 출동이다. 한 시간 안짝이면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할 수 있다. 줄을 감고 달린다. 타이머를 장착한다. 다 됐다. 버튼. 그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기와지붕이 천지사방으로 날아간다. 그와 동시에 지붕이 폭삭 가라앉는다. 비명. 엄청난 먼지가 폭풍우속의 눈처럼 날린다. 그러면, 휴의는 그 장면에서 생각을 멈췄다. 전시회는 어쩌나. 위험을 무릎쓰고 가야하나. 아니면 변경될 장소가 아니라는 확신이 선 만큼 그대로 시행할까. 휴의는 두 대원에게는 이런 심란한 의중을 말하지 않았다.

쇼핑을 마친 유마와 점례는 호텔로 돌아왔다. 산 옷은 마음에 들었다. 백화점에서 만족했지만 돌아와서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한 번 입어 볼게요. 방으로 들어간 점례가 다시 거실에 나타났을 때 유마는 옷이 날개처럼 그녀의 양어깨에 착 달라붙은 것을 보았다. 옷이 날개라더니. 당신 정말 천사 같아. 칭찬인가요. 물론, 말이라고 해. 당신도 한 번 입어봐요. 난 괜찮아. 벗고 입는 것이 귀찮아. 알았어요. 남자들이란. 그 말을 하고 점례는 아차 실수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난 그런 표현 싫어해. 보통의 남자와 나를 섞어 넣는 거 말야. 비교하지마. 미안, 미안해요. 내 실수에요. 인정. 점례는 부지불식간에 나온 말 때문에 조금 미안했다. 그럴 의도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런 것을 마음에 담아둘 그가 아니었으나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지, 생각했다. 대놓고 그는 말했어. 나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고. 당연하지.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비교대상이 될 수 있어. 어떤 누구도 세상의 그 누구도 유마를 대신할 수 없어. 휴의도 아냐. 휴의도 아니라고. 이렇게 해놓고 점례는 휴의라면. 이라는 가정의 단서를 달았다. 휴의의 숨소리가 느껴져. 그가 어딘가에 이 객실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점례는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유마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얼굴을 감춰야 한다. 표정을 들켜서는 곤란해. 당신은 길을 가다 치이는 그런 흔한 남자가 아니에요. 나의 남자가 어떻게 장삼이사와 같을 수 있겠어요. 점례는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몰랐다. 정신적으나 육체적으로나 그는 얼마나 고상한가. 육체는 건강하고 영혼은 순결하다. 그런 그를 그냥 보통명사 남자로 넣었다. 이런 실수가. 점례는 말을 돌렸다. 화제를 바꿔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걸 눈치챘는지 유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보, 아까 그 헌병대원들 조금 심하지 않아. 아, 종로통에서요. 그래. 굳이 채찍으로 때릴 것까지야 있나. 한쪽으로 비키라고 주의를 주면 될 것을. 그러게요. 말로 해서 안 듣는다고 생각했나 보지요. 개, 돼지도 아니고 사람인데 말로 해서 안 될 게 뭐가 있어.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조선독립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이 적어져. 저렇게 대놓고 학대하는데. 그러게요. 좀 심했다 싶었어요. 죄도 없는데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인데. 이건 대일본 제국의 수치야. 내가 총독이라면 이런 식으로 조선을 관리하지는 않을 거야. 힘으로는 잠깐 복종시킬 수 있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거든. 군대도 마찬가지야. 명령은 실행되지만 성과까지 그런 것은 아냐. 인간적으로 감동을 줘야 해. 총독을 만나면 오늘일을 설명해 달라고 해야겠어. 왜 그랬는지. 정말 당신은 휴머니스트. 인정. 더 들어봐. 조선 사람이 다른 민족한테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어, 여보. 그럴 리가요. 더 보기 어려워 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당신처럼 마음이 아팠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못했어요. 당신을 존경해요. 