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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7-15 11:57 (월)
편지를 읽고 나서 그가 추가할 만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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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고 나서 그가 추가할 만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17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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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점례가 그 생각에 잠겨 침묵하자 유마가 입을 열었다. 대신 누군가는 그래야 하는 것처럼. 추가할 만한 말 없어. 정말 없는 거지. 추신에 추신을 더하라고요. 사족일 뿐이에요. 그래도, 내가 놓친 것을 당신이 찾을지 모르잖아. 편지가 무슨 숨은 그림 찾기에요. 그런 것 없었거든요. 난 당신 의견을 하나쯤 넣었으면 해. 퍼펙트 한데, 그래도 원한다면. 점례가 입가에 손을 대고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유마는 그런 점례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이리와. 당신과 닿고 싶어. 점례가 유마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세게 기대도 돼, 나 안 무너져. 얼굴을 떼고 점례가 살짝 웃었다. 그래요. 당신은 센 남자에요. 힘보다 의지가 그래요. 그런 칭찬은 됐고. 유마가 겸연쩍은 듯이 한마디 했다. 그러면서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이 진다는 생각을 전선에서는 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랬었지. 지금도 그렇고.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어. 붙으면 이겼으니까. 진주만도 그렇고. 그런데 필리핀 해전부터 상황이 꼬였어. 당연히 이번도 이기리라고 달려들었는데 엄청나게 깨졌거든. 내기에 큰 손실을 본 거지. 일본이 약해 져서 그런 게 아니고 미국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던 거야. 우리는 그대로인데 상대는 더 커져서 온 거지. 그걸 간파하지 못했어. 적들은 숨은 곳은 귀신같이 찾아내고 후퇴하면 기다렸다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공격했어. 일본이 조준하기 전에 발사하는데 당해낼 개간이 있겠어. 이제 알았으니 대책을 세우겠지. 그래도 뚜렷한 게 안 나올거야. 아버지의 고민이 깊은 이유야. 적이 강하고 내가 약한데 어떤 대책이 나올까. 전쟁 분석은 더할 게 없고요. 더구나 난 전문가도 아니고. 그래서 결혼이나 꺼낼까. 하다가 이 부문에서 점례는 망설였다.

아버지 뜻을 따르는 게 어떠냐고, 나는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번 대화에서 앞으로 언급하지 않기로 이미 정리가 된 상태라서 다시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신경은 써졌다. 나와 관련된 일이니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울고 불고 할 일은 아니다. 정말 그렇다. 유마는 과분한 상대고 나는 이미 자립의 기반이 확고하다. 언어가 통하고 삶의 의지가 있고 생계 수단이 있다. 그림을 파는 일이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유마가 결혼을 하거나 일본으로 돌아가거나 당장 전선에 재투입된다고 해도 그의 안전이 걱정될 뿐이지 그의 아내 아닌 것이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 이야기는 그 전에 끝났어. 굳이 또 꺼낸다면 그가 화를 낼 것이고 더군다나 일부러 자기 자신을 그런 기분속에 몰아 놓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대로가 좋지 않은가. 휴의나 완용에 에 관한 것도 그렇다. 내가 알든 모르든 그것은 파리에 있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헤어진 수 년 동안 우리는 접촉이라고 불릴 만한 상황을 맞은 적이 없다. 스쳐 지나간 것이 휴의와의 만남이 전부고 완용은 그 정도도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아는 체를 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냥 있기도 뭐해서 점례는 한 마디 툭 던졌다. 조선은 어떻게 되느냐. 미국이 소련 개입 없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소련이 조선 땅에 들어온 후 종전이 됐을 경우 조선이 어떤 상태가 될지 정말 궁금핟는 듯이 물었다. 조선의 운명은 그런 경우 어떻게 되는 거죠. 점례의 입에서 조선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마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선이라, 조선의 운명. 글쎄, 나는 생각못했어. 당신이 참 조선 출신이지. 유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뒷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괜히 했다는 듯이 서둘러 다음 말을 이었다. 조선도 아마 해방되겠지. 원래 독립 국가였잖아. 그런데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만한 역량이 있을지 몰라. 우리가 패전하면 당연히 조선 땅에서 일본군이나 일본인이 물러나겠으나 그렇다고 온전히 조선사람이 전처럼 나라를 꾸릴 수는 없을 거야. 미국이 들어오겠지.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가 되는 거지. 혹시 몰라. 소련의 식민지가 될지도. 아니면 지금처럼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고. 변수는 많아. 소련이 언제 참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분명한 것은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거야. 조선은 우리에게도 중요하지만 미국이나 소련한테도 더 없이 가치 있는 땅이야. 그들이 그대로 두지는 않을거야. 어떤 식으로든 차지하려고 들겠지.

유마가 이 정도면 이해하겠지 하는 얼굴로 점례의 표정을 살폈다. 혼자 계속말하는 것이 조금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점례가 가만히 있자 이어서 말했다. 내가 군대는 떠났어도 정세 판단을 빠르지. 그래서 군부에서도 나를 작전참모로 썼던 거야. 그때는 뭐가 그리 좋았던지 오로지 군복만이 나의 전 인생이었어. 목숨 정도는 거기에 비하면 아주 하찮않지. 당신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군복이 잘 어울리는지. 그런데 우습지. 지금은 전혀 아니야. 군복은 전생에서도 이제 나와 어울리지 않아. 전혀. 그가 손을 점례의 어깨에 걸치면서 부정의 뜻을 강하게 표현했다. 근데 아버지는 아냐. 군복을 벗었으면서 군인보다 더 전쟁에 빠져 있어. 옷을 벗은지 꽤 됐는대로 말이야. 아버지는 수상까지 노리고 있나 봐. 천황 이나 그 친척들과도 긴밀히 연락하고 있으니 전쟁 전후에 아마 최고 자리에 오를지 몰라. 그러면 난 귀국해야 해. 당분간 아버지 옆에서 잘난 아들 행세를 해야지. 벗었던 군복을 입히고 당신과 나란히 서서 이 정도면 충분히 수상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일본 국민에게 자랑하고 싶어 할 거야. 그것까지 내가 거부할 수는 없고. 누군가의 권력과 유지를 위해 내가 도구가 되는 것이 싫지만 어쩌겠어. 아버지인데.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가 나올 거고. 점례는 기어이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말은 입 밖으로 떨어져 나왔다. 예상대로 유마는 화를 냈다. 그러나 말하는 톤은 달랐다. 단호히 아니라는 말 대신 부드러운 음성으로 난 결혼이 싫어. 날 압박하는 모든 것은 내게서 떨어져야 해. 달달 볶이는 것은 죽음과도 같아. 애도 싫고. 애도 싫다고. 점례는 조용히 그 말을 되씹었다. 내 몸에 당신 아기가 자라고 있어요. 그럴지도 몰라요. 

그 말을 언제쯤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에게 당신은 나는 애가 싫다고 말한다. 점례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얼굴은 그런 내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약간 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 당신 애 좋아하는 거야. 몰랐어. 난 난리통의 군인이었어. 당신도 그렇고. 사람 목숨은 파리목숨보다 가벼워.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그래.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라고. 싫어. 난 단호히 그걸 거부해. 내 신념은 확고하고 의지는 누구도 말리지 못해. 점례는 그가 이처럼 단호한 것은 군복에 일본도를 차고 작전을 명령할 때에 보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기가 두 눈에 가득 찼다. 누구도 말리지 못해. 그 다음에는 아버지라도 천황이라도 라는 말이 생략됐다고 점례는 생각했다. 이건 나에 대한 예의야. 당신에 대한 예의 이기도 하고. 우습지. 그게 나야. 전쟁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짐승의 것도 아니고 모기의 것도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래서 난 아버지와도 엄마와도 그 누구와도 친해지기보다는 떨어져 있고 싶어. 살아 있다는 것만 알면 되지 더 뭐가 필요해. 묻는 말인지 아닌지 점례는 알 수 없었다. 그 부분은 정확히 자신과 일치했다. 죽마을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의 안부가 간혹 궁금했다. 경성역에서 그들은 자신의 바로 옆에 있었고 막사 앞에서는 같이 생활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전쟁에서 점례는 그걸 느꼈고 알았다. 그래서 유마가 하는 지금 이 말, 부모와도 친해지기보다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그 말이 자신 속에 들어와 박혔다.

