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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확신을 가졌을 때는 이미 상황이 벌어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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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확신을 가졌을 때는 이미 상황이 벌어진 뒤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0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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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완용이 좀 더 일찍 점례의 신원을 확인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약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가정은 성립되지 않지만 말이다. 미행을 일찍 붙여 화랑주인과 조카 그리고 점례의 관계가 자신의 손에서 놀았더라면, 제국의 참의원이 그들과 깊숙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지금보다는 먼저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약간이 아니라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그래서 나중에 이 모든 것을 파악했을 때 완용은 땅에 대고 피가 나도록 손바닥을 쳤다. 자신의 실수에서 도망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것은 치욕이고 분하고 억울했던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었는데 한 박자 늦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원통함이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절망. 자신의 경찰 인생에서 최고의 실수라는 뼈아픈 질책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가 사실 파악을 했을 때는 상황이 이미 벌어진 뒤였다. 그 시각 총독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33명의 독립군 침투조는 각기 맡은 역할에 따라 들이닥친 순간부터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했다. 보이는 것과 움직이는 것은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그들이 놀라서 얼어 붙은 나머지 한 발짝도 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미제 기관단총이 그렇게 만들었다. 총독부는 그렇게 순식간에 독립군에 장악됐다. 총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높다고 해서 피하고 낮다고 해서 더 많이 맞지 않았다. 똑같이 겨냥된 곳으로 날아가 가슴팍과 얼굴에 박히고 나서는 제 할일을 마쳤다. 총소리가 나기 전 총독부 일층은 들떴고 분주했다.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들이 참의원 일행이 도착하고 나서 늦지 않게 저녁을 준비하려고 서둘렀기 때문이다. 일은 그 와중에 일이 터졌다.음식 담당 직원은 총독과 본국의 유력 정치인이 함께 하는 저녁 식사 당번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평소 보다 간을 맞추는데 더 신중했고 재료를 고르는데 세심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부산을 떤 결과 지지고 볶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난 후 이제 막 요리를 식탁위에 올릴 즈음이었다. 식어도 괜찮은 음식 일부는 이미 제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고 메인 디시 등 온도를 신경써야 할 음식은 주인공이 착석하기를 대기하고 있었다.

사슴 고기를 준배했던 팀은 다 된 요리를 들고 만찬이 열리는 삼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대딛었다. 손에 든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슴의 앞가슴살이 비릿하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창경원에서 갓 잡아 온 것이다. 사람들의 구경거리에서 총독 만찬장에 오른 사슴은 자신이 사슴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뿔과 같이 쟁반에 담겨있었다. 총독은 광장을 내려다 보면서 그 냄새를 맡았다. 일전에 한 번 먹어본 기억이 뇌를 통해 입안의 침으로 고여들기 시작했다. 분명히 참의원도 좋아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총독은 이층에서 대기하고 있는 참의원 일행을 삼층으로 안내 하도록 비서에게 지시했다. 도착하는 것을 지켜 봤던 그는 차에서 내린 그들이 총독 관저를 우러러 보고 뒤를 돌아 광화문의 건물들을 하대하면서 내려다보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조선의 일인자 이면서 제국의 이인자 임에도 본국에서 오는 일행이라는 이유로 긴장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들은 돌아가면 총독에 대한 보고서를 천황에게 올릴 것이다. 왕은 그것을 보고 그의 측근이나 힘이 있는 자들에게 총독에 대한 이런저런 평을 공식이든 사석이든 간에 이야기 하겠지. 이것은 자신의 평판에 관련된 것이다. 총독은 높은 평점을 받고 싶은 마음에 최선을 다해 참의원 일행을 대우하겠다고 연신 다짐했다. 그가 그런 것은 조선에 더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인자 역할을 하는 것이 제국의 이인자 보다 좋았다. 부임 일년만에 그는 이런 사실을 터득하고 앞으로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즉, 잘려서 나가기 전에 질려서 그만 둘 때까지 조선의 총독이고 싶었다. 여기서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다한다. 신이 있다면 그 신도 조선총독과 자리를 바꾸기 위해 제우스에게 로비를 했을 것이다. 

그런 흡족한 마음으로 총독은 비서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옷 매무새를 거울을 통해 고친 다음 열린 문을 통해 그들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상상을 했다. 그들이 올라와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고를 해야지. 그게 내 임무야. 응당 그러해야 한다는 듯이 그는 아래를 쳐다 보던 시선을 돌려 자신의 집무실 주변을 둘러 보았다. 화려한 장식품과 돋보이는 그림들, 식민지 국가 최고 책임자의 위신에 딱 맞는 장식품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암, 초라해서는 안 되지. 총독이 이런 상태로 참의원을 맞을 준비가 끝났을 즈음, 비서가 총독에게 의원 일행이 올라오고 있다고 보고했고 그 보고 소리와 거의 동시에 참의원은 배를 발보다 먼저 앞으로 내밀고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넘어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듯이 눈을 아래로 깔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는 총독과 눈을 맞추면서 각하 하고 먼저 소리쳤다. 소리를 들은 각하는 어서 오시오 기무라 의원님하고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일본에 있을 때 익히 익힌 얼굴이었고 두어 차례 만남을 따로 했던지라 오늘의 만남이 초면이 아니었다. 그래서 총독은 허물없이 대하는 오랜 친구처럼 참의원 일행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했다. 그러나 어색하지도 낯설지도 않아야 마땅한 둘의 만남은 삼년 반 이라는 시간과 조선이라는 공간이 주는묘한 차이 때문에 처음에는 이상한 기운을 떨칠 수 없었다. 총독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입은 옷은 물론 수염까지 길게 길렀고 얼굴은 되레 더 젊어진 듯이 핏기가 가득해 마치 청년처럼 화색이 돌았다. 조선이 그렇게 좋은가. 나이를 거꾸로 먹을 정도로. 참의원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달랐다. 각하, 만수무강 하십이오. 어허, 나 아직 그런 소리 들을 나이 아니요. 이래뵈도 겨우 육십 입니다. 총독이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나이를 대면서 아직은 일할만한 나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각하. 아주 젊음이 넘치십니다. 참의원이 한 번 더 아부의 인사를 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식민지의 지배자와 본국의 지배자가 만나는 자리는 이처럼 화기애해했다. 그들이 착석하고 나서 일분쯤 지났을 때였다. 식사가 세팅되고 구수한 사슴 고기가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다.식사하면서 이야기 할까요. 총독이 주인 행세를 하느라고 음식을 권유 하면서 참의원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것이 조선 막걸리요. 우리네 청주와는 조금 다른데 조선술 한 번 맛보시지요. 다른 건 몰라도 조센징들이 술은 잘 빚어요. 주시는 것이니 어디 한 번 먹어 보겠습니다. 참의원에 잔에 코를 대고 킁킁 거리면 냄새를 맡았다. 쉰맛이지만 아닌 것 같고. 곡식의 날것 냄새도 좀 있고. 그게 봐로 잘 된 겁니다. 그렇군요. 

