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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입은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광장을 가로 질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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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입은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광장을 가로 질러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0.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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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 후 떠난다는 휴의의 일정은 늦어졌다. 경성역은 철저히 봉쇄됐다. 일제는 들고 나는 사람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검문했다.

짐이란 짐은 모두 풀어 헤쳐졌고 옷 속까지 다 뒤집었다. 남녀노소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휴의는 일단 소나기는 피하자고 했다. 조금 늦는다고 해서 안 될 이유도 없었다.

그즈음 상해 소식도 그에게는 중국행은 머뭇거리게 하는 이유였다. 밀정을 어렵게 접촉한 결과 주석은 상해에 없었다. 그는 저장성이나 후난성 아니면 항저우 등으로 자꾸 거쳐를 옮겼다.

상해 임정은 어려운 상태였다. 흩어진 독립단체와 정당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자금이 주석에게 쏠리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지 않아도 좌우갈등과 파벌 싸움이 한창이던 정당은 주석의 한국독립당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주석은 일단 이들을 설득하고 하나로 뭉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조선인끼리 뭉치지도 못하면서 일제와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설득은 쉽지 않았다. 각기 주장이 강하고 서로 우두머리가 되려는 자들의 횡포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석은 인내심이 강했다. 그 힘으로 끝내 이들을 하나로 모아 독립된 단체를 만들기도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조선혁명당 당사인 남목청에 주석을 포함한 핵심인사들이 은밀히 모였다.

은밀히 라고 했으나 비밀이 새 나갔다. 불만을 품은 괴한이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총을 쐈다. 주석도 한 발을 맞았다. 병원에 이송된 환자를 본 의사들은 그가 곧 죽을 것으로 알고 수술도 피했다.

그러나 세 시간이 넘어도 환자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어렵게 살아난 주석은 글을 쓸 때 손을 떨었다. 흉통으로 인한 신경의 끈이 손끝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못했다.

그런 글씨를 본 사람들은 떨림체라고 했고 주석은 스스로 총알체라고 농담을 던졌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총을 맞은 비운도 흩어진 동지들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일제는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윤봉길이나 이봉창 같은 인물로 자신들을 괴롭힌 것에 대한 보복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주석 암살 계획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주석은 앞서도 말했듯이 신출귀몰 중국 전역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숨겼다. 그를 잡아 처단하기는 어려웠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으나 현상금의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테러리스트의 두목을 잡아 죄목을 낱낱이 공개하려던 일제의 계획은 잘 이행되지 않았다. 

주석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자의 우두머리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다. 조선총독부의 총독을 노렸다.

그것은 앞서 휴의 군대의 총독부 습격으로 이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제 대만 총독까지 죽여 세계의 이목을 끌려고 했다. 그러나 일제가 주석을 제거하는 것이 어려웠던 만큼 주석의 총독 제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밀정의 이런 소식을 들은 휴의는 일제와의 싸움이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번 실감했다.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정치인과 독립투사들의 엇갈린 방향을 저주했다. 

그는 주석을 누구보다도 신뢰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안중근이나 윤봉길, 이봉창 같은 인물로 휴의 자신이 뒤를 잇는 주인공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것을 바라고 독립전선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젊은 혈기와 얽히고설킨 동휴와 점례, 용희의 행방 등이 어지럽게 연결돼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조선독립이 필요하다는 철학적 이론만은 확고했다. 다만 그의 감성이,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다가 최근 들어 확연히 느려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확실했다.

밀정은 눈을 빠르게 굴렸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그의 얼굴에 가득 들어 있었다. 위험을 무릅쓸 만큼 자신의 일이 중요하고 자신에게도 어떤 득이 있는지 그는 잘 알이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이길로 접어들었고 휴의를 만나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더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따라 일어선 휴의에게 언제 중국행 열차를 타느냐고 물었다.

애초에는 삼 일 전이었으나 지금은 일주일 후로 미뤘다고 말했다.

'일주일 후면, 아 13일 수요일이군요. 몇 시 차요.'

휴의는 한 시라고 말 대신 검지손가락을 들어 표시했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모자를 한 번 만지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휴의도 바로 음식점을 나왔다.

밀정이 나가고 난 지 삼 분 정도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는 최대한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남대문을 지나 바로 남산길로 접어들었다.

도피보다는 신사참배가 목적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산을 오르면서 그는 일주일 후라는 말을 그리고 13일과 수요일 한 시라는 말을 곱씹었다.

그는 그날 그 시각에 경성역에 있지 않을 것이다. 헤어질 때 보았던 밀정의 차가운 눈은 배신자의 눈을 떠올렸다. 새로운 먹잇감을 잡은 사냥꾼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핏 보았던 것이다.

너의 비밀을 알았으니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작고 가는 눈이 말하면서 사라졌다. 그래 너는 대어를 헐값으로 샀다고 좋아하겠지.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지 않아.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몸이 숨기는 것이 상책이었다. 휴의는 그보다 시간을 더 앞당기기로 했다. 경계가 비록 삼엄하기는 하지만 기차는 예정된 시각대로 출발했고 사람들은 가고 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되레 이것이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수색이 강화됐다는 것을 경성 사람 가운데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도 차를 탄다면 의심을 살 사람이 아니거나 급한 사람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휴의는 적의 동태를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부관은 당장 내일 떠나기로 했다. 그가 어떤 검문을 받고 어떤 식으로 일경을 따돌리는지는 휴의에게도 도움이 될 정보였다.

휴의는 갑자기 커진 간이 자신을 억누르기라도 하는 듯이 손을 들어 간이 있는 쪽을 움켜쥐었다. 간혹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행동을 했다.

경성역에는 그날 비가 내렸다. 공기 중에 흙냄새가 훅하고 끼쳐 올랐다. 고향의 냄새인가. 휴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잊은 고향을 떠올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광장의 인파가 확연히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역을 빠져나온 사람이나 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리 질뿐이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봄비를 맞고 젖은 옷을 몸에 붙인채 광장을 서로 가로질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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