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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인생으로 승화시키는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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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인생으로 승화시키는 경지
  • 의약뉴스
  • 승인 2007.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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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허진호의 <행복>

   
▲ 허진호는 <행복>을 통해, 사랑이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복>은 허진호의 영화도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0대 후반의 감수성이 날카롭게 살아있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20대 중반의 생생한 아픔이 녹아있는 <봄날은 간다>를 지나, 30대 중반의 사랑의 고통이 부각된 <외출>을 넘어, 나이 먹어 한번쯤 뒤돌아보는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행복>을 통해, 사랑이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허진호는 보여주었다.

허진호의 네 번째 영화 <행복>은 <외출>을 연출하기 이전에 이미 시나리오를 완성한 영화였다. 그래서 허진호 영화의 순서를 보면, 이 영화는 <봄날은 간다>와 <외출>의 사이에 있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했다. 아마도 허진호는 불가능한 사랑도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믿는, 아니 불가능한 사랑의 아픔이야말로 사랑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행복> 역시 사랑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사랑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외출>과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허진호가 사랑의 불가능을 이야기할 때에는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설정해 둔다. 불치병이거나 사회적 관습이 거대한 산처럼 앞을 가로 막는다. <행복>에서는 그것이 공간적 설정과 상황으로 변모한다. <행복>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서울과 시골을 비교하는 것이다. 기존의 그의 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영화의 주배경은 서울이 아니라 한적한 중소도시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것이 더욱 심화된다. 병을 앓고 있는 영수(황정민)가 내려온 곳은 전북 장수의 산골에 있는 요양원이다. 서울에서 바를 운영하다가 폐업을 하고 병까지 얻어 내려온 그곳에서 만난 여인이 8년째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요양원 스탭 은희(임수정)이다.

   
▲ 영화 <행복> 역시 사랑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은희는 순수한 여인이다. 허진호의 영화에서 이미 등장했던 다혜(심은하)나 상우(유지태)처럼 그녀는 세상의 먼지와 거리를 둔, 너무나 순수한 여인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고아 은희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같이 살자고 먼저 제안한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둘의 동거가 정겹게 이어질 때이다. 시골의 작은 집을 구해 아기자기하게, 서로를 위해 주면서 살아가는 두 사람의 생활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사랑의 판타지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지극하게 위해 주는 마음만 있다면 이 세상은 충분히 따뜻하고 살 만한 것 아닌가.

이제까지 많은 영화를 보아왔지만, 이 장면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찾기는 쉽지 않다. 서울의 거칠고 황량한 생활에서 벗어나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자연과 더불어, 욕심 없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는, 순수한 생활이 아닌가. 농사 일을 거들면서 자연과 하나 되는 마음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영수는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나 젊었다. 그의 병이 다 나으면서 상황은 돌변한다. 영수는 1년 동안 술과 담배를 끊으면서 은희와 더불어 노력해 병을 고쳤지만, 그에게는 시골 생활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그는 서울 생활을 동경한다. 은희와 영수의 동거는 아름답지만 끝까지 가지 못할 성격의 중간 생활에 불과하다. 전에 서울에서 영수와 동거하던 고급 부티크 숍매니저 수연(공효진)이 아우디를 몰고 와 “자고 갈까?”라는 한마디에 그는 이미 흔들려 버렸다.

이제부터 파탄이 이어진다.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나”라며 사랑을 보냈던 대사가 이번에는 “개자식, 니가 인간이야?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로 변한다. 사랑의 아픔의 격렬함을 견뎌내지 못하는 한 여인의 비참한 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은희는 영수를 보내고야 만다. 잡아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이 떠난 사람은 잡는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떠난 사람의 마음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은 마치 식초를 삼키는 것 같은 고통을 매일매일 감당해야 한다.

   
▲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허진호는 그 쓸쓸함을, 결국 인생의 쓸쓸함을 한 편의 이야기로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은희를 버리고 서울로 올라간 영수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바를 새로 운영하고 잘 나가는 숍매니저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었을까? 아니다. 정반대이다. 영화의 결말은 영수가 은희를 떠날 때 이미 결정되었다. 몸이 아픈 은희에게 마음도 아프게 한 영수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한다.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었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채 아버지의 법에 의해 무의식으로 가라앉으면서 욕망은 결코 해결되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한 나르시스의 욕망도, 늙은 것을 한탄하던 타나토스의 욕망도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으로 남고 그것을 가진 인간은 괴로운 것이다. 충족되지 못하는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발버둥치지지만, 욕망은 결코 메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메워지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의 성도착은 곳곳에 널려 있다.

영수는 서울에서는 시골을 그리워하고, 시골에서는 서울을 잊지 못한다. 시골에서는 은희를 동경하고 서울에서는 은희를 잊지 못한다. 때문에 그의 생활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설령 두 사람과 동시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생활은 안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못한다. 영수를 갈망하던 은희의 욕망이나, 병들었던 영수를 차버렸지만 다른 여자와 있는 영수를 다시 원한 수연의 욕망도 충족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은 슬프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행복을 운운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허진호는 그 쓸쓸함을, 결국 인생의 쓸쓸함을 한 편의 이야기로 보여주었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끝으로 참으로 정감 있게 다가오는 장면 하나. 평생 담배를 피워 폐암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영수의 룸메이트가 자살하고 난 뒤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영수는 다음날 아침, 요양원 입구에 있는 슈퍼의 들마루에 앉아 있다. 그의 가라앉은 마음을 보여주듯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그의 앞에는 소주병이 놓여있다. 영수의 방에 찾아갔다가 걱정 된 은희가 그곳으로 온다. 이어 두 사람이 같이 앉아 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영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앉는다. 술도 마시지 않는다. 첫잔 그대로이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때 은희가 말한다. “마시지 않을 거죠?” 은희는 소주잔을 기울인다. “예전의 맛 그대로네요” 이어 은희는 떨고 있는 영수를 안아준다. 지켜보기만 하던 카메라는 이때부터 서서히 줌인해서 들어간다. 두 사람의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제 둘의 사랑의 파노라마가 조용히, 그러나 친밀하면서도 밀도 높게 진행된다. 인물과 배경이 단순한 대화 속에 너무도 조화를 이루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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