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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그녀 몸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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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그녀 몸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1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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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여순은 가끔 우울했다. 그럴 때면 활기없는 몸이 축 늘어졌다.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억지로라도 여순은 피아노를 쳤다. 기타를 만지작 거렸다. 그러면 조금 나았다. 무엇에 끌릴라치면 어김없이 환자가 들어왔다. 우울은 오래가지 않았다. 늘어진 몸은 다시 생기를 찾았다. 우울증은 잠깐 왔다 사라졌다. 환자들은 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픈 것이 낫기만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서렸다. 그럴수만 있다면 잘못된 것을 다 버리겠으니 오로지 건강하게만 해달라고 했다. 여순은 그런 환자들에게서 의지를 보았다. 여순은 정성을 기울였고 환자들은 나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병원문을 나섰다. 그러다가 같은 이유로 그 환자가 다시 찾아 올 때면 굳센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술병이 난 사람은 다시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서는 며칠후에 속병이 도져 다시 여순을 찾아왔다. 사람은 그런 것이다. 여순은 환자를 책망하지 않았다. 의사인 나도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순은 병원 개업할 때를 생각했다. 환자가 들고 생활이 안정되자 천국이 따로없었다. 이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남는다고 돈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사치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여순도 환자처럼 자꾸 변해갔다. 어느 날은 병든 환자가 됐다가 또 어느 날은 완치됐다가 다시 환자가 되는 일이 여순에게도 반복됐다. 우울한 것도 그것의 일종이었다. 비록 잠시지만 여순은 순간 순간 우울감에 나락으로 빠져 들었다. 찾아 보면 딱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에 여순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손을 놓았다. 

다 가졌어도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허전한 것의 원인을 찾아서 메꾸고 그래야만이 가라 앉는 마음도 치유될 수 있었다. 아기에 대한 생각은 버렸다. 말수는 거기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 자신이 아버지될 자격이 없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아니면 다른 이유 즉 여순의 어머니 자격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여러달이 지났다. 불쑥 말수가 말을 꺼냈다. 그 입양건 말이야. 당신이 말했잖아. 아이 한 명 들여볼까. 지금도 당신 생각 변함 없는 거지.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나온 그 말은 숨어 있던 게릴라의 출현처럼 여순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놀라움은 잠시였다. 그 말 한마디에 여순은 다시 아기를 품에 품었다. 올챙이처럼 오물거리는 것을 등에 업고 얼르고 손을 잡고 동네를 걸을 때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벌써 아기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포목점 집 아들 말이지요. 이제 백일이 막 지났지. 늦둥이 막내 아들이 여간 귀엽지 않아. 벌써 그렇게 됐어요. 해산통으로 그 집 마누라가 고생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여순이 말꼬리를 흐렸다. 들었는데가 아니라 여순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윤사장이 잉어탕을 끊였다고 병원에 들러 자랑을 하는 자리에 여순도 있었다. 여기는 한약은 취급안하지요. 양약보다는 조선 인삼이 최고라는데, 그래서 시내서 한약도 좀 지었고요. 그 아이가 백일이 지났다. 말수는 돌이 되면 돌반지 하나 주겠다는 마음으로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 놈이 마지막인가요. 말수의 말에 윤사장은 그야 모르지요. 내가 아직 힘이 있거든요. 하고 웃었고 안주인은 차를 내온다는 핑계를 대고 어색한 자리를 떴었다. 

그 집에서 준대요. 아직 몰라. 말은 안 했봤는데 진지하게 제의하면 받을지 모르겠어. 괜히 이야기 꺼냈다가 사이만 나빠질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술 김에 농담삼아 이 녀석 우리 아들 삼자, 내가 데리고 가지. 하고 말해 볼 참이야. 마침 오늘 저녁에 술 약속이 있거든. 여순은 들떳다가 술이라는 말에 입양 이야기는 쏙 빼놓고 걱정부터 했다. 여보, 요즘 술 너무 자주 마시는 것 아니에요. 그것도 많이. 걱정마, 내가 실수한 적 있어. 없잖아. 적당한 선에서 나는 끊고 맺거든. 그야 그렇지 만요. 여순은 지난 번 실수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한 번도 없다니요. 지난 번에 그 일을 잊었나요. 여순은 목에 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참아냈다. 울컥한 감정이 말을 막아 버렸다. 불과 보름 전의 일이다. 한 번 울기 시작한 말수는 이번에도 울었다. 다 큰 남자가 크게 울자 여순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슬픔 속에서도 무언가를 재고 있었다. 그것은 어른의 울음이 주는 낭패감 때문이었다. 힘깨나 쓰는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맞아서 터진 꼴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다.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수는 만취하면 곧잘 울었다. 그러면 여순은 그러지 말라고 했고 그러면 말수는 소리를 낮췄으나 완전히 그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신경 쓰지 마. 그게 막 나와. 나도 그치고 싶은데 안돼. 그러면 여순은 우세요, 실컷 울어요. 그러면서 그를 안아 주면서 그녀도 울음 대열에 동참하려고 했으나 전처럼 같이 울지 못했다. 어느 날 부터는 그 말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한 두 번 통했던 그 말은 이제는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울라고. 나보고 울라고. 그러면 흉보려고 그러지. 그가 충혈된 눈으로 여순을 노려봤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수류탄 파편이 터지는 것처럼 위험했다. 오늘 밤에는 다 잤다. 잘 수가 없다. 여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수가 제풀에 지쳐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무력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말수는 대들었고 시비를 걸었다. 가만히 있으면 가민히 있는다고 말리면 말린다고 손을 내저었다. 어쩌자고 저렇게 됐을까. 여보 정신 차려요. 정신. 정신 이라고. 내가 정신을 잃었으니 차리라고. 내가 언제 잃었는데. 암 그래야지. 그리고 나서 말수는 그녀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 나 처음으로 제정신이 들었어. 미안해. 내가 정신 줄 놓았나 봐. 철이 들라면 멀었다. 난 아직도 당신 손길이 필요한 애야, 난 애라고. 이런 식으로 빈정거렸다. 다 술 때문이다. 술이 원수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야 바다가 잠잠해 지듯이 마음 껏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나서야 말수는 쓰러졌다. 미안해요, 당신의 깊은 맘 헤아리지 못해서. 여순은 그런날이면 우울이 조금 더 심해졌다. 그리고 오래갔다. 아무 준비도 없는데 이런 벌어지고 있었다. 말수는 술을 통해 잊었던 과거를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려는지 여순은 겁이 났다. 깨고 나면 말수는 미안했던지 진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쳐박혀서 차트를 본다거나 의학서적을 뒤적였다. 차를 주면 거기 놓고 가라는 시늉을 했다. 기타 연습 안해요. 시간이 있어야지. 그리고 내 취미도 아니야. 그것은 당신이 제일이지. 그녀는 돌아 나왔다. 무사히 이 밤을 지낼 수 있을까. 오늘은 그렇다 쳐도 내일은 또 어떻게 하고.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여순은 포목점 집을 찾았다. 그리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말수가 이미 운을 띄운 뒤라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이라는 조건을 걸고 안주인은 자신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애가 다섯이에요. 나도 나이도 들고요. 자기 먹을 것은 태어난다고 해도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에요. 의사 선생님이 데려가 키우면 저희야 고맙지요. 간혹 가서 볼수도 있고요. 여순은 그 순간 그 아이가 제 아이인양 몸이 떨려왔다. 애 아빠가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저녁에 애기해 볼께요. 마침 선생님도 오시니. 오늘 저녁에 바깥양반과 약속이 있나요. 모르셨어요. 애 아빠가 그러더라고요. 술상을 봐 놓으라고 의사 양반 온다고. 이렇게 말하고 아침에 나갔어요. 아, 그러고 보니 들은 것 같네요. 여순은 얼버무렸다. 아기가 울었다. 발버둥 치면서 젖 달라고 보챘다. 윤사장 부인이 돌아서 아기를 안고 젖을 물렸다. 젖빠는 소리를 들으며 여순은 밖으로 나왔다. 가지고 있던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데 그 여자는 알고 있다. 남편의 일정을 나 보다 더 잘알고 있다. 여순은 다리에 힘이 빠졌다. 입술이 말라왔다. 그래도 힘을 냈다. 점심 참에 잠깐 나왔으니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떼었다. 아기의 울음 소리가 뒤따라왔다. 요새는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은 포목집에 들른다. 거기서 끝나면 좋지만 다른 곳에서 또 술을 마시는 모양이다. 그런 날은 언제나 취해서 들어온다.

