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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눈 빛은 아득하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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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눈 빛은 아득하고 평화로웠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2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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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하고 싶다. 차라리 그것이 낫다. 아니면 적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방어하고 역공하고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떠났던 죽음이 그림자처럼 슬금슬금 다가온다. 정말로 그렇다. 정오를 향해 가는 해가 쓰러진 병사들과 엉거주춤 기대선 병사들에게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죽음의 그림자.

그림자에 병사들은 생명을 의지했다. 자신을 지켜 줄 것은 오로지 그림자 뿐이라는 듯이 그들은 자신의 그림자보다 더 큰 그림자 아래에 모여 있었다. 펄럭이는 일장기와 욱일기를 중심으로 그들은 뭉쳐 있었다. 산자도 죽은자도 부상병도 다 한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조금 전에는 싸우자는 의지도 있었으나 쉬고 있으니 그런 마음은 사라졌고 몸은 스스로 가라 앉았다. 적들은 샜다. 자신들이 쏜 포의 위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적들의 모 역시 우리들의 모 만큼 강했다. 그래서 그들은 떨었다. 뜨거운 갑판 위에서 그들은 한 겨울 옷차림으로 덜떨 떨었다. 

병사들은 억지로 괜찮다는 표정을 짓거나 죄지은 자의 어색한 웃음을 보이것이 한계에 다다른 듯 보였다. 그러기에는 힘이 부족했고 의지도 떨어져 나갔다. 담배를 피면서 긴장을 누그러뜨려 봤으나 그것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별 것 아니라는 시늉을 내기에도 벅찼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인생이 심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린 병사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엄두를 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알고는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 들었다. 그것이 무서운 것은 이런 분위기는 쉽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정의감이나 조국이나 하는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앞에 끝나가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가벼웠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다. 소중한 것은 딱하나 조국이었다. 그래, 조국 말고 생각할 것이 있나. 내 목숨은 그저 조국을 위해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는 정의와 시간과 정막이 거대한 군함의 갑판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처음 와보는 낯선 곳에서 병사들은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말수는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낯선 곳 사이에 끼어서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이곳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그는 싸우는 병사가 아니라 싸우다 다친 병사들을 치료하는 의사였던 것이다. 

저들이 곧 내 환자가 된다. 움직이는 자들을 보고 말수는 생각했다. 저들은 이미 내환자고. 고통을 참던 자가 그러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면 말수는 이렇게 단정했다. 그러니 여기있는 모든 병사가 내 환자다. 말수는 내 환자라는 말을 되내면서 나와 환자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고 가깝다는 것을 인식했다.

달궈진 쇠붙이에서 연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장교가 옷을 털면서 먼저 일어섰다. 명령하지 않아도 병사들은 장교를 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갑판에 널려 있는 어지러운 탄피를 줍기 위해 장교처럼 옷을 손으로 터는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대열을 정리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었던 병사는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상이 어느 정도 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장교는 고함을 치면서 한 발 앞으로 다가가 그 발로 웅크린 녀석의 옆구리를 냅다 걷어찼다. 그가 힘없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빠가야로. 일어나라. 싸워야지. 대일본 제국의 병사가 그게 무어냐. 고함 소리는 쓰러진 병사의 귀에는 들어가기 않았다. 그는 들은 귀가 먹었던 것이다. 귀를 열었던 생명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너무 하는군. 시체를 발로 차다니. 장교도 부상을 당하겠지. 저런자도 내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까. 죽어 무릎을 꿇고 있으면 그의 부하였던 자가 자신의 임무를 대신해 발로 차줄까. 말수는 장교의 발길질에 쓰러진 채 꼼짝 않고 있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스스로 일어서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일부러 몸을 갑판에 내맡긴 것처럼 보였다. 병사와 갑판이 자석처럼 붙어 있었다.

장교는 넘어진 그를 놔두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말수가 병사에게 다가갔다. 손을 목에 댔다. 느리지만 호흡이 느껴졌다. 그는 죽지 않았고 다만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어깨가 들썩이고 작은 흐느낌 같은 소리가 피와 함께 입에서 비어져 나왔다. 

