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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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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생각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6.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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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잘 된 것이다. 아닌가. 잘 된 일이야. 아니야. 여순은 어리둥절했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처음에 놀랐던 여순은 곰곰히 생각하고 나서 나름대로 결심을 했다. 선택의 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이다. 그럴 때 머뭇 거리면서 기회조차 사라진다. 본능적으로 여순은 그것을 감지했다.어차피 살아갈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떤 수를 쓰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들어갈수록 깊어지는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 이판사판 걸어볼 만한 모험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두려움의 핵심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였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도망쳐야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었다. 말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여순에 대해 함께 도모할 대상이라고 여겼듯이 여순 역시 말수라면 다른 누구보다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여순은 일의 끝에는 낙이 있다는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탈출은 일의 끝이 아닌 과정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실패는 고생 끝의 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이 보다 더 잘못될 수는 없다고 다짐을 하면 할수록 더 잘못되는 수가 있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직은 모르지 않는가. 이 놈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 그렇다면 나의 신세가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 없는 일이잖는가. 가정에는 끝이 없었다. 그래서 여순의 고민은 깊었다. 도망가자. 함께. 그냥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다. 이 함께라는 말에 여순은 힘을 얻은 게 사실이다. 나 혼자는 못해. 그걸 말수가 안 걸까. 그래서 함께를 내걸었는가. 도망치자. 그 말은 여순의 뇌리에 깊이 박혀 다른 생각은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다. 설사 일본이 패망한다고 해서 여순의 생이 다른 식으로 전개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살 수 있다는 희망도 나오지 않았다. 미래보다는 현재야. 오늘 하루를 견디는 것은 다가오는 내일을 꿈꾸는 것보다 거칠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말수는 여순의 이런 흔들리는 마음을 알았는지 그것은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감당해야 해. 말수는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뒷문으로 사라졌다. 그가 나가고 난 방은 생각보다 컸다. 원래 방이 이렇게 컸던가. 여순은 말수가 없는 방이 공허하기보다는 너무 크게 다가왔다. 혼자 있기에는 너무 커. 너무 크다고. 여순은 의미 없는 말을 혼자 떠들었다. 그러나 소리는 떠들었다기보다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정도로 여순의 귀에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그날 이후 여순은 감당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겼다. 과연 나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무섭고 떨렸다. 발각되면 죽음이다. 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그것은 자신과는 한 발 떨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일로 다가오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등 뒤로 날아온 총알이 가슴을 뚫고 빠져나갔다. 몸을 관통한 총알은 빠르지 않고 느리게 나아갔다. 그래서 여순은 가슴으로 나온 총알이 앞으로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금속성의 탄두 끝에 자신의 붉은 피를 묻이고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총알을 여순을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다. 이 총알을 내가 만든거야. 도쿄에 있을 때 였지. 그때가 좋았느냐고. 알잖아. 말했을 걸. 십장과 공장장에게 시달렸다고. 그런데 좋았던 기억처럼 왜 회상하느냐고. 총알 때문이지. 그리고 좋았던 기억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 지금과 비교해도 그래. 그 쪽이 더 나았고 이쪽이 나쁘다고 말 못해. 다 나쁘니까.

여순은 손을 뻗다 말고 멈췄다. 총알이 아무리 느려도 여순이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리지는 않았다. 여순은 뒤늦게 총알 대신 쏟아지는 피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 어찌할 줄 모른다. 마치 피를 처음 보는 것인양 이게 뭐지? 하는표정이다. 피다, 피. 붉은 피. 그러면서 여순은 손에 가득찬 이것을 버려야 할지 그냥 들고 있어야 할지 허둥대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데 꼴이 가관이 아니다. 한 번은 어디서 날아온지 모를 포탄의 파편이 얼굴에 박혀 그것을 빼는데 잘 빠지지 않는다. 억지로 잡아 당기자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광대뼈까지 따라 나온다. 마치 죽마을의 천년 묵은 소나무가 잘리면서 초가 지붕을 덮칠 때 나오는 그런 광경이다. 여순은 기겁을 한다. 이번에는 병사의 긴 칼이 목을 찔러 온다. 한 번에 잘려 땅에 떨어지지 않고 좌우로 건들거리는 목을 두 손으로 잡아 바로 세운다. 그리고는 내리친 병사를 향해 도망갔다고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진다. 병사가 여순대신 까무라친다.

여순은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더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누구도 해낼 수 없다.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다. 그 인내심으로 감당해 내자. 한 번 해보는 것이다. 한 번죽지 까짓껏 두번 죽느야 하는 심정이었다. 아침에는 주저했다가 저녁에 파김치가 되고 나면 여순은 이렇게 다짐을 했다. 여순은 말수가 가고 난 후 방안을 운동장 삼아 운동에 열심이다.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몸이 튼튼해야 오래 버틸 수 있고 그래야 살아서 고향에 갈 수 있다는 말수의 말이 뼈에 박혔기 때문이다. 혹시 누가 알고 따라오면 빨리 달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다. 여순은 틈나는대로 방안에서 달리는 연습을 했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서너 발 떼면 닿는 벽을 반환점 삼아 달리고 또 달렸다. 제자리에서 달리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시속 30킬로는 될거야. 한 시간 정도 이 속도를 낸다면. 두 시간을 더 달리면. 벗어날 거야. 적의 시야에서 벗어날 거여. 이 속도면 적이 조준해도 맞추기 힘들어. 총알보다 빠른걸.

달리기라면 여순은 자신이 있었다. 소학교 때 운동회서 일등을 한 적도 있다. 마을 대항전에서는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여순은 학교를 오가는 길에 늘 달렸다. 왜 달려야 하는지 모르고 그냥 달렸다. 걸어도 되는 것을,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됐다. 하지만 여순은 지각하는 소녀처럼 그렇게 마구 달렸다. 황토배기 언덕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 했던 그 동작 그대로 여순은 발을 들었고 들었고 든 발을 힘차게 앞으로 내 딛었다. 방이 커서 다행이야. 서 너 발은 뗄 수 있어. 고맙지 뭐야. 연습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됐다. 이제는 방안에서 달리기는 습관이다. 습관은 끊어 지지 않았다. 그러는 나날이 계속되자 등을 뚫고 나오는 총알의 환영도 사라졌다. 몸에서 땀이 나고 다리에 근육이 붙자 살아야 한다는 의욕이 앞섰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지옥은 견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라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말이 생각났는지 여순은그 말을 되 내면서 하루를 보냈다. 좋은 표현이야. 이런 말을 어떻게 생각해 냈지. 벗어나자 지옥 이겨내자 지옥. 여순은 구호를 외쳤고 그럴 때마다 주먹 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지옥은 견디라고 있는 것 아냐, 벗어나라고 있는 거야. 그날 이후 말수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계획을 세워서 온다는 그는 여러 날이 지나도 방문을 열지 않았다. 여순은 초조했다. 그가 죽었는가, 체념하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왔다.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그 답지 않은 태도였다. 팔을 다쳐 멜빵을 하고 있어도 그렇지. 용기는 어디 간 거야. 겨우 팔을 다쳤다고 수그러들다니. 저런 말수를 내가 믿은 거야. 속으로 여순은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말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만도 했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탈출하려다 잡힌 동료 때문에 감시가 더 삼엄해 졌다고 했다.

잡힌 동료 세 명은 두들겨 맞다가 죽었어. 개패듯이 패더군. 사람 목숨이 질겨. 그렇게 맞고도 비명을 질렀어. 나중에는 시끄러운지 오장 한 놈이 나서서 쏴 버리더군. 그것으로 끝난 거지. 끝났어. 그 말은 탈출을 포기하자는 말로 들렸다. 이제 글렀구나. 여순은 낙담했다. 말수는 죽은 자들이 불상하다고 했다. 언제 죽어도 죽지만 생각보다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너무 어려. 스물도 안 된 애들이야. 말수가 애도했다. 도망치다 잡히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본보기로 당한 거지. 우리 조선 노무자들이 그 광경을 지켜봤어. 그 때 난 결심했지. 탈출을 포기하기보다는 더 해야 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여순은 말수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했다는 안도의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차례다는 의욕이 앞섰다. 여순도 말수와 같은 심정에 이르자 동지 의식이 강해졌다. 하지만 말은 반대로 나왔다. 그럼 탈출은 끝난 거야. 노.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건 아니라고 말수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시간이 지체된 것뿐이니 조금 더 기다리자고 했다. 군함은 언제나 떠나고 기회는 찾아온다고 되레 성급하게 구는 여순을 달랬다. 당장 내일 밤이라도 갈 것 같더니 이제는 보채는 여순을 진정시키고 있다.

그 말에 여순은 고개를 끄덕여 동감하는 대신 말수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 봤다. 믿음이 간다. 저 눈 반짝이는 저 눈. 어찌보면 살기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빛에 여순은 자신을 맡겨보자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그것밖에 더 있겠어.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는 그 방법을 따라야지. 여순은 상황에 맞게 자신을 이런 식으로 정리해 나갔다. 기다리자. 지금까지 참았는데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말수는 기다리면 일을 그르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가 그것을 증명이라고 해보이듯이 품에서 권총 한자루를 꺼내 여순에게 주었다. 잘 간수해. 나는 숨겨둘 곳이 없어. 놈들이 늘 점호를 하거든.여순은 금속성이 주는 차가움을 느끼면서 권총을 받았다. 무섭다기보다는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권총은 무거웠다. 이걸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순은 권총을 제대로 들기 위해 팔굽혀 펴기 운동을 했다. 여순은 그런 여자였다. 상황이 오면 그것에 맞게 자신을 맞췄다. 말수는 그런 여순에게 신뢰를 더했다. 자신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잘도 하는 것이 기특했다. 

자유자재로 권총을 쥐고 흔들수 있게 됐을 때도 여순은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나고 호흡이 가파지고 근육이 불거질 때 여순은 생명을 느꼈다. 팔이 굵어 지고 허벅지가 단단하게 조여왔다. 몸에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자신감을 이어가자. 죽마을 해변에서 넘어졌을때 휴의가 점례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을 엎고 뛸 때 느꼈던 그런 당황하면서도 기분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런 기분이라면 피할 이유가 없지. 여순은 지친 몸을 다시 바닥에 대고 몸을 일으켰다 누웠다는 반복했다.권총은 벽의 벌려진 틈에 숨겨 놓았다. 그 위에 여순은 옷가지를 던지듯이 걸쳐 놓았다. 그러자 일부러 누가 발로 차거나 뜯어 보지 않는한 찾기 어려울 만큼 감쪽같았다.

더구나 방은 어둡고 권총도 어둡다. 총이 옆에 있자 여순은 없는 자신감이 생기는 듯 했다. 여차하면 권총을 꺼내리아. 그런 마음으로 아무도 없는 시간에는 그것을 꺼내 손에 들고 쏘는 연습을 했다. 혼자 죽기는 아까워. 어느 날 말수는 권총에 총알을 재고 방아쇠를 당기는 연습을 여순에게 가르쳐주었다. 조준은 이렇게 하는 거야. 말수가 왼쪽눈을 감았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도 보여줬다. 어렵지 않았다. 총은 몇 개의 쇠붙이로 쉽게 분해되고 조립됐다. 여순은 자신의 삶도 권총처럼 저렇게 분해됐다 조립되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권총과 자신의 처지가 닮았다. 잘도 붙여댄다. 여순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 거렸으나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분해되지 않고 조립되지 않았다면. 골로 갔겠지. 살은 빠지고 뼈만 남은 골. 

여순은 방안이 아닌 진짜 운동장에서 달리고 싶었다. 총을 쏘기보다는 쉬지 않고 달리고 싶었다. 등에 맨 책보 속의 도시락이 달그락거려도 신경쓰지 않고 마구 달려 나갔을 때처럼 달리고 싶었다. 책보를 생각하자 여순은 눈시울이 불거졌다. 소학교 시절 황토배기를 넘어서 남자애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던 때가 눈에 어른거렸다. 고학년 남자를 빼고는 여순을 달리기에서 이기는 남학생은 없었다. 여순은 그만큼 빨랐고 쉽게 지치지 않았다. 그래 변또. 양은 변또는 소리가 요란했어. 그 안에 수저와 젓가락이 같이 따라왔거든. 달리다 보면 책보는 흘러내리거나 앞이 뒤가 되기도 해 불편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젓가락 소리가 여순을 더 자극했다. 덜거덕거리는 그 소리는 때로는 박자가 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빨리 집에 가려는 마음을 재촉하기도 하고 승부욕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여순은 언덕을 넘어 들판을 달리고 다시 언덕을 오르고 과부촌과 성당을 지나 학교 앞에 도착하는 그 모습에 울컥했다. 그리고 다시 탈출을 생각했다. 달리면, 무작정 달려 나가면 안 될 것도 없지 싶었다.

탈출에 필요한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할지 그리고 실패해 잡혔을 때 죽지 않기 위해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말수가 놓친 것이 있다면 자신이 대신 챙기고 싶었다. 그러다가 실패에 이르자 여순은 그것은 끝이라고 둘러댈 것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이미 죽은 몸인데 둘러댄다고 살아날까. 여순은 오로지 성공만을 떠올렸다. 필리핀으로 떠나는 군함에 승선하기만 하면 탈출은, 절반은 성공이라고 말수는 조용하게 말했었다. 여순도 그말을 믿었다. 일단 타고 나서 볼 일이다. 그 다음은 닥치면 하면 된다. 그러자 닥치면 하게 될 일이 미리 생각났다. 얼마나 긴 시간을 군함의 외진 곳에서 숨어 있어야 할지 그리고 뱃멀미는 어떻게 대처할지 고심했다. 그렇다. 뱃멀미였다. 아무리 큰 군함이라도 바다 앞에서는 나뭇잎이라고 했어. 올 때 그걸 느꼈어. 흔들리는 나뭇잎. 흔들리겠지. 계속 흔들릴 거야. 그러면 속이 울렁거리고 먹은 것을 토하겠지.

여순은 멀미를 연상하자 속이 벌써 뒤집어 지고 있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으나 꾹 참았다. 신물은 이미 입안에서 맴돌고 있다. 그 맛은 보고 싶지 않다. 생각을 빨리 옮기자. 자, 군함에도 오르고 멀미도 이겨내고 필리핀에 도착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다음은. 말수는 대책이 있을까, 심란했으나 이곳의 심란함을 생각하자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되버렸다. 자유만 있다면 흙이라고 못 먹을까. 먹어 봤잖아. 먹을 만 하던데.여순은 애써 흙맛을 생각하면서 억지 웃음을 지었다. 정 먹을 게 없으면 흙도 먹고 개미도 먹고 벌레도 먹고 개구리나 뱀도 먹지. 송진도 씹어 먹고. 그러고보니 먹을 게 지천에 널려 있다. 굳이 세상에 나올 필요있나. 정글 숲에 숨어서 짐승처럼 살면되지. 그래, 그게 뭐가 어때서. 이 곳보다는 나아, 백배 천배 낫단 말이야. 정글 소녀가 되는 거지. 모글리 대신 여순이 되는 거야. 늑대 소녀 여순. 제목 나왔네. 좋았어. 

아니면 굶어 죽어도 좋아. 속이 비면 마음도 편해지니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면서 죽어도 좋을거야. 죽을 때 말수가 옆에 있다면 서로에게 유언을 해도 되겠지. 아니면 남길 게 없는데 유언 같은게 무어냐고 핀잔을 받으면 그 핑계 삼아 아무말도 하지 않고 꼴가닥 하고 죽으면 되지. 여순은 줄 선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이런 생각 하면서 견뎌냈다.

점례는 여순보다 일직 죽음을 체험했다. 자신이 의도한 일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갔으니 점례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일어나 보니 점례는 자신이 내동댕이쳐졌다는 것을 알았고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책임이었다. 실수에 대한 책임. 자신이 져야 할 몫. 누군가는 책임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해야 한다. 그런데 주변은 너무 조용했다. 개미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포성도 멈추었고 군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것은 어떤 징조인가. 점례는 바닥에 손을 집고 허리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잠깐 돌아왔던 의식이 다시 꺼졌다. 돌아오는 것은 길었으나 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점례는 도로 쓰러졌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뜬 점례는 아직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는 것을 알았다.

책임에 대한 부담도 사라졌다. 그래서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죽은 듯이 곰을 만나 죽은 사람 시늉을 하듯이 그대로 있었다. 무사히 곰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점례는 그야말로 꼼짝않고 있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곰은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물기도 했고 핥기도 했다.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먹기 위해서 곰은 나름대로 머리를 쓰고 있었다. 곰의 콧김이 훅하고 끼쳐왔다. 날 것 그대로 짐승의 냄새가 점례를 아프게 찔러왔다. 점례는 놀라 스스로 움칠거렸다고 느꼈다. 실수였다. 놈이 알아챘다면 그것으로 마지막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내는 몸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곰이 들이키는 숨소리였다. 곰은 점례의 배에 커다란 다리를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올려 논 앞발을 좌우로 흔들었다. 배가 조금 출렁였다. 잠시 후 다리를 땅으로 내려놓은 곰은 주위를 한 참 맴돌았다. 그리고는 미련은 있지만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몸짓을 보이며 저쪽으로 엉금엉금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점례는 살았다고 안도할 수 없었다. 무엇하나 내 영역인 것이 없었다. 죽음조차도 그랬다. 차라이 곰에게 물려 죽었으면 싶었다. 대가를 치렀는데 어떤 기쁨도 맛보지 못했을 때 느끼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이제 죽든 살든 게의치 않고 싶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서 한 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 자세로 더 있기 어려울 무렵 어쩔 수 없이 손을 바닥에 대고 몸을 일으켰을 때 점례는 몸이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힘을 받아 점례는 본능적으로 겨울잠을 깨는 곰처럼 문을 살짝열었다. 낮게 깔린 달이 안쪽을 들여다보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초저녁이었다. 아니 새벽인지도 몰랐다. 한순간 점례는 마치 달이 자신을 영접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를 받아 주는 것은 하늘뿐이었다.

꼬박 삼일을 고생한 후 점례는 몸을 추스렸다. 정신이 들었다고 여겼을 무렵 초소의 병사 두 명이 점례를 찾아왔다. 이곳 대장의 명이라고 했다. 그들은 장교님은 바빠서 올 수 없으니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양쪽에서 점례를 부축하면서 그들은 이런 하찮은 일을 시킨 것이 불만이라는 듯이 어서가자고 서툰 걸음을 걷는 점례는 채근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의 있게 행동하려고 무척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장교의 다짐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태도였다. 점례는 부축없이도 제 발로 갈 수 있었으나 그것이 편해 그대로 두었다. 장교는 여유가 있었다. 점례를 보고는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초소에서 처음보았던 신경질적인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장교는 다 알고 있으니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고 정말로 점례를 안심시켰다.

그는 만주 전투병과의 최고 장군보다 계급은 한 단계 아래였으나 보직의 중요성은 높았다. 그래서 다른 장군들이 그에게 상관 대접을 했으며 그는 그들을 부하처럼 다루는 기색을 보였다. 말하자면 이곳 만주의 산속에서는 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초소에 있었던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잠깐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들렀던 것이고 그것이 점례를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점례에게 병을 핑계로 너를 빼돌렸으니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고 점례가 궁금해 하는 지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이 점례를 특별한 존재로 대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장군의 호의에 점례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병사들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 점례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점례는 다시 막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장군은 이곳에서 병을 고치고 나랑 같이 살자고 했다.그게 가능할까. 장군은 막사의 불만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만주 시내로 나갔을 때 점례를 대신할 중국인 여성 3명을 데려왔다. 점례가 빠지더라도 인원상의 문제가 없게 미리 대비한 것이다. 섬의 최고 장군이 왜 자신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점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그저 그들이 선택한 데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것이 보름 전의 일이었다. 