그만, 내가 당신한테 인정받으려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라는 것 알잖아. 사람의 감정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법이거든. 인정해요. 점례가 짧게 말했다. 그런데 인정하고 아랫배에 짧게 힘을 주는 그 순간 뭔가 좀 이상했다.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배 안에서 밖으로 두들겨 대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은 화신에서도 받았다. 옷을 배에 댄 짧은 순간이었다. 상처처럼 배가 부어오른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으나 지금은 달랐다. 임신인가, 아이인가. 달거리가. 점례는 손가락을 꼽았다. 설마, 그럴 리가. 내 몸은 내가 안다. 아이를 키울 만큼 건강하지 않다. 다 부서졌는걸. 산산히 부서져 내렸는 걸. 아기가 자랄 수 없어. 그럴 수 없다고.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지난 번 달거리가. 그러고 보니. 당신 왜 그래, 갑자기 말도 없이 얼굴을 찌푸리고. 내 말이 불쾌한 거야. 노 노, 네버 절대로 아니에요. 배가 좀 아파요. 현기증도 있고요.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그러게요.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점례가 돌아서면서 말투를 바꿨다. 그래도 몰라. 한 번 가보자. 내일은 일정이 없잖아. 전시회 준비는 삼촌이 다 할 거고. 병원에 갔다가 화실에 들르자고. 서로 거리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럴까요. 아니에요. 점례는 왔다갔다했다. 가보고도 싶기도 했고 아니고도 했다.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임신이 확인되면 이보다 더 큰 낭패는 없다. 유마는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결혼한 몸도 아니다. 아이, 여자, 막사. 이런 단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째야 하나. 점례는 자신의 걱정이 다른 모든 걱정에 앞서자 오로지 이 문제 하나만이 자신에게 닥쳐온 것처럼 행동했다.

내일 상태 봐서요. 자꾸 미룬다. 내일 은 꼭 그렇게 할게요. 더는 안돼. 유마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요즘 당신 무리했어. 한시도 쉴 틈이 없었잖아. 내가 커피숍에 간 사이에도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그림을 그리질 않나. 그림은 좋지만. 유마가 그 와중에도 그림에 대한 칭찬을 했다. 이젠 좀 쉬어도 좋아. 연필도 놓고. 그림은 파리에 가서 실컷 그려도 되고. 네, 염려 붙들어 매세요. 아프지 않겠어요. 당신 걱정하는 거 볼 수 없어요. 점례가 혀를 내밀었다 얼른 집어 넣었다. 이리와, 여보. 내가 당신을 열망해. 나도요. 둘은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겠다는 듯이 한동한 선채로 포옹을 했다. 그 시각 호텔 로비에 완용이가 도착했다. 그는 유마가 집을 나갈 때부터 미행했다. 백화점에서도, 마차를 탔을 때도,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 휴의는 점례와 접선 실패다. 그렇다면 오후 늦게라도 반드시 어떤 모션을 취한다. 휴의가 호텔로 온다. 로비에 점례가 나타난다. 둘은 스쳐 지나가지만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찰라의 순간 그들은 서로 말을 섞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완용은 담배를 신경질 나게 비벼 끄고는 마주 앉은 부하에게 네가 휴의라면 지금 어디에 있겠느냐고 물었다. 자고 있겠지요. 완용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없이 쳐다봤다. 같잖다는 태도였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머저리 같은 놈. 주변의 다른 사람이 들어도 상관 없다는 듯이 제법 큰 소리로 그가 말했다. 넌 빠가야. 부하는 지지않고 말했다. 그것 말고 달리 뭐 할 게 있겠어요. 안 그래요. 그물을 쳐 놓고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어찌 움직이겠어요. 바보가 아닌 이상. 대꾸하는 꼬라지 하고는. 완용이 혀를 찼다. 그 놈은 바보 이상이다, 이 얼빠진 놈아. 그래서 그물을 쳐 논 걸 알면서도 돌아다녀. 알았어. 이 빠가야로 같은 놈아. 완용의 거듭된 욕설에 부하는 화가 치밀었으나 대들수는 없었다. 