저러다 큰 일이 날 것만 같다. 몸도 염려 된다. 당국에 불순불자로 체포될 지 모른다. 술병이 날지도 모른다. 전쟁통에 허구헌날 술만 퍼마시니 잡아갈 이유는 많다. 윤사장은 더구나 일경을 만나는 사이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말수가 자신을 보기 위해 뒤돌아 서는 무거운 표정을 상상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여순은 몸을 바짝 움츠리고 종종 걸음을 쳤다. 나, 막 감옥에서 탈출했어. 여보 날 어서 숨겨줘. 곧 체포될 거야. 말수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잠에서 깬 말수가  부들부들 떨었다. 찬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여순은 수건을 들고 이마를 닦있다. 그 사이 말수는 엎어져 있었다. 몸을 돌려 눕혔다. 힘이 들었다. 말수도 배불뚝이처럼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술배야, 술배. 여순은 그 와중에도 반동으로 탕탕 소리를 내는 배를 두들겼다. 여보 추워. 춥다고. 두려움에 떨며 쓰러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여순을 향해 말수가 이불 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빨리, 좀 더 빨리 움직일 수 없어. 달리라고, 달리라니깐. 알았어요. 이불을 가져올게요. 빨리 더 빨리 달려. 고함 소리가 옷장으로 향하는 여순의 등뒤를 때렸다. 이런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말수는 시간이 지날 수록 달라지고 있다. 여순이 이불을 가지고 왔을 때 말수는 쇼파에 앉아 손에 약봉지를 들고 있었다. 표정도 싹 바뀌어서 언제 화를 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디가 아픈가. 정신이 돌았나. 그 사람이 저 사람 맞아. 여순은 말수가 그것을 입에 넣을 때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의 분말 가루를 확인했다. 설마 아편인가. 이제 아편에 까지 손을 대고 있나. 여순은 소스라쳤다. 아편이라니. 내가 잘못 봤나. 그러나 여순은 그것이 아편일 거라고 아편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것을 먹고 나서 입맛을 크게 다셨기 때문이다. 얼굴은 찡그러지고 그 상태로 근육을 풀지 않은 채 입가심을 위해 물을 들이켰다.

여순은 속에서 뻗쳐 나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그 구역질은 익숙한 것이었다. 뱃멀미. 태평양의 섬과 태양. 억지로 참으면 속에 있던 신물이 올라왔다. 여순이 말수처럼 인상을 썼다. 말수는 그런 여순을 보고 아주 쓴 맛을 느낀 자만이 보이는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갈색과 강한 쓴맛, 토하게 하는 특이한 냄새 그것은 의료용 아편의 특징이었다. 여순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심장의 고동 소리는 자신은 물론 말수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모른 척 하려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잘되지 않았다. 말수가 이 순간을 봤다면 갑자기 빈혈이 일어나 쓰러지기 직전의 환자를 연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수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어서 약기운이 퍼져 고통대신 기쁨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초조함이 잔뜩 묻어났다. 갖고 온 이불을 말수의 어깨에 올려놓고 여순은 그 옆에 앉았다. 말수가 말했다. 갈치구이가 먹고 싶어. 갈치구이. 여순이 잠깐 갈치라고 방금전에 말한 말수의 입을 쳐다봤다.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왜 내 얼굴이 뭐가 묻었나. 못 볼 거라도 붙이고 다니는 술주정벵이가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화가 난거야. 그런 거야. 아니면 못들었어. 들었으면 대답해야지. 듣는 귀가 있는데 왜 못들었겠어요. 알았어요. 내일 준비할게요. 내일, 내일이라고 당장 가져와. 난 지금 먹고 싶어. 억지 부리지마요. 여순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에 어디서 갈치를 가져온단 말이에요. 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에요. 어부, 어부 그래 당신은 어부가 아니야. 의사지, 의사. 그 잘란 의사 말이야. 뱃놈은 나야, 나 말수가 뱃놈이라고. 통영 뱃놈. 그는 자신을 비하했고 능욕했다. 정신병에 든 사자처럼 자기 꼬리를 씹어 먹었다. 그 날카로운 이빨로 가슴을 찔렀고 동시에 여순을 겨냥했다. 숨이 막혔다. 턱 막혔다. 목에 가시가 박혔으니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이제 생선을 먹을 거야. 마음껏 먹어야지. 못 먹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요, 갈치구이 해 먹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다할 수 있어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원하는 걸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래요. 다 할 수 있어요. 왜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말 만해요. 다 들어 줄게요. 잘난 체 그만해. 당신은 다 할 수 없어. 없다는 걸 알면서 왜 그래. 이래도 되는 거야. 어, 이래도 되느냐고.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여순은 말수가 시비를 걸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비 말고 다른 게 뭐 있겠는가. 작정하고 싸우려는 그와 대화는 무의미했다. 이제 어쩌지. 어떻게 해하지.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머리도 그렇다. 여순은 온몸이 진공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 아냐. 검은 연기가 가득 찬 거실에서 더 머물 수 없다. 빠져 나가지 않으면 질식해 죽는다. 검은 연기를 마시면 폐가 검어진다. 나가자. 어서. 여순은 그러나 말수를 놔두고 혼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은 잡혀갈 수 있다. 이 위험을 왜 자초하는가. 그는 예전의 말수로 돌아가고 있다. 갑판 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데 혼자 낄낄 웃고 조롱했던 뱃사람으로 돌아가고 있다. 선주를 갈고리로 찍어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전쟁터에서 손에 쥔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말하기 않겠다. 그건 살인이 아니다. 그냥 사람을 죽인 것 뿐이다. 그래도 사람을 죽였다. 