그 날 이후 점례는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요새의 대장 숙소에서 지냈다. 대장은 처음에는 밥을 해달라거나 세탁을 요구했다. 다른 것을 점례에게 말하지 않아 점례는 때로는 두려웠으나 이것도 처음이 어색했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익숙해졌다. 막사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활의 자유가 주어졌다. 겨우 뜰 안의 민들레만을 보고 지내는 생활이 아니었다. 안락한 숙소에서 점례는 멀리 보이는 바위와 나무들이 우거진 경치를 감상했다. 이런 행운이 나에게 오다니. 점례는 그것이 도로 갈까봐 초조했다. 하지만 운명이라면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현재를 받아들였다. 계절이 변하고 있다. 변화하는 계절을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다. 나무잎이 자라면서 신록이 우거지는 봄과 여름을 보았다. 어느 날은 숙소를 나와 혼자 언덕을 올라 오기도 했다. 멀리 가지는 말라는 당부가 있어 점례는 대장이 손가락으로 알려준 그 지점까지 와서는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곳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이 자유이며 그래서 몸이 홀가분한 것을 느꼈다.

거기에 서면 자신이 있는 숙소와 시멘트 구조물 세개 동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검은 막사가 보였다. 점례는 그곳에 가 있는 눈길을 얼른 돌렸다. 누가 볼새라 그녀는 금새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 변했다. 여기서는 저기가 잘 보이는 구나. 저기가 안 보이는 다른 쪼으로 가자. 점례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막사는 가려졌다. 점례는 안도했다. 이 장소로만 와야지. 그러면 소름이 돋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는 앉기에 좋은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내게도 기회가 온 것인가. 아니면 기회를 놓치고 있는가. 점례는 자신에게 갑자기 찾아온 변화가 믿기지 않았다. 비록 제한됐지만 이런 자유를 누리다니. 그녀는 마치 세상을 처음보는 아이처럼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이 그녀 곁에 있었다. 군홧발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군가 소리와 제자리에 서서 구령을 지르는 소리도 마치 오래된 일처럼 잊혀져 갔다. 연병장에 군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야간 작전을 나가는 모양이다. 곧 사라지겠지. 저렇게 연병장을 꽉 채웠다가 어느 순간 텅 비었다. 연병장은 신비로운 장소였다. 

거기를 보고 있으면 바람이 부는지 안 부는지 알 수 있었다. 모래 먼지가 산쪽으로 몰려가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희뿌연 먼지 없이 회색빛이 조용하면 바람도 쉬어가고 있구나, 생각하면 됐다. 이것은 꿈이다. 한 여름밤의 꿈이다. 꿈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 그러나 점례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꿈과 현실의 중간 쯤인가. 나에게 닥쳐온 이것을 점례는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꿈처럼 잡혀왔다가 꿈처럼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마치 연병장에 부는 바람처럼, 뿌연 연기처럼 혹은 산의 팔부능선에서 피어오르는 운무처럼 실체 없이 떠도는 가벼운 공기가 바로 자신이었다. 이런 공상을 하는 점례가 놀랄 때는 한 무리의 병사들이 열을 맞춰 연병장으로 달려 나올 때였다. 역시나. 여전히 점례는 군인들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늘 그랬다. 달려 왔다가 달려갔다가를 반복했다. 왜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반복되는지 점례는 궁금하지 않았다. 여기 군인들은 그렇게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나도 우습지가 않았다. 달려나온 그들은 훈련의 하나인 것이 분명한 동작을 취했다.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는  모여서서 군가를 불렀다. 군가 소리는 악소리로 변해갔고 그것은 박자라기 보다는 무작정 지르는 함성소리였다. 점례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뜨거운 불을 쬐기 위해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한 무리의 거지들을 떠올렸다. 경성역에서 보았던 거지들도 저렇게 모여 있었지. 모인 군인들은 흩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그런 자세로 한 십분 쯤 소리를 질렀다. 목이 아플거야. 저렇게 질러대면 성대가 남아날리 없어. 날 달걀을 먹어도 고생을 하겠지.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극성이다. 기합을 받고 있나. 

그래 저것도 기합일 거야. 군대는 기합을 먹고 산다고 했어. 대장이 그랬어. 군인들은 기합없이 움직이지 않아. 그들은 밥을 먹는 것처럼 기합을 일상으로 여겨. 그 일상이 무너지면 군기도 무너지는 거지. 그때 점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대장은 간혹 점례 앞에서 군대 이야기를 꺼냈고 병사들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알지 못하는 말을 혼잣말 처럼 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점례는 물어보고 싶은 호기심을 느꼈으나 감히 그게 뭔데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같은 질문을 하지 않고 속으로 되뇌일 뿐이었다. 주제 넘는 일을 점례는 하지 않았다. 그래야 하는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말은 했다. 식사하셔야지요. 군복을 다녀놨습니다. 오늘 오전에 장군 회의가 있어요. 그런 말들은 빠지지 않고 했다. 그럴 때면 대장은 자신을 데려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군인들이 마침내 원을 풀고 일렬로 늘어섰다. 상관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큰 함성을 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점례는 공포를 느꼈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모두가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포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그 공포의 실체가 모여 있는 것에서 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가 아니고 둘이 아니고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가 모여 있을 때 점례는 오금이 저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리지은 그들은 사나웠다. 지르는 소리도 움직이는 모습도 모두 위협적이었다. 두 손으로 총을 잡고 앞선 칼날을 찌르면서 돌격해 왔다. 심장이 찔린 것처럼 점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기도 편히 쉴 곳이 못되는구나. 점례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장군 숙소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무섭게 달려 들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밖을 보기보다는 안에서 문을 잠가야 한다. 대장은 나갔는가. 아니면 그대로 숙소에 있는가. 점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군화 한 짝이 있었다. 대장과 상의하기 위한 부하의 것이었다.

점례는 그들이 눈치채지 않게 조심하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손에 익은 뜨개를 뜨기 시작했다. 아직 식사를 준비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대장이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도 모르고 숙소에서 한다면 몇 인분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러명의 것이라면 군인가운데 식사당번이 처리하는데 오늘 처럼 두 세명이 모이면 점례가 직접 챙길 때도 있었다. 식재료는 늘 풍부하게 대기하고 있어 점례는 식사 준비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숫자가 많으면 병사들이 도맡았다. 오늘은 대장을 포함해 두 명이다. 어쩌면 간단한 식사를 부탁할지도 모른다. 부탁이라고. 점례는 부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내가 부탁을 받을 처지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대장이 나에게 식사를 부탁해, 하고 말한다. 점례는 부풀어 올랐다. 자신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다. 뜨개를 하면서도 귀는 창문밖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여는 소리와 부르는 소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였다. 부하와 대화가 끝나면 대장은 점례를 찾을 것이다. 점례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오직 대장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대장이 명령하면 병사들이 달려올때처럼 늘 긴장된 상태로 어떤 내용일지 신경을 곤두 세웠다. 부하는 전투에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서 대장과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마침내 대장이 일어났고 부하도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무전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계속 무전을 쳤다. 그리고는 종이쪽지를 들고 무언가를 대장에게 보고했다.

대장은 그러면 그것을 다시 정리했다. 자기 손으로 일일히 정리하고는 부하에게 넘기면서 타자로 치라고 명령했다. 그가 받는 보고서는 많았으나 대장이 정리한 서류는 아주 짧았다. 그는 긴 것 보다는 짧은 것을 좋아했다. 보고도 장황한 것보다는 간단하게 끝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어떤 부하는 대장의 방에 들어오기도 전에 보고와 명령이 끝나는 수도 있었다. 대장은 태평양 전쟁의 상황을 본토로 보내고 새로운 작전명령을 예하 부대에 내려 보냈다. 요즘 들어 그러는 횟수가 더 잦아졌다. 이곳 전선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했고 그의 전통도 수시로 바뀌었다. 유리한 것이 상부에 올라기도 했고 때로는 불리한 전황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는 어떤 경우든 표정을 바꾸지 않고 원래 상태인 얼굴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지시를 내리거나 받아서 같은 곳에 전달했다. 그가 내리는 명령은  최종적인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곳에서 오는 전화나 전통도 모두 그의 손에서 마무리됐다. 그들은 대장을 부를 때 모두 각하라는 호칭을 썼다. 점례는 그의 직책이 도대체 어느 선인지 알지 못했다. 유마 각하, 혹은 유마 호사카 각하님. 부하들은 대장을 그렇게 부르면서 고개를 숙였다. 깊은 존경과 상관에 대한 철저한 복종의 자세였다. 점례는 일부러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어 보지 않았고 묻는 말에만 대답을 했다. 대장은 간혹 산을 떠나 만주에 직접 나가 삼 사일 동안 이상 돌아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가 외부로 나갈 때는 옷장에서 꺼낸 깔끔하게 다린 군복을 입었다.

그날을 위해 점례는 언제나 군복을 칼날 처럼 날카롭게 다녀 놓았다. 대장이 점례가 꺼내준 군복을 입고 나면 날이 선 누런 군복에서 위엄과 권위가 느껴졌다. 위엄은 그가 사는 곳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대장 집무실은 저 아래 연병장에 비하면 다른 세상이었다. 푹신한 침대가 있고 세련된 가죽 쇼파와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장식장이나 사제 옷장 등이 있었다. 과자나 과일 등 먹을 것도 있었고 군복이나 군화 등은 언제나 새것으로 준비돼 있었다. 군인들은 새것을 에이급이라고 불렀다.

한 번도 입지 않고 그래서 세탁도 하지 않은 날것을 에이급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입을 때는 대접받고 있다고 느꼈다. 군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새것들만이 대장의 숙소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용물품 뿐만 아니라 사제 물품도 에이급이었다. 그러나 점례는 일부러 그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장이 떠나고 나면 점례는 대장을 위해 일장기가 그려진 자수를 짰다. 비단에 수 놓는 자수는 보기에 좋았다. 일장기가 끝나면 태양을 본 뜻 욱일기를 시작했다. 떠나기 전 그는 점례에게 무엇을 하라고 따로 지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례는 시간을 함부로 쓰지 않고 무언가를 했다. 같다온 대장은 그동안 점례가 한 일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조선 여자는 믿을만 해. 

지금 욱일기를 새기는 비단천도 지난 번 시내에 나갔다 올 때 사온 것이다. 점례가 학이 그려진 자수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났는지 이것으로 뭐든 해봐, 하고 손에 든 것을 내밀었던 것이다. 자수를 짜던 모습을 유심히 보던 대장은 자신도 해보고 싶다고 바늘을 달라고 했다. 점례는 그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망설였다. 그러다가 아무말 없이 천을 내밀었다. 대장은 주는 것을 받아들고는 이 정도는 해보지 않았느나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일본 육사 시절에는 군복을 직접 꿰어 입었다고 자랑했다. 그 솜씨 어디가지 않고 여기 있을 거야. 그는 바늘 끝에 침을 묻히고는 비단의 붉은선을 따라 바늘을 꼽았다. 그도 휴의처럼 붉은 부분에 바느질을 했던 것이다.

휴의가 학의 얼굴에 붉은 실을 넣을 때 대장은 일장기의 붉은 부분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작은 상처를 냈다. 검지에 피가 한 방울 이슬처럼 뭉쳐 있었다. 얼굴을 잠깐 찡그린 그는 바늘에 찔렸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몰라 그대로 있었다. 점례는 순간 그가 남자가 아닌 여자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곱상한 외모가 머리가 짧지 않고 길다면 영락없는 여자상이었다. 섬세한 행동도 그랬다. 바느질을 하겠다고. 그런 일에는 준비가 필요해. 군인이니 알겠지. 어떤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무작정 달려 들었다. 한 두 번 해본 걸로는 부족해. 자수는 단순히 꿰매는 작업이 아니거든.

점례의 생각은 복잡했다. 대장은 여전히 피나는 손을 들고 어치해야 하는지 몰라 점례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에서 점례는 피가 나서 아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실수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있게 나섰다가 망신 당한 꼴이라고나 할까. 점례가 무릎 걸음으로 다가갔다. 대장이 그런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다면 낭패다. 점례는 피 묻은 손을 쥐고 있는 대장의 손을 가볍게 옆으로 치우고는 입으로 나온 피를 빨았다. 죽마을 시골에 있을 때 늘 하던 버릇이 나왔다. 엄마는 바느질 하다 찔리면 침으로 피를 닦아냈다. 그래야 상처도 아물고 빨리 낫는다고 했다.

대장은 그대로 있었다. 대장은 자신의 손가락을 빠는 점례의 목덜미를 보았다.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그 목덜미에 대장은 가볍게 입술을 댔다. 점례가 가볍게 떨었다. 그 떨림은 손가락을 빨고 있는 대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점례는 무안하고 부끄러웠으나 하던 일을 계속했고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입을 땠다. 그리고는 입술을 훔칠 생각도 없이 누구나 처음에는 이런 경험을 한다고 대장을 안심시켰다. 그의 얼굴에 욕구를 만족 시켰을 때 나오는 은근하고 아득한 표정이 한 가득 배어나왔다.

그는 이제 됐다는 듯이 손을 한 번 흔들더니 자수는 내 체질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일어섰다. 고맙다. 너는 뭐든지 잘하는구나. 대장은 점례가 이곳에 있는 것이 당연한 듯이 여겼다. 되레 너무 늦게 데려 온것을 질책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더 좋은 장소에 점례를 두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자신의 침실과 사무실의 한쪽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대장과 점례가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공간 공동체라고나 할까. 

그러나 점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있는 곳도 충분히 좋다고 했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가 대장의 마음에 또 들었다. 행동이 점잖고 하는 말이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명령이라면서 그렇게 하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있어. 행동도 그렇고. 분명히 점례는 그것을 인식했다. 유마가 어떤 식으로 달라지는지 점례는 순간 순간 그것을 알아챘다. 점례는 더는 거부하지 않았다.

유마는 점례와 함께 생활하면서 도쿄의 집처럼 안도감을 느꼈다. 전쟁터가 아니라 평시에 사는 생활인 같은 편안함에 유마는 불쾌한 일에도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대장이라고 부르지마. 그냥 유마라고 해. 그게 편해. 호칭에 변화가 왔다. 그를 부르는 용어가 달라질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점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좋은 징조야. 점례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잘 알지는 못해. 말을 배울 때 처럼 아직 나와 그는 걸음마 상태야. 그 뿐이야. 점례는 처음으로 유마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유마가 볼 때 점례는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았는데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처럼 상대의 마음속을 샅샅히 살피는 감정이 점례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었다. 건축물로 말하자면 화강함처럼 기초가 튼튼했다. 이제 점례는 어떻게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야 하는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체득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건드리지 않은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것은 말해도 되고 저것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기 시작할 무렵 문득 점례는 자신이 삶이 달라지고 있는 것은 느꼈다. 

대장이 만주 시내로 군용트럭을 타고 나갔다. 짚차를 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병사들이 필요한 지점으로 직접 시찰을 나가는 것 같았다. 점례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가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던 책을 읽었다. 소학교 때 배운 일본어는 이제 읽고 쓰고 말하는데 불편이 없었다. 불과 세 달 만에 장교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일본어 책도 마음대로 읽는 수준이 됐다. 소세키가 쓴 고양이가 주인공인 소설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고양이가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말을 알아 듣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고양이를 읽다가 죽마을 툇마루를 들락거렸던 검둥이를 생각했다. 온 몸이 검은 고양이는 어느 날 와서는 마치 제 집인듯이 생활했다. 아버지가 작대기로 내쫓아도 그뿐, 언제 그런 낭패를 당했느냐는 듯이 툇마루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고양이와 생활한 경험은 고양이 책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이 됐다. 점례는 거기 나오는 주인공과 친구와 이웃간의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갔다. 느렸지만 꾸준히 그녀는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썼다. 그러면 시간은 금새 지나갔다. 어느 날은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놀라웠다. 그녀는 햄릿을 읽고는 눈물을 흘렸다.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구사하면서 상대의 감정을 파고 드는 책이 있다는데 감사했다. 유마는 왜. 내게 왜. 이렇게 잘하지. 그리고 나는. 책이 마음에 들어. 이런 책은 듣도 보고 못했는데. 이런 걸 물어보면 싫어할까. 그러나 점례는 물어 본다는 틀림없이 유마가 기꺼이 대답해 줄 것을 알았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래서 그는 햄릿을 읽었노라고 그가 말하면 말해 주려고 작정했다. 

오월로 접어 들면서 맞은편 산에도 새싹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사방에 연두색과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산의 이곳 저곳에서 야생화들이 피어났다. 숨막힐 지경이었다. 나무들은 사람이 아래서 해를 피하면서 쉬어도 좋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잎이 무성해 졌다. 점례는 창문을 열었다. 새로운 공기가 들어왔다. 이런 공기를 마시다니. 여전히 점례는 꿈속을 헤맸으나 그 꿈속은 이전의 꿈과는 다른 것이었다. 엄연히 실체가 있었고 그 실체를 온 몸으로 느꼈다. 연병장은 언제 보아도 넓었다. 이쪽에서 저쪽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끝에는 절벽처럼 산이 깎였고 그 바로 절벽아래에 시멘트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곳은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득했다. 달려가면 금방 닿을 곳이 마치 멀고 먼 이국의 땅처럼 시야에서 멀게만 느껴졌다. 점례는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만주 시내가 펼쳐질까. 시내는 어떤 모습일까. 인파로 북적이는 만주 시내가 궁금했다.

역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경성으로 가는 차도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마음이 이곳을 벗어나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에 갈 수 있을까.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점례는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앳된 얼굴이지만 눈가에는 너무 일찍 생긴 주름 같은 것이 보였다. 얼굴에 진짜 주름이 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점례의 가슴은 방망이질 쳤다. 만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막사 밖에서 들려오는 군가의 두려움보다 유마의 숙소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심장을 더 요동치게 만들었다. 겨우 다섯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 세월은 너무 멀고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다. 너무 잘해주니 배은망덕의 마음이 들어섰다고 점례는 자책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꾸 벗어나려는 의욕이 생겼다.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날까. 자신을 고향 땅으로 실어 나를 구름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좋겠다. 구름을 타고 가는 것은 필경 멀미를 부를 것이다. 차 멀미와는 다를 것이다. 구름 속을 달려야 하니 몸도 아플 것이다. 그러나 멀미나 아픔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구름에서 하는 구역질이라면 토사물 때문에 낭패를 당하지 않아도 된다. 하늘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토사물. 점례는 살풋이 웃었다. 누가 맞게 될까. 맞고 나서 냄새 때문에 인상이 치푸려지는 누군가를 생각하자 점례는 웃지 않고는 배길수 없었다. 제 정신이 돌아온 점례는 눈으로 문가를 쳐다봤다. 그 순간 점례는 아무 소용이 없는 쓸데 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하는 약간의 기대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구름을 타고 가는 것만큼이나.

