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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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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도덕경>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05.01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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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주전자를 가지고 놀기에 적당한 날이 있다. 비가 와서 샘물은 풍족한데 날이 좋아 마당이 마른날이 그런 날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때가 호시절이었다. 땅꼬마 시절이니 족히 수 십 년은 지났을 것이다. 마당의 경사진 위쪽으로 가서 물을 붓기 시작하면 물은 줄을 남기며 아래로 흘렀다.

작은 구덩이가 있으면 채운 다음 다시 흘렀는데 한 번도 거꾸로 역류한 적이 없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흘렀고 가는 곳이 깨끗하거나 더럽거나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갑자기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 것은 노자의 <도덕경> 때문이다. ‘상선약수’라는 말을 그 때는 당연히 알지 못했지만 물은 아래로 내려가 아무리 작은 구멍이라도 채우고 간다는 것은 알았다.

제 8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경구인 상선약수를 좀 더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노자의 핵심사상이 여기에 담겨 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기기만 할 뿐, 그것들과 결코 겨루는 일이 없으며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해 흐를 뿐이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도는 실천하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낮은 곳이 아닌 높은 곳을 원하기 때문이다. 물처럼 언제나 낮은 곳을 찾는 일은 인간은 어찌해 볼 수 없는 신의 경지에 오른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노자는 왜, 인간을 신의 경지로 올려놓으려고 이런 말을 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수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알 수 없다.

그 자신도 종장에 해당하는 81장에서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면서 “선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변론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부정하는 듯 한 말을 써놓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읽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는 유행가 가사와 같은 것이 <도덕경> 아니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이미 도를 깨쳐가는 사람이라고 대답해도 무난할 것이다.

도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제 1장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라는 것.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 도인가. (좋다. 질문은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

도를 아는 길은 이처럼 멀고 험하다. 쉽지 않다고 해서 시작도 하지 않고 멈출 수는 없다. 책의 내용 중 이해하기 쉬운 것만을 옮겨 놓는 것으로 일단 이해의 폭을 좁혀나가 보자. (모를수록 자꾸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도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이 방법밖에 없다.)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고 착한 것은 악한 것이 있기 때문이며 긴 것은 짧은 것이 있기 때문이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반어적인 이 말은 이들이 독립된 것이 아닌 서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다시 말해 상대적인 것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말고 귀중하다는 것을 귀히 여기지 말며 탐날 만한 것을 보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사람 사이에 다투거나 훔치거나 사람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4장에서는 “도는 그릇처럼 비어 쓰임에 차고 넘치는 일이 없고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주며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된다” 고 말한다.

여기에 익히 알려진 ‘화광동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도는 티끌 다시 말해 세상과 하나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세상과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간다는 것.

도도한 곳에 있는 것이 도가 아니라 숱한 먼지 속에 도가 있으니 도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도는 세상 도처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기도 한데 보이지도 않고 볼 수 도 없으니 갈고 닦은 원석이 아니라 다듬지 않은 통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잘 말라 틀어지지 않는 통나무를 대패질하고 싶다. 무언가 만들려는 욕심이라기보다는 그저 이마에 땀을 흘리고 싶을 뿐이다.)

제 7장에서는 이런 말도 한다.

“하늘과 땅이 영원한 것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며 성인이 그러한 것은 자기를 위해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 한다” 는 것. 역설의 미학이다. 굳이 이런 명언에 설명이라고 덧붙여 사족을 만들 필요는 없다.

제 18장에서는 공자의 <논어>를 비판하는 듯 한 모양새도 취한다.

“대도가 패하면 인이니 의니 하는 것이 나서고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며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되고 가족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효니 자니 하는 것이 나서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겨난다.”

인이나 예가 없으니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것을 강조하는 사회는 이상사회가 아니고 덜 되거나 병든 세상이니 인을 그만두고 의를 버리면 효성과 자애를 회복 할 수 있다는 것.

