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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 때 보지 못했던 편지를 점례는 돌아와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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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 때 보지 못했던 편지를 점례는 돌아와서 보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1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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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내부대신에 임명됐다는 일본에서 온 편지는 유마가 답장을 보낸 지 한 달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편지를 먼저 본 것은 유지가 아닌 점례였다. 유마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점례는 그런 유마를 내버려 둔 채 아침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센강은 혼탁했으나 고요했다. 빠르지 않고 느리게 흘러갔다. 가로수의 낙엽이 한 두 개씩 땅에 떨어져 쌓였다. 나갈 때 보지 못했던 편지가 와 있었다. 문 간 우편물에 편지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둥지의 새가 무엇이 있나 궁금해하면서 부리를 들고 있는 것처럼 편지는 쉽게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 온 것이구나. 아버님이 보내셨군.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런 예상을 하면서 손을 들이밀었고 알을 꺼내듯이 조심스럽게 손에 잡았다. 방금 어미 품속에서 있었던것처럼 따뜻한 감촉이 맴돌았다. 내부대신이라는 글자가 먼저 눈에 띄었다. 점례는 참의원이 내무대신으로 임명됐다는 것을 알았다. 수상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가. 엄청난 일이다. 점례는 마음이 급했다. 여보, 일어나 봐요. 아버님이 보낸 편지예요. 내부대신 직인이 찍혀 있어요. 유마는 킁, 하고 몸을 비틀었다. 눈은 뜨지 않고 내무대신. 하고 중얼거렸다. 아버님이 보내신 거예요. 읽어 드릴까요. 아니, 아니 됐어. 당신이 읽고 나중에 말해줘요.  유마가 더 자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불을 얼굴 위로 덮어썼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 게요. 점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고집 부릴 이유가 없었다. 술이 약한 그가 조금 과음한 것 같았다.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다. 피로를 풀어야 오후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점례는 유마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는 모든 일을 잠을 자고 난 후로 미루는 습관이 있었다. 아무리 중하고 급해도 졸린 상태에서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말없이 물러났다. 

그녀는 편지를 그의 머리맡에 두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속풀이 해장국을 준비하기로 했다. 조선에 있을 때 무교동으로 먹으로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길은 즐거웠고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콧 노래가 나왔다. 유마는 선지가 들어간 국밥을 유난히 좋아했다. 다른 것도 먹을 게 많이 있었으나 무얼 먹을까요. 하고 물으면 언제나 대답은 국밥이었다. 국밥, 조선 국밥이 최고야. 왜 일본에는 이런 게 없는 지 몰라. 그런 유마를 위해 오늘은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국밥을 만들 수는 없었다. 더구나 선지를 구하는 것은 난망했다. 그래서 그녀는 맑은 탕국을 끓이기로 했다. 소고기를 준비하고 마늘과 무를 곁들였다. 소금을 조금 치니 간이 맞았다. 유마가 깨기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편지 내용이 궁금했으나 참기로 했다. 자신이 쓴 편지에 대한 답장이 궁금했던 것이다. 유마는 두번째 답장을 점례에게 맡겼다. 같이 쓰자면서요. 아냐 난, 다른 것 써야해. 부탁해 여보. 그러면서 유마는 점례가 쓴 답장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오케이, 이거면 아버지도 기뻐 하실 거야 하면서 자신이 직접 우체국에 가지고 가서 붙였다.

그랬으니 점례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점례는 기다렸다. 유마가 먼저 읽고 나서 말해달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으나 아들 이름으로 온 편지를 점례는 뜯을 수 없었다. 수신인은 점례가 아닌 유마였다. 그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답장은 아들에게 한 것이지 내게 한 게 아냐. 점례는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무대신은 유마에 속한 것이지 나에 속한 것은 아니다. 점례는 거실을 한바퀴 돌면서 그런 생각을 떨치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그림들을 하나씩 감상했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만족을 표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봐도 작품의 가치는 있었다. 그녀는 전쟁의 그림 대신 파리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유화를 주로 그렸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전쟁이었다. 일본의 승리였다. 그 반대로 조선민의 삶이었고 죽음이었다. 욱일승천하는 욱일기가 파란하늘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잘려나간 팔다리는 실체였고 과거가 아닌 현실이었다. 어디든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과 속해 있었던 과거 세계를 점례는 고민했다. 그리고 실감했다. 전쟁은 어디선든 피할 수 업서. 여기도 마찬가지야. 파리가 해방된지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다.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더 빠르게 생명이 자라고 있다. 예술가들은 그것을 눈여겨 보았다. 사실 내 주제는 인간의 본성이예요.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죠. 인간은 왜. 하는 원초적인 질문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전쟁은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주지요. 그런 면에서 작가에세 전쟁은 이득이에요.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요. 유마가 당신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냐고 말했을 때 점례는 이런 식으로 답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인간의 본성에 심취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해답을 구해야 하는 이유다. 당신의 글 주제는요. 역시 인간이겠죠. 사랑, 증오. 무게중심의 차이일뿐 본질은 다르지 않을 거예요. 답을 말해 놓고 질문을 한다고 유마가 뾰루뚱하게 받았다. 대답할 시간을 줘야지. 미안~ 미한해. 점례가 혀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작품의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을 탓할 수는 없다. 점례가 그러는 것처럼.

맞아, 나도 당신의 그림 주제와 같아. 사랑과 전쟁, 전쟁과 평화 같은 어울리지 않은 것들이 핵심이야. 우습지. 왜 인간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까. 파괴 하고 다시 복구하고, 다시 파괴를 반복하지. 유마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다음말로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 당신을 주인공으로 삼았어, 라고 말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는 글의 주제는 말했으나 주인공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알겠지. 그러나 사랑과 증오라는 그녀의 말은 딱 들어맞았다. 점례, 식민지 조선의 일본군위안부. 그가 아내 역할을 하면서 때로는 비서요, 동지로 내 곁에 있다. 나는 진실을, 내가 보고 겪은 그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질문이 나온 순간 그렇다, 이니다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노래 후염구 같은 것이 아니다. 점례가 그림으로 나를 표현하고 자신을 그렸듯이 나는 글로 나와 그녀를 기록할 것이다. 과연 그것은 가능할까.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유마는 착실하게 그 작업을 해나갔다. 작업 진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등장인물 역시 뭉뚱그렸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 점례가 자기 이야기를 보고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지금은 과거를 꺼낼 때가 아닌데,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덧내는 것은 아닐까 유마는 걱정했다. 걱정은 거기까지였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쓰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을 유마는 잠재울 수 없었다. 우리 시대의 일은 누군가는 그려야 하고 또 누군가는 써야 해. 그 누군가가 내 옆에 있는 점례이고 또 나 자신이다. 유마는 숙취로 머리가 띵한 상태에서도 이렇게 현재를 정리해 나갔다. 빨리 일어나야지, 몸을 추스려보자. 잠을 잔 것은 분명해. 또다시 자는 일이 있어도 일단은 일어나자. 그래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절대로 과음하지 않기로 했다. 과하면 다음날이 그냥 지나간다. 아까운 시간이다. 하루는 세상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 만큼 길고 길다. 원고로 치면 끊없이 인쇄할 수 있는 분량을 채울 수 있다. 어젯일을 후회하면서 그가 슬리퍼를 끌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어린 병아리가 엄마를 따라 오듯이 달콤한 냄새, 추억의 냄새를 찾아 유마의 발길은 저절로 부엌으로 향했던 것이다. 알에서 부화한 새의 후각은 이런 것이다. 크고 나서도 나무와 나무사이에서 용케도 자기 집을 찾아낸다. 오늘은 내가 막 알에서 깨어난 날이다. 그런 기분이야. 세상을 처음본 느낌이랄까.  냄새가 좋아, 여기가 파리인지 조선의 무교동인지 모르겠군. 이 냄새 정말 오랜만이야. 유마가 너스레를 떨었다. 여보, 일어났어요. 보면 몰라. 당신은 종종 뻔한 것을 물어. 그것말고는 다른 불만은 없어요. 그게 다야. 그것이 딱하나 나의 불만이야. 당신도 참, 점례가 혀를 찼다. 내 뒤집어진 속을 좀 달래줄거지. 그러려고 국밥을 끓였어요. 시래기가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런대로 먹을만 할 겁니다. 난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발길이 절로 이리로 이끌었다니까. 난 병아리야, 막 알에서 태어난. 당신은 엄마닭이고. 그러니 날 품어줘. 품었으니 병아리가 됐죠. 아니면 지금도 알 상태일걸요. 맞아. 그렇지. 품어 줬으니 이제 먹이를 줘. 앉아요. 그 전에 손을 씻고요. 세수하라는 말은 안할게요. 오케이. 유마가 흔쾌히 약속했다. 냄새는 어때요. 스멜 굿. 당연히 합격이지. 유마가 영어를  썼다. 내가 믿지. 당신은 훌륭한 요리사야. 그 어떤 프랑스 요리사보다 낫지. 내가 인정해. 당신이 인정하면 최고 세프가 되는 건가요. 그만해요. 비행기 떨어지겠어요. 그러다가 맛이 없으면 어쩔려고요. 아니야, 냄새는 맛을 알려주는 전주곡이야. 속일수 없어, 이 냄새는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어.

