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2-12-02 19:47 (금)
당장 베이징을 거쳐 도쿄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태바
당장 베이징을 거쳐 도쿄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5.15 0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후에는 남산을 올랐다. 천천히 걷다가 총독이 있는 경무국앞에서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유지가 있어야 할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저곳이어야 했다.

그녀는 꼭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참배를 했다. 그녀 말고도 신사를 향해 두 손을 모으는 일행들이 있었다. 그들의 정성만큼이나 점례도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두 손을 세우고 손끝을 입술 가까이 댔다.

그런 정성이 효과를 본 것일까. 유지에게는 좋은 일이 닥쳤다. 그는 떠나기 일주일 전에 점례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극적이었다. 사이판의 전선에서 조선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았을 때 유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이것이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내용도 마음에 들었고 그녀가 그린 삽화는 더 마음에 들었다. 유지는 웃었다. 모처럼 혼자 방에 들어가 크게 웃었다. 그가 살아서 여기를 빠져나가 할 이유가 보다 더 분명해졌다.

전선이 밀리고 있을 때 이런 짓은 무모했지만 유지는 그렇게 했다. 너무나 기쁘고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그림은 애초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볼수록 빠져 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당장 파리의 거상들이 서로 사려고 앞다투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유행을 따라가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체취를 점례는 화폭에 표현했다. 모방의 단계를 벗어나 확실히 자신만의 화풍을 가슴에 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조선 제일의 화가를 넘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될 것이다. 사람 볼 줄 알았던 유지는 자신보다 점례가 치고 나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했다. 아무렴, 괜찮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경쟁하면 서로에게 이득이다.

그런 확신이 유지를 웃음과 환호의 상태로 만들었다. 그림에서 눈길에 떼고 글자에 눈을 고정 시킨 유지는 그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양 껴안기 위해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쟁의 승리보다도 당신의 안위가 더 중요해요. 내게는.’

그 흔해 빠진 그래서 속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조국이니 명예니 천황이니 하는 구호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소중한 당신, 속히 내게로 와요.'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누가 시켜서 마지 못해 따라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진실된 것이다. 유지는 집단 체면의 광기에서 자신이 한 발 빠져나오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런 나를 비웃지 말아 달라고 점례는 호소했다. 아녀자의 속좁은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왜 내가 너를 비웃니?'

유지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 번 이해하고 말고.’

조국을 위해 산화하라고 했으면 편지를 찢었을지도 모른다. 유지는 갈수록 점례가 좋았다. 당장 만나서 못다한 회포를 풀어야 한다. 방에서 나온 유지는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이미 유지는 유지는 본국 철수를 명받고 상해로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의 짐이야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더 꼼꼼히 점검했다.

점례에게 줄 그동안 그렸던 삽화와 유화와 그녀에게 배운 자수 솜씨로 만든 흰 천에 그려진 자신과 점례의 모습. 자수를 뜰 때의 그 정성을 회상하며 그는 여전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가의 웃음은 물론 입에서 나오는 흥얼거림은 부하의 찾는 소리가 없었다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그는 곧 표정을 바꾸었다. 쏘아보는 눈빛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일이 틀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나 부하의 말은 지금 당장 베이징으로 가라는 본국의 명령을 신속히 수행하라는 전갈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곧 죽을 자 앞에서 살아서 돌아가는 자가 해서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겉으로는 표정을 엄하게 하고 속으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웃음을 감췄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유지는 하려고 했던 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편지를 행운으로 간직했다.

'그녀는 나에게 행운을 준다.'

그가 일장기를 단 검은색 군용 차량에 오를 때 유지는 여전히 냉혹한 표정으로 거두지 않았다. 웃음기 사라진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는 마지막 인수인계를 마친 후 그를 배웅하는 후임 장교에게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출발 전에 한 번 더 업무를 숙지시켰다. 못 미더운 표정을 지은 것은 자신이 떠나는 것은 신상의 안위보다는 더 큰 대업을 위한 것 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지의 다른 한 곳은 미안함과 자신만 사지를 벗어난다는 부끄러움도 있었다.

사실 유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죽으면 죽는 거고 그럴 때까지는 싸워야 한다는 젊은 피를 재우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진해서 최전방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해 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서서히 변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점례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아니 점례가 없었더라도 이제 그는 전선을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하고 실천에 옮겼을 것이다. 말하자면 점례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고 그는 불길이 잡히기 전에 어서 사이판을 떠나야 했다.

예술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충만했다. 그는 이미 수백 장의 삽화를 완성해 놓았다. 전쟁의 참상에 관한 것도 승리에 대한 환호의 순간을 기록한 것도 그 찰라를 예술로 승화하는 것도 모두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몫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았다. 그 즈음 본국의 아버지에게 유지는 긴급한 상황을 알렸었다. 그렇지 않아도 외아들이 언제 죽을지 몰라 노심초사했던 아버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이판 최고 사령부와 연락을 넣었다.

연락을 받은 사령부는 유지 장교에게 당장 베이징을 거쳐 도쿄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천황을 근거리에서 모시면서 일본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버지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그는 유지가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경성에 잠시 머물 거라는 연락을 받고 조선 여행을 결심했다.

그는 동생이 운영하는 화실도 구경할 겸 조선 나들이를 위해 5,6 명의 동행자를 꾸리고 조선길에 올랐다. 그가 조선에 도착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유지도 조선에 당도할 것이다. 부자는 재회의 순간을 기다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