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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상해에 내린 첫 눈위에 발자국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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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상해에 내린 첫 눈위에 발자국을 찍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9.19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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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갔다. 금방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11월이었다.

날은 갑자기 추워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을 날씨였는데 저녁 무렵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다음날 첫 눈이왔다. 상해서 맞는 겨울이 시작됐다.

용희는 이층 자신의 방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창문의 열린 틈으로 겨울바람이 횡하니 들어왔다. 용희는 스웨터의 단추를 잠갔으나 창문을 닫을 생각이 없었다.

지나가는 서너 명 행인이 나누는 소리가 들였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짐승이 내는 소리는 분명 아니다. 그녀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사이이고 어떤 이유때문에 어디로 함께 가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들에게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지금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의 늪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까.

환자가 없는 틈이면 용희는 늘 이런 마음으로 일상을 채워나갔다. 책을 보다 잠시 다른 길로 가는 경우는 대개 이러했다. 악기 연습하다 손톱을 고를 때도 이런 쪽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것이 좋았다.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당장의 고통이 없을 때 도드라졌다. 편안한 마음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하지 않아도 찾아왔다. 이런 상태를 그녀는 좋아했다. 

아래층의 말수는 또 어떨까. 그는 병원이 안정되자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고심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조선으로 가야 할 지 아니면 이곳에서 말뚝을 박아야 할 지 이런 저넌 상념에 잠겼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정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잘 될 것라는 막연한 낙관이 그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용희는 자신보다도 뛰어났다. 영어도 그렇고 의학서적을 읽어 내는데도 그렇고 악기 다루는 솜씨도 그랬다.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녀는 환자들에게 위안을 주었으며 결코 과잉진료로 돈벌이에 나서지 않았다.

무지한 백성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축내지 않고 꼭 필요한 진료와 치료만 했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했고 그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여겼다. 그것을 말수는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때로는 좀 더 야무지게 일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을 불평했으나 천성이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돈을 더 받을 수 있는데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때 그녀는 야무지지 않다고 말수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물러터진 것이 용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아가려는 힘을 그녀는 고삐를 잡고 뒤로 잡아 당겨 균형을 맞추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용희가 없는 삶을 말수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말수는 나도 천성이 있고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용희라고 다를 게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큰 틀에서 둘은 사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말수는 정치에 조금 기울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그 자신의 운명만큼이나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늘 새로운 환자를 맞는 것 만큼이나 신기했던 것이다. 열세인 공산당과 우월한 국민당이 손을 잡으면 될 일을 그들은 잡았다, 놓았다하면서 서로 견재했다.

공동의 적인 일본군 앞에서도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싸우는 상황을 말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조선말의 조정 회의에 단 한 번만이라도 참석했더라면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직 정치가 무엇인지 정권을 잡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일본은 끈질겼고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세계의 어떤 나라도 힘에 겨울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일본은 중국 전체를 노리고 있었다. 아직 전부 다 삼키지는 못했어도 야금야금 전진해서 한 뼘씩 늘리는 그들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중국이 뚫리면 러시아도 위험하다. 여기까지 말수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조선독립군의 실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연 진격하는 일본군이나 방어하는 중국군만큼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을까.

조선독립군은 누가 지휘하고 그들을 막후에서 조종하거나 지령을 내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수는 한 발짝 더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포목점집 주인 남자가 퍼득 떠올랐다.

그라면 실체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는 독립군과 연계돼 있을 것이고 그 연계선을 따라가면 마침내 최종 종착지는 아니더라도 중간  기착지 정도는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도착역에 서면 말수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더 뚜렷하게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다. 

포목점집 주인은 그러나 완벽히 신뢰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은밀하고 조용히 진행되어야 할 독립운동을 너무 쉽게 발설한 것이 말수는 못내 아쉬웠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알고 그리 쉽게 입을 열 수 있었을까. 내가 아니고 일본 정보통의 끄나풀이었다면 그가 알고 있는 독립군은 심각한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그는 좀더 세밀했어야했다. 

