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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살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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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9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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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역은 인파로 붐볐다. 점례는 용희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소리치는 군인들과 그들이 가르는 이편저편을 이겨낼 수 없었다.

사라져 가는 용희의 뒷모습을 보며 점례는 트럭에 올라탔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싶었는데 차 뒤쪽에서 나오는 그르렁거리는 기계음에 숨이 막혔다. 점례는 숨을 쉬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으나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무언가가 내리 누리고 있어 가슴은 터질듯이 답답했다.

유지의 팔이 점례의 목에 통나무처럼 길게 걸쳐져 있었다. 그가 고는 콧소리가 엔진음을 대체했다. 심하지는 않았으나 일정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매연을 토해내는 트럭 엔진 소리와 진배없었다.

검은 연기 사이로 한 소녀가 다가왔다. 용희였다. 너, 어디 있었니? 괜찮은 거야?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용희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다른 소녀가 다가왔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행복한 표정이다. 용희와는 달랐다. 누군가? 점례는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처음 보는 여자인지라 알기는 어려웠다.

다시 한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고 그 소녀는 엎드려 울고 있었다. 좁고 비좁은 군인용 막사 안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점례다. 자신이 자신을 보고 있다. 빠져나와라. 왜 그러고 있니? 어서, 어서.

점례는 외쳤다. 소리 질렀으나 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유지가 팔을 풀었다. 그 제서야 막혔던 호흡이 돌아왔다. 목에 걸린 찰떡이 물 한 컵에 쑥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점례는 다시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억지로 일어났다. 땀이났나 이마를 만져 보니 말라 있었다. 그녀는 창가로 갔다. 달갑잖은 꿈을 쫓아내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억지로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달은 사라지고 없었다. 멀리서 여명이 달빛이 드나들던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직선으로 달려와 거실의 한쪽 벽에 비수처럼 박혔다. 점례는 뒤숭숭한 꿈을 뒤로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속이 불편했지만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그새 꿈은 사라졌다.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실 수 있어 다행이다. 걱정할 게 없는데 괜히 걱정하고 있다.

스스로를 이렇게 달래며 점례는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유지가 간밤에 말한 것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악몽으로 이어질 일이 아니었다.

전쟁에 이기든 지든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이든 조선의 독립이든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점례는 그림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을 지켜 내는 것은 그것뿐이다.

하나 더 있다면 유지의 소설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나와 유지에만 신경쓰자. 그녀가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유지가 일어났다. 그는 일부러 자신이 깼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인기척을 냈다. 놀라게 하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물 드릴까요?'

'아니야, 여보. 그런데 당신 괜찮아?'

'왜 문제가 있을까 봐요?'

'좀 그래. 밤새 앓았거든. 헛소리도 내고. 흔들어 깨우면 잠잠하다가 다시 잠들면 고함을 쳤어.'

'내가 좀 그랬나 봐요. 개운하지가 않아요. 낮잠을 자서 그런가 봐요. 제때 자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 당신 좀 쉬고 몸조심해.'

'몸조심해.'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서로를 챙기고 건강하라고 덕담을 나누지만 몸조심해, 라는 말은 처음 듣는 것처럼 생경했다.

'몸조심해.' 

이국만리에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 점례는 안심했다. 고마웠다. 그는 자신만큼이나 나를 위하고 있다.

'몸조심해.'

그 말을 곱씹자 점례는 갑자기 생각이 돌아온 사람처럼 손가락을 꼽았다. 그리고 벽에 걸린 달력을 쳐들었다. 아니, 내가 왜 이것을 몰랐을까. 벌써 석 달째다.

그럴 리가 없다. 엄마라니. 말도 안 된다. 가슴이 조여왔다. 꿈속에서처럼 비명을 질러야 할 것 같다. 이번에도 유지가 달여와 도와줄 것이다. 아니다.

아직은 아냐. 말할 것도 없어. 실망할지도 몰라. 속단하지 말자. 아니야. 한 번도 아기에 대해 말해 본 적이 없어도 좋아할지도 모른다. 점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다.