그리운가. 정말로. 남편은 왜 그런 천한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걸까. 자학이다. 고통은 그 시절 이후로 끝났는데. 왜 못찔러 안달이지. 그런 식으로라도 보상을 받고 싶은가. 이미 받았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더 바랄 게 뭐가 있지. 말수가 옆으로 쓰러졌다. 약기운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그는 쓰러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숨을 쉴 때마다 반쯤 벗겨진 셔츠 사이로 비어져 나온 배가 불뚝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배불뚝이 남자를 닮아가고 있다. 여기서 깨져서는 안 된다. 어떻게 찾은 행복인가. 오래가야 한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물건이다. 난 그럴 자격이 있다.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순은 다짐했다. 별수를 다 내서라도 말수를 되돌려야 한다. 뱃사람 말수가 아닌 전쟁통의 말수로, 의사인 말수로. 완전히 길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 네가 내 엄마는 아니잖아. 말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순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같잖다 이거지. 꼴 보기 싫다 이거지. 나가 줄게. 내가 나가면 되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수는 손가락 하나 까닭하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 약은 그를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갔다. 여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알면서 왜 그러세요. 날 모르세요. 당신은 날 살렸어요. 그런데 지금 날 죽이려고 해요. 여보, 그러지 말아요. 난 당신과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그럴 권리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있다고요. 알겠어요. 그럴 권리가 있다고요. 말수의 눈이 흐려졌다. 입이 벌어지고 있다. 대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침이 흐른다. 아편의 기운이 제대로 깊게 세포 하나 하나마다 퍼지고 있다. 뼛속까지 침투하고 있다. 어느 순간 쓰러진 몸이 벌떡 일어났다. 시체가 살아서 움직였다. 그러다가 다시 자빠졌다.

그 순간 여순은 독한 마음을 먹었다. 달리 처방할 것이 없었다. 오후 네 시만 되면 수면제를 타 먹여야 한다. 오후 환자는 많지 않다. 있으면 내가 보면 된다. 환자가 찾으면 감기 기운 때문에 잠시 휴식하고 있다고 둘러대면 된다. 그렇다. 잠을 자면 나가지 못한다. 술을 먹지 못하고 아편과도 멀어진다. 언제부터 약을 먹었지. 여순은 돌이킬 수 없는 중독상태가 아니기를 바랐다. 여기서 끊어야 한다. 극약처방이다.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렇지, 죽으면 만사 끝이다. 남편이 죽으면 나도 죽자. 먼지처럼 허공을 날다가 떨어지면 그만이다. 여순은 고개를 푹 숙였고 눈물이 맺혔다. 바보처럼 웃고 있던 말수가 혼잣말로 그러지 말라고 혀꼬부라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 없으면 난 죽은 사람이야. 여순은 말수 옆에 나란히 누었다. 나도 그래요, 여보. 당신이 없으면 그 순간 난 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여보, 죽지 마세요. 죽지 말라고요. 알았지요. 여순은 말수의 손을 잡았다. 큼지막한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 넣었다. 그 손은 차가웠다. 찬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히면서 여순은 그렇게 그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생명이 왔다. 폐허에서 살아남은 생쥐처럼 생명은 쉼 없이 꿈틀거렸다. 한시도 쉬지 않고 꼬물 거렸다. 보채고 울었고 먹고 싸고 잠을 잤다. 그것은 신비 그 자체였다. 작은 손, 손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 작은 손이 먹이를 찾고 손에 잡은 것을 놓치 않을때 여순은 감탄했다. 쥔 손의 힘이 세. 세도 너무 세. 넌 힘이 센 아가야. 내 아가. 우리 아들. 환구가 달리고 있다. 쿵 쿵 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쉬지 않고 뜀박질이다. 넘어질 듯 위태롭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우리 아들 환구. 여순은 부드러웠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아들이었다. 그러면 못써. 넘어지면 다쳐. 환구 다치면 엄마가 맴매 해줄거야. 여순은 말만 하지 않고 따라가서 잡았다. 환구는 그러면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애들은 저러고 크는 거야. 내버려 둬. 지치면 알아서 그만두겠지. 말수가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품이 저런 것이다. 다치면 당신 책임인 거 알죠. 엄마의 목소리였다. 육환구. 아이가 병원에 들어 오면서 식구가 한 명 더 늘어 세 명이 됐다. 단순히 한 명 뿐인데 여순의 일상은 곱절로 바빳다. 저절로 크는 것이 아이가 아니었다. 돌봄이 필요했다. 아이는 포목점 집보다 크고 넓은 병원을 제집처럼 아니 제집인 것이니 마음대로 활보했다. 뛰었고 울고 웃어댔다. 거실을, 이층으로 가는 계단을, 진료실 앞을 마구 흔들었다. 말수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그 모습을 입꼬리가 올라간 여순이 바라보았다. 흐뭇했고 안심이 됐다. 무언가 사라졌던 것이 소중한 것이 저절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시 삶이 시작됐다. 휴일에는 셋 이서 나란히 외출했다. 잘 차려 입고 시내를 돌다가 맛있는 것을 먹었다. 그리고 돌아오면 나른한 피곤함이 기분을 환기 시켰다. 창문을 열고 소독냄새를 빼고 걱정 어린 환자들의 눈망울을 지웠다. 그러고 나면 병원은 낙원이 됐다. 셋이 행복했고 비로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았다. 말수는 술이 줄었으나 아주 끊지는 않았다. 아편은 모르겠다. 여순 앞에서 한 번도 흰 종이에 싼 갈색 가루를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흐리멍텅한 눈을 들낀 적도 없다. 그러나 여순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 번 들인 맛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 악마의 눈이 그를 위협할 지 모른다. 손을 잡았으면 끝까지 잡아야지. 중도에서 놓으면 어떻게 해. 말 안들면 정말 놓을 거야. 그런 위협은 깡패나 하는 거지. 정말 놓지 않을 거야. 그래, 아 놓을 거야. 내가 질긴 놈인 거 알지. 그래요. 장해요. 그 어려운 것을 말수는 견뎌내고 있다. 낭떨어지에서 밀어대는 상대의 힘을 뒷발로 버텨내고 있다. 먼지가 일고 있다. 돌덩이가 떨어지고 있다. 그도 알고 있다. 여기서 밀리면 떨어져서 죽는다는 것을.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걸 풀지 않으리라. 말수는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을 앞으로 계속 실천할지는 말수 자신도 알지 못했다. 포목점 집과는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진짜 형님으로 말수는 집주인을 대했다. 여순도 안 사람을 형님으로 부르면서 깍듯이 존대했다. 그러나 서로는 환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쩌다 나온 말은 실수라며 주워 담았다. 거둬 들인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조차 몰랐다. 그들은 만날 때 환구는 없었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말수는 세상의 지도가 어떤 식으로 그어질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의학서적 만큼이나 세계사 책도 열심히 읽었다.