그렇게 울지 마. 넌 살 수 있어. 넌 용감한 군인었어. 발로 찬 것은 그것에 대한 증거야. 말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다. 다독이는 것인지 그도 알지 못했으나 눈 빛 만큼은 애처로움이 가득했다. 쓰러진 병사는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다. 말수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가볍게 껴안았다. 살아 있는 인간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가 눈을 떠서 말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갑자기 냉동에서 해동된 듯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말수도 그러는 그를 도와 상처난 곳이 어디인지 앞뒤로 손을 댔다. 총알이 뚫고 지나가거나 파편이 박혀 있지 않았다. 잠시 기절한 것일까. 그런 경우가 종종있다. 다행이다. 그는 사망자도 중상자도 아니다. 다만 놀라 자빠져서 가볍게 입은 경상장 일 뿐이다.

이런 사실을 그도 알아챘다. 그는 귀신처럼 벌떡 일어서더니 대열 쪽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보니 달릴수도 있었는지 마지막에는 달리듯이 빠르게 다가갔다. 사태파악을 한 그는 부끄러웠던지 장교에게 힘찬 경례를 올려 붙였다. 이제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남보다 더 열심히 움직여 잃었던 자존심을 만회하려고 앞장설 것이고 이는 자신을 발로 차서 고름을 빼내준 장교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아직 일본군의 군기는 죽지 않았다. 다시 포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포탄이 군함 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넘어가는 포탄이 순간적으로 보였다. 눈으로 보니 별 것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떨어지면 문제가 심각하다. 적들은 포탄 지점을 확인하고 사거리를 조정한다음 다시 공격해 온다. 이때는 넘어가지 않고 탄착지점이 갑판위가 된다. 지금 포는 그냥 공갈포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이렌 소리가 다시 갑판을 흔들었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반격하기 위해서는 공격지점을 확인해야 한다. 장교가 분주히 움직였다. 사수들은 표적을 재고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갑판 위는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처럼 끓어 올랐다. 포신을 빠져나온 탄피가 공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적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었다.

포사격이 빗나가자 군함의 적들은 다시 포를 장전했고 그러기 전에 뱃머리에 달린 기관총을 난사했다. 아직 비명은 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 총을 잡고 있던 병사와 그 옆에서 보조하던 부사수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맞았다. 기관총 사수가 맞았다. 너, 나가서 기관총 잡아. 부사수는 너야. 장교가 엎드려서 비슷한 자세에 있는 병사의 옆구리를 권총의 총구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말수는 직감적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그들이 곧 죽을 것을 알았다. 아까와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쓰러지 자들 가운데 한 명이 뭍에 올라온 고기처럼 배를 펄떡였다. 말수는 가방을 챙겨 급히 그들 쪽으로 달려갔다. 여순도 고개를 숙이고 그 뒤를 따랐다.

적의 공세는 계속됐다. 첫 번의 공격에서 탄착점을 확인한 적은 그곳에 무차별 포화를 집중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통나무처럼 무겁거나 가볍게 자빠졌다. 장교의 고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도 쓰러진 것일까. 말수는 다가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사수와 부사수는 예상대로 즉사했다.

나머지는 아직 죽지 않고 그 옆에서 살아서 꿈틀거렸다. 그들은 꺼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려고 발버둥 쳤다. 말수는 쏟아지는 피를 막을 수 있는 붕대를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그럴 것 없소.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장교였다. 어깨의 견장이 그가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갑판 위의 장교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부상병을 돌보시오. 그것은 지시였고 명령이었다. 죽지 않은 그는 죽을때 까지 명령을 내렸다. 장교의 위신을 세워 죽어서도 멋있는 장교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말수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허벅지를 관통당했는지 피가 꾸역꾸역 뿜어져 나왔다. 말수는 급하게 지혈하기 위해 손바닥을 펴서 눌렀다. 여순이 다리 아래로 붕대를 넣고 감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더 싸울 수 없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던 장교는 이러는 의사에게 화를 참아서는 안 되지만 그에게는 소리치거나 흥분할 힘이 없었다.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 제압당한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 상처의 고통보다 더 심하고 아팠다.

장교는 함장을 만나고 싶어했다. 마지막 순간을 의사의 손에서 죽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존경하는 함장에게 자신의 최후를 보고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끊어져 가는 생명줄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사무라이 전사로 깨끗하게 살아 명예롭게 죽는다고 최종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실천되지 않았다.