그러나 한 번 뛰기 시작한 가슴은 여간해서는 멈추지 않았다. 상상은 계속이어졌다. 좋다. 여기서 탈출한다손 치자. 그러면 그 이후는. 막사에서 보고 행한 것을 함께 고향으로 가지고 갈 수 있을까. 가지고 가서 어디에 써먹을 수 있나. 고향은 나를 반겨줄까. 거기가면 내가 할 일이 있을까. 그러나 순간 낙담하는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이런 속마음을 유마에게 털어 놓고 싶었다. 지금 점례의 갈팡질팡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오는 혼란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것이다. 대안이 없어. 떠나면 뭐가 있지. 날 기다리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자 점례는 그만 그 자리에서 푹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괜한 생각을 후회하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봤다. 문제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고사람들은 여기 일을 모른다. 종일 낙원을 뛰어다녔는지 공장에서 예쁜 신을 만들었는지 지옥 불에서 허우적거렸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허욱적거리다가 어느 새 죽마을 대나무 밭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엄마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휴의였다. 그런데 휴의는 반가운 표정보다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 일이 즐겁더냐. 점례는 대답 대신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자루가 빠진 맷돌처럼 점례는 어쩌구니 없었다. 그 일이 즐겁더냐고. 알고 싶어. 사실대로 말해줄까. 아냐, 아니야 미안해. 점례야 그런 뜻이 아니야. 휴의가 반성했다.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 졌다. 말해주지. 그까짓것 어려울 것 없어. 즐거웠어. 행복했다고. 됐지. 또 알고 싶어. 몇 명 이었느냐고. 어떤 수를 상상하든 그 이상이야. 됐어 됐느냐고.

점례는 쓰러졌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잽싸게 대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제일 큰 대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시합하자. 누가 먼저 오르나. 휴의가 달려들면서 점례 옆의 나무를 타면서 말했다. 웃었다. 둘은 그렇게 경쟁하면서 웃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나무는 휘어졌다. 휘어지는대로 점례도 휘어졌고 휴의도 휘어져서 마침내 둘이 맞닿았다. 마주보고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웃음이 나는 모양이다. 

웃다가 점례는 울었다. 마치 아니처럼 순식간에 감정이 변했다. 다 버려야 한다. 몸도 마음도.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린 아이로. 이것으로도 안된다.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한다. 아냐, 그럴 수 없어. 지금의 나로 족해. 족하다고. 책을 읽고 자수를 떠. 어제는 그림을 그렸어. 그러자 이곳 생활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장은 대범하다. 언제까지 그럴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그러니 도망칠 생각은 말자. 그러다 잡히면 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가까이 있었다. 체념하는 마음이 점례의 기분을 바꿔 놓았다. 그렇게 마음을 정했어도 만주로 가는 대장을 볼 때면 다른 생각이 들었다.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기차역에 서성이는 자신의 모습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설마 휴의가 그렇게 물을까. 그녀는 고향에 가면 무엇이든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돈을 어떻게 벌고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 아니면 만주나 상해도 좋고 그도 아니면 구라파라도 못갈 이유가 없다.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심연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우러나오고 있다. 점례는 당황했으나 이것은 자신에게 닥쳐온 거쳐야 할 관문이니 이겨내자고 다짐했다.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점례로 사는 힘을 얻었다. 대장이 준 선물로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었다. 그가 책을 주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가 없는 점례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은 정리됐다 흩어졌다를 반복했다. 혼란스러워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까만 어둠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연병장의 부연 먼지처럼 뒤죽박죽된 것이 좀처럼 제자리를 차지 못했다. 나는 나고 나는 점례라는 사실만 변하지 않을 뿐이었다.

또 심장이 뛰었다. 그 소리가 귀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본능적으로 점례는 뛰는 심장의 소리를 자신말고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알아보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다른 사람이 아닌 유마였다. 만주에서 그가 돌아왔다. 점례를 보자 마자 그는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라고 했다. 점례는 그가 시키는대로 했다. 두 눈을 감고 얌전하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민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코 끝으로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장미향인가, 들판의 라일락 꽃 향기인가. 눈을 떠도 좋은가요. 점례는 물었다. 유마는 아차 싶었는지 두번째 명령을 실행하지 않은 것을 알고는 눈을 떠라 하고 말했다. 점례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떴고 손안에 담긴 생전 처음 보는 예쁜 포장을 보았다. 무겁지 않고 들을만큼 가벼웠으나 무척 소중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풀어봐도 되나요 하고 묻기 전에 유마는 풀어봐 하고 말했다. 점례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풀면서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빨간 사탕이었다. 검은 초콜릿이었다. 유마가 눈짓을 주었다. 이번에는 말이 아니다. 맛있으니 먹어보라는 명령이라는 것을 점례는 말을 듣지 않고도 알았다.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유마에게 점례는 엄마의 사랑을 느꼈다. 그가 먹어봐 하면서 이번에는 고개로 명령을 내리자 점례는 자신은 그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이토록 대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귀한 대접을 받고 나자 점례는 자신이 정말로 귀한 사람이 된 것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행여 다쳐서는 안된다는 엄마의 눈으로 유마가 쳐다보고 있다. 사탕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녀는 차마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먼저 넣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점례는 손에 든 그것을 앞에 있는 유마의 입으로 가져갔고 뜻밖의 행동에 당황했던 유마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이것은 내것이 아니라 네것이니 점례가 먹어야 한다며 그것을 빼서 점례에게 도로 주었다.

점례는 부끄러웠다. 그러나 몸 속은 따뜻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용광로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견기디 힘들었다. 천웅 장터의 펑튀기 손잡이 부근에서 김이 무섭게 솟고 있다. 터지기 직전이다. 그러나 점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유마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그는 강한 여자를 원한다.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방어해줄 강한 여자. 그래서 점례는 당당하게 다음으로 유마가 준 것을 끌러 보았다. 옷칠이 된 액자였다. 액자 속에는 양복을 입은 늙은 부부가 점잖은 모습으로 점례를 바라고 보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목각인형은 이제 버려. 잊으라고. 대신 부모님을 섬겨. 나처럼. 대장이 말하면서 사진속의 인물이 자신의 부모임을 밝혔다. 점례는 액자 속의 사진을 보면서 뜨끔했다. 인형의 존재를 그가 알고 있었다니. 점례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무언가를 들킨 것 같은 미묘한 표정을 유마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서랍으로 가더니 점례가 넣어 놨던 목각인형을 들고 왔다. 점례가 그 모르게 서랍의 한 쪽 구석에 둔 것이었다. 이건 이제 버려. 애지중지 하는 이유는 묻지 않겠어. 무슨 사연인지도 알고 싶지 않아. 힘들면 이 사진을 봐. 이제 목각인형은 없다. 

그가 말하고 나서 점례의 의견도 묻지 않고 손에 쥔 그것을 밖으로 던졌다. 그것이 날아가는 모습이 슬쩍 보였다.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장은 어려운 숙제를 마친 것 같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이것이 웃을 일인가. 간직하고 있던 소중한 것이 빠져나갔으나 점례는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녀는 다시 사탕 하나를 얼른 입에 물었다. 그까짓 부서진 목각인형 쯤이야, 이런 마음이었고 그 마음을 유마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런 심정으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사탕을 깨어 물고는 아주 달다면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점례가 의식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목각인형은 점례와 어떤 사연으로 얽혀 있을까. 단순하든 그 이상이든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다. 그는 통큰 사내였다. 점례가 보기에 그랬고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난, 나무 인형이 어떤 의미가 있든 왈가왈부하지 않아. 그 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그런 마음이라는 것을 점례가 읽었을 때 그가 한 발 다가왔다. 그리고는 검지 손을 세워 점례의 눈 앞에 갔다 댔다. 대신 이걸 봐. 바늘로 찔린 상처가 아물었고 그것은 너 때문이니 고맙다는 표시였다. 이런 게 고마운 거야. 상처가 났을 때 아물 게 하는 거. 그게 의미 있는 일이야. 그러면서 그가 다른 손에 있던  또다른 꾸러미가 점례 앞으로 내밀었다.

부피가 크고 제법 무게가 나갔다. 유마는 이번에는 점례에게 풀어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이 끈을 풀려고 했다. 그러나 들고 있는 무게 가 매듭을 강하게 죄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벽에 걸린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작은 끈을 자르는데 너무 큰 칼이었으나 점례는 그것을 의식하기보다는 내용물이 더 궁금했다. 긴 칼을 뺄 때 칼집을 스치는 날의 날카로운 금속음 소리를 점례는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자르는 대상에 따라 칼날을 이렇게 다른 소리로 다가왔다.

면도칼보다 날카로운 날이 두껍고 단단한 포장줄을 가볍게 잘랐다. 유마는 칼을 칼집에 넣지 않은 채 끊어진 줄을 잡아 당겨 풀고는 뚜껑을 열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펼쳤다. 그림을 그리는 물감이 가득했다. 점례는 놀라지 않고 미소 지었다. 물감의 옆 다른 칸에는 크기가 다른 붓이 여러개가 있었고 유마는 그 붓 하나를 들어 점례의 볼에 대면서 그려, 넌 그림에 소질있어. 앞으로 널 화가로 부를 게. 조선의 최고 화가. 유마가 너스레를 떤다고 점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표정에서 나 지금 진지하거든, 하는 얼굴 모습을 보였다.

점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점례의 몸에 생기가 돌고 있다. 그것을 느낀다. 밟힌 민들레 잎이 새로 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저녁에 눕는 것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살아 가는 이유가 하나 생긴 것이다. 너를 만나 행복하다. 날마다 죽음이 곁에 오지만 널 보면 삶의 충만을 느낀다. 대장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공간이 편안해. 살기 띈 공기도 없어. 난 오늘도 이 방안에 오기 위해 밖으로 나가. 그러면서 오늘 밤에도 여기서 자게 해 주세요, 하고 빌지. 이번에 하지 못하면 다음에도 하지 못하니 기어이 하겠다는 듯이 유마의 입이 어렵게 들썩였다. 

죽으러 갔다가 살아 돌아온 느낌이 이런 것이다. 점례는 그런 기분을 안다. 그래서 유마가 하는 말이 가슴이 하나씩 새겨졌다. 그도 나처럼 죽음을 달고 사는구나. 널 보면 난 힘이 생겨. 대장이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는 거짓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나를 귀한 사람처럼 대하고 있다. 어디가 이뻐서 그렇지. 점례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한 번이 아니고 계속 이어지자 의문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게서 생명을 늒지지. 그렇지. 그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게서는 그런 냄새가 나. 어머니 배속에서 나와 맡는 젖냄새. 그런 냄새가 나한테 날거야. 어린애야, 당신은. 엄마 품이 그립지. 점례는 유마를 아기를 바라보듯이 쳐다봤다. 

이런 변화는 좋은거지. 그런 거지. 아마 그럴거야. 하지만 그가 바뀐 것이 아냐. 그는 그대로야. 내가 처음 초소에서 접했던 등이 따뜻했던 남자. 그는 남자가 아냐. 여자로 태어 났어야 했어. 총 대신 펜을 들고 칼 대신 붓으로 그림을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내야. 그는 오늘도 그것을 표현한 거야. 난 여자라고. 그럼 누가 변했지. 뻔하잖아. 여기서 그가 아니면 누구겠어. 내가 변한 거지. 점례는 그가 숙소를 나가 사무동으로 일을 하러 가면 빈 집에서 자신이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했고 실천했다. 어제 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먼저 그것부터 처리했다. 점례는 늘 변하고 싶었고 그래서 일을 찾아서 했다. 점례는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례는 그것은 아직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내일은 대장 복장에 어울리도록 그를 잘 꾸미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에 앞서 자신을 돌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옷 매무새를 다듬었고 머리를 보기 좋게 빗었다. 젊은 그가 여자처럼 예쁘장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거울 속에서 웃을 때 점례는 자신도 저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 옆에 같이 있기에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대장은 점례가 자신을 꾸밀 때면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아이처럼 귀찮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점례는 대장의 머리도 직접 깎았다. 손놀림이 좋은 점례는 한 두 번 해보면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고 대장은 언제나 점례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라고 믿고 맡겼다. 그래서 자신을 온전히 기댔고 기대는 언제나 만족하게 다가왔다. 전투복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나면 점례는 그보다 먼저 현관으로 나가 군화를 챙겼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은 군화는 대장의 위엄을 한껏 빛나게 했다. 그가 군화를 신기 위해 허리를 굽히면 점례는 가죽 가방을 들고 그가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대장은 거의 모든 일을 점례에게 의지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점례의 손을 빌렸다. 이제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 같은 상태가 되어 갔다. 점례 손에 자란 아이, 점례는 유마의 유모였으며 생모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나가고 연병장에 그가 탄 지프가 뿌연 연기를 날리며 절벽 끝에 있는 사무동쪽으로 가는 동안 점례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서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엄마가 교문으로 들어가는 막 입학한 어린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 마냥 점례는 그런 심정으로 대장이 막사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 눈을 팔지 않고 그렇게 있었다. 그를 도와 주고 싶었다.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살피고 또 살폈다.

퇴근해 집에 오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식사를 챙겼고 편히 잘 수 있도록 햇볕에 잠옷을 말렸고 말린 잠옷을 걷어 잘 다려놓았다. 그가 어떤 일을 하든 점례는 묻지 않았다. 그가 간혹 전쟁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어떻게 생각해, 당신은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런 식으로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조용히 듣기만 했다. 나는 그날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점례는 유마가 자신을 점례로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부른 날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점례는 스스로 그림을 배웠다. 하루는 유마가 오는 것도 모른체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어깨에 닿는 그의 손을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점례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 유마가 내가 제대로 알아봤어. 당신은 유명한 화가가 될 거야, 하고 말했었다. 유마 호사카. 유마가 나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의 당신이라니.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이날을 점례는 기억해야 하고 기억할 것이다. 당신이라니. 내가 그의 당신이 됐다. 그럼 나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하나. 대장 각하가 아니고 나 역시 당신이라고 불러야 하나. 내가 알아봤다고. 이 그름은 아무나 그릴 수 없어. 당신은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될 거야. 아버지가 기뻐할 거야. 아버지가 나를 기뻐한다고. 어머니도 당신 그림을 보면 칭찬할 거야. 어머니가 칭찬한다고. 점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니 그림에을 실재로 착각해 날아드는 나비처럼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언제나 처럼 점례는 그곳에서 쉽게 빠져 나왔고 상황을 정리했다.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해. 먼저 들어갈게. 마쳐 색칠해. 내일 아침 깨어나면 내가 볼 수 있게. 유마가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식탁에 있는 부보님 사진을 향해 가볍게 경례를 올려 붙였다. 유마는 아버지를 천황 만큼이나 존경했다. 그래서 인지 들고 날 때 언제나 액자에 든 부모님 모습을 살펴보았고 오늘도 그렇게 하고 있다. 

점례는 액자속의 부모를 그가 소중히 여길수록 자신도 그런 기분속에 빠져들었다. 보지 못하는 내 부모님 대신 사진 속의 유마 부모님을 진짜 부모님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다. 점례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액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하루는 유마가 평생 자기 곁에 있게 해달라고 소원하기도 했다. 내곁에 있어줘. 그대 내곁에 죽을 때 까지 있어줘.  유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을 점례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나 표정이나 행동에서 점례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사무동에서 돌아올 때는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깊은 내면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에 짓눌리고 있음을 점례는 눈치챘다.

전황은 어떻게 되는가. 대일본 제국의 압승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불리한가. 오늘은 그의 얼굴이 좀 어둡다. 감추려고 해도 점례의 눈을 속일수는 없다. 점례는 전쟁은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겼으나 유마가 걱정스런 얼굴을 슬쩍 비추면 그가 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유마는 늘 부하의 보고를 받았고 본국으로 보낼 무전 내용을 정리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졌고 그래서 점례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펼쳐 놓은 문구를 스케치용 노트와 여러가지 색깔의 물감과 그리기에 적합한 연필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다니. 이런 솜씨가 내 안에 있었나. 점례는 유마가 틈나는대로 자신을 따라 해 보라며 가르쳐준 대로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칠했다. 작은 나무 책상이 점례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었다. 책상은 유마가 직접 부하를 시켜 만든 것이었다. 진한 나무향이 가시지 않은 생나무였으나 손때가 묻으면서 제법 반질거렸다.

유마는 자수를 뜨는 점례와 눈이 마주치면 수대신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러면 점례는 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하얀 도화지 앞에 마주앉았다. 점례는 뭐든 잘해. 일본어도 잘 하고 자수도 그렇고 이젠 그림도 숙달되고 있어. 유마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점례를 칭찬했다. 하루는 그림을 그릴 때 구도가 왜 중요한지 스토리가 있어야 좋은 그림이라는 둥 실기보다는 이론을 잔뜩 늘어놓았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이날은 유마가 출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낮잠을 자지 않고 늘 일어나는 시각에 일어나서는 점례를 흔들었다. 오늘은 이론을 공부해 보자.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마. 돈 주고도 듣지 못하는 강의라고. 유마가 으스대며 말하면 점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리가 있나요. 너무 좋아요. 어디가서 이런 말을 듣겠어요? 하는 심정이었다. 유마는 점례의 인생 스승이었고 그림의 스승이었다.

유마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지만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생도들의 얼굴을 그렸고 그의 그림을 받지 못한 생도는 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유마는 학교에서 인기 있는 화가였다. 원래 그의 꿈도 화가였다. 평시였다면 그의 꿈대로 도쿄의 한 대학에서 미술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고 오래 가면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정치인 아버지는 미래를 위해 육사를 원했고 유마는 거절하지 못했다. 정치를 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의 직업으로 화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심성이 고왔던 유마는 거절 의사조차 내비치지 못한 채 육사에 들어갔다. 천성이 싸우는 것을 싫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분위기에 끌렸다.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전투 병과를 피하는 대신 작전장교로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계속 승진을 거듭해 장군이 됐고 만주 전선의 최고 대장이 됐다. 아버지의 후광 덕이 컸다. 물론 유마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 여러번 성공했고 그것이 육군성 인사참모의 후한 점수를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다들 유마를 부러워 했으나 유마는 제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동기들은 그가 더 높은 자리로 이동할 거라는 소문을 들었으나 정작 유마는 그런 소문을 반가워 하지 않았다. 그는 무인보다는 문인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연극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최대 관심은 그림이었다. 

그는 생도 시절 틈틈히 화실에 들렀고 거기서 자신만의 화풍을 가다듬었다. 부모님 몰래 배운 솜씨였지만 타고난 것이어서 그곳 화방 주인은 그의 그림을 사정하다 시피해서 서 너 점을 확보할 정오였다. 나중에 큰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이다. 유마는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점례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점례에게 주었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점례를 지도할 때 뿐이었다. 자신의 글림을 완성하는 일은 없었다. 점례는 그 점이 궁금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을 물어 볼 때가 아니라고 여겼고 그래서 궁금증으로 남겨 놓고 있었다. 언젠가는 물어봐야 겠지만 지금은 아냐. 점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마는 선수보다는 코치가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옆에서 그리는 점례의 그림을 코치할 점례는 그의 눈이 매섭다고 느꼈다. 어떤 날은 그게 아니라면서 점례의 연필 잡은 손을 자기 의지대로 움직였으며 점례가 그린 스케치 위에 또다른 선을 연거푸 그려 넣기도 했다.

