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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그 분 오시면 치료 잘 해주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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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 오시면 치료 잘 해주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9.0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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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끊어져 한동안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찾아보기도 했다. 논밭 사이로 난 길은 대개 이랬다. 누런 황포강을 따라가다 익어가는 벼를 보았다.

지금쯤 고향 죽마을에도 황금 물결이 일겠구나, 용희는 감회가 새로웠다. 말수도 그 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둘은 그런 강물과 그 같은 들판을 바라볼 뿐 상념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대신 부부는 손을 잡았다. 부부가 손을 잡고 하는 드문 외출이었다. 논길을 벗어났다. 서양식 집들이 웅장하게 다가왔다.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용희가 본 그런 건물들이었다.

힘이 나고 있는지, 익숙해서 인지 용희는 작은 것 하나에도 관심을 보였다. 얼굴은 환한 표정을 내내 유지했고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잡초에서 눈길을 주었다.

말수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 저도 기분이 좋은지 길가의 강아지풀 하나를 꺾어서는 용희를 간지럽혔다. 용희가 그런 말수의 손을 잡고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겉옷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 상태로 둘은 큰 길을 돌고 돌아 일본인 마을을 지났다. 한인촌이라고 해보아야 일본인 촌에 비해 초라했다. 몇 가구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모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듯했다.

포목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가게 앞에 내놓은 물건을 보고 용희는 목적지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말수가 손가락 질을 하면서 저 집이오 하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용희는 화답했다.

포목점 집 주인은 비대했다. 바짝 마른 사람 천지인 세상에서 뚱뚱한 몸은 곧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는 배를 앞으로 내밀고 파리채를 들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날고 있는 파리가 앉으면 그때 내리치려는 준비동작이었다.

'곽문영 선생아니시오.'

말수가 말했다. 그가 의사 선생님 오셨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손에 잡은 파리채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가게는 제법 컸다.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 여자가 반갑게 맞았다.

바깥양반에 비교해 보면 체구가 작아서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일 다 의문 투성이지만 남녀 관계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똑바로 뜨고 용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손님을 대할 때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슬쩍 웃는 웃음을 지었는데 보통 여자 이상의 어떤 품격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용희는 단박에 자신이 그 여자와 서로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면서 지나갔다. 그 중 한 애를 보고 여자가 이름을 부르며 손으로 까불렀다.

7살쯤 되보이는 사내아이가 조금 더 놀겠다며 들어 오기를 거부했다.

'그래 알았다. 조금만이야, 아주 조금.'

그녀는 그 말을 하고 용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들이 씩씩해 보여요.'

'아주 말썽 꾸러기입니다.'

'저 애가 맏인가요?'

'아유, 아니에요.'

여자가 크게 손사레를 쳤다.

'외동아이가 철이 없어요.'

용희는 말수에게서 이 집 애들이 셋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외동아들이라니, 뭔가 잘못됐나.

'셋 이라고 들었는데...'

'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사촌 아이들이예요.'

'그렇군요.'

용희와 여자가 이런 말을 주고 받을 때 말수는 주인 남자와 술잔을 마주 하고 앉았다. 가볍게 한잔 하자는 것이 두 어 순배 돌았다.

'가을 볕이 따뜻하니 술이 술술 넘어갑니다. 의사 선생, 지난번 잘 치료해 줘서 고맙소.'

'별말씀을요.'

'그런데 선생은 조선인 맞지요? 일본인 같지 않아서요. 조선말을 아무리 잘해도 토박이 아니면 조금 표가 나거든요. 다 알아요. 조선 사람은 이국땅에서는 얼핏 봐도 알아요.'

'그래요?'

말수는 허허 웃었다. 조선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일본인을 고집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태어나기는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른 나이에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이라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일본과는 연관이 없은 토종 조선인이라고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조선인들은 독립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여요. 아무래도 왜놈들이 점령한 조선 땅에서 보다는 수월하지요.'

그는 말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를 조선인으로 확신했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눈에는 왜놈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말수는 눈을 반짝였다. 초면이라고 해도 될 만한 사람에게 이런 말들은 앞서나가도 한 참 앞선 것이다.

'조선 독립을 위해 운동을 한다고요? 간혹 그런 신문 기사는 봤지만 직접 듣기는 처음이요.'

'그럴 거요. 일본 순사들이 나, 조선 독립하는 사람이오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을 그대로 두겠어요?' 

남자가 반문을 하면서 의사 선생은 조선인이 분명하다고 말뚝을 박았다. 말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에서 죽 자란 조선사람이라고 말했다.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말수의 과거를 알고 싶어 했으나 그는 고향이 통영이라는 것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경성에서 병원을 차린 것 정도만 이야기 했다.

'아, 그 애기는 지난번 슬쩍 했잖아요.'

남자가 핀잔을 주는 듯한 모양새를 지으며 사모님은 보령이구요. 하면서 알은체를 했다. 제가 홍성이라고 애기했지요.'

말수는 멋적었다. 그런 대화를 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면 선생은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알겠어요?'

말수가 화재를 돌리기 위한 질문을 했다.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파리채를 탁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몸은 비대했으나 순간 놀림은 빨랐다.

오후의 햇볕에 인근 생선가게서 나오는 비린내를 맡고 포목점까지 온 파리 한 마리가 그 순간 사라졌다.

그가 죽은 파리를 파리채 끝으로 털어 냈다.