손이나 어서 씻고 오세요. 유마는 할 일을 잊었으나 생각났다는 듯이 앉았던 탁자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점례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유마는 지적해 주는 점례가 고마웠다. 잔소리가 피아노 곡으로 들려. 바가지를 긁어 줄때 나는 더 배워야 한다고 다짐해. 점례는 부족한 것을 늘 채워줘. 고맙지 뭐야. 유마가 식탁으로 돌아왔을 때 상은 차려져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유마는 감탄부터 했다. 그런 모습을 점례는 어미닭의 모습으로 지켜 보았다. 대충 얼굴을 씻었으나 머리는 정리하지 못해 어수선했다. 사춘기 소년 같은 모습이다. 아침 식탁의 차림새로는 나쁘지 않았다. 이 모습 기억했다가 스케치해도 돼죠. 점례가 물컵을 갖다 놓으면서 물었다. 유마가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미안, 미안 너무 배가 고파서. 아네요. 그 정도면 준수해요. 맛은 어때요. 그렇지 참 평가를 해야지. 여보 고마워. 먹기도 전에 유마는 이렇게 말했다. 저 남자를 내가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매사에 나를 배려하는 저 남자. 군인이었다니. 사람을 죽이는 군인이었다니. 믿을 수 없다. 유마 나의 유마. 어느 한구석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다. 입맛을 다지며 유마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래, 이 맛이야. 숙취가 한방에 사라졌어. 역시 해장국은 조선음식이 최고야. 난 일본이 아닌 조선에서 태어났어야 했나봐. 

점례는 행복했다. 이 행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오래 갈 분위기다. 그런데 여보, 편지에는 뭐라고 썼어. 유마가 먹다말고 생각난듯이 물었다. 아직 보지 않았어요. 왜, 얘기해 달라고 했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마는 개봉하지 않은 점례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저 여자는 예절을 알아.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정확히 구분해. 당신 이름으로 온 거잖아요. 부자지간에 비밀 얘기도 있을 수 있고. 비밀, 하하 뭐 그런 게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었나. 부자의 비밀을 알아챌까봐 겁이 났어. 당신도 참. 점례가 가볍게 핀잔을 하면서 일어나 편지를 가져왔다. 식사하고 읽어 볼래요. 아냐, 지금 보지 뭐. 아까 내무대신이라고 한 것 같은데. 맞지. 봉투를 받아든 유마가 내부대신을 확인하고 맞네, 맞아 내무대신이야. 우리 아버지가 수상 다음 자리에 올랐어, 하고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듯 감격한 표정을 유마가 지었다. 그리고 껄껄 웃었다. 아버지는 대단해. 축하해야지. 그래요. 축하주 한 잔 해야지요. 갑자기 부엌이 밝아졌다. 늦은 아침의 해가 창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늘도 축복을 내려주고 있어. 여보 축하해, 여보. 당장 전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냐, 아버진 마음만으로도 만족하실 거야. 그리고 지금 전화를 한다고 해도 받을 형편이 못돼. 아버진 바빠. 나와는 다르거든. 대신 바로 답장을 쓰자. 그것이 효도지, 효도가 따로 있나. 그래요, 여보. 그렇게 해요. 이번에도 답장은 당신 몫. 그럴까요. 점례는 마다하지 않았다. 유마는 요즘 소설에 빠져 있다. 그에게 방해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그가 하루라도 빨리 소설을 완성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점례가 선뜻 답장하겠다고 대답한 이유였다. 

창가에 앉은 점례는 들어오는 빛을 피하지 않고 감상했다. 이 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플라타너스 잎이 지고 있었다. 바람이 강해서가 아니라 계절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무의 잎은 제명대로 살다 가고 있다.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앙상해진 가지는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생명은 시작되고 있다. 유마에게서 받아든 편지를 점례는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는 밝게 시작했으나 불안했다. 전쟁을 낙관하다가 어느새 비관적으로 변해갔다. 우리가 이기는 것은 분명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패전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기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에 있었다. 점례는 일본이 전쟁에 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정세에 밝은 내무대신이 아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일본이 전쟁에 진다. 그러면 조선은 어떻게 되지.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이기든 지든 점례는 그것이 자신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에 있다면 모를까 여기는 이국만리 파리 아닌가. 점례는 그것이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녀는 마시다 만 커피잔을 들었다. 먹기 좋게 식은 잔에서 묵직한 원두 맛이 묻어났다. 한 모금 마신 그녀는 다시 편지에 눈길을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의견을 물었다. 지난번 편지에서처럼 군인이었던 아들이 어떻게 정세를 보는지 궁금해 했다. 그것은 아들의 의중을 떠보는 것임과 동시에 그에게 정치적 수업을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의원직을 물려 주면서 아들을 정치인으로 키우려는 또 다른 야심을 갖고 있었다. 내무대신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전후 세계는 엄청난 격랑에 휩쌓이고 그것은 정치가 해결할 문제였다.