완용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마를 다시 불러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다른 상황이 없는 상태에서 그에게 다시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었다. 안 돼지, 안 돼. 경 칠일 있나. 그렇잖아도 기분 언짢은데. 그러다가 불현듯 아, 덕영산장.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 완용이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너희들 바로 출동해서 덕영산장 감시해. 드러내 놓지 말고 멀찍이 떨어져서 오가는 놈들을 살피고 의심스러운 자는 바로 체포해. 서 너 명 더 데리고 가라. 여기는 어쩌고요. 나 혼자면 충분하다. 완용은 부하를 보내고 나서 다리를 길게 맞은 의자 쪽으로 뻗었다. 한편 시장을 나온 휴의는 근처 아지트로 급히 몸을 숨겼다. 믿을만 하지. 그 음식점 주모. 휴의는 대원에게 묻는 것인지 자신에게 질문한 것인지 모를 혼자 말을 했다. 일년 전에 한 번 들렀었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네. 그때 군자금 모금을 위해 조선에 왔을 때 여성독립군과 같이 왔었거든. 여성독립군. 그 말을 하고 휴의는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 그녀는 지금 서대문형무소에 있다 이승을 하직했다. 이를 어째. 나 때문이야. 휴의는 눈을 잠시 감았다. 내 잘못이야. 살릴 수 있었는데. 휴의는 주먹을 쥐었다. 그는 동료 대원에게 그때의 일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어때 믿을만 해. 하고 이번에는 확실히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딱 한 번 본걸로는. 다른 동료가 끼어들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어요. 이마가 크고 눈이 가늘고 긴 상이거든요. 광대뼈도 조금 나오고요. 이런 정도면 배신을 잘 하지 않지요. 관상으로 일을 판단할 수는 없어. 일단 다이너마이트를 옮기는 중책이야. 양이 많거든. 한 번에 끝장내야지. 한옥은 물론 옆 건물에 있어도 타격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안전하게 옮겨 놓기는 어려워. 지금쯤 종로서나 헌병대 쪽에서 감시가 들어갔을 거야. 외곽 경비는 물론이고 십여 명이 상주하고 있을지도 몰라. 섣불리 들어갔다가 시도도 하지 못하고 끝날 수 있어. 그러면 억울하지.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주모를 쓰자는 거야. 애초 계획에 없던 일이라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되고 말고. 상황은 수시로 변하고 그 때 그 때 작전은 바뀔 수 있어. 그 자리에서 신분을 밝히고 도움움을 구하지 그랬어요. 너도 참. 농담이었어요. 그래 아무리 급박해도 농담은 필요하지. 하지만 이런 얼빠진 농담은 삼가자. 유머 아니거든. 휴의가 말했다. 

한 번 떠 본거야. 그때 여성독립군 말로는 믿을 수 있는 우리쪽 사람이라고 했어.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 주모도 여성독립군이 부상당한채 체포된 사실을 알고 있어. 그리고 죽은 사실도 알 거야. 생사가 달린 문제를 직접 체험한 거지. 그런데 나를 도와주시오. 죽은 여성독립군과 일한 사람이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나올까. 더구나 주모와는 일년 동안 접촉이 없었단 말이지. 나를 전혀 알아 보지 못해.  아들은 아프고. 그동안 큰 변수가 생겼어. 큰 변수야. 그래서요. 사실대로 말해야지.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아까는 아니라면서요. 기회를 보자는 거지. 그런 다음에는요. 야, 너도 좀 생각이라는 걸 해봐. 묻지만 말고. 저야 시키는 일만 했으니까 그렇죠. 대장님은 지시만 했고요. 알았어. 이번 일이 성공하면 너도 시키는 일을 하게 될 거야. 저도 대장으로 승진하나요. 됐거든요. 다른 대원 하나가 넌 나 다음이야 하고 끼어들었다. 밤이 되기 전에 이따가 한 번 더 들러볼까해.