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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악의 꽃(1857)- 현대시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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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악의 꽃(1857)- 현대시의 시작과 끝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4.04.11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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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현대시의 개척자 혹은 완성자라면 단연 보들레르를 떠올린다. 그만큼 그는 지금 우리가 쓰는 시, 속된 말로 롤모델을 만들었다. 따라서 19세 이후의 모든 시는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라고 말하면 가히 틀린 말이 아니다.

시어하면 좀 고상해야 하고 일반인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것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한마디로 시의 경계를 허물고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했다. 이 같은 시의 혁명은 다른 혁명과 마찬가지로 소란을 불러왔다.

프랑스 법원은 그의 시집 '악의 꽃'이 동성애 등을 거론한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문제 삼았다. 시인과 출판사는 벌금형을 받고 결국 문제의 6수를 삭제했다. 이후 4년이 지나 보들레르는 추가로 35수를 더해 1861년 <악의 꽃> 개정판을 냈다.

저주받은 시인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던 보들레르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화됐다. 한편 제목 <악의 꽃>은 초판에서 삭제된 ‘레스보스’에게 넘어갈 뻔했다. 시인은 처음에 <악의 꽃> 대신 죽음이나 레스보스를 제목을 염두에 뒀다.

레스보스는 그리스 동부 에게 해에 있는 섬인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 이 섬에 여성 동성애자 즉 레즈비언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레스보스의 여인들’ 이라고 시집 제목을 정하려고 했다. 시인의 악마적 기질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면 레스보스가 어떤 내용인지 잠깐 살펴보자. 라틴풍 놀이와 그리스풍 향락의 어머니/ 레스보스, 거기서 태양처럼 따갑고 수박처럼 신선하고, 나른한 입맞춤과 유쾌한 입맞춤이 영광스러운 낮과 밤을 장식한다/...레스보스, 무덥고 나른한 밤의 땅, 눈가가 움푹 파인 아가씨들이 거울 앞에서, 잉태하지 못한 쾌락이여! 묘령의 무르익은 열매를 어루만진다. 레스보스, 무덥고 나른한 밤의 땅/... 그러니 늙은 플라톤의 찌뿌린 얼굴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옳고 그름의 법도 필요 없다. 그대들은 숭고한 마음씨 가진 처녀들이고 이 섬의 자랑거리다./

▲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현대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현대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하지만 ‘레스보스의 연인들’은 곧 악의 꽃에 밀려나고 만다. 서두에 보들레르는 스승이자 친구로 부르는 테오벨 고티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이 병든 꽃들을 바친다.”

악의 꽃은 한마디로 병들고 시든 꽃이다. 정말 병든 꽃일까. 이것은 역설인가, 아닌가. 그는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아니 그가 화가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먼저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에드바르 뭉크, 외젠 틀라크루아, 칼를로스 슈바베 등에게 헌시를 남겼다. 그런가 하면 제1부 <우상과 이상> 제6편 ‘등대’에서는 루벤스, 레오나드도 다빈치, 램브란트, 미켈란젤로, 피제, 와토, 고야, 들라크루아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악의 꽃>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이 시의 마지막에 나온 ‘여행’이다. 여행은 평생 우울과 절망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시인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이정표 였다. 여행은 160여 편의 시 가운데 154행으로 가장 길다.

지도와 판화를 사랑했던 소년 보들레르. 그의 험난한 인생은 이미 6세 때 아버지를 잃으면서 시작됐다. 이듬해 어머니의 재혼에 충격을 받고 중학교 때 퇴학을 당했다. 이대로는 폐인이 될 것을 염려한 가족이 회의를 열고 그를 인도로 추방했으나 이동 중에 도망쳐 다시 파리로 왔다.

성인이 된 후 보들레르는 거액의 유산을 친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 돈은 혼혈 여배우와 함께하면서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만큼 낭비벽이 심했다. 그는 어머니와도 의절했다.

나중에 극적으로 화해했으나 그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에 가담했다. 그때가 보들레르가 27세 때였다. 이때 그는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해 프랑스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41세에 이미 병고는 깊어졌고 46세에 사망했다. ‘여행’에서 말했던 것처럼 보들레르는 오직 떠나기 위해 풍선처럼 가벼운 몸으로 훌쩍 떠났다.

어차피 죽을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렇게 외칠 수밖에. 자, 떠나자.

랭보는 보들레르를 시인의 왕이요, 진정한 시인의 신이다, 라고 칭송했고 프루스트 역시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발터 벤야민은 우울에서 자양분을 받은 보들레르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했다.

: 보들레르는 니체처럼 산에 올랐다. 그리고 더 배울 게 없어 산에서 내려왔다. (10년 만인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닌가.) 그의 애필로그, 내용이 짧으니 다 옮겨 보자.

“흡족한 마음으로 나는 산에 올랐다. 여기서는 도시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병원도, 유곽도, 연옥도, 지옥도, 도형장도, 그곳에서는 온갖 기괴한 일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오, 고뇌의 수호자 사탄이여, 너는 안다, 내가 그곳에 헛된 눈물이나 흘리러 간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늙은 호색한이 늙은 창녀에게 그러하듯이 지옥의 매력이 끊임없이 나를 젊게 해주는 그 엄청난 창녀에게 취하고 싶다. 네가 감기에 걸려 무겁고 우울한 아침 이불에 싸여 잠들어 있건 섬세한 금줄로 장식한 황혼의 장막 속을 으스대며 걷고 있건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오 불결한 수도여! 창녀들이여! 강도들이여! 그대들은 내게 신을 믿지 않는 속인은 절대로 모르는 온갖 쾌락을 이토록 자주 가져다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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