일본의 정세와 대응을 자세히 써보낸 것은 그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일단 이겼을 경우는 생략하겠다. 다만 가정이지만 질 경우다. 우리는 최대한 항복을 늦추려고 한다. 이것은 황실과도 이야기가 된 것이다. 소련이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다. 소련의 참전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점례는 조금 당황했다. 소련의 참전이 일본에게 불리할 것으로 봤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소련이 전쟁에 발을 담가야 한다. 아마도 조만간 그런 소식이 들릴 것이다. 내무대신은 소련의 움직임을 이같이 예측했다. 이것은 단순한 예측이 아닌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소련이 참전할수록 일본은 불리해 지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편지는 그것을 바라고 있다. 다음 말에서 점례는 노련한 정치인의 분석에 감탄했다. 미국 일방의 승리는 일본에게 위험하다. 어쩌면 일본이 둘로 쪼개질 수 있다. 막강한 미국의 힘을 분산시켜야 한다. 소련이 전쟁에 참여하고 독일로 진격하거나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남하할 경우 승전국의 지분은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다. 그렇구나, 점례는 무릎을 쳤다. 전쟁이 이런 식으로 흘러 가는구나. 그러면 우리는 비록 패전하더라도 미소 양국의 틈새에서 줄다리기를 할 수 있다. 패전국이지만 패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물론 패전에 대한 책임도 아주 작은 선에서 마무리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소련과 접촉을 시도했다. 여러 루트를 통해 소련 서기장과도 대화했다. 눈치빠른 로스케 놈들은 일본이 질 것을 낙관하는 눈치더라.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나서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듯 싶다. 유마야, 너는 먼 이국에 있으니 전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거다. 그곳 분위기는 어떠니. 그리고 이같은 아버지 전략에 어떤 점수를 줄 수 있니. 기탄없는 너의 의견을 기다린다.

내무대신은 아들이 편지를 받자 마자 답장할 수 있도록 글 중간 중간에 번호를 매겨놓고 아들의 의견을 물었다. 점례는 이번 답신은 내가 아닌 유마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쓰기에는 너무 벅찼다. 지난번 편지는 아버지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너는 판단 내리기를 주저했으나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어떤 때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너, 글쟁이가 되겠다고. 글쎄 너는 어릴 때부터 글솜씨가 있었다. 백일장에서 상을 타온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군인으로 남기를 바랐다. 제대 후에는 아버지처럼 정치인의 길을 가고. 내가 지역구를 물려주마. 하지만. 네 뜻이 너무 완강하니 아버지가 어떻게 할 수 없구나. 품안의 자식일는 말을 너두 알겠지. 이 말을 하는 아버지의 가슴이 아프다. 넌 아비보다도 엄마를 닮았다. 네 엄마가 감수성이 풍부하잖니. 지금도 시를 쓴단다. 여하튼 너는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최상위에 오를 것을 아비는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림을 포기하다니 여간 아쉬운게 아니다. 하지만 그림보다 더 위대한 것이 글이 아니더냐. 좋은 글을 많이 쓰도록 해라. 부탁하나만 하자. 아버지 일에 한 쪽 다리를 걸쳐 놓는 것을 일지 말아라. 세상일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지금 같은 전시에는 더 그렇다. 정치는 일상이고 모든 것의 상위개념이다. 정치가 있어야 경제도 문화도 있다. 문화도 있다고. 네가 쓰는 글이 문화아니냐. 

여기까지 읽고 점례는 다시 편지에서 눈을 뗐다. 다음 글씨에 조선여자라는 문장이 보였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새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식은대로 커피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뜨거우면 뜨거운대로 식으면 식은 대로 변치 않는 커피 맛 같은 사람은 누굴까. 점례는 뜬금없이 그렇게 물었고 유마라고 대답하고는 입꼬리를 올리고 살짝 웃었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조선 여자는 어떠냐. 파리 화랑가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은 지난번 편지를 통해 받았다. 대회에서 수상한 적은 있니. 살롱전 같은 것 말이다. 미술잡지에 도판이 실리는 정도로는 너도 만족 할 수 없겠지. 하여튼 네가 글을 쓰고 조선 여자가 그림을 그린다니 볼만 하구나. 점례는 올렸던 입꼬리를 내렸다. 조선여자라는 표현이 거슬렸다. 차라리 점례라고 표현했으면, 그게 마음에 든다. 그래서 이번에 답장을 쓸 때 아버지 조선여자는 점례에요. 창씨개병한 이름은 점례 마스코고요. 조선여자는 이곳에 없어요. 점례는 그렇게 했으면 싶었다. 조선여자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문장에서 점례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서로 누가 먼저 꼭대기에 오르는지 각분야에서 경쟁해도 좋겠구나. 그리고 참, 너의 결혼 문제를 상의하지 않을 수 없구나. 아빠의 동료 의원이며 황실의 사촌이 늦둥이 딸을 하나 두고 있다. 지난해 동경대 법대에 들어간 처녀인데 인물도 보통이 아니다. 우선 사진을 동봉하니 한 번 보거라. 그리고 네가 일본으로 오던지 아니면 적당한 곳에서 여자를 한 번 만나라. 아버지도 손주가 보고 싶구나. 이 대목에서 점례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누그러진 마음에서 불똥이 일었다. 가슴이 뛰어 진정하기도 어려웠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유마가 피는 시가에 손이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만 두었다. 결혼이라. 그럼 나는.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오자 떨림은 곧 진정됐다. 대신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한숨은 곧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래 결혼해야겠지. 순주를 보야 더 큰 정치를 하지. 그럼 나는 뭐가 되지. 뭐긴 뭐야. 점례가 어디가겠어. 하던일 계속하면 되지. 유마가 없더라고 내 앞길을 챙길 수 있어. 그게 가능하냐고. 물론 가능하고도 남지. 그러면서 그녀는 사진 한 장을 손에 들었다. 대학건물을 배경으로 두꺼운 책을 들고 활작 웃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여학생이었다. 단발 머리에 교복을 입었는데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잘 어울렸다. 그녀는 사진을 식탁위에 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만사가 귀찮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한 잠 자고 싶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등에 손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유마다. 그새 일어났는가. 밥을 먹자 말자 편지를 읽는둥 마는둥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던 유마가 점례의 등 뒤에 서 있다. 

그 사진 치우라고 했잖아. 아니 치우지 못한 내 잘못이지. 나는 전혀 관심없어.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불효자식이라 안됐지만 난 아니야, 결혼할 생각 없다고. 난 결혼해서 애 낳고 싶지 않아. 할 일이 많거든. 더구나 사진속의 여자는 아냐. 털 끝 만치도 없어. 나 때문이라면 신경 꺼도 돼요. 난 당신이 결혼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게요. 그런 거 아냐. 알잖아 당신도. 사진 이리줘. 확 찢어 버리게. 그러지 마요. 아버님이 주신 건데 함부로 하면 안 되요. 나중에 후회한다니까요. 점례는 사진을 받으려는 유마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옆에 있는 미술잡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 안 보이는 곳에 감춰둬.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으라고. 그러면 나도 조금은 효도하는 셈이지. 유마는 저녁 늦게 일어났다. 하루를 새면 하루를 잠으로 보충했다. 저녁은 먹지 않았다. 점례도 빈 속이었으나 배가 고프지 않았다. 창밖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이 희미하게 거실 안쪽을 밝혀 주고 있었다. 불 켜지 말아요. 그냥 이대로 창밖을 구경해요. 어, 그럴까. 불을 켜려던 유마는 멈칫했다. 그리고 점례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보, 우린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야. 당신을 두고 내가 다른 여자와 사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어. 당신은 내 아내며 동지며 친구며 애인이야. 그만, 그만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점례가 유마의 입을 막았다. 그는 점례의 손을 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녁에 작가 모임에 있어. 아까 말하려다 깜박했군. 나가봐야 해. 미안해 저녁은 혼자서 먹어. 유마가 일어섰다. 먹고 나가요. 조금이라도. 생각없다니까. 정말이라고. 빠질 수 없는 저녁 약속이야. 술은요. 안 먹을 거야. 이렇게 고생했는데 술이 들어가겠어. 그래요. 당신 건강도 생각해야지요. 옷을 챙겨 입은 유마가 급한듯한 모양새로 나갔다. 조심해서 돌아오세요. 걱정 마, 일찍 올게.

