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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그녀는 사라지는 그의 손끝을 보고 겨우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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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라지는 그의 손끝을 보고 겨우 이렇게 말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12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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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니 안 되는 것은 버려야 해.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들어. 돌아가는 정세도 그렇고. 임정 때문에 고통받는 고국 동포들 생각도 해야지. 여기서 독립운동이다 뭐다 하면서 시끄럽게 굴면 조선사람만 힘들어.

말수는 자신이 힘들다는 듯이 힘든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 팬단 말이지. 남은 사람만 죽어나는 거지. 일본인 누구 하나 다쳐봐. 열에 백에 천이 짓밟혀. 가만히 있는 조선 백성이 무슨 잘못이 있어. 상하이로 도망쳐 와서는 독립한답시고 지들끼리 싸우질 않나.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어.

그래도 해야 할 건 해야지 말입니다. 3.1운동은 백성들이 일으켰잖아요. 안 그래요? 그 후 일제의 태도가 바뀌었고요.

그래서? 그 다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탄압은 거세져.

그렇지만 말이란 것이... 여보. 독립운동은 목숨을 걸고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나쁘게만 볼게 뭐 있나요? 생기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 돈 쓰면서 하는 일인데...그 분들 명예도 있잖아요.

용희가 말수와 다른 의견을 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진 거 있어? 해봤잖아. 안 해 봤다면 해 볼 수 있어. 벌써 수십 년을 하고 있어. 그런데도 안 되는 것은 우리가 힘이 없거나 일본이 너무 세서 그래.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이길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거지.

글쎄요, 난 정치는 잘 모르지만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어요. 모르기는 해도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 기개가 없다면 조선 반만년 역사는 어디로 갈까요? 그 유구한 역사가 순식간에 사라져서야 되겠어요?

유관순 열사 납시었네. 알았어. 알았다고. 내 말은 좀 길게 보자는 거지.

말수가 벌컥 화를 냈다.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비웃는 것은 아니지만 그답지 않은 언사였다.

괜한 말로 당신 화나게 했어요. 화낼 일이 아닌데...

내가 괜히 화를 냈다는 거지?

그런 거 아니거든요. 거기까지 당신 마음이 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정세에 밝지만 저는 어두워요. 

용희가 톤은 낮췄다.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내비친 것이다. 

난 다만...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는 주관이 있어요. 가만히 있어도 심정적으로는 마음이 그쪽에 있잖아요? 당신도 그렇고요.

난 조금 달라. 아니 많이 달라.

말수가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입을 비죽 내밀었다.

상대가 사납게 나온다고 맞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해도 때리는 그가 옳다고 편들 수는 없잖아요?

누가 편들라고 등 떠민 거 아니잖아.

알았어요. 여보. 다른 거 다 떠나서 병원 열심히 하는 게 우리한테는 애국이고요. 그 밖의 것은 차차 정리하지요.

기회다 싶어 용희가 논쟁에서 빠지기 위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 일로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잘 해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독립이니 친일이니 하는 일이 방해를 놓고 있다. 불쾌한 기억도 때론 떠오른다. 일제 이야기만 나와도 몸이 떨리는데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그새 죽을 고비를 잊어버렸나.

풀이죽은 용희를 보고 말수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설득하듯이 말했다.

병원 개업도 따지고 보면 다 일본 때문에 가능했던 거 당신 벌써 잊은 거요? 나카무라 대장이 아니었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지 몰라. 그가 자리 알아주고 돈 대주고 다 했잖아.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은 내가 가는 길이 아냐.

누가 그러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 다만 나는 그런 사람들의 노고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싶어요. 타국 땅에서 제나라 찾겠다는 사람들은 외롭거든요.

우리에게 그들을 달래줄 의무가 있는 건 아냐.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난 다만, 당신이 호의적이었다가 적대적으로 돌아서고 있어서 그게 좀 걱정이 되서요.  나카무라 대장이 개업에 도움을 준 건 고마운 일이에요. 그걸 부인하거나 아니라고 덮어 두려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당신이 거기에 깊이 빠져들지 않았으면 해서요. 정치를 하려는 건 아니잖아요?

아냐, 맞아. 제대로 집었어. 난 정치를 하고 싶어. 그게 체질에 맞아.

그래서 어쩌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이제 임정과는 좀 거리를 둡시다. 돈을 대는 것도 그렇고 그쪽 사람들은 치료비도 거의 공짜로 해주는데, 그것도.

알았어요. 그렇다고 당장 매정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 건 당신이 알아서 해. 그냥 그렇게 사무적으로 대해줘. 거리를 두자는 거지.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니까.

그래요. 당신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해요. 남는 돈은 병원 증축에 씁시다.

용희가 결론을 내렸다는 듯이 대못을 박았다. 말수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다른 뜻이 있었다. 아내 몰래 비행기 헌납 같은 큰일을 하고 싶었다.

일본에 녹을 먹었으니 제대로 한 번 값아 보자는 심사였다. 일제 만주국 요원과는 포목점 집 주인과 통하면 쉽게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 사정이 어렵다고 하니 통 크게 한 번 쏠 수도 있다.

전투기 한 대를 쏘겠습니다. 이렇게 한번 해 보지 뭐. 돈이야 또 벌면 되는 것이고.