'어쩌다 만나기는 해요.'

그러면서 그는 손가락의 엄지와 검지를 말아 원을 그리고는 쑥스러운 듯 곧 풀면서 돈이 좀 들어요,하고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운동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지요.'

그가 자신이 그런 일에 돈을 대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을 말수는 알았다. 아까 나갔던 아이가 엄마를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 들어왔다.

'녀석, 아주 말을 안들어서 골치 아파요. 공부 대신 노는데 정신이 팔렸으니.'

'애들 다 그렇지요. 공부는 커서 해도 늦지 않아요.'

말수는 아빠보다는 아이 편에 서서 못마땅한 눈을 여전히 뜨고 있는 주인 남자에게 말했다.

'나머지 애들은 어디 갔어요?'

말수가 물었다.

'나머지라니요.'

주인 남자가 여자와 같이 말을 받았다.

'아들 하나 낳고 영 들어서진 않아요. 두어 명은 더 낳고 싶은데.'

남자가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말수는 아이가 하나라는 말에 자신이 세 명이라고 판단한 것은 넘겨짚은 것이라고 용희에게 설명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애가 부모를 닮아 잘 생겼어요.'

'아이고 의사 선생, 그런 말 마시오. 나만 닮거나 지 엄마만 닮았어도 좋을 텐데.'

어디서 저런 애가 났는지 원, 하면서 남자는 아이를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정말 그래서 그렇기보다는 다른 사람앞에서 자식 자랑하는 것이 못난 아빠라는 생각 때문에 일부러 낮게 말하고 있었다.

말수는 그것을 좋게 보았다. 믿도 끝도 없이 자식자랑하는 남자나 부인네를 보면 팔불출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이 집 주인은 비대하고 쉽게 말하고 자신을 다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말수는 환자를 대할 때의 긴장감을 놓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따라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마셨다.

'의사 선생, 다음에는 우리 다른 사람도 함께 어울려 마십시다.'

'그러지요.'

말수는 쉽게 대답했다. 다른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입이 근질거리는지 포목점 주인이 먼저 말했다. 속에 든 것을 뱉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독립운동을 하는지 아니면 심부름을 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쪽과 관계된 사람인데 간혹 물건을 사러 우리 가게에 와요. 고향도 광천이라고 해서 다른 조선인에 비해 정이 조금 더 가기는 해요. 물건값을 후하게 쳐주는 편이에요. 같이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요.'

말수는 그렇군요,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잠시 말이 끝기자 남자는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말수 앞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내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오 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말수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고급 군인 양성소로 그곳 출신들이 일본 고급 장교로 빠진다고 했다. 간혹 조선인들도 들어가고 중국인들도 들어갔다 나와서는 다들 제 몫을 했다.

'내가 그곳 출신이라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을 외면 못해요.'

그가 물러나면서 옆에 두었던 파리채를 들었다. 그곳 출신이면 출세한다던데...말을 하다가 말수는 아차 싶어 그만 두었다.

'왜 포목점 사장은 출세하고 거리가 먼가요?'

'그런 뜻이 아니라...'

말수가 또 말을 머뭇거렸다.

'돈이 제법 돼요. 그리고 무엇보다 장사는 편해요. 관리가 되거나 군인질은 전쟁 통에는 골치 아프거든요. 돈 벌어서 경성으로 돌아가야지요. 돈 벌어서 어서 한가한 남자가 되어야지요.'

남자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그럴 게재가 아니라는 듯이 한 삼 년은 더 고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자는 자꾸 술을 권했으나 말수는 더 먹으면 집을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말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크리스마스 전에 한 번 더 보기로 하고서.

따라 일어나면서 주인 남자가 손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면서 물었다.

'지난번에 그러니까 한 삼사일 전에 복통 때문에 어떤 남자가 병원에 들르지 않았어요?'

말수는 생각을 더듬듯이 잠깐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그래요, 남자 둘인가하고 왔는데 내가 보기에 맹장염 같은데 수술은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다음 주 월요일쯤 급성이 아니라면 방문할 거 같아요. 약을 삼일 치만 줬거든요.'

'아, 그 분 잘 치료해 주세요. 아마도 큰일 하시는 분 같아요. 저도 직접 만나서 얘기 하지는 못했지만 말은 많이 들었거든요.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그 분이 틀림 없을 것예요.'

거리는 멀지 않아도 논길을 걷다가 자칫 빠질 수도 있고 샛길로 가서 용희를 힘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는 말수는 올 때 보다도 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딱 마지막 잔이라고 하고 더는 먹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의사 선생은 좋겠어요. 나는 그러질 못하거든요. 멈출 때 멈추어야 하는데 꼭 더 먹어서 혼이 나거든요. 참 대단하십니다.'

'어, 이거 감당하기 어려운 칭찬인데요.'

말수가 너털웃음을 짓자 남자도 같이 따라 웃었다.

'잘 가시오 의사 선생, 어 제수씨도 잘 가시오. 다음에 올 때는 뭐 과일 같은 거 사 오지 마시고 그냥 오세요. 맛있는 거는 여기 다 있으니까.'

남자는 용희에게도 너스레를 떨었다.

다시 거리로 나왔을 때 말수는 용희 손에 보자기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주인 여자가 포목 몇 점을 끊어 줬는지도 모른다. 말수는 길을 잘못 들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걸었다.

'그 분, 오시면 치료 잘 해 주세요.'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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