과거를 알아야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은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전쟁이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도 그럴 것이다. 조선은 어떻게 될까. 전쟁도 하지 못하고 거저 나라를 뺏긴지 어언 30년이 넘었다. 오천 년 조선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기적적으로 기사회생해 명맥을 이를 것인가. 조선말도 뺏기고 이름도 뺏기고 정신도 뺏겼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배불뚝이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가능하고 말고요. 독립해야지요. 한 민족의 정기를 찾아야 해요. 그가 연설하듯이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흔들었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눈은 더 작아졌다. 큰 얼굴에 작은 얼굴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두 눈의 크기가 짝짝이였다. 확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나 자세히 보면 오른 쪽 눈이 왼쪽 눈보다 더 크고 길었다. 말수는 그런 인상을 싫어했다. 싫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앞에서는 늘 조심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책 잡히지 않도록 했다. 나중에 모았다가 한꺼번에 쏟아낼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 불만을 해소할지 몰랐다. 짝짝이 눈은 거짓말을 잘해. 신뢰하면 반드시 당하지. 말수는 속으로 늘 이렇게 되뇌면서 눈 대신 그의 뛰어나온 광대뼈를 보고 말했다. 그것은 고집스러우면서 무모한 것을 의미했다. 튀어 나왔어도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얼굴의 다른 부문과 조화롭지 못했다. 형님, 동생 하지만 결정적인 일은 도모하지 않기로 만나는 순간마다, 헤어지고 나오는 순간마다 말수는 맹세를 다짐했다. 뒤통수를 칠 상이다. 배신하고 또 배신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믿었을 때 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꾸 만나다 보니 어떤 때는 짝짝이가 아닌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래는 정상이었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그렇게 바뀌는 지도 몰랐다. 저런 상이라면 괜찮은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날도 있었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괜찮다고 주문을 걸기도 했다. 아주머니 상은 그런대로 괜찮아. 부부 중에 하나라도 좋으니 다행이다. 거친 윤사장과 부드러운 부인. 환구 부부의 관상은 이렇다. 

윤사자은 말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게의 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아기까지 양주로 준 후로는 더욱 허물없이 지냈다. 아니 지내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러나 적당한 선이 오면 막수는 그것을 막았다. 이 선은 넘지 마시오. 그러면 윤 사장은 순간 고요한 사막같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회를 잡으면 참았던 것을 서슴없이 내 뱉었다. 그가 하는 말은 직설적이었다. 빙빙 돌려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말수의 본능을 자극했다. 심장을 달궜고 머리를 두들겼다. 아니 만나야지 하면서 발길이 가는 이유였다. 그러다 보니 환구를 입양하기 까지 했다. 일본놈들을 쓸어 버려야 해요. 임정이 직접 그 일을 하고, 누군가는 심부름을 해야 해요. 한 번 임정에 같이 가봅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돕던지 말던지 할 거 아니오. 말수를 만난 어느 날 배불뚝이는 이렇게 말했다. 가서 뭐 내가 할 일이 있어야지요. 환자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선생도 알다시피 지금 임정은 곤란한 지경이오. 무엇보다 돈이 없소. 군인을 양성해야 하는데 그럴 자금이 없단 말이지요. 어려운 살림이란 말이외다. 자금이 필요해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보고 돈을 내라고. 임정에 발을 들여 놓으라고. 나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어서 어떤 재미를 보려고. 동생도 조금 힘을 써봐요. 그는 선생이라고 했다고 동생이라고 했다가 말수를 그렇게 편한대로 불렀다. 의사 선생, 임정은 지금 한 푼이 아쉬운 상태요. 지난번 나는 권총 값을 지불했어요. 나중에 임정 사무관이 고맙다는 전갈을 가져왔어오. 잘했다 싶었지요. 배불뚝이는 자신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사인을 나에게 보내고 있다. 못할 것도 없다. 재산을 다 주는 것도 아니다. 거기까지 가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는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선생, 돈이 있으면 기부를 해요. 없는 사람들도 십시일반 하는 분위기입니다. 독립운동도 시기가 중요해요. 지금은 일제를 구석으로 몰아 넣을 적기라는 거지요. 윤사장은 거침이 없었다. 밖에 누가 있는지 좌불안석 하는 것은 말수였다. 문을 쓱 열고 일경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빠가야로, 조센징. 손에 권총이 들려있다. 말수는 그 순간 두 손을 드는 자신을 연상했다. 

배불뚝이의 오른눈이 다시 작아졌다. 말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임정에 돈을 댄다는 것은 조선독립운동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내가 그럴자격이 있는가. 아직 나는 덜 정리됐다. 난 조선인이기 보다는 일본인이다. 내가 왜. 왜놈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야지요. 누가 하겠어요. 다 같이 해야지요. 한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러니 선생도 힘을 보태시오. 맡겨놓은 돈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배불뚝이는 당당했다. 말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환구 친부만 아니라면 뭐 이런 게 있어, 하면서 박차고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말수는 그러지 않았다. 가슴은 이미 벌렁대고 있었지만 말은 차분하게 새어 나왔다. 안 사람하고 상의도 해야 하고요. 아직 그것의 의미를, 나 자신의 중심을 잘 알지 못해요. 난 여기서 조선사람도 왜인도 되놈도 로스케도 양놈도 아니고 그냥 떠돌이처럼 살고 있어요. 아니, 아니 될 말이오. 주체가 있어야지. 당신은 조선인이오. 통영이 고향이라는 것 내가 다 알아요. 배불뚝이는 좀처럼 물러갈 기세가 아니었다. 이런 대화를 이렇게 크게 떠들어도 되는가. 조용히 아주 은밀하게 밀정같은 행동으로 해야 되는 않을까. 말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수술준비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빠져 나왔다.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지를요. 아 참, 제수씨에게 안부도 전해 주시고요. 말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신을 신었다.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가. 그렇다. 내가 누구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는가. 누구 때문에 여순이 그렇게 욕을 봤던가. 누구 때문에 불임이 됐고 누구 때문에 고향땅을 떠났지. 그래 지금은 의사로 호의호식하고 있지만 죽어도 여러 번 죽음 목숨이었다. 그리고 순간씩 번지는 내 트라우마는. 여순은 우울증은. 