어때, 이게 좀 낫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점례는 그가 손댄 것이 대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자유스럽고 보기 좋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점례는 자신도 실력에 탄력이 붙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학교 때 학교 미술 선생의 칭찬을 받은 기억이 또렷하다. 넌 솜씨가 있어. 이것은 타고나는 것이지. 누가 알려줘서는 이런 그림이 안 나와. 선생은 그런말을 어린 점례에게 했고 점례는 이제서야 그 말을 기억해 냈다.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구나.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어. 선생님의 그 말을 유마가 따라하고 있다. 어떤 날은 그런 말이 선생님이 하는 말인지 유마가 하는 말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지금 점례의 귓가에 어른거렸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고. 이 말은 유마가 한 것이 틀림없다. 

내일은 쇼와의 날이다. 천황의 생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를 갖추고 나면 잠깐 시간이 있겠다. 아침을 먹고 나서 저기 언덕에 가보자. 양지바른 곳에는 진달래가 지천이야. 거기서 풍경화를 그려 보는 거지. 누가 잘 그렸는지 내기 한 번 해보자. 어때. 내 제의를 받아들이는 거지. 제의라고. 고마울 뿐이다. 그 어떤 것이라도 받겠다. 명령이 아닌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점례가 감격의 눈초리로 그의 제의를 당연히 받아들이자 유마가 웃었다. 그 웃음은 그러나 남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여자의 것에 가까웠다. 손을 입에 대고 살짝 웃었는데 입꼬리는 귀쪽으로 올라가기보다는 거의 입술과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거절하면 일하러 가려고 했었지. 협박하듯이 유마가 말했다. 그러니 잘 생각해봐. 난 이미 허락했어요. 점례는 서둘러서 화구를 챙겼다.

쇼와의 날에 소풍을 가는 거야. 아버지가 존경하고 내가 존경하는 쇼와의 생일을 이렇게 즐길 수 있어 기뻐. 생일날에는 기뻐야햐 하는 거야. 비단 쇼와 뿐만 아니라 내 생일도 점례 생일도. 그러고 보니 점례는 생일이 언제야. 챙겨주겠다는 듯이 유마가 물었고 점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생일이라고, 내 생일 날짜를 물어보는 거야. 그래 생각났어. 정월달이야. 초 사흘. 추운 날에 태어났네. 난 여름이야. 엄마가 고생했지. 8월 13일. 기억하자 서로. 점례 생일은 내년에 축하하고. 내 일은 아직 시간이 남았네. 유마가 기어코 생일 잔치상을 받겠다는 어린아이다운 태도로 말했다. 기억해 둘게요. 선물도 있어요. 기대해도 좋아요. 제때에 적절한 단어로 유마를 감동시키는 힘이 점례에게 있었다. 서둘자. 도시락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요. 지금 하면 되지. 그럴까요. 서두르자. 당신이 도와주면 가능해요. 점례는 주먹밥을 만들었다. 흰 쌀밥에 싱겁지 않게 소금간을 하고 멸치조림을 반찬으로 덮었다. 됐어. 그걸로 충분해. 산속에서 먹는 밥은 맨밥도 최고지. 암, 일본 육군 대장 유마가 입맛을 다셨다. 

삼 십 분후 그들은 연병장이 아스라히 보이는 산의 중턱에 있었다. 숲은 온통 녹색이었고 주변은 온통 분홍 천지였다. 진달래, 오호 진달래. 죽마을 뒷산에서 보던 그 진달래와 아주 똑 닮았다. 하나를 따서 먹었다. 일부러 유마가 볼 때 꽃잎을 입에 넣었다. 점례는 오물 거렸고 유마는 그래도 되느냐고 눈으로 물었다. 대답대신 점례는 하나를 따서 유마에게 건넸고 유마는 점례를 따라 그것을 입에 넣고 똑같이 오물 거렸다. 싱거워. 간이 안됐어. 그래도 유마는 진달래를 입에서 뱉지 않았다. 하늘은 푸르렀고 새들은 날아 올랐다. 그리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점례가 화구를 펼쳤다. 그 순간 점례의머리는  훈련하는 병사와 진달래 꽃이 마구 어우러져 복잡했다. 상상과 실재의 조합. 소재를 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유마는 자유라고 했다. 아무거나 그렬. 아무거나. 그것이 제일 어렵다. 그래도 시합이니 해야 한다. 이겨보자는 심사보다는 조금 허술하게 그려 유마가 끼어드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점례는 그 순간에도 기억해 냈다.

내 그림은 아직은 상대가 안돼. 실재로도 그렇고. 아직은 그의 코치가 필요한 거고 그도 그러기를 바랄거야. 일단은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언젠가 유마는 구도를 말하다가 스토리가 있어야 좋은 그림이고 말했었다. 그게 없으면 오래 못가. 스토리는 역사야. 과거이면 현재고 미래지. 알 것 같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말에 점례는 애써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물과 같은 걸이나 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실체가 있는 명확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전시고 여기는 전쟁터니 군인이 빠지면 재미없을 것이다. 황색의 군복을 입은 황군. 어깨에 별을 단 유마. 오늘의 주인공은 유마다. 그러나 유마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구름 속의 정체 불명의 군인. 그러나 누구나 그가 유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점례는 머리를 짜내면서 그라면 풍경에 어떤 이미지를 입힐지 상상했다.

무서운 건 싫어. 총칼이 너무 빛나면 안돼. 빛나는 건 태양말고 다른 건 없어. 총칼 빼고도 승리를 담을 수 있지. 그래 승리를 기원하는 힘찬 진군. 황군의 늠름한 모습. 적진을 향해 조용히 다가가는 천황의 군대. 싸워서 이겨 환호하는 병사들의 얼굴이 진달래 꽃과 중첩되면 어떨까. 그리고 그 위에 지휘자 유마. 점례는 그림의 주제를 놓고 여러 방면으로 고심했다. 그 때 나비 한 마리가 분홍의 꽃밭을 어른 거렸다. 여기 앉았다가 저기 앉았다가 정신이 나갈 정도로 분주했다. 어떤 때는 점례가 꽃일 줄 알고 곧장 점례쪽으로 날아오기도 했다. 그런 나비는 아니다 싶었는지 그대로 날아갔다. 나비를 넣을까. 진달래와 나비. 점례는 진달래 위에 앉은 나비를 본 적이 없다. 꽃을 따먹기 위해 황도배기를 누볐어도 나비가 진달래꿀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는 있다. 내가 못 본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거야.  진달래와 나비는 사실화가 맞아. 점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일단 스케치 두 점을 그려보기로 했다. 일장기와 욱일기를 들고 승리의 군가를 부르면 귀대하는 황군의 늠름한 모습. 주변은 온통 진달래다. 그러다가 문득 진달래? 에 의문을 품었다. 진달래와 황군이 어울리나. 진달래 대신 사쿠라. 그런데 사쿠라는 벌써 지고 없다. 둘을 섞을까. 일단 꽃의 종류는 뒤로 미루자. 그것은 배경이니 진짜 주인공을 넣은 다음 생각하자. 유마가 대장이다. 그는 앞서야 한다. 그가 끌고 뒤따르는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는 모습. 그러면 총이 있어야 한다. 권총을 오른 손에 들고 돌격 앞으로, 그리고 좌우로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 
절벽 아래 막사는 희미하게 표현하고.

이런 식의 두 어개의 스케치를 내밀자. 그러면 그가 어떤 그림에 더 관심이 있는지 알 것이다. 걱정을 덜었다는 듯이 점례는 화구를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구상이 끝났으니 그리기만 하면 된다. 보지 마세요. 컨닝이 나쁜거 아시죠? 점례사 연필로 선을 그려나가자 곁눈질 하던 유마는 들켰다는 듯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등을 돌릴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볼 것을. 그래도 완성되기 까지는 아닙니다. 좋을 대로. 그런데 당신은 왜 내것을 훔쳐봐. 아니거든요. 그럴 마음이었잖아. 마음도 안 되나요. 물론. 생각이 행동을 만들거든.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 말고 동시에 점례는 유마에게 배운 스케치 기법으로 빈 도화지에 쓱쓱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안에서 밖을 내다 보는 그런 자세로 점례는 도화지에 눈을 고정했다가 고개를 들고 먼 산을 바라 보았다. 같은 동작을 몇 번 되풀이 할 때 마다 선은 많아졌고 형태는 뚜렷해졌다. 

점례의 연필심은 거침이 없었다. 예상대로 잘 되고 있다. 늠름한 황군. 권총을 치켜들과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유마. 분명 앞에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림에는 없지만 적은 쓰러지고 피를 흘린다. 유마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갑자기 그림의 밖에서 끄러진 적이 일어나 달려들고 있다. 적들은 우리쪽을 향해 맞고함을 치면서 마구 총을 발사하고 있다. 점례는 그림을 멈추었다. 달려오는 병사 가운데 휴의의 모습이 언뜻 비쳐 들었다.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점례는 머릿속의어지러운 생각을 떨쳐 내듯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아냐,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냐. 점례가 다시 연필을 잡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쓱쓱 쉽게 채색할 수 없었다. 왜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꾸 나타나서 나의 일에 훼방만 놓고 있나. 점례는 고개를 숙였다. 나쁜 놈. 없어져라.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다시 연필을 잡았고 날카로운 연필심으로 휴의의 두 눈을 내리 찍었다. 사라져. 사라지라고. 피를 흘리면 휴의가 사라졌다. 안 보여. 내 눈이 안 보여. 그런 휴의의 절망적인 소리가 희미하게 점례의 귓가를 맴돌았다. 꺼지라고. 점례는 그렇게 외쳤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점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간에 어떤 걸 채워야 할까, 그게 고민이지 말입니다. 점례가 남자처럼 말했다.

굳이 채울 필요없어. 여백의 미도 있으니까. 그러나, 여긴 채워야 하지 말입니다. 알아서 하시오. 유마가 참견하는 대신 자신의 화폭으로 눈을 돌렸다. 점례는 잠깐 동안 화가 났으나 이내 평점심을 되찾았다. 이제 휴의 오빠, 나에게 더 필요하지 않아요. 그러니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는 것처럼 그렇게 불쑥 나에게 오지 말아요. 내가 줄게 없어요. 설사 줄 것이 있다해도 이젠 다 끝난 일이에요. 점례는 유령에게 하듯이 그렇게 표나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옷에 묻은 얼굴처럼 나의 오점이 되지 말아요. 심지어 점례는 그런 표현까지 찾아내서 휴의를 멀리하려는 마음을 되새겼다. 그리고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고 나머지 부분을 그려 나갔다. 완성해야 한다. 

몇 번을 고치고 몇 장의 종이를 버리고 나서 점례는 겨우 해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전 같았으면 쉽게 해냈을 법도 한데 오늘의 점례는 그렇지 않다. 시작은 쉬웠으나 마지막은 어려웠다. 아마도 휴의의 존재가 그녀의 작업에 방해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 할테면 해. 그럴수록 나는 단단해 질거야. 속은 물론 겉도 그렇게 될 거라고. 점례는 자신이 쉽게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죽마을은 내가 아니란 말이야. 난 나신이 다해. 농부처럼 씨도 뿌리고 가꾸고 수확까지 하지. 그런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데. 내가 그럴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야. 아직 소개는 못했지만 오빠, 미안하지만 오빠는 아냐. 내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은 유마 호사카. 만주군 일본군 사령관 대장이야. 알아. 그러니 날 잊어줘.

다 된 거야. 그런 거야. 유마가 자신의 화폭에 묻은 지우개 흔적을 털어내면서 자신의 그림을 어미가 자식을 보듯이 흐뭇하고 내려다 보고 있는 점례를 향해 물었다. 꼭 자식을 보고 있는 느낌이야. 좋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물감을 칠해서 내 방에 걸어 놓자. 아니 사무실로 가져갈 거야. 난 아직 미완이야. 점례가 네가 나머지를 처리해. 이번 내기는 내가 졌다. 유마가 스스로 패자라고 인정했다. 그림대회에서 승자는 점례야. 그가 주심이라도 되는 양 점례의 손을 들었다. 이건 아닌데. 여보, 이건 아니에요. 그 말을 하고 점례는 놀랐다. 유마가 점례에게 당신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혹간 있었느나 점례가 유마에게 여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다. 점례는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로 막았다.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찮아, 당신. 당신은 나를 그렇게 불러도 좋아. 

그림자는 산 허리를 지나고 곧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에서 내려왔다. 오늘의 소풍은 그런데로 만족이다. 꽃을 봤고 그림을 그렸다. 유마는 오전 내내 전쟁을 잊었다. 숙소에 와서도 전쟁보다는 점례의 스케치를 눈여겨 봤다. 그에게서 전쟁은 머릿속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부관을 불러 전황을 보고 받아야 하는데. 유마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시간을 자꾸 뒤로 미뤘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저녁도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참다 못한 부관이 문을 두드렸다. 짜증이 난 유마는 그러나 복장을 단정히 하고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간단한 보고가 이어졌다. 알았어, 나가봐. 그는 더 말하려는 부관의 입을 막고 귀찮은 듯이 밖으로 내보냈다. 부관이 나가고 나서 유마는 창문을 열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이 막사와 연병장을 푸르스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멋지군. 저 모습도 점례에게 스케치 하도록 해야지.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었다. 달은 구름에 가렸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커다란 달무리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부는 군. 유마는 혼잣말을 하면서 오늘밤에는 비가 오겠다고 생각했다. 이리와봐, 여보. 유마가 점례를 불렀다. 멋지지. 오늘은 멋진 것만 보고 있어. 진달래를 보고 저녁에는 달꽃을 보고 있네. 정말 멋지군요. 저 모습 기억해. 스케치하라고요. 알았어요. 도쿄의 하늘에도 저렇게 달은 빛나고 있겠지요. 이 말을 하고 점례는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그랬구나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미안해요. 괜한 말을 했어요. 그러나 유마는 질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꾸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유마는 고향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말한 적이 없다. 벌써 3년째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점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유마의 말을 점례는 기억하고 있다. 괜히 꺼냈어. 점례는 요즘들어 자신이 말을 많이 한다고 느꼈다. 참아야지. 그가 묻기 전에는 입을 닫자. 점례는 그런 다딤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마가 고향의 엄마는 늘 하늘을 보면서 내일 날씨를 말했어, 라고 점례의 말에 호응했다. 당신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 점례의 뜻밖의 질문에 당황했다. 쓸데 없는 질문을 했군. 세상의 모든 엄마 마음이야 다 같겠지. 우리 부모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당신 부모가 당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클거야. 점례는 살며시 유마의 뒤로 가서 그의 등을 껴안았다. 고마운 사람. 난 당신을 사랑해요. 점례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오후 늦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마가 출근한 후 점례는 다시 언덕을 올랐다. 내려 오면서 꽃꽃이를 해야 겠다고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오후에는 비가 올 지 몰라. 그러기 전에 서두르자. 점례는 유마와 같이 올랐던 언덕에서 어제 보았던 진달래를 두서 없이 꺾었다. 한 아름 꺾고 나서 점례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양손에 꽃이 가득했다. 어제 보지 못한 개나리도 있었다. 꺾을 까 말까 잠시 점례는 망설였다. 개나리를 진달래 처럼 흔하지 않고 어쩌다가 피어났다는 듯히 두 줄기만 길게 위로 뻗어 있었다. 두 개니까 괜찮아. 한 개면 내가 꺽을까봐. 점례는 하나를 꺾으면서 미안한 마음을 이렇게 달랬다. 앞가슴에 개나리, 진달래가 한가득 들어왔다. 그녀는 가슴에 품은 것이 보자기가 아니고 꽃인 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꺾은 꽃을 유리 항아리에 넣고 어디가 좋을지 위치를 잡기 위해 방안을 빙 둘러 보았다. 탁자위, 그래 저기 탁자 위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잘 보이는 곳이다. 여기에 놓자. 그가 좋아할 것이다. 숙소로 온 그가 꽃을 보고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점례 역시 입가에 미소가 절로 어렸다. 저녁 10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연병장의 병사들은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겠어. 지금 이 시간이면 잠을 자야지. 그건 그렇고 당신은. 이렇게 늦은 적이 없다. 늦으면 부하를 통해 먼저 알렸는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다. 무슨 일이지. 잘못을 저지르고 들통날 것을 염려하는 어린애 같은 두려움이 점례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무슨일이 터진 거야. 며칠 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어. 점례는 지레짐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이제 안정된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몰라. 당신은 속 깊은 사람이야. 그래, 그 말을 할 때 유마의 입술이 떨렸지. 그게 무슨 의미지. 속이 깊다는 말이. 나를 신뢰한다는 말일까. 그 말을 듣고 난 위로를 받았고 안심했어. 그런데 속 깊은 나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이 있을까. 그가 시계를 보는 척 하면 눈길을 피했는데 그건 무슨 이유지. 나와 과련된 건 아냐. 이 문제는 그에게 속한 문제야. 뭐겠어. 전쟁, 전쟁말고 뭐가 있겠어. 이긴다고 이기니 금방 끝나는 전쟁이라고 했는데. 아직 멀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점례는 거실 공간으로 쓰는 주변을 어슬렁 거렸다. 진달래는 아직 시들지 않았으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날 안아줘요. 냄새 맡아봐요. 화병 속의 분홍과 노란 꽃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막장의 입구. 유마가 나와 같은 처지에 몰렸을까. 내가 만주로 끌려 왔을 때 처럼 같은 처지에 이를 수도 있을까. 대장이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잘 모르지만 육군 대장이 설마. 하지만 책임은 높은 사람이 지잖아. 유마는 높은 곳에 있으니 져야 할 책임도 그만큼 끌거야. 이를 어째. 그가 잘못되면 내가 잘못되는 거야. 소름이 몸의 이곳저곳에 돋으면서 사색이 된 점례는 화병의 꽃을 외면했다. 화병 속에 꽃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몰린 유마가 떠올랐다. 그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이쪽도 저쪽도 위험부담이 크다. 그러나 내려야 한다. 덜 위험한 곳을. 동전 던지기라도 해서 결정했으면 좋겠다. 유마는 망설였다.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크고 위중한 지 알기 때문이다. 유마에게 힘을 주세요. 점례는 두 손을 모았다. 갇힌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지금은 싱싱하게 웃고 있지만 열 흘도 못돼 시들어 버려질 진달래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당신 힘을 내요. 점례는 울었다. 너무나 큰 걱정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이런 걱정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름 사람을 위한 걱정. 나보다 그가 더 소중했다. 차라리 내가 잘못됐으면 싶다. 다시 구렁텅이에 빠져서 유마를 구해낼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늘을 보니 검은 구름이 대세다. 어둔 밤에도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검다고 다 검은 것이 아니다. 그 중 더 검은 것이 있다. 검고 크고 빠르고 억센 것. 먹장구름이다. 구름은 예상대로 비를 몰고 왔다. 비, 비는 점례에게 추억이었다. 몇 개 안되는 기억하고 싶은 기억. 점례는 교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다시 들어갈까. 아냐. 달리자. 그냥 달리다 보면 그칠 수도 있다. 점례는 책보를 머리에 이고 달렸다. 그러자 망설이던 다른 아이들도 점례를 따라했다. 운동장을 지나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비는 그치지 않고 더 거세졌다. 옷에 달라붙은 비는 달리는데 방해꾼이다. 더 낼 수 있는 속도가 쳐졌다. 그래서 점례는 차라리 걸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빗길에 비를 맞으면 걷는 것은 왠지 아니지 싶었다. 이런 때 우산이라도 있었으면. 나무 우산 말고 쇠우산이었으면. 그래서 바람이 불어도 찢어 지지 않는 쇠우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우산은 얻어질 물건이 아니다. 쇠우산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점례는 다시 달렸다. 책보를 받쳐든 손이 아프다. 팔이 저리다. 그래도 내려 놓지 않고 계속 이고 달렸다. 그마저 없이 머리전체로 비를 맞을 수는 없다. 젖은 몸, 달라 붙는 옷. 처음에는 싫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점차 흠뻑 젖어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옷이 몸에 감기고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를 때리자 점례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미친년 처럼 정말 미친 것처럼 웃고 마구 달려 나간 던 것이다. 그러자 거짓말 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옷은 젖고 축축했지만 기분이 좋으니 빗속의 질주도 나쁘지 않았다. 저기로 달려 나가 뛰어볼까.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렇게 비에 몸을 맡기고 나면 그 때와 같은 좋은 기분이 들까.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분 전환은 될 것이다. 군인만 연병장을 달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법이 있나. 설사 그런 법이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해당 사항이 아니다. 군인이 없는 연병장은 오로지 내 차지다. 아무도 없는 넓은 마당을 나 홀로 비를 맡으며 달린다면 어떤 기분일까. 점례는비 맞는 기분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나가볼까 생각했다. 마중을 핑계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 군홧발 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고 어느 새 유마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몸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의 그는 점례에게 무슨 생각을 했기에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느냐고 물었고 점례는 소학교 시절 비가 오는데 무작정 뛰어서 집에 온 일을 이야기했다. 마중갈까 했어요. 빗속을 달려서요. 당신이 좋아했을까요. 텅 빈 연병장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빈 곳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으니 버려진 느낌이랄까요. 군인들이 뛰는 모습이 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대신 내가 뛰어 볼까 했지요. 그것은 조금 꾸며댄 말이었다. 텅빈 연병장이니 군인들이 뛰는 모습 같은 말은 당장 생각해 낸 말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자신이 꾸며낸 말 때문에 군인들이 상처 입었다 그러려고 불쑥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결과는 그렇게 됐다. 