점례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녀는 덮은 잡지를 열었다. 사진이 들었던 곳이 바로 펴졌다. 손에 들고 얼굴 가까이 사진을 가져왔다.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어두운 실내에서 그녀는 밝은 빛으로 빛났다.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빛과도 같이 웃는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반짝 반짝 빛났다. 점례는 갑자기 자신이 던져졌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 내팽겨진 건가. 그녀는 편지를 들었다가 얼른 놓았다. 차가운 얼음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편함에서 꺼낼 때 느껴던 따스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행복으로 가득한 하루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불길한 냄새가 번졌다. 유마가 없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했으나 가능하지 않았다. 유마는 정말 결혼 생각이 없을까. 그 자신은 그렇다 쳐도 내무대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까. 정치인 아들이 대를 물려 받으려는데 가정 없이 가능할까. 나는 지금 위험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구나. 점례는 시골집의 문지방을 넘다 넘어져 머리가 깨진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커피잔을 내려놓기 위해 점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른 잔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났다. 포도주를 가득 따랐다. 좀 무겁다 싶을정도로 술은 잔의 위까지 가득찼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고 점례는 다시 일어섰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해가 보고 싶어. 어둠이 가득찼네. 노란 갓을 쓴 거실등이 식탁을 비추고 있었다. 점례는 다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 줄을 읽기 위해서였다. 추신이라는 글은 안 읽고 넘어갈 수 없게 굵은 글자로 본문과 다르게 눈에 띄었다. 대개 이것은 짧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길었다. 그만큼 중요하다고 내무대신이 생각한 때문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휴의와 완용이라는 글자를 또 보았다. 진정됐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잔을 들어 한 잔 마셨다. 잔이 넘쳐 흘러 내린 것이 손등에 조금 묻었다. 포도주의 붉은 빛이 타는 자신의 속마음과 비슷했다. 조선총독부를 공격한 휴의 일당은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다. 테러리스트를 처단하지 못하면 대일본 제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유사한 일이 재발될 수 있고 그가 또 어떤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 잡범을 잡아들이고 행인들을 집어 넣고 범인으로 몰아간다고 해서 분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진짜 범인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참에 만주에 있는 군대를 동원해 상하이 임정을 아예 박살 낼까 생각 중이다. 뿌리를 뽑아 아예 싹이 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휴의와 상하이 조선 임정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됐다는 것이 우리 첩보기관의 판단이다. 공교로운 것인지 어떤지 종로서장 완용이 휴의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묘한 인연아니냐. 하나는 조선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다른 하나는 그런 자를 잡기 위해 일본인이 됐다. 승자가 누가 될 것 같니. 물어보나 한 질문이다. 점례는 이 대목에서 손을 떨었다. 이런 일들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이 앞섰다. 오로지 그림만 그리려던 자신이 계획이 어긋날 수 있다. 파리에 와서 휴의와 완용을 떠올릴 줄은 몰랐다. 이제 도쿄의 여자는 없고 그 자리에 그들이 차지하고 들어섰다. 새로운 걱정이 생기니 그 전의 걱정은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녀는 그림 속으로 들어 가고 싶었다. 고개를 약간 돌렸다. 비스듬히 보이는 벽을 따라 그와 유마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일종의 자화상이다. 그녀는 붓을 든 자신과 책을 들고 한 손은 붓든 자신의 어깨를 집고 있는 유마를 그려 유리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두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자신을 맞는 것은 그림 속의 자신과 유마였다. 유마도 그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다. 들어가서 유리속에 숨어서 영원히 나오지 않고 싶다. 그곳은 낮과 밤이 세상처럼 돌아가니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침 햇살을 받고 저녁 노을을 기다리는 곳이다. 돌가는 세상 일을 다 보고 느끼고 있다. 아냐, 그림은 그림일 뿐이야. 그곳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오로지 평온뿐이지. 그래 나에겐 그게 중요해. 그런 곳으로, 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이게 무슨 일이람. 새로운 일이 계속 일어나고 그 일은 내 몸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불행인가. 잇따라 오는 그런 종류의 불행인가. 점례는 낭만주의자에게 닥쳐온 불행을 웃음으로 넘겨 버리지 못하고 낙심한 사람처럼 잠시 고뇌에 빠져들었다. 골치 아픈 일이다. 점례는 편지 읽기를 멈추고 가죽 정장에 금박 입힌 성경책을 들었다. 그러다가 그대로 옆으로 밀쳤다. 세로로 된 성경 글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작아. 이렇게 작은 글자라니. 이 정도는 돼야지. 편지 글 말이야. 

굳이 조선독립이 필요한지 내가 조선인 입장이라고 해도 이해가 안 간다. 우리는 원래 같은 민족이었고 조선은 여러 대 위에서 갈라져 나온 우리 선대가 세운 나라다. 내선일체가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어째서 그들은 저항하고 반항하느냐. 사억 중국 인구도 우리에게 대들지 못하는데 겨우 삼천만 인구가 싸우려고 든다. 어리석은 자들은 말로 해서는 안 될 때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 점례는 다시 그림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번에는 들어갔다가 영원히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그런 통로를 개척하고 싶었다. 들락날락 해야지. 그럴수만 있다면. 어쨌든 우리는 휴의와 같은 인간을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한다. 일본과 조선이 한 덩이로 뭉쳐 대항해도 어려운 싸움인데 식민지 조선에서 난동이 벌어졌고 그 주동자를 일 년이 지났어도 아직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완용을 족쳤다. 서신으로, 통신으로 그랬고 조선헌병대사령관을 따로 불러내 세 달의 기한을 준다고 일렀다. 그래도 잡지 못하면 조센징의 실력 없음 때문이고 게을음 때문이니 종로서장직을 박탈하려고 한다. 아마도 사령관이 내 뜻을 분명하게 그보다 더해서 세게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혹시 너는 그들에 관한 정보가 없니. 점례는 인사동에서 네 삼촌과 함께 살았다. 언젠가 너는 술자리에서 완용을 보는 점례의 눈초리가 아는 사람을 피하는 듯하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휴의와 완용이 친구사이인 것처럼 점례도 혹시 그런 사이인지도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점례를 이용하면 일은 쉽게 풀릴지 모른다. 이용보다는 활용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넌지시 그들에 대해 혹시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 점례에게 물어봐라.

이 대목에서 내무대신은 자신의 편지를 아들 뿐만 아니라 점례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 같다. 다음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직접적으로 하기 어렵다면 내가 궁금해한다고 전해라. 점례와 너는 같이 호흡하고 있지 않느냐. 아니면 이 편지를 그녀에게 보여주고 동의를 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점례는 정치인의 용의주도함과 비열함을 동시에 보았다. 그러나 크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내부대신이 어떤 인물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니 편지 내용을 내가 안다는 사실을 그가 안다고 해도 불리할 것도 없었다. 고향 친구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니 그렇게 친구가 됐고 그들이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내가 그림을 그리러 파리에 온것과 같은 것이다. 모두가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이 운명이라면 점례는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다고 할까. 조선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인사를 나눴다고 할까. 휴의가 그런 인물인지 내가 알리 없잖은가. 그리고 완용도 마찬가지다. 고향을 떠나 온지 강산이 한 번 흐릴만큼 흘렀지 않은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이 한마디면 된다. 굳이 그가 물어 본다면. 