점례는 혼란스러웠다. 한 달 만 더 기다려 보자. 이달에도 없다면 일단 병원에 가보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점례는 어떤 새로운 기운이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환한 빛이 어둠 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사막의 오아시스를 비추고 있었다. 갈증 난 사람들에게 그것은 생명이었다. 그것이 내게로도 오고 있었다.

유지는 방에 들어간 지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손에 편지지를 들고 나타났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언제나 기억했다가 그렇게 하는 유지였다.

'한 번 읽어봐.'

'아니 내가 편지를 왜 읽어요?'

점례가 짐짓 손사래를 쳤다.

'부자간에 오가는 정이잖아요. 중간에 내가 끼어들면 감정이 달라질까 두려워요.'

'그럼 내가 읽을게. 들어봐.'

점례는 유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지가 편지를 들었다. 순간 점례는 수류탄을 든 병사의 손을 본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랐다. 요즘 들어 점례는 간혹 환상을 보고 있다.

어제와 같은 가위눌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땅 깊은 곳에 있던 바이러스가 얼음이 녹아 세상 밖으로 나온 것처럼 점례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 밤에 나타난 그것은 낮 동안에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기억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도 그중의 한 가지 방법이었다.

수류탄은 던져지지 않았다. 유지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손을 앞으로 당겨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이곳 파리는 어수선해요. 독일이 항복한 지 서너 달이 지났지만 아직 정리할 게 많아요.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괴뢰 정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평가예요.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은 소수이고 공론의 장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어요. 목숨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아요. 나치에 목숨을 내주었으면 조국에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고 핏대를 올려요. 처단하자는 목소리가 높고요. 이곳의 피는 뜨거워요. 낭만적 혁명주의가 센강의 쥐들처럼 들끓어요. 예술가들은 더 하고요. 그들은 그렇게 한바탕 떠들어 대고는 각자 일에 몰두해요. 화가는 화가대로 작가는 작가대로 죽기 살기로 파고들지요. 그런 점이 좋아요. 드골에게 충분히 압박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덤벼들었으니 이제 내 할 일을 하자는 주의지요. 아마도 드골 정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론 낼 것 같아요.'

유지가 잠시 편지에서 눈을 떼고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점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소련의 참전 문제인데요. 아마도 조만간 대일본 선전포고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나쁜 조짐입니다. 괄호 열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요. 아버지 기대처럼 소련의 참전은 미국 일방의 세력에서 연합국이 이원화될 수있는 기회지요.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일본의 패전을 가정하면 소련의 참전은 우리에게 득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들이 파죽지세로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 전역은 물론 한반도로 진격할 경우 상황은 달라져요. 그러면 일본은 본토 공격에 대한 걱정이 앞서겠지만 그러기 전에 전쟁이 끝날지도 몰라요. 괄호닫고.'

유지는 괄호를 열고, 닫고를 말로 표현했는데 그럴 때마다 점례와 눈을 마주쳤다. 딴짓하지 못하도록 선생이 학생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이따가 편지에 대한 평을 물을테니 잘 들어.'

유지가 입을 삐죽이 앞으로 내밀었다.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에 대한 일본의 움직임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적극 개입하면 나중에 미국과 협상하는데 도움이 될 테지요. 물론 아버지가 잘 알아서 판단하겠지만 이국에서 보는 눈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관한 것인데요. 아버지, 저는 아직 결혼 계획이 없고요. 결혼한다고 해도 보내주신 사진 속의 여자는 아닙니다. 점례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밖에 없는 저의 동지입니다.'

유지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점례를 보았으나 어느 새 장난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와 마주친 점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사진 속의 여자가 아니라고 했을 때 점례는 결혼할 사람은 점례입니다. 점례 마사코라는 말이 나올까 봐 가슴이 벌렁거렸다. 다행히 그는 동지라는 말로 점례의 두려움을 없애 주었다.

'결혼에 대해 말씀 주셨는데 답장이 서툴러 죄송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휴의와 동휴는 점례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그런 사람을 접촉한 사실이 없어요.'

점례는 이 대목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휴의와 동휴를 모르는 인물로 결정해 버렸다. 점례의 생각은 그 지점에서 한동안 머물고 있었다.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자 유지가 어때하고 물었다. 생각이 돌아온 점례가 너무 가혹하다고 한마디 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냐. 나머지를 들어봐. 아버지가 추신을 보냈듯이 나도 추신을 썼거든.'

