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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베짱이(1891)- 올가 이바노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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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베짱이(1891)- 올가 이바노브나는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03.28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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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간혹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책이 끝나고 나서 등장했던 주인공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나름대로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미 상황이 종료됐지만 그렇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라고 가정하고 말이다.

안톤 체호프의 <베짱이>에 나오는 여주인공 올가 이바노브나의 참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이 문득 궁금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그 순간의 참회를 참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전의 과정을 죽 지켜본 독자는 그녀의 울음을 진실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죽 끓듯이 변하는 변덕에 주목했다면 말이다.

인간의 타고난 성품은 바뀌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들 한다.

그래서 의사 남편 드이모프가 죽은 후 그의 이름 드이모프를 무려 세 번씩이나 애타게 부르며 실수가 있었다고 그러니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는 올가의 절규를 진정한 반성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반성을 통해 인생의 교훈을 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에 반하는 것으로 독후감으로는 적절치 않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흐느낌을 가식이나 순간을 모면하려는 제스처로 봤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작가의 손을 떠난 책은 유명한 평론가가 아니라 해도 누구에게나 비판의 자유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까지 올가 이바노브나를 미워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녀의 행실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추적해보면서 하나하나 따져보고 나서 하겠다고 대답을 조금 뒤로 미룰 수 있겠다.

각설하고 그녀는 좀 들떠있다. 아니 아주 그렇다. 젊은 청춘이니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편이 있다. 유부녀라는 말이다. 그녀가 그것을 몽유병 환자처럼 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순진하고 착하고 언제나 자신의 말을 듣는 남편을 배신했다. 화가와 놀아났으며 남편이 눈치챈 이후에도 바람을 멈추지 않았다.

▲ 주인공 올가는 남편이 죽고나서야 자신이 실수했다고 울부짖고 있다. 이 순간 만큼은 누구라도 그녀가 반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주인공 올가는 남편이 죽고나서야 자신이 실수했다고 울부짖고 있다. 이 순간 만큼은 누구라도 그녀가 반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람은 흔한 것인데 그 정도로 웬 성화가 심하냐고 질책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렇다 해도 숨어서 하는 것을 넘어 아예 대놓고 그렇게 한다면 해도 너무하다 싶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가 종일 다른 여자를 찾아다니는 것을 보고 정부의 실체를 확인한다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일단 그녀 주변 인물부터 살펴보자.

그림을 그리는 화가, 노래 부르는 오페라 가수, 연극을 하는 배우,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가, 이름난 작가 등 쟁쟁한 예술가들이 포진해 있다. 그녀 역시 이 방면에 안목과 재주가 있는데 특히 삽화에 소질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녀는 언제나 유명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여자는 없고 모두 남자 뿐이다. 예술적 감각이 자신을 뺀 모든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때문일까.

어쨌든 그녀는 평범하고 단순하더라도 예술에서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남편에게 바랐다. 그러나 드이모프는 연구하고 박사 논문을 쓰고 환자를 돌보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평생 자연과학과 의학에만 매달렸다.

그러니 그녀의 일상은 남편보다는 그들과의 교류로 날이 새고 날이 밝는다. 그중에서 특히 화가로 촉망받는 랴보프스키가 있다.

금발에 잘 생기고 호감형이며 그림 솜씨도 탁월하니 올가는 그에게 금방 빠져들었다. 우수에 가득한 표정으로 볼가 강의 그늘과 낙엽과 구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올가는 그의 품에 안겨 죽고 싶을 만큼 그의 사랑을 갈구했다.

랴보프스키는 그런 올가를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끌어 당겼다.남자답게 사랑을 먼저 말하는 예의를 차릴 줄도 알았다.

여름 별장에서 그들은 비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꿀맛 같은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 맛은 오래가지 않았다.

랴보프스키는 어느 날 괜히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불륜 남녀의 전형적인 코스로 그들도 접어들고 있다.

올가는 매달린다. 순진하고 가엾은 남편이 때로는 눈에 들어오지만 예술을 알고 낭만을 아는 랴보프스키를 떠날 수 없다.

