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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6:02 (금)
270. 충녀(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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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충녀(1972)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12.1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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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감독의 여(女) 시리즈 완결 편은 <충녀>(蟲女)다. 하녀(下女)와 화녀(火女)도 그렇지만 벌레 여자로 번역할 수 있는 <충녀>는 제목이 아주 심상치 않다.

이 심상치 않은 제목의 주인공은 <화녀>에서도 같은 이름(명자) 이었으며 같은 배우인 윤여정이다.

명자는 직업이 첩이되기 전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꿈 많은 여고생이었다.

젊음과 청춘에 대해 당돌하게 담임선생님 앞에서 외칠 수 있는 그녀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첩의 자식들은 장례식장에 참석도 못한다.) 기우는 가게 앞에서 긴 머리 땋고 흰 칼라가 어울리는 교복은 거추장스럽다.

첩살이의 전 단계는 요정이다. 어머니의 강요와 등 떠미는 대학생 오빠의 성화에 못 이겨 19살 명자는 외할머니와 엄마에 이은 3대째 이어오는 첩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후실이나 소실, 작은 어머니로 불리기도 하는 첩은 좀 더 세련된 표현인 세컨드라는 현대적 용어로 대체된 지금은 거의 죽어가는 언어지만 이처럼 간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참고로 첩은 법률상의 처나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와는 다른 의미로 남자로부터 지속적으로 경제적 원조를 받는 대신 성적 관계로 맺어 졌다는 점에서 단순한 섹스 파트너와는 구별된다. 과거의 첩은 신분이 양민이었을 때는 양첩( 첩 중에서 최상위)으로 불렸으며 기생이면 기첩, 종의 신분이면 비첩, 천민이면 첩 중에서 가장 천한 천첩으로 불렸다.)

굳이 분류하자면 명자는 이중에서 첩 중에서는 그래도 양반인 양첩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기첩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여러 남자를 거치지 않고 첫 남자의 첩이므로 기첩대신 양첩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교복대신 연두색 짧은 미니스커트와 그에 어울리는 작은 핸드백을 들고 요정에 출근하는 명자는 어느 날 돈은 많으나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동식( 남궁원)을 만난다. ( 남궁원은 <화녀> 에서도 잘 어울리는 윤여정의 파트너였다.)

 

그리고 그가 잘 난 부인( 전계현)의 위세 때문에 기가 눌려 발기불능상태에 있다는 사실도 안다.(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술집 마담은 ‘내 처는 처녀가 아니었다, 나는 처녀가 필요하다’고 외치며 아내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동식에게 시골서 막 올라온 숫보기(숫처녀) 명자를 겁탈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손을 등 뒤로 묶인 명자는 돈이면 제일이냐고 발버둥 쳐보지만 앞뒤로 칼날이 달린 예리한 양면 면도칼로 마담이 시키는 대로 옷을 도려낸 다음 자신감을 얻은 후 일을 벌인 동식의 여자가 된다. ( 그 전에 동식은 첫 번째 시도에서는 어설프게 달려들다 실패한다. 그 분풀이로 명자의 따귀를 때리고는 여자란 때려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기분도 좋고 어쩐지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것임을 예고한다.)

아침이다. 고가도로 아래는 차량이 분주하다. 어제의 명자가 아닌 오늘의 명자는 이제 동식 없이는 못사는 신세다. ‘내 처와 대결해야 한다’ 는 동식의 말을 듣고 첩살이 정도는 해볼 만 하다는 듯이 혀를 삐죽이 내 민다.

명자의 말을 돌려 표현하면 동식은 이제 죽은 남자에서 산 남자가 됐다. 지금은 왕성하다는 말로 ‘저이는 남자구실을 할 수 없다’는 부인을 아주 무안하게 만들더니 한 술 더 떠 부인이 늙어 피부에 탄력이 없고 산송장과 사는 기분이라고 동식이 했던 말을 본처에게 전할 때 표정은 장난기가 가득하다.

분에 못 이겨 따귀를 한 대 치기는 했지만( 잘도 때린다. 연습을 많이 했는지 아주 실감이 난다.) 본처는 어쩔 수 없이 후처로 명자를 받아들인다.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면 살인이 난다는 명자의 대거리에 그만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부인은 자정 전에는 반드시 남편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등의 몇 가지 조건을 명자가 수용하자 아파트를 얻어 주고 다달이 생활비를 대준다. ( 이 집의 경제권은 남자아닌 여자에게 있다. 그녀는 대형 트럭 일을 하는 업체의 사장이다.사장이지만 일보다는 첩을 감시하는데 더 시간을 쓴다.)