배가 나온 것도 불만이었다. 그것은 쉽게 뛰는 외모였다. 다들 마른 체형인데 그만이 앞으로 배를 내밀고 걷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 남자는 지휘관의 자격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좀 더 빨리 달려 숨을 수 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걸죽한 목소리는 명령을 내릴 때 위엄을 실을 것이고 부리부리한 눈매는 거절하지 못하는 엄명 같아서 부하들은 죽어라 싸울 것이다.

그래, 이번 주말에 그쪽으로 한 번 가보자. 다른 볼 일 때문에 들른 것처럼 해서 만나면 그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말수는 그런 생각을 하자 목요일 밤이 길게 느껴졌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에 횡 하니 병원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길은 내린 눈으로 하얗게 변했으나 일부 녹은 곳은 시커멓게 지저분한 자국을 남기도 있었다.

말수는 용희처럼 열린 문을 닫지 않았다. 일층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층 창문의 틈으로 들어오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병원 전체가 금세 기온이 뚝 떨어졌다.

용희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창가로 갔다. 창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 밖을 한 번 더 내려다봤는데 그 때 말수가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구부정한 어깨로 고개를 약간 숙인 뒷모습이 틀림없는 말수였다. 저이가 어디로 가지. 아직 문닫을 시간은 아닌데. 용희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는 병원 문간에서 말수를 불렀다.

'여보, 어디가요.'

말수는 두 세 걸음 더 걷다가 다시 불러대는 용희의 목소리를 그 제서야 제대로 들었다는 듯이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알았다는 뜻이었고 바로 병원에 들어갈테니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용희는 말수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병원 안에 있는 것보다 밖에 이렇게 서 있는것이 되레 덜 추위를 느꼈다.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자 용희는 자신도 몇 걸음 더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직 밟지 않은 눈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었다. 죽마을에서 곧잘 하던 버릇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이 오면 용희는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자신의 짚신 자국을 여기저기 남기면서 좋아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찍을 새로운 눈도 없었을뿐더러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용희는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뗐다. 중요한 서류에 인감 도장을 찍었을 때처럼 마음을 졸였다.

끌여오기 전해에는 고무신을 선물받았다. 너도 이제 처녀가 됐으니 고무신 하나는 있어야지. 엄마가 자신의 살보다 더 뽀얀 고무신을 내밀었다. 뜻하지 않은 고무신을 받은 용희는 고맙기보다 이 비싼 것 때문에 우리 집 살림이 어려워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품에 안았을 때는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는 아무때나 그것을 신지 않았다. 평소에는 짚신을 신다가 정말로 특이한 날에는 찬장에서 그것을 꺼내 신었던 것이다.

고무신. 그녀는 눈자국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다. 고무신 자국과는 달리 구두 밑창에는 이렇다 할 문양이 박혀 있지 않았다. 밋밋했다. 고무신에는 세로로 물결치는 멋진 모양이 뒤축은 물론 앞에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구두는 그냥 일자였다.

네모난 뒤축과 발자국 모양을 따라가는 형태였다. 구두를 신고는 눈길을 걷지 말아야지. 그때 뭘 그렇게 봐, 넋을 놓고. 그 사이 말수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벌써 왔어요. 어디 간거예요.'

용희가 대답대산 말수를 채근했다.

'먼저 말하면 대답하지.'

'그냥 눈 위에 찍은 발자국을 보는 것 뿐이죠.'

'나도 그냥 조금 걸었을 뿐이야.'

말수가 용희의 말을 따라했다.

용희가 일어서자 말수가 용희의 어깨를 조금 감싸 안으면서 병원 안쪽으로 몸을 밀었다.

'이번 일요일에 포목점 집을 가볼까 해.'

'같이 갈까요.'

'아니. 그냥 나 혼자. 다른 볼일도 있고 해서 그냥 들러볼까 해. 지난번에 치료비도 넉넉히 주고 갔고 옷감도 가져왔으니 만두라고 사서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잘 생각했어요. 그럼 저는 당신 올 때까지 그 노래 연습하고 있을게요.'

'그 노래?' 

'있잖아요. 독립군간가 하는 그 군인들이 부르는 노래말이에요.'

'어, 그래. 아직 익힐 시간이 부족했지.'

말수는 얼버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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