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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적 혼성영화에 깃든 은밀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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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적 혼성영화에 깃든 은밀한 욕망
  • 의약뉴스
  • 승인 2007.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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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디 워>
   
▲ <디 워>는 의외로 재미있고 논쟁거리가 수두룩한 영화이다.
하늘이 두쪽 나도 다시는 심형래의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1999년 <용가리>를 보고나서다. 당시 정부와 언론은 합심하여 심형래에게 신지식인이라는 생뚱맞은 칭호를 부여하며 추켜세우기 급급했고 그 흐름에 휩쓸린 나는 충무로에서 억울하게 홀대받는 개그맨 출신 영화인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줄 것을 잔뜩 기대하며 <용가리> 개봉일 첫 상영시간에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줄을 섰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극장문을 나설 때의 그 환멸감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까? 영화인이 아닌 한 장사꾼의 사기극에 온 국민이 놀아났다는 황당함과 함께 그 바보들의 행렬 속에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 자존심을 심하게 긁어댔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 심형래의 <디 워>가 또 한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때에도 그저 개 닭 보듯 냉소와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것은 아마도 그때의 불쾌감이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 미덥지 않고 불쾌하기까지 한 <디 워> 신드롬에 입 가진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디 워>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올렸다는 이유로 이송희일 감독과 김조광수 대표가 네티즌들에게 공개처형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거의 부관참시의 테러를 받게 된 상황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임에도 별 것도 아닌 이들의 말 한마디가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중의 광적인 분노를 자극한 배경은 무엇일까?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디 워>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온통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나는 <디 워>에 대한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였고 영화를 보는 것은 그저 비판의 근거를 재확인하기위한 차원일 뿐이었다. 그런데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막상 직접 본 영화는 의외로 ‘재미있고’ 논쟁거리가 수두룩한 영화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단지 “70년대 미국토스트기의 짝퉁모방품”이라는 한마디로 치워버리기에는 매우 많은 논쟁을 유발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디 워>는 재미를 갖춘 영화다. 물론 순제작비 3백억을 들인 블록버스터에서라면 도저히 나와서는 안 될 장면들, 예컨대 특히 초반부에 집중되어 있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쇼트분할이라든지 도대체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연기들은 그냥 덮어둘 수 없는 연출의 기본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그 많은 문제거리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 문제라는 건 <용가리>에 비하면 일취월장의 수준이긴 하지만) 이 영화는 내러티브를 최소화하면서 다양한 볼거리를 극대화하는 현대블록버스터의 특징을 두루 갖춘 거대한 스펙타클 영화라 할 수 있다. 평상적인 블록버스터에 대한 관객의 기대치를 감안하면 다른 블록버스터들에 지불하는 7천원의 비용은 이 영화에도 충분히 투자할 만 하다는 얘기다.

   
▲ <디 워>는 동서양의 전설과 신화, 종교적 모티프와 대중영화를 뒤죽박죽 섞어놓는다.
<디 워>는 영화 전체가 온통 익숙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인에게 친숙한 이무기 전설, 환생모티프의 할리우드 SF물, 괴수물, 액션물 등 모든 장르를 뒤섞어 만든 이 영화는 초반에는 <스타워즈>, 중반에는 <터미네이터>, 후반부에 가서는 <반지의 제왕>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이정표적인 작품들의 이미지를 두루 연상시키는 무국적 포스트모던 영화이다. 물론 여기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매끄러운 외관에 비교해 어딘지 모르게 심형래 특유의 소박함과 유치함이 물씬 배어 기우뚱거리는 ‘B급 블록버스터’의 느낌도 스며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이무기 전설, 환생의 모티프 등 토속적인 모티프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이미지를 뒤섞는 방식이다. 영화의 배경이 중세 조선에서 현대 LA에 걸쳐있는 <디 워>의 틀은 미국의 건국신화라 할 수 있는 웨스턴 장르를 지극히 동양적이고 중세적인 의상과 컨셉으로 치장해 미래의 우주공간에 옮겨놓은 <스타워즈>를 차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도 미국적인 신화인 <스타워즈>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스타워즈>는 괜찮은데 <디 워>는 졸렬하다는 평에는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사실 <스타워즈>라는 영화도 따지고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영화 아닌가? 일련의 시퀄과 프리퀄로 이어지는 시리즈에서 맨 처음 만들어진 두 세편을 제외한다면 <스타워즈>의 쾌감은 <디 워>가 주는 쾌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한국이라는 토양에 이식하기 어려운 미국적 정서로 가득한 <스타워즈>보다는 차라리 <디 워>의 친근한 모티프들이 영구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훨씬 더 호소력이 있을 수 있다. 그건 내가 공감하기 어려운 미국적 정서에 ‘스타워즈 프릭스’라는 별칭을 가진 미국 아이들이 중독현상을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입장에서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디 워>에 대한 <스타워즈>의 우위 주장은 넌센스다.