몸에 불이 붙었어.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바다로 뛰어들지. 비명과 함께. 인간은 죽지만 이런 식은 아냐. 사방에서 나보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라고 해. 그 보다 많은 수가 거기 있으라고 하고. 결국 판단은 내가 하는 거야. 나는 그러니 어쩌겠어. 그래서 부상을 핑계로 빠져 나온 거야. 아버지는 아쉽겠지만. 할 수 없어. 나는 나 잖아. 나보고 떨어져 있어도 뭐라도 하라고, 마음만이라도 힘을 보탰으면 싶지만 난 분명히 했어. 나는 글을 쓰겠다고. 총을 쏘는 자만이 애국자가 아냐. 난 그걸 보여주고 싶어. 아버지는 또다른 나를 발견하고 대견해 하실거고 마침내는 내 결정이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겠지. 유마가 먼 산을 보듯 초점을 가까이에 두지 않고 창밖으로 던졌다. 들어 보세요. 여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을 보는 나는 이렇게 행복해요. 내 행복의 팔 할은 당신이에요. 나머지도 나의 것은 아니죠. 그래요. 내 행복의 전부는 당신에게서 왔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불행의 한 가운데를 빠져나온 것은 순전히 당신의 힘 때문이죠. 그러니 이제는 말할 수 있어요. 불편하면 언제든 당신을 떠날게요. 말로 하든지 아니면 그게 싫으면 눈치를 주세요.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떠날게요. 홀로 서 있어도 당신에 대한 고마움은 늘 함께해요. 그러니 여보, 가는 사람 억지로 잡지 말고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요. 오는 사람 밀어내지 말고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올게요. 점례가 진지하게 유마를 바라보았다. 

너무 하는군 이거. 앞서 나가는 진도가 빨라. 유마가 달래려는 듯 대꾸했다. 그러나 그 말이 불편한 것은 오히려 그가 아니라 점례였다. 그동안 난 좋은 일만 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누가 알아요. 또다른 행운이 찾아올지. 보름달을 보고 두 손을 모아 빌다보면. 저 멀리서 개도 짖지 않는 환한 밤에 당신이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문 앞에 와서는 내다 점례야, 제발 부탁이니 문 좀 열어줘, 이렇게 말할지도. 내 참, 기가 막혀서, 이런 추론은 전혀 이치가 맞지 않아. 논리적이 않단 말이지. 유마는 손을 저었다. 그런 미신 같은 이야기는 하지마. 난 그런 일 없을 거야. 당신을 밀어냈다가 보름달에 불쑥 찾는 그런 일 같은 거 말이야. 나를 믿지 미신을 믿어. 그게 조선식 미신인가. 그래요. 아마 그럴 거예요. 엄마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물 한 잔 떠 놓고 늘 빌었어요. 달을 보고, 떨어지는 유성을 보고 그렇게 했고 마을 앞 큰 나무 아래에서도 그랬어요. 뭐, 그게 어때서. 당신 엄마는 잘하고 있었던 거야. 우리 일본도 그래. 성경책 놓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우리는 늘 주변의 것에 고마움을 표하지. 심지어 주머니 속에 있는 성냥에도 감사해. 유마가 성냥을 꺼내면서 의식적으로 크게 웃었다. 여보, 당신이 낭만적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에요. 낭만적 혁명주의자들과 함께 있어서 그러나. 아냐, 난 원래부터 낭만주의자야. 커피 한 잔, 한 잔의 술과 담배면 난 충분히 사치스러워. 그걸 지금 하고 있잖아. 그리고 당신도 있고. 더 뭘 바래. 더구나 난 절제해. 적당한 선에서 그만할 수 있어. 그것이 내 장점이지. 술을 먹어도 결코 나를 방어하지 못할 만큼 취하지 않아. 절제하면서도 잘못되는 경우는 없어. 이것은 내 안에 있는 낭만과 함께 내가 최후까지 지켜야 할 신조야. 이리 와, 여보. 왜 떨어져 있어. 다시 닿게 이리와. 유마가 점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손을 잡고 점례는 밖으로 나왔다. 가을꽃이 시들려고 막바지 불꽃을 피워냈다. 붉고 노란 것이 가기 전에 나를 봐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가지는 흔들렸으나 다시 제자리를 찾아서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나. 이 꽃 좀 봐요. 알아서 자라더니 이렇게 됐어요. 내년에는 제대로 좀 심어야 될까봐요. 점례가 손을 놓고 그 손으로 꽃을 받쳐 들었다. 조선의 꽃이라면 이름을 좀 알겠지만 이국의 꽃 이름은 낯설었다. 이 꽃이름이 뭐죠. 글쎄, 나도 모르겠네. 식물도감 책을 한 권 사야겠어. 유마가 관심을 기울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거기 나온 꽃들을 죄사 사다 심어요. 봄에는 봄꽃 여름에는 여름꽃 가을에는 가을꽃 말이에요. 좋지, 좋아. 유마도 무엇이 좋은지 신나서 맞장구쳤다. 기분이 높아진 두 사람은 우체국을 향해 걸었다. 통신으로 연락할까 했으나 굳이 그러지 않았다. 내무대신은 바쁠 것이고 편지를 보낸 사실조차 잊었을지 모른다. 아직 점심은 이르지만 여기저기서 끼니를 준비하는 식당의 모습이 분주했다. 빵 굽는 냄새가 나기도 했고 기름때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여는 가게도 있었다. 성미 급한 몇 사람은 야외 탁자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 모습은 평온했다. 언제 전쟁을 치렀는지 모를 만큼 거리는 생명으로 넘쳐났다. 인간의 복원력은 이처럼 대단한 것이다. 놀라워. 자연보다도 빨라. 패전한 독일이 물러난지 얼마나 됐다고 파리 사람들은 전쟁 전으로 돌아갔어. 그게 인간이야. 다 잊는 거지. 과거보다는 현재고. 아니면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산사람들은 살아야지요. 그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이고. 죽은자들도 저들이 자신처럼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랄거야.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우체국을 나온 그들은 다시 센강 변으로 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잠깐 멈춰섰다. 에펠탑이 밑에서 부터 꼭대기까지 다 보이는 지점이었다. 폭격을 피했군. 용케도. 일부러 그랬을까요. 독일군이 일부러 기수를 돌렸을까요. 아니면 조준했는데 빗나갔을까요. 글쎄. 졌다고는 해도 나찌 전투기들이 그 정도로 형편 없진 않았을 거요. 나름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책이라고 봐야지. 유마가 그 쪽에 힘을 실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참 인간은 모르는 것 투성이에요. 사람은 짐승처럼 마구 죽이면서 무생물인 철탑을 살려두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어요. 영원히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했겠지. 자기들 건데 굳이 파괴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식민지 정책과 같은 거지. 처음에는 좋은 거 다 뜯어서 가져가다 보니 깨지기도 하고 잃어 버리는 거야. 아차 싶은 거지. 왜 굳이 이런 수고를. 이곳도 우리 나란데. 그러면서 식민지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듯이 말하지. 너희 조상것을 우리들이 잘 보존해 줄게. 우리 참 좋은 사람들이지. 그러니 까불지 말고 우리 말 잘들어. 간혹 사탕도 줄게. 삼촌이 생각났다. 인사동의 삼촌은 조선의 유물을 마구 사들였다. 경천사지 10층탑도 샀다. 샀는지 위협해서 빼앗았는지 모른다. 어쨌든 사고 보니 규모가 너무 컸다. 무려 140 토막으로 잘랐다. 그리고 배로 실어 날랐다. 도쿄에 있는 아버지 정원에 갇다 놓으면 보기 좋을 것이다. 형님도 손뼉을 치면서 눈을 휘둥그레 하시겠지. 그러나 문제가 터녔다. 외국의 몇 몇 기자가 문제를 삼았다. 귀찮아서 다시 갔다 놓았다. 나찌도 그랬을까. 인사동의 삼촌처럼. 삼촌이 유물을 사고 일본으로 보내는 것도 이와 같은가. 비유가 좋네요. 그런 생각은 못했는데 들어보니 이해가 가요. 어쨌든 살아 남아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으니 저 건물, 정말 굉장한데요. 점례는 에펠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 낙엽이 다 지기 전에 저기 한 번 올라가보자.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면 장관 일거야. 그나저나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유마가 손에 땀이 나자 잡은 손을 풀며 물었다. 그때 거지 서너 명이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손은 얼굴만큼 검었는데 비굴하게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이빨이 대조적이었다. 유마는 무시하고 지나가자고 머뭇거리는 점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소매치기야. 순진하고 모자란척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뱀처럼 날렵하거든. 유마가 돈이 없다는 시늉을 하면서 그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한 번 당할 뻔한 적이 있거든. 이번처럼 지난번에도 서너 명이 저런 표정으로 다가왔어. 아무 생각 없이 밥 먹을 만큼 주려고 했는데 글쎄 지갑을 꺼내는 순간 달려들어서 뺏으려고 하더라고. 어찌나 빠르고 날래던지 거의 뺏길 뻔했지. 다행인 것은 손에서 떨어진 지갑이 그들 쪽으로 가지 않고 내쪽에 있었던 거지. 내 손이 한 발 빨랐어.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꼼짝 않고 노려봤지. 어린애들이 빤히 마주 보면서 뒷걸음질 치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졌어. 거리낌이 없더군. 서두르지도 않고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 호의를 베풀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어.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맞어. 동양인들은 표적이야. 지난번에 좋은 운이 이번에도 좋다고 보장할 수 없어. 그래요, 말로만 들었던 것을 눈으로 직접 보니 조심해야겠네요. 저도 그들이 미행하는 경우를 몇 번 당했거든요. 아무리 전후 정신이 없는 정부라고 해도 프랑스가 저런 걸 방치하다니 이해할 수 없어요. 그렇지. 아무대나 오줌을 갈기고. 이런 소동을 겪고 나서 그들은 거대한 성당 앞에 발을 멈췄다. 오려고 했던 곳이에요. 점례가 기대에 찬 눈으로 성당의 지붕을 보면서 감탄했다. 이곳도 에펠탑처럼 파괴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소설가 책에도 여기가 나오지. 유마가 아는 체를 하면서 책 속의 장소를 찾았을 때 짓는 작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여기서도 좀도둑이 나와. 알아요. 촛대를 훔쳤죠. 신부는 그걸 용인했고요. 지금 상황이라도 신부는 그렇게 했을지 궁금해요. 나도 궁금해. 둘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웅장한 외관을 눈에 새겨 넣었다. 높이 솟은 첨탑이 그들이 모시는 신의 엄청난 위상을 가늠케 했다.