둘이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면서 한 모금 깊게 먹고 나서였다. 아래층이 소란스러웠다. 처음에는 그것이 총소리인지 총독은 물론 참의원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연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확실하게 소리를 낸 물체가 총인 것을 알고는 두 사람은 곧 사색이 됐다. 비서는 급하게 출입문을 닫았고 총독 일행을 안쪽의 구석진 곳으로 숨겼다. 이곳은 총독 관저의 비밀 스러운 공간이었다. 급하게 숨느나 총독과 참의원은 서로 어깨를 부딫쳤고 미쳐 불을 준비하지 못해 안은 깜깜했다. 어디서 불을 켜야 하는지 비서는 불을 켜는 것을 잊었는지 어둠 속에서 두 고관 대작은 몸을 바짝 붙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요. 곧 해결 될 겁니다. 자체 경비병력도 있고 아니. 그나 저나 답답하군요. 살짝 문을 밀어 밖을 좀 볼까요. 참의원이 허락을 받지 않고 말고 동시에 문을 조금 밀쳤다. 그러자 아래쪽에서 격렬한 공방이 오가 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총소리가 요란했다. 저기 비서가 문의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있네. 가만 있자 이건 권총 소리고 이건 소총 소리고 저건 기관총 소리 같은데. 각하, 소리가 구분되지요.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총독은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서랍에는 자신이 아끼는 러시아제 권총이 있고 일본도도 걸려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거기까지 가고 싶지 않다. 여기서 대기하면서 상황을 보자. 비서가 일단 막고 있으니 비서가 뚫리면 우린. 총독은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이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보통내기들이 아냐. 누가 누구와 싸우고 있지. 침입자들은 대체 누구란 말이냐. 

마치 연습을 한 것처럼 신속하고 용의주도해. 참의원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 놈은 왜 저기서 기대고 서 있기만 하지. 내려가서 상황 파악을 해야 하는 것 아냐. 내려 보낼 까요. 내려가라고 소리칠 까요. 내버려 둬요. 최종 방어선은 있어야 하니까요. 총독이 비서를 내려 보내 아래층 상황을 알아 보고 싶어하는 기무라는 제지시켰다. 대충 하다 멈추겠지요. 트럭에도 무장 병력이 있지 않았소. 몰랐던 것을 이제 알았다는 듯이 총독이 물었다. 그는 삼층 창가에서 의원 일행이 들어오는 지켜봤었다. 그래요. 우리 뒤를 트럭이 따라 왔어요. 그게 무장병력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했고요. 틀림없어요. 내가 위에서 봤어요. 그럼 곧 진압이 되겠지요. 그러기를 바래야지요. 답답하네요. 나가 볼까요. 참으세요. 이러다 큰 코 다칩니다. 상황종료 보고가 올 때까지 여기 있습시다. 알았어요. 답답하네요. 이렇게 붙어 있느니. 나도 마찬가지요. 비상구안에서 총독과 참의원이 이런 말을 주고 받을 때 일층을 점령한 독립군 특공대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닫힌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잠시 지체했다. 이층 계단은 나름대로 방어한답시고 비서 중 하나가 위에서 던진 의자 등으로 바리케이트가 생긴 상태였다. 거기다 총 소리 직전 음식을 들고 막 이층으로 올라가던 직원들은 그 전에 자신들이 배운 군사경험을 십분 활용하는 지지를 발휘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적의 침입을 확인하고는 들고 있던 쟁반을 아래쪽으로 마구 던졌다. 계단은 음식찌거기와 기름기 등으로 번질 거렸다. 잘못 밟았다가는 미끄러질 위험이 있었다. 삼층 진입이 지체된 것은 순전히 음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냄새는 구수했다. 공격하기 딱 좋은 분우기기야. 내게는 죽마을 해당화 향기처럼 느껴져.