처음에는 싫지만 나중에는 환호할지 누가 알겠어요? 하고 점례는 말했다. 누가 알겠느냐는 말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유마의 시선이 잠시 꽃병에 머물다가 점례에게로 다가왔다. 그래볼까. 한 번 달리는 모습을 구경해 볼까. 그러다가 마음 내키면 우리도 달려볼까. 그래보자는 제의의 눈빛이 뚜렸했다. 그때 빗속에서 번개가 쳤고 이어서 천둥 소리가 들렸다. 벽시계는 자정이 가까운 지점을 바늘로 가리켰다. 유마는 군화를 벗기 전에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당직사관에게 요즘 우리 군대의 군기가 빠졌다고 냅다 호통을 쳤다. 그리고 병사들을 지금 즉시 집합시켜 운동장을 달리라고 명령했다. 처음에는 각개 훈련 운운하다가 구보로 명령이 바뀌었다. 구보가 났겠어. 이런 날에는 아무 생각없이 뛰는 게 좋아. 

정말요? 수화기 너머에서 이런 말이 들리은 듯 했다. 잠은 언제 자고요. 항의의 목소리가 따라오나.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점례는 군대를 모른다. 명령이라면 죽어도 해야 하는 것을. 유마가 전화기를 놓고 소원대로 됐으니 좋지 하는 표정을 지었고 점례는 자기 책임이라는 듯이 미안한 감정을 담은 목소리로 괜한 소리를 했어요 하고 모기소리로 말했다. 아냐, 한번은 그래야해. 나도 때를 보고 있었거든. 문 열기 전에는 오늘이 그 때인가 하고 생각했고. 마침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고. 그러니 마음 쓸 것 없어. 훈련하고 나면 잠도 잘 올거야. 훈련이 때와 장소를 가릴 형편인가. 유마는 대장 다운 어투로 말했다. 군대는 강하게 키워야지. 실전에 도움이 될 거야. 죽고 사는 문제인데 한 시간 잠 못 잔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어. 

유마는 되레 점례를 안심시켰다. 잠시후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군인들이 완전군장을 한 모습으로 열을 지어 연병장으로 모여들었다. 연병장은 순식간에 가득 차서 언제 텅 비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들은 모여서 군가를 부르고 달리면서 기세를 올렸다. 세운 총은 허공을 찔렀고 기세에 눌렸는지 번개도 천둥도 더는 치지 않고 세찬 비만 계속해서 내렸다. 대장은 창문의 커튼을 열고 점례를 보더니 살짝 웃었다. 이제 됐으니 구경하는 일만 남았다는 투였다. 장교는 점례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빗속을 달리자고. 그리고 연병장이 아닌 늘 가던 뒷산으로 점례를 끌었다. 익숙한 길이었으나 비에 젖어 미끌거렸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점례는 유마의 손을 꼭 잡았다. 비틀거릴 때는 유마를 끌어 안았다. 

둘은 그런자세로 허겁지겁 산을 올랐다. 점례는 약간 무서웠으나 재미 있었다. 무서운 것은 그의 말 한 마디에 수많은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었고 재미 있는 것은 상상했던 빗속의 질주를 하는 것이었다. 익숙한 곳이 었기에 대장은 잡은 점례의 손에 힘을 주면서 거침없이 위로 올라갔고 점례도 이 길은 나도 안다는 듯이 주저 없이 따라 올라갔다. 조금만 더 가면 진달래 꽃을 땄던 곳에 다다르지. 거기가 아마 종착지일 거야. 점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위로 올라 갈수록 군가 소리는 점차 흐미해졌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여기는 까지는 올라와 본 적이 없다. 목적지라고 정했던 지점을 벗어나가 점례는 이제 그만 갔으면 싶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억수로 쏟아지고 있는데 산으로 가는 길이 불길했다. 이제 재미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만 내려 가자고 하려는 참에 유마가 커다란 바위앞에 멈추섰다. 바위에서 뒤를 돌아보자 연병장은 아예 눈에 보이지 않았다. 

구령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을 맞춰 대열을 정비하고 막사로 들어갔나. 현장 지휘관이 알아서 했겠지. 이렇게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데. 바위 틈에는 작은 틈이 있었고 유마는 자신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서 점례를 불렀다. 들어와. 점례는 들어가기 전에 하늘을 보았다. 밝아왔다. 순식간에 비는 그치고 검은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달빛인가. 오늘이 보름인가. 뭘 망설여. 들어와. 여긴 비가 없어. 점례는 유마가 했던 것처럼 몸을 세로로 세운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과 달랐다.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바닥은 말랐고 천장에서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구름이 가렸던 달이 빠른 속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처음이지? 이런 곳을 어찌 알았어요. 가만히 있어봐. 소리 들려. 헤쳐모여라는 소리. 아니요. 전혀. 내 귀에는 들려. 헤쳐 모였으니 해산하겠지. 우리는 조금 있다 해산하자. 안 들린다고. 자 귀에 손을 모아봐. 들리지. 점례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들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해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외치며 환호는 병사들의 구령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병사들은 비를 맞고 마치 큰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고함을 치고 있었다. 듣지마. 저 소리는 살인의 소리야. 안 들리지. 안들려요. 동굴속은 아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밖의 습한 기운과는 달리 보송보송한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점례는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흘러내리믄 물기는 멈췄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옷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안 보이지만 유마도 그럴 것이다. 점례처럼 머리부터 털고 얼굴을 닦고 옷에 묻은 물을 손으로 딱딱치겠지. 정말로 딱딱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요. 나도 알아. 그래서 불을 피우려는 거야. 고마워. 당신이 군인들 사기를 올려줬어. 군인은 내가 아닌 당신이 해야 맞는데. 난 군인체질이 아냐. 그런데 대장까지 달고 있으니. 그러다가 문득 고맙다 점례야 한 마디 했다. 정말로 그는 점례가 고마웠다. 군인들의 기세를 올려준 것은 참모가 아닌 점례였다. 저렇게 한바탕 훈련을 하고 나면 정신이 달라진다. 이 빗속의 훈련을 생각해 낸 점례를 위해 그가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그것은 의무였다. 

그는 이 동굴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 대신 성냥불을 그었다. 이곳을 여러 차례 온 듯이 행동이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순간의 빛에 점례는 많은 것을 보았다. 동굴 안은 군인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타다 남은 장작 더미도 있고 먹다 남은 술병도 있었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따로 나무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불만 그으면 됐다. 그걸 아는 유마가 마른 장작 사이에 있는 덤불에 다시 성냥불을 갖다 됐다. 마른 장작은 작은 불쏘시기에 금방 타올랐다. 굴 밖에서 바람이 오자 불자 불은 더 세게 탔고 대장은 불을 등지고 장작을 불덩이에 더 던져 넣었다. 비에 젖어 추위에 떨던 점례는 불 앞에 앉자 몸 전체로 빠르게 온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군. 그렇지. 따뜻하니 좋아요. 병사들도 지금쯤 따뜻해 지겠지요. 나보다 당신이 부하를 더 사랑하는 군. 당신은 남자로 태어 났어야 해. 나와 바꿀까. 당신이 대장하고 내가 화가하고. 불가능해요. 군대에서 그런 건 없어. 아니, 있어요. 성을 바꾸는 건 그래요. 그런가. 그렇지. 유마가 실없는 대답을 했다. 유마가 나무 의자를 끌어 당겨 점례 옆으로 붙었다. 점례는 더 열이 나는 몸을 느꼈다. 유마는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려고 했고 점례는 멈춰 세울 방법을 알고 있었으나 내버려 두었다. 

삼십 분쯤 후 그들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좋았고 달과 별이 서로 경쟁하듯이 아래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숨쉬는 공기가 산뜻했다. 점례는 심호흡을 했다. 오기를 잘했지. 그래요. 정말요. 이런 냄새를 언제 맡아 보겠어요. 달빛에 비치는 풍경도. 소나기에 먹구름에 달에 별에 그리고 오월의 진달래까지. 점례가 두서 없이 말을 했다. 점례는 볼 수 없었으나 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표시였다. 그는 내려가다 말고 멈춰서서 비에 젖은 꽃잎을 만졌다. 갑작스런 감상이 가던 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점례의 어깨를 잡았다.  점례는 진달래꽃은 따서 먹어도 된다고 했다. 나 어릴때는 많이 먹었어요. 미심쩍어 하는 그를 대신해 점례가 먼저 여러 개를 따서 한 잎에 넣고 씹었다. 그도 따라했다. 대장이 점례를 보고 웃었다. 점례의 입에 붉은 꽃잎이 붙어 있었다.

이것을 말려서는 차로 마시거나 술로 만들어 먹기도 해요. 그러냐고 유마가 관심을 가졌다. 비가 그친 야밤은 그야말로 환상적 풍경을 자아냈다. 온통 붉은 꽃밭이 노랑과 어우러져 눈을 황홀하게 했다. 붉은 것 위에 영롱한 물기가 아롱거렸다. 아름다운 늦봄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런 곳이 전쟁터라니 점례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점례는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오늘따라 포성도 들리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어. 그래요. 전쟁이 끝나야지. 도쿄로 가고 싶어. 아냐, 거기는 전쟁 냄새가 날 거야. 파리로 가야지. 난 파리가 좋아. 가봤어요. 파리. 아니, 전쟁이 끝나면 갈거야. 점례는 유마가 파리로 가고 자신은 떨어져 나간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도 같이 가자. 유마가 점례의 손을 잡았다. 가자고. 같이 가는 거야. 점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장은 하산을 서둘렀다. 점례도 뒤질세라 그 뒤를 따라 달리듯이 내려왔다.

며칠 후 대장은 점례에게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점례는 사령부도 전선을 따라 이동하는 줄로 알았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고 하니 아쉬웠다. 정든 연병장이 무엇보다도 눈에 밟힐 것이다. 먼지 날렸었지. 점례는 벌써 과거형으로 연병장을 그렸다. 유마는 늘 떠나는 준비해 왔기에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점례는 서운함이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라면 알아 먹겠어. 유마가 웃었다. 지도를 가져오면 좌표를 찍어주지. 됐어요. 돼거든요. 점례가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유마의 점례의 그림을 창 쪽으로 향해서 들고 있었다. 마치 위조 지폐를 식별하는 것처럼 그림을 살펴 보았다. 

좋아, 내가 사람 볼 줄을 알아. 대장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모든 그림에는 목적이 있어. 전쟁처럼. 일장기와 욱일기, 그리고 착검한 총을 세우고 양쪽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이 직사각형의 도화지에 알맞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풀지 않고 유마는 다른 그림을 집어 들었다. 막사와 막사 높이보다 위에 핀 진달래와 바닥의 민들레, 노란 꽃 위에 앉은 검고 푸른 커다란 나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두 남녀. 이건 나고 이건 너지. 대장은 손가락질을 하면서 묻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한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점례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군인의 눈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유마는 말했다. 점례는 선생님이 잘못을 지적할 때 느끼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연필 가져와. 그는 점례가 가져온 연필을 대검을 꺼내 조심스럽게 깎아 나갔다. 날이 바짝 선 검은 천천히 움직였다. 이 부분은 세밀화처럼 정밀하게 여러번 칠해야 해. 그가 깎은 연필로 나비의 일부에 자신의 칠을 입히기 시작했다. 좋아요. 좋네요. 점례는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곳은 괜찮은지 물었다. 손 볼 곳이 있다면 고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연필을 놓았다. 색을 칠하면 멋진 작품이 탄생할 거야. 유마는 돌아섰다. 씁씁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코치하고 있지만 점례의 스케치는 벌써 자신을 넘어서고 있다. 하나를 알면 열을 깨치거든. 이건 타고난 거야. 보는 눈이 달라. 그냥 여기서 썩히기는 아까운 인물인데 어쩌지.

유마는 전쟁의 와중에도 점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천재를 알아보는 그의 눈에 점례의 안전은 중요했다. 여기도 위험해 지고 있어. 안전한 곳은 만주 어디에도 없는데. 일단 조선으로 보낼까. 마침 삼촌이 조선 인사동에서 큰 화랑을 열었다는 소식도 있어. 삼촌에게 좀 맡겨 볼까. 점례는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아. 나만 생각하면 점례는 필요해. 하지만. 유마는 결정을 망설였다. 누가 내 곁에 있어줄까. 점례없는 생활이 가능할까. 유마는 그것을 걱정했다. 이제 그의 관심은 태평양 전선보다는 점례의 처리에 더 신경이 갔다. 나약해 지지 말자. 난 대일본 제국의 육군 대장이야. 만주군 최고 사령관이기도 하고. 이런 말을 혼자 생각하고 있을 때도 유마는 군대나 승리모다 점례의 그림에 더 빠져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점차 마음을 굳혀갔다. 포성은 가까이 오고 있다. 늦으면. 더 늦출 수 없다. 유마는 점례의 조선행을 승인했다.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마음이 되레 편해졌다. 삼촌이라면 믿을만 하지. 그림을 보는 안목도 있고. 점례는 한단계 뛰어 오를거야.

어느 날 유마는 찻잔을 마주하고 점례와 마주 앉았다. 한바탕 포성이 지나가고 난 뒤였다. 어, 도판이 다 닳았네. 이 책은 너덜너덜하고. 서양미술사는 나를 가르켜야 할 수준이고. 유마가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점례를 바라봤다. 조선으로 가. 당신은 조선에서 그림을 그려야 해.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못돼. 조선으로. 점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선이라는 말도 그렇고 가라는 말이 생경했다. 이곳에서 조선을 잊은지 오래됐다. 그 이름을 불러 본지도 너무 오래됐다. 조선이라니. 그리고 가라는 말은. 나를 풀어준다는 말일까. 조선은 확실하다고 치자. 가라는 말은 조선은 아닐거야.

뭘 그렇게 놀래. 조선으로 가라니까. 전쟁터와 당신은 어울리지 않아. 위험하기도 하고. 나도 곧 따라 갈게. 유마는 뜻모를 이야기를 했다. 따라가다니. 나를 따라온다고. 내가 따라 가야 하는 것 아냐. 메인 몸은 나인데 유마가 나를 따른다고. 어쩐 일이지. 무슨 변화가 온 건가. 난 당신 곁에 있기로 했잖아요. 언제나. 언제나 그래 언제나. 그 언제나는 죽을 때까지 아닌가. 그런데 살아서 간다고. 편지는 이미 써놨어. 삼촌이 반겨줄 거야. 아버지와 같은 존재야. 삼촌이 결혼 전까지 오랫동안 같이 살았어. 난 삼촌을 알아. 삼촌은 아버지와 달라.예술가의 기질이 있어. 그래서 정치에 빠지지 않고 미술에 몸 담았지. 일찌감치 도쿄 미대를 졸업하고 큰 화랑을 차려 엄청난 돈을 벌었어. 지금 조선에 있는 이유도 아마 그럴거야. 삼촌은 돈 모으는 재주가 있어. 아버지 정치 자금도 거의 다 삼촌이 대. 

점례가 잡은 찻잔이 갑볍게 떨렸다. 이제 모든 게 선명해졌다. 귀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유마는 결정하면 밀어 붙이는 성격이다. 그러기 전에 고심하지만. 점례는 그 정도는 안다. 그래서 이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주소가 있어. 쉽게 찾을 거야. 주소가 없어도 인사동 화랑을 가면 제일 크고 제일 화려하고 제일 가는 화랑이니 어렵지 않게 삼촌을 만날 거야. 혹시 모르지 주소는 외워둬. 그 말을 하고 나서 대장은 등을 의자뒤로 기댔다. 어려운 결정을 하고 난 뒤의 편안함 같은 것이 보였다. 그가 전쟁을 지휘할 때도 저런 모습이었지. 부하들을 세워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는 다 물리친뒤 의자에 등을 기댔어. 그때보다 지금이 더 편안한가.

난 섬으로 이동할 거야. 어느 섬인지는 몰라. 섬에서 큰 전투를 치를거야. 후방은 내 체질이 아냐. 자원했어.아버지 모르게. 그리고 곧 전역 할 거야. 조선에서 만나자. 우리. 그 땐 넌 나보다 위대한 화가가 돼 있어. 틀림없어. 난 천재는 아니지만 천재를 알아보는 재능은 있어. 가기 전에 아버지께 편지는 남길거야. 아들이 어느 전선에 있는지는 아버지도 알아야 할 책임이 있잖아. 유마의 깊은 눈이 더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깊은 눈이 지금 점례를 보고 있다. 부러움과 설렘과 너를 놓아준다는 자만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전쟁의 한 가운데로 나는 가고 점례는 조선으로 가고. 내게 싫증이 난 거죠. 점례는 이렇게 물었다. 이런 질문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점례는 말해버리고 말았다.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다. 그냥 헤어지는 것이 서러워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허허허. 유마가 일부러 그런 웃음을 지었다. 평소 짓지 않던 억지 웃음이었다. 그럴 거라면 왜 조선으로 보내니. 너를 원래. 거기서 유마는 말을 멈췄다. 다음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원래 뒤에 어떤 단어가 따라 올지 점례는 알았다. 점례의 어깨가 약간 올라갔다. 그녀는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아냐, 아냐. 유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당신도 알잖아. 나는 태평양 어느 섬으로 가고 당신은 조선으로 가. 잠시 떨어져 있을 뿐이야. 섬에서 같이 생활할 수는 없어. 부득이 한 조치지. 조치. 그래, 이것은 민간인들이 쓰는 말은 아냐. 조치를 취한 거야. 알아 듣겠어? 유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전쟁은 불리하지 않아. 확실한 승기를 잡아야지. 그래서 내가 가는 거야. 유마는 마치 자신이 가면 전쟁이 이길 것 같이 말했으나 장수다운 기개를 그에게서 찾을 수는 없었다.