과거의 사람들이 이 성당 앞에서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작은 죄까지 까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아니면 없는 죄를 일부러 만들어 고해성사를 하고. 설마. 그랬을 까요. 기록에 있거든. 이건 소설처럼 내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냐. 숱한 사람이 죄없이 신의 이름으로 처단됐어. 그만요. 피비닌내가 나요. 오케이. 내 입을 봉했어. 과거는 잊고 현재만 보자고. 저 천장을 봐. 하늘을 닿고 있어. 엄청난 높이네요. 압도 당하고 있어. 그런데 당신은 멀쩡해. 난 다리가 후둘거려. 완전히 주눅들었어. 더 안쪽으로 들어가 봐요. 좀 무섭긴 하지만. 점례는 유마의 등을 밀었다. 안전하게 뒤를 따라가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신보다는 남자를 위하는 행동이었다. 좋은 것은 유마가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안은 온화했다. 환하지는 않았으나 어둡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내부의 것들이 다 눈에 들어왔다. 둘은 가운데 부분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가볍게 기도하자. 점례는 무엇을 빌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앉았던 유마가 바로 일어나서 따라 일어났다. 처음에는 자리를 바꾸려나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유마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덩치 큰 사람들 앞에 있으면 당했다는 느낌이 들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특히 서양사람을 보면. 유마는 서양사람을 미국인과 동일시 하는 듯 했다. 노릿한 냄새도 나거든. 점례는 자신들 앞에 있는 서양인들이 행여 들을까봐 유마의 등을 가볍게 툭툭쳤다. 하여튼 점례는 유마를 따라 일어나 기도대신 내부를 구경하는데 시간을 썼다. 향로에서 타오르는 촛불이 촛농을 녹여내고 있었다. 그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노린내와는 달라. 숙연했다. 넓은 공간에 별 잡음이 없어 더 고요했다. 덩치 큰 서양인들은 유마가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들이 할 일만 했다. 아직 정식 미사 시간은 아니다. 사람은 군데군데 있어 혼잡하지 않다. 점례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없던 죄도 사하고 싶어지는군. 유마가 농담 삼아 한마디 했다. 옛날 사람처럼요. 그러다 처형당하면 어쩌려고요. 하하하. 할 수 없지.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일상이 이런 분위기라면 죄짓고는 못살 것 같아요. 아까 그 소매치기들도 이런 경험을 했으면 싶어요. 미사를 드리게 하고요. 그러면 손을 털지 누가 알겠요. 당신은 참. 그들은 이곳에서도 그 짓을 하거든. 뒤를 돌아봐. 기회를 노리고 있을거야. 어딘 가에 숨어서. 그러지 말아요. 벌써 등골이 오싹해요. 나도 그래. 떨린다고. 성당의 지하실에 있는 억울한 죽음들이 배회하고 있나봐.  그곳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난 거야. 상상하기도 힘들지. 이방인들을 이단으로 잡아들였어. 마음에 안 들면 마녀로 몰아 가뒀지. 그리고 불에 달군 인두로 살을 지졌어. 살타는 냄새가 성당에 가득 찰 때도 있었지. 불어, 불면 살려줄게. 처음부터 아니었던 그들은 고문에 못 이기고 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그만 실토한거야. 마녀 맞아요. 약속은 거짓이었어. 그걸 알면서도 고해신부들은 그들을 이용했어. 마녀인 것을 시인하고 앞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한 그들을 신의 이름으로 용서해 준거야. 그런데 밖으로 나온 이들은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 앞에서 돌팔매를 맞고 죽어갔어. 신의 용서는 이런 식이었어. 점례는 소름이 끼쳤다. 닭살이 돋아 몸이 으스스했다. 구원대신 상처를 입었다. 여기서 나가요. 그럴까. 그들이 나갈 때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들어온 빛이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을 그들 앞에 뿌려댔다. 길을 잘 찾아가라고 인도하는 것처럼. 다시 생명의 빛인가. 점례는 잠시 멈춰섰다. 그래, 그것은 오래전의 일이야. 그리고 신부가 하나님도 아니고. 잠시 착각한 거지. 실수할 수도 있고. 신부가 신은 아니잖아. 멈춰선 김에 성호를 긋고 무사안녕을 기원해야지. 잠시 시간이 흘렀다. 훅, 호흡이 귓가에 닿았고 아멘 하는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유마였다. 끝났으면 아멘을 붙여야 해.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아멘, 점례는 따라했다. 밖으로 나오자 또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하늘은 맑았고 하얀 구름은 모여 있었다. 