추신: 아버지, 전쟁에 대한 제 분석을 더 들어보세요. 깜박한 것이 있어요. 소련은 동아시아까지 집어삼켜요. 다 먹는 거지요. 그리고 막판에 한반도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이 바로 뒤로 후퇴합니다. 지난번 만주 침략 때 처럼요. 아버지도 알다 시피 만주 황군은 우리 전력 가운데 으뜸이지요. 그런 황군이 제대로된 전투도 없이 후퇴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아버지. 안 그런가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전선을 크게 뺏지요. 아마도 이것도 아버지 작전일 듯 싶습니다. 나도 아버지의 그 작전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소련은 이 상황에서 약간 당황했으나 곧 일본이 본토 방어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생각하지요. 이쯤되면 미국은 난감할 겁니다. 승자는 미국만이 아닌 소련도 포함되니까요.

그 때 우리는 소련에 최후통첩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일본의 항복입니다. 아버지, 이것이 우리가 노리는 최종 목표여야 합니다. 소련의 사회주의를 막기 위한 것이지요.

일본이 만주에서 소련과 격돌하지 않은 것은 잘한 결정입니다. 이미 우리는 44년 필리핀 인근 해역 전투에서 미군에 크게 패한 후 패전으로 기울고 있어요.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요.

미국 전력의 손실이 아니라 일본 해군의 궤멸입니다. 이때 아버지는 일본의 패전을 가정했어요. 그렇지요? 아버지는 만에 하나라는 가정하에 그럴리는 없지만 일본의 패전에 대비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정확합니다. 이미 기울어지고 있어요. 진다면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하지요. 패전했으나 승전한 것 같은 결과를 얻는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천황제를 지켜 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아버지, 사회주의를 막고 천황제가 유지되면 일본은 패전이라도 승전입니다.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받을 카드만 받는다고요.'

유지의 추신은 아버지의 추신처럼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 항복선언은 이때까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측 공작 담당자에게 이 점을 분명히 하세요. 우리는 소련과 싸울 생각이 없다. 만주로 진격한 병력을 빠르게 남하시켜라. 우리는 병력을 조중 국경 지역으로 빼겠다. 그리고 다시 한반도에서 빠르게 철수할 계획이다. 대신 본토 공격은 꿈도 꾸지 마라. 이 정도 선에서 소련과 비밀조약을 맺어야 합니다.'

편지를 다 읽었는지 유지가 그것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어때 이 정도면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지? 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편한 웃음을 짓기 위해 입을 양쪽으로 벌렸다. 점례는 유지의 정세 분석에 놀랐다. 과연 고급 정보장교다운 판단이었다. 그러면 조선은? 이제 일본이 물러나고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는구나.

'미국이 이것을 용납할까요.'

점례가 물었다.

'별수 없을 거야.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는 쪽은 우리보다 미국이야. 두고 봐. 곧 내 말이 맞는지 결판나겠지.'

'여보, 여기에 더하고 싶은 말은 없어?'

점례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결혼 말이에요. 아버지가 충격받지 않겠어요? 단칼로 거절했으니 자존심이 상할 게 분명해요. 여지를 두지 그랬어요. 생각해 본다는 좋은 구절이 있잖아요?'

'아냐, 아버지한테는 그게 안 통해. 의사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거든.'

'그런데, 휴의나 종로서장에 대해 당신은 내게 묻지 않았잖아요?'

점례가 주제를 급히 바꾸었다.

'왜 알고 있는 인물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뭐가 문제지?'

'추신을 마지막에 그것도 길게 쓴 것은 결혼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야. 아버지는 결혼도 관심이 있지만 사실 전쟁이 더 중요해. 마무리를 잘해야 하거든. 이것은 일본의 운명에 관한 것이고. 휴의나 동휴의 문제도 뒷전이다. 그냥 끼워 넣은 것뿐이고.'

유지의 추가 설명에 점례는 그렇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무대신의 입장에서 전쟁 종결말고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었다.

점례는 입을 다물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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