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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9 12:48 (월)
333.제저벨(1937)-사랑과 미움과 다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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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제저벨(1937)-사랑과 미움과 다시 사랑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3.29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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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지위와 미모가 있다면 거의 다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행복과 매우 가까이 있다. 미혼 여성이라면 그에 걸맞은 남편만 있으면 된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제저벨>의 줄리( 베티 데이비스)를 통해 그런 여자의 일생을 그려나가고 있다. (참고로 제저벨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7대왕의 부인으로 음행과 술수를 일삼는 악녀다. 줄리가 여기에 해당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영화의 재미를 더해 줄 것이다.)

일생이라고 했지만 영화에서는 인생의 겨우 절반만 해당하는 젊은 시절만 나오니 전 생애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봐도 그녀 인생의 전부가 다 그려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매우 중요한 시기를 다룬다. 복에 겨워서 인지 줄리에게는 남편감도 있다. 프레스톤(헨리 폰다)은 똑똑하고 잘났고 은행의 핵심 인사이니 줄리에 비해 뒤쳐질게 하나도 없다.

약혼한 두 남녀는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 줄리는 결혼 날짜만 기다리면서 프레스톤과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에서는 1852년으로 나온다.) 뉴올리언스의 중요한 파티가 있는 날이다.

선남선녀들이 모여들고 내로라하는 고관자식들이 다 모인다. 아무거나 입어도 독보적이지만 줄리는 무대 의상에 신경을 쓴다. 당시는 미혼 여성은 모두 흰 드레스를 입었다. 다른 색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사회 관습 때문이다.

그런데 줄리는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 미혼이라고 해서 흰색만 입을 필요는 없다고 기세가 등등하다.

기혼이나 입는 붉은 색 옷을 선택한다. 옷 입는 것으로 페미니스트 여부를 가린다면 줄리는 단연 선두에 선다. 프레스톤은 미혼 여성은 절대 흰색 말고 다른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격식에 맞는 옷을 입기 전에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줄리는 대든다. 겨우 이 옷 때문인가. 설마 두려워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누군가 나를 모욕할 때 나를 옹호해 주기가 두려운가. 아, 이런 논리를 구사하는 줄리는 남자를 가지고 놀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

둘은 파티에 참석한다. (그 전에 프레스톤의 아버지 친구였던 은행가는 파티에 참석하기 전에 프레스톤에게 요즘은 남부 여성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으로 줄리의 청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을 핀잔한다. 그러면서 자네 아버지 였다면 일단 회초리를 들고 나서 그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선물할 거라고 한다. 이런 태도가 남부 여성에 대한 존중인지 학대인지는 모르지만, 다행인지 어떤지 프레스톤은 회초리를 들 기회가 있었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우역곡절 끝에 둘은 사람들 사이에서 춤을 춘다. 온통 흰색인 가운데 나 홀로 붉은 색은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다.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은 둘만 남겨 놓고 모두 뒤로 물러난다.

참석자들은 사방에서 수군거리고 오케스트라는 연주를 멈춘다. 춤의 행진은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남들은 다 입고 자신만 벌거숭이가 된 느낌이다.

그때까지 당당하던 줄리는 돌연 집에 가자고 조른다. 용감하고 당찬 모습은 사라지고 연약해진 줄리는 끝내 울음을 터트린다. ( 은행까지 찾아오면서 네 일만 중요 하냐, 나는 안 중요하냐고 따지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나) 이런 일이 있은 후 1년이 지났다.

북부 출신인 프레스톤은 그쪽으로 떠나고 그가 남부로 돌아왔을 때 그 옆에는 부인이 있었다. (영화를 제법 본 관객들도 이 장면은 상상하기 좀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게 용서를 구하겠다, 그에게 낮추겠다, 그와 결혼하겠다고 다짐했던 줄리, 그를 맞기 위해 하인을 독촉해 집안을 꾸몄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던 줄리의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에게 따귀를 올려붙이면서 세를 과시했던 줄리는 이제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다.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면서 언제나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북부 뉴욕 출신의 부인과 함께 온 그를 줄리는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오매불망 흰 색 드레스를 입고 기다렸던 줄리의 무너져 내리는 심정은 줄리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루이지에나 사람들은 뭘 해도 놀라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놀란 것은 물론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이다. 그러나 줄리가 누군가.

곧 사태를 완전히 파악한 그녀는 식사시간에 프레스톤의 연적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사이가 좋지 않은 벅에게 친근함을 과시한다.

이제는 가질 수 없는 내것이 아닌 북부 출신 프레스톤을 자극하는 노예제도 등의 말을 서슴없이 한다. 노골적으로 프레스톤을 깎아 내리고 거리의 여자처럼 천한 행동을 하면서 벅을 추켜세운다. 그리고 결투 음모를 꾸민다.

정말로 그녀는 프레스톤을 제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에 프레스톤의 동생과 벅은 결투를 벌인다. 당연히 그 지역 최고의 총 솜씨를 뽐내는 벅이 이길 것을 예상했다. 동생은 한 번도 결투를 해 본 적이 없다. 누구나 생각했던 일이 어긋났다. 벅이 죽은 것이다.)