추신은 이어졌다. 늘 흩어지고 서로 싸우는 것이 조센징의 특징이지만 때로는 감싸주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상한 족속이다. 우리에게서 갈라져 나오면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말이다. 유마야, 내 아들 유마야. 만약이라는 말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말은 유용하게 쓸 때가 있다. 지금처럼 말이다. 만약 우리가 큰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조선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만주는 넘겨주고 다른 아시아 국가는 다 연합국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 조선만은 우리 일본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우리 영토다. 히든 카드로 조선을 남겨둘 생각이다. 조선은 영원히 일본 영토여야 한다. 왜냐고. 애초부터 일본과 조선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조선총독이 되기를 희망한다. 어떤 식으로든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조선에서 나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다. 왠지 조선은 이곳 도쿄보다 더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처럼 조선에서 같이 만나면 좋을 것이다. 어리석은 총독 때문에 고초를 겪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저 추억이 되고 있다. 내가 총독으로 부임하면 그때는 경비를 철저히 해 총격으로 혼란스럽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를 할 것이다.

창백한 중년 남성의 얼굴이 점례 앞에 어른거렸다. 다음 순간 당황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중 늙은이가 따라왔다. 무뚝뚝하게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화난 표정을 짓다가 고함을 치다가 다시 웃는 사람, 순간마다 자기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변신에 능한 내무대신의 모습을 점례는 상상했다. 그가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내 때문이 아니다. 나도 휴의와 완용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는 알지 못한다. 휴의와는 인사동에서 잠깐 만난 것이 전부고 완용은 내무대신이 알듯이 술집에서 잠깐 스쳤을 뿐이다. 아, 그렇지. 유마는 내가 완용을 아는 것 같다는 말을 아버지게에 했지. 나한테는 말하지 않고. 뭐, 그럴 수 있어. 대화중에 나왔을 수도 있고. 별 거 아냐. 그건 그렇고 나를 어떻게 이용한다는 거지. 휴의를 잡기위해. 나와 만났 때 덥치겠다고. 그런데 여기는 파리잖아. 조선에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굳이 휴의를 만날 이유가 없어. 그런데 왜 내무대신은 그런 표현을 썼지. 나를 믿지 못하니 조심하라는 암호일까. 점례는 다른 건 몰라도 그 내용만큼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휴의를 만나 나보고 중재자 역할을 하라는 의미인가. 하는 얼토당토 않는 생각도 해봤다. 어찌됐든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이 있고 서로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간다. 내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 답장을 서둘러 보내려다 내부대신이 착각한 모양이다. 전황이 급하고 왕실과 교류 과정에서 골치아픈 일이 발생해 잠시 착각했나. 아니다. 나를 이용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휴의를 체포하는 것이다. 잡히지 않으니 미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나는 파리에 있고 휴의는 만주에 있는지 조선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먹이로 유혹할 수 있지. 점례는 편지 때문에 어지러웠다다.

혼란만 남겨두고 편지는 끝났다. 점례는 남은 잔에 있는 술을 마져 마셨다. 아까와는 달리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마신 덕분인지 알코올 기운이 목을 타고 위장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온전히 느꼈다. 억지로라도 기분을 전환해야 하는데 쉽게 그렇게 됐다. 마치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우연히 찾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알코올은 이런 때 필요했다. 술 더분에 마음을 다잡은 점례는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닥치면 그때그때 생각하자. 이미 많은 부분은 그렇게 했다. 걱정은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점례는 졸린 눈을 부비지 않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 점례가 눈을 떴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인기척 때문인지 깨고 나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일찍 들어왔네요. 내려다보고 있는 유마를 향해 옷을 털면서 점례가 입을 열었다. 더 자지, 미안 깨워서. 아니에요, 저절로 눈이 떠졌어요. 그런데 몇 시죠. 11시가 막 넘었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어, 그래 싸움이 있었어. 지난번에도 그랬거든. 내가 끼어들 입장도 아니어서 슬그머니 나왔지.

점례가 눈을 비볐다. 잠은 달아났다. 자기들끼리 하는 정치토론이야. 비씨 정부 인사들을 전부 사형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많았어. 당신도 알지. 이런 험악한 시대에는 강경파들의 힘이 세잖아. 그것이 또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소수의 사람은 너도 그 상황이었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걸 하고 비아냥대지만 호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동정심이 통할 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았거든. 그런 논리가 아직은 먹지 들 수 없잖아. 나찌에 협조한 자들이 이익을 챙긴건 분명해. 그러니 군중들은 더 분노하는 것이고. 나라를 팔고 동료를 팔아서 호위호식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내가 거기에 끼어들 이유가 없어서 그냥 좀 구경하다가 나왔다. 잘했어요. 당신이 거기서 이러꿍저러꿍 누구 편을 들 상황은 아니잖아요. 내 나라 일도 아닌데. 그건 당신 말이 맞아. 그런데 분명한 것은 처형파나 동정파나 모두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거야. 나도 그렇고, 신이 나기도 하더라. 전후에 벌어지는 프랑스 내분은 우리 일본에게도 분명 어떤 의미를 줄게 틀림없어. 조선도 마찬가지고. 즐길 만큼 구경한 나는 그냥 물러났어. 이방인이잖아.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아냐. 그리고 우린 저들과 달리 아직 전쟁 중이고. 비록 밀리고는 있지만. 소련이 변수지. 어디까지 개입할지가 중요해. 소련이 끼어들어. 그럴 거야. 유마는 자신이 한 말에 놀랐는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소련이 끼어드는 거. 아, 맞다. 아버님이 그러셨지. 당신도 아버님과 같은 생각이군요.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잖아. 아, 만사가 귀찮군. 나에게 전쟁은 어울리지 않아. 뭐, 따뜻한 꿀물이라도 드릴까요. 아냐, 물은 많이 마셨어. 밤새 화장실 들락 거릴거야. 저녁에는 참는 건 좋은 일이죠. 그런데 답장은 써봤어. 이번에는 당신이 해봐요. 글은 당신이잖아요. 점례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지 뭐. 유지가 흔쾌히 말했다. 지난번 편지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갑자기 효심이 생겼기 떼문이다. 내일 약속도 없으니 오전에 써서 오후에 우체국에 가자. 가서 점심 먹고 오자. 모처럼 우리끼리 데이트하고요. 점례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근처에 성당도 가봐요. 모처럼 파리를 즐겨보자고요. 둘은 나란히 누웠다. 커다란 달이 창가에 비치고 있었다. 여보, 그런데 이번 소설은 길게 간다면서요. 단편과 비교하면 어때요. 당신 단편은 참좋아요. 장편은 처음이라 긴강이 돼. 호흡이 길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을 독자들에게 주는 것인데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야. 길게 가면서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거든. 그래서 작품은 작가와 운명공동체야. 그림도 그렇고요. 모든 예술활동이 다 그렇지. 서두르지 말고 제대로 한 번 달려 보자고요. 처음에 오버 페이스 하지 말고 끝까지 자기 체력을 유지해요. 마라톤 선수처럼. 그래요, 처음에 앞서 나가다 중도포기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늦더라고 완주해야지. 난 당신을 믿어요. 도서관에서 당신책을 읽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글쎄. 뭐 다르겠어. 아니 달라요. 너무 달라요. 내가 아는 당신과 책 속의 당신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대단할 것 같아요. 난 아냐. 난 안 볼거야. 내 손을 떠났으니 매정하게 보내야지. 다른 읽을 거리도 많은데. 그건 당신이 그 작품에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에요. 내 운명을 가능하게 좋게 그려주세요. 비극보다는 희극으로요. 그게 마음대로 될까. 노력은 해볼께. 당신이 끌어들이려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에 힘을 실어보지. 언제 대충이라도 애기해 줘요.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아직은 비밀. 사실은 나도 잘 몰라. 어떻게 가고 있는지. 그냥 거칠게 써놓고 계속 고칠 생각이야. 세상이 변하면 글도 바뀌게 되니 완성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 서두르지 말고 대작을 완성해 봐요. 기대가 커요. 내 이야기라고 해서 너무 미화하지 말고. 유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인 결과였다. 그렇게 나오는군요. 그렇죠. 아닐 수도 있고. 피, 그런 말이 어딨어요. 지금은 정확한게 아무것도 없어. 딴전부린다고 생각하지 마. 그럴 마음도 없고. 이건 사실이야. 사실에 기반해서 쓰고 싶어. 거짓으로 꾸며 대지 않고. 말하자면 진실의 기록. 잠시 뜸을 들인 유마는 말을 이었다. 당신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무조건 뺄 거야. 칭찬은 못하더라도. 난 당신이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싫어하거든. 그러지 말아요. 소설일 뿐이잖아요. 그래도. 당신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신중을 기할 게. 그래서 나쁠 게 없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이 문장이 나를 보고 썼구나, 내 이야기네 하고 알거 잖아.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당사자가 자신임을 알아 챌 때는 함부로 쓸 수 없어. 대화와 같은 거지.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살 순 없잖아. 점례는 그가 나를 어떻게 표현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경험이 들어간 것이니 진실과 아주 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점례는 유마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지금 물어요. 나중에는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지 몰라요.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게 있나요. 난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대답할 준비가 돼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물을 수 없는 거라도 나한테는 그냥 편하게 질문해요. 난 전부 사실대로 말할게요. 꾸밀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게 나니까요. 소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내자고. 너무 깊이 들어가고 있어. 내가 막히면 그 때 다시 하자고. 점례가 이어서 말을 할까 봐 유마가 미리 막아섰다.

