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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약국 윤태윤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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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약국 윤태윤 약사
  • 의약뉴스
  • 승인 2005.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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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그는 산동네 약사였다. '연탄길'(이철환 著)에 묘사되는 산동네보다 더한 곳이었다. 그 곳에서만 20년을 보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산동네. 그 언저리에서 일곱평 짜리 약방(?)을 운영하고 있다.

예전의 환자들이 그를 기억하고 찾아주는 게 고맙다. 세월이 흐른 만큼 약국을 넓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연탄불을 빌리러 다니던 이웃과 함께 더불어 보냈다는 사실이 후회스럽지는 않다.

◇산동네…그 사람냄새 나는 곳

윤태윤 약사(67)는 그저 평범한 약사다. 산동네에 머물고 싶어 둥지를 튼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지난 1968년 처음으로 약사생활을 시작한 곳이 정릉이었고, 그 다음이 봉천동이었다. 가장 최근에 머문 곳은 신림동 산동네였다.

"동네 이름은 B지구였다. 동네가 처음 생기기 시작할 무렵엔 거의 판자촌이었다. 술꾼과 막노동꾼이 그 곳에 모여 살았다. 주변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새벽 두어 시가 넘은 시간에도 약국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잦았다."

윤 약사는 서서히 그들에게 섞여 갔다. 산다는 것은 그리 특별할 것도, 별다를 것도 없다. 그저 부대끼며 사는 게 '인생'이라고 윤 약사는 말했다. 그런 점에서 B지구는 사람 살 만한 곳이었다고 했다.

◇연탄불과 따뜻한 가슴들

B지구에 차렸던 약국은 '원일약국'이었다. 그 곳이 지난 1997년 재개발이 되면서 윤 약사도 둥지를 지금의 금정약국(신림본동)으로 옮겼다.

산동네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또 다른 산동네를 전전해야 했고, 다소 여유있는 부류는 아파트에 입주했다.

산동네는 타지 사람들로 채워졌다. 낯설고 선득한 느낌의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그 속에서 윤 약사는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고 했다. 연타불이 꺼져 불을 빌리러 오던 순진한 이웃, 그 따스한 가슴들이 그립다고 했다. 그런 탓에 윤 약사는 그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약국을 대부분의 환자는 노인들이다. 우연히 옛 이웃이 찾기도 한다. 그때는 박카스 한 병을 더 내놓는다. 다른 이웃들의 소식을 전해듣는 값이다."

<사진2>

◇덕성여대 59학번…약사로서의 자존심

의약분업 전에는 약사가 의사의 역할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특히 산동네에선 더 그렇다. 새벽에 약국문을 두드리는 새댁에게 열이 펄펄 끓는 아기에 대한 조언을 해줄 수도 있었고, 숨이 넘어가는 사람에게 응급조치를 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B지구에서 사람 목숨 여럿 살렸다. 병원도 멀었고, 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같으면 큰일(?)날 소리다. 그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 살맛이 난다."

윤 약사는 지금은 별로 재미가 없다고 했다. 약사가 의사의 지시(처방전)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위치에 섰다는 말이다. 윤 약사가 약대에 진학할 무렵엔 의대보다 오히려 학력고사 점수가 높았다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약사 가운에 대한 '불만'

최근 약사 가운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다. 윤 약사는 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약사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굳이 약사만 가운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약사 가운은 일종의 위생복이다. 병원에서는 사무장이나 간호사도 입는다. 왜 약국에서는 약사만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약국 근무자들도 위생복을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

다만 약사의 경우 반드시 명찰을 착용토록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그는 강조했다. 카운터 척결로 약화사고를 예방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약사 가운을 모두 걸친다고, 혹은 그렇지 않는다고 해서 약사로서의 자긍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산동네 약사'로서의 변명

그는 이제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세련되고 말쑥한 노인은 되지 못했다. 그저 이웃집 할머니의 모습만 남았다. 40여년간 약사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라곤 일곱평 짜리 약국과 그를 기억하는 가난한 이웃들이다.

"남들만큼 돈도 벌지 못했고, 집도 사지 못했다. 누군가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구멍가게 주인이라고 답한다. 굳이 변명을 할 필요가 없는 탓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고 싶다고 그는 전했다. 사정만 허락한다면 어린아이와 노숙자를 위한 '자활센터'도 운영해보고 싶다. 그러러면 돈이 필요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돈 버는 일에 매진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든, 그렇지 못하든 그는 행복하다. 이따금씩 산동네 약사인 그를 기억하는 발길이 약국 문턱을 넘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의약뉴스 홍대업 기자(hongup7@news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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