중반을 향해가면서 <디 워>의 토속적인 환생 모티프는 <터미네이터>의 4차원적 시공간과 기독교적 종말론 위에 살짝 겹쳐지기 시작한다. <터미네이터>에서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미래세계 지도자 존 코너의 모친 이름이 ‘사라’였다는 것을 떠올려보면(사라는 성서 속 여성 인물이다) 이무기에게 쫒기는 여의주가 될 운명의 여인이 ‘사라’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파악될 것이다. 존 코너의 엄마 사라가 인류의 미래를 걸고 미래세계에서 넘어온 터미네이터로부터 탈출하듯이 조선시대 여의주 여인의 환생인 사라 역시 인류를 위해 필사적으로 악한 이무기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동서양의 전설과 신화, 종교적 모티프와 대중영화를 귀엽게 뒤죽박죽 섞어놓은 이 패스티쉬(혼성모방 혹은 공허한 패러디)적인 감성으로 충만한 영화에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심형래에게 너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영화의 모든 것은 <블레이드 러너>나 <터미네이터>식의 심오한 철학적 비전이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 펼쳐지는 두 마리 이무기의 대결과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용의 위용에 찬 이미지를 위해 바쳐진 한편의 거대한 롤러코스터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스펙타클을 위해 심형래는 자신이 이해한대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마음껏 이용하고 모방했을 뿐이다.

   
▲ <디 워>의 시나리오는 미국에 대한 열등감의 기형적 표출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불현듯 든 생각은 미국의 아이들이 <스타워즈> 시리즈를 즐기고 <스타워즈>와 함께 성장하면서 미국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해온 것처럼 영구와 우뢰메, 티라노, 용가리와 함께 자라난 한국의 아이들이 이제 <디 워>를 통해 <스타워즈>가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만족감을 찾게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가 한 시대의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생명을 이어나가는 현상 자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디 워>에 대한 논쟁은 CG니 연기니 하는 표피적이고 기술적인 지적을 넘어 이 대중적인 영화가 한국사회에서 행하는, 혹은 행하게 될 신화적 기능이 무엇일지를 좀더 냉정하게 짚어보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사실 내가 진정 두려운 것은 이 패스티쉬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혼성영화에 깃들어있는 은밀한 욕망의 실체이다.

영화의 토속적인 모티프와 엔딩부에 흘러나오는 감동적인 아리랑의 선율, 그리고 이어지는 감독의 편지는 중심에서 추방된 한 개인이 피땀을 흘리며 중심을 향해 힘겹게 근접해온 역사를 지극히 감정적인 톤으로 호소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멸시받는’ 주변부 영화인이 한국영화의 중심인 충무로를 향해, 나아가 세계영화의 중심인 할리우드를 향해 불굴의 의지로 접근해왔다는 개인의 성공신화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미국이라는 중심을 향한 콤플렉스와 욕망이 복잡하게 뒤얽혀있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적 정서를 자극하는 민족서사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민족주의’라는 순혈주의에 호소하며 흥행몰이를 하는 이 영화가 사실은 미국이라는 중심과의 혼혈을 지극히 욕망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주인공 ‘사라’가 최면요법을 받는 장면에서 전생에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은 감독의(혹은 그의 영화에 열광하는 한국 대중들) 욕망의 대상인 미국의 뿌리가 사실은 ‘우리 자신’이라는 집단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소망 시나리오라는 점이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열등감의 기형적 표출일 수도 있는 이런 시나리오는 그야말로 한국 내부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거대한 집단적 신화 아닌가? 할리우드를 정복하겠다는 욕망 역시 결국은 나도 너희의 일부이니 너희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욕망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미국의 패권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까지 무비판적으로 이미지화한다. 미국 상공에 나타나 거대한 마천루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무기를 향해 군사작전을 벌이는 미군의 모습은 어쩐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의 음험한 시뮬라크라를 연상시킨다. 왜 그것이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용병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온갖 찬사를 받으며 상영되어야 할까? 나는 심형래가 세계에서 잘나가는 기업인이 되든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인이 되든 개의치 않지만 그의 영화가 제시하는 상상력에 내가 얼굴 벌개지는 상황만큼은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기껏해야 한편의 영화에 대해 조금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이 집단적 광기가 애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용인되는 상황 역시 정말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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