두 집 살림을 하는 남자는 바쁘다. 자다가 일어나서 밖에서 운전수를 대동하고 기다리는 부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가 다음날 다시 첩의 집을 찾는 것이 비록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 해도 한가할 수만은 없다.

부부에게는 장성한 아들과 딸이 있다. 첩과 나이가 엇비슷한 딸은 피아노를 잘 치는데 곡은 정해져 있어 언제나 로망스다.( 이 노래는 어떤 상황에도 잘 어울린다.)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첩의 사이에 끼어서 괴로워한다.

우유부단한 남편은 본처 보다는 첩에게 끌린다. 애교도 있고 젊고 마사지도 잘한다.( 등 뒤에서 두드리다가 어깨 쪽 높이에서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가면서 짝, 짝 소리가 나게 하는 동작은 정말 보기에 좋아 절로 입이 벌어진다.)

둘이 오순도순 좋아하니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본처는 용납 할 수 없다. 거부하는 남편을 술 먹여 혼절 시킨 후 억지로 정관수술을 받게 한다. 남편과 첩은 먹여 살려도 더러운 자식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울먹인다. ( 그 심정 이해할 만하다.)

명자는 여자는 애를 갖지 못하면 남자를 더 이상 잡고 있을 수 없다며 그 나름대로 고뇌하며 죽는 시늉을 하고 남자도 따라하는 장면은 아주 가관이다.

그 즈음 딸은 흰 쥐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작은 엄마에게도 선물한다.

명자는 그 쥐와 놀기도 하고 물리기도 하고 때려잡기도 하는데 어느 날 냉장고를 열자 아기가 들어 있고 그 아이는 또 쥐를 갖고 놀고 그 와중에 운전사는 명자를 겁탈하려다 실패하고 하수구 뚜껑 속에는 안 보이던 아기가 있고 쥐떼로 소름이 돋는데 남자는 본처를 애들 앞에서 무시하고 그 여세를 몰아 명자와 한바탕 일을 치른다.

유리위에 알사탕을 쏟아 놓고 벌이는 대낮의 정사는 동그란 사탕과 유리라는 장치를 통해 기괴함을 배가 시키고 본처가 들이닥치고 화난 남자는 내일 아침 군대 가는 아들의 따귀를 때리고 고소하겠다고 덤비는 본처에게 월급을 줬으니 간통죄( 지금은 폐지됐다.)가 안 된다고 고등교육을 받은 명자( 이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한다.)는 되받아 치면서 월급이고 집이고 다 필요 없고 남자를 달라며 떼를 쓴다.

이 정도면 아주 막 간 것이다. 그러니 이후의 상황은 대화로 풀 수 있는 단계를 지났다. 더 설명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말이다. 김기영 감독은 <충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84년에 <육식동물>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했다.

국가: 한국

감독: 김기영

출연: 남궁원, 윤여정, 전계현

평점:

 

: 남자와 여자가 서로 운이 통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일찌감치 헤어져야 한다. 이것은 남녀 관계의 철칙이다. 그런데 본처와 첩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큰 고난도 사랑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했으나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는 이런 말 쯤 하는 것도 괜찮겠다. ‘이 세상에 한 번 뿐인 내 인생이 나온 건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서는 반쪽만 내 것이었으나 저 세상에서는 모든 게 내 것이다.’

이 대목에서 첩의 한을 이해할 것만 같다.

두 여자의 보살핌으로 오래 살 것 같던 남자는 바람처럼 스치는 칼 날 한 번에 피를 흘리며 계단으로 굴러 떨어져 저 세상으로 가고 냉장고안의 아기는 인형으로 변해 있고 아들을 태운 입영열차는 환호를 받으며 떠난다.

첩년은(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오해 말기를. ) 누구나 가슴에 화약을 품고 있듯이 명자도 남자를 따라가고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첩을 중심으로 본처와 남자와의 삼각관계가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서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한 두 여자의 심리 묘사가 살아 있고 첩으로 인해 남자로 다시 살아난 남편의 생기가 영화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쥐와 그 무리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삶보다는 죽음으로 연결된다.

‘여자가 남성을 잡아먹는다, 남권을 찾아라’ 는 정신병원의 대화는 정신병자의 혼잣말에 불과하다고 여겨도 된다.(감독의 의도는, 아닌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뚝뚝 끊어지고 이유없이 건너뛰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국도극장에서 상영된 이 영화를 선전하는 당시의 지라시를 보면 금년도 최고 흥행 기록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랑이 있으면 믿고 싶다거나 두려움, 놀라움, 이 지상에 천국과 지옥이 있었다, 범람하는 현대의 욕망, 위험한 여성의 남성 편력' 등의 글자가 굵은체로 표시돼 있는데 이를 옮긴 것은 영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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