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같이 갈까요. 아니다, 혼자 가마. 너희들은 잠이나 자둬. 그깟 잠이야 잘못되면 영원히 자게 될 텐데요. 이놈이, 재수 없는 소리는. 뭐 먹을 거 있으면 말해라. 싸우지들 말고. 알아서 좀 싸오세요. 대원 하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시각 삼촌은 어떤 그림을 어떤 식으로 배치할지 머리를 짜냈다. 메인 그림은 확정됐다. 외국작품은 안쪽으로 배치할 생각이다. 여러 번 그림을 이리저리 달았다 떼었다를 반복하다 괜한 헛고생 하지 말자고 위치를 정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느 것이나 매단 곳이 어울린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세워 놓은 순서대로 벽에 걸었다. 참 좋아, 조선 천재야.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런 그림을. 조카가 빠질 만도 하지. 조선을 넘어 세계에 이름을 떨칠 거야. 조선에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야. 상판도 그렇고. 삼촌은 이런 말을 노래처럼 흥얼거렸다. 파리 미술전시에는 당연히 일본인으로 이름을 올리겠지. 뭐, 조선이라는 나라도 없어진 형국이니 일본 사람이지, 점례 마사코. 손기정 이후에 조센징으로는 두번째로 세상에 이름을 알릴 거야. 화랑전 우승은 물론이고. 일본인이 해낸 거지. 삼촌은 그림에 넋을 놓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전시회가 끝나면 일본으로 보낼 것과 자기가 가질 것을 구분해 놓았다. 현장에서 사려는 자가 있으면 서너 점을 팔아야지. 꽤 돈이 될 거야. 처음에는 다 팔려고 했으나 욕심이 생겼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 다 가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삼촌의 얼굴이 양옆으로 넓게 퍼졌다. 그런데 휴의라는 놈하고는 왜 연결된 거야. 완용은 또 어떻고. 마치 소설책을 읽는 기분이 들어. 유마에게 언질을 줘야지. 그 놈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니 완용이라는 놈부터 제거하라고. 삼촌의 눈이 번득였다. 건방져. 조센징 놈이. 거칠기만 하지 머리가 없거든. 그런 놈은 토끼 사냥이 끝나면 잡아 먹는 것이 상책이야. 그나저나 점례의 정체를 모르겠어. 그가 어느 편인지. 휴의에 호감이 있는 것은 분명해. 그렇다고 유마를 배신하지는 못 할거야. 그럼, 배신이라니. 당치도 않아. 유마는 결혼을 해야지. 점례는 물론 아니고. 전시회 끝나고 총독님 만찬에 가지고 갈 그림을 챙겨야지. 메인 작품과 그래 저거야. 군복을 입고 욱일기를 들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저 그림. 유마는 별로라고 했지만 총독부에 걸면 기가 살거야. 크기도 그렇고. 점례는 소재 선택에도 탁월해. 여자이면서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유마를 아주 잘 표현했어. 총독이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어떤 그림을 모방했는지 아니면 순수한 창작인지는 몰라도 아무렴 어때. 주인공이 유마고 깃발이 우리 것인데. 오후에 오면 내 전시 솜씨에 놀라자빠지겠지. 하하하. 너만 천재야 나도 천재다. 전시천재. 하하하. 삼촌은 그렇게 웃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는 양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심각한 얼굴을 했다. 휴의라는 놈만 잡으면 되는데. 그러면 다 드러나. 곧 잡히겠지. 문제가 있어도 점례는 빼돌려야지. 유마가 눈이 돌아도 그러면 안 된다. 유마야, 예술을 생각해야지. 정치는 짧지만 예술은 영원한 것 모르니. 파리고 가라. 점례를 데리고 어서 가. 거기서 다 잊어라. 이렇게 달래야지. 순진한 유마는 내 말을 따를거야. 그러면 예전처럼 아무일 없이 점례는 그림을 그릴 거고. 난 돈을 벌고. 하하하. 심각한 얼굴의 삼촌이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카멜레온이 따로 없었다. 

