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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수난이대>(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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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수난이대>(1957)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2.1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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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이 좋은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미성년 자식에게도 수백 억대의 주식을 나눠주고 입사해서 10년 만에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대물림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행복이다.

가나의 대물림이 아닌 부자의 대물림이나 지혜의 대물림 같은 것은 마땅히 물려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수난의 대물림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절대 사절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어찌나 손을 크게 흔드는지 매달린 나무의 잎이 떨어질 지경이다. 거부하고 싶어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 오기도 한다.

좋은 것의 대물림 대신 수난의 대물림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울컥하고 딱하기 그지없다. 하근찬은 <수난이대>에서 아버지와 자식의 불행 대물림을 건조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대라고 했으니 먼저 아버지부터 이야기를 꺼내 보자. 아버지 박만도가 기분이 좋다. 팍팍한 살림에 기분이 좋은 것은 무슨 돈벼락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삼대 독자인 아들이 온다는 편지를 받았다.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편지를 뜯는 만도의 손은 크게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용을 읽고 나서는 떨 던 그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 하근찬의 <수난이대>는 일제 징용으로 팔을 잘린 아버지와 한국전쟁으로 다리를 절단한 아들의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아들을 등에 업은 아버지와 고등어 한 손과 지팡이를 손에 쥔 아들의 모습이 처연하다.

대한독립 만세에 버금가는 벅찬 순간이다. 진수, 내 아들 진수가 돌아온다. 한 줌의 뼈가 아닌 온전히 살아서 돌아온다. 그럼 그렇지. 뉘 집 자식이더냐.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통 소식이 없는데 진수는 살아서 온다. 기차역으로 마중가는 만도는 신바람이 났다. 점심 때에 도착하지만 해가 겨우 산등성이를 타고 올 때 용머리재를 올랐다.

오정이 되려면 멀었지만 마음은 괜히 바쁘고 신바람이 절로 난다.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게 있다. 병원에서 나온다는 말.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설마 나처럼 팔뚝 하나가 몽땅 잘려 나갔을 리가 없다.

총알 하나가 볼기짝이나 장딴지를 약간 스쳐 갔겠지. 그는 불길한 생각을 누르고 오르막 내리막을 지나 외나무 다리가 있는 작은 개울을 건넌다.

논두렁을 지나 한 참을 가서 바로 읍내로 접어 든다. 초가집 단골 주막에 들를까 하다가 관둔다. 눈썹 짙은 여편네와 술 한잔 먹으면서 농 짓거리를 하고 싶지만 댓돌에 신발이 여러개 놓여 있고 시끌벅적한 소리에 발길을 돌린다.

길게 뻗은 신작로를 지나 장터에서 고등어 한 손을 산다. 아들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는데 맛있는 생선을 사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더냐. 아무리 군색해도 그것 살 돈은 그에게도 있다.

그리고 정거장 대합실로 들어선다. 익숙한 곳이다. 이곳에서 만도가 징용으로 끌려갔다. 그는 잠시 상념에 잠긴다.

등골이 시리면서 이끼 낀 나무토막 같은 팔뚝이 저만치 떨어져 나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백여 명 남짓 모인 장정들은 북해도 탄광이나 남양군도 혹은 만주로 갈 운명이다. 일제에 징용당한 그들은 기차를 타고 멀리 멀리 떠났다.

그때 눈물을 흘리던 마누라( 그는 지금 어디 있는지 이 때 한 번 등장하고는 영 소식이 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언급이 없다. 내 짐작으로는 만도가 떠난 후 친정이나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럭저럭 같이 지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팔뚝이 잘려나가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집에 있었다면.)가 눈에 선하다.

하지만 기차가 떠나자 눈앞이 뿌우옇게 흐려지던 마음은 곧 사라졌다. 사흘째 되는 날 배에서 내려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을 때 만도는 주변 풍경에 압도 당했다.

마침 해질녁이라 하늘은 활활 타오르고 있지, 바닷물은 불에 녹은 쇠처럼 벌겋게 출렁 거리지 산 그림자는 바다위에 주황빛으로 둥둥 떠다니지, 만도는 무시무시하도록 황홀한 풍경에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 뿐. 배에서 내린 순간부터 만도는 죽음과 같은 노역에 시달렸다. 시골에서 농사일에 잔뼈가 굵은 만도였으나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였다. ( 얼마나 고됐으면 차라리 공습이라도 왔으면 하고 바랐을까. 그때는 일을 멈추고 엎어져 있어야 하니까. 내 철원 군생활의 교통호 작업도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된 일이었다.)

물도 맞지 않고 음식도 찌는 듯한 더위에 쉽게 변하고 병까지 들고 잠자리만한 모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덤벼 들었다. 패방 직전의 일본군( 책의 어디에서 이런 표현은 없다.)이 발악을 하고 있다.

비행장을 건설하고 비행기를 숨길 굴을 파는데 조선사람들을 마구잡이 끌고 왔다. 강제 징용. 만도는 공습을 피하기 위해 굴속으로 들어 갔다가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바람에 사고를 당했다.

앞서 말한 대로 팔뚝 하나를 어갯죽지에서 떨어트린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칠 즈음 기적 소리가 들리고 승객들이 기차에서 내린다.

만도는 아들을 찾아 두리번 거리지만 아들은 없다. 돌아설 때 등 뒤에서 아버지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진수다. 그런데 진수는 목발을 짚고 있다.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 있는 진수는 예전의 진수가 아니었다. 바람이 분다. 스쳐 가는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인다.

십 이 삽 년 전 징용으로 아버지는 팔뚝을 잘리고 아들은 한국전쟁으로 발이 잘렸다. 이쯤되면 제목이 왜 <수난이대>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것은 한 가족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약했던 우리 민족의 비극에 다름아니다.

: 하근찬은 우리의 슬픈 역사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았다. <수난이대>에 이은 <흰 종이수염>도 일제말에서 6.25전쟁 기간을 그려내고 있다.

민중의 고통과 좌절이 엄혹하지만 물러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기개가 담겼다.

다리 잘린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현실을 믿지 못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아들을 등에 업는다. 개울을 건너는데 지팡이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대신 아들은 팔이 하나 없는 아버지를 위해 고등어 한 손을 잡았다. 손이 필요할 때는 아들이 발이 그러하면 아버지가 하면된다. 둘을 그런 다짐을 하면서 용머리 재를 힘차게 넘고 있다.

그 전에 아버지는 가다가 들르지 못한 주막에서 빈속에 술을 거푸 석잔을 먹었다. 아들에게는 국수를 사주었다. 그 때는 '서방님 들어 가신다', 호기롭게 외치던 헛수작도 계집에게 하지 않았다.

여편네 궁둥이 곁에 가서 앉지도 았았다. 여간 언짢은 일이 있어도 속이 쑥 내려가는 것과 아들의 잘린 다리는 비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두 마디의 대화체 문장은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표현되는데 이는 작가의 고향이 경북 영천이기 때문이다.

희망사항이지만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사립문을 밀고 나오면서 아들을 반갑게 맞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들의 지팡이를 보고 아버지처럼 처음 잠깐만 놀라고 곧 정신을 수습해 아들을 위로해 줬기를 기대한다.

역사에서 가정이 필요없듯이 소설에서도 끝난 이후를 상상하는 것은 의미 없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수난이 여간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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