그는 곧 의식을 잃었다. 말을 하려고 이밖으로 비어져 나온 혀는 들어가지 않았다. 말수는 입을 벌려 혀를 제자리에 집어 넣었고 적에게 증오심을 보이던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뒤집어진 눈꺼풀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잘 감기지 않았으나 두 세번 하자 눈꺼풀은 눈동자를 가렸다. 

말수는 장교의 품위를 지켜줬다. 지위에 맞는 행동을 했으므로 그것은 당연했다. 말수는 자신도 죽게 된다면 장교처럼 멋지게 가고 싶었다. 그러면서 죽을 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내 이름은 후쿠다 요시오가 아닌 마말수다. 이렇게 말하면 괜찮을 것이다.

함장님이 곧 와요. 여순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장교의 귀 가까이 입을 대고 말했다. 그런 거짓 동정을 바라지 않았던 장교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떨궜다. 그것은 평소 그가 수없이 다짐한 결과였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비참하게 가는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마음먹은 대로 실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달랐다. 특히 무릎을 꿇고 앉았던 병사는 하필 그 무릎에 총을 맞고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어디서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지 옆에 있던 동료가 놀랄 자빠질 지경이었다. 살아서 그렇게 큰 소리를 쳤다면 총알도 피해갔을까. 그는 말수가 다가가자 옆에 있던 여순에게 총을 맞지 않아 자유로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여순은 간호와 의사의 직업정신으로 내민 손을 잡았다. 무릎을 관통한 총알의 위력은 강했다. 다리에서 무릎은 사라졌다. 전투복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홍수처럼 작은 내를 이루다 넘쳐 흐를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왔다. 상체에서도 피가 나왔다. 부상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옷을 벗길 필요도 없었다. 옷 틈으로 장기의 일부가 드러났던 것이다. 여순은 얼른 것을 가리기 위해 손으로 덮었다. 

조금만 참아요. 살 수 있어요. 여순은 조금전에 했던 그 말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여순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수가 피 묻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여순을 힐끗 보았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인지 입에 발린 소리는 이제 그만하라는 것인지 여순은 그 역시 알지 못했지만 게의치 않았다. 지금이 중요하다. 부상한 병사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순은 여자의 본능으로 알아챘다. 살 수 있어요, 조금만 힘내요. 그녀는 힘내라는 말이 병사는 물론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듯이 팔에 힘을 주면서 병사의 몸을 압박했다. 피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주사기를 꺼낸 그녀는 아직 의식이 있는 그의 허벅지에 강하게 찔러 넣었다. 들어갈 때 근육이 저항하는 느낌을 잠시 받았으나 여순은 무시하고 약물이 다 들어갈 때까지 잡은 주사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시나마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그녀가 할 일었다. 진통의 효과가 몸에 퍼지자 그는 잠시 억지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난 알아요. 내 고향은 가고시마예요.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인지 용희가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병사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아니 지금까지 드러낸 적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눈빛은 심지어 가장 존경하는 대상에게 바치듯이 아득하고 멀었다.
 

고마워요. 이 말을 남기고 무릎과 복부에 파편을 맞은 병사가 죽었다. 그는 여순에게 고맙다고 했다. 무엇이 고마운가. 자신의 최후를 지켜준 것은 고향도 따뜻한 엄마 품도 아니었다. 그것이 고마운가. 그래, 고마울 것이다.누구나 죽을 때 옆에 있어 준 사람은 설사 그가 자신을 죽인자라고 해도 고마울 것이다. 

여순의 고마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죽음을 보내고 나자 연달아 또 다른 죽음과 마주했다. 그들은 죽으면서 연순에게 고마워 했으나 전쟁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결같았다. 죽음을 가져온 것에 대해서는 증오하지 않았고 죽음을 지켜보는 자에게는 감사함을 느끼다니. 이것은 형용모순인가. 

여순과 병사는 이 순간 형제나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죽은 병사는 고향의 부모 형제 였으며 휴의이며 완용이었다. 어쩌면 점례였는지도 모른다. 여순은 그런 마음으로 죽은 자들과 이별했다. 한바탕 회오리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낮의 태양이 이글거렸다. 태양은 다 지켜보았으면서도 모른 척 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할 일만 했다. 야속했다. 타는 태양은 지독한 냄새까지 불러 모았다. 

