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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소식이 온다는 말에 반장은 두둑한 복채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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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온다는 말에 반장은 두둑한 복채를 주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10.19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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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파병이 결정됐을 때 반장은 기회가 올 것을 믿었다.

군단장이 부를 것에 대비해 군복을 깨끗이 하고 군화를 닦아 놓았다. 구두약을 열 때 그는 감회에 젖어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헝겊에 약을 찍고 모닥불에 데워 불광을 내면서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알싸한 구두약 냄새가 그의 코끝에서 맴돌았다.

그는 전투 의욕이 솟았다. 그 기세를 몰고 가야 한다. 여기서 멈추면 다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그는 허리를 세웠고 목을 들었다.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몸을 급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마을 앞길을 매일 달렸고 산에 오를 때는 그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시멘트로 만든 역기를 쉴 새 없이 들었고 모래 샌드백을 손에 피가 날 때까지 때렸다. 피가 멈추지 않은 다음 날에도 또 때렸다. 아물기 전에 상처에서 딱지가 졌고 딱지는 그대로 살에 박혔다.

그는 그 주먹으로 아무 곳이나 때렸다. 때릴 곳이 없으면 땅을 찍었다. 여러 번 찍고 나면 절굿공이로 내리친 것처럼 땅구멍이 생겨났다.

그는 굳은 다리를 찢었고 태권도복을 세탁했다. 품세를 외웠으며 정권을 갈고 어퍼컷을 날렸다. 그의 집에는 새벽에 기합 넣는 소리가 닭 소리보다 먼저 울렸고 그 소리를 들고 마을은 아침을 시작했다.

비록 시간은 몇 년이 흘렀으나 반장의 능력은 녹슬지 않았고 체력은 금세 회복됐다. 살기 어린 눈은 더욱 거칠어져 가을날 굴로 들어가기 직전의 살모사와 대결해도 물러서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40을 넘겼지만 20대 젊은이들을 우습게 봤다. 맞서 주먹질을 하면 한 발에 날릴 것이다. 그는 시험 삼아 일부러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가 누군지 모르고 덤볐던 읍내 깡패들은 얻어터지고도 보복할 생각을 접었다. 대대장이었던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그를 피하거나 만나면 넙죽 엎드렸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그는 늘 거울 앞에 섰다. 그가 봐도 그에게 군복처럼 잘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이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거울에 비친 중령 계급장과 대대장 견장이 그를 더 크고 우람하게 만들었다. 발을 모으고 손을 들어 경례할 때 그는 자신이 영원한 군대 체질인 것을 알았다.

직업 군인의 나이로는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일선 지휘관이 아니라면 참모 역할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죽으라면 죽는 충성심만큼은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상관을 위한다면 누명까지도 뒤집어쓰겠다는 각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투영됐다. 거짓 자백으로 고문을 당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알아주는 상관을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죽음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

절박한 나머지 반장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골에서 썩을 수는 없다. 첩질도 신물이 났다. 여기저기서 생긴 아이들도 꼴 보기 싫었다.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 아는체하는 것도 귀찮았다.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산의 중턱에 있는 무당집에 도착했을때 그는 어떤 신념 같은 것이 자신의 몸을 뱀처럼 감싸고 도는 것을 느꼈다. 무당은 그가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그의 눈이 이미 많은 것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그 눈이 앞으로 더 그러기 전에 무당은 여기서 그가 멈추기를 기원했다. 그녀는 그러나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런 자는 거짓이 되레 사실보다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식이 온다고 말했다.

'조금 기다려, 소식이 달려와.'

소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이 인생의 꼭지점이니 조바심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반장은 두둑한 복채를 무당의 손에 쥐어 주고 그늘이 막 지기 시작한 염산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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