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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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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다
  • 의약뉴스
  • 승인 2022.09.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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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알 수 없는 곳으로 말수는 걸어가고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어서 걱정이 됐다. 누구나 처음 가는 사람이 갖는 두려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구름 위 같기도 했으며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가고 있는 그곳이 정확히 어떤 곳이며 무엇 하는데 인지를 알고 싶었다.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바로 그 사람, 중년에 이마가 좁고 하관이 발달 된 뿔테 안경 너머의 그 사람. 말수는 보통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기운을 떠올리면서 이봉창이나 윤봉길 같은 사람의 배후가 그 사람은 아닌지, 그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배를 위아래로 누르고 압박하면서 느꼈던 작은 반동과 그 반동뒤에 오는 어떤 강한 의지 같은 것으로 뭉쳐진 그 사내의 정체가 말수는 궁금했다. 

독립운동의 뿌리이면서 기둥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자신이 가는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곳은 구름 위도 검은 지하의 세계도 아닌 바로 발을 딛고 있는 땅 바로 이곳이었다.

이곳에서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말수는 그들 사이로 끼어들지는 못해도 멀찍이서 그들이 가는 모습은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 틈새에 끼어들어 가서 그들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기에 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저질렀던 살인이 떠올랐다. 불을 질렀던 기억을 꺼내 들었다. 거센 파도에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통영 먼바다의 조각배를 그리워했다.

태평양 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 발파 작업으로 무너져 내린 흙더미 깔린 그때에 이르러서는 몸을 떨었다. 얼떨결에 의사가 되고 살려 달라고 목을 부여잡으면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던 젊은 병사의 뒤 집어진 두 눈이 실루엣처럼 눈 앞에 어른 거렸다. 

살인에 방화에 뱃놈에 노무자에 의사에 도망자에 온갖 풍상을 겪은 자신의 그림자가 자전거 바뀌처럼 빙빙 돌아갔다. 이마가 좁은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도 더 험난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말수는 침착했다. 덤벙대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고 그것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운명에 맡겨야 할 것이다.

피할 수도 피하려는 노력을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다고, 그렇게 부산을 떤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말수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운명 말고는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느때보다 심장의 고요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용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말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운명을 부여 잡았다.

그것말고는 그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포목점 주인과 조선독립과 중년 환자의 치료는 어떤 끈으로 연결됐고 그 끈의 일부를 자신이 잡고 있다고 여겼다.

잡은 손을 놓을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고 그대로 잡고 놓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러나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잡았다면 잡은 그대로 놔두고 싶었다.

바람이 불어 잘리면 잘리는 것이고 더 큰 줄이 와서 강하게 엮이면 엮이는 것이었다. 누가 잡아끌면 끌리는 데로 가면 그뿐이었다. 용희는 상해의 삶도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태평양의 먼바다에서 이곳에 도착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했으나 이곳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정해진 운명으로 해석했다.

파도가 밀려오면 밀려오는 대로 썰물에 빠지면 빠지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이다. 과거보다 더 나빠질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오지도 않은 어려움 때문에 미리 고뇌에 빠져서 허둥댈 필요가 있을까. 없다.

용희는 그렇게 물었고 그렇게 대답했다. 용희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원래 태생이 부지런했으나 남는 시간은 영어와 의학 공부로 피아노와 기타로 그리고 운동으로 시간을 채웠다.

환자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몸으로 대하기 위해서 추가한 것이 운동이었다. 그녀는 병원이 순조롭게 운영되면서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알았다. 무게도 늘었고 뱃살도 나오려고 한다.

말수는 임신했어? 그런 거야? 하고 배를 눌러가며 핀잔을 주었다. 그 말은 싫었다. 그래서 한 번은 애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알잖아요. 하고 진지하고 말했다.

울 듯한 용희의 수심 어린 얼굴을 보고 말수는 그 이후로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되레 용희가 그 말을 상기시켰다. 말수는 이미 아랫배의 일부가 쳐졌다.

당신이 임신했으면 좋겠어요. 아니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말수는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했던 말에 상처를 받았을까 봐 안심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용희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병원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틈틈이 군인들이 했던 것을 따라했다. 구보는 장소 상 하기가 어려웠다. 벌칙으로 가해졌던 엎드려 뻗쳐나 앉았다 일어서기의 반복, 오리걸음 걷기 등으로 하체를 단련했다.

여군 납셧네, 입대할 거야.

말수는 용희가 취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칭찬인지 농담인지 한마디 했다. 그래요, 의사가 아니었으면 여군이 됐을 거예요. 용희가 씩씩하게 받았다.

그러면서 당신 뱃살도 집어넣어야지요. 옷감이 많이 드는 거 내가 싫어 하잖아요. 싫어하는 건 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럼 시키는 데로 따라 하세요. 이 방법이 최고예요. 그래야 날 밤을 세워 수술 해도 지치지 않아요.

용희는 운동을 자신들의 직업과 연관시켰다. 말수는 그런 용희가 대견했고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불평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맹세 플러스 평생을 옆에서 지켜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리 와요, 오늘은 삼 십개만 해봐요.

말수가 용희 옆에서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하나 둘 셋 넷...

숫자 십 삼에서 말수는 배를 땅에 깔고 엎어졌다.

그도 한때는 오십 개는 식은 죽 먹기였다. 군함의 갑판 위에서 군인들을 따라 그는 쿠샵을 했었다. 노가다로 잔뼈가 굵은 그가 군인들보다 체력이 약할리가 없었다.

그물 한가득 올라오는 물고기를 뱃머리로 끌어 올리던 힘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우리 매일 반복해요. 내기 어때요. 지는 사람이 업어 주기로요. 퍼대기도 있어요.

퍼대기?

말수가 반문했다. 포목점 주인이 선물로 준 걸로 뚝딱 만들 수 있어요.

말수는 웃었다. 이번의 웃음에는 어떤 쓰라린 것이 담겨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탄을 그런 식으로 넘어 가고 있는 용희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당신이나 열심히 해요.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말수는 그러면서도 열 개를 더하고 일어났다. 용희가 옆모습으로 보니 그의 팔뚝에 붙은 가느다란 근육이 움찔거렸다.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그러기 전에 근육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

용희는 말수가 따라주는 것이 고마웠다. 싫은 것이라도 말하면 들어 주는 척하는 사람이 말수였다.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도 당장은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만큼 말수는 용희를 배려했고 그 마음을 용희를 알고 있었다. 나이 차가 나고 그녀의 과거를 그가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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