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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조선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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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9.0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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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일지 빨리 만나고 싶어 했으나 정작 만나고 나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조금 실망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용희가 만남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있지 못한 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기를 바랐던 게 너무 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말수도 썩 좋은 대화는 아니었다고 여겼다. 용희처럼 무엇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만남에 대한 만족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낯선 곳에서 조선말로 그것도 고향 보령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이번 포목점 주인과의 대화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살붙이 하나 없는 타향에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애초 그들과 우리는 다르고 앞으로 가는 길도 다를 것이니 너무 정을 많이 주지도 그렇다고 아주 무시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곳이 좋겠다.

굳이 정기 모임을 한다면 한 달은 너무 짧고 한 달 보름 정도가 적당한 것이다.

말수와 용희는 서로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병원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그런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서로에게서 확인하고는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곳에 들어서자 둘은 위험한 곳에서 빠져 나온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관심조차 거둘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상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는 일어 설 수 있는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았다. 환자가 없는 한가한 시간은 이렇듯 새로운 기분이 두 사람을 감싸고 돌았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 때로는 음악에 빠지고 공부에 빠지고 돈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어디서든 그것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말수는 흥얼거렸고 용희는 박자를 맞추었다. 라디오는 그 시간에도 전황을 전하기에 바빴다.

일본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라디오 속의 남자는 흥분된 목소리로 전했다. 다른 소식통 들과 마찬가지로 대일본 제국이 승승장구 있다. 그러나 모두 진실을 아니었다.

그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말수는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전하는 사람의 목소리나 어떤 단어 하나만으로도 유리한 지 불리한 지 알아 맞출 수 있었다.

라디오의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불러주는 대로 마이크 앞에서 읽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말수처럼 본능이 발달해 있었다.

전쟁은 그 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말수는 팔뚝을 쓸어 내렸다. 피부가 감지하는 느낌은 일본의 패주였다. 상해나 만주 혹은 북경의 분위기도 일본 이후를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초조한 자와 쫓기는 자는 얼굴에 나타난 그 표명을 감출 수 없고 말수는 환자를 보는 노련한 의사답게 진단을 제대로 내리고 있었다. 정보에 밝은 고위 관리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송을 열심히 듣다보면 새로운 구체적인 전황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가 있다. 어디서 얼마만큼 진격했고 적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라고 말할 때가 진실을 가려내는 중요한 잣대가 됐다.

어느 날 부터 방송은 적들의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내놓은 것을 주저했다. 전선이 어디쯤에서 형성되고 있고 며칠 후에 정한 곳을 점령한다는 말도 사라졌다. 이것은 결코 일본군이 아닌 적들에게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의 증거였다.

말수는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아직 확정 하지 못했다. 누가 승자가 되든 아직 모르는 것은 너무 많았고 알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다.

일본의 패망이 하나의 지표가 될 수 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신상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포목점 주인에게 처음 들은 조선 독립군의 실체에 대해서도 놀랍기는 했지만 큰 동요는 없었다. 대기실의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수군대고 있었고 자신이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것을 서로 주고 받았지만 그 이후에 자신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변할지에 대해서는 상상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대개는 만주까지 장악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밀린다고 해도 이곳 육지에서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은 그래서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다.

말수도 그런 여론에 동조했다. 한 눈은 전쟁에 두고 다른 한 눈은 환자에게 두면서 말수는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현재를 즐기면서 삶을 꾸려나가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환자들은 꾸준했다. 병원 걱정은 덜었다. 개업할 때 빌린 돈은 육 개월 만에 거의 다 갚았다. 의료기기 값으로 남은 것은 한 해를 넘기지 않은 정도이다. 재촉했다면 당장 처리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현금은 풍족했다. 가난한 환자나 부자나 모두 현금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간혹 외상을 하기도 했으나 떼일 염려는 거의 없었다. 시간의 문제였지 한 달 후라도 그들은 반드시 값을 치렀다. 용희의 피아노 실력은 점점 늘어갔다. 기타 솜씨도 이제 코드를 잡을 만큼 익숙해졌다. 말수는 그런 용희가 대견스러웠다.

도대체 못 하는 것이 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둘은 행복했고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언제 무엇이 들이닥쳐 병원을 그만두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은 그런 걱정은 없었다. 닥치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체득한 경험이었다.

말수는 성질이 점점 더 죽어갔다. 어디서든 화를 내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다. 목소리가 커질 때도 스스로 억제했다. 통영 뱃놈은 천성이 바뀌지 않는다는 성현들의 말을 거부했다.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다. 천성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수는 자신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아주 드문 예외적 상황을 말수가 만들었다.

그런 말수가 용희는 엄청난 인간으로 보였다. 이처럼 서로는 서로에게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힘을 발견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서로를 밀고 당기고 있었다.

