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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백치 아다다>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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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백치 아다다> (1935)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9.2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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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은 모진 것인가. 시집에서 쫓겨 난 딸에게 나가서 죽으라고 발악이다. 말로만 그러지 않는다.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사정없이 쥐어패기도 한다.

어미와 딸의 이런 관계는 아무리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고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딸은 좀 모자라지 않은가. 감싸주고 토닥여 주어도 부족한데 쌍욕에 매질까지 하니 딸의 인생은 이어지기보다는 끊어지는 것이 옳은가.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를 읽다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 이것은 인간 세상의 일이 아닌 지옥의 아귀다툼을 연상한다. 때는 일제 시대.( 작품의 그 어느 곳도 일제를 연상하거나 연관 지을 설정이나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따지면 그렇다.)

아다다는 좀 모자라다. 작가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치다. 이름 앞에 백치가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알만하다. 원래 이름 대신 아다다라고 부르는 것은 말을 잘못하는 벙어리이기 때문이다.(장애를 비하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작품속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어쩌다 나오는 말도 말이 되지 못하고 더듬거리다가 겨우 아다다 아다, 아다 하니 동네 사람들은 물론 부모도 그렇게 부른다.

작품은 아다다가 질그릇을 깨서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는 것부터 시작한다. 천성이 곱고 무슨 일이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다다는 된장을 퍼 날라야 한다는 어미의 말을 귓전에 듣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이다 제대로 사달이 났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동이 깨진 것보다는 어디 다치지나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그릇이 부서지는 대신 아다다가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아다다는 그러지 않고 살아서 버둥거린다.

나가 뒈지라는 폭언이 이어지고 머리가 뽑힐 정도로 휘둘리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 눈에 띄면 성격상 내버려 두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다다의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은 매번 이런 꼴로 나타난다. 어머니는 부지런한 아다다의 이런 성품이 반갑지 않다. 되레 성가셔 죽을 지경이다.

이쯤해서 상황을 정리해 보면 아다다는 결혼한 몸이다. 열아홉이 넘어도 시집을 가지 못하는 바보 딸을 똥 치우듯이 해치운 것이 5년 전이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으니 벼 한 섬지기를 시댁에 주는 조건으로 혼례를 치렀다. 처음에 시댁은 아다다를 몹시 귀여워했다. 없는 살림에 논을 가져 왔으니 이 아니 고마울 수가 없다.

더구나 남편은 스물여덟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다. 비록 바보라고 해도 아다다를 색시로 얻고 논도 생겼으니 부지런한 남편은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다.

문제는 다음에 생겼다. 돈으로 시집간 아다다는 돈 때문에 소박을 맞았다. 아다다가 가져온 종잣돈을 밑천 삼아 시댁은 돈을 모았다. 방탕해진 남편이 어느 순간 말아먹었으나 투기질로 떼돈을 벌었다. 집을 짓고 색시를 사 왔다. 똑똑한 며느리에 시댁 어른들도 아다다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피신해 온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모닥불을 뒤집어쓰는 것과 같은 끔찍한 친정엄마의 음성이나 손찌검 정도는 남편의 그것에 비할 것이 아니기에 할 수 없이 도망쳐 온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딸을 위로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품어 주어야 어미의 도리다. 그러나 아다다 어미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아다다가 백치이며 일을 저지르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차마 나가서 죽으라는 말을 하기는 어려운데 그런 말을 예사로 한다.

그냥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참말로 그렇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은 질긴지라 아다다는 마음속으로 숱하게 죽었어도 실행에 옮기는 것에는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 겁에 질린 아다다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을까. 이 위기를 극복할 다른 대안은 없을까.

있다. 홀아비로 사는 그 마을 수롱이가 자신을 버린 남편과 구박하는 어미를 피할 안식처로 딱 들어맞았다. 수롱으로 치면 피붙이 하나 없는 노총각으로 가난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럽다. 한 마디로 별 볼 일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수롱은 아다다에게 마음이 있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는 잘 아는 그는 어렷한 색시를 얻어 장가 가기는 틀렸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다.

아다다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아다다는 초시의 딸이라 순 상놈인 자신이 생각하면 과분할 수도 있다. 마음은 있지만 적극 대시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마침 아다다가 그의 오두막집을 찾아 왔다.

둘은 인근 섬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거기서 행복하게 살기로, 예식대신 굳은 언약을 했다. 아다다의 불행은 끝나고 행복은 시작한 것인가. 그러나 아다다는 수롱과 함께 하면서 비극의 정점을 찍고 만다.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아다다와 돈과의 관계를 조금 설명해야겠다. 가난뱅이 수롱이 에게는 평생 모은 돈이 조금 있었다. 밭을 사고 일굴 만한 돈이었다. 그 돈으로 아내를 살 수 있다. 그러나 아내를 사면 땅은 살 수 없다. 영리한 수롱은 공짜아내 아다다를 얻고 그 돈으로 땅을 사 가정이라는 것을 가지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아다다의 생각은 달랐다. 수롱이 돈을 내놓자 아다다는 화색이 돌기보다는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칠 것을 지레 짐작했다. 기쁘기보다는 눈을 내리깔고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남편도 가난할 때는 자신을 사랑했으나 돈을 벌면서 구박하고 첩을 들이고 종래는 쫓아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수롱이가 밭을 살 만한 돈 자랑을 하자 그 돈을 바다에 던져 버린 것이다. 밭에서 나는 곡식은 쌓이고 쌓여 더 많은 돈을 벌어 올 것이고 그러면 전 남편처럼 수롱이도 자신을 버릴 것으로 아다다는 믿었던 것이다.

평생 남의 일로 돈을 한 푼 두 푼 모았던 수롱이가 보기에 바다에 돈을 버린 아다다는 정말로 미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그가 발로 차서 바다에 떨어 뜨린 것은 그의 성미가 불같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엄청한 일을 아다다가 벌였기 때문이었다.

: 계용묵의 본명은 하태용으로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수학했으며 1927년 단편 <최서방>으로 문단에 나온 후 1928년 <인두지주>를 발표하고 1935년 문제적 작품인 <백치 아다다>를 내놔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인간의 순수성과 선함을 옹호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그러면서 불순과 악에 파멸되는 인간상을 구현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끄집어내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단순히 그런 세태를 묘사하는데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한편 <백치 아다다>는 물질 만능 시대에 돈과 인간과 사랑과 애욕의 보여줬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에서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돈이 없어도 문제고 있어도 문제투성이인 자본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돈이 반드시 행복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로 시작하는 나애심이 부른 ‘백치 아다다’ 노래를 들으면서 야속한 운명 아래 맑은 순정 보람없이 세상 떠난 아다다의 젊은 넋을 위로해 본다.

나애심은 1956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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