권총을 가슴에 세운 휴의가 눈으로 서서히 삼층 계단을 확보하기 위해 나서는 독립군 부하에게 올라갈 것을 지시했다. 그가 음식 찌거기를 피해서 한 발 올라갈 때 휴의와 다른 동료들이 엄호 사격을 위해 눈을 위로 향했다. 진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 때 위쪽에서 어떤 물체가 날아와 휴의 발 아래에 떨어졌다. 곰인형이었다. 이어 화분도 떨어져 박살났다. 던질 수 있는 것을 다 던지겠다 이 말씀 이군. 저들은 무기가 없다. 올라가자.  좁은 계단을 타고 독립군들이 삼층을 향해 돌격했다.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우두머리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기세 좋게 탈출해야 한다. 머뭇 거리면 몰살 당한다. 휴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또 위에서 무언가 날아온다. 맨 앞에 있던 독립군이 잽싸게 몸을 돌려 피했다. 맞았으면 아마도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그것은 모양이 예쁜 둥근 수석이었다. 수석의 중앙에는 일장기처럼 하얀 원이 그려진 모양이 박힌 돌이었다. 그것이 휴의 발 아래에서 구르다 멈춰섰다. 이마를 맞지 않았어. 이마였다면 어쩔 뻔 했어. 충격이 완화된 돌은 멈추기 전에 다른 독립군의 군홧발을 쳤다. 기분이 상한 그는 위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수석의 공격은 독립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기관총 난사로 삼층에 있는 두 명의 비서 가운데 한 명이 가슴에 총을 맞고 계단으로 굴러떨어져 내렸다. 빗나간 목표물 때문에 운이 나쁜 비서가 당했다. 그는 자신이 왜 총을 맞았는지도 모른체 운명을 달리했다. 주방장도 운이 나빳다. 그도 난사된 기관총에 허벅지를 정통으로 맞고 피를 쏟았다. 맞은 부위는 치명적인 곳은 아니었으나 심줄을 건드려 피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돼지의 멱을 딸 때 쏟아졌던 그 피처럼 피가 나오자 주방장은 자신의 운도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은 음식을 몰래 조금 싸게 가족과 함께 먹으려고 했던 그의 꿈은 사라졌다. 삼층 문턱에서 먼저 올라간 독립군은 남의 비서의 총을 맞고 숨졌다.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기관총을 난사했던 독립군이 다시 물불 가리지 않고 갈겨 대는 바람에 비서 역시 숨을 거뒀다. 휴의는 삼층의 상황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총을 든 적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있는 것이 확인된 이상 무턱대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더구나 밖이 수상하다. 군홧발 소리가 들린다. 적들이 모여들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총의 소리와 다른 총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포위됐나. 여기서 죽나. 휴의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철수 철수 철수 세 마디 말을 외치고 그는옆에서 엄호하는 부관과 함께 총독부 안에서 급하게 밖으로 튀쳐 나왔다. 그 순간 광화문 쪽에 왜적이 개미떼처럼 달려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총독 관저를 호위하고 있던 경비대대병력이 광장을 가로 질러 총독부청사로 들어오고 있었다. 휴의가 남겨 놓은 일분대 병력 일부는 대장의 침착한 지략에 놀라면서 달려오는 적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시도했다. 아무 이유도 모른채 마구 앞으로만 달리던 대대병력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은 쓰러진 동료를 넘어서 다시 달려왔고 그런 그들을 독립군은 여지 없이 조준사격으로 격파했다. 처음에 막무가내로 달려들던 대대병력은 손실이 엄청나고 적이 어디서 어떻게 쏘는지도 모른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런자들은 먹이를 놀이던 조선호랑이의 좋은 표적이 됐다. 사용된 무기는 기관총뿐이 아니었다. 수류탄은 또하나의 치명적이 무기였다. 운 좋게 총알을 피해오던 적의 일부는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수류탄 부대의 치명적인 공겨격을 받았다. 일제히 투척. 휴의의 한 마디에 대기하고 있던 분대원들은 일제히 투척 명령을 그대로 복창했다. 그와 동시에 손에서 떠난 수류탄이 몰려 있던 대대병력의 복판에 떨어졌다. 제대로 먹인 것이다. 아비규환이 따로없었다. 적들은 혼비백산 도망치지 바빴다. 명령할자도 명령을 받을 자도 없는 처참한 상황이 이어졌다.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비록 적이지만 그들은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며 아버지였다. 휴의는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고만할 수 없었다. 현장을 빨리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초반 승부에서 적을 제압했다고 해도 이후 상황까지 독립군이 사태를장악할 수는 없었다. 중과부적이었다. 후방 부대는 없다. 철수만이 살길이다.애초 계획한 것 이상의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시간을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있다. 비록 적들이 허둥댔지만 그들 역시 명령을 내렸다. 가용 경찰력음 완전무장을 한 채  모두 총독부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산에 있는 헌병대사령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령을 받은 그들은 달리거나 차를 타거나 어떤 것이 빠른 것인지 잠깐 생각을 한 후 광화문을 향해 돌진했다. 엄폐물로 자신을 숨기고 조준사격을 하는 것도 한계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총도부는 사방에서 에워쌓였다고 볼 수 있다.

휴의는 퇴각하면서 들어올 때 보았던 느티나무 아래서 쉬고 있던 병력이 있던 자리를 힐끗 보았다. 그들은 몰살당한 대대병력과 함께 이승의 강을 건넜다. 느티나무 그늘아래에 있는 병사들은 그래도 운이 좋았다. 죽음의 길 바로 목전에 육체와 정신을 편히 쉬게 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달려 오다 죽은 대대병력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다 죽었으니 그 역시 휴식 만큼이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적들이지만 안 됐다. 안 됐어. 빠르게 가슴에 성호를 긋고 휴의는 남은 대원들을 재촉했다. 빨리 뛰어. 최대한 빨리. 조선땅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자신들이 당했다. 대비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완벽하지 않았고 조금 허술했을 뿐이다. 독립군은 운이 좋았고 왜적은 그 반대였을분이다. 복지는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수습이 먼저다. 양측의 수뇌부는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나 답은 나와 있었다. 조선독립군의 승리, 일제의 패배. 조선 식민지 수 십년 만에 벌어진 경성 전투는 이렇게 막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실탄도 거의 바닥났다. 주춤 거리면 생포되거나 왜적처럼 최후의 순간을 맞아야 한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종로서 왜경들이었다. 그들은 휴의 부대가 다 빠져 나가기도 전에 경북궁 경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다 알다시피 이런 싸움은 속도가 중요하다. 게릴라전은 생명은 치고 빠지는 빠르기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관저에 들어온지 벌써 35분이 흘렀다. 죽지 않고 부상을 입은 총독부 초병은 일이 벌어진 것을 간파하고 늦었지만 알려야 한다는 군인정신으로 피묻은 손을 이용해 부리나케 전화를 돌렸다. 검은 전화기에서 불이 나기 전에 자신의 몸이 불이 날 지경이었음에도 초병은 최후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휴의의 눈에 귀에 대고 전화를 거는 초병이 들어왔다. 달리면서 그는 지향사격을 했고 순간 그가 돌돌말린 검은 줄은 바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비상, 괴한 들이 총독 관저에 진입했다. 초병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이런 식의 애국심은 누군든 어느 나라 군인이든 본받아야 마땅하다. 순직한 초병에게는 일계급 승진과 함께 유족을 위해 국가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런점에서 이 초병 역시 할 일을 다하고 자신의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나 저나 위험에 처한 총독은 안전할까. 유마 아버지 참의원 기무라는.