갑판 위의 병사들은 피할 그늘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산자들은 살아야 한다. 일부는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자기 발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부상병과 그렇지 못한 자들은 쏟아지는 태양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받았다. 죽은 자들은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수장됐다. 바다로 던져지기 전에 그들의 목에 걸린 인식줄이 수거됐다. 인식줄은 그들이 살지 않고 죽었다는 증표였다. 

말수와 여순은 지칠대로 지쳤다. 그들의 어깨로 쏟아지는 열기는 발다닥까지 뜨겁게 달궈 놓았다. 간혹 서풍이 불면 땀이 식는 듯 했으나 멈추면 이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였다. 우리도 좀쉬자. 쉬지 않으면 생으로 타 죽을 것이다. 피비린내는 피할 수 없어도 태양을 피할 곳을 찾자. 메스꺼움이 여순의 목근처까지 와서 간질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용케도 참아냈다. 이력이 붙은 것이다. 멀미는 조금 했으나 구토까지는 아니었다. 

습관이지. 습관. 겨우 그늘 한 조각을 찾고는 이렇게 중얼 거렸다. 잠시 평온이 찾았다. 굳이 갑판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답답했다. 비록 이곳은 뜨겁고 습해도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다. 해수면의 찰랑 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검푸른 바다도 볼 수 있다. 답답한 것보다 이런 것이 좋다. 

그러나 한가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상병 가운데 일부가 또 죽어나갔다. 아직 살아있는 부상병은 시체를 치우라고 고함을 질렀다. 여기 시체가 있다. 치워주시오. 여순처럼 선실로 내려가지 않은 병사 하나가 소리나는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다른 병사 하나도 마찬가지 비슷한 폼으로 거의 동시에 시체에 도달했다. 그들은 죽은 시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놓고 옥신각신했다.

장교를 대신한 상사에게 보고를 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 같았다. 여순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다 그것도 힘에 겨운지 눈을 돌렸다. 어떤 일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은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었다.  어느 새 또 다른 병사 하나가 합세했다. 셋은 시체를 들고 박자를 맞춰 숫자를 세더리 어영차 소리와 함께 바다로 던졌다. 어영차 소리는 돌격 앞으로 하는 소리와 비슷했다. 손을 털면서 그들은 굳어지기 전에 해치운 것에 만족한 것 같았다. 

여순은 시체와 물이 만나면서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점차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바다가 그를 수면 아래로 끌어내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 수면을 그려보았다. 그러자 정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나의 생명을 삼킨 바다는 전과 다를바 없었다. 무자비한 바다였다. 아니다. 자비를 베푼 것이다. 죽은 자의 수치심을 알아서 감춰준 것이다. 바다는 그 일을 말 없이 수행했다. 명령을 받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척척해냈다.

그 덕분에 바다로 던져질 때 장기를 드러냈던 무릎을 다친 병사는 부끄러운 모습을 감출 수 있었고 더이상 부끄러움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조금 남아 있던 병사의 젊은 피는 스펀지처럼 짠 물에 마지막으로 스며들었다. 장교의 애국심도 바다와 함께 가라앉았다. 병사들이 또 옷을 털었다. 손에 묻은 것을 턴 옷에 슥슥 비볐다. 해치웠다는 안도감이 손 끝으로 몰려왔다.

일을 마친 그들은 이제는 정말 지쳤는지 앉을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짐을 버린 홀가분한 기분으로 두 다리를 쭉 뻗는 자도 있었다. 일부는 그대로 드러 눕기도 했다. 상황이 일시 종료됐다. 다시 올려다 본 하늘은 금새 저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붉은 기운이 더해져 검은 피처럼 엉겨 붙었다. 장교와 병사들의 애국심이 저기에 가서 붙었을까.

무릎을 관통당해 비명을 질렀던 병사의 드러난 장기가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구름은 서로 엉기켠서 구부러진 내장의 형태를 띄기도 했다. 피를 먹은 해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기가 막힌 풍경이 산과 산 사이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은 죽마을 해변이 아니었다.

거기서도 석양은 볼만 했으나 이곳과는 차원이 달랐다. 크기도 엄청나서 두 팔을 벌려도 다 껴안 수 없을 정도로 해는 엄청나게 컸다. 저리도 찬란한 경치 앞에서 젊은 넋들은 가차없이 쓰러졌다. 내 피도 저기에 묻었을까. 병사들은 이런 생각으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여순은 사람 형태도 갖추기 전에 떠나 보낸 뱃속의 아이를 생각했다. 그것은 죽어서 필시 하늘로 갔고 오늘 그 모습을 여순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 멋있다. 그곳에서 잘 살며무나. 여순은 입맛을 다셨다. 여순의 피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또다른 피를 토했던 도착하던 날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래, 하늘의 태양이 붉은 것은 억울한 피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기 때문이야. 

