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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데미안>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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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데미안> (1919)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6.06.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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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은 도처에 있다. 어린 아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으니 8살이 틀림없겠다.

어느 날 구석진 골목길에서 한 녀석이 나를 찾았다. 뒤돌아보니 악당이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덩치가 내 배는 됐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주먹이 세서 다들 그를 대장이라고 불렀으나 나는 그를 악당이라고 여겼다.

“왜? 대장” 하고 내가 다가가자 그는 대 놓고 내 가방을 뒤져 연필과 지우개를 가져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울지도 못했고 더구나 항의하는 말은 꺼낼 수도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숱하게 대장에게 책받침이며 아직 쓰지 않은 새 노트를 뺏겼다. 그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은 2학년이 돼서 그와 반이 갈라서면서 부터였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악당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그의 수중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 1년 동안 나는 악당인 대장의 졸병이었고 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형이나 누나에게 이 일을 말하거나 아니 선생님에게 고자질을 했더라도 나는 대장의 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고 그 이후 더 힘든 시련의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확신한다.

어린 나이에도 이것은 누구에게 말해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대장과 나 사이에 있었던 상하관계를 스스로 깨지 못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사실을 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주인공인 나 싱클레어는 행운아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이후 프란츠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됐지만 데미안이라는 걸출한 인생 선배를 만나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했다.

순식간이라고 했지만 데미안이 나타나기 전까지 내가 초등학교 때 겪었던 것과 비슷한 숱한 불면의 밤과 허리를 꺾는 듯 한 고통은 싱클레어라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콱 하고 죽어 버렸으면 하는 나날이 며칠간 계속되기도 했겠는가. 아버지가 술꾼이며 싱클레어 보다 세 살이나 많은 그러니까 13살 쯤 되는 어른 티가 나고 말투와 걸음걸이에서 직공들의 흉내를 내는 크러머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난 것은 기적이었다.

막스 데미안이 거짓말처럼 그 앞에 턱 하니 나타나지 않았다면 싱클레어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데미안은 내가 사는 도시에 전학 온 유복한 미망인의 자식으로 나보다 학년도 위고 나이도 몇 살 더 들었다. 실제로는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고 선생님에게 맞설 정도로 단호하고 자신감이 넘쳐흘러 곧 나는 물론 모두의 관심을 끄는 존재로 부상했다.

 

그는 내가 크로머의 노예 신세였을 때 카인과 아벨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구원의 짙은 향기를 뿜어주었고 새로운 자유를 찾아 주었다.

훔치지도 않은 사과를 그것도 보통사과가 아닌 최고 품종의 사과를 훔친 것을 자랑했다가 협박 질에 그만 그가 하라는 대로 하고 나오라는 장소에 나가 제발 경찰이나 부모에게 도둑질한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 싱클레어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나는 확실히 안다.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마치 새 세상이 열리는 것과 같은 황홀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혹은 누군가의 도움 때문이라 하더라도 빠져 나온 이상 그것은 해방이며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될 마음의 평화를 의미한다.

“난, 가난한 놈이다. 너처럼 부자 아빠가 없으니 돈을 가져오라”는 협박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싱클레어는 이제 그 전의 그가 아니다.

사악한 적을 생각하며 토하지 않아도 됐고 집 앞에서 나오라고 불어대는 휘파람 소리에 더는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됐으며 어머니가 어디 아픈가하고 걱정하면서 가져온 초코릿을 먹지 않는다고 울부짖지 않아도 됐으며 의사가 찾아와서 아침에 차가운 물로 씻으라고 내리는 처방을 듣지 않아도 됐다.

그 후로도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고 마음속의 여자 베아트리체에 연정을 품고 술집을 드나들고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주저앉을 때마다 나타나는 구세주였으며 살아있는 신이었다.

시쳇말로 든든한 멘토였던 것이다. 인생의 긴 여정을 항해하면서 데미안과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 세상에서 살만한 가치를 얻은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아무나, 누구나 데미안의 조언과 충고와 해결책을 들을 수 는 없기 때문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만났다가도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어떤 끈 같은 것, 예를 들면 그림이나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 등을 통해 마지막 장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한다.

데미안이 장교로 군대에 징집되고 싱클레어도 전쟁에 나가기까지 그러니까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도 나와 데미안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을 설계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알에서 깨어 나오는 것이다.

: <데미안>은 저자 서문을 제외하고 모두 8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나뉘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서로 독립된 것이라기보다는 앞에 것과 시간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다. 첫 장인 두 세계에서는 편안한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과 함께 하는 삶과 프란츠 크로머에게 시달리는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카인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고 베아트리체에서는 마음속의 이상형인 여자를 그리는 숨 막히는 청소년기를 회상하고 있다. 누구나 관통해야 하는 성의 몸부림을 주인공도 비켜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혹은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이 문구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이야기는 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데미안>을 모르는 사람도 새와 알에 관한 이야기는 알고 있다.

데미안과 헤어진 후 싱클레어는 우리 집 문양에 그려져 있는 새의 그림을 그에게 보낸다. 데미안은 곧 답장을 하는데 답장은 그 유명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알락사스.” 로 끝나는 내용이다.

그는 이 문장의 화두를 들고 헤맨다.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압락사스라는 낯설고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선다.

그러다가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영혼의 울림을 깨닫는다. 피스토리우스는 말하자면 데미안처럼 새로운 조언자였던 것이다. 눈 여겨 볼 대목은 7장의 에바 부인이다. 그는 에바 부인을 사랑하고 에바 부인과 데미안을 동일시한다.

낡은 구시대와 작별하고 새로운 신세계를 맞아 자아를 찾아가는 나의 인생 여정에서 <데미안>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될지 모른다. 두 세계에 갇혀 불안과 고통에 떠는 한 젊은 영혼에게 바치는 찬가라고나 할까.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6년에 썼고 출간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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