배고파요. 인정. 파스타 어때요. 인정. 유마가 점례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꾸했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흔쾌한 마음이었다. 번개의 속도로 그는 점례의 말에 수긍했다. 들어볼 필요도 없이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나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거기서 한거에요. 빵을 훔친 농부에게 신부는 내가 주었다고 말하지 않은 거죠. 저 자가 훔쳤어요. 경찰에 끌려간 도둑은 빵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죠. 살기 위해 먹었다가 더 일찍 죽은 거죠. 용서나 화해나 그런 것들을 거기에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들은 신으로 부터 받은 상처에 굴하지 않았어. 악착같이 살아 남은 거지. 어쩌면 그들이 신보다 더 강할지도 몰라. 신보다 강한 신자라. 누구 학설인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이 나왔다. 냄새도 고소했다. 코를 들이밀면서 음미하던 유마가 한 마디 툭던졌다. 누가 그런 말 했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래, 먹자, 먹어. 맛있겠다. 유마가 면을 포크에 감으면서 말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잖아요. 어쩜 이렇게 보기좋게 말아 올렸을까요. 그게 요리사의 솜씨겠지. 장신 정신이라고나 할까. 고맙게 먹어야 겠어요. 비유가 좋아. 조선 속담인가. 뭐가요. 아, 그 먹기 좋은 떡. 그래요. 조상대대로 전해져 왔죠. 그런 걸 내게 많이 말해줘. 글 쓰는데 도움이 될 거야. 좀 보여줘 봐요.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어요.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요. 점례가 약간은 뾰루뚱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듯한 손짓을 했다. 알아야 면장이라고. 뭔데 말해봐. 그런게 있어요. 말해봐. 당신 먼저. 아직은 아니야.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거든. 유마는 점례가 실망한 표정을 보이자 실수한 것을 나중에 알아 차렸다. 거칠어. 전혀 정리가 안됐어. 당신이 보면 웃을 거야. 그래서 이렇게 달랬다. 자신은 달래려고 한 말이었으나 점례는 적극적으로 나왔다. 정 그렇다면 말로 좀 설명해 줘요.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도 힘겨워. 말도 안돼. 이런 게 남녀 불평등. 당신은 내 것 다 보잖아요. 그림. 그림은 완성품이지. 누구나 보잖아. 나 말고도. 미완성도 슬쩍슬쩍 보잖아요. 안 보는 척 하면서요. 그리고는 한 마디 하잖아요. 좋았어. 이 정도면 최고야. 유마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그림에 눈길이 가면 언제나 유마는 이런 제스처로 점례의 기분을 추어올렸다. 

나도 그러고 싶어요. 당신 작품 최고야. 인류를 구원하는데 도움이 될거야.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어. 인류에게 쏟아진 벼락 같은 축복. 이런 식의 칭찬을 하고 싶어요. 칭찬은 아마 틀림없이 당신을 춤추게 할 거고요. 유마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칭찬받으려고 쓰는 거 아냐. 나 위해서 하는 거지. 기분 좋잖아. 주인공들을 내 마음대로 끌고 가면. 세상은 그게 안돼.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 않아. 악당이 이기거든. 하지만 소설은 달라. 살리고 죽이고 울고 웃기지. 난나쁜 놈을 죽일거야. 선한 사람 살리고. 내 작품은 해피 앤딩으로 끝나야 해. 그러길 바래요. 소설은 현실과는 달라야지. 안 그래. 인정. 나 따라 하는 거 말고 진심을 말해봐. 내 마음도 그래요. 현실에서는 악이 이기지만 작품에서는 선이 이기기를 바래요. 난 그렇거야. 그래서 내가 소설에 빠져 드는 거야. 독재자 기질이 농후하군요. 그렇게 얘기가 흘러가나. 커피 먹으러 가자. 거기서 좀 더 하자. 매듭지어야지. 이렇게 대충 끝내고 당신은 화실로 가고 나는 나의 아지트로 가면 속이 덜 먹은 느낌이야. 커피라면 사양하지 않는 거 알죠. 요즘 내가 커피사랑에 완전히 빠져 들었어요. 술보다 전 커피 쪽이죠. 커피와 술은 종류가 달라. 뱀과 개구리처럼 종이 완전히 다르다고. 나에겐 둘 다 같은 종이에요. 구분하자면 서양인과 동양인 차이라고나 할까. 써 먹어야지. 커피를 먹을 때 나는 그녀가 말한 인간 종에 대해 생각했다. 어때. 이 문장. 어울려요.

점례가 유마를 흉내 내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당신은 못하는 게 뭐지. 갑자기 생각나서 그래. 뒤로 미루면 잊을 까봐 지금 꺼내야지. 자, 그럼. 당신은 말이면 말, 글이면 글, 그림이면 그림 정말 못말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니까요. 알아모시겠습니다. 커피향이 올라왔다. 검은 그것은 올리브의 강한 향과는 다른 냄새를 풍겼다. 누가 발명했는지 몰라. 세상에 발명 안된 것이 없다니까. 최초의 커피 생산자가 궁금하네. 어디 물어볼까요.점례가 점원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내가 알아서 알려줄게. 그게 더 빠를 거야. 유마가 말했다. 저 남자. 뽐이 근사하지요. 커피를 내리는 저 진지한 눈 빛. 그 정성으로 내린 커피가 여기 있어요. 자 봐요. 점례는 노트를 꺼냈다. 정말 당신은 강한 여자야, 어떤 경우든 쓱쓱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바르지. 근사 하지요. 유마가 다시 엄치척을 했다. 난 안돼. 당신처럼 쓱쓱이 안 돼. 쓰는게 요즘 들어 벅차. 그림과 글은 다르잖아요. 주인공도 내 맘대로 안된다니까. 아까는 그 반대 때문에 소설을 쓴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럴 때도, 아닐 때도 있고. 유마가 풀이 죽었다. 알지요. 내가 왜 모르겠어요. 당신은 한 시간만에 편지를 썼지만 전 밤새웠다고요. 일단 커피를 마시자. 내가 원고를 보여줄지 말지 커피를 먹으면서 생각하지.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아닐지도 모르고. 두 잔 먹고 밤에 잠이 안 오면 당신이 책임져요. 한 잔에서 결론을 내지. 유마가 남자다운 웃음을 지으면서 흔쾌히 대답했다. 오후의 햇살은 따스했다. 밖으로 나온 점례는 핸드백을 앞뒤로 흔들면서 앞서 갔다. 세상에 막 나온 토끼가 엄마를 따라 깡총깡총 뛰는 모습을 닮았다. 저런 여자가 어떻게 내게 왔지. 유마는 순간적으로 점례에 대해 동지 이상의 애정을 느꼈다. 끝까지 가야할 사람이라는 인식이 발동했다. 그저 핸드백을 흔들면서 갔을 뿐인데 유마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점례에 대한 신뢰가 더해졌다.

