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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펄럭이는 깃발은 희미했으나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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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이는 깃발은 희미했으나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22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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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그치기도 전에 말수는 아버지, 하고 흐느꼈다. 다 울고 난 말수는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었다.

'아버지, 용희에요, 곽용희. 아버지의 못난 아들이 이렇게 잘난 색시를 데리고 왔어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돼지우리 쪽으로 눈부터 돌렸다. 제일 크고 튼실한 놈으로 잡아서 잔치를 벌일 생각에 입은 옆으로 벌어졌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 고생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소리내어 웃었다.

'어무니, 제 색시 어때유.'

'네가 골랐으니 오죽하겠니.'

그것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었다. 말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웃음도 그런 칭찬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상주도 없이 쓸쓸히 묻힌 아버지 모습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버지의 의처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타 죽은 사람의 이름 대신 허우대로 시선이 바뀐 것이다.

허우대가 죽은 자를 비난할 때 어머니의 눈이 자꾸 그쪽에서 멈추었고 이는 공격 빌미를 제공했다. 죽은 자를 욕하는 허우대의 기세에 거기 모인 마을 사람들은 전부 허우대로 눈이 기울었다.

어머니도 그런 것인데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는 눈이 돌아 간것은 그들이 이전부터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들이밀었다.

'말수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라.'

'네, 아버지.'

'네 엄마가 허우대와 만나고 있다.'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어제는 아니라면서요. 꿈 꾼 것을 착각했다면서요.'

'어디서 봤건 간에 본 것은 본 것이다.'

'아버지,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라고 내가 닦달하고 있다. 제 가슴이 찢어져 봐야 상대 마음도 안다.'

배를 타러 나가기 하루 전에도 아버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겨우 잠든 어머니를 깨워서는 어디 갔다 왔느냐고 다그쳤다. 신경쇠약에 빠진 엄마는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해. 아픈 곳을 찔리니 그렇지?'

아버지의 추궁은 집요했고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 옛날의 이말네는 어디로 간 거야?’

아버지는 비웃었고 의기양양했다. 꼬투리를 잡고는 자신의 말이 그럴듯했던지 옛날의 이말네가 죽고 없어. 하면서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했다.

말네는 어머니 이름이었다. 이말네, 말수는 조용히 어머니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마도 이번이 처음인가. 엄마 이름을 부른 것이.

말수는 하직 인사도 없이 새벽달을 보면서 집을 나섰다. 발걸음이 무거워 말수는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의처증이 마을에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늙은 어머니에 대한 모욕은 여기서 그쳐야 한다. 명예롭지 못한 일에 어머니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노망난 아버지가 추궁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끔 꿈에서 보인다. 꿈속에서 두 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나를 반기실까.'

'그럼, 당연하지.'

'많이 늙으셨지?'

'어, 그런데 돌아가셨을 거야.'

'왜, 그렇게 단정해.'

'내가 떠나올 때 그럴 거라고 직감했어. 꿈속에서도 이승을 떠난 걸로 보여. 장인, 장모님은?'

'살아 계실거야. 당신을 보면 춤을 출거고.'

'우리 용희가 시집 간다고?'

'조선 땅에서 제일 잘난 신랑을 데리고 왔다고 온 동네 자랑하고 다니시겠지.'

'그래, 고향에 가면 찾아뵙고 인사드리자.'

용희는 자신 못지않은 가혹한 운명을 안고 사는 말수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가 더는 상처 받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

말수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용희는 일 층에서 대기했다. 말수가 떠나자 벽돌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고 용희는 반사된 빛이 따가워 소매로 눈을 가렸다. 눈을 떴다 감았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니 주변이 눈에 익었다.

말수가 신호를 보냈다. 밖으로 나온 용희는 말수처럼 부서진 성당 벽에 몸을 기댔다. 아찔한 현기증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움직임은 없었다. 사방도 고요했다.

성당의 지하실이나 밖의 세상이나 고요한 것은 다를 게 없었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군인들과 트럭과 쏟아지던 폭탄들은 꼭꼭 숨어서 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둘은 서서히 걸었다. 패잔병 보다 더한 몰골로 더 힘이 없는 발걸음을 힘겹게 떼면서 어떤 단서라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부서진 탱크들, 뼈만 남은 시체들, 그것을 먹다 그 옆에서 죽어 같비뼈를 드러낸 개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었다. 얼마를 더 가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운동장이었다. 부서진 잔해는 학교 건물이었다.

운동장 한쪽에는 우물도 있었다. 먹는 물인지 확인하기 위해 말수가 힘겹게 두레박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물은 깨끗했다. 우물 속에 어떤 썩는 물질은 들어가지 않았다.

물 한 모금씩 마시고 둘은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은 여유가 있었다. 산은 작고 아담했고 시야는 멀리 까지 퍼져 나갔다.

둘이 앉아서 보는 풍경은 좋았다. 이 좋은 곳에서 살면 어떨까. 군인들이 없고 세상이 평온하다면 그럴 수도 있다. 잔해를 치우는 일은 시간이 걸려도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 둘만의 천국을 세우자.  아직 우리는 젊다. 스스로 생각해서도 그렇고 남이 봐서도 그렇다. 제발 이 섬에 인간의 발자취가 사라졌으면.

용희가 꿈꾸는 모습으로 하늘을 봤다.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 위에는 독수리 여러 마리가 원을 그리면서 어디로 내려야 할지 내릴 곳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말수가 어깨를 툭쳤다. 용희는 자신의 본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뭐, 내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어.'

제 딴에는 제법 재치있는 답변이라고 했으니 당신도 그런 말을 해봐라는 뽐내는 듯한 태도로 용희가 말했다.

'저기, 저기 봐.'

말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용희가 자신이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어떤 대답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용희는 멀리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다. 희미하지만 그것은 식별할만 했다. 성조기였다. 미국의 깃발이 펄럭인다. 본능적으로 용희는 말수의 복장을 확인했다.

일본 군복도 미군복도 아니다. 민간인 복장에 팔뚝에는 십자가를 단 민간 의사였다. 용희도 자신을 둘러 봤다. 왼쪽 팔에 단 붉은 열십자가 자신도 의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전쟁터의 피난민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어 아군은 물론 적에게도 불쌍한 존재로 인식될 것이 틀림없었다. 

의사 부부. 어떤 식의 시나리오를 써야 할까. 그들은 입을 맞추지 않아도 어떻게 처신할지 알고 있었다. 미군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투른 영어와 능숙한 일본어로 그들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그대로 말할 참이었다. 태생은 조선인이나 일본군에 의사로 끌려 왔고 전투 중에 성당 지하실에서 피신해 있었다고.

그것이 소중한 목숨을 지키는 지름길이었다. 이들은 살고자 하는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해 안전하게 미군들과 접촉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것은 쉽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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