그렇다면 몰래 보지 뭐, 점례가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없을 때 살금살금 도둑 고양이처럼 서재로 기어들어가서 킁 킁 냄새를 맡으며 앞발로 원고를 긁어서 넘여야지. 그리고 냠냄 맛있게 먹을 게요. 소설은 여기서 끝. 유마가 선언하듯이 말했다. 점례도 거기서 멈췄다. 멈춰야 할 적당한 때를 아는 것이 점례의 장점이었다. 난 벌써 끝냈거든요. 당신은 아직 소설 속에서 빠져 있고요. 그러니 이젠 정말 소설은 끝이고요, 편지로 넘어가죠. 내 걱정은 붙들어 매고요. 결혼은 생각해 봤나요. 그 이야기는 지난 번에 끝낸 것 아니었어. 다 정리했잖아. 난 결혼 안한다고. 전에 다 얘기 마쳤는데. 또 그럴 거면 나 화낸다. 정말로 화났다는 듯이 유마가 돌아누웠다. 그런 유마를 점례가 흔들었다. 그 것 말고 이거요. 아버님이 휴의나 완용에 대해 물었잖아요. 조금 뜸을 들였다가 점례가 다시 말했다. 거기에 대한 답장은 해드려야지요. 유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이 아무말도 없었다. 그새 잠이 들었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는 조용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다는 신호였다. 점례는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은 것이 되레 다행이다. 무뚝뚝하게 대답하거나 그가 어, 그래. 그런데 당신 그 사람들 아는 사람이었어. 하고 물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그리고는 휴의에게 편지를 써봐. 여기로 오라고. 아니면 당신이 조선에 가니 몇 날 몇 시에 만나자. 그런 정보를 종로서 완용에게 주고. 그러면 그 자를 체포할 수 있잖아. 점례는 호흡을 멈췄다. 자신의 생각을 들낀 것같아 유마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괜한 것을 건드렸구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가 묻기도 전에 묻다니. 점례는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달은 컸다. 보름달인가. 시골 죽마을에서 보던 것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더 노랗고 붉은 기운마저 느껴졌다. 점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까 잠을 자서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청해 보았으나 불가능했다. 가볍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잠자리를 빠져나온 점례는 거실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차가웠다. 다시 들어가 겉옷을 입고 나왔다. 현관문을 열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거실에 눌러 앉았다. 창틈으로 달빛이 서로 들어오려고 다투는 듯 보였다. 여기저기 걱정거리가 몰려 왔다.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귀찮게 했다. 그녀는 잊기 위해 자기방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달이 옥상을 비추고 있다. 거기에 젊은 여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다. 웃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약간 고개를 숙였으니 사색에 잠겨 있다고 봐야한다. 아니 슬픈 때문에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묶은 머리 때문에 귀는 드러나 있다. 긴 생머리에 어깨가 작아 동양 여인으로 보인다. 창가에는 노란 침대가 있고 남자가 등을 벽 쪽으로 하고 누워 있다. 마찬가지로 얼굴을 볼 수 없어 자고 있는지 그냥 누워 있는지 안색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다. 이불 위로 손이 나와 있다. 그 손은 이불에 수놓은 한 쌍의 학을 잡고 있다. 평온한 모습이다. 점례는 스케치를 마쳤다. 채색의 구상도 끝냈다. 가볍게 칠할 수채화 붓을 들고 그녀는 머릿속의 것을 꺼내 자신과 달과 유마를 한 장의 화폭에 담았다.

여기는 어딘가. 장소는 불분명하다. 일본인지 조선인지 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땡하고 한 번 종소리가 울리고 다시 두 번 더 울리고 잠잠해졌다. 새벽 네 시다. 작업을 대충 마쳤으니 홀가분하기도 하다. 숱하게 충돌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은 그대로 묻어두고 점례는  유마 옆에 다시 누웠다. 물감 냄새가 점례 코 주위에서 맴돌았다. 경성역은 인파로 붐볐다. 인파 만큼이나 많은 먼지들이 보도 위를 떠돌았다. 먼지들. 우린 저 점과 같은 먼지들이야. 먼지들은 뭉칠 수 없어.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점례는 여순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소리치는 군인들과 그들이 가르는 이편저편을 이겨낼 수 없었다. 먼지야, 우리는. 사라져 가는 여순의 뒷모습을 보며 점례는 먼지와 함께 트럭에 올라탔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싶었는데 차 뒤쪽에서 나오는 그르렁거리는 기계음에 숨이 막혔다. 점례는 숨을 쉬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으나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무언가가 내리 누리고 있어 가슴은 터질듯이 답답했다. 유마의 팔이 점례의 목에 통나무처럼 길게 걸쳐져 있었다. 그가 고는 낮게 깔리는 소리가 엔진음을 대체했다. 심하지는 않았으나 일정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매연을 토해내는 트럭 엔진 소리와 진배없었다. 그르렁 그르렁 그르렁. 