그녀는 뒤돌아 보았다. 유마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런 말 알아요. 가을 햇살에 딸 내보내고 봄 햇살에 며느리 내보낸다. 당신이 애타게 원하는 조선 속담이지요. 유마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래도 딸과 며느리를 차별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뭐지. 정말 몰라. 빨리 말해줘. 유마가 보챘다. 어린아이처럼 젖을 달라고 칭얼댔다. 그는 천상 사색가다. 몽상가이면서 묻기를 좋아한다. 그의 입은 언제나 물음표를 달고 있다. 작가에 딱 어울리는 성격이다. 점례는 그에게 좋은 소재였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아니죠. 정답을 말하는게 갑자기 귀찮아진 거에요. 그래서 무식한 척하는 거지요. 유마가 손사래를 쳤다. 제대로 알고 싶어서 묻는 거야. 진짜라고. 그러면서 무안했던지 말을 더듬었다. 불어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처럼 행동했다. 점례는 더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 햇볕이 그만큼 여자 피부에 좋다는 말이에요. 반대로 봄볕은 그렇지 않고요. 그때 듣기 좋은 너털웃음을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지나가는 금발 머리의 남녀가 그런 유마를 힐끗힐끗 보고는 웃으면서 지나쳤다. 내가 지나쳤나. 지나치게 손을 뻗었지. 연극배우처럼. 이것은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이제 어디로 가지요.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오후의 햇살도 즐겼고요. 한 군데 더 가자. 내친 김에 파리를 쓸고 다니지 뭐. 유마가 선심쓴다는 듯이 팔을 벌렸다. 궁금하네요. 작가 모임을 하다 알아둔 장소가 있어. 위고나 모파상이 즐겨 갔던 곳이라고 하더군. 좋아요. 그런 장소라면 기를 받을만 하지요. 성당에서 받지 못한 구원을 거기서 받읍시다. 

점례가 다가와 유마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점례는 자신의 겉옷 주머니 속에 넣었다. 작은 주머니 안에서 두 손이 서로 어울렸다. 점례는 쉬지않고 행복했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나쁜 기운들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수다를 떨어야 해. 말을 뱉어내야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점례는 그때 도를 깨치는 스님처럼 번득 깨닫았다. 발걸음이 상쾌했다. 이런 식이라면 종일 걸어도 종아리에 붓기 대신 잔 근육만 생길 것 같았다. 배우러 가는 길, 무언가 알기 위해 학교로 가는 길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점례는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폐허의 건물들은 철거되고 있었다. 먼지가 일었고 두 사람은 그 자리를 얼른 피했다. 복구의 속도는 느렸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복되고 있다. 전쟁의 아픔은 사라지고 대신 희망의 노래가 울리고 있다.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상하지 않은 상점은 활기찼다. 여보 저기 들어가 볼까요.  당신 신발이 달았잖아요. 언제나 헌구두만 신을 거예요. 작가는 빈티나야 멋있어 보이지만 하나쯤은 새 신발이 있어야지요. 회색 바지에 갈색 구두가 어울린다는 생각 안해봤어요.  느닷없는 제의에 유마는 끌려가듯이 매장으로 들어갔다. 아직 그럴마음이 유마는 없었지만 점례가 사주는 신발로 갈아 신었다. 예술가들이 사치하는 모습을 유마는 싫어했다. 그래서 자신도 검소하게 생활하려고 했고 특히 작가 모임에는 일부러 헐한 옷차림을 즐겼다. 뒷축이 단 구두를 신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울려요. 당신한테 딱이에요. 안성맞춤입니다. 안성막춤. 뒤꼬리가 올라간 것이 이번에도 물음이다. 안성막춤이 아니고요. 안성맞춤. 아, 이거요. 짐작한데로 역시 조선 속담입니다. 딱 들어 맞는 다는 뜻이죠. 점례는 더 설명하려다 그만두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면 지칠지도 모른다. 호기심을 뛰어넘으면 그 다음은 무관심이 될 수 있다. 점례가 유마의 뒤쪽으로 돌아가서 갈색 빛이 도는 구두를 살피면서 음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정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또 기분이 좋았다. 일곱살 무렵 설 명절 때 받은 선물 같았다. 검정 고무신. 얼마나 신났던가. 잘 때도 가슴에 안고 잤던 그 고무신. 새 신에서 올라오던 고무냄새. 그 기분을 그녀는 똑같이 느꼈다. 이번에는 자신이 아닌 유마를 통해서였다.

지갑을 열고 점례는 돈을 치렀다. 그 돈은 어디서 난 건지 유마가 궁금해 할 수 있다. 돈에 관해서는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무언가를 사려고 하면 돈은 항상 그 이상으로 있었기에 그는 한 번도 생활을 걱정하지 않았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큰 돈이 들어가는 것은 파리 일본영사관이 알아서 다 해줬다. 지난 번 그림 팔았다고 했잖아요. 그것으로 샀어요. 파리에 와서 처음으로 판 건데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었어요. 신발을 신고 열심히 걷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운동하라고요. 건강이 최고에요. 걷기는 건강을 지키는 일등공신이고요.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든 점례가 이렇게 말했다. 남의 돈이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번 돈 이었다. 유마가 말했다. 나도 질 수가 없지. 그런 것이 사랑이라면. 당신 머리에 딱맞는 모자를 사줄게. 당신 책 아직 안 나온 거 아시죠. 선인세를 받은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뒤로 미뤄요. 아냐, 아니야. 대박날 거야. 미리 가불을 한 셈으로 치지. 여기 출판사도 가불로 작가를 미리 잡아 두거든. 이번에는 유마가 잡아 끌었다. 파리지엥이야, 당신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점례를 보면서 유마는 만족했다. 새 신을 신었으니 당신은 하늘을 향해 폴짝 뛰어요. 나는 모자를 쓰고 뒤따를 게요. 정말로 유마는 점례의 말을 따라했다. 마치 춤을 추듯이 위로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하늘에 닿겠다는 듯이 다리에 힘을 모았다. 그리고 가볍게 달렸다. 골목길을 이리 저리 지나쳤다. 점례가 행여 놓칠세라 한 손으로 모자를 꾹 누르고 따랐다. 늙어서도 우리가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점례가 말했다. 안될 것도 없지.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사랑할까요. 그러리라고 믿어. 그래야 세상이 조금은 살만하자. 그러니 여보 우리 평생 늙지마요. 그런 소설을 써야겠군. 제목,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 윤기나는 검은 머리에 흰머리는 상상이 안돼.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라는 말도 있어요. 점례가 잡은 손을 상대가 눈치챌 수 있도록 꼭 쥐었다. 그건 또 뭔 소리. 유마가 놀란 척 물었다. 설마 그것도 조선 속담인가. 눈치가 빠르군요. 맞아요. 조선속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그렇게 오래도록 해로 하면서 부부가 같이 살자는 의미에요. 참 조선은 신비한 나라야. 비유가 대단해. 유마가 감탄사를 쏟아냈다. 난 흰머린 참을 수 있어요. 대신 머리는 빠지지 마요. 난 대머리가 싫어요. 우리 아버지 보면 나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듯 그가 말했다. 그 정도라면 봐줄만 해요. 아버진 머리 가운데가 빠졌어도 잘 티가 나지 않아요. 스님처럼 대머리가 되면 난 울거에요. 점례가 그 말을 하고 우는 시늉을 했다. 울어. 실컷 울라고. 울면 어린애가 되겠지. 다시 젊어지는 거야. 점례처럼 유마도 우는 시늉을 했다. 

