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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휴의는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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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는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14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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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되어도 훈련은 끝나지 않았다. 애초 기대한 것과는 다른 것에 휴의는 화가났다. 그렇다고 달리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나가기는 더 어려운 곳이 이곳 아닌가.

더구나 이곳이 어딘지도 모른다. 굳이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조교들 나름대로도 이유는 모르지만 화가 나 있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도착해서 저녁 먹자마자 기기 시작했으니 이제 취침해도 될 성싶었다. 그러나 훈련 조교들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우리만큼 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훈련병 때문이라는 듯이 그들은 화를 센 훈련으로 앙갚음했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가 아닌지라 밤새워 돌릴 수는 없었다. 사이 사이 휴식이 주어졌다.

그때마다 동료들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휴의는 팔로 상체를 기댄 채 그런 자들을 보았다. 저들과 똑같이 하고 싶지 않았으나 고개는 자꾸 아래로 가라앉았다. 겨우 눈을 떠 보니 산허리에 걸친 검은 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 사이로 빛나는 별 몇 개가 서쪽 하늘로 기울어져 있었다. 십분 이해해도 이것은 아니다. 체력 훈련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러나 모아놓고 설명도 없이 그저 뛰고 기라고만 한다.

입에 묻은 거품을 휴의는 손등으로 닦아냈다. 혀에 댄 맛은 짠기 가득한 소금물과 진배없었다.

'난 너희들과 달라, 조선독립군의 장교다. 나에게 너희들 왜 그러니?'

휴의가 옆에 앉은 조교에게 다른 훈련병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난 그런 거에 관심 없다.'

'뭐라고?'

'계급장에 신경 안 쓴다고. 나에게 걸리면 별들도 뺑뺑이 돌아야 해. 더구나 조선독립군 장교. 입 다물고 훈련이나 받아라.'

휴의는 불쾌했다. 깔보는 자의 그 눈빛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었다. 이제 가까운 곳의 시선을 식별할 만큼 날이 밝았다. 날을 샜구나. 휴의는 길게 다리를 뻗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그 조교에게 심하게 따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조교가 무얼 알겠는가. 상관이 시키니 그렇게 하는 것뿐이다.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다.

공짜로 시켜주는 훈련 아닌가. 손해 보는 쪽은 양키들이다. 그러니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하자. 휴의는 다시 관대한 마음이 됐다. 13명이 한 조였다.

조선독립군이 3명, 나머지는 모두 장개석 군 소속이었다. 아직 그들과 통성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더구나 조선인들끼리도 그랬다.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시간이 날 것이다.

원래 입소 날이 제일 군기가 세지 않은가. 그런 좋은 마음이 들자 휴의는 어서 날이 활짝 밝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무리 인간병기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밤낮이 바뀌면 잠이라는 것을 거쳐야 한다.

'아, 잠들고 싶어라.'

사실 휴의는 잠보다도 다른 목적 때문에 시간에 집착했다. 체력 훈련 말고 바로 폭파훈련이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정신이 고갈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짝 차리고 하는 훈련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아무리 체력 훈련이 폭파 교육의 양념이라해도 너무 나갔다. 내일쯤이면 아니면 늦은 오후라도 다이너마이트를 손에 쥘 수 있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것을 소총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때까지는 참고 견디자. 참지 않으면 다른 방법도 없다. 설마 그들이 이런 식의 뺑뺑이만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휴동지, 수고해 주시오.'

주석이 말한 수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참고 견디는 것. 이런 망상에 사로 잡혔을 때 훈련 조교가 시가렛 하면서 담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휴의는 고맙다며 냉큼 받았다. 담배는 끊은지 오래였다. 그러나 늘상 가지고 다녔다. 사교를 위해 혹은 변장이나 주변 시선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소품으로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휴의는 맛나게 피는 시늉을 했다. 연기를 콧구멍 두개 사이로 연신 뿜어 냈다. 그러나 목구멍 속에 들어갔다 나온 연기는 아니었다. 고맙다며 휴의는 다시한 번 조교에게 인사했다.

'여기서 나가면 내가 맥주한잔 사주겠다'.

휴의는 이런 미끼를 던질 줄도 알았다. 조교는 네가 사주는 술은 맛이 있을 거라 면서 오후 일정을 이야기 했다. 오늘 같은 훈련.

휴의는 맥이 빠졌으나 그런 시늉을 하지 않았다.

'오케이.'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길게 연기를 날렸다. 이 맛으로 훈련 받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런 너스레는 곧 멈췄다. 다시 훈련이다. 도열한 훈련병들은 우에서 좌로 연병장을 돌기 시작했다.

완전군장에 작은 기관총을 메고 달렸는데 박자가 척척 맞았다. 그러나 절반도 돌기 전에 엇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단순한 훈련이었으나 병사들 중 일부가 쓰러졌다.

체력의 한계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쓰러진 사람을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았다. 한 바퀴 돌고 나자 아까 쓰러진 자가 그 자리 그대로 있었고 뛰던 자들은 그를 뛰어넘어 달려나갔다.

