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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빈처(1921)- 나, K를 존경하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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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빈처(1921)- 나, K를 존경하는 아내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10.23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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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문학 작품의 첫 문장은 자주 인용된다.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나름대로 불행하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 주오’, 같은 표현 등이 그렇다.

주로 외국 작품을 인용하는 사례가 많은데 우리 작품에도 늘 써먹고 싶은 첫 문장이 있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날개 첫 문장이다. 그런가 하면 현진건의 <빈처> 역시 이에 뒤질 수 없는 대단한 첫 문장이다.

“ 그것이 어째 없을까?”

평범한 문장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이 첫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마술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그것은 전당포에 내다 팔 무엇이고 그 무엇은 가구나 의복 따위에 해당한다.

제목에서 내용을 연상했다면 첫 문장에서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다.

얼마나 살림이 궁핍하면 그런 것들을 팔아 끼니를 때우겠는가. 그것도 이번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세간살이가 텅 빌 정도니 이 집 남편 K라는 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속된 말로 그는 골은 찼으나 몸은 빈 숙맥 같은 존재다. 콩과 보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인데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돈벌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골이 찼다는 것은 배운 것이 많아 넉넉한 학식이 들어 있다는 의미인데 많이 배웠으면 많이 벌어야 이치가 맞다. 그러나 그는 버는 것에는 전뱅이다.

아내가 ‘모본단’ 저고를 찾을 때 그는 책상머리에 우두커니 앉아 책장만 뒤적이고 있는 꼴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먹거리를 당장 찾아 나서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책 속에서만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는 외국물을 먹었다. 이유인즉슨 지식에 대한 갈증이라나. 중국이나 일본을 떠돌던 이유치고는 참, 대단하다. 책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지식의 바닷물을 얻어 마시려고 표연이 집을 떠났었다.”

이때가 육 년 전 그러니까 남편이 16살 아내가 18살이고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반거들충이가 돼서 집에 돌아왔다. 이런 인물이 책장을 뒤적이고 있으니 무언가 당장 일을 낼 위인이 될 자격은 충분하다.

그런데 꼬락서니는 반대로 가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쓰는 것이다. 이른바 작가다. 그러나 변변한 작품이 없고 알아주는 세간의 평도 없는 무명작가 신세다( 작가 자신을 빗댄 것이다).

다행히 처가가 부유해 아내는 이런저런 내가 팔 것을 많이 가져왔다. 하지만 결혼 후 매일 같이 처분하다 보니 이제는 숨은 것을 찾아야 할 정도다.

그래서 첫 문장이 그것이 어째 없을까? 하는 의문부호로 시작한 것이다.

대개 이런 경우 남편은 술을 먹고 와 아내를 패기 마련이다. 여편네가 사내의 큰 뜻을 알지 못하고 겨우 먹는 것 가지고 남편을 못살게 군다면서 주먹질을 예사로 한다.

상을 뒤엎는 것은 그 뒤에 자연히 따르는 행사다. 아내는 훌쩍이고 그러면 운다고 또 팬다.

그러나 여기 남편은 그러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손찌검 대신 아내를 사랑한다.

어떤 때는 이른 결혼을 후회하기도 하고 어쩌다가 이 신세인가 한탄하기도 하지만 그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아이는 없는지 애들 이야기는 빠져 있다.

▲ 가난해 아내에게 양산 하나 사 줄 수 없는 남편의 신세는 처량하다. 글로써 조선반도를 떠들썩하게 하고 싶으나 현실은 누구 하나 알아 주는 사람없는 무명작가다.
▲ 가난해 아내에게 양산 하나 사 줄 수 없는 남편의 신세는 처량하다. 글로써 조선반도를 떠들썩하게 하고 싶으나 현실은 누구 하나 알아 주는 사람없는 무명작가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 정도가 아니라 존경하기까지 한다.

마음이 어떠하면 이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싶다. 비단결 같이 곱다는 표현가지고는 부족하다. 비록 제대로 옷 한 벌 해 입지 못하고 당목 옷이나 입는 주제이지만 남편의 바다와 같은 마음을 이해한다. 어느 날은 위안과 용기까지 준다.

세상에 천사 아내가 있다면 여기 나오는 이런 아내야말로 맨 앞자리에 설만 하다.

그러나 이 같은 아내도 남편의 먼 친척인 한성은행에 다니는 T가 자기 아내에게 준다고 사온 양산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인천에 사는 처형이 사준 신발을 신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남편의 마음은 오죽할까. 하루아침에 대작을 써서 조선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요술 방망이처럼 ‘뚝딱’하고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때마다 오는 끼니를 걱정하는 아내에게 볼 면목이 없다.

더구나 내일은 장인의 생일이 아닌가. 안국동에 사는 처가는 부유해서 사람까지 보내 아침에 들라는 기별까지 했다.

천변에서 안국동까지 걸어가는 신세가 처량한 것은 남들은 ‘삐까뻔쩍’ 하는데 아내가 입은 낡고 빛바랜 옷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다. 장인, 장모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아내만 보내고 싶었으나 같이 가자고 조르는데 달리 대꾸할 수 없어 따라나섰으나 마음은 착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높은 솟을대문으로 들어가니 손님들로 벌써 처가댁이 시끌벅적하다. 사람들은 그의 행색을 보고 하인인 줄 알고 희끗 거리니 죽을 맛이다.

한쪽에서 들입다 못 먹는 술만 먹었수밖에. 인천사는 처형과 아내를 비교해 보니 동생이 언니처럼 보일 정도로 언니는 피어나고 동생인 아내를 시들고 있다.

그런데 얼핏 본 처형의 눈두덩이가 시퍼렇다. 한 대 얻어터진 것이다. 게다가 처형의 남편이라는 자는 기생집을 들락거리며 돈 번 티를 낸다.

쌀장사로 제법 벌었다고는 하나 그런 남편을 두고 있는 처형의 신세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술에 취한 남편은 장모가 마련해 준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고 가라는 만류를 뿌리친 것 역시 자격지심 때문이다.

인력거 비용 대신 돈으로 주면 좋으련만 하고 그 와중에도 책 사보고 싶은 마음이다. 천생 한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덕이 높은 선비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싫어하지 않는다. 되레 마음속으로 우리 남편 ‘쵝오’ 한다. 겉으로도 그렇다. 조선에서 이름을 떨칠 거라고 힘을 준다.

이런 아내와 돈은 있지만 얻어터지는 아내와 비교하면 어떤 아내가 더 좋은 아내인가. 투표를 한다면 결과가 어찌 나오는지 궁금하다.

: 남편의 아내는 계절로 치면 이 가을에 어울린다. 풍요의 계절, 무언가 결실을 얻는 계절이라기보다는 메마른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녀는 나이는 어려도 대단히 용기 있고 지혜롭다. 지식인 남편의 고뇌를 받아 줄 줄 알며 가난해도 행복 할 수 있다는 자기만의 비법을 터득하고 있다.

아내는 결코 빈처가 아니다. 굳이 표현하면 부처다.

현진건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대구에서 우체국장을 지냈다. 위로 형들도 독립운동을 하는가 하면 유학길에 오르는 등 풍족한 생활을 했다.

현진건은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글로써 가난한 민족의 어두운 현실을 돌파하고자 했다.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냈으며 더불어 한없이 순진한 낭만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했다. 혁명가 기질이 다분했다고나 할까. 말년에는 닭을 키우며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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