해가 기울었다. 휴의가 밖으로 나왔다. 초저녁에 다시 온 휴의를 주모는 알아보지 못했다. 옷을 바꿔입고 안경을 썼기 때문이다. 허름해 보이는 차림이나 왠지 깔끔한 인상도 드는 복장이었다. 여기 막걸이 한 병하고 메밀전 하나 주시오. 굵고 묵직한 음성에 안쪽에 있던 주모가 황급히 나왔다. 예, 예 대답을 하면서 주모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항아리 속의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았다. 휴의는 젊은이 서 넛이 좁은 시장통을 지나가자 가만히 있기도 뭐해 주모 어서 가져 와요 하고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접대를 그 모양으로 해서 되겠느냐는 핀잔이 섞여 있었다. 주문했는데 나오는 것이 생각보다 오래 기다렸거나 자기보다 늦게 온 사람에게 음식을 먼저 가져다 준 것에 대한 항의 같은 표현이었다. 그러나 나직하고 조용하게 말해 옆 자리에 손님이 있어도 알아 듣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의 주목을 일부러 끌 필요는 없었다. 급히 손을 놀리던 주모가 미안했던지 다시 한번 예예,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요,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도 한 참 미안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청년들은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 주모도 한잔하시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술은 못한다고요. 주모가 술을 못하면 누가 한단 말이오. 휴의가 비운 자신의 잔에 반잔 쯤 따라 주었다. 그리고는 아까보다도 더 나직이 그 왜 그 여성독립군 아시지요. 작년에 같이 뵈었는데요. 주모의 눈이 갑자기 복어의 배처럼 갑자기 커졌다. 아이고 이런. 주모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왔던 그 양반이네. 작년에도 왔었소. 나머지 두 명은 어디 갔소. 어디 가긴. 제갈 길 갔지요. 나를 모르시 겠소. 혹시 상하이에서 보낸 요원이오. 쉿, 휴의가 손가락을 입에 갔다 대는 시늉을 했다. 작년에 여성 독립군과 여기 와서 술을 먹었소. 이제 기억이 나오. 그래요. 어렴풋이. 그런데 왜 또 왔소. 그때보다 지금이 더 위험하단 말이오. 그보다도 안 됐소. 그 여성분, 젊고 얼굴도 예쁘고 싹싹하고 나보고 엄마 엄마하고 따랐는데. 만신창이가 돼서. 주모의 눈이 붉어졌다. 형무소 면회를 가봤소. 휴의가 고개를 저었다. 갈 수가 없지라. 가고 싶어도. 주모가 사투리를 쓰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린 촉촉한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그나저나 왜 또 왔소. 그 말을 하면서 주모가 걱정스러운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옆자리 손님이 일어서 나갔다. 잘가시오. 주모가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길게 뺐다. 그러게요.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좀 도와주시오. 덕영산장에 음식을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요. 그렇게 어제 말했지요. 그 음식 거리는 어떻게 날라요. 머리에 이고 가지요. 잘 됐소. 내가 주는 것을 음식 사이에 넣어서 가져가시오. 그리고 남의 눈에 안 띄게 잘 보관하셔야 합니다. 휴의는 주모의 눈을 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고 검은 동공이 제대로 박혔다. 주모가 눈길을 피하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야야, 동요야, 손님에게 술 한 병 더 내오라. 남자의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젊은 청년 하나가 주전자를 내밀었다. 이름이 동휴요. 아니오 동요. 왼손잡이 군요. 그래요. 그가 슬쩍 휴의를 보더니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꺼리는 듯한 태도였다. 저 애가 손가락을 다쳤어요. 주모가 그 말을 하면서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주모의 눈에 슬픔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휴의는 가슴이 저렸다. 조선에 오기 전에 그는 주모의 내력을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남편이 징용에 끌려가 죽었어요. 어디서 죽었는지 모르지요. 일본 광산이라고 하는데 나고야인지 어딘지도 모르지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이라고 도 했소. 군함도 아니오. 들어보니 그런 것 같소. 맞아요, 군함도. 어쨌든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리고 딸도 그렇게 됐는데. 아마 그렇게 됐을 거고만요. 고향 떠나고 벌써 6년째 소식이 없어요. 다들 죽은 걸로 알고 있어요. 남편 죽고 딸은 생사 불명이 됐지요. 하나 남은 아들이 학도병에 끌려갈 나이가 되자 결단을 내렸어요. 어느 날 자고 있는 아들의 손가락 두 개를 잘랐어요. 고기써는 바로 이 칼로. 