골목길을 벗어나자 큰길이 나왔다. 군용트럭들이 여전히 많았다. 꽁무니에 시커먼 매연을 뿜으면서 굉장한 소음을 울렸다. 마치 폭발음과도 같은 소리가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쉬지 않고 울려댔다. 정리할 게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서진 것은 고치고 새로운 것이 자꾸 생겨났다. 유마는 그 길로 잠깐 사람을 만나겠다며 길을 건넜다. 점례도 따랐다. 그러기 전에 앞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가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신다고 했다. 기분 전환에 더없이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정말로 즐거운 표정이었다. 왜, 잘 안 나올 때가 있잖아.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봐. 유명인들도 거기 와서 막 수다를 떨어.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르면 그대로 나가버려.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마구 써 갈기지. 혼자 우두커니 한 시간 째 앉아 있는 사람도 있어. 무슨 무언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코미디를 연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해. 그런 사람을 관찰하면 인물을 묘사할 때 도움이 돼. 그 심정 알 것 같아요. 당신도 누군가에게 관찰의 대상이 되겠네요. 가능하면 주인공이 됐으면 해요. 복수극을 펼치는 그런 강인한 사람 말고 용서해 주는 마음 좋은 주인공요. 그런 식이면 안 팔려. 복수는 잔인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아마도 지금쯤 누군가는 나찌에 엄청난 복수를 하는 소설을 쓰고 있을 거야. 또 누군가는 지하로 잠적한 비시 정부 요인들을 찾아내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스토리를 구상할 거야. 어떤 것이 세상에 발표될지 벌써부터 긴장돼. 전쟁은 때로는 인간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 주거든. 소설은 정말 끝이 없어요. 인간의 상상력에 늘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요. 엄청난 작품을 기대해요. 당신은 꼭 해낼 거예요. 일찍 올 거죠. 그래야 하겠지. 거긴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숨이 막혀. 담배 연기 때문에 질식하거든. 적당한 순간에 빠져나와야지. 오래 있으면 싸움에 휘말려. 서로 노려보면서 상대를 고르는 패들이 항상 있어. 그 대상이 되면 슬그머니 뒤걸음질 치는 거지. 그리고는 상쾌한 기분을 안고 집에 와서 기억할 만한 것을 빠르게 써야 해. 저기 한 번 가면 일주일은 밖에 안 나가도 쓸 거리가 넘칠 때도 있겠네요. 그럼, 그렇지. 그래요, 오늘은 한 달 치를 받아오세요. 당신을 꼭 잡아 두고 곁에서 두고 보게요.

유마가 웃었다.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숱이 많은 머리칼을 뒤로 날리며 빠르게 걷는 유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점례는 그가 무사히 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 지켜봤다. 박박깎은 머리보다 보기에 좋아. 휘날리는 남자 머리는 보기에 좋거든. 아주 보기에 좋아. 영화라면 남자는 건너기 전이나 건넌 다음 뒤를 보고 손을 흔들고 그러면 이쪽에서도 마주 흔든 다음 각자 길을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유마는 그러지 않았다.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안 모양이다. 대신 살롱에 빨리 들어가서 오늘은 누가 와서 무슨 행동을 보일지 보는 것이 급했다. 점례는 간단한 저녁거리를 준비한 다음 집으로 향했다. 나도 글이나 써볼까. 아냐, 하나라도 잘하자. 소설은 내 분야가 아니야. 그에 비하면 그림은 얼마나 단순한가. 상상력이야 소설 못지않지만 단 한 장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소박하다 못해 순진하지 않은가. 점례는 새로운 스케치보다는 이미 한 스케치에 물감을 칠하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 모자가 땅에 떨어지자 아냐, 오늘 일을 하나 더 스케치한 다음에 하자고 색칠을 뒤로 미뤘다. 스케치는 간단했다. 새 신발을 신은 유마와 새 모자를 쓴 자신이 하늘을 향해 날고 있는 모습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걸으면서 하늘을 공란으로 둘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따라 좌우 양쪽에서 날고 있는 새나 나비나 그 밖의 어떤 곤충을 배치할지 고민했다. 우리들은 주인공이니 천사들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비행하는 거야. 바닥은 초원. 아니면 오래된 보도블록이 빛나는 것으로 할지 이것저것 재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점례는 집에 도착했다.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늦은 오후는 그녀 기대대로 정말 천천히 흘렀다. 그것 또한 그녀를 기쁘게 했다. 열쇠를 꽂으면서 그녀는 또 다른 우편물을 발견했다. 일본에서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일단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어디서 보낸 것인지 호기심이 이는 마음으로 발신지를 살폈다. 조선에서 온 것이다. 인사동 삼촌의 글씨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편지가 계속 온다. 좋은 조짐인가. 그녀는 햇살이 마당 가득 찬 정원에 잠시 앉았다. 해를 마주 보면서 이 집은 정말 해가 잘 드는구나. 명년 봄에는 봉숭아를 심어야지. 분홍색으로 손톱에 물을 들일 거야. 울 밑에선 내 모습이 벌써 기다려져. 손톱을 싸맨 것을 보고 유마가 깜짝 놀라겠지. 다친 거야. 그런 거야 당신. 그래요. 음식 하다 조금 다쳤어요. 어디 봐, 어디. 걱정스럽게 달려들면 그 때 서야 이렇게 말하겠지. 아니, 아니에요. 손톱에 물들이려고요. 당신이 좋아할 거에요. 이것도 조선식인가. 아마 그럴걸요. 점례가 뽐내는 투로 말했다가 금방 말을 바꿔 이건 일본에서 온 건지 몰라요. 왜, 지난번에 우리 아버님댁에 갔을 때 그곳 아주머니 딸이 손에 봉숭아 물들인 것 봤잖아요.

점례는 손을 들어 손톱을 살폈다. 새끼손톱에 할지 약지에 할지 아니면 둘 다 할지,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손톱에는 이미 검붉은 칠이 덧입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지. 깜짝 놀란 점례는 얼른 손을 내렸다. 착각이었다. 막사에서, 그 고통의 막사에서 잊기 위해 들였던 봉숭아 물이었다. 그녀는 아플 정도로 세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다. 있던 봉숭아도 다 뽑아버려야지. 점례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기쁨의 순간에 공포가 닥쳤다. 이리 빨리 변하는 감정에 점례는 자신도 놀랐던지 서둘러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느닷없이 찾아온 자신을 사로 잡았던 공포를 애써 눌렀다. 그리고 기분 전환을 위해 그녀는 찔레꽃을 흥얼거렸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그래, 찔레꽃을 심자. 작고 하얀 꽃이 정원에 어울릴 것이다. 아침마다 진한 향기를 주는 찔레꽃이 봉숭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찔레꽃, 찔레꽃 몇 번을 중얼거리자 조선에서 듣던 찔레꽃 노래가 저절로 따라 나왔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마구 불렀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그런대로 가사가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달이 뜨는 저녁이면 동창생들 모여앉아 못 잊을 사람아~. 이 정도면 충분해. 찔레꽃이라면 상처를 덧 낼리 없다. 그래 찔레꽃을 심는 거야. 그런데 다음 구절이 뭐더라. 그 다음은 전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거면 어딘가. 이 정도도 성공이다. 조선에 가면 가사를 외워 와야지. 점례는 남쪽 나라 내 고향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래 바로 이거야, 찔레꽃을 심자. 하지만 찔레꽃을 생각할수록 봉숭아가 자꾸 떠올랐다. 손톱으로 땅을 파면서 고향 땅에 심었던 작고 까만 봉숭아 씨가 자꾸 어른거렸다. 막사의 어두 껌껌한 방에서 울면서 손톱을 싸매는 그 순간을 어찌 잊겠는가. 나쁜 기억은 왜 이리도 생생하게 살아나는가. 이렇게 좋을 때에 하필 그렇게 나쁜 때를 떠올리는 머리를 점례는 한 대 쥐어박았다. 매달릴 것이 못 되는 것에 헛심만 쓰고 있다. 유마에게 미안했다. 막사만 생각하면 유마를 쳐다볼 수 없다. 잘못한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죽을 때까지 용서를 빌어도 빠져나올 수 없다. 자신을 스스로 용서했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 골목길의 강아지처럼 예고도 없이 불쑥 뛰어나왔다.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어쩌자고 이러는가. 그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런 기억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가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그때의 그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미치겠다. 정말로 미칠 것만 같다. 정상이 아니다. 나는 정상이 아냐. 