겉으로 보이는 인이나 예는 노자가 보기에 천박하기 그지없다. “군자는 죽어서 이름을 내지 못하는 것을 걱정 한다” 는 세속적인 유교의 해석에 이르면 노자는 부질없는 짓을 그만두라고 호통을 친다. (그런 면에서 <도덕경>은 <논어>보다 더 깊은 곳을 다닌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넘치도록 가득 채우지 말고 적당할 때 멈추고 낳았으나 가지려 하지 말 것이며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지 말고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으며 움푹 들어가면 채워지게 되고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 당하게 되며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이고 조용한 것은 조급한 것의 주인이며 정말로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고 흰 것을 알면서 검은 것을 유지하고 영광을 알면서 오욕을 유지하고 배는 채우되 욕심은 버리고 장차 빼앗으려면 먼저 주고 밝으면서도 어둡고 물러나면서도 나아가고 희면서도 검으라” 라고 한다.

아리송하다. 옳고 그른 것의 딱 부러짐이 없다. 흑백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치면 회색인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니 이런 말이 자연히 나왔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상선약수만큼이나 유명한 이런 글귀에 접하면 아찔하다. 간신히 참아왔던 정신 줄을 놓지 않을 수 없다. 깊고 깊은 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하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끊없는 반어법의 반복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현실과 따로 놀지도 않는다. 노골적으로 위정자를 질타하기도 한다.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윗사람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가기 때문이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이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이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그러면 노자의 이상사회는 어떤 사회인가하고 한 번쯤 반문하게 된다. 노자는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의 백성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을 도가적 이상사회로 보았다. 목자적인 사회가 이런 사회일까.

인구가 줄어드는 요즘 우리나라의 현상을 보고 노자는 이상사회와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하지 않을까. ( 한국을 보라, 이상사회로 가는 이상적인 국가가 바로 이 나라다.)

: 도는 이름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답이 없다는 이야기다. 의존하지 않고 절대적이며 한정이 없다.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보잘 것 없지만 천하에 누구도 신하 부릴 듯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개천과 계곡물이 강이나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처럼 채움의 길을 버리고 비움의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 도에 가깝다는 것이다. 현대와 같은 세상에서 노자님의 말씀은 딱 머리에 들어오기 보다는 한가한 소리쯤으로 치부될 수 있다.

바삐 일해도 먹기 살기 힘든데 좀 쉬라고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고 처세술을 배우고 읽혀 스펙을 넓혀야 하는데도 진리를 찾고 도를 닦으라고 한다.

가진 것을 버리고 더 가지려고 하지 말며 우주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라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진리의 길을 찾으라니 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허나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굳센 것을 이긴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마냥 허튼소리라고 무시할 수 없다. 무위자연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도식이라기보다는 억지로 꾸미지 말고 과장하지 말고 허세부리지 말고 가식이나 위선대신 진실로 대하라고 이해한다면 쉽다.

선한 사람에게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하면 선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여러 번 상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장부터 37장까지를 상편 도경이라고 하고 38장부터 81장까지를 하편 덕경이라고 해서 둘을 합쳐 도덕경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도 오래전에 나와서 정말로 노자가 썼는지도 의문이고 썼다면 혼자 썼는지 아니면 여럿이 썼는지 수년에 걸쳐서 썼는지 단숨에 내려 썼는지에 대한 주장도 분분하다.

공자와 동시대인이라고도 하고 그보다 앞서거나 뒤섰다고 말하기도 한다.(세상에 나타나기 보다는 주로 숨어 지내서 더욱 헷갈린다.)

해석도 넘쳐난다. 그런데 대개는 왕필이나 하상공의 주석서를 참고로 한다고 한다. 5,000자 81장에 불과하나 수 천 권의 장서를 소장한 사람에게 이 가운데 하나 만 집어 들으라고 하면 서슴없이 <도덕경>을 빼든다고 한다.

한두 번 읽기보다는 오래 곁에 두고 참 뜻을 헤아려 보기에 이만한 책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그런가. 그런지 않그런지는 읽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그러니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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