주모가 도마위의 토막칼을 들어 올렸다. 총을 쏠 수 있는 오른손이었지요. 이놈마저 죽일 수 없어 그렇게 했어요. 참 독한 사람이지요. 이년이 참 독해요. 어쨌든 그 일로 내 아들은 징용을 피해 살아남았어요. 소문에는 어미를 도와 돼지머리를 자르다 잘못해서 생긴 사고라고 하는데 어미는 그 말을 하면서 피눈물을 흘립니다. 정말 눈물에 피가 섞여 있었다니까요. 여기까지가 휴의가 알고 있는 주모의 살아온 이력이었다. 휴의는 막걸리 한 잔을 더 걸쳤다. 취기가 올랐으나 자신을 방어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만둘 때 딱 그만 두고 자리를 떴다. 할 말을 다하고 들을 말을 다 들었다. 그는 미행하는 자가 없음을 알았으나 혹시나 해서 경희궁까지 갔다가 아지트로 돌아왔다. 주모는 믿을 만 했다. 지난 번 보다 더 강단있어 보였다. 그 시각 점례는 이리저리 잡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제 이틀 남았다. 가부간 일이 벌어질 것이다. 휴의가 설치한 폭탄이 터진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가. 만찬장에는 총독뿐만 아니라 유마도 있다. 자신도 있고 배 아픔이 임신이라면 아기도 있다. 그에게 실토할까. 휴의를 만났다고. 조선에서 제일 몸값이 높은 악명높은 독립군 휴의를 만났다고. 그래서 그에게 총독 만찬 장소를 알려 줬다고.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아무리 유마라고 해도. 그런 후에는 이것으로 우리 둘 사이는 끝장이다. 휴의는 죽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내일 열리는 전시회에 그가 참석할지 모른다. 그를 만날 수도 있다. 인파 속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설명하면서 잘못 나온 소리라는 듯이 장소 변경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다. 변경됐어요. 남산 헌병대사령부로. 눈치껏 그가 알아듣는다. 그 다음은. 다음은 나도 모른다. 그는 빠르게 갤러리를 빠져나간다. 거짓 정보를 듣고 엉뚱한 곳에 폭약을 설치하겠지. 그리고 그래 나를 원망해. 실컷 하라고. 아니다. 장소는 또 바뀔 수 있다. 그는 결코 나를 원망할 수 없다. 그래, 그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어디로 할까. 그냥 총독부라고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뻔해. 그래, 좋아. 아까 생각한 남산 헌병대사령부라고 하자. 거기라면 총독이 만찬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장소다. 마침 신사참배도 할 수 있으니 의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장소가 바뀌었어요. 남산 헌병대사령부 만찬장, 정오. 이 짧은 한 문장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은 전과 같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주일 후 나는 조선을 떠나 다시 파리로 간다. 그와 인연은 더는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점례는 편안해졌다. 그래, 내일 일은 그렇게 정리해 두자.

유마가 등을 돌렸다. 그러더니 안되겠다 싶었는지 일어나 앉았다. 등 좀 긁어줘. 등이라고요. 내 몸 하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네. 그렇게 가려워요. 참아 보지요. 그럴수록 더 심해져. 그렇다면 효자손은 기대하지 마세요. 효자손. 그게 뭐지. 대나무로 만든 등긁게 손. 혼자서 등을 긁을 수 있어요. 점례가 손을 뒤로 해서 긁는 시늉을 했다. 아냐, 있어도 난 효자손 싫어. 당신 손으로 해줘. 긴 손톱으로 살살 긁어줘. 마고할미처럼. 어쩌죠. 어제 깎았거든요. 어제. 그럼 짧은 손톱이라도 좋아. 점례가 다가갔다. 어디. 여기. 아니 좀 더 위. 그래 거기. 점례가 살살 만져보니 작은 돌기같은 것이 느껴졌다. 뭐가 났나 봐요. 뾰로지 같은 거. 그래 긁어줘. 피가 나게요. 시원하게. 어 됐어, 그만하면 됐어. 정말 시원해.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점례가 말했다. 그런 생각 안해봤어.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같이 살자며. 기억하고 있네요. 당신은 참 조선말 잘해요. 당신 일본어 만큼 할까. 유마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자, 오늘 하루가 참 길다. 먼저 자요. 난 조금있다 잘게요. 뭘 그렇게 생각이 많아. 조선에 오니 그런가 봐요. 그럴 만도 하지. 참, 죽마을에 한 번 갔다 오지 그래. 아니에요. 거긴 이제 아무도 없어요.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일가 붙이도 없는데 가서 뭘 하겠어요. 미안해. 그러라고 말한 게 아니잖아요. 알아주니 고맙군. 그나저나 난 당신이 필요해. 잠이 필요하다고. 그가 점례에게 가까이 왔다. 당신 몸도 생각해야지요. 바로 어제 일이잖아요. 아직은 팔팔해. 사십이 낼 모레라는 걸 잊지 말아요.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점례는 눈을 감았다. 그도 잠이 필요했다. 몸이 노곤하면 그런대로 숙면에 빠질 수 있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되레 화합했다. 