말수는 윤사장의 말을 곱씹었으나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아직은 없었다. 그는 일본총영사관 사람들과도 만나고 있다. 그들을 만나면 조선은 일본 때문에 근대화 됐다고 칭찬에 입이 마를지 누가 알겠는가. 나와 나눈 대화도 내일이면 일경의 귀에 들어갈지 모른다.  내선일체 운운하면서 일본과 조선은 한민족이라고 외치고 다니겠지. 조선민은 일본인의 조상과 뿌리가 같고 일본민족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침을 튀기겠지. 덴노를 위해서 우리는 살고 또 죽어야지요. 그런 말을 실제로 말수는 들었다. 술기운도 아니었다. 신문을 보다가 딱 던지고는 조선 백성이 왜 일본 전쟁에 소극적이냐고 말수에게 따져 물었다. 더 많은 학도병이 나서야 한다고, 왜 그런지 아느냐고 바로 황국의 신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 뿐이 아니었다. 그는 간혹 임정의 움직임을 일본영사관이 내보낸 밀정에서 보고 하기도 했다. 수시로 임정이 사무실을 옮기는 것도 이같은 첩자들 때문이었다. 말수는 믿지 않았다. 믿음은 언제나 한쪽 방향인데 상황에 따라 반대쪽을 향하면 불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말수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없는 것들을 주워 듣다 보면 나름대로 판단 근거도 나왔다. 진주만 습격으로 미군이 참전한 것은 일본의 뼈아쁜 실수라거나 소련을 태평양전쟁에 끌어 들이려는 노력은 일본에게는 신의 한 수라는 등 제법 놀랄만한 국제정세에 대한 견해도 내놓았다. 전황이 불리한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소련이 일본편에 서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만약 소련이 미군과 영국이 있는 연합군에 들어가면 일본은 승산이 없다는 것이 포목점 집 주인의 판단이었다. 말수는 그와 만나면서 잊고 싶었던 전쟁에 다시 발을 들여 놓고 있었다. 후방에서 보는 전쟁은 그가 겪었던 것과는 달랐으나 이전의 아픈 상처를 되살려 놓고 있었다. 그 가운데 여순이 있었다. 말수는 인상을 썼다. 몸 전체에 화약냄새를 묻히고 허름한 막사에 쪼그리고 있는 여순을 다급하게 찾아갔던 그 순간은 머리를 쪼개서라고 기억에서 씻고 싶었다. 그러나 구석으로 도망치려는 여순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던 일은 여전히 말수의 속을 헤매고 다녔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아는데,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여순에게 그럴 수는 없다. 그녀가 겪은 고통은 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말수는 하늘을 보았다. 기도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라고. 제발 여순을 과거에서 꺼내지 말고 동굴 깊은 곳에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해달라고. 열쇠는 오로지 하느님만 갖고 있다고. 사이판의 성당에서 우리는 기도했었지. 여기서 살아서 나가면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그것도 열심히. 하나님, 말수는 소리질렀다. 내게는 동굴의 문을 열 열쇠가 없어요. 신이여, 그러니 그것을 당신도 영원히 열지 마시오.

혼돈의 시간이었다. 어느 것 하나 뚜렷한 것은 없었다. 말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런 자신의 감정 때문에 괴로웠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말수는 초조한 자신 때문에 속이 상했다. 억지로라도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원하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면 주먹으로 쳐서라고 떨쳐내야 한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자.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 나가면 입을 다물자. 감당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라 해도 잊어야 한다. 기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상처가 아니다. 말은 안 해도 여순은 내가 괴로운 이유를 알고 있다. 나의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간파했다. 말수는 그것이 미안했다. 상처를 덧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이게 무슨 낭패인가. 속에서 끓어 오르는 적개심을 억누르기 어렵다. 자신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있다. 이럴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못난 자신을 자책해야 하고 말수는 그렇게 했다. 학대에 이를 정도로 그런 상태가 되자 자연히 그 다음 순서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렇다치고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자연스럽게 제국주의 때문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일제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그들이 조선에 오지 않았다면, 내가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면, 태평양으로 끌려가서 광산 노동자로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다면.뭐 이런 가정들이 꼬리를 물었다. 이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 결과는 얼마나 참혹했던가. 