말수는 자신감에 차올랐다. 새로운 일은 언제나 그에게 신바람을 주었다. 남자의 기개가 이제서야 빛을 본다고 생각했다. 일제가 승리하면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온다는 확신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나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해서다. 그런 면에서 일본이 내세우는 대공아공영권은 자신에게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아시아인은 아시아인끼리 뭉쳐야지. 각 민족의 생존권과 번영을 약속하고 있잖아. 맞아. 지금 전쟁은 서양과 아시아의 전쟁이야. 설사 과실은 전부 일본이 딴다고 해도 서양 패거리에게 주는 것보다는 낫지. 일본을 중심으로 뭉치면 조선 독립도 피를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을지 누가 알아.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일본이 진다고 해도 빚은 갚는 거고.

말수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은 정치에 자신이 붙었기 때문이다. 포목점 집 주인과 많은 대화는 자신에게 정무 감각이 탁월하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국제 정세를 분석하고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이전투구를 하나로 묶을 방책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는 임정으로는 조선을 대표할 수 없다는 확신이 섰다.

저 정도 정치력으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을 통합할 수 없다. 통합하지 않으면 모래알이다. 그는 통합된 임정의 수반으로 자신이 어울리겠다는 야망을 키웠다.

여기 수장은 귀국하면 독립된 대통령이 된다. 그는 조선의 새로운 대통령을 꿈꿨다. 왕실은 이미 붕괴됐으니 신경 쓸 일이 없다.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임정의 수반이 되어야 한다.

말수는 그러기 위해 일본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데 의심하지 않았다. 해방이 된다고 해도 조선은 일본놈 판이야. 총독은 쫓겨나도 그 아래 관리들은 다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어. 아니면 친일파이거나.

그들의 힘을 얻지 않으면 독립된 조선은 껍데기야. 미군이 신탁통치를 한다고 해도 결국 정치는 친일파가 할 거야. 경제가 돌아야 하고 치안을 유지해야 하고 문화를 살려야지. 그러려면 일본과 친일파 없이는 불가능해.

일단 비행기를 크게 쏘고 나서 때를 보자. 일본이 패망하면 협박 때문이라고 둘러대면 되고. 아니면 누가 내 이름을 팔았다고 하면 되지. 변명은 수천 가지가 넘고 그걸 따질 사람은 없어. 일단 정권을 잡으면 다들 넘어오게 돼 있지. 권력 앞에 꿇는 것은 본능이야.

지금은 친일이 대세야, 때를 봐서 친미를 하거나 친중이든 친러든 그때 가서 붙자고. 병원장 그릇으로 남기에는 말수는 너무 통이 컸고 그릇이 넘쳤다. 끝도 없는 통영 앞바다를 호령했던 그는 이순신 장군이 된 듯이 큰 칼을 옆에 차고 나라 걱정, 자신의 무궁한 앞날에 빠져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임정을 접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사분오열된 임정의 명령체계를 단일화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을 의심받고 있는 주석을 제거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말로 해결하는 것이 일순위다. 설득해서 되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다. 스스로 내려놓고 나를 지지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난망하다. 조선인들은 감투 쓰기를 좋아하고 어떤 자들은 용의 꼬리 보다는 뱀 대가리를 원한다.

그러니 이당, 저당 당이 수도 없이 많지. 서너 명 모아 놓고 당수라고 하지 않는가. 나라고 당장 당을 만들어 당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차라리 당을 하나 차릴까.

대일본조선독립당 정도는 어떨까. 이름부터 혼란스러워야한다. 정치는 원래 회색 인간들에게 어울리니까. 일본을 앞에 내세우는 것은 좀 그렇다. 조선독립대일본당은 어떨까. 거꾸로 하니 조금은 낫군. 하지만 웃기고 자빠지는 일이야.

말수는 스스로 웃었다. 좋아죽겠어서 일부러 계속 웃었다. 당장 당수가 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의 충성심에 감동이 벅차올랐다. 장개석이나 모택동을 만날까. 아니면 스탈린은. 빠를수록 좋다. 만나자고만 한다면 처칠이나 아이젠하워도 거부할 이유없다.

내 영어 실력과 중국어와 일본어라면 상대 못 할 것도 없지. 주석이 없는 세상에서 신선한 자신이 치고 나간다. 명망도 있고 돈도 있고 무엇보다 강점은 때묻지 않은 깨끗함이다.

그것으로 좌우익을 사로 잡은 후 어디 쪽에 붙을지 시험해 보자. 일본이 승리하면 조선에 가서 한 자리 차지하자. 총리나 장관쯤은 식은 죽 먹기다. 조선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형식적으로 조선인 관리는 필요하다.

나 말고 다른 적임자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말수는 정신이 없었다. 이런 생각은 용희에게는 하지 않았다. 부부라고 해서 다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용희는 굳이 편을 가르자만 독립운동에 찬성하는 눈치다. 설득하면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나를 감추어야 한다. 그것도 철저히. 때로는 그녀 의견도 도움이 된다. 나는 통합파이기 때문이다.

말수는 조선독립일본당의 당사 간판을 흐뭇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곧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도 없이 말수는 밖으로 나갔다. 부드러운 음성이었고 사랑이 담겨 있었다.

이때만은 정성스런 마음으로 조심해서 다녀 오라는 그녀에게 등뒤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여보, 저녁 7시 시내 대세계에서 만나는 것 잊지 말아요. 늦지 말고요. 

용희는 사라지는 말수의 손끝을 바라보며 겨우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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