점례는 성급하게 행복을 버렸다. 스스로 고통을 머리 위에 썼다. 점례는 모자를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그러다가 다시 집어서 머리에 썼다. 왕관이다. 아니다. 가시면류관이다. 점례는 희망했다가 절망했다가 왔다 갔다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거실을 돌아다니면서 다시 찔레꽃을 불렀다. 그래도 무언가 부족했다. 심란함이 찾아온 것이다. 이럴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붓을 드는 것이다. 마구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천근 같던 몸이 봄 강물의 얼음처럼 서서히 풀렸다. 그런 날은 느리게 가던 시간도 급작스럽게 빨리갔다. 스케치는 쉽게 완성됐다. 샤갈이 보면 자신의 그림을 패러디했다고 화를 낼지 칭찬을 할지 모르겠다. 새 신을 신고 뛰는 듯 나는 유마와 새 모자를 쓰고 그 옆에서 천사처럼 날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왠지 그의 화풍을 담았다.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닌데 누가보면 그렇게 됐다. 기왕지사 그렇게 된 마당에 가난한 화가들이 사는 벌집 화실에 들러 잠깐 봤던 그의 또 다른 그림을 본떠 보고 싶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이다. 점례는 사람을 그릴 때면 대개 두 명을 넣었는데 자신과 유마였다. 점례는 한복을 입고 있다. 정확히는 조선에 사는 평범한 아녀자의 흰옷이었다. 아래는 광목천의 검정 치마를 입었다. 발에는 짚신을 신었는데 치마 사이로 한쪽 종아리만 드러냈다. 허리는 끈으로 강하게 조였고 그래서 숨이 막히는지 표정은 억지로 참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조선에 이런 여자가 있을까. 이렇게 저고리를 바짝 죈 여자 말이다. 여기서는 안 되는 게 없어. 프랑스잖아. 그리고 여자 체형은 이래야 좀 살지 위와 아래가 같으면 비율이 안맞아. 대칭이 정확해야 균형이 잡히거든. 점례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이렇게, 그렇지 뒤로 확 젖혀야지. 챙이 큰 모자를 썼음에도 머리가 뒤로 휘어졌으므로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점례는 자신의 얼굴 가운데 이마를 가장 먼저 쳤다. 눈이나 코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이마가 넓고 두드러졌으며 거기에 하얀빛이 났다. 거울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이마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도 얼굴의 중심은 눈이 아닌 이마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이마 하나는 끝내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손에는 깃발을 하나 들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허전해서 그려 넣은 것인데 어느 순간 태극기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네 괘를 얼른 지웠다. 그리고 원의 곡선을 없애고 붉게 칠했다.

일장기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점례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불경한 짓을 했다. 유마가 오해할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태극기는 잊고. 그렇지. 손 사이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왔다. 살아있어. 마치 뱀이 꿈틀 거리는 것 같아. 생머리를 파머 한 것이 낯설었으나 파리에서는 무엇이든 통했다. 이런게 해석하면 되는 것이고. 여기에는. 딱 맞는 군. 그녀 뒤로 유마가 웃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점례의 등에 올라탄 듯이 보인다. 아래에 있는 점례는 힘들다는 기색이 없다. 어깨는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듯이 구부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 점례가 큰 가. 유마의 발이 점례의 허리께에 걸쳐 있다. 새 신이 아닌 군홧발이다. 한쪽 군화는 풀어 헤쳐져 있다. 벗으려고 하는 행동인지 신으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는 군복을 입고 있다. 자랑스러운 대일본 제국의 최고위 대장 제복이다. 별이 반짝인다. 무려 네개다.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거물의 모습이다. 얼굴은 상기됐다. 어디서 봤더라. 지휘하는 프랑스 여전사의 그림이다. 여기저기 마구 짬뽕이군. 그녀는 실없이 웃었다. 대충 그림이 완성됐다. 색칠을 하자. 스케치 후 바로 그런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다. 유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완성하자. 선물이다. 그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주기 위한 나의 작은 배려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점례의 손길은 바빠졌다. 처음에는 거칠게, 덧칠할 때는 종이를 뚫고 지나갈 정도로 눈에 힘을 주면서 세밀하게 칠해 나갔다. 어둡다. 비가 오려나. 허리를 펴고 점례는 시간을 보았다. 벌써 이렇게 됐나. 저녁이다. 그래서 어두워졌다. 서너 시간을 점례는 한시도 쉬지 않고 그림에 매달렸다. 완성됐다. 전체적으로는 환하다. 색칠의 마술사를 본뜬 것처럼 화려하고 날렵하다. 이것을 그에게 주자. 퇴근하는 그에게 안겨 주자. 그가 어떤 식으로 대답할지 미리 상상하지 말자. 점례는 기다렸다. 식사도 하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꼼짝 않고 그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린다. 유마다. 내 사랑, 그가 왔다. 점례가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여보, 당신에게 줄게 있어요. 어서요. 빨리 들어와요. 그러나 유마는 못 들었는지 들었어도 평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일부러 애간장을 태우려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점례가 문을 열고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어두워, 불을 켜야지. 아니, 잠시만요. 등을 뒤로 돌리고 있어요. 아니면 두 손으로 눈을 감던지요. 무슨 일인데 그래. 나 놀라는 것 싫어. 세살 아이처럼 유마가 투정을 부리며 등을 돌렸다. 주변이 환하게 밝아왔다. 점례가 말했다. 이제 돌아서 봐요. 똑바로 선 그에게 점례는 들고 있던 그림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선물이에요. 그 말도 하지 않았다. 유마는 잠자코 그림을 보았다. 칭찬 세례를 기대했으나 아니었다. 여보, 너무 정치적이야. 일장기에 군복에 권총이라니. 그가 책망하는 듯이 말했다. 전쟁은 끝났거나 끝나고 있어. 난 군복을 벗은지 오래야. 그리고 여긴 파리고. 맞아요, 너무나도 정치적이죠. 점례는 풀이 죽었다. 이런 그림 하나쯤은 남겨 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군복 입은 모습, 그리고 나의 모습. 그런데 당신은 옷이 왜 그렇지. 세련된 차림 많잖아. 조선식의 흰 옷은 좀 촌스러워. 한복인가. 그래도 좀. 그렇지만 그게 나인걸요. 아냐, 당신은 조선의 점례가 아니라 점례 마사코야. 유마가 조금 화를 냈다. 앞으로 가지 않고 간혹 뒤돌아 가는 점례에 대해 유마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다 잊었는데 새삼스럽게 과거를 꺼내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이 좋은가. 그럴 리가. 그때 점례는 자결을 시도했다. 그런데 왜. 이런 그림을. 그녀가 과거를 제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과거를 다스려야지, 상기시키면 안돼. 유마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점례가 풀이 죽자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주제만 빼고는 근사하다고 유마는 뒤늦은 칭찬을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난 뒤였다. 점례의 기분은 다시 착잡했다. 그가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지. 식탁에 앉으면서 유마가 편지를 들었다. 인사동 삼촌에게 왔어요. 그렇군. 맞아 삼촌이야. 삼촌체는 한 눈에 들어와. 주소를 읽어 내려가던 유마가 말하면서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읽어 내려갔다. 여보, 조선에 가봐야겠어. 급한 모양이야. 삼촌이 찾아. 당신이 보고 싶은가봐. 당신도 참. 그런 게 아니고 그림을 좀 가져오래. 지난번 당신 그림이 조선에서 최고가에 팔렸대. 그리고 전시회에 출품하라는데. 조선은 멀어요. 몽마르트르 언덕이 아니잖아요. 점례가 입을 내밀었다. 그가 편지를 내밀었다. 읽어봐. 거짓말 아니거든. 그리고 판단해. 점례는 편지를 읽었다. 유마가 말한 그대로였다. 그림을 가져오라는 것과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라는 것 두 가지가 요지였다. 그런 거라면 짐으로 부칠 수 있잖아요. 삼촌은 그렇게 안 해. 삼촌 스타일 알잖아. 작품이 손상될까 봐 그렇지. 더구나 지금 이 시기에 짐은 서너 달 걸릴 수도 있고. 분실 위험도 크고. 그리고 당신도 그렇지. 생명과 같은 당신 그림을 마구 실어 보낼 수 있어. 이 난리판에. 유마가 이런저런 이유를 댔다. 가게 하려는 의도였다. 미리 서로 짰나. 삼촌은 당신 그림도 그림이지만 파리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그림을 사오라는 거야.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이름난 사람들 그림을 살 수 있을 만큼 사라는 거지. 점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리 결정하고 밀어 붙이고 있다. 다른 의도가 있나. 내가 알지 못하는. 점례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유마는 틈을 주지 않았다. 아는 화가들 많잖아. 배고픈 화가들 그림을 사주면 서로 좋은 거 아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요. 기분 전환을 위해 점례가 거들었다. 그래 어쨌든 좋은 거잖아. 서로에게.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해요. 내일 해도 되고요. 점례는 뭐가 뭔지 몰랐다. 자신을 떼어 내려고 그러는가. 등떠미는 이유가 뭐지. 그것은 아니다. 한 번도 유마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오늘도 아주 유쾌하지 않았던가.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다. 불쾌한 시선을 보낸 적이 없다. 받은 기억이 아예 없다. 