밤은 깊어 갔고 인경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잠이 들었다. 점례는 다시 깼다. 흐릿한 형상이 다가오고 있다. 배회하는 유령처럼 그가 점례 앞으로 와서 손을 내밀었다. 점례야, 넌 내여자야. 왜놈 장수를 끼고 있을 때가 아냐. 저게 뭐지. 저게 왜 내게 다가오지. 비켜 꺼져 저리 가란 말이다. 점례야, 휴의 오빠다. 난 오빠가 없어요. 왜 나타나서 날 괴롭히나요. 당신과 인연은 이미 끝났다고요. 변장을 하고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은 자유지만 거기에 날 끌어들이지 마세요. 난 조선독립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조선이든 일본이든 마찬가지라는 걸 오빠도 잘 알잖아요. 당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땠나요. 조선사람이 통치해서 잘먹고 잘 살았나요. 일본이 들어와 더 어려워졌나요. 아무려나 난 관심 없어요. 죽마을 일은 잊어요. 아니 그곳에서도 난 오빠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그러니 착각하지 말아요. 증오해요. 사랑 같은 것은 애초에 없어요. 내 행복이 부러운가요. 그래서 위험한 일에 목숨을 거나요. 거창한 일을 하면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마침내 돌아올까 봐서요. 천만에요. 난 그림을 그려야 하고 지금의 나로 만족해요. 지금보다 나쁜 길로 갈 수 없어요. 싸움의 한 복판에서 나를 빼주세요. 내 삶은 이제 새로운 길로 접어 섰고 오빠는 오빠의 길을 가요. 왜 날 힘들게 해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요. 그래요.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작별인사가 필요하다고요. 난 그것도 상관없어요. 마지막 굿바이, 난 이렇게 손을 흔들었어요. 알아, 안다고.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그리고 네 인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점례야,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네 행복이야. 오빠는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빌고 또 빌어. 부탁이다. 이번 딱 한 번이야. 제발. 조선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선생은 말했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조선은 독립할 수 있대. 생각해봐. 독립된 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모습을. 싫어요. 생각 안 해요. 독립해도 난 주인이 아니에요. 당신도요. 주인은 따로 있고 우리는 종이에요. 난 파리로 가요. 조선은 이제 나와는 연을 다했어요. 그래 알았다. 점례야, 네 뜻이 그렇다면 더는 이 문제로 괴롭히지 않으마. 그동안 고마웠다. 혹시 아니. 파리 생젤리제 거리를 걷다가 오빠를 만나게 될지도. 그 때는 오빠가 아는 체하지 않을게. 그냥 잘 살아주고 있어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살라고 그렇게 빌어만 줄게.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점례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목욕을 했다. 그러니 조금은 나았다. 등을 긁어 시원한 것처럼 몸에 물이 묻자 점례도 시원했다. 그녀는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지도 않고 수건 한 장 만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연필을 들고 하얀 백지에 쓱쓱 줄을 그어 나갔다. 왼쪽에는 삼층의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그 오른쪽 아래에는 조선식 한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 건물을 사이에 두고 총독과 사람들이 모여서 만찬을 즐기고 있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은 유마였다. 총독보다도 더 잘생겼고 근엄했고 당당했다. 그를 호위하듯이 총독의 대신들과 장관들이 도열 했고 그들을 호위하는 헌병대사령부의 군인들이 긴 칼을 차고 담장을 치듯이 둘러서 있었다. 완용의 모습도 보였다. 깃을 세우고 머리를 짧게 세운 그가 군중 속에서 붉은 눈으로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독립군 복장의 휴의가 있었다. 완용을 바라보는 휴의의 눈에서 강렬한 광선이 뻗어 나갔다. 눈과 눈이 마주치면서 그 중간에서 번개가 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주인공은 유마 호사카가 아니라 완용과 휴의였다. 맞대결을 펼치는 듯한 자세가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들 것처럼 긴장감이 돌았다. 점례는 스케치를 완성하지 않았다. 뭉쳐 있는 사람들은 점례가 아니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을 끝으로 점례는 손을 놓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