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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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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7.01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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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 출근한 경시정은 당직 순사를 불렀다. 그리고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조선총독부에 전달할 순사부장의 참수 사건에 대한 보고서였다.

에이 포 용지 하나 분량의 간략한 것이었으나 거기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제목: 조선인 경부의 일본인 순사부장 참수 사건

내용: 조선인 경부 기미또 요시(천동휴)는 일본인 순사부장 아리수라를 일본도로 목을 내리쳐 죽였다. 상급자에 대한 모욕 행위와 누명 씌우기라는 제목으로 행해진 즉결처형이었다.

경부는 어떤 심문이나 반성의 기회를 주기도 전에 사살하기 위해 권총을 꺼내 들었으나 실탄이 없자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으로 위협을 느낀 순사부장이 도망치려 하자 그대로 목을 뱄다.

독립군 끄나풀인 휴의를 체포하거나 사살하지 못한 책임을 순사부장이 상관인 경부에게 물은 것이 발단이 됨. 순사부장은 휘하의 순사들이 모인 장소에서 삿대질을 하면서 경부를 모욕했음.

장소: 신의주 경찰서내 복도

일시: 1943년 11월 13일 오전 11시 30분경

결과: 정당방위에 의한 무죄

추신: 순사부장이나 유족에게는 안 된 일이나 전시라는 위급한 현실과 경부가 지금까지 쌓아온 개인 경력 등을 감안해 내린 결론임.

보고서 작성자: 신의주 경찰서 경시정 나시무라 기요꼬

경시정은 보고서에서 조선인 경부와 일본인 순사부장이라는 사실을 두 번에 걸쳐 정확히 명시했다.

유선상으로 보고하지 않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한 것은 경시정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문구였고 총독부도 그것을 눈치챘다.

경시정은 결과는 무죄였지만 조선인은 유죄라는 원초적 굴레를 씌워 후환이 생길 경우 용이한 처리를 위한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러나 경시정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목이 잘려나간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일등 사무라이도 하기 힘든 칼 솜씨를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경시정은 칼은 물론 총솜씨도 보통 이하였다. 은연중에 열등감이 드러난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쓰러지고 있는 몸을 붙잡고 몸과 따로 복도에 굴러떨어져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순사부장의 목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쓰려고 했으나 그만 두었다. 어쩐지 그것은 자신에 대한 치욕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휴가 창씨개명을 한 엄연한 일본인이지만 조선인이고 조선인이 일본인을 죽인 것은 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시정은 술집에서 맺은 도원결의를 생각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였다. 경시정은 순간적으로 스쳐간 동휴에 대한 증오의 마음을 거두고 형제애를 억지로 끄집어 냈다. 역겨운 일들은 도처에 널려 있는데 이런 일로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상황은 바뀌었다.

‘그래. 기미또 요시 경부는 내 동생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우리는 피로 맺은 형제간이다.’

형제를 떠올렸을 때 동휴의 죄는 완벽하게 용서됐다. 권력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총독부의 질책은 없었다. 그가 살려달라고 부탁하기도 전에 내린 결론에 대해 경시정은 만족했다.

경시정은 자신이 죽기 전에는 경부가 배신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는 이제 내 손안에 있다. 그를 살려 둔 것은 내가 사는 길이다. 경시정은 웃음으로써 자신이 내린 결정에 엄청난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 사건은 딱 이틀간만 떠들썩했다. 삼 일째 되던 날 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다. 새벽 사이렌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경찰서 내 무장병력은 일시에 신의주 기차역 인근의 한 마을로 긴급 출동했다.

트럭에 올라탄 순사들은 소총에 실탄을 장전한 채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첩보에 의하면 만주의 독립군 일당이 어제 신의주 기차역을 통과했다.

삼삼오오 노인이나 병약자 심지어 여성으로 변장한 무리는 대략 30명 정도로 일개 중대 병력이었다.

그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1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산을 타고 도주하면서 관공서와 일본 군경을 노린다는 것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경성의 조선총독부였다. 신의주 경계를 넘기 전에 완전히 제압하라는 상부의 명령에 경시정은 경부를 불러들였다.

‘일망타진하라. 그들이 시끄럽게 굴기 전에 싹 없애 버려.’

경시정은 작은 눈을 번득이며 짧고 강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위엄을 세우고 명령에 대한 확고한 실행을 다짐받기 위해서였다.

경시정은 독립군을 들판의 잡초처럼 생각했다. 낫질 몇 번으로 싹둑 잘라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부의 생각도 경시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라야 별 것 있겠는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급조된 병력이다. 더구나 보급로도 없다. 기습하고 매복하고 포위하면 한 달안에 작전을 끝낼 수 있다.

'보름안에 끝내.'

경시정은 그 말을 하면서 눈을 치뜨고 경부를 쳐다봤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투였다.

약속을 하면 기한을 따질 것이고 열 흘 만 더 달라고 요구하면 안된다고 잘라 말할 것이다. 어떤 대답을 하든 경시정은 경부를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경부의 대답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어라, 경시정은 속으로 이놈 참 대단하다,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그럴 줄 알았다. 네 놈은 확실히 달라. 아니 내 동생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하지.'

경시정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마음을 달리 먹었다. 그리고 자기의 그런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동휴가 바로 응답했다.

‘곧 출동하겠습니다.’

‘오케이. 꾸물거리지 말고.’

‘휴의는 가능하면 생포하고 여차하면 사살해라. 이번에도 놓치면 넌 끝장이다. 너의 끝장은 내 끝장이기도 하다. 알지?’

‘네, 형님.’

'지난번 실수를 만회해야지.'

경시정은 쐐기를 박듯이 막 출동하는 동휴의 등뒤에 총알을 박듯이, 말을 박았다.

실수가 순사부장의 참수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휴의를 놓친 작전의 실수를 말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둘 다 인지 동휴는 파악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것이든 실수라면 실수인 것이다. 실수는 만회하라고 있는 것이다.

경시정의 말은 틀리지 않고 맞다. 동휴는 돌아서서 다시 한번 경례를 멋들어지게 올려 붙었다. 군홧발이 착 부딪치는 소리와 손이 번쩍 올라가면서 내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동휴의 귀를 울렸다.

'반스시' 잡겠습니다. 맹세합니다.'

동휴는 최대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공손함으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발음이 새기도 했다. 그는 반듯이를 한 번 더 되풀이 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따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오로지 경시정에 대한 충성심과 적들에 대한 들끓는 분노만이 담겨 있었다. 자기가 당한 분한 마음을 반드시 풀고자 하는 욕심이 그런 마음을 자꾸 부채질했다.

‘맹세가 그렇게 좋으냐.’

경시정은 이번에는 동휴에게 들리지 않도록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문을 박차고 나가 실제로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해도 동휴가 알아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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