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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멀리서 그것이 반짝일 때 좋은 기운이 몸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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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그것이 반짝일 때 좋은 기운이 몸을 감싼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1.17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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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고독을 사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고독 속에서 홀로 죽었다. 부인이 있었고 많은 자식이 있었지만 그는 죽음의 순간에 홀로 있고 싶어 했고 그래서 가족 품 대신 거리에서 죽었다.

고독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절대 언어였다. 그것이 없는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니었다. 함께 있어야 즐거울 때도 있다. 사회속에 섞여 있어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영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혼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여럿이 아닌 홀로여야 한다.

홀로 있을 때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느낀다. 자유는 영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는 청소는 하면서 늘 이문제를 생각했다. 여럿이 모였다가 일을 할 때는 각자 흩어졌다. 모여 있을 때는 그런데로 즐거웠다.

그러나 홀로 떨어져 있을 때는 더 그랬다. 그러니 고독은 나와는 오랜 친구처럼 떨어지기 어려웠다.

집게로 쓰레기를 줍고 주운 것을 봉지에 담고 담은 그것이 차면 한 자리에 모았다. 그것이 반복되는 하루를 나는 지겨워하지 않았다.

이처럼 단순한 일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서 나는 고독과 고독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매 순간 느끼고 있다.

어떤 때는 쓰레기가 매우 반가운 존재로 느껴졌다. 여기저기를 다니는데 쓰레기가 없어 허전하다가 저쪽에서 환하게 빛나는 라면 봉지를 보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마치 산속에서 약초를 캐는 약초꾼이 오래 묵은 더덕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그는 그 기분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 바로 캐기보다는 잠깐동안 온전한 몸체, 지상으로 나오기 전의 그러니까 흙속에 묻혀 있는 그것의 몸체를 상상한다.

그리고 줄기를 잡고 냄새를 맡은 다음 호미를 조심스럽게 갖다 댄다. 그런 것이다. 쓰레기를 발견하고는 대견스러워 한동안 바로 줍지 않고 내려다볼 때 내 몸은 환한 기분으로 가득 찬다.

주운 쓰레기는 바로 자루에 담긴다. 담긴 쓰레기가 어디로 가서 어떤 절차를 거쳐 쓰레기의 일생이 마감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쓰레기의 최후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고독했다. 무엇이든 살아 있든 그 반대이든 그것의 최후는 늘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살아 있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이 귀중한 것이었을까 생각하기보다는 살아 있는 존재 자체로 그는 중한 존재였다.

존재하기만 해도 그는 살아갈 가치가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모든 사람의 존재는 선하고 지구를 위해 무언가 쓰임새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존재는 그런 것을 초월한다. 뛰어넘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인류에게 선사한다. 해안가 쓰레기 작업은 연중무휴였다.

여름이 조금 더 많기는 했지만 겨울이라고 해서 적은 것도 아니었다. 파도가 밀고 왔다 밀려 가는 양은 별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쓰레기를 버렸다. 버린 쓰레기의 최종 정착지는 바다였다. 거리에서 강을 따라 내려온 쓰레기는 바다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파도를 타고 흘렀다가 어느 섬에 정착했다. 그곳에 그냥 머물 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다시 파도를 따라 먼 바다로 나가기도 했고 다른 섬에 안착하기도 했다.

썩어 없어지는 것은 그래도 나았다. 바다는 품이 넓어 썩은 것을 정화했다. 그러나 아무리 넓어도 매일 매일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양을 처리하는 것은 힘에 겨웠다.

이 많은 쓰레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나. 기업은 생산을 해야 먹고 산다. 소속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생산하고 기업은 또 성장하기 위해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한다.

세상에 나온 것은 소비되고 소비된 것은 쓰레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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