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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스러져간 젊은 넋은 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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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스러져간 젊은 넋은 말 없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7.0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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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는 이만희 감독의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살펴봤다. 전쟁영화를 보면서 스러져간 젊은 넋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유월이 가고 칠월이 왔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은 여전하다. 한국전쟁 70년인데도 말이다. 그 처참한 역사가 상처처럼 아물지 않고 덧만 나는 것은 증오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한때 휴전이 아닌 종전이나 영구 평화협정 같은 것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것이 불과 이년 전이다. 지금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화해보다는 대립이 앞서고 있다. 어서 그런 날이 종식되기를 바라면서 임권택 감독의 <낙동강은 흐르는가> 를 감상해 보자.

이 영화는 국책영화다. 반공을 전면에 내걸었다는 말이다. 당시 독재 정권은 정권을 안정시키고 홍보하기 위해 그것을 요구했고 감독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영화 첫머리에 국방부와 문화공보부가 후원했음을 떳떳이 밝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육군본부는 제작지원을 했다.

이런 것을 감안 하자. 그러면 영화의 완성도를 따지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즐거움으로부터 시작한다. 즐거워야 슬픔이 더 배가된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기 때문이다. 젊은 남녀가 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서로 사랑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여과 없이 드러낸다.

다들 부러워 한다. 그런 때가 나에게도 있었던가 하면서. 해피한 순간이다. 그때 한 떼의 피난민 행렬이 눈에 들어오고 전쟁이 일어났음을 실감한다.

전쟁이 무지막지한 것은 겪어 보지 않아도 안다. 직접 체험하지 않았어도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재산을 잃고 고아가 되고 떠돌이 개처럼 처량한 신세가 된다는 것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안다.

▲ 자진 입대한 소년병이 적 탱크를 향해 맨몸으로 돌진하는 장면은 숭고하다기보다는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 자진 입대한 소년병이 적 탱크를 향해 맨몸으로 돌진하는 장면은 숭고하다기보다는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적은 계속 아래로 치고 내려온다. 휴전선 아래 노란색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고 대구와 부산만 남아 있다. 유엔 결의에 따라 유엔군이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도가 확실하다.

전쟁에 혈안이 된 북괴군은 더 빨리 진격하지 못하는 대원을 공개 처형한다. 한탄강이나 임진강이나 한강은 쉽게 넘었는데 낙동강은 태평양만큼이나 넓어서 아직 넘지 못하느냐고 동료를 죽인다. 무자비한 것이 있다면 바로 북괴군이다.

상황이 이런데 사랑 타령이라니. 두 젊은 남녀의 사랑했던 시절은 이것으로 끝이다. 적이 무자비한 것은 앞서 말했다.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인정사정없는데 그런 적에게는 눈곱만큼의 인정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

북괴군의 첨병은 탱크다. 육중한 몸으로 굉음을 내면서 남으로 남으로 쳐들어오는데 막을 장사가 없다. 서울은 맥없이 무너지고 북괴군의 악랄함을 비난하는 배우들의 목소리 또한 덩달아 높아진다.

적은 무능하고 아군은 용감한데 전선은 밀리고 있다. 여기서는 그런 것도 따지지 말자.불리하고 어려운 여건이지만 관객들에게 북괴군의 악랄한 짐승 이미지를 씌우면 된다.

우리는 선량하고 적은 나쁘고 우리는 원칙을 지키고 적은 거짓과 술수로 민족을 탄압하고 있다. 우리는 편했고 너무 방심했고 너무 대비가 없었다. 이런 넋두리는 책임을 관객에 돌리는 장치로 유용하다.

남은 것은 이제 대구와 부산이다. 대구가 떨어지면 부산도 함락이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괴뢰군이 맞붙고 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국군은 미군의 진격과 공습으로 반격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하지만 적도 만만치 않다. 탱크를 앞세우고 대구 공격을 위한 교두보 확보에 총공세에 나섰다.

몰려오는 탱크를 막지 못하면 나라는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 국군은 최선을 다하지만 역부족이다. 그러나 언제나 위기를 돌파하는 영웅이 있기 마련이다.

상사가 나선다. 몸에 폭탄을 감고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일시적으로 남진을 막는다. 그러나 적은 나머지 탱크로 계속해서 내려온다. 적은 끈질기고 끈질긴 것은 나쁜 것이다.

포로 호송을 맡았던 소년병은 포로를 내버려 두고 탱크 앞을 육탄으로 막아선다. 여기서 소년병이 앞서 말한 사랑하는 남녀의 그 남자가 되겠다. 여자는 가지 말라고 소리치지만 남자는 그 반대의 길을 가는 심정을 이해해 달라고 맞받는다.

소년병은 죽는다. 두 사람의 숭고한 죽음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들은 말한다.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좋은 사람인지를. 누가 민족을 배반하고 누가 민족을 지켰는지를. 거짓말을 하고 선동하고 약속을 어기는 자가 누구인지를.

관객들은 영화관을 나오면서 비열하기 짝이 없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북괴군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담고 나온다.

이 정도라면 영화가 바라는 바는 성공적이다. 그러니 묶지도 않은 포로를 소년병이 후방으로 호송하는 장면의 비현실성을 논할 필요가 없다.

그 포로를 소년병이 살려두고 자신은 탱크에 맨몸으로 부딪치는 장면에 대해서도 이러쿵 저러쿵 떠들 필요가 없다. 너풀거리는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전장을 누비는 미녀 간첩이 나와도 그런가 보다 하면 속 편하다.

이 영화는 반공을 국시로 삼은 정권이 감독을 동원해 만든 반공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공 영화라고 해서 전쟁영화가 갖는 순기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피난민의 고된 행군길, 입에 풀칠 하기 위한 산자 들의 절규, 어린아이의 울부짓음 이런 것만 보여줘도 전쟁의 참혹함은 드러난다. 아무리 반공 영화라 해도 전쟁의 참상까지 감출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완전히 실패하지 않고 아주 조금은 성공했다.

국가: 한국

감독: 임권택

출연: 진유정, 장혁

평점:

: 탱크 병의 복장이 너무 깨끗하거나 깔끔하다는 이유로 다시 말해 너무 고급지거나 혹은 말투가 세련돼 괴뢰의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영화는 개봉된 지 며칠 만에 간판을 내렸다고 한다.

정부가 대대적으로 지원한 영화가 이런 상황이었다니 놀랍다.

내용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북괴를 비난했고 소년병의 입을 통해 친절하게 낭독했으니 시비 걸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트집 잡을 거리가 겨우 복장이었다니 실소가 절로 나온다.

이것이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는 지금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잠깐 뒤만 돌아봐도 아찔한 순간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실제로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했다.

영화가 정치나 이념에 구속되면 본질은 흐려진다. 멋대로 편집하고 멋대로 잘라내서 원본은 어디 가고 조각조각 흩어진 쪼가리만 관객에게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는 식으로 던져 준다면 그게 어디 영화인가.

이런 영화 만들었다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시대가 하 수상했고 어쩔 수 없었고 먹고는 살아야 하는 현실은 고달프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그 시대상은 그 나름대로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죽어간 젊은 넋들은 이념보다는 오로지 조국을 택했다. 구멍 뚫린 철모가 주는 비애는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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