어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작가만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날 만찬을 책임진 총지배인 겸 주방장은 번뜩 그 생각으로 소름이 돋았다. 각하께서 위험에 처했다. 그는 손에 쥔 식칼을 내려 놓지 않고 그대로 삼층 계단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말이 돌진이지 그는 계단을 서너개 오르기도 전에 넘저지고 말알았다. 자신이 직접 만든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돼지수육을 밟은 것이다. 기세좋게 음식이 담진 접시를 던지면서 적을 막았으나 그 막은 음식이 주방장의 최후를 안내했다. 그는 넘어지면서 자신의 오른손에 쥔 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칼은 전날 여러 번 부싯돌에 갈아 반들 거렸다. 예리한 그것은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목의 가장 굵은 심줄을 건드렸고 그는 굴러떨어져 바닥에 닿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애국자였다. 어떤 왜적보다도 공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굳이 따지자만 조금은 억울할 수 있다. 독립군은 이미 총독 관저를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기름이 발라진 계단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식은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병사는 자신이 다음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대로 실행했다. 총독과전에서 광화문 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관저를 막 벗어나려는 순간 문이 닫혔다. 초병에게 지향사격을 하지만 않았어도 휴의는 문을 빠져 나왔을 것이다. 이번에는 휴의가 운이 나빴다. 순찰을 돌던 순사 하나가 잔꾀를 내 것이 바고 문을 잠그는 것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괴한의 침입을 알았고 그들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이 들어간 문을 닫는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퇴로는 분명 들어간 곳일 것이다. 왜냐면 달리 찾을 곳이 그곳밖에 없으니까. 그의 예상은 맞았다.


이제 휴의 독립군은 광화문에 갇힌 상태가 됐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운명의 신은 아직까지는 독립군 편이었다. 마침 현장에 당도한 헌병대사령부의 13대 병력은 닫힌 광화문을 급하게 열여 제꼈다. 만류하는 순사는 그 자리에서 즉격 처형됐다. 감히 아무것도 모르는 순사가 문을 막고 섰으니 그는 황천길을 재촉한 것이다. 순사의 애국심은 또다른 애국심 앞에 무너졌다. 트럭은 문을 부쉈고 부숴진 문 틈으로 차에서 뛰어내린 잘 훈련된 군인들이 경내로 들이닥쳤다. 그 와중에 뒷걸음질로 후퇴하면서 교전을 벌이던 종로서 소속 순사 3명이 바퀴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운전수는 바퀴에 닿는 물컹 거림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를 세우지 않고 그대로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이것은 팽소니가 아니었다. 그는 작은 죄책감을 무시하고 큰 작전에 투입되고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휴의 부대는 트럭을 본 순간 건물 기둥 뒤로 서너명 씩 짝을 지어 몸을 숨겼다. 기둥을 크고 넓어서 쫓기는 독립군을 넉넉하게 감싸주었다. 트럭이 움직일 때마 독립군 역시 그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몸을 틀었다. 운은 또한 번 바뀌었다. 그런 식으로 수 십초간 목숨을 유지했던 휴의 독립군이 전멸될 위기의 순간 창의문 쪽에 대기하고 있던 독립군의 또다른 부대가 사다리를 타고 경북궁 경내로 진입했다. 헌병대사령부는 뛰어내려오는 괴한 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황군 복장으로 위장한 상태였다. 적들이 적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순간 적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가 불을 뿜었다. 애국심을 발휘했던 운전수가 사망하면서 트럭은 화강암 계단에 부딪치면서 전복됐다. 부상당한 황군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총을 잡았을 때 그들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조준경에 적을 넣어 보지도 못하고 그들은 군인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적들이지만 이 점만은 칭찬해야 한다. 살아 남은 일부는 휴의 부대가 빠지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이런 각오는 막 들어온 독립군도 하고 있었으므로 두 부대는 교전을 시작했다. 

북문을 타고 넘어 근정전 안쪽에서 벌어진 교전으로 창의문 부대원의 가운데 상당수가 사망했다. 적들의 죽음 만큼이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죽음앞에서는 적이든 아군이든 질량을 재서는 안 된다. 왜적과 독립군들이 이미 흘린 피와 새로운 피가 합해져 경복궁 뜰을 적시기 시작했다. 한줄기 소나기처럼 피는 골을 딸라 잠시 흐르다 멈췄다.  피비린내가 경성의 이른 밤하늘에 노을 처럼 번져 나갔다. 휴의는 허리춤의 회중시계를 들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음에도 휴의는 일부러 그렇게 했다. 그런 행동이 자신을 지켜 줄것으로 믿었다. 차가운 것이 순간 온기를 품었다. 오후 5시 38분, 그들은 광화문을 벽의 뚫린 공간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전에 정해진 퇴로였다. 왜군에 의해 막혔다가 왜군에 의해 뚫린 그 문을 이용했다. 목숨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평소 달리기에 소극적이던 독립군들도 자기 기록을 경신하면서 정말 빠르게 달려 나갔다. 쓰러진 적 가운데 죽지 않은 일부는 그들이 달려 나가는 모습을 뜬 눈으로 모습을 보았다. 화살인가. 무언가 쏜 화살처럼 빠르제 스쳐 가는 것을 보면서 병사는 인생은 손쌀 같이 흐른다더니 정말 그렇군. 그러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직 정신이 조금 더 남아 있던 황군은 독립군을 확실히 인지했다. 저런 군인들은 처음본다. 내 평생 처음이다. 어떻게 훈련했으면 저렇게 빠를까. 나도 빠르고 싶다. 그러나 죽음 만큼은 늦추고 싶어. 그러나 그런다고 저승사자가 잡은 손을 놓을리 없었다. 어린 황군은 엄마 대신 이런 감탄을 하면서 마지막 숨을 쉬고는 급하게 저승사자의 뒤를 따랐다. 