점례는 유마의 얼굴에 스치는 아쉬움을 찾았다. 엄마 손을 떠나 학교에 가는 아이의 어린 마음. 그 반대야. 넌 지키고 싶어서 그런 거야. 유마는 그날밤 몇 시간에 걸쳐 자신의 어린시절과 일본 육사시절 그리고 그림 이야기. 정치인 아버지로 많은 말을 했다. 어머니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점례는 일부러 피한다고 생각해 엄마는 어떤 사람이지요? 하고 묻지 않았다. 전쟁에 대한 말도 했다. 이길 수도 있고 질수도 있어.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늘 승리만 이야기 했다. 그런데 질수도 있다고. 점례는 그런가요? 하고 동의하지도 않고 그냥 그의 이야기만 들었다. 당신은 말 안해? 그러지 않아도 나를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당신이잖아요. 내가 어떤 여자라는 걸. 여자. 그래 당신은 남자가 아닌 여자지. 부탁하나 있어. 들어줄 거지. 점례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의 품에 가만히 있었다. 지금도 좋지만 더 당당해져. 당신은 누구한테도 세상 누구한테도 빚진 게 없어. 그러니 부끄러워 하지마. 당신의 과거. 이 말을 하다 유마는 또 말을 멈췄다. 과거가 주는 나쁜 이미지 가 떠올랐던 것이다. 점례도 알고 있다. 당사자가 어찌 그것을 모를까. 당신의 과거는 없어. 없다고. 말해봐. 나의 과거는 없어요. 

당신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조선의 신식 엘리트 여성이야. 미술을 전공했어. 그 재주를 인정받고 싶어 만주에 왔지. 그리고 화실을 연거야. 그 화실에 내가 들락 거리다 당신을 만났고 둘은 사랑에 빠졌어. 그래서 전선에서 같이 생활했어. 그게 다야. 그게 전부라고. 알았어. 내가 삼촌에게 말했지. 편지에 그렇게 썼어. 어느 날 밤에 도쿄의 미술 대학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말한 거 기억하지. 삼촌이 물으면 대답하라고 한 거야. 당신 고향이나 부모는. 그대로야. 있는 그대로. 당신 일본어는 삼촌보아 좋을 거야. 당신은 고급 일본어를 차분하게 써. 조선말을 하지 않고 있지만 모국어를 잊을 수는 없을 거고. 그러니 당신은 조선에서 살아야 해. 일단.

그 다음은. 몰라. 내가 운이 좋아 살아서 당신과 재회하면 파리로 갈거야. 파리. 거기서 당신은 그림을 그려. 난 뭐하냐고. 당신 그림을 팔아 줄거야. 난 당신의 개인 화상이고 싶어. 고희의 동생 테오가 되고 싶은 거지. 다 구상이 있었군요. 맞아. 난 전쟁 보고를 본국에 타전하는 상황에서도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는 당신을 상상해. 섬에서 곧 난 옷을 벗을 거야. 제대한다는 말이야. 전쟁은 군인이 하고 그림은 화가가 그려야지. 난 아버지 핏줄이 아닌 어머니의 핏줄을 온전히 받은 거야. 점례는 그 말에서 어머니도 화가였나. 아니면 다른 쪽의 예술가 였겠지 하고 추측했다. 

측은하구나. 대장을 점례는 걱정했다. 이런 모습을 설마 부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 당연하지. 문을 나서면 부드럽던 눈은 호랑이 눈으로 바뀌겠지. 사뿐히 걷는 걸음걸이는 땅이 파일 정도로 군홧발에 힘이 들어가고. 맞아. 유마는 철저히 이중의 생활을 하는 거야. 힘이 들겠지. 얼마나 어렵겠어. 제대라고. 잘 생각했어. 전쟁이 군인이 해야지. 당신은 군대 체질이 아니에요. 점례는 이말을 하고 싶었으나 육군 대장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만 두었다. 조선행이 결정되고 나서 점례는 들떴으나 이내 차분해졌다. 정신의 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내 이겨냈다. 그리고 삼촌을 만나면 시시콜콜 물어볼 것에 대비해 유마가 틈틈히 말한 내용을 복기했다. 그리고 정말 유학생활을 한 대학생 답게 세련된 표정을 거울 앞에서 연습했다. 그래, 당당하자. 유마가 내게 주문한 것은 이것이다. 꿀릴 게 없이 당당하게. 과연 가능할까. 못할 것도 없지. 책장의 책은 다 읽었어. 서양 문학은 이제 말할 자격이 있어. 누구와도. 일본이나 조선 작품도 꽤고 있고. 미술사라면 교수를 해도 되겠지. 그러니 내가 머뭇 거릴 이유는 없어. 어느 새 내가 이런 사람이 됐지. 유마. 당신은 고마운 사람이오. 평생을 걸쳐 은혜를 갚고도 다 갚을 수 없어.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있다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다니. 점례는 감정이 변하는 자신의 마음이 다시 어떤 식으로 바뀔지 궁금했다. 그러기 전에 일단 감사한 마음은 쌓아두자. 

나는 유마의 일부야. 아냐 전부일거야. 그러자 유마가 측은했다. 군복을 입고 각 세운 그가 허물어진 성곽처럼 처량했다. 이제 내가 그를 구원할 거야. 마음속으로 점례는 그와 영혼의 교류를 갈망했다.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할 존재를 위해 점례는 지금까지 자신이 고향을 떠나 온 후 가졌던 크고 사소한 일에 대한 경멸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가 나를 놓아주려고 한다. 너무나 비현실적 세계에서 살다가 갑자기 풀려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자유가 주어졌지만 주인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머슴의 막막한 심정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러나 그녀는 한때 꿈꿔 왔던 탈출의 순간이 저절로 왔다는 기쁨에 몸이 들떴다. 죽마을에 있던 그 점례가 지금의 점례는 아니었다. 난 달라졌어. 달라도 너무 달라. 아마 엄마도 나를 알아 보지 못할 거야. 나라는 사실을 안다면 깜짝 놀라겠지. 점례야, 네가 정마로 내딸 점례가 맞아. 그렇다니까요. 하지만 그 전의 점례는 잊어 주세요. 난 컸고 더 커졌고 많이 커졌어요. 소녀가 아니고요. 어른이에요. 다 큰 어른. 어른은 스스로도 그랬지만 유마가 잡아 준 손을 맞잡은 결과였다. 그가 없었다면. 점례는 머리를 흔들었다. 절대 배신하지 않을거야. 정마로. 내가 죽더라도 이 마음은 변치 않아. 그런 마음으로 점례는 장교와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안전한 지역까지 일본군의 안내를 받으며 만주 시내로 들어왔다. 점례는 보자기 대신 세련된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다. 옷도 그렇고 머리도 단정하게 뒤로 묶었다. 차림세가 사람을 만든다고 점례는 정말로 모던 걸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찰기 흐르는 볼과 탄력있는 피부는 전쟁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다들 느낄 정도였다. 어느 귀족의 따님 이겠군. 누가 봐도 그랬다. 점례는 걸음걸이에서 당당한 자신을 느꼈다. 그래서 시내를 가면서 그런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새기면서 그러지 않은지 자신을 둘러 보았다. 틀림없었다. 점례는 옷을 한 번 터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유마준 가방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꼭 쥐었다. 

그 가방안에는 고흐가 동생 테오와 지인들에게 쓴 책과 일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서양 미술사에 관한 미학 책이 들어있었다. 심심할 때 읽어봐. 습작에 도움이 될 거야. 점례는 책에서 유마의 손길을 느꼈다. 이론도 실기 만큼 중요해. 고흐의 글이 없었다면 그림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글과 그림이 함께 여서 더 가치가 있는 거지. 작문 연습도 게을리 하면 안돼. 물론 그림이 주가 되지만 글도 된다면 금상첨화지. 그래 내가 할 일이 많아. 유마는 내게 숙제를 주었어. 놀지 못하도록 개구장이 아이에게 안겨주는 그런 숙제가 아니야. 나를 담금질 하는 그런 숙제. 난 갈고 다듬을 거야. 많은 책을 일고 쉬지 않고 그릴거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말도 또 뭐가 있겠어. 점례는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이런 각오를 다졌고 그러자 자신은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잘 보살펴야지. 이제 여기서부터 난 혼자야. 나를 지켜야 해. 유마가 나를 믿었듯이 나도 나를 믿어야 해. 

만주역은 부산했다. 이른 제비 두어 마리가 낮게 날아서 어디론가 급히 날아갔다. 하늘에는 높이 솟아 제자리를 맴돌며 시끄럽게 우는 종달새 무리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금은 새들이 계절이었다. 점례는 죽마을에도 제비가 왔겠지, 종달새는 저렇게 지저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유마는 떠나 올 때 말했어. 거기서는 그림만 그려. 책만 읽고. 모든 건 삼촌이 편의를 봐줄거야. 그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꼭 쥐었지. 손을 들어 점례의 유마의 감촉을 느꼈다. 집을 떠나올 때 막사를 벗어나 장교 숙소로 올 때 그리고 지금 조선으로 떠날 때 점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어쩌면 떠나고 싶지 않다고 느낀 첫 번째 감정이 지금일 것이다. 유마는 그 사이 점례의 가슴을 고통스럽게 할 만큼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부르는 소리가 기차의 경적음에 섞였다. 점례 마사코. 내이름을 이렇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불러준 사람이 유마 말고 또 있을까. 점례는 멀어져 가는 만주 들판을 보면서 유마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말수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오던 사람이 안 오자 여순은 은근히 기다려 지기도 했고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안중에 없고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올 때가 됐는데 오지 않는다면 다쳤거나 죽었거나 둘 중의 하나 일 수 있다. 개처럼 죽었나. 바다에 버려져서 죽은 고기처럼 이리저리 떠다닐까. 아니면 다리가 부러졌거나. 여순은 나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그것을 돌리기 위해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찾아 나설 수 있다면 좋으련만. 여순은 매인 몸이 한스러웠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말수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혼자 탈출하다 말수가 잡혀간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발각돼서 지금쯤 문초를 심하게 받고 있나. 내 이름을 불었을까. 혼자가 아니오. 여순과 같이 하려고 했소. 그녀가 내가 준 권총을 가지고 있소. 여순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주저 앉고 말았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야 하는데 좀처럼 되지 않았다. 여순에게 말수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나. 여순은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말수의 무거움을 새상 느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오늘은 오겠지, 내일은 틀림없이 소식을 가져 올거야. 이렇게 기대했으나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말수의 소식은 들려오기 않았다. 만사가 허사로 돌아갔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순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탈출은 고사하고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허탈감이었다. 탈출하지 않아도 좋아. 그저 간혹 나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으면. 간덩이가 무은 거야. 어쩌자고 무모한 계획에 선뜻 동의했을까. 말렸어야 했다. 애초 되지 않는 것을. 입술을 깨물고 여순은 눈물을 흘렸다. 기다리는 대상이 없어지자 여순의 하루는 길고 길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 여순을 더쳤고 여순은 그 무게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이러다 깔려 죽고 말거야. 아직은 아닌데, 그러기에는 너무 이른데. 그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 수가 있나. 

그에게서 여순은 여기서 살아가는 법, 생활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순전히 말수 덕분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끌려가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에 이제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에 매단 쟁기처럼 자신은 그가 가는데로 가야한다. 그런데 소는 없다. 여순은 자신의 어깨에 걸친 멍에를 끌어 줄 사람이 없자 낙담했다. 여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는 소는 오늘도 음메하고 울지 않았다. 그녀는 멍에를 스스로 끌 힘이 없었다. 소가 있어야 해. 누렁 소가 음메하고 울어야 해. 소의  큰 눈망울이 한 없이 그리웠다. 멍한히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눈은 초점 없이 상대를 바라봤고 문 밖의 풍경도 더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이 빠져 나간 사람이 있다면 여순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말수인가 헛것인가 착각이 들정도로 혼미해지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비벼댔으며 그로 인해 눈이 빨갛게 충혈댔다. 어떤 병사는 그런 여순의 눈을 보고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내 눈은 멀고 있어. 

눈설미 좋은 눈이 멀고 있다고. 스스로 무너져 내리면서 여순은 삶의 의욕을 잃었다.  거칠었지만 솔직한 사람. 그가 나왔어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영과 여순은 맞서야 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건 우래 감출 수 있는 물건이 아냐. 권총을 맡기면서 말수가 말했다. 금방 이게 필요할 거야. 급한 건 나야. 널 위해 내가 서두른다고 생각하지 마. 그 말을 하던 말수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혹 내가 늦더라도 아주 안오지는 않아. 그러니 기다려. 기다리고 있잖아.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믿고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너무 길다. 너무 길다고. 긴 시간이 얼마인지 여순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제 하루 이틀도 기다릴 수 없다. 숨겨둔 권총이 발각 된다. 그러라면 그러라지. 애써 태연해 보지만 그럴 수록 불안에 떠밀려 이리저리 해맸다. 이런 꼴이 여순은 싫었다. 매캐한 냄새가 난다. 나무 타는 냄새다. 그래 이 냄새는 아궁이에서 나더 바로 그 냄새야. 여순은 문을 열었다. 연기의 정체는 산불이었다. 간 밤에 포 소리가 들리더니 파편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마치 누군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 처럼 산불은 화염 대신 연기만 피어 올렸다.  그러나 연기는 곧 꺼질 것이다. 날이 흐려오고 있다. 비가 곧 쏟아진다.

산불 걱정 따위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에는 신경쓸 이유가 없다. 다시 말수에게 집중하자. 여순은 손으로 이마를 집었다. 그는 바쁠 것이다. 나의 남는 시간을 그에게 주고 싶다. 하찮은 내 인생은 이제 그의 것이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 어디든 좋으니 여기서만 빠져 나가게 해달라고. 그런 생각을 벗어날 수 없자 여순은 그가 오지 않는 날은 군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던 시간보다 더 불안하고 초조했다. 성경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도 없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한시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억지로라도 성경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시골 성당에서 보았던 예수를 떠올렸다. 나무에 매달려 못 박혀 죽은 그의 고통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예수 대신 말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하느님보다 더 오랫동안 여순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이어서 다정한 속삭임을 쉬지 않고 내뱉었다. 탈출하자 탈출하자고. 그는 탈출하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광야를 탈출하는 거야. 거칠고 삭막한 이곳을 빠져 나가는 거야. 간절한 기도한 통한 것일까. 문이 벌컷 열리고 말수가 들어왔다. 정말로 말수였다. 환영이 아니다. 여순은 눈을 비비려고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말수인지 확인하려는 시도 였다. 그러나 얼굴에 있는 손이 눈에 가기도 전에 말수가 그 손을 나꿔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냉큼 잡은 손을 끌고 빨리 이곳을 뜨자고 재촉했다. 그리고는 권총 내놔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여기, 여순이 숨겨 놓은 곳을 가리켰다. 말수는 그것을 꺼내 품 속에 넣었다.

어서 가자. 그의 억세고 다급한 소리에 하느님 아버지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렸다. 말수의 억센 손에 끌려 여순은 내달렸다. 뒷문을 통한 다음 숲으로 이어지는 가빠른 언덕을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숨이 턱에 차 올랐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더 가야 한다. 안전한 곳은 여기는 아니다. 언덕을 넘고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렸다. 쇠뭉치 처럼 날카로운 소리는 명령하고 있었다. 서라 움직이면 쏜다.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거총 자세를 하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투박하게 들려왔다. 죽었구나. 그러나 여순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 목소리를 간단히 무시했다. 명령은 군인한테 어울려. 난 민간이야. 그리고 여자라고. 감히 나보고 서라고. 싫어 난 서지 않고 달릴 거야. 애초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여순은 말수의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놓치면 죽어. 죽는 거야. 그러기라도 하는 듯이 말수도 그렇고 여순도 맞잡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달리기라면 자신 있는 여순이었다. 서라는 명령을 가볍게 어긴 것도 이런 자신감 때문이었다. 이런 날을 대비해 내가 방에서 달렸잖아. 팔굽혀 펴기를 하면서 근육을 키웠다. 사내 놈들 너희들보다 내가 더 세, 알아? 더 세다고. 난 연습했어. 곧 지쳐 죽더라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지. 오늘 실력 발휘는 그 덕분이다. 난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났어. 그리고 제자릴 뛰기를 했지. 근육이 제대로 말을 듣고 있어. 더 빨리 달릴 수 있는데 왜이리 늦느냐고 지청구를 하네. 그래 알았어. 알아 들었다고. 여순은 피치를 올렸다. 뒤따르는 말수는 죽을 힘을 다해 여순을 따랐다. 

서라고 명령하던 자들은 이제 등뒤에서 기척을 내지 않는다. 대신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쏘라지. 총알보다 내가 빠른 걸 너희들이 알겠어. 쏘라고, 이 빠진 놈들아. 여순은 고함을 지르며 마치 마라톤 결승전을 향해 막바지 힘을 쓰는 선수처럼 거침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귓전을 때리던 총소리는 사라졌다. 그 이전에 병사들이 멀찍이 떨어졌다. 이윽고 그들은 적의 눈을 피해 구덩이처럼 생긴 참호 속에 몸을 숨기는데 성공했다. 씩씩 거리는 숨소리를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으로 느꼈다. 말수와 여순이 숨어든 참호안은 방금 군인들이 떠났는지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먹을 거리도 있었다. 여순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먹어야 한다는 식욕을 느꼈다. 그들은 깡통을 따서 서로 조금씩 나눠 먹었다. 다시 달려야 한다. 떨어졌던 그들이 다시 추격을 해올지 모른다. 이번에는 여순이 재촉했다. 지체할 시간 없어요. 달려요. 우리 달려 나가자요.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기 위해 입을 벌리고 씩씩거리던 말수는 조금 더 쉬었다 갔으면 하는 간절한 눈빛을 거두고 여순의 말에 순종해 참호 밖으로 승냥이 처럼 뛰어 나갔다. 지금 막 들어왔는데 벌써 나가자고 재촉하는 여순이 야속하다는 생각은 금새 지웠다. 그녀가 옳아. 지체하면 안돼. 다시 밖으로 나온 여순과 말수는 뒤서거니 앞서거니 경주하는 육상선수 처럼 산을 올랐다.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쉭쉭 하면서 두 사람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 빨리, 그래야 살 수 있다. 여순은 그러기 위해 복부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다 잠깐 비틀거리면서 쓰러졌다.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멈췄다. 몸도 정신도 사라졌다. 여순은 이 순간 잠시 죽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순은 그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뒷간에서 부르는 은근한 조선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여순아, 놀자. 여순아 놀자. 여순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습관처럼 고리를 잡고 문을 열고 내다봤다. 비도 없고 연기는 어느 새 사라졌고 눈부신 빛 서너 줄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해질 무렵 잠깐 아주 잠깐 비치는 석양이 여순을 정조준하고 있다. 여순은 그것을 피하는 시늉으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무슨 용무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놀자고. 여순아, 우리 놀자. 바다에 가서 놀자고. 여순처럼 막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햇볕을 피해 반대편에 모여있던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가 말했다. 우리 바다가자 응, 여순아. 여순은 이곳에 온지 지금껏 해변을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와서 여순은 자기 방과 이곳 뒤쪽 말고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작은 방과 그 방안에서 밖을 보는 작은 틀이 그녀가 본 남양군도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막사 밖에 해변이 있을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딴세상이 펼쳐져 있을 거라는 상상은 여순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는 기분전환용이었다. 그녀는 늘 떠올렸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은 천국이라고. 천국으로 달려나가자. 여기가 섬이니 주변은 온통 바다 일 것이다. 그래, 섬을 벗어나면 천국이 펼쳐질 거야. 여순은 천국을 직접 밟아 보고 싶었다. 보지 않아도 좋다. 그냥 발로 밟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고향이 더 그리워져도 할 수 없다. 그리운 것은 그대로 남겨두고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 여순은 일어섰다. 이번에는 동료들의 제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보자. 내가 없는 사이 말수가 오면 어쩌나 생각했으나 몸은 어느 새 신발을 신고 바닥을 다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정해진 시간에 혼자서가 아니라면 철조망을 넘어 잠깐씩 해변에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견디지 못하고 여자 둘이 자진하고 나서였다. 다 죽일수는 없어. 그러면 전투력에 손실이 온다는 이유로 그들은 막사의 여자들에게 외출을 허용하는 아량을 보였다. 

