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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돈 대신 작은 성경책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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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대신 작은 성경책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04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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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린 마음은 이곳에서 살자였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자. 긴 고민 할 것 없다. 기회를 엿보자고 결심한 순간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속 편했다. 산자가 취할 행동 중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용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뱃멀미 같은 것은 더는 없다. 울렁거림은 좋은 것이 아니다. 용희는 그것을 잊어야 한다. 아무리 속을 뒤집어 놓아도 더는 토해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포기하는 체념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제자리걸음이었다. 제자리서 걷다 보면 앞으로 가게 될 것이다. 뒤로 밀어내기보다는 앞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용희는 느꼈다. 그러자 밤이 조금은 덜 두려웠다. 장막도 걷어낼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 날 조선인이 들어왔다. 일본군만 상대하다 조선인이 들어오자 용희는 놀라면서도 반갑고 반가우면서도 창피했다.

그도 그런 마음이었는지 조금 쭈뼛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뿐이었다. 이미 그렇게 하고자 작심했던 것을 하기 위해 그는 일본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그의 입에서 의미 없는 조선말이 튀어나왔다. 용희는 가만히 생각했다. 누굴까. 말수였다.

갑판 위에서 기대감에 들떠 혼자 떠드는 바로 그 사내였다. 그도 용희를 알아봤다.

잠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무엇을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잘못으로 판정 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낭패감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말수를 당혹하게 했다.

그러나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그뿐이었다. 그도 일본군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용희는 구렁이 꿈을 꾸지 않았다. 대신 점례와 휴의와 동휴와 함께 했던 마을 앞 해변가를 뛰어다녔다. 백사장은 길었고 눈부셨다.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 쓴 듯 온통 하얀 모래가 햇볕에 부서지고 가라앉았다.

그 사이로 해당화가 붉게 물들었다. 붉은 물결은 하얀 백사장을 타고 끝없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용희는 뛰어다녔다. 점례가 따라오다 넘어지고 휴의가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동휴는 그런 모습을 보고 따라 웃었다. 웃음의 끝에는 용희에게서 점례에게로 눈길이 옮겨졌다. 이미 집안끼리 성례를 한 상태이지만 용희는 점례에게 주는 동휴의 그런 따뜻함을 받지 못했다. 용희는 점례보다는 동휴가 더 미웠다.

그날 넷은 물 빠진 바다를 건너 앞의 섬으로 이동했다. 절벽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쉬지 않고 떠들고 깔깔댔다. 언덕에 오르자 잘 정돈한 묘가 드러났다. 숨을 다듬고 그들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끝에 눈길을 모았다.

두 개의 묘가 나란히 서서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쌍묘는 죽어서도 함께 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용희는 나도 죽으면 이런 곳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 죽음을 떠올린 것은 용희 아버지가 그 석 달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임자 없는 산속의 외진 곳에 누웠다.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던 용희가 깜짝 놀란 것은 메뚜기 한 마리가 손등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잔디 위로 날아다니던 메뚜기 중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용희의 손등에 앉은 것이다. 숨을 다듬고 그들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끝에 눈길을 모았다.

비명을 지르는 용희에게 먼저 다가선 것은 동휴가 아닌 점례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듯이 용희의 손을 잡고 흔들어 메뚜기를 날려 보냈다.

용희는 점례를 보고 웃었다. 웃음 사이로 언젠가 저 바다를 넘어 다른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그들의 꿈이 모였다.

말수는 간혹 찾아왔다. 유일한 조선인 손님이었다. 그는 언제나 돈을 낼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을 했다. 조선인이지만 일본인과 다를 바 없이 대해달라는 투였다.

용희는 그런 그를 통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다. 전황은 유리하기도 했고 때로는 불리하기도 했다. 말수는 그런 말을 하면서 광산일이 고되다고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이 들고 돈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갈 때 준다고 전표에 기록하고 있지만 알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선인이 죽어 가고 있다고 했다. 여기 오고 나서 벌써 3명이 죽었다고 했다.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날 말수는 돈 대신 작은 성경책 하나를 용희에게 주고 갔다. 성경책이라면 용희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전날 이웃 마을에 사는 고모를 따라 읍내의 성당에 간 적이 있었다. 삶은 달걀 하나를 받아 들고 용희는 행복했다.

신을 부르면 여기로 달려올까. 십자가를 걸고 하느님을 찾으면 그분은 눈앞에 나타나 너의 고통을 알고 있으니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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