광화문을 탈출한 휴의 부대원들은 어느 순간 인왕산을 넘고 북한산 쪽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부대원들은 일단 분대별로 흩어졌다. 흩어저라. 모이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이미 황군 복장을 뒤집어서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 입은 휴의는 부대원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가라. 이후는 명령 받은 대로 행동하라. 이렇게 휴의는 부대원들을 이미 정해 놓은 목적지로 산개 시켰다. 목숨을 부지하면서 다음 지령을 기다려라. 어둠 속에서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을 당한 소년병사와 부관남았다. 이 아이는 내가 치료하마. 너희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일단 아이부터 고치고 나서. 그런 다음에는. 그렇지. 상하이로 가는 대신 조선에 일단 남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부관에게 조차 말하지 않고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오늘과 같은 산발적 전투도 먹혀 들어가겠는 걸. 오늘 같은 일이 조선 팔도에서 벌어진다면. 흰 옷 입은 삼천만 동포들이 독립 의지를 다시 불태우겠지. 상하이 임정은 휴의 부대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했다. 이런 대규모 공격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총독부 경내로 진입해 전투하는 것은 자살행위로 여겼다. 그래서 휴의 부대를 일회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휴의는 아니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간다. 실제로 그는 죽은 병사를 거의 내지 않았고 부상병도 생각보다 적은데 자신감을 얻었다. 휴의는 인왕산 자락을 타고 신촌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그쪽에 보아 둔 절이 있었는데 그곳 주지와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그곳에 들르면 달릴 수는 없어도 걸을 수는 있는 부상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스님은 산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음식과 옷과 급한대로 소년 병사의다리에 붕대를 감겨 주었다. 그리고 다친 다리에 필요한 약을 먹였다. 작은 상처라도 덧나면 위험하오.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휴의는 엎드려 절했다. 고맙습니다. 스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 휴의가 합장했다. 소년병의 부상은 휴의가 보기에 일주일로는 어림 없었다. 아마도 그 사이에 죽을지도 모른다. 팔뚝 관통상을 입은 소년은 절까지 오는데는 성공했으나 피를 많이 흘렸다. 핏기가 빠져 나간 얼굴은 창백했다. 소년은 두려움에 덜었다. 그것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앞서 죽지 않고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붕대를 풀때 그는 자신이 지르는 고통의 소리를 자신의 귀로 온전히 들었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소년병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 처음으로 살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했다.

단 한 발의 총알이나 한 번의 깊숙한 대검으로 생과 사의 시간이 짤라에 불과하다면 죽음은 더 이상 위협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상을 입고 비명을 지르고 피를 쏟는 것은 보고 느끼는 것을 끔찍하다. 이것은 모든 부상병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더 최악인 것은 포로가 되는 것이다. 다행히 그것을 피했으나 소년의 창백을 얼굴을 보고 휴의는 그의 얼굴을 잡고 울었다. 소년의 눈물로 화답했다. 나무아미타불. 스님이 다시 염불해다. 지옥을 믿는 대신 극락을 믿지 않았던 휴의는 소년이 죽어서 생전 자신이 믿지 않았던 평화의 세계로 가기를 기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아이는 꼭 극락으로 갈 겁니다. 제가 인도하지요. 스님이 목탁을 작게 두드리며 말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휴의는 따라했다. 그러다가 문득 부하들도 자신처럼 권총을 하나씩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에게 권총이 있었다면. 그러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직감한 소년이 쉽게 자기길을 결정했을 수도. 자신의 최후를 남의 손이 아닌 스스로 책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결코 마지막을 경솔하게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적에게 항복하거나 붙잡히는 것보다 백배 아니 천배는 더 낫지 않은가. 가장 최악의 순간을 면한 것은 또 얼마나 다행인가. 소년병은 죽어가고 있다. 죽는 것이 좋은것이다 라고 그에게 말할까. 다행이다. 적에게 잡히지 않은 것이. 그들에게 잡히면 손톱 발톱 다 뽑는다. 종국에는 눈알을 도려낸다. 휴의는 자신이 잡혀 고문받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에 앞서 독립군을 잡아 자신이 그렇게 고문했던 것을 털어 놓고 싶었다. 난 잡아 고문했던 왜경이 내 어릴적 친구였어. 너 만할 땐 우린 손을 잡고 해변을 달렸어. 친구의 소중함을 알았지. 그래 다 털어 놓는 거야. 그리고나서 소년 병사앞에서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럴 기회가 있을까. 난 독립군토벌대 장교였다고. 너 같은 독립군을 사냥했어. 미안하다. 너를 부상입히고 피를 흘리게 하고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바로 나야. 지금은 고바야시. 종로서장이야. 조선인 최초라고 아주 신났더구나. 내가 반드시 복수해 주마. 나를 고문한자가 아니라 너를 죽인자를 그렇게 해줄게. 약속할게. 소년병사가 눈을 꿈벅였다. 속마음을 알아채기라고 한듯이. 그런 약속을 하는 순간 휴의는 눈물을 뚝 그쳤다. 되레 차분한 마음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선생이 준 시계를 보고 있는 것처럼 가슴 깊은 바닥은 고른 숨소리가 그 상태를 유지했다. 더 올라가려는 기미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죽어가는 어린 부하 앞에서 지나치게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남의 일인가. 남의 일처럼 굴어도 되는가. 더구나 지금은 소년이 죽는 순간이다. 아무리 급해도 소년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 적들이 산을 포위하고 시내를 이잡듯이 뒤지고 있어 당장 떠나지 않으면 적에게 잡힌다 해도 휴의는 소년병을 두고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휴의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의 생명도 중요했지만 자신만 보고 있는 이 젊은이들의 온기를 유지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았다. 나의 목숨보다 그의 목숨이 가볍지 않다. 죽기에 너무 이른 나이는 없다. 적들의 군홧발 소리가 들린다. 여기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소년은 숨이 길다. 어서 죽기를 바라야 하는가. 다려가야 한다. 산자들이라고 살아야 한다. 지금이 그 시간이다. 휴의는 그래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았다. 다리가 서두르고 있다. 살아 있을 때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는 품에 안은 소년병을 내려 놓지 않았다. 대장은 망설였다. 평소 단칼을 좋아했던 대장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대장은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안긴 것은 소년이 아니라 나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나는 운이 좋았고 소년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소년은 죽어가고 있고 나는 지금 살아있다. 여분의 인생인가. 그래 여분의 인생. 휴의는 쓴 웃음을 지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비장하다 못해 거의 연극배우처럼 소리치지 않았던가. 죽여라, 보이는 것들은 다 죽여라. 총독을 찾아라. 닥치는 대로 쏘고 던져라. 이렇게 외쳤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싶다. 목소리가 쉰 것을 빼면 그런 소리를 질렀는지 조차 의문이 들었다. 마치 배위의 이순신 장군처럼 포효했었는데.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집기를 치우고 삼층 난간에 도착했다. 내가 앞장선다. 뒤를 맡아라. 엄호해라. 휴의는 삼층을 박차고 올라갔다 비록 이층 계단에서 몇 발자국되지 않았으나 정말로 박차를 가했다. 분대장이 뒤를 따랐다. 너는 여기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달려드는 적을 처치하라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몰았다. 일분대장은 불만이 없었다. 바로 그 명령을 받기 위해 들어온 것처럼 즉시 아래로 몸을 돌렸다. 이 무렵 완용의 종로서 왜경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다. 얼마나 급했던지 왜경들은 자신들의 위치는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동문쪽이 아닌 정문을 향해 진입하기 위해 열을 지었다. 완용은 오른 손을 들어 앞으로 내리면서 경내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도열했던 왜경들은 완용의 명령에 따라 흙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군대가 패배하자 경찰력이 동원된 것을 나무날 수 없다. 비록 적이지만 이런 작전은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칭찬할 이유는 없다. 칭찬을 한다고 해도 받을 시간을 그들은 확보하지 못했다. 경찰 병력 역시 당장은 독립군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상황파악이 덜 된 상태에서 무턱대고 달려들다 상당수가 발로 차면 쓰러지는 고목신세였다. 