극적으로 여기까지 와서는 이제 그런 것 다 상관없다고 했는데 아닌 게 되고 있다. 술이 문제다. 술을 먹으면 과거가 취기처럼 떠오른다. 악몽이다. 마약을 끊어야겠다. 그것을 계속하면 파멸이다. 나보다도 여순이 먼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녀 없는 내 삶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여순이 무슨 죄가 있는가. 완용에게 속아서 일본에 팔려온 것이 죄인가. 죄라면 이미 씻고도 남았다. 이제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 말고 그녀가 내게 잘못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손가락을 꼽아 보았지만 하나 하나에 어떤 이유도 댈 수 없었다. 말수는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약자가 되고 있다. 아니다. 말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강해, 강하다고. 이제는 울지 않겠다. 어떤 경우에도 소리 내면서 흐느끼지 않겠다. 절제하자. 술을 줄이자. 약을 끊자. 절제해서 잘못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흔들린 것은 그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다시 나로 돌아가자. 병원에만 집중하자. 그런데 안 된다. 마음은 포목점 집에 가 있다. 권총 살 돈이 없다고 했다. 말수는 아내 모르게 조금씩 돈을 모았다. 용돈을 절약했다. 의사들 모임에 회비를 내야 한다며 손을 벌렸다. 여순은 의심하지 않았다. 모은 돈을 환전했다. 일 천 달러 정도는 됐다. 아쉬운 대로 이것이라도 하자. 말수는 프랑스 조계지를 찾았다. 배불뚝이와 함께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가 모르게 은밀히 해야 한다. 굳이 자신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무원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운영자금에 쓰라고 넌지시 봉투를 내밀었다. 독립자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젊은 사무원은 황공해서 벌떡 일어섰다. 마침 선생님이 안에 계시니 만나 보라고 했다. 사무원은 그가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나 부부가 운영하는 병원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찰하는 와중에 언뜻언뜻 비치는 날카로운 인상을 그는 선생을 모시고 갔을 때 강하게 받았고 그 인상을 기억해 냈다. 하관이 빠르고 매서운 눈매는 웃는다고 해서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심하는 얼굴로 환자를 대했으나 눈에 살기가 아직 빠지지 않은 때였다. 사람을 죽이고 죽기 일보 직전에서 벗어난 사람의 얼굴은 쉽게 예전의 모습을 찾지 못한다. 젊은 그가 선생의 집무실인 이 층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나무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다. 말수가 그 소리를 신호로 이만 가봐야겠다고 손에 든 모자를 집어썼다. 그럴 필요없어요. 선생님은 바쁘고 저 역시 그래요.  청년이 손을 잡았다. 그러나 말수는 아니라고 잡은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바쁘신 선생을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댔으나 사실은 선생에게까지 자신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싶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그때 위층에서 김군 손님 오셨으면 모시고 올라와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수는 당황했다. 올라가야 할지 내려가야 할 지 망설였다. 여러 단상이 순간적으로 스쳤갔다. 그는 못 듣은 것으로 하고 청년에게 눈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잘한 결정이다. 자신을 드러낼 순간이 아니다. 병원장이 독립자금을 대고 있다는 소문은 그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특히 신변을 걱정하는 여순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앞쪽에서 하오리에 게다를 신은 일본인 남자가 거들먹 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횡하니 불었다. 여기가 왜놈땅인줄 아나 보지. 만주를 먹었다고 중국 전체를 삼낀 건 아닌데 말이야. 말수는 그런 마음으로 남자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안심이 됐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엄마품에 안기고 나서 한숨을 돌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말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자신이 임정에 들렀다는 사실을 여순에게 말했다. 사전에 말하지 않아 조심스럽게 꺼냈다. 조용히 돕는 것이라면 반대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위험해 지는 것은 볼 수 없어요. 더구나 우리에겐 아들 환구도 있잖아요. 여순은 말수와 이야기 할때면 환구 이야기를 곧잘 꺼내 들었다.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의도적으로 하는 발언이었다. 우리야 어찌됐든 어린 환구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보살펴야죠.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고요. 환구가 결혼해서 아이를 안고 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알았어. 여보. 나도 그렇게 되기를 두 손 모아 빌어요. 그런 걱정거리는 붙들어 매라는 식으로 말수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식으로 애국을 하는 거예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여순이 제법 진지하게 받았다. 말수가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수는 여순이 환구를 이야기에 끌어들이는 것이 부담이 됐다. 아이는 아이고 우리 일은 우리 일인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환구를 붙들고 늘여져야 하나. 말수는 제 뱃속으로 나은 엄마인 것처럼 행동하는 여순이 조금은 불편했다. 배 아파서 나은 자식도 아닌데 뭘. 그런 심산이었다. 그래서 말수는 여순에게 일종의 지침같은 것을 알리고 싶었다. 더는 선을 넘지 말라는.

고민하더니 결국 행동으로 옮겼네. 그건 생각과는 다른 거야. 우리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어. 임정에 힘을 보탰으니 일제가 쫓는 요주의 인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난 당신이 쫒기는 걸 바라지 않아요. 말수도 동의했다. 전문적인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자신은 그러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환자를 보살피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나는 죽어도 의사고 죽어도 병원에서 수술하다 죽을 것이라고 여러 번 여순에게 약속했다. 이런 약속을 깰 수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간다는 말도 없이 임정에 갔다 왔어. 상의도 없이 말이야. 괜찮지. 말수가 미안한 듯 물었을 때 여순은 아차 싶었다. 혹시 포목점 아저씨도 아나요. 모르지. 당연히 몰라. 잘했어요. 당신이 옳아요. 사람은 좋지만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어요. 자금을 댄 것을 알면 일제 밀정에게 고자질할지 누가 알겠어요. 철저히 비밀로 해요. 알았어, 여보. 말수가 다가왔다. 그리고 가볍게 안았다. 당신을 힘들지 않게 할게. 난 덴노 훈장도 있어. 그걸 버리지 않은 이유를 알지. 한 번은 그걸 써먹을 기회가 있을 거야. 내 보호막이거든. 난 나보다도 당신을 믿어요. 하지만 훈장은 믿지 않아요. 그걸 써먹을 기회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여보. 당신 말대로 할게. 한 번 했으니 뜸을 들여요. 임정은 당분간 발을 끊는 게 좋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미행하는 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안심시키는 말을 했으나 그날 이후 말수는 임정에 점차 발을 디디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는 나름대로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다음에 선생을 만나면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미리 생각을 정리해 놓는 게 좋다. 그가 내 작전에 동의할까. 난 보았어. 전선에서 일제가 싸우는 모습을. 그런 일제와 맞서려면 우선 병력이 있어야 해. 군인 없이 군인과 싸울수는 없거든.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우선이야. 하지만 대규모 전투는 어려워. 게릴라, 그거야. 테러도 좋은 방법이고. 그러나 한두 명 해친다고 해서 독립이 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를 해치면 또 다른 하나가 오고 둘을 해치면 또 다른 둘이 온다. 한둘이 아니라 다 쫓아내야 한다. 조선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군인이 필요했다. 그는 배불뚝이를 통해서 임정이 일차로 조선총독부를 공격했고 이차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력이 얼마나 모일지 궁금했다. 거기다 모인 병력은 단순히 총 쏘는 병사뿐만 아니라 병사를 다룰 장교 인력이 얼마냐가 중요했다. 적어도 장교가 서른 명 정도는 돼야 한다. 그래야 조선 땅에서 전투를 해 볼 여력이 생긴다. 상하이에서 우선 급한대로 열 명이라도 장교를 조선에 급파하고 이들이 은밀하게 조선 각지에서 병사를 훈련 시켜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까지 미치자 말수는 자신이 직접 장교가 돼 병사들을 통솔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총이라면 어떤 것이든 자신있다. 수류탄이나 폭약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내가 적임자가 아닌가. 이만한 사람이 있는가. 담력과 체력과 의술까지.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것을 실천에 옮길 확률은 제로라고 봤다. 나 말고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을 만날 필요가 있다. 머릿속에 있는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을 접목해 보고 싶었다.