그 즈음 뉴올리언스 에서는 이상한 기운이 퍼진다. 흉흉한 소문도 나돈다. 급성바이러스 질환인 황열병이 창궐하기 시작한다.

당국은 지역을 봉쇄하고 환자는 나환자들이 있는 외딴 섬으로 추방한다. ( 어찌 코로나 19가 기승인 지금과 비슷하다. 뉴올리언스는 실제로 1853년과 1905년 두 차례에 걸쳐 황열병의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이곳이 지난달 25일 150만 명이 참석한 마디그라 대축제를 열어 코로나 19의 새로운 진앙지로 떠올랐다. 부디 세 번째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 베티 데이비스의 눈을 보자. 사랑에 빠진 그녀는 킴 칸스가 1981년에 부른 '베티 데이비스 아이스'라는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죽음에 빠진 남의 남자를 위해 간호를 자청한 그녀는 과연 성녀인가, 아닌가.
▲ 베티 데이비스의 눈을 보자. 사랑에 빠진 그녀는 킴 칸스가 1981년에 부른 '베티 데이비스 아이스'라는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죽음에 빠진 남의 남자를 위해 간호를 자청한 그녀는 과연 성녀인가, 아닌가.

프레스톤이 거리에서 쓰러진다. 황열병에 걸렸다. 사람들은 모두 피한다. 이동 제한에 걸려 옴짝 달싹도 못한다. 줄리의 집에 온 그는 바로 격리 조치에 들어가야 한다. 부인이 남편의 간호를 자처한다. 그럴 수 있다. 부인이니까. 그 섬에 가면 프레스톤도 죽고 부인도 죽을 것이다. 살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줄리가 나선 것이다. 자신이 부인을 대신해 프레스톤의 병간호를 하러 가겠다는 것이다. 북부 것들은 절대로 이해 못한다. 이곳 남부는 뱀이나 나오는 곳으로 안다면서.

나환자가 몰려 있는 죽음의 섬으로. 열병 저지선을 넘었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하는 이 혼란한 상황에, 마차에는 죽은 시체들이 즐비한데.( 연일 확진 자와 사망자 숫자의 세계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미국의 상황이 오버랩된다)

줄리는 말한다. 아내인 당신의 권리를 존중하지만 과연 당신이 적임자 인가 묻는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당신보다 내가 더 강하고 용감하다. 내가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달라.

미심쩍은 부인이 한마디 아니 물을 수 없다. 당신만이 알 수 있는 대답을 하라. 프레스톤이 아직도 널 사랑하니.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나는 확실히 아니다.

그 말을 들은 부인은 하느님께서 당신과 프레스톤을 살려 줄 것이다, 라는 대답을 하고 뒤로 빠진다. 줄리가 떠날 때 장엄한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게 영화 말고 현실에서도 가능한가. ( 이 장면에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만큼 혁명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국가: 미국

감독: 월리엄 와일러

출연: 베티 데이비스, 헨리폰다

평점:

: 이 영화는 반전이 있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 질투심으로 없애려고 까지 했던 그녀가 그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와 함께 마지막 길에 동참한 것이다.

대개의 여자는 이런 경우 모른 척하는 것이 당연하다. 가슴이 조금 아플 수는 있다. 한 때 사랑했었으니까. 그리고 약혼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결혼한 남의 남자이며 몹쓸 전염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른 남자를 돌보는 것은 가당찮다.

당연히 부인의 몫이고 가슴 아파 하는 것으로 양심의 문제는 거리낌 없어야 하고 그리고 또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줄리는 아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을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기심이라고나 해야 할까.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기 않는다. 죽음의 섬에서 간호하는 그녀나 간호의 결과가 어떤 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둘이 다 죽거나 둘이 다 살거나 둘 중의 하나만 살아서 돌아온다는 뉘앙스도 없다. 그저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의 마무리 치고는 아주 세련됐다.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섬의 생활과 그 이후의 과정이. 그렇다면 삼삼오오 모여서 ( 코노라 19가 종식된 이후에) 줄리와 프레스톤 그리고 그녀의 부인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 수는 있다.

줄리의 대저택에 아직은 백인의 노예로 살고 있는 흑인들이 모여서 부르는 떼창은 기가 막히다. 그곳이 재즈의 고향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열연을 펼쳤던 구렛나루가 인상적인 젊은 헨리 폰다를 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한편 킴 칸스는 1981년 ‘베티 데이비스 아이스’라는 노래를 불렀다. 세계는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해 나도 많이 흥얼 거렸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베티 데이비스는 줄리 역의 전설적인 여배우 그 베티 데이비스가 맞다. 그레타 가르보라는 가사도 한 줄 나온다. ( 그레타 가르보는 지난 331회에 소개한 <크리스티나 여왕>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눈, 정확히는 프레스톤을 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킴 칸스는 허스키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구구 절절 풀어냈다. ( 킴 칸스는 최근 사망한 ‘레이디’의 가수 케니 로저스와 듀엣으로 ‘돈 폴인 러브 위드 어 드리머’ 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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