종로서에는 처음에 괴한 오육 명으로 보고됐던 사안이 점차 커져서 소대 병력이 됐다가 그보다 적다거나 그 정도는 된다는 식의 혼란이 이어졌다. 적의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했으나 완용이 이끄는 경찰은 자신들이 공을 세울 기회라고 생각해 외곽을 지키는 군인과 경쟁하듯이 광장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 나갔고 결과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고목이 됐다. 완용은 그런 부하들을 뒤에서 지켜 보았다. 그렇다고 후퇴를 명령할 순 없어. 저들 가운데 몇 명은 살아 남아서 나머지 내 명령을 기다릴 거야. 잘하고 있어. 저녁은 누구지. 그래 들어온지 일년이 된 신참 나카무라 순사군. 저런 달리기 속도라면 금방 안으로 들어가겠는 걸. 이진 앞으로. 완용은 이진을 들판의 소처럼 내몰고 난 후 자신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성난 황소가 됐다. 나를 따르라. 산자여 나를 따라오라. 완용은 부관을 앞세우고 방금 앞서간 부하들의 뒤를 좇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옆으로 새서는 경북궁 별궁의 기둥뒤로 몸을 숨겼다. 무작정 달려나가기보다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전방을 주시해야 한다는 판단때문이었다. 이거 큰일 날 뻔 했네. 총소리가 너무 요란해 자칫하면 자신이 표적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몇 차례에 총독 관저 출입으로 대강의 건물 위치나 광장의 크기를 알고 있었으나 막상 달려 보니 생각보다 광장은 넓었고 보호해줄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완용은 직감적으로 적이 계단 아래나 궁의 다른 건물에 숨어서 저격한다면 일개 연대가 동시에 들어쳐도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우선 적의 숫자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어디에 숨어 있는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래야 적들이 어느 정도 강한지를 알수 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움직이기로 했다. 완용은 부관의 무전기를 빼앗듯이 받아 들고는 자신이 직접 상황을 경찰청으로 중계하기로 마음먹었다. 괴한들이 상당히 강한 상대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들처럼 갑자기 완용에게 다가왔다. 일방적인 공격만 퍼붓다가 자신보다 센 자를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그런 공포였다. 그래서 그는 우선 몸을 사렸다. 공포심은 살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했다. 더구나 적들의 정체는 안갯속이다. 그는 처음에는 미군을 생각했다. 겁없이 진주만을 공격했고 미드웨이 해전을 벌인 복수로 미군이 총독부를 습격한 것으로 알았다. 언제나 선제공격을 했으나 이번에는 미군에게 기선을 뺏긴 것으로 보았다. 그만큼 그는 정보가 없었다. 미군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느꼈다. 미군이 아니라면 총독관저를 침입할 용기를 가진 자나 그런 힘을 가진 괴한 무더기는 없었다. 중국은 아니다. 그럴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 제나라 지키기도 벅차다. 남은 것은 소련이다. 그러나 소련도 아니다. 모른다. 소련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소련과는 한 때 친구였으나 지금은 적으로 맞서고 있다. 소련이라면 정말 강한 상대가 아닌가. 기둥뒤에 숨어 완용은 별 별 생각을 다 했으나 그 생각의 범주에 조선은 없었다. 감히 조선 독립군정도가 일본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그의 두뇌 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간혹 한 두 명의 정신 나간자가 테러 행위를 벌일수는 있으나 집단으로 대드는 경우는 어떤 첩보도 그런 기미도 보고받은 바도 없고 낌새도 전혀 없었다. 두만강이나 압록강 전투는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로 치부했다. 총독부 공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가 간주한 적의 범주에 조선독립군이 빠져 있었다. 