여순에게 이제 멀미는 남의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누워 있지 않아도 속은 편안했다. 마치 평지에 있는 것처럼 여순의 몸과 마음은 안정됐다. 멀미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여순은 목을 들어 다시 불타는 태양을 올려다 봤다. 거기에는 태양 대신 함장의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저벅 거리는 박자국과 군도가 버클에 부닥치는 소리가 들린다. 여순은 억지로 일어섰다. 부관과 함께 온 함장은 부상자들의 상태를 물었다.

여순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말수가 나섰다. 3명이 죽고 6섯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사망자는 이미 처지가 끝났고 부상자들은 임시로 봉합했으나 모두 생명이 위중한 상태라는 사실을 말수는 머뭇 거리며 덧붙였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 양 말수는 그 말을 하고는 함장의 얼굴을 살폈다.

함장은 말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변을 고개를 돌려 둘러 보았다.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아니 방금 죽은 시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여순은 그가 지금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 있다고 여겼다. 더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심리적인 방어선을 치고 함장은 갑판을 서성였다. 아끼던 장교의 죽음은 그에게 남은 마지막 두려움마저 걷어갔다. 무언가 결정한 듯이 그는 턱수염을 만지다 지휘봉을 흔들며 올라왔던 계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관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기억에 저장되기 전에 이런 음산한 광경은 지워야 한다는 듯이 여순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저런 식으로 지휘관이 화가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여순은 생각하지 않았다. 동물적인 본능이 살아날 때 나타나는 반응은 저런 것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여순은 두려웠다.

달리는 군함보다 해는 더 빠르게 식기 시작했다. 산 기슭에 걸리고 물에 닿는가 싶었는데 어느 새 모습을 감춰버렸다. 어둠이 찾아왔다. 깊은 적막이 감돌았고 부상당한 병사들은 다시 괴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어둠을 향해 지르는 비명은 상당한 공포를 불러왔다. 다행인 것은 포성은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적들은 다 죽었는가. 이쪽이 이 정도의 피해를 봤으니 적들도 어느 정도 피해는 봤을 것이다.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그들도 쉬고 있을 것이다. 다들 해처럼 지친 몸을 잠시 식히고 있어야지. 해도 쉬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그러나 함장은 쉬지 않았다. 함실로 내려간 그는 상대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해 답답했다. 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들은 사라진 군함을 찾기 위해 레이더를 가동했고 섬 사이로 숨은 군함은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더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소강 상태가 길어지고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고 사정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더 나빠질 수 있어 서로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함장은 적들의 이런 심리를 간파하고 있다. 그러나 연합군의 전투기가 문제였다.  그것들이 목표물을 향해 태평양 상공을 빠르게 날고 있는지 지금쯤 군함을 타격 거리에 두고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는지 알 수 없었다. 더 큰 공격이 올 것을 대비하고 싶었으나 대비할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함장은 지도를 펴고 깊은 고뇌에 빠져 들었다.

용기와 무모함 만으로 전투를 이길 수 없다. 한 두 번은 가능해도 매번 그럴수 없다는 것을 함장은 숱한 전투에게서 깨닫았다. 그는 본부의 지시는 지시일 뿐 현장에 있는 자신에게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책임감을 느꼈다. 나는 태평양 사령부를 책임지고 있다. 내 손에 대일본 제국의 운명이 달려있다. 

여기서 승기를 잡아야 한다. 패하면 어쩌면 본토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다. 그는 무전병을 불렀다. 그리고 말끔히 정리된 갑판위로 전투기 서너 대가 앉을 수 있도록 암호를 쳤다. 다른 군함에도 전투기들이 발진할 채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연료를 채워라, 실탄을 점검하라. 이것은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대비할 필요없는 선공을 때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을 실행하려고 한다. 미국령의 한 섬을 폭격해 전선을 확대하면서 눈엣 가시를 제거해야 한다. 그는 본국의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초조해 하지 않기 위해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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