요원 훈련과 그에 따른 자금 문제 그리고 조선 침투 루트를 개척하는 것 등 머릿속이 일사천리로 앞서 나갔다. 일본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지금이 말수는 적기라고 봤다. 훈련된 천 명 정도의 병력이 일시에 조선총독부를 접수하고 총독과 정무총감 등 식민지 수뇌부를 체포하면 일단 성공이다. 그런 다음 헌병대사령부와 주한일본군사령부도 점령하자. 그러면 승산이 있다. 친일파 제거는 그다음 문제다. 말수가 무언가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여순은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술이나 마약같은 눈에 보이는 실체였다. 간혹 유곽에도 드나들었다. 그런 날에는 얼굴이 핼쑥해져서 돌아왔다. 여순은 그가 변하는 것이 계절만큼이나 뚜렷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기에 아직은 용인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해 놓은 잣대를 넘지 않기 위해 말수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적어도 이 선은 넘지 말자. 말수는 마지노선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지켜야 자신도 유지된다는 것을 알았다. 여순은 그의 퇴로를 열어 놓았다. 빠져 나갈 수 있는 틈을 준 것이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했다. 그러나 감시의 눈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가는 길이 실패로 돌아가면 여순 역시 실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순은 실제로 모르는 것이 많이 있었다. 진료가 끝나면 그는 의사 모임을 핑계로 집을 나갔다. 그리고는 늦은 시각 들어왔다. 만취해서 이성을 잃는 경우는 없었으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몰두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독립운동도 그 중 하나였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순이 모르는 그 무엇인가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좋아, 그냥 이대로. 오늘같은 내일이면 된다. 여순은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내버려 뒀다. 억지로 막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가 취하는 최고의 방법인지도 몰랐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개입하지 않고 물결처럼 흘러가게 쳐다만 보는 것외에 당장 그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은 없었다. 그래, 이 정도면 좋아. 더 바라면 욕심이야. 한껏 자신을 낮추자 이번에는 무엇을 해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무력감이 더해졌다. 여기서 더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여순의 생각이었다. 더 지나가면 돌아올 수 없다. 앞으로 그냥 가는 수밖에. 그러기 전에 돌려 세워야지. 그럴수만 있다면.

벌린 것이 있으니 거둬들이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말수는 새로운 일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 그가 그만의 새 인생을 살려고 작정한 것인가. 그럭저럭 아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인데 왜 자꾸 다른 것에 눈길을 돌리는지 여순은 말수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라고 해도 전적으로 그의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의 한쪽에는 내 인생도 있고 더구나 우리에게는 아이도 있다. 말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잡고 애원하고 싶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러니 더 깊숙이 들어가지 말아요. 그 속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낭패를 보면 회복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멈추어요. 멈추고 돌아봐요. 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러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일 거요. 이는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한 번 더 넘어지면 일어날 용기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거진 다 소진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잃고 있다. 기타를 치다 여순은 그만 줄을 놓고 흐느꼈다. 이제는 내가 울 차례다. 그녀는 울면서 폐허 속에서 생존했던 그 때를 떠올렸다. 몸서리 처졌다. 상하이에 와서 어쩌다 끄집어 낸 기억은 그녀는 괴롭혔다.

죽음은 사방에 있었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그땐 더워도 너무 더웠었는데. 바르르 떨리는 몸이 멈출 줄 몰랐다. 걷잡을 수 없었다. 이러다 죽고 말지. 끝내 죽고 말거야. 정신을 겨우 차린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일어섰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내렸다.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위장에 도달하자 마음이 조금 차분해 졌다. 그녀는 극과극으로 치닫는 심경을 이런 식으로 달랬다. 다행이다. 커피가 맛있다. 묵직한 그 무엇이 술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차와도 달랐다. 이 맛, 쓰면서도 달콤하고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커피를 여순은 사랑했다. 식도락이 생겼다면 커피와 친해진 것이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어려운 순간에 무엇이든 여순의 곁에 있었다. 그것이 고마워 여순은 찬잔 속으 검은 물체에게 감사했다. 여순아, 그때를 생각해. 최악의 순간들, 네 인생에서 가장 비참했던 기억을. 그러면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 거야. 그때가 없었다면 지금은 버텨내기 힘들거야. 그러나 네겐 그 때가 있잖아. 그 때 말이야. 그 때. 그 때가 언제란 말이지. 알지. 내가 왜 모르겠어. 그 때를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어. 지금은 새발의 피야. 그 때와 비교해 보면. 그러니 정신 차리자. 그 때가 아냐. 그 때가 아니라고. 여순은 그때와 지금을 저울위에 올려 놓았다. 조금씩 마음의 위안이 찾아왔다. 아무리 나빠도 그 때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자 나의 불행이, 나의 괴로움이 들기 쉬울 정도로 가볍게 느꼈졌다. 환구가 다가왔다. 엄마, 어디 아파. 아파. 울지마 엄마. 그래 엄마가 조금 아파. 어디, 어디가. 그가 작은 손으로 여순의 이마를 댔다. 머리가 아니야. 그럼 어디야. 여순은 두 손을 모아 가슴을 가리켰다. 마음이 아파. 아빠 때문이지. 술먹어서 그렇지. 늦게 와서는 커억, 캬 해서 그렇지. 네 살 환구가 아빠 흉내를 냈다. 그런 것 아냐. 우리 아들,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까. 여순은 환구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가려다 말고 밖으로 나왔다. 요리를 하는 대신 만두를 사줄 요량이었다. 바람이 불었고 하늘은 청명했다. 바깥공기는 여순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 놓았다.

그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돌아오는 길에는 갈치를 큰 놈으로 서너 마리 샀다. 말수를 위한 것이었다. 갈치가 먹고 싶다고 칭얼 댔는데 이제 생각났다. 그를 위해 실력좀 발휘하자. 소금은 있겠지. 굵은 소금 한 주먹 뿌리자. 좀 짭짤해야 하거든. 노릇하게 굽자. 좀 탄 맛이 있어야 하거든. 그러면 된 거네. 그래 국도 끊이자. 구이 하나로는 부족해. 시레기도 있고 그래 무가 필요해. 청양 고추를 넣고 얼끈하게 끊이자. 청양 고추. 그건 없어. 그럼 아무 고추나. 여보, 술 한잔 해요. 왜 나랑은 싫어요. 그럴리가요. 술이 고프면 이렇게 둘이서 짠 하고 마셔요. 다른 데 가서 마시지 말고요. 위험해요. 나랑은 웃옷 풀어 헤치고 먹어도 시비할 사람 없어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그 즈음 이곳에서도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두만강 푸른 물에. 여순은 두만강에서 잡은 갈치야. 잘 익고 있군. 아냐. 갈치는 바다에 살지. 내 참. 말수에게 꾸지람 들을 뻔 했어. 두만강 푸른 물에. 여순은 노릇하게 구어진 갈치와 보글보글 끊는 시레기가 듬뿍 들어간 갈칫국을 준비했다. 어, 이거 가리 천지군. 지금이 철인가. 그건 당신이 더 잘알지요. 먹읍시다. 그럽시다. 이런 대화를 생각했다. 환구가 치맛자락을 잡은 손을 놓고 문가로 달려갔다. 아빠가 온 모양이다. 