자신 빼고는 조선에서 왜경에 대들만한 강한 자가 없어. 이런 자만심이 당시만 해도 완용의 가슴에 뻗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답답했다. 공포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욕망으로 차 올랐다. 모르는 적과 대항하는 것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일이다. 그는 무전에 대고 총독 관저가 습격을 받았고 지금 전투 중이며 총독이 어떤 상대인지 알지 못한다고 청에 보고했다.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완용은 그것이 자신도 궁금해서 미칠지경이라고 했다. 가장 시급히 해결할 것은 괴한의 무리가 어느 나라 병력이며 그 규모가 어느 정도 인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도. 그래서 완용은 무전기를 부하에게 넘기고 자신이 직접 총독 관저로 뛰어들기로 작정했다. 공포를 이길 방법은 공포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견뎌온 방식을 이번에도 사용했다. 그래서 날랜 부하 세 명을 급히 차출하고는 바로 회색 건물의 기둥 쪽으로 돌진했다. 엄폐물이 없는 광장을 빠른 속도로 지나친 다음 기둥에 숨어 다음 작전을 개시하려는 속내였다. 그 사이 안에 있던 휴의는 이층 계단을 확보하고 총독이 있는 삼층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 집의 주인이며 조선을 통치하고 있는 자가 분명 이 근처에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어디 숨었나. 손들고 나오면 빵하고 쏴줄께. 난 사냥개. 구멍속에 있는 거 다 안다. 어차피 죽은 거 사내답게 떳떳하게 나와라. 권력을 쓸 때 그 자신감은 어디가 있니. 굳은 의지는 또 어떻고. 어서 나와 이 쥐새끼야. 휴의는 삼층 전체가 울려 퍼질 정도로 외쳤다. 메아리가 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 아주 급하거든. 네 놈은 내가 죽기를 바라지. 그래야 네가 사니까. 이제 그런 공식은 기대하지마. 넌 죽었어. 셋 셀 동안 안 나오면 수류탄 마구 던지고 난 탈출할 거야. 알았어. 지금 부터 센다. 으찌, 니. 쌈. 휴의는 이렇게 세고는 수류탄 대신 기관총을 문짝이 있는 모조리 돌아가면서 쐈다. 밀폐된 공간에 수류탄을 터트리면 적도 죽지만 자신도 부상을 당할 공산이 컸다. 휴의는 죽음보다 부상을 더 두려워했다. 포로로 잡히면 완용의 고문을 피할 수 없다. 두 번 다시 그같은 악몽을 꿀 수는 없다. 

기관총 세례를 받은 목표물은 문이 저절로 열리기도 했고 어떤 곳은 나무 판자를 그대로 통과해 유리창을 깨고 나가 대리석 벽에 부딪쳤다. 그는 총맞은 문을 차례로 발로차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세 개의 문까지 그렇게 하는 동안 그가 마주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그러다 마지막 네 번 째 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총독을 보호하려고 양쪽 문 옆에서 아래쪽 상황을 주시하던 총독부 산하 지휘대장과 부관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비서는 죽은 지 오래됐는지 신음소리 조차 없었다. 비서는 총이 가슴과 배를 관통하자 맞았다, 내가 총을 맞았다고 외치면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반사적으로 총알이 날라온 곳을 향해 쥐고 있던 총을 한 방 쏘았다. 그 총알은 천장의 상들리에에 맞고 상들리에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원하지 않은 사태를 맞은 휴의는 움찔했으나 상황을 역전 시킬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머리 쪽을 맞은 지휘대장은 비서보다는 상황이 더 나팠다. 겨우 총을 겨누기는 했으나 발사하지 못하고 얼마 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쓰러진 자들을 확인사살한 독립군 대장 휴의는 근처 어딘가에 총독이 숨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소리를 지르면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숨소리가 들려. 바들바들 떨면서 살려고 애원하는 저 가냘픈 눈동자가 느껴져. 

그래서 그는 총독이 들으라는 듯이 쥐새끼 같은 자식, 어디 숨었니. 살고 싶으면 나오라. 아니면 이번에는 정말로 수류탄으로 모두 박살내겠다고 외쳤다. 삼층의 비밀 공간에 숨어 있던 총독과 참의원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누가 나오라고 해서 말을 들을 그들이 아니었다. 나는 저 말을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나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총독은 나오면 살려 준다는 말에 그럴까 하고 몸을 움직이다말고 멈췄다. 그리고는 휴의의 말을 따라 그대로 행동에 나설듯한 참의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귀에 대고 나가면 죽으니 여기 그대로 있자고요, 하고 만류했다. 독립군 대장은 자신의 말을 듣고 총독이 제발로 걸어 나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몰라 항복을 두어 차례 더 요구했다. 그러나 총독은 물론 참의원 둘 중 누구도 손을 들고 나 여기 있소, 그러니 쏘지 마시오 하고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총독과 참의원은 총알이 자신들을 비켜 간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들이 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운이 오늘 하루 종일 자신에게 올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턱대고 비밀창고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가면 죽고 있으면 산다. 총독은 그 말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몇 번을 되풀이 했다. 그러면서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게 돌아가게 이유를 알지 못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참의원은 더 기가 막혔다. 조선의 상황이 어찌된 일인지 속시원히 누가 설명해 줬으면 싶었다. 이러려고 내가 조선은 온 것은 아니다. 이런 상태라면 조선 총독은 줘도 갖지 않겠다. 당장 참의원은 이런 마음이었다. 조선 총독은 싫어. 내 적성에 맞지 않아. 