그녀는 언제나 첫사랑을 고백할 때 영원하고 성스러운 존재였던 랴보프스키의 그 선한 눈빛을 잊지 않고 있다.

유부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남자에게 드이모프는 어쩌고요. 이건 너무 하잖아요 하고 일단 버텼을 때 그가 한 말이 귓가에 여전히 맴돌고 있다.

드이모프요? 그가 어쨌는데요. 나와 무슨 상관있지요. 볼가 강이 있고 달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나의 사랑, 나의 환희가 있으면 그만 아닌가요. 당신만 사랑할 수 있으면 목숨도 예술도 버리겠어요.

이랬던 그가 이제는 변하고 있다.

달라붙으면 떨쳐 내고 싶은 것이 남자의 심정이던가. 그는 매몰찼고 그녀는 그러면 독약을 먹고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사랑해 달라고, 버리지 말라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애원하고 매달린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화실로 찾아오는 그녀를 간혹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 어느 날 그림을 봐달라는 최소한의 핑곗거리를 만들고 찾은 그의 아틀리에에서 올가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표구 뒤로 급하게 숨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심한 모멸감에 빠져든다.

독자들은 이 쯤되면 거기서 손을 떼고 이리로 오라고 충고하고 싶을 거다. 그러나 올가는 그러지 않았다. 랴보프스키를 집에 초대해서는 남편은 물론 동료 의사가 눈치챌 수 있는 사랑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문간에서 작별할 때는 다음에 만날 날을 정하기도 하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어떤 날은 남편이 관용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다고 그럴듯한 말을 지어 내기도 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분개할 수도 있지만 있어도 없는 척 하찮은 존재로 드이모프를 보는 올가 이바노브나라면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화가에게 멀어졌다가 달려가고 또 돌아서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는 법. 삽화가 형편없다고 구박을 받은 어느 날에는 이렇게 살아도 사는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짜증을 내면서 화가 대신 음악을 하라는 말에는 정나미가 떨어졌다. 드디어 그녀가 육체를 벗고 정신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절교하려고 단단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녀는 거리로 나왔다. 그 순간 올가는 랴보프스키로부터 그림으로부터 작업실에서 느꼈던 수치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스러워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차갑고 잔인하게 그와 헤어질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드이모프가 심하게 앓는다. 디푸테리아에 걸렸다. 연구를 위해 스스로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의학적 관심이 대단한 그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죽으면서도 그는 전염될 것을 염려해 올가를 자기 침실로 들어오지 못할게 할 정도로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다. 동료 의사들은 위대한 학자 드이모프의 죽음 뒤에는 공모자인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올가에게도 인생의 겨울이 닥쳤다. 여름내내 놀고 먹기만 했던 베짱이처럼.

여기서 앞서 말한 올가의 참회가 등장한다. 실수였다고 그러나 모든 것을 잃지 않았으니 앞으로 멋지고 행복할 수 있다고. 당신은 비범하고 위대한 인물이고 그대 앞에서 평생 공경하고 기도하며 경외감을 느끼고 살겠다고. 그러니 살아만 달라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느낌표 다음에는 이런 문구가 따라올 수도 있다. 그냥 참고만 하시라.

'삼일장을 끝낸 올가 이바노브나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상복을 벗고 새하얀 드레스로 갈아 입고 거리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상중에 틈틈이 그린 볼가 강의 아름답고 따스한 풍경이 화폭 가득 스케치 돼 있었다. 그림을 봐달라고 랴보프스키의 화실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새처럼 가볍게 뛰었으며 몸은 나비처럼 너풀거렸다.'

: 한 사람의 참회를 비꼬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이것은 이 책 밖의 내용이다. 그러니 독자는 참회까지만 읽으면 된다.

주제넘게도 책을 벗어난 점을 용서하시라.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 본성은 잠깐 돌아갈 수 있지만 관성처럼 제자리를 찾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좀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지만 그런 일은 러시아의 문학 작품속 뿐만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삶을 좀 더 진지하고 경건하게 살려는 의욕은 점차 멀어지고 있다. 치열하지는 않더라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갖고 순간의 쾌락보다는 영원의 구원을 갈구하는 그런 사람이 늘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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