검은 연기 사이로 한 소녀가 다가왔다. 여순이었다. 너, 어디 있었니. 괜찮은 거야.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어디 있었느냐고. 대답을 기다리는데 아무말 없이 여순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다른 소녀가 다가왔다. 말끔하게 차려입었는데 표정이 영 이상하다. 이빨 사이로 피가 흐른다. 손에는 작업 공구를 들고 있다. 아니 붓이다. 화가인가 나처럼. 그런데 붓이 예사 붓이 아니다. 작고 길쭉한 것이 아니고 끝이 아주 넓다. 뒤에 비행기가 보인다. 대일본 제국을 상징하는 욱일기다. 여순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병사들을 환영하고 있다. 깃발을 흔든다.  병사들이 달려 든다. 여순이 옷을 벗고 있다. 아니다. 벗은 여순이 금새 하얀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런데 그냥 옷이 아니다. 뭐지. 점례는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소복이다. 겨우 알아 냈을 때 여순은 가고 없었다. 다시 한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고 그 소녀는 엎드려 울고 있다. 좁고 비좁은 군인용 막사 안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다. 점례다. 자신이 자신을 보고 있다. 빠져나와라. 왜 그러고 있니. 어서, 어서. 이건 꿈일 뿐이라고. 어서 꿈을 깨라, 어서 깨라고. 점례는 외쳤다. 소리 질렀으나 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유마가 팔을 풀었다. 그 제서야 막혔던 호흡이 돌아왔다. 목에 걸린 찰떡이 물 한 컵에 쑥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꿈이구나. 점례는 다시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억지로 일어났다. 자면 악몽이 이어진다. 일어선 점례는 땀이났나. 이마를 만져 보니 말라 있었다. 그녀는 다시 창가로 갔다. 달갑잖은 꿈을 쫓아내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억지로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달은 사라지고 없었다. 멀리서 여명이 달빛이 드나들던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직선으로 달려와 거실의 한쪽 벽에 비수처럼 박혔다. 점례는 뒤숭숭한 꿈을 뒤로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속이 불편했지만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그새 꿈은 사라졌다.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실 수 있어 다행이다. 걱정할 게 없는데 괜히 걱정하고 있다. 그러지 말아야지. 점례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낮잠이 왠수야, 그러니 악몽을 꾸지.  스스로를 이렇게 달래며 점례는 일부러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유마가 간밤에 말한 것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악몽으로 이어질 일이 아니었다. 전쟁에 이기든 지든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이든 조선의 독립이든 아니든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휴의를 만나라고. 그런 말은 애초에 없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목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눈물을 찔끔 흘리며 먹었다. 목 천장을 데인 것 같았다. 그러나 신경쓰지 않고 한 모금 더 마셨다. 그 새 커피는 조금 식어서 이번에는 데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 그래, 내가 할 일은 그림이야. 그것 없으면 난 죽어. 유마가 글 쓰지 않으면 술에 젖어 있는 것처럼. 나도 그래. 정신 차리자. 점례야, 너 왜 그러니. 점례는 그림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을 지켜 내는 것은 그것뿐이다.

하나 더 있다면 유마의 소설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를 위해 일할 때 나는 기운이 넘쳐나. 유마도 마찬가지야. 화구를 사올 때 그의 얼굴을 보여 주고 싶어. 입이 그야말로 활짝 찢어지거든. 이거야. 최신식이야. 기름이 덜 번져. 제일 비싼 거야. 뭐가 그리 좋은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물감을 사오고 유마가 웃고 있다. 그래, 다른건 다 버리고 나와 유마에만 신경쓰자.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잖아. 그녀가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유마가 일어났다. 그는 일부러 자신이 깼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인기척을 냈다. 놀라게 하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물 드릴까요. 아니야, 여보. 그런데 당신 괜찮아. 왜 문제가 있을까 봐요. 좀 그래. 앓았거든. 헛소리도 내고. 잠코대가 심했어. 흔들어 깨우면 잠잠하다가 다시 잠들면 고함을 쳤어. 내가 좀 그랬나 봐요. 개운하지가 않아요. 낮잠을 자서 그런가 봐요. 제때 자면 괜찮을 거예요. 당신 좀 쉬고 몸조심해. 몸조심 하라고. 몸이 최고야. 몸있고 내가 있는 거야. 기운나게 하는 말이었다. 서로를 챙기고 건강하라고 덕담을 나누지만 몸 조심해, 라는 말은 처음 듣는 것처럼 생경했다. 몸조심해. 이국만리에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 점례는 안심했다. 고마웠다. 그는 자신만큼이나 나를 위하고 있다. 몸조심해. 그 말을 곱씹자 점례는 갑자기 생각이 돌아온 사람처럼 손가락을 꼽았다. 그리고 벽에 걸린 달력을 쳐들었다. 아니, 내가 왜 이것을 몰랐을까. 벌써 석 달째다. 그럴 리가 없다. 엄마라니. 말도 안 된다. 가슴이 조여왔다. 꿈속에서처럼 비명을 질러야 할 것 같다. 비명이다. 그러면. 이번에도 유마가 달려와 도와줄 것이다. 아니다. 아직은 아냐. 말할 것도 없어. 실망할지도 몰라. 속단하지 말자. 아니야. 한 번도 아기에 대해 말해 본 적이 없어도 좋아할지도 모른다. 점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다. 점례는 혼란스러웠다. 한 달 만 더 기다려 보자. 이달에도 없다면 일단 병원에 가보자. 혼자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점례는 어떤 새로운 기운이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의 불안이었고 기쁨이었다. 

환한 빛이 어둠 가운데를 뚫고 들어왔다. 검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비추고 있다. 갈증 난 사람들에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그것이 내게로도 오고 있었다. 유마는 방에 들어간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손에 편지지를 들고 나타났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언제나 기억했다가 그렇게 하는 유마였다. 벌써 다 쓴거에요. 난 꼬박 하루가 걸릴 텐데. 한 번 읽어봐. 아니 내가 당신 편지를 왜 읽어요. 점례가 짐짓 손사래를 쳤다. 부자간에 오가는 시크릿 이잖아요. 중간에 내가 끼어들면 감정이 달라질까 두려워요. 그럼 내가 읽을게. 들어봐. 점례는 유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것마저 거부할 수 없었다. 어떻게 두 손으로 귀를 막을 수 있겠는가. 점례의 귀는 활짝 열렸다. 유마가 편지를 들었다. 그리고 눈 가까이로 가져갔다. 순간 점례는 수류탄을 든 병사의 손을 본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랐다. 요즘 들어 점례는 간혹 환상을 보고 있다. 어제와 같은 가위눌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땅 깊은 곳에 있던 바이러스가 얼음이 녹아 세상 밖으로 나온 것처럼 점례를 위협하고 있다. 천 만년전의 빙하가 녹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 밤에 나타난 그것은 낮 동안에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기억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도 그중의 한 가지 방법이었다. 수류탄은 던져지지 않았다. 애초 그것은 손에 없었다. 유마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손을 앞으로 당겨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이곳 파리는 어수선해요. 독일이 항복한 지 서너 달이 지났지만 아직 정리할 게 많아요.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괴뢰 정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평가예요.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은 소수이고 공론의 장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어요. 목숨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아요. 나치에 목숨을 내주었으면 조국에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고 핏대를 올려요. 처단하자는 목소리가 높고요. 이곳의 피는 뜨거워요. 낭만적 혁명주의가 센강의 쥐들처럼 들끓어요. 예술가들은 더 하고요. 그들은 그렇게 한바탕 떠들어 대고는 각자 일에 몰두해요. 화가는 화가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죽기 살기로 파고들지요. 그런 점이 좋아요. 드골에게 충분히 압박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덤벼들었으니 이제 내 할 일을 하자는 주의지요. 아마도 드골 정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론 낼 것 같아요. 유마가 잠시 편지에서 눈을 떼고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점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소련의 참전 문제인데요. 아마도 조만간 대일본 선전포고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나쁜 조짐입니다. 괄호 열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요. 아버지 기대처럼 소련의 참전은 미국 일방의 세력에서 연합국이 이원화될 수 있는 기회지요.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일본의 패전을 가정하면 소련의 참전은 우리에게 득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파죽지세로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 전역은 물론 한반도로 진격할 경우 상황은 달라져요. 그러면 일본은 본토 공격을 대비해야 해요. 그러기 전에 전쟁이 끝날지도 몰라요. 괄호닫고.

