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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있던 사람들이 놀라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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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있던 사람들이 놀라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4.29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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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절 방에서 나는 호랑이 꿈을 기억해 냈다. 그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짜깁기할 정도로 흐려진 기억은 아니었다. 선명과 흐릿함 그 중간 정도라고나 할까.

누워 있으니 노곤한 피로가 몰려왔다.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약초를 찾으면서 헤맸으며 하산하는 길에 모기를 물리고 급기야 독사의 맛을 보기에 이르렀으니 그럴만도 했다.

독사의 독이 온몸으로 퍼져 가고 있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졸음과 독에 의한 의식의 흐름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독은 아직 물린 자국 근처에서 머물고 있다고 판단했다.

일어나서 다리를 확인해 보니 두 줄의 핏줄기는 발목 부근까지 다다르지 못하고 멈춰서 있었다. 피가 흐르다 굳은 모습은 너무 자주 보는 것이라서 색다를 것이 없었다.

붉은 색에서 약간 바랜 연한 주황색으로 피는 변해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피의 줄기는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서 마침내 한 줄이라기보다는 도로위의 점선처럼 떨어져 있었다.

부어 오르지도 않았다. 물린 자국은 선명했으나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약간 올라와 있을 뿐이었다. 살의 융기는 그래서 걱정하지 않을 정도였다.

칠점사의 독은 살을 부풀어 오르게 하기 보다는 신경을 공격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그래서 몸이 마비가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그런 낌새는 없었고 되레 나는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고 싶지는 않았다. 낯선 절방에서 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뿐더러 독사에 물린 사람의 처신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호들갑은 이미 내려올 때 다 떨었으므로 새로운 것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다시 등을 바닥에 대고 누었다. 절방의 천장은 높았으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환기가 잘 돼서 인지 나처럼 긴급 사태가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인지 사람 냄새도 없고 그저 진공 속에 와 있는 듯 무색의 냄새가 지배했다.

곧 사이렌을 울리면서 엠블런스가 올 것이다. 내소사 입구로 들어오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읍내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병원이 연락을 받았고 구급차가 있고 운전사가 대기하고 있다면 아마도 40분 정도면 도착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시계를 보니 얼추 그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내 책임이었지만 나는 부끄러움 대신 이후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걱정이 앞섰다.

사실 나는 하루 약초를 캐고 나머지 시간은 일부 여름 휴가를 즐기기로 작정한 터였다. 전라도의 남쪽 끝을 구경하고 경상도로 가서 동해안을 타고 강원도로 가는 긴 여정을 잡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독사에 물렸으니 일정은 차질이 불가피 했다. 마음이 안정되자 독사에 물린 것보다 여행 일정이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 혼란스러웠다.

혼자라면 걱정이 없겠으나 이번 여행은 나 혼자의 여행이 아니었다. 설명하면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 뿐만이 아니라 위로도 받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해나 위로를 원하지 않았다.

새로운 곳을 여행한다는 기대는 가족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때문에 취소되거나 변경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차가 출발하지 않았다면 올 필요가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문을 열었고 스님을 찾았으며 스님에게 병원에 한 번 더 연락을 부탁해야 겠다면서 밖으로나왔다.

그때 아래 쪽에서 엠블란스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이내 큰 소리가 나고 절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어쩔 수 없다고 계획했던 것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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