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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는 말없이 묵묵히 앞으로 가는 소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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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는 말없이 묵묵히 앞으로 가는 소가 되고 싶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8.18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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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는 소를 닮고 싶었다. 거짓말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 소처럼 듬직한 그 무엇이 되고 싶었다.

한발 한 발 앞으로 나갈 때 정태는 인생의 낙을 느꼈다. 그것은 무언가를 해 냈을 때 얻을 수 있는 보람 같은 것이었고 배불리 흰쌀밥을 먹고 났을 때 느끼는 포만감이었다.

사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런 것을 이겨 내는 힘은 바로 조금씩 나아지는 살림 살이었다.

벌고 안 쓰면 적게 벌더라도 남는다는 것이 정태의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고 언제나 맞아 떨어졌다.

병태가 술 먹고 휘청거릴 때 그는 논밭에서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저녁에는 복조리를 만들었고 용순이 모시를 삼도록 도왔으며 새벽같이 일어나 소를 챙겼다. 소는 송아지를 낳았고 송아지는 소가 돼서 밭을 갈았다.

허리는 아프고 이마는 땀으로 눈을 따갑게 했으나 그는 그것을 즐겼다. 신성한 노동의 가치 같은 거창한 것을 생각해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는 이것은 농사꾼의 기쁨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러다 보니 남들은 하지 못한 논을 사고 밭을 샀다.

누군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 밟으려고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비록 씨족 마을이라고 하나 대를 이어 오면서 촌수는 멀어지고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는 일하기 싫어 먹고 놀면서 논을 갖고 싶은 사람들의 표적이 됐다. 반장은 그런 정태를 노렸다. 한 번 크게 망신을 주어 기를 꺾어 놓으려고 작정을 했다.

병태에게 술을 사줬다는 말을 듣자 억하심정은 극에 달했다. 제 놈이 돈이 많기로 서니 외상값까지 갚아 줬다는 말을 듣고는 화를 참지 못했다.

나이가 어리고 항렬이 낮다고 반장인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본때를 보이고 싶었다.

반장은 뛰어나온 눈을 부라리면서 이 자식을 아예 곤죽을 내겠다고 두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키가 크고 억센 주먹 때문에 억지로 반장 자리를 꿰찬 그는 그것도 완장이라고 위세를 부렸고 그런 그를 마을 사람들은 싫어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고 겉으로는 언제나 비굴한 웃음을 지으면서 반장님, 반장님하고 불렀다. 면에 가서 서류를 떼고 순사를 만나고 하는 일은 반장의 몫이었다.

행패를 부리는 정태는 반장이 못마땅했다. 다툼이 일어나면 잘못은 언제나 힘없는 자가 졌다. 사과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들과는 달리 잘못은 언제나 상대방이 하고 있다는 것을 정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과 현실과 그것을 마주 대하는 마을 사정은 같지 않고 모두 달랐다. 정태는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힘이 센 사람은 잘못 해도 벌 받지 않고 잘못하지 않았으나 돈이 없고 미련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일본 사람들도 그들 편이었다. 자기 말을 들으면 틀려도 옳았고 듣지 않으면 옳아도 틀렸다.

남의 집 씨암탉을 아무 이유 없이 잡아먹고 독에 든 술까지 공짜로 먹고 난 반장을 일본 순사는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풀어주었다.

정태 아버지는 신고했다는 이유로 몰매를 맞았다. 거기다 폭행죄까지 뒤집어썼다.

그가 남의 일이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20리밖에 면사무소까지 달려가서 호소한 것은 다른 집도 아닌 바로 옆에 사는 조카의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데 반장은 머슴 둘을 데리고 와서는 다짜고짜 닭을 잡았고 술독을 뒤졌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잔치를 벌였다.

하도 어처구니없어 왜 그러냐고 조카 대신 따지고 멱살을 잡자 반장은 이놈 보라고 고함을 치면서 주먹으로 면상을 갈겼다.

당장 순사에게 신고하라고 쓰러진 정태를 한 번 더 밟았다. 정태가 일어나면서 코를 문지르자 하얀 옷소매가 금세 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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