말수는 한동안 아기 이야기기를 하지 않았다. 전쟁통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고 아이들 역시 죽어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차마 우리 아이를 낳자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용희는 그런 말수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술을 좋아했다. 한 마디로 술 맛을 알았다. 아무 술이나 먹지 않았다. 혀에 감기는 달콤함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느끼는 진짜 술의 의미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빠져 들지 않았다. 작심을 하고 먹어도 적당한 선에서 딱 그만두었다. 더 먹으면 취하고 취하면 혀가 꼬부라지고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말수는 알았다.

당겨지는 그 기분이 좋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그것은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말수는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러기 전에 잔을 엎었다.

누구도 그의 그런 태도를 비웃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면 내일 아침에 수술이 있다고 말하면 두 번 다시 술을 권하지 않았다. 의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권하는 술을 마다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의사는 참 좋은 직업이야, 말수는 술자리를 빠져나오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옛날 뱃놈으로 돌아가서 쌍욕을 하던 거친 사내의 모습을 말수는 기억에서 지워가고 있었다.

그것이 지워진 다음 어느 것이 차지할지 아직 말수는 알지 못했다. 정말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그는 물론 용희도 답답했다. 죽을 때는 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지금 살고 있으니 그에게 어떤 목적이 있는지 용희는 알고 싶었다.

당장은 없다면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지? 같은 질문을 하면서 그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다. 용희가 그런 심란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간호사가 들어오면서 지난번 배 아픈 환자가 다시 찾아왔다고 말했다.

용희는 그 환자가 맹장 환자라는 것을 바로 기억해 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포목집 주인장이 한 말 때문이었다.

‘그 환자가 다시 오면 잘 해 주시오.’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긴 것은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고 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독립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용희 앞에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전해 들었을 때 용희는 아차 싶었다.

말수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조선이 독립되거나 독립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맹장이 의심스러운 환자는 독립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포목점 주인이 간혹 자금을 지원한다는 연락책인지도 몰랐다.

이번에도 그 환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한 명은 젊은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늙은 여자였다. 전에도 함께 였던 젊은 남성은 그와 함께 일을 도모하는 사람일 것이고 늙은 여자는 어머니 정도로 추측됐다.

남자는 침대에 누웠다. 말수는 오른손으로 배를 이리저리 문질렀다. 촉진으로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약을 먹은 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아프지도 않았고요.’

배를 문지르는 의사의 손길을 느끼면서 환자가 말했다. 그는 중국말을 했다. 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인 것을 확신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유창한 중국어가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순간 그는 그가 조선인인 것을 알았다. 그가 조선 환자인 것이 분명했으나 말수는 조선말로 대꾸하지 않았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환자는 덧붙였다.

‘수술하지 않을 수만 있으면 하지 말아 주시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꼭 그렇게 해달라는 듯이 두 눈에 부탁한다는 간곡한 호소를 담았다. 늙은 여자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하찮은 수술이라고 하더라도 배를 째고 하는 수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수술하면 입원해야 되고...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시간이 없거든요.’ 남자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일시적 복통이 아닐까요, 의사 선생님?’

그가 반문하면서 말수는 쳐다봤다. 대답 대신 말수는 배를 이리저릴 쓸어보고 눌러보고 밀쳐보고 잡아 당겨보는 것을 계속했다.

맹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급체했다가 회복됐을 것이다. 말수는 이번에는 일주일 치 안정제를 처방하고 아프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좋다고 확정적으로 말했다.

남자는 안도한 눈 빛을 보이면서 어느 새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앉았다.

‘의사 선생, 잘 치료해 줘서 고맙소.’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혹시 조선사람 아니냐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상대가 무안하거나 놀라지 않을 정도로 지나가는 투로 말했으나 거기에는 너는 조선사람 맞다라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꼭 우리 고향 사람 같아서 말이요.’

고향? 말수는 속으로 고향이라고 되 내었다.

말수는 대답 대신 선생님은 중국 사람 아니신가요?

‘맞아요. 중국인이오. 연변에서 오래살다 3년 전에 상해로 왔지요. 그 전에 우리 아버지는 북간도에서 살다 함흥에서 결혼했고 평양이나 경성에서도 살았어요. 그래서 조선 물정을 훤히 알지요.’

남자는 하지 말아도 될 말을 부지런히 주어 삼켰다. 친근감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선사람끼리 잘해 보자는 자기만의 방식이었는지도.

늙은 여자는 맹장은 아니지요? 하고 두어 번 더 물어보았다. 자신보다도 자식이 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신발을 신은 환자는 실내를 유심히 바라봤다. 천장이며 복도며 삼층으로 가는 계단 등이 그의 눈에 박혀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말수는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숱한 전투 경험과 전선에서 쏟아져 나오는 환자와 일본군의 진료 과정 등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읽었고 사람의 관상을 살폈다.