한편 임정은 말수가 다녀간 후 그를 포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왔다. 완전히 우리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선생이 소매를 걷어 붙였다. 신분이 확실하고 믿음직스러운 말수의 등장은 천군만마와 같은 것이었다. 선생은 권총 성금을 낸 그가 자신을 치료했던 의사라는 것을 젊은 사무원을 통해 들었다. 전에 선생님을 치료한 조선 의사입니다. 사전에 연락이 온 것은 아니고요. 오다가다 들렀다고 합니다. 그 전에 포목점 주인에게서 말로는 들었습니다. 아마도 윤사장을 통해 위치를 파악한 모양입니다. 어렵게 찾았다는 표정이 얼굴에 보였어요. 좀 긴장도 했고요. 자신이 이런 일을 하는 걸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렸어요. 불안한 눈빛도 있었고요. 그럴만도 하지. 이런 일은 위험이 따르지. 그걸 의사가 왜 모르겠어. 나 때문에 조선사람 하나가 또 고초를 겪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그런 일이 없었으면. 그 분은 병원을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소매를 걷어 올릴 때는 옷에서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쳤어요. 의사는 속일수가 없어더군. 음. 선생이 짧은 신음소리를 내고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다른 기억할 만한 말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했어요. 선생은 사무원을 물리고 나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난 번에 왔을 때 가려는 그를 서둘러 잡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됐다. 그러나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는 말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 전문가로 활약했다. 의사가 된 후로는 전선을 따라 다니며 부상병을 치료했다. 특히 포로로 잡힌 일본군 함장을 살려 냈다는 일화는 일본 영사관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 보답으로 함장은 태평양 바다로 그를 복귀시키지 않고 눌어 앉도록 서류를 꾸몄다. 그리고 병원 개업을 도왔다. 미복귀 이유로 부상을 핑계로 댔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덴노 훈장을 말수가 받은 것도 그 함장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도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개연성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포목점 주인에 따르면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정은 일단 포모점 주인 자체를 믿지 않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입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잘 못 믿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간다. 선생은 그를 직접 만나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 오래 대화하고 싶었다. 그 전에 그 인상을 한 번 보기로 했다. 치료 중에 받은 인상은 별로 기억에 없었다. 흰 가운을 입으면 모두가 고만고만하게 보인다. 관찰하면서 말해야지. 눈을 보면서. 그를 판단할 수 있어. 사람의 얼굴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는 신념을 선생은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도 보지 않고 큰 일을 시킨 경우가 없었다. 선생은 이리 저리 이층 집무실을 옮겨 다니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일본이 기울고 있을 때 한시라도 빨리 조선에 독립군을 보내야 한다. 그래야 전후에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미국에 전권을 내주지 않으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우리 목소리를 내야 해. 다른 나라가 대한제국을 재단하면 혼란은 엄청날 것이고. 그렇다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되는 것도 두고 볼 수 없지. 임정은 최악의 시나리오도 상정했다. 휴전에 서명한 미국과 일본이 짜고 서로 영토를 나눠 갖는 것. 일본은 전쟁에 지고도 조선을 여전히 지배한다.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독립군의 조선내 침투, 그리고 조선에서의 대규모 전투가 필요했다. 

선생은 마음이 급했다. 휴의는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다. 약속한 훈련 기한이 끝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미군 측에서는 어떤 연락도 없다. 우리 쪽에서 상황을 알아 보고 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확인을 거부하고 있다. 흉의 접선한 사실조차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조차 노 코멘트하고 있다. 답답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 즈음 미군은 미군 나름대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휴의에 대한 행방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애초 그들은 휴의를 조선독립군에 넘길 의사가 전혀 없었다. 몰래 써먹기 위해 임정에 손을 벌렸던 것이 결국 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미군은 첩자를 임정 주변에 배치했다. 휴의가 나타나면 체포할 요량이었다. 그들도 일이 틀어지고 있어 임정에 대한 반감이 일고 있었다. 그래서 사건이 더 벌어지기 전에 덮거나 마무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휴의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임정이나 미군이나 모두 휴의의 행방을 찾고 있을 때 휴의는 중국 전역을 떠돌고 있었다. 어느 날은 난징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난칭은 몇 해 전에 일어난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 때문에 유령도시로 변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표정이 없었다. 살아 있는지 조차 자신들은 알지 못했다. 수 십만명이 재판도 없이 처형됐다. 목 베기 시합이 벌어졌고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산채로 매장됐다. 여자들은. 휴의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어떤 것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휴의는 자신이 인간인 것이 슬펐다. 나도 이런 적이 있었어. 고문하고 지져댔어. 그게 잘못된 것인줄도 모르고. 황군의 옷을 지금도 입고 있다면 나도 대열에 참여했겠지. 세상에. 어떤 옷을 입었으냐에 따라 인간이 바뀔 수 있다니. 국민당 정부는 도대체 뭘하고 있었지. 제나라 백성이 이 지경이 될 동안. 남의 나라 걱정할 때가 아닌가. 조선을 봐. 조선을 보라고. 난징과 다를 바 없어. 

휴의는 다시 상하이 외곽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도 미군이 자신을 뒤쫒고 있다는 것을 예견했다.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이 임정을 감시하고 있다. 섣부리 나설 수 없는 이유였다. 미군이 자신을 잡기 위해 요원을 파견한 사실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러리라고 생각은 했다. 그 생각은 적중했다. 자신이 체포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임정에게도 책임 추궁이 따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군에 잡히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임정과 접촉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궁금해하는 선생에게 살아 있고 잘 견뎌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전갈을 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렵게 암호문을 보내는데 성공했다. 선생은 휴의의 안전을 확인하고 안심했으나 왜 돌아오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할 수 없었다. 미군과의 관계가 틀어졌다면 앞으로 작전에도 상당한 애로가 있을 것이다. 미군 측의 오해를 풀면서 휴의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선생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임정은 국민당 정부의 손을 빌렸다. 가운데서 중개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당장 무기 공급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아무리 훈련된 교관이라고 해도 무기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선생은 휴의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무기를 얻기 위해 미군에 먼저 연락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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