그래서 막사의 여자들은 틈나면 서로 이름을 부르며 해변가로 갔다. 거기 장교는 여자 둘이 죽고 나서야 산 자들을 상대로 죽은 이유를 캐물었다. 자살을 방지 위해서였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데 왜 죽어. 장교는 죽은 여자들을 동정하지 안았다. 대신 그녀들이 왜 그랬는지 몰라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순에게도 장교는 질문을 했다. 너도 죽을 생각이냐. 여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철조망 밖을 가리켰다. 저기 가고 싶다고. 장교는 돌아가서 여자들의 면담 결과를 모아서 해결책을 내놨다. 도망갈데도 없는데 산책은 허용이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겠지. 장교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는 자신의 아량으로 여자들에게 군인들은 꿈도 못꾸는 모래사장을 거닐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희들은 더 잘해. 이런 요구가 얼굴에 가득담겼으나 여순은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막사를 끼고 돌아가니 경사진 비탈길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 한 오분간 내려갔다. 한 명이 앞장을 섰는데 그녀는 이번이 세 번째라고 했다. 가는 길이 익숙한지 발걸음이 가뿐했다. 빨리 바다에 닿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길은 세번의 사람발자국으로 길이라는 것을 충분히 표시했다. 풀들은 쓰러졌고 발자국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길을 안내 했던 앞선 여자가 두 팔을 들고 허리를 약간 돌렸다. 여기 오면 숨통의 띄여. 그녀는 말하면서 허리를 더 빠르게 돌렸다. 여순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온통 파란 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바람은 잔잔해 가볍게 해변을 때리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바다가, 진짜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바다다. 여순은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기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기쁨의 순간도 잠시 여순은 비틀거렸다. 뱃멀미가 올라오는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던 것이다. 

여순은 몸을 바로 세우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순아, 정신차려.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여기에 일본군은 없어. 오로지 자유만이 있어. 나를 지배하는 것은 바다야. 바다라고. 파도소리가 일본군의 거친 숨소리라고. 꿈이야. 넌 꿈과 현실을 구분해야 해. 파도소리. 익숙하지 않아. 늘상 봐왔던 모습이며 소리잖아. 파도가 모래에 부딪쳐 내는 철썩이는 소리.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 뺨을 맞으면서 들었던 그 철썩이는 소리가 아냐. 널 때릴 사람은 여기에 없어. 그러니 여순아, 차분해 지자. 앞으고 가. 가라고. 그녀는 주문대로 앞으로 가 하얀 포말이 이는 파도에 손을 댔다. 온기가 느껴졌다. 따뜻하군. 부드러워. 그래 가만히 있자. 한 참을 그렇게 있자 여순은 마음은 진정됐다. 그래서 여순은 고개를 들었고 물을 데운 강한 태양이 꼬리를 내리를 것을 보았다.

석양이다. 물속으로 빠져들고 있어. 바다가 붉은 색이네. 정말 붉어. 여순은 어느 날 자신의 몸에 묻은 피가 저 붉은 노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씻자. 여순은 조심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눈에 훤히 보이는 물속은 조용했고 아늑했으며 끝을 모른 심연처럼 깊었다. 그녀는 손을 놀려 몸을 씻었다. 어느 정도 씻자 여순은 손가락으로 물장난을 쳤다. 물이 손가락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손가락이 물을 이리저리 갈랐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그녀는 자신이 숨쉬는 인간임을 느꼈다. 여유가 생긴 여순은 기지개를 켜고 물 속에 담근 몸을 일으켰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백사장은 길었다. 죽마을의 백사장보다 넓고 길었다. 모래는 흰색이었고 그것들은 쌓여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여순은 걸어올 때 딛는 발이 빠지지 않고 마른 땅처럼 단단한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러자 그녀는 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달려나갔다. 방안이 아니라 밖에서 달렸다. 질주했다. 빠르게 더 빠르게 달려 나갈 때 그녀는 단발 머리가 귀뒤로 쓸렸다. 바람을 맞은 파도처럼 뒤로 자꾸만 쓸려 나갔다. 아랑곳 없이 그녀는 더 달렸다. 감히 따라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인들이 따라온다고. 그럴 수 없을 걸. 달리기를 내가 얼마나 잘하는데. 나를 보라고. 이렇게 빠른데 나를 따라잡겠다고. 웃기지 마. 날 잡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없어. 여순은 달리다 쓰러지겠다는 심정으로 백사장을 말보다 더 빠르게 질주했다. 그러다 정말 여순은 쓰러졌다. 다리를 삐긋했다. 약간의 통증이 발목쪽에서 왔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이미 해 본 것이다. 좀 붓다가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다. 여순은 쓰러진 그대로 얼굴을 모래에 박고 가만히 손으로 모래를 긁어 모았다. 그리고 모래를 얼굴쪽으로 쌓았다. 눈을 감았다. 코가 모래로 덮였고 귀가 덮였고 머리카락이 덮였다. 여순은 똑바로 누워 눈에 힘을 주었다. 양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제 얼굴은 모래에 완전히 덮여 모래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누가 왔으면 좋겠네. 휴의 오빠. 그래 휴의라면 나를 내 몸을 전부 모래로 덮을 수 있을 거야.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런데 오빠는 없잖아. 어디 간거야.  내가 필요로 할 때 있어야지. 그래, 없는 오빠 기다리지 말자. 내겐 말수 오빠가 있잖아. 말수를 떠올리자 여순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안오는 거야. 온다고 했으면 와야지. 얼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여순은 남아 있는 작은 알갱이를 씻기 위해 바다로 나갔다. 그런에 바다는 아까 본 바다가 아니었다. 

눈 앞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거대한 군함의 무리였다. 책에서 보았던 엄청난 크게의 고래들처럼 검은 색을 한 군함들이 한 척도 아니고 두 척도 아닌 선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 군함들이 여순을 바라봤고 여순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저 것이 군함이구나.말로만 듣던 군함. 크기도 하지. 저걸 타면 세상 어디든 가겠네. 여순은 군함을 타기 위해 급하게 서두르는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육지쪽을 향해 내달렸다. 발목이 아픈 것도 몰랐다. 아까 달려 나갈 때보다 속도가 줄기는 커녕 더 붙은 것 같았다. 그녀는 달리면서 저렇게 큰 배는 처음 본다. 앞으로 뻗은 포신이 이쪽을 향해 사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무장적 뛰고 또 뛰었다.

그때 섬의 저쪽 너머에서 진짜로 포성이 들렸다. 요즘 들어 더 빈번한 함포 사격은 여순의 심기를 건드렸다. 전에는 밤에만 울렸으나 요즘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전쟁이 정말 코 앞까지 왔구나. 여순은 전쟁을 달리는 모래사장에서 실감했다. 같이 온 여자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종아리가 잠길 정도까지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가서 거기서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뒤를 돌아보며 여순에게 너도 들어오라며 깔깔거렸다. 들어와, 들어와 보라고. 보는 것과는 달라. 난 더 깊은 곳까지 갔다왔어. 못 본 거야. 내가 머리를 박고 물 속에 들어간 것은. 그러나 여순은 그녀들의 말에 순응하듯이 다시 바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래가 끝나고 물이 발가락 사이로 흘러들었다. 모래가 발가락 사이에 끼는 기분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이 기분을 안다. 여순은 눈을 감고도 모래에 닿는 발가락의 느낌과 물에 닿는 느낌을 구분할 줄 알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죽마을 밖에서 이런 느낌이 받다니.

그녀는 이곳이 꿈에 본 천국이 아닐까 여겼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성경속의 지상낙원은 바로 이곳이다. 지금 이 순간은 말이다. 막사로 돌아가기 싫다. 이대로 바다로 떠밀려 갔으면. 가다 가다 어느 섬에 그러니까 군인들이 없는 섬에 닿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원숭이들과 물고기를 친구로 삼으면 된다. 간혹 돌고래도 오겠지. 야자수 그늘아래 누워서 떠가는 하얀 구름을 질리도록 봐야지. 그래, 여기가 바로 그곳이야. 그녀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이곳인양 주변에 사과나무가 있는지 두리번 거렸다. 아냐, 이곳은 천국이 아냐. 지옥이야, 지옥이라고. 이 보다 더한 지옥이 어디 있겠어. 여순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하면서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고개를 들면 푸는 바다는 끝이 없이 펼쳐졌고 잔잔한 파도는 끝없이 물결쳤다. 그 물결은 종아리에서 멈춰섰다. 여순은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 멈춰서서 발 아래를 굽어 보았다. 엄지 발가락이 희미하게 어른 거렸다. 발톱을 깎아야 겠어. 깎고 나서 또 와야지. 손톱깎이를 빌려야지. 그래, 옆방 언니에게 살갑게 굴자. 뭐든 아쉬운 소리를 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어. 언니, 여순이 처음으로 언니를 불렀다. 그녀는 여순보다 서너 살 위였다. 막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여자들이 큰 언니라고 부르는 언니였다. 네가 여순이지. 그래, 다음부턴 너도 나와, 오늘처럼. 나오니까 좋잖아. 언니가 손을 뻗어 여순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살아서 나가야 해. 그것만 생각해. 언니가 말했다. 여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될려면 멀었지, 언니. 여순이 살갑게 물었다.  여순은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 가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그런 기쁨이 가득차 올랐다. 저쪽에서 물고기들이 뛰어올랐다. 작은 녀석들이다. 하얀 배를 드러내고 곧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앞선 여자들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저런 웃음소리를 들은 게 얼마 만이냐. 여순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웃자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로 좋아서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웃는 얼굴이 보기에 좋았는지 이번에는 더 큰 물고기들이 첨벙 첨벙하는 큰 소리가 화답했다. 엄청나게 큰 녀석들이 떼를 지어 고개를 내밀고 빠른 속도로 달렸다가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떠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럴 때면 파도가 일어 여순의 몸을 강타했다. 여자들은 물벼락을 피하기 위해 성급히 해변으로 올라갔다. 이런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장관이 따로 없었다. 고래다. 돌고래다. 여순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따라 해변에 당도한 여자들이 고래다, 돌고래다 하고 여순을 따라 더 크게 소리쳤다.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저 쪽 산에 부딛쳤다.

돌고래. 책에서 본 고래. 고래가 나타났다. 여순은 고래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돌고래가 사라진 쪽을 뒷걸음질 하면서 유심히 지켜봤다. 다시 한 번 떠올라라. 크게 숨쉬어라. 여순은 이렇게 응원했다. 그러나 녀석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여순은 한 바탕 회오리가 지나가고 나서 이제 가야 할 시간이 아닌가 걱정됐다. 언니가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누군가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다면 당황할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 여자 넷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을 알면 화를 내고 쫓아 올지 몰랐다. 보고는 했지? 누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 했어. 삼십분 쯤 후에 돌아온다고. 벌써 지났을 거야. 빨리 가자. 여자들은 언니의 말이 떨어지기게 무섭게 막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순은 달리지 않았다. 빨리 도착하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도 곧 여자들과 보조를 맞췄다. 말수가 왔을 거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그런 생각을 하자 여순은 초조해졌다. 왜 예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여순의 예감은 말수가 막 방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에 멈춰섰다. 여순아. 우리 살아서 가자. 그녀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여순이 내민 새끼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살아서 나가자고. 약속한 거다. 어기기 없기. 그리고 또 부르면 나와. 나오니 좋지. 조장 역할을 하는 큰 언니가 부드러운 말씨로 말했다. 조장은 일본군이 조선 여자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 논 직책이었다. 나이도 많고 활발한 여자 가운데 조장을 선정했던 것이다.  여자들은 조장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조장이라고 불렀다. 조장 언니는 일본군이 준 거라며 가슴의 브로치를 들어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자랑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우쭐했다. 웃는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직 10분 남았다. 우리 좀 더 있어도 돼. 언니가 말했다. 그녀는 조장의 권위로 허락했다. 바다에서 10분은 짧았다. 방안의 그 시간은 뱃머리의 멀미처럼 길었지만 발가락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물과 모래가 있는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10 분간의 휴식. 여순은 군인들이 훈련하다 말고 10분간 휴식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한 시간 훈련하고 10분간 휴식을 했다. 휴식은자 신만의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것이 휴식인가. 여순은 파도가 내는 잔잔한 소리와 은빛으로 빛나는 모랫바닥의 감촉을 계속 즐기기 위해 맨발로 모래바닥을 긁었다. 이곳은 단순한 해변이 아니다. 교회이고 성당이었다. 그곳보다 더 평온했다. 성경이었고 예수님 말씀이었고 천사의 보금자리였다. 여순의 영혼은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바다에서 몸을 돌려 막사로 향하기 위해 일어섰다. 가야 할 때를 안 것이다. 여순도 따라 일어섰다.  일어섰을 때 여순은 자신이 낯선 곳에 버려졌다는 느낌에서 조금은 벗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조금 편했다. 군함이 시선에서 흐려졌고 그 자리에 돌고래 떼가 들어 앉았다. 여순은 자신이 걸어왔던 막사 쪽으로 눈을 모았다. 그런데 해변에서 막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많이 걸어온 것 같지 않은데 이쪽에서 저쪽은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감쪽같이 위장한 덕분에 막사는 바다 쪽의 공격을 용케도 피하고 있었다. 언니 달리기 시합하자. 여순이 말했다.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참고 참았던 말을 꺼내니 속이 시원했다. 저기 언덕까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그녀가 응했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보았다. 그들도 동의했다. 다들 해본 솜씨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 둘 셋을 외치면서 여자 넷이 막사 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발에 묻은 모래가 뛰어 올랐다. 그만큼 지지 않으려는 욕심이 앞섰다. 순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차례로 여자들은 언덕에 모였고 숨을 헐떡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잘가요 언니. 너도 잘 들어가고. 다음에 부르면 나와 오늘처럼. 언니는 했던 말을 하고 또했다. 

여순의 자신의 방 앞에 섰다. 숫자가 있었으나 그것을 쳐다보지 않았다. 38. 그녀의 방 번호였다. 번호 앞에서 여순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때 여순은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방안에 들어와서 여순은 그대로 벌렁 누웠다. 자유다. 난 자유인이라고. 여순은 방안에 누워 한동한 바닷속을 헤매고 다녔다. 다 예수님 덕분이다. 여순은 조용히 성경책을 꺼내 들었다. 이제 일본어는 완전히 익었다. 일본어로 쓴 성경 덕분이었다. 조선말보다 일본어가 어떤 때는 더 편했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저도 모르게 조선말보다 일본말이 먼저 나오기도 했다. 점차 안정을 찾자 여순은 닫힌 방안이 답답했다.  말수는 오지 않는가. 죽마을은 어떻게 됐을까. 부모님은 잘 계시고. 휴의와 완용은 또 어떻게 지내는지. 일본으로 잘 갔을까. 점례를 여순은 걱정했다. 마음이 편해지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신대에 들어가 총알을 만들고 비행기를 닦고 있을까. 돈은 제 때 받아 부모님 논은 사들였을까. 

그리고 휴의는 왜? 점례와 완용이 혼삿말이 오가는데도 점례를 잊지 못하고. 여순은 이 대목에서 휴의를 잠깐 떠올렸다. 그 자신도 휴의를 늘 가슴에 품고 있었고 그 마음은 여전히 지금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휴의엿다면. 나 같으면 점례에게 눈길 조차 주지 안았을텐데. 그 순간 이후 아무 것도 모른 척 하고 빠졌을 텐데. 그러면 내가 휴의 오빠와 가까워 졌을 수도 있고. 휴의는 나보다 점례에게 더 끌려나 보다. 여순은 여기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일까. 억하 심정이었을까. 점례가 완용을 멀리하자 완용은 나게게 눈길을 둘렸었다. 그러나 나도 그에;게는 관심없다. 순사 위세를 부리지만 난 그런 거 싫어. 이건 본능이야. 누가 시켜서 그런 건 아니라고. 모르지. 완용이 달라 붙었으면 지금쯤 그의 부인이 돼서 그의 애들을 낳고 살고 있을지도. 그 생각을 하자 여순의 이미는 깊게 패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와 함께 살다니. 차라니 이게. 하다가 여순은 몸서리쳤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순은 완용에게 미안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다. 다가오는 그를 멀리했다는 자책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원했는데 자신이 선뜻 대답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다 지난 일이야. 이랬으면 어땠을까 해봤자 소용 없다니까. 난 지금 여기있고 완용은 어디있을까. 휴의는. 그리고 점례는. 한동안 여순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죽마을을 회상했다. 이렇게 내가 한가한 적이 있었던가. 그래, 한가한 시간이야. 조금 더 생각을 이어가도 되겠지. 만약이지만 말이다. 내가 완용과 결혼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하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완용은 내게 말했었다. 나와 결혼하자. 아직은 안돼. 왜 휴의 때문에. 미쳐어 정말. 그런거 아냐. 아니래도. 내가 잘해 줄게. 순사가 되면 논도 살 수 있어. 난 논 싫어. 그럼 뭐가 좋아. 시골말고 도시에서 살 거야. 그럼 도시로 가자. 순사가 된다며? 순사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하나? 도시에도 순사많아. 그래도 난 싫어.

여순은믿고 끝도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란 유치해. 정말 유치해 눈 뜨고 볼 수 없어. 혼잣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여순은 한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금새 해변의 추억은 사라졌다. 이 방에서 벗어나야 해. 벗어나고야 말거야. 기어이. 그러니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자. 그런척 하자. 그러나 여순은 또 한숨을 쉬었다. 막막함이 가슴이 조여왔다. 최면을 걸며 아무리 위로해 봤자 스스로하는 위로는 위로가 돼 주지 못했다. 누군가 대신 위로해 줘야 한다. 말수. 말수가 와야 한다. 내 앞에는 말수가 필요해. 그만이 내 앞에 올 수 있어. 그런데 왜? 완용이 또 등장하지. 완용이 첨례를 넘본다. 나쁜 놈. 거부하길 잘했어. 원래 완용은 저런 놈이야. 점례가 혼사를 거부했다고 순순히 물러날 놈이 아냐. 그런데도 나에게 결혼하자고? 더러운 놈. 