전적으로 삼촌의 말을 듣기 위해서인가.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아버지 동생이며 삼촌 이상으로 유마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게 없다. 파리에 와서도 삼촌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을 보면 그다지 정이 깊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인가. 나 때문인가. 그런데 내가 그림을 가지고 가면 삼촌은 팔아서 이득을 본다. 나에게는 어떤 이득인가, 그리고 유마에게는. 점례는 조선행의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일본에 있는 내부대신의 정치자금이 필요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거액을 들여 멀고먼 조선땅에 갈 이유가 없었다. 편지 한 통으로 유마가 그런 결정을 너무 쉽게 내렸다. 그러나 조선행이라는 말은 잠결 내내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조선에 간다. 내 땅이다. 혹시 부모님 소식을 들을지도 모른다. 휴의는 살아 있을까. 상하이에서 돌아와 조선 땅에 있을까. 완용은. 심란한 밤이 지나가고 새벽에 들어서야 점례는 약간 눈을 붙였다. 아침이 환하게 밝았다. 유마가 먼저 일어났다. 그런 일이 없었다. 오늘따라 그는 아침형 인간이다. 그가 조용히 이불을 빠져나왔다. 산책할까요. 공기가 좋아요. 난 화장실이 급해. 찬 거리 사올게요. 알았어. 점례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없는 사이 유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 잡혔다. 그래 편지. 편지다. 유마는 식탁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그림 때문은 아니다. 뭐지. 그런데 이 편지에도 추신이 붙었다. 유마야, 편지를 들고 해에 비춰보렴. 사쿠라 꽃이 바람에 날리는구나. 말대로 유마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창을 열고 편지를 비춰보았다. 흐릿하지만 정말로 사쿠라 꽃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이런 작은 글씨가 보였다. 점례를 급히 보내라. 이유는 자세히 묻지 마라. 조선에 긴히 쓰일 때가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요인을 체포할 거다. 몸값이 높은 자를 잡아야 한다. 점례가 필요하다.

유마는 얼른 편지를 덮었다. 정보 장교의 촉감으로 그는 온몸의 세포를 동원했다. 점례를 이용하는구나. 휴의라는 자를 체포하려고. 아니면 선생으로 불리는 임정 최고 수뇌부인가. 알 수 없군. 점례를 이용한다고. 아버지 편지에도 가볍게 스쳤지만 그런 뉘앙스가 있다. 그렇다면 완용과 함께 언급한 휴의다. 점례와 휴의. 단순히 아는 사이는 아니다. 아는 사이 그 이상이 아니면 미끼의 효과가 없다. 점례와 휴의는 단순히 그런 관계를 뛰어넘는다. 미끼로 사용할 정도라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 유마는 편지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단순한 추측을 넘어 이것은 확신에 가깝다. 유마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이유는 묻지 말라면서 이유를 다 밝힌 편지 내용에 대해 그리고 삼촌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오랜만에 하는 심각한 결정을 내야 한다. 조선에 가봐야 해, 그러기로 결정한 거지. 아침거리를 사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점례에게 유마가 말했다. 일어나자 마자 그 얘기에요. 삼촌이 서두르라고 했잖아. 가는데 하루 이틀 걸리는 것도 아니고. 언제부터 삼촌말을 그렇게 잘 들었어요. 기저귀 차고 있을 때부터. 유마가 기저귀라고 발음하고는 뭐가 우스운지 그냥 웃었다. 웃고 있지만 그것은 명령이다. 부하를 대하는 상관의 명령을 점례는 피해나갈 수 있을까. 점례는 망설였다. 선뜻 그러겠다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가기 싫다면 내가 같이 갈게. 혼자 가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지. 내가 딴짓 할까봐. 그런 거 아니라는 것 알잖아요. 그럼 됐어. 다 끝난 거다. 유마가 자신이 동행하겠다고 팔을 걷었다. 점례는 또 놀랐다. 다음 달까지 원고를 마감한다면서요. 갔다 왔다 적어도 한달 정도는 깨질 텐데요. 걱정마, 갔다 와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올지 누가 알겠어. 그리고 마감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머리를 식힐 겸 나도 조선에 가봐야겠어. 마침 잘 됐어. 그리고 당신 부모님 말이야. 이번에 한 번 만나보지. 살아 계시다면 말이야.

점례는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가 부모님을 언급했다. 죽마을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봉숭아를 찾고 찔레꽃을 불렀더니 정말 고향에 가는가. 안 된다. 고향에 갈 수는 없다. 완용은 다 알고 있다. 어쩌면 휴의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순사들이 집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체포할 거야. 부모님은 돌아가셨어요. 지난번 말하지 않았던가요. 남동생 하나는 집을 떠난 지 오래됐고요. 고향에는 피붙이가 없어요. 그러니 조선에 가도 경성에만 머물까 봐요. 점례는 유마가 함께 간다는 말에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고민이 사라졌다.갈까 말까한 고민이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줄이야. 지난 밤에 괜한 걱정을 했네.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어지자 점례는 여행자의 기분이 됐다.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 점례는 홀가분 했다. 내일 출발하자. 유마가 가볍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내일요. 그래 단숨에 쉿물을 빼자고. 그게 아니고요. 쇠뿔도 단숨에 빼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 가려고 마음먹었으면 주저하지 말고 당장 가야지. 유마가 웃었고 점례가 따라 웃었다. 그리고는 정색을 했다. 마치 잊었던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이 그림은 어쩌고요. 그림 사오라고 했잖아요. 목적이 그건데 목적을 제외해 놓고 출발을 결정하다니. 잠깐 동안 유마의 놀란 얼굴을 점례는 보았다. 어 그렇지, 그림. 집에 있는 걸로는 부족한가. 유마가 둘러대면서 거실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다 해도 스무 점이 안되요. 그것도 거의 내 작품이고요. 한 삼일은 필요해요. 가는 여정도 알아봐야지요. 그거야, 영사관일이지 우리 일은 아닌잖아. 삼일 후. 오케이. 상쾌하게 유마가 일정을 수정했다. 오케이. 점례도 따라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복종한 점례는 결론이 나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유마는 그런 점례를 보면서 예술가 이상으로 서로는 묶여 있다고 여겼다. 서로는 서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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