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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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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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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을 내려놓기 위해 점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른 잔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났다. 포도주를 가득 따랐다.

좀 무겁다 싶을 정도로 술은 잔의 위까지 가득찼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고 점례는 다시 일어섰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해는 사라지고 대신 가로등 빛이 집안으로 들어왔고 노란 갓을 쓴 거실등이 식탁을 비추고 있었다.

점례는 다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 줄을 읽기 위해서였다. 추신이라는 글은 안 읽고 넘어갈 수 없게 굵은 글자로 본문과 다르게 눈에 띄었다. 대개 이것은 짧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길었다.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휴의와 동휴라는 글자를 보았다. 진정됐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잔을 들어 한 잔 마셨다. 잔이 넘쳐 흘러 내린 것이 손등이 조금 묻었다. 포도주의 붉은 빛이 타는 자신의 속마음과 비슷했다.

'조선총독부를 공격한 휴의 일당은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다. 테러리스트를 처단하지 못하면 대일본 제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유사한 일이 재발될 수 있고 그가 또 어떤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

잡범을 잡아들이고 행인들을 마구 잡아들여 범인으로 몰아간다고 해서 분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진짜 범인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참에 만주에 있는 군대를 동원해 상하이 임정을 아예 박살 낼까 생각 중이다.

뿌리를 뽑아 아예 싹이 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휴의와 상하이 조선 임정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됐다는 것이 우리 첩보기관의 판단이다. 공교로운 것인지 어떤지 종로서장 동휴가 휴의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묘한 인연아니냐? 하나는 조선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다른 하나는 그런 자를 잡기 위해 일본인이 됐다. 승자가 누가 될 것 같니? 물어보나 한 질문이다.' 

점례는 이 대목에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런 일들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이 앞섰다. 오로지 그림만 그리려던 자신이 계획이 어긋날 수 있다.

파리에 와서 휴의와 동휴를 떠올릴 줄은 몰랐다. 이제 도쿄의 여자는 없고 그 자리에 그들이 차지하고 들어섰다. 새로운 걱정이 생기니 그 전의 걱정은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녀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고개를 약간 돌렸다. 비스듬히 보이는 벽을 따라 그와 유지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일종의 자화상이다. 그녀는 붓을 든 자신과 책을 들고 한 손은 자신의 어깨를 집고 있는 유지를 그려 유리 액자에 넣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자신을 맞는 것은 그림 속의 자신과 유지였다. 유지도 그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다. 들어가서 영원히 나오지 않고 싶다. 그곳은 낮과 밤이 세상처럼 돌아가니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침 햇살을 받고 저녁 노을을 기다리는 곳이다. 돌가는 세상일을 다 보고 느끼고 있다.  아니,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곳으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이게 무슨 일이람. 새로운 일이 계속 일어나고 그 일은 내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불행인가? 잇따라 오는 그런 종류의 불행인가.'

점례는 낭만주의자에게 닥쳐온 불행에 낙심한 사람처럼 잠시 고뇌에 빠져들었다. 골치 아픈 일이다. 점례는 편지 읽기를 멈추고 가죽 정장에 금박입힌 성경책을 들었다. 그러다가 그대로 옆으로 밀쳤다.

‘굳이 조선독립이 필요한지 내가 조선인 입장이라고 해도 이해가 안 간다. 우리는 원래 같은 민족이었고 조선은 여러 대 위에서 갈라져 나온 우리 선대가 세운 나라다. 내선일체가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어째서 그들은 저항하고 반항하느냐. 사억 중국 인구도 우리에게 대들지 못하는데 겨우 삼천만 인구가 싸우려고 든다. 어리석은 민족은 말로 해서는 안 될 때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

점례는 다시 그림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번에는 들어갔다가 영원히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그런 통로를 개척하고 싶었다. 

'어쨌든 우리는 휴의와 같은 인간을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한다. 일본과 조선이 한 덩이로 뭉쳐 대항해도 어려운 싸움인데 식민지 조선에서 난동이 벌어졌고 그 주동자를 일 년이 지났어도 아직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동휴를 족쳤다. 서신으로, 통신으로 그랬고 조선헌병대사령관을 따로 불러 세 달의 기한을 주었다. 그래도 잡지 못하면 조센징의 실력 없음 때문이고 게을음 때문이니 서장직을 박탈하려고 한다. 아마도 사령관이 내 뜻이 분명하게 그보다 더해서 세게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혹시 너는 그들에 관한 정보가 없니? 점례는 인사동에서 네 삼촌과 함께 살았다. 언젠가 너는 술자리에서 동휴를 보는 점례의 눈초리가 아는 사람을 피하는 듯하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휴의와 동휴가 친구사인 것처럼 점례도 혹시 그런 사이인지도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점례를 이용하면 일은 쉽게 풀릴지 모른다. 이용보다는 활용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넌지시 그들에 대해 혹시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 점례에게 물어봐라.'

이 대목에서 내무대신은 자신의 편지를 아들 뿐만 아니라 점례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 같다. 다음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직접적으로 하기 어렵다면 내가 궁금해한다고 전해라. 점례와 너는 같이 호흡하고 있지 않느냐. 아니면 이 편지를 그녀에게 보여주고 동의를 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점례는 정치인의 용의주도함을 보았다. 그러나 크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안다고 해도 불리할 것도 없었다. 우연히 친구가 됐고 그들이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내가 그림을 그리러 파리에 온것과 같은 것이다. 모두가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이 운명이라면 점례는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늘 흩어지고 서로 싸우는 것이 조센징의 특징이지만 때로는 감싸주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상한 민족이다. 우리에게서 갈라져 나오면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말이다. 유지야, 내 아들 유지야. 만약이라는 말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말은 유용하게 쓸 때가 있다. 지금처럼 말이다. 만약 우리가 큰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조선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만주는 넘겨주고 다른 아시아 국가는 다 연합국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 마지막 카드로 조선을 남겨둘 생각이다. 조선은 영원히 일본 영토여야 한다. 왜냐고? 일본과 조선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조선총독이 되기를 희망한다. 어떤 식으로든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조선에서 나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다. 왠지 조선은 이곳 도쿄보다 더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처럼 조선에서 같이 만나면 좋을 것이다. 그때는 경비를 철저히 해 총격으로 혼란스럽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를 할 것이고.'

혈기왕성하고 잘생긴 중년 남성의 얼굴이 점례 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당황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그가 떠올랐다.

무뚝뚝하게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화난 표정을 짓다가 고함을 치다가 다시 웃는 사람, 순간마다 자기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변신에 능한 내무대신의 모습을 점례는 상상했다.

그가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내 때문이 아니다. 나도 휴의와 동휴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는 알지 못한다. 휴의와는 인사동에서 잠깐 만난 것이 전부고 동휴는 멀찌감치서 보았을 뿐이다.

설사 둘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해도 내가 중재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이 있고 서로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간다.

편지는 끝났다. 점례는 남은 잔에 있는 술을 마져 마셨다. 아까와는 달리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마신 덕분인지 알코올 기운이 목을 타고 위장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온전히 느꼈다.

억지로라도 기분을 전환해야 하는데 쉽게 그렇게 됐다. 마치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우연히 찾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점례는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닥치면 그때그때 생각하자. 이미 많은 부분은 그렇게 했다. 점례는 졸린 눈을 부비지 않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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