생각보다 강도가 셌다. 서 너 바퀴를 더 돌고 나자 훈련병의 반 이상이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휴의는 최후의 일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최하위도 최상위도 아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금이라고 판단하고 휴의는 다른 병사들처럼 정신 줄을 놓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텅 비어 버렸다. 속은 아무것도 없다.

노른자를 뺀 껍질만이 남았다. 그는 껍데기처럼 가벼운 몸으로 흙냄새를 맡았다. 넘어질 때 총구가 귓가를 가볍게 때렸다. 이제 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온기는 아무데도 없고 몸은 바들바들 떨렸다. 조교들은 쓰러진 자들에게 물을 끼얹었다. 살아서 일어나는 자들은 겨우 지탱했다 또 쓰러졌고 그러면 다시 물을 뿌렸다.

게릴라로 여러 해를 살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적도 부지기수였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육체는 떠났고 정신만이 겨우 남아서 찌그러진 몸뚱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군이 센 이유를 알겠다.'

입술이 위아래로 들러 붙어 물 한 모금조차 넘길 수 없었다. 이렇게 훈련받다 죽는구나, 휴의는 마저 수고 하지 못하고 죽을 자신을 자책했다. 억울한 개죽음은 이런 것이다.

하늘의 별은 스러진지 오래고 낮의 해가 산등성이 타고 넘어왔다. 구렁이가 담장에 기대서 들어 오듯이 슬그머니 들어온 해는 쓰러진 자들의 눈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다른 곳은 조준하지 않았다. 빛을 받은 눈이 꿈쩍거렸다. 휴의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꿈속을 벗어 나는 데는 여러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교들은 시간이 없었다. 그들을 억지로 깨웠고 다시 연병장으로 내몰았다.

그런 훈련을 일주일 받고 버텨 냈을 때 다이너마이트가 눈앞에 들어왔다. 본격적인 폭파전문가 훈련이 시작됐다.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다이너마이트는 이제 빵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다.

돈을 주고 달라고 하면 받는 구수한 빵 냄새와 폭약 냄새가 다르지 않았다. 훈련 조교는 어느 날 막사의 한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계급장 없는 미군이 그를 맞았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면서 너는 나무랄 데 없는 일등 폭약전문가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서 있는 건물을 척 보면 얼마의 양이면 폭삭 주저앉힐 수 있겠다, 계산이 바로 나왔다. 그 계산은 정확했고 오차가 적었다. 미군도 그를 인정했다.

이제 나가면 된다. 수료장은 필요 없다. 주석을 만나 새로운 명을 받고 수행하면 된다. 조선독립의 무장 투쟁역사에서 하나의 획이 그어질 것이다. 내일이려나. 내일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려나.

휴의는 콧수염 아래의 입술이 그렇게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말이 나왔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같은 단어에 휴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선글라스를 낀 처음 보는 양키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뒤통수를 일격에 맞은 느낌이었다.

결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조선이 아니라고. 중국 내 일본 시설이 아니라고. 휴의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자 그는 '너를 이제부터 미군 특전단 소속 폭파전문가로 임명한다'는 말이 들렸다.

종이쪽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구두로 그 순간 미군이 됐다. 미군 이라고. 계급은 중사다. 혼란스러웠다. 조선독립군이 미군이라고. 그리고 인도네시아로 간다고.

휴의는 그 순간 뭐가 잘못돼도 엄청나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휴가 명령서가 전사통보로 바뀌는 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난, 조선독립군이다.'

'아냐, 넌 오늘부로 미군이다. 죽어도 미군으로 죽고 살아서 공을 세워도 미군이다.'

마이클 휴가 휴의가 받은 미군 이름이었다. 조선독립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미군이라니.'

이제 휴의는 선글라스의 한 마디로 조선독립군 장교에서 미군 중사가 됐다. 미군으로 살고 미군으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첫날부터 생사를 넘나들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 오르려고 까무라쳤던 것도 아니다.

휴의는 그러나 더 대꾸하지 않았다. 따지듯이 묻지도 않았다. 다른 애들은 다 좋아하는데 너만 왜 그러니? 같은 대답을 듣고도 잠시 멍하니 있을 뿐 상대를 화나게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다. 괜히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힐 이유가 없었다. 퇴소 날짜는 삼 일 후다. 휴의는 생각을 하고 생각한 것을 되풀이 확인하면서 디데이를 언제로 할지 고민했다.

선글라스 말대로 다른 훈련병들은 자신이 미군이 된 것에 대해 크게 좋아했다. 미군은 돈도 많이 벌고 대우도 좋다. 조선인 3명도 미군 통보를 받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잘 때도 낮에 벌렸던 입을 그대로 벌리고 잠에 들었다. 탈출이다. 그것만이 정답이다. 지급받은 미군복을 관물대에 가지런히 정리하면서 휴의는 그렇게 다짐하고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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