아, 마음 둘 곳이 없어. 말수. 말수가 필요하다. 쌍욕을 해도 씩씩거리며 거칠게 나와도 이제는 말수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 버티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말수 때문이라고 말해야 옳다. 와야지. 오늘은 올 거야. 사고라도 났나. 죽었는지도 모르지. 아냐, 인상을 보니 그는 길게 갈 상이야. 쉽게 죽지 않아. 죽지 않는다고. 말수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확신하자 다시 휴의가 떠올랐다. 듬직한 등. 말수와는 달라. 거친말을 하지 않아. 눈은 또 얼마나 깊고. 완용의 끈적한 눈과는 질적으로 달라. 그는 부드러워. 난 부드러운 것이 좋아. 말도 행동도 생김새도 쳐다보는 눈도 나에겐 부드러워야 해. 여순은 웃었다. 떠나 올 때 그가 준 부적은 무슨 의미일까. 기다릴 테니 날 잊지 말라는 표식일까. 벌써 찢어서 없앴지만 완용에게도 여순은 일말의 애정을 느꼈다. 여순은 편지를 썼다. 대상은 없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쓴다. 휴의였다가 부모였다가 점례였다가 어떤 날은 완용에게 까지 편지를 썼다. 부칠 수 없는 편지였지만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잠깐 동안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읽고 또 읽고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그래, 너도 용서하고 너도 용서하마. 네 목소리가 들려, 네 얼굴도 보여. 잊지 않을게. 여순은 사랑을 잃은 여인의 심정으로 연필을 꾹꾹 눌러 썼다. 그러자 마른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여기 와서 흘렸던 숱한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여순은 이제 그쳐야 겠다고 다짐하고는 앞치마 끝을 잡아올려 눈물을 닦았다. 자신을 능욕했던 사람들을 저주할 용기도 사라졌다. 함부로 대했던 자들도 미워하는 마음을 거뒀다. 그러자 이 일을 겪고 났는데. 이런 일을 했는데. 휴의는 커녕 완용도 볼 낯이 없다. 난 사랑을 얻기도 전에 잃었어. 내게 사랑 따윈 없어. 

여순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의 진척이 더딘 것을 말수를 탓했다. 탓하기는 했지만 여순은 여전히 그를 믿었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성경을 믿었고 찢어 버린 부적에 의지했다. 완용을 지워졌다고 해도 마음 속의 부적마저 버리고 싶지 않았다. 긴 칼을 휘두르는 무서운 얼굴의 사나이. 사나이인지 괴물인지 거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부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듬직하다. 부적과 완용은 아무 상관없어. 그가 줬다고 해서 그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부적이 다 무어람. 벌써 찢어 발겼는데. 여순의 마음은 또 이렇게 변했다. 성격책도 거칠게 옆으로 밀쳤다. 다 쓸모 없어. 필요없다고. 그래도. 그래도. 여순은 던져버린 성경책을 다시 끌어 들였다. 그리고 읽었다. 어떤 곳은 문장이 좋았다. 그 문장을 써먹고 싶다. 그래 다음 편지에는 써봐야지. 불안감 속에서도 여순은 즐거운 평화를 순간 느꼈다. 쓴 글을 띄엄띄엄 읽다 여순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얼른 편지를 감추었다. 본능이었다. 숨길 이유가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손이 등뒤로 갔다. 말수였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수. 그가 성난 황소의 얼굴로 문을 벌컥 열어 제쳤다. 

말수는 예상의 범주에 들었던 부상을 당했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서 돌맹이가 어깨를 강타 했다고 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세 시간 만에 깨어 났는데 이런 경우는 이곳 남양군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개는 깨어나지 못하면 바로 사망처리해서 치우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말수는 끌려온 자들의 십장이었고 일을 서너 명 몫을 했기에 일본은 관리자는 그의 경과를 지켜봤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인 관리자의 판단이 옳았다. 말수는 깨어나서 자기 손으로 어깨의 상처를 짚었고 별 거 아니니 붕대와 항생제를 달라고 했다. 누구의 손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손으로 붕대를 맸고 상처에 소독약을 뿌렸다. 어제 겨우 어깨에 걸친 붕대를 풀었다. 좀 뻐근하지만 괜찮아. 내 걱정보다도 네 걱정 때문에 잠도 못잤어. 말수가 말했다. 여순은 그의 말하는 표정을보았다.

그 사이 얼굴은 더 검어졌고 눈은 더 깊어져 광대뼈가 드러났다. 그는 여순이 놀란 몸을 뒤로 하고 자세를 가다듬을 동안 그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 여순은 다행이라고 화답했다. 정말이지 죽은 줄 알았어요. 내가 죽는다고. 이 말수가 죽는다고.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여순의 손을 잡았다. 거칠었으나믿음직 스러운 손이었다. 여순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말수를 쳐다봤다. 측은한 감정을 가득 담아서. 말수도 그런 마음을 여순의 눈에서 보았다. 나를 걱정했구나. 고맙다. 여순아. 나도 힘들면 널 생각하면서 버텼어. 너도 그렇게 해. 그러면 이겨낼 수 있어. 둘은 그렇게 손을 잡고 한동안 말이 없고 움직임도 없었다.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찾아왔다.

광산이 무너져 내렸어. 정말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지. 조선인 노무자 8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13명이 부상 당했다. 난 내 위에 깔린 젊은애 때문에 살았어. 내가 숨쉬기 위해 그를 밀쳤을 때 그는 몸뚱이가 따로 떨어졌어. 말수는 말하면서 흐느꼈다. 이 덩치가 흐느끼다니. 난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이 운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죽어서야 끝나겠지. 계속해서 좋은 운 때문에 말수는 살아났다. 앞으로도 그럴까. 그러기 전에. 여순은 도망이나 탈출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며칠 후 사고가 터졌다. 이번에는 일의 진척 사항을 보러 왔던 일본군 장교가다쳤다. 거짓말처럼 말수는 또 살았다. 단순히 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다들 혼비백산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만큼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었고 평소에 가지고 있던 대담함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다쳐 피가 낭자한 일본군 장교를들쳐 업고 무작정 굴 밖으로 나왔다. 일본군 장교는 죽을 것 처럼 비명을 지르면서도 말수의 대담한 용기에 감탄했다. 어깨위에서 말수는 이 자가 대단히 무거운 자라는 것을 알았다. 채 아물지 않은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수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안전지대까지 오고 나서야 말수는 조심스럽게 그자를 땅위에 뉘었다. 너는 안 죽어 임마, 죽을 사람은 그런 힘 없어. 말수는 조선말로 지껄이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맸다. 일본군 장교는 그가 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침착함, 용기, 힘과 대담함. 이런 자가 군인이 됐다면 전선에서 크게 이름을 날리겠어. 상처의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일본군 장교는 말수의 칭찬했다. 

말수는 고통스러워 하는 장교의 팔이 뒤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소리쳤군. 장교 체통도 없이 말이야. 말수는 더 고통을 받으라고 내버려 두려다 그럴 수 없어 뒤로 돌아간 장교의 부러진 팔을 원래 위치로 맞췄다. 딱 소리가 나면서 부러진 팔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비명을 질렀던 장교의 목소리가 수그러 들었다. 말수는 자신의 옷을 찢어 피가 나는 그 자의 팔뚝과 다른 곳을 붕대삼아 감았다. 개새끼야. 가만히 있어. 너보다 내가 더 힘들어. 말수는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일본군 장교는 그가 지껄이는 조선말이 욕설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의사였고 환자는 의사의 말을 따라야 했다. 난 죽을거야. 난 죽을 거라고. 고함을 지르던 일본군 장교는 이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살았다는 안도감을 그는 느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다.

너 조선에서 의사였니? 죽었다 살아난 자의 첫 질문치고는 그런대로 들어줄만 했다. 의사였구나. 의사가 어쩌다 이곳까지 왔어. 그가 말수를 동정했다. 너나 걱정해. 지금은 나보다 네가 중요하거든. 이 왜놈의 장교 새끼야. 말은 부드러웠으나 말수의 욕설은 거침없었다. 그러나 환자를 치료하는 손길은 어머니 손길처럼 따뜻했다. 이 놈은 그래도 예절이라는 게 있네. 고맙다고 인사를 하네.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뭐라도 줄 듯이 행동하네. 지금은 그럴거야. 치료되고 나서도 그럴지 두고보자, 이 왜놈 자식아. 말수는 또 그렇게 욕을 해댔다.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었다. 내가 의사라고. 조선에서 의사질을 했느냐고. 그래 했지. 내가 의사가 아니면 어떻게 너를 이렇게 능숙하게 다룰수 있겠니. 

말수는 여러 번 조선인을 치료한 적은 있었지만 치료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들었어도 의사냐는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말수는 못 들은 척하면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궁리했다. 기회가 자신에게 올 지 모른다는 어떤 예감이 순간 작용했던 것이다. 장교가 대답이 없자 일에 열중해 자신의 질문을 잊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찡그리고 상처를 내려 보는 말수에게 재차 물었다. 의사였나고? 조선에서 너 의사질 했지? 이번에는 조금 짜증 섞인 질문이었다.정작 짜증을 낼 당사자는 자신인데 말수는 이놈의 자식 하면서 또 한 번 혀를 찼다. 그러면서 말수는 준비한 답을 내놨다. 아버지가 한의사였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도 의사가 됐지요. 

그는 아버지 심부름을 하면서 침도 놓고 다친 환자들을 꿰매는 일을 도왔다고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면허증이 있어야 의산가. 치료하면 의사지. 말수의 생각은 이랬다. 의사라고 하는 자들보다 자신이 훨씬 더 환자를 잘 다룬다고 실력을 뽐내고 나자 말수는 이런 자신감이 들었다. 다음날 말수는 섬에 하나 밖에 없는 진짜 일본인 의사에게 불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의사가 부족한데 네가 대신 도와달라고 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네 솜씨를 봤다. 응급 처치를 잘했더구나. 그는 말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항생제 진통제 주사제 등의 목록과 사용량 등이 적힌 쪽지를 건넸다. 내가 시간이 없어 자세한 설명은 못한다. 궁금하면 물어봐라. 한의사였다고. 의사는 다 같은 의사지. 곧 양방에 익숙해 질거야. 그날로 말수는 광산에서 나와 의사의 조수가 됐다. 의사는 장교가 조선 의사가 실력이 좋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곡괭이 대신 수술칼을 들어야 해요. 의사는 당장 그렇게 했다. 자신의 일손도 덜겸 어려운 것은 그에게 떠넘길 요량으로 덥석 말수의 손을 잡았다. 넌 이제부터 내 조수다. 어때 괜찮은 제의지. 의사가 말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노가다 십장에서 졸지에 의사가 된 말수는 막사 옆 간이 병원에서 다음날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작업복 대신 하얀 가운을 입고 말수는 거울을 보았다. 그래 천하의 말수가 노가다가 왠말이냐. 그러나 말수는 흰옷을 입었다고 자신이 진짜 의사인 것이나 된 것처럼 뻐기지 않았다. 일부러 자신을 낮추면서 말도 고급스럽게 사용하려고 애썼다. 위치가 사람을 만들지 않는가. 십장에게는 십장의 언어가 있고 의사에게는 의사의 언어가 았다. 그에게는 가운외에도 군인들이 입는 전투복이 지급됐다. 내가 이제는 일본군이 됐군. 군의관 복장이야. 왼쪽 팔뚝에 병원을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 천을 걸었을 때 말수는 정말로 의사가 된 자신을 실감했다. 눈치가 빠른 말수는 의사 행세를 제대로 해냈다. 

그는 첫날부터 실력을 발휘했다. 일본 의사는 말했다. 척 보면 알지. 죽을지 살지. 죽을 것은 내버려 두고 살 것을 먼져 치료해. 간이 병실에는 노가다는 거의 없었다. 군인들이 차지고 있었는데 죽어도 좋을 환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생생했고 곧 전투에 나설 정도로 씩씩했다. 쓸모없는 환자는 전투력의 손실만 가져와. 상처가 곪은 자들은 빼. 전염병을 옮기거든. 의사니까 말안해도 잘 알지. 다리나 팔뚝을 자른 자는 뒷전으로 밀어놔. 살아도 전투를 할 수 없는 자들이야. 잔인하군. 의사는 사람 살리는 직업인데 이거는 순 살인자나 다름없군. 여기서 제켜 놓으면 죽는건데. 말수는 입맛을 다셨으나 일단 지시를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전시상황아닌가. 전시에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운명에 달린거야. 

환자는 광산 사고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총상이나 폭판 파편으로 일그러진 일본군 들이 들이닥칠 때도 있었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마치 성난 파도처럼 간이 병실이 들썩였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병실을 내주어야 했다. 군인이 우선이었다. 어떤 날은 한가했으나 어떤 날은 잠 한숨 자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요즘들어 환자는 부쩍 늘었다. 쉬지 않고 밀려든다는 말이 맞을 듯 싶었다. 그만큼 전투가 격렬한 모양이다. 양놈들을 물리쳤다고 하더니 아닌가. 말수는 군인들을 치료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거 의사라고 나을 게 하나도 없네. 고되기는 광산일 보다 더하면 더했지. 저녁에도 불려 나가기 일쑤였다. 어라, 이러다 과로로 죽겠어. 부상이 아니라 잠 못자서 죽을 판이야. 그래도 이게 어디야. 간혹 시간이 나면 말수는 여순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여순에게 가지 못하는 심정에 애를 태웠다.

한 시간도 짬을 낼 수 없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러다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수는 무릎을 쳤다. 그래. 종일 같이 있을 방도가 있어. 간호사로 쓰는 거지. 말수는 의사에게 조선 여자 하나가 막사에 있는데 인천에서 간호사 일을 했다. 손이 야무져 누구보다도 간호에 열성일 것이니 여기 데려와서 써먹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마침 결핵으로 괴로워하던 고급 장교 하나가 여자라는 말에 눈을 번뜩이더니 당장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그래. 경력은. 오래되지 않았어요. 한 일년 정도. 그것도 보조 역이었어요. 그런 건 상관 없다. 말수는 달렸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는 도착하자 마자 임시방편으로 가져온 붕대를 시험 삼아 여순에게 간호사 수업을 시켰다. 묶고 풀기를 반복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주사기를 꺼내 자신의 팔에 찌르는 연습을 시켰다. 여순은 어안이 벙벙했다. 탈출 모의가 이것인가. 말수는 말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허겁지겁 연습을 마치고는 당장 여기를 떠나 병원 막사로 가자고 했다. 여순아, 하는 일이 바뀌었어. 너는 이제 부터 간호사다. 인천에서 수련을 받았다. 한 일년 정도 됐으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이렇게 말수는 여순에게 이것저것 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알렸다. 여순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으나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인지했다.

여순은 그가 하자는 데로 따라했다. 묶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됐다. 문제는 주사였다. 좀처럼 핏줄을 찾아 정확히 찌르기 어려웠다. 말수가 말했다. 넌 할 수 있어. 손재주가 있잖아. 별 거 아냐. 처음이 어렵지 한 두 번 하면 익숙해져. 겁낼 것 없어. 찔러. 말수가 연습용으로 내민 자신의 팔뚝에 주사기를 갖대댔다. 찔러. 과감하게 찌르라고. 피가 흘렀다. 여순이 주가기를 뺐다. 말수는 흐르는 피를 문지르면서 안타까운 눈초리를 보냈다. 간호사가 주사도 찌르지 못하면 간호사가 아니지. 다시해봐. 떨지말고. 그러면 여기서 못나가.

그러면서 말수는 평생 이곳에서 갇혀 살고 싶으면 그렇게 계속 떨라고 협박했다. 권총을 받아 들었을 때보다도 여순은 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래 떨지말자. 이까짓것 찌르지 못할 이유없다. 말수가 다시 손을 내밀고 주먹을 쥐었다. 여기 보이지. 불끈 솟은 힘줄. 거기에 찔러. 픅찔러. 그렇지. 피가 고이면 된 거야. 그럴 줄 알았어. 성공이다. 성공. 

그래 해보자는 심정으로 퍼렇게 솟은 말수의 힘줄을 찾아 찔러넣고 포를 뜨듯이 그것을 위로 가볍게 들어 올린 것이 주요했다. 주사기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됐다. 이렇게 하는 거다. 가자. 어서 가자. 짧은 말수의 말에 여순은 해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문을 열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탈출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도망자를 쫓아오는 적을 해칠 권총은 필요없다.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군함을 타고 이 섬을 빠져나가리라. 이동하면서 여순은 이 말을 곱씹었다.

말수가 그랬던 것처럼 간호복을 입은 여순도 자신의 일을 척척해냈다. 많은 수련을 쌓은 사람처럼 자신감이 넘쳐났다. 찢어진 상처, 부러진 팔다리를 보고도 여순은 놀라지 않았다. 이런 상처 정도는 인천에서 숱하게 봐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피흘리며 고함치는 환자들을 대했다. 자신에게 이런 잔인함이 있고 침착함이 있고 칼로 살을 찢고 바늘로 꿰매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여순은 반갑게 받아들였다. 이제 여순은 숙련된 간호사였다.

일본군은 한의사 아버지에게 의학 상식을 배우고 경성제대서 서양의술을 익힌 조선 의사 말수와 인천에서 간호사 일을 한 경험이 있는 노련한 간호사 여순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일본군을 세심하게 치료했고 그들의 행동을 소상하게 관찰했다. 그 즈음 여순은 식욕이 왕성해졌다. 그러나 밥걱정은 없었다. 임시 병원에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다. 고기도 있고 간혹 열대 과일 같은 것이 남양척식주식회사 이름을 달고 상자째 들어오기도 했다.

밥보다 과일이 더 맛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은 여순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여순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배가 불러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달마다 있던 것이 두 달째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재앙이다. 그녀는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상의할 대상은 말수밖에 없었다.누구의 애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말수는 어떻게 그것을 지우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더 크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터지고 갈라지고 뭉개진 외상은 어느 정도 해볼 만했으나 속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일본 의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막사에 있던 여자가 임신한 것은 흔한 일이었다. 장교는 여순이 그곳 출신이라는 것을 깜박 잊었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자신도 해 본 적은 없지만 해보자고 했다.

전투력의 상실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임신 사실을 알리기 전에 먼저 꺼낸  것은 말수의 치밀한 계획의 결과였다. 여순 없는 병실은 이제 생각 할 수 조차 없었다. 그 간호사란 말이지. 그래요.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낌새가 느껴졌어요. 의사가 말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네 놈이 범인이구나 하는 눈이었다. 말수는 눈길을 피했다. 자신이 범인이면 어떤가. 그보다는 여순에게 무슨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앞섰다. 간호사 자리를 놓칠 수도 있다. 지우면 일주일 후면 다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수는 아첨하는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 해보자고. 죽기밖에 더하겠니. 일본인 의사는 말수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죽기밖에 더하겠어. 말수는 그 말을 속으로 따라 했다. 잘 하면 이곳을 떠날 수 있어. 이제 곧 이 지긋지긋한 곳과 이별이라고.  떠날 수 있다는 됐다는 생각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말수는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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