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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종각역 인근에서 맞춘 한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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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종각역 인근에서 맞춘 한복을 입었다
  • 의약뉴스
  • 승인 2013.03.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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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이야, 어머니가 이 말을 했다면 나는 속이 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지금까지 나에게 다 너 때문이야 라고 말한 적이 없다.

편한 곳으로 전출시키기 위해 시간과 들인 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등병 생활도 다 끝나가니 고생도 할 만큼 한 게 아니냐, 그러니 이번에는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건 어떠니? 하고 물었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걱정 말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웅크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무릎담뇨를 덮어 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네 자랑이다. 자신보다 아들이 사업 수완이 더 뛰어나다며 벌써부터 건설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믿을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그런 책임감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는 건설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돈도 관심이 없었고 나는 제대하면 내가 하고 싶은 다른 것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어머니가 이 말을 내가 아닌 형에게 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를 보면 형이 떠올랐다. 어머니 얼굴에 형 얼굴이 겹쳐지기도 했다. 어떤 때는 어머니가 나를 보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형에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마에 생긴 일자주름도 형 때문에 생긴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나는 어머니의 일념이 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보다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했으며 심신도 깊었던 형에 대한 애착을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청소하다가 이유 없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깜짝 놀란 것처럼 나는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싫어 고개를 들었다. 액자 속에서 형이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가족사진을 올려다 봤다. 그리고 자러 가야 겠다고 말했다.

말은 했지만 나는 어머니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로 아버지 사업은 잘 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형 소식은 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졸렸고 피로가 몰려왔고 취기가 금새 올라왔다. 나는 쓰러져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달라져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업은 잘 된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한 숨 속에서 나는 돈 걱정은 안하니 형의 안부만 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어머니의 희망을 읽었다. 나는 막연히 전에도 그렇지만 형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이 세상 사람이라 하더라도 살아 있는 모습으로 더는 우리 가족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방정맞은 생각이었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그 생각은 좀체 떠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바에야 죽은 모습으로도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이 나는 싫었다. 아니 내가 싫은 것은 어머니의 곡 소리일 것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어머니의 간장이 끊어 지는 그런 광경은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어머니는 품고 있을 것이고 그 희망이 있는 한 어머니는 버틸 것이다. 간혹 생기있는 목소리가 반짝이는 눈에 어릴 때 어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제 가서 자라, 어머니는 눈짓으로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일어서려고 했다.

거실을 가로 질러 가면서 나는 천장에 걸려 있는 금장식의 가족사진을 다시 보았다. 형이 대학입학을 하고 나서 기념사진으로 찍은 것이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형은 사진 속에서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다. 웃고 있는지 이빨이 조금 드러났고 눈은 옆으로 가늘게 벌어졌다. 나도 웃고 있었고 아버지도 웃었는데 제일 환한 모습은 어머니였다.

한복을 입었는데 나는 종각역 근처에서 맞춘 것을 알고 있다. 한복을 찾는 동안 두 어번 치수를 재기 위해 어머니와 동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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