작은 상처에도 어두운 그림자의 환자는 죽어 나갔고 큰 부상인데도 환한 얼굴은 살아났다. 치료의 기술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얼굴에 나타난 관상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했다.

말수는 남자의 관상에서 어떤 빛을 보았다. 보통 사람에서는 찾지 못하는 빛이 강하게 얼굴을 관통하고 있었다. 특히 좁은 이마에서 시작해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넓어지는 하관에 이르면 빛은 더욱 커졌다.

저 사람은 어려서는 죽을 고생을 하고 힘든 여정을 보냈지만 커 갈수록 큰일을 해낼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다고 말수는 생각했다.

그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지금 말수는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영원히 그래도 문제없다. 그러나 조선사람이냐고 물었을 때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포목집 사장도 맹장이 의심되는 환자를 언급했다.

조선사람, 그래 조선사람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게 달라지는가.

용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내과는 용희 담당이었지만 남자는 용희에게 보이기보다는 말수가 봐주기를 원했고 말수도 용희에게 환자를 떠밀지 않았다.

용희가 한마디 했다.

‘하루 세 번 복용 잊지 마세요. 열흘 정도 지나도 이상 없으면 괜찮을 겁니다.’

그는 말수가 했던 말을 되풀이 하면서 환자를 안심 시켰다. 남자는 용희를 안 보는 척하면서 한 번 보고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용희도 그 남자를 보았다.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혔으며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용희도 그가 조선 독립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환자들이 떠났다. 젊은 남자가 계산을 했다. 그리고 한 삼십 분쯤 지났을까. 서너 명의 일본 순사들이 의사 양반을 찾는다는 사환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말수도 듣고 용희도 들었다. 둘은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실 쇼파에서 그 환자에 대해 잠시 각자의 느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행이야, 난 급성 맹장인줄 알았거든.’

‘저도 그랬어요. 그 정도로 아파한 경우는 배탈과는 다르거든요.’

‘어쨌든 잘 일이야.’

이런 이야기 중이었다. 사환 애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을 타고 오르는 둔탁한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말수는 소리만 들어도 계급장까지 알아 맞출정도로 군홧발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군인이 아니고 순사들이었다.

초급 순사 한 명과 순사부장이 앞서 들어왔고 두 어명이 뒤따라 그들 뒤에 섰다.

‘당신의 이곳 의사요.’

‘그렇소이다.’

‘어디가 아파서 왔나요.’

‘내가 아픈 게 아니고 아픈 환자 가운데 수상한 자가 여기 병원에 왔다는 첩보를 받았소. 입원 환자 가운데 4, 50대로 보이는 남자 환자 있소?’

말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아니 없소 하고 말했다.

‘그럼 외래 환자 중에 그런 환자는 있소.’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소.’

‘가장 최근에 온 것은 언제요.’

용희는 말수를 쳐다봤다. 말수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수가 말을 꾸며대면 자신도 거기에 맞춰야 했다.

‘있었소. 바로 전에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환자가 다녀갔어요. 복통 때문이라고 왔는데 어디 멀리 간다면서 한 달 치 약을 달라고 했소.’

‘멀리 간다고.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소.’

‘그 말은 듣지 못했어요.’

순사부장이 용희를 힐끗 보더니 이내 소리를 내면서 병원 복도를 두어 발자국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그자가 이 자인가요? 그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 영락없이 바로 조금 전에 다녀간 환자였다.

‘아니오, 이런 사람 아니었어요.’

‘그 사람은 안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리고 머리도 이보다는 길었고 눈매도 이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순사부장은 사진을 용희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이 자를 본 적이 있어요?’

용희는 순간 망설였다. 틀림없이 조금 전에 왔던 바로 그 남자였다.

‘아니요,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입원 환자라면 익숙하겠지만 잠시 왔다가 가는 환자들은 일일이 다 기억을 못해요. 더구나 방금 왔다 간 환자는 안경 없는 맨얼굴이었고 머리도 제법 길었어요.’

‘머리야 자르면 되고 안경이야 벗으면 되고.’

순사부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는 그가 아니라고 단정 짓지 못한다는 투였다. 얼마든지 변장할 수 있고 변장의 수준도 매우 낮다고 보았다.

그는 돌아서다가 다시 원래로 돌아와서는 ‘의사 양반, 도쿄에서도 경성에서도 훌륭한 의사였다는 소리 들었어요. 그리고 일본 장교를 여럿 살리는 의술을 보여 줬다고 상부에서 기록한 것도 보았어요. 대일본제국이 지금 전쟁 중인 건 알지요?’

말수가 대답 없이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런데 조선이 말썽이요. 조센징이 감히 독립한다고 나대니 말이오. 한 몸으로 뭉쳐 일본, 중국, 조선이 한 몸으로 뭉쳐 적들과 싸워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오.’

그가 마치 독립운동가를 앞에 두고 있기나 한 듯이 말수를 보고 나무라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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