유마는 괄호를 열고, 닫고를 말로 표현했는데 그럴 때마다 점례와 눈을 마주쳤다. 딴짓하지 못하도록 선생이 학생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이따가 편지에 대한 평을 물을테니 잘 들어. 유마가 입을 삐죽이 앞으로 내밀었다.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에 대한 일본의 움직임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적극 개입하면 나중에 미국과 협상하는데 도움이 될 테지요. 물론 아버지가 잘 알아서 판단하시겠지만 이국에서 보는 눈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관한 것인데요. 아버지, 저는 아직 결혼 계획이 없고요. 결혼한다고 해도 보내주신 사진 속의 여자는 아닙니다. 점례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밖에 없는 저의 동지입니다. 유마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점례를 보았으나 어느 새 장난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와 마주친 점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피했다. 사진 속의 여자가 아니라고 했을 때 점례는 결혼할 사람은 점례입니다. 점례 마사코라는 말이 나올까 봐 가슴이 벌렁거렸다. 다행히 그는 동지라는 말로 점례의 두려움을 없애 주었다. 결혼에 대해 말씀 주셨는데 답장이 서툴러 죄송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휴의와 완용은 점례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그런 사람을 접촉한 사실이 없어요.

점례는 이 대목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휴의와 완용을 모르는 인물로 결정해 버렸다. 아버지의 편지와는 달랐다. 알고 있다고 짐작한다는 말에 대한 답장치고는 핀트가 빗나갔다. 일부러 그런 건가. 점례의 생각은 그 지점에서 한동안 머물고 있었다. 유마는 휴의 건에 관해서는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다. 나를 위한 배려인가. 아니면 아버지 편을 드는 것인지 점례는 종잡을 수 없었다. 생각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자 유마가 어때. 하고 물었다. 의식이 돌아온 점례가 너무 가혹하다고 한마디 했다. 유마의 허를 찌르는 가혹하다는 표현에 유마가 당황하면서 아직 다 끝난 건 아냐. 나머지를 들어봐. 아버지가 추신을 보냈듯이 나도 추신을 썼거든. 추신: 아버지, 전쟁에 대한 제 분석을 더 들어보세요. 깜박한 것이 있어요. 소련은 동아시아까지 집어삼켜요. 다 먹는 거지요. 그리고 막판에 한반도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이 바로 뒤로 후퇴합니다. 지난번 만주 침략 때 처럼요. 아버지도 알다 시피 만주 황군은 우리 전력 가운데 으뜸이지요. 그런 황군이 제대로된 전투도 없이 후퇴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아버지. 안 그런가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전선을 크게 뺏지요. 아마도 이것도 아버지 작전일 듯 싶습니다. 나도 아버지의 그 작전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소련은 이 상황에서 약간 당황했으나 곧 일본이 본토 방어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판단하지요. 이쯤되면 미국은 난감할 겁니다. 승자는 미국만이 아닌 소련도 포함되니까요. 소련이 조중 국경 근처에 왔을 무렵 우리는 소련에 최후통첩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일본의 항복입니다. 아버지, 이것이 우리가 노리는 최종 목표여야 합니다. 소련의 사회주의를 막기 위한 것이지요. 그리고 조선을 영구히 차지하기 위한 유일한 전략이고요. 

일본이 만주에서 소련과 격돌하지 않은 것은 잘한 결정입니다. 이미 우리는 필리핀 인근 해역 전투에서 미군에 크게 패한 후 패전으로 기울고 있어요. 아버지도 그럴 지난번 편지에서 인정했고요. 미국 전력의 손실이 아니라 일본 해군의 궤멸입니다. 이때 아버지는 일본의 패전을 가정했어요. 그렇지요. 아버지는 만에 하나라는 가정하에 그럴리는 없지만 일본의 패전에 대비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정확합니다. 이미 기울어지고 있어요. 진다면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하지요. 패전했으나 승전한 것 같은 결과를 얻는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천황제를 지켜 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아버지, 사회주의를 막고 천황제가 유지되면 일본은 패전이라도 승전입니다.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받을 카드만 받는다고요. 받을 카드에는 반드시 조선이 포함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대륙으로 뻗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일보 후퇴는 이보 전진입니다. 군부는 이런 식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유마의 추신은 아버지의 추신처럼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 항복선언은 이때까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왕실에게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 측 공작 담당자에게도요. 우리는 소련과 싸울 생각이 없다. 만주로 진격한 병력을 빠르게 남하시켜라. 우리는 병력을 조중 국경 지역으로 빼겠다. 그리고 다시 한반도에서 빠르게 철수할 계획이다. 하지만 말은 철수지 절대로 로스케가 국경을 넘는 것을 허용하면 안 됩니다. 만주 철수 조건으로 이걸 걸어야 합니다. 거기에 본토 공격은 꿈도 꾸지 마라. 이 정도 선에서 소련과 비밀조약을 맺어야 합니다.

편지를 다 읽었는지 유마가 그것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어때 이 정도면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지. 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편한 웃음을 짓기 위해 입을 양쪽으로 벌렸다. 점례는 유마의 정세 분석에 놀랐다. 과연 고급 정보장교다운 판단이었다. 그러면 조선은. 전쟁이 끝나도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속국이구나. 식민지는 변함없이 그대로 식민지고. 미국이 이것을 용납할까요. 점례가 물었다. 별수 없을 거야.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는 쪽은 우리보다 미국이야. 그 쪽 대통령이 안달 하거든. 선거에서 이겨야 하니 끝내자는 여론을 따를 거야. 두고 봐. 곧 내 말이 맞는지 곧 결판나겠지. 유마가 점례를 보았다. 그리고는 여보, 여기에 더하고 싶은 말은 없어. 하고 의견을 물었다. 단순히 배려 차원의 말이 아니었다. 점례가 말하면 추신 아래 덧붙일 각오였다. 점례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결혼 말이에요. 아버지가 충격받지 않겠어요. 단칼로 거절했으니 자존심이 상할 게 분명해요. 여지를 두지 그랬어요. 생각해 본다는 좋은 구절이 있잖아요. 아냐, 아버지한테는 그게 안 통해. 의사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거든. 다른 거는. 글쎄요. 아, 휴의나 종로서장 건요. 당신은 내게 묻지 않았잖아요. 점례가 주제를 급히 바꾸었다. 왜 알고 있는 인물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럼 됐어. 뭐가 문제지. 추신을 마지막에 그것도 길게 쓴 것은 결혼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야. 아버지는 결혼도 관심이 있지만 사실 전쟁이 더 중요해. 마무리를 잘해야 하거든. 이것은 일본의 운명에 관한 것이고. 휴의나 완용의 문제도 문제가 아냐. 다만 당신과 연관성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그건 당신을 아버지도 깊게 생각한다는 반증이야. 누가 알겠어. 다음 번에 그러면 점례를 결혼 대상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어올지도 모르지. 유마가 헛기침을 했다. 

유마의 추가 설명에 점례는 그렇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무대신의 입장에서 전쟁 종결말고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었다. 점례는 입을 다물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글만 쓰는 줄 알았는데 언제 전쟁을 탐구했지. 본능이 시켰을 거야. 전쟁에서 빠져 나왔어도 별을 단 장군 출신이 그것에서 손을 놓을 수는 없어. 더구나 아버지가 자꾸 전쟁이야기를 꺼내니, 유마가 완전히 예술에만 몰두 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진정한 예술이 뭐야.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거잖아. 지금은 전쟁통이고. 그러니 유마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해. 나도 그림에 전쟁을 넣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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