참의원은 화가 나 있을 뿐만아니라 자신이 하필 왔을 때 사태가 터진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허구헌날 놔두고 왜 오늘이야. 조선땅에 눌어 앉아 호사를 누리려던 그의 계획은 물건너 간 것은 둘째 치고 생명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의 이런 기분은 제삼자가 보기에도 이해할만 하다. 정말로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놀라움에 그는 잡은 총독의 손을 더 세게 잡고는 각하, 도대체 누굽니까 하고 귓속말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실어 말했다. 낸들 알겠소. 총독이 그보다 더 작은 소리로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목소리가 떨려서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총독이라는 자가 떨고 있군. 참의원은 이런 생각을 했으나 여기서 죽으면 개망신이라는데 둘은 의견을 모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살아서 나간다면 우리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싸운 거요.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그나 저나 살기만 하면 뭐든 하고 싶은 심정이오. 시골에서 가서 농사 지으라면 짓고 대장장이가 되라면 되겠소. 나도 그런 마음이오. 둘은 조선정책을 근본적으로 다시 세워야한다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목숨만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때 독립군 대장이 수류탄 운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알은 운 좋게 피했어도 수류탄은 그럴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농부고 대장장이고 뭐고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참의원은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렇게 조선행을 서둘렀는지 한탄했다. 아들을 보고 아들이 데리고 있는 조선여자도 보고 동생도 만난 것에 만족하면서 숨을 거둬야 하는지 참의원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한심스러운 자신을 한심스럽게 탓하고 있던 참의원의 귀에 엄청한 폭발음이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소리는 3층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광장에서 터진 것이 마치 여기서 나온 것처럼 크고 굉장했다. 대포 소리인가. 침략자들이 광화문에 포를 설치하고 총독부를 향해 갈겨대고 있는지도 몰랐다.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는 실로 대단했다. 포성이 멈추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총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삼층에서도 전투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 짐작할 정도로 요란했다. 총독의 입장에서 보면 그 굉음은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뒤늦게 합류한 남산의 헌병대사령부가 자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추궁을 받지 않도록 포를 날린 것이다. 포는 광장에도 떨어졌고 근정전 옆의 기와에도 떨어졌다. 독립군 대장은 철수를 명령했다. 더는 머무를 수 없었다. 철수, 지금 바로 철수다. 독립군 대장 휴의의 외마디 소리에 따라 다급한 군홧발 소리가 요란했다. 비밀공간의 총독과 참의원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안았다. 철수. 적들이 물러난다는 말이지. 조선말이라고 해도 나는 그 정도는 알아들어. 무슨 말인지 몰라 옆구리를 찌르는 참의원에게 알려줄 생각도 않고 총독이 속으로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산 것은 아니어서 총독은 검은 공간에서 환한 곳으로 나가기를 주저했다.

독립군 대장은 전멸 당하느니 일부라도 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정도도 애초 계획했던 시도보다 백프로 이상 성공한 작전이다. 그러니 더 큰 것을 노리려다 실패하지 말자고 생각을 바꿔먹었다. 부하를 살려야 한다는 그 말 속에는 자신의 목숨도 들어있었다. 독립군 대장 휴의는 죽음의 피비린내 속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 거리자 이층으로 올라올 때 보였던 결기가 한 순간에확 꺾어진 것을 알았다. 무전이 온 것도 아니고 창의문이나 북악산, 인왕산 쪽에서도 상황이 바뀌었으니 철수하라는 내용도 없었다. 철수는 단순히 현장 지휘관인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계단을 내려오면서 수류탄을 던지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삼층에 있던 세 명의 무장 독립군은 급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 대장을 따라 이층으로 내려갔고 이어 일층 현관에 있던 나머지 병력과 합세했다. 일층의 병력들도 대장의 철수명령을 받고 일부는 광장을 질러 출입문 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완용의 총에 앞선 병사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소년 병사였다. 그는 내버려 두면 쓰러질것이다. 다행이 뛰는 다리가 아니라 팔이쪽이다. 휴의는 소년병사가 가장 앞서 달린 죄로 가장 먼저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뒤이은 병사도 완용이 계단에 배치한 경찰의 총에 맞아 마사토 흙에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독립군 대장은 이런 것을 염두에 두었으나 지금은 후퇴하면서 교전하는 방법외에는 어떤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한다. 달려라. 철수 철수. 

여기서 독자들은 휴의의 판단 미스를 지적하고 싶을 것이다. 철수가 조금 느렸다는 것과 총독이 있는 곳에 수류탄을 던지지 않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독자들은 짐작은 할 수 있으나 휴의의 판단이 틀렸다고 단정적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목숨은 물론 부하들의 목숨을 생각했다. 더구나 작전은 기대 이상의 성공이었다. 총독부에 진입할지 여부도 불분명했으나 진입에 성공했고 우리측 사상자보다 적의 사상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전과를 올렸다고 여길만했던 것이다. 총독을 봐주기 위해 일부러 수류탄을 던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급하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 앞에 열린 문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어야 한다는 것을 그만 잊었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하고자 한다. 그만큼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 때 휴의나 부하중 누구 하나라도 총독이 숨은 곳에 수류탄을 던졌다면 정말로 조선의 식민지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수류탄을 던져라 하고 말한 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역사에 미련으로 남을 것이다. 조선민으로 보면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고 제국주의 입장에서는 천운이었다. 그나저나 휴의의 퇴로는 힘에 겨웠다. 진격보다 더 위험했다. 총알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다갔다 했다. 눈뜨고 자세히 보면 보일 것만 같았다. 그만큼 사방에서 비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적들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그야말로 벌떼처럼 공격했다. 그것은 마치 정월 대보름날 불깡통에서 나오는 별똥별 같았다.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모습. 

휴의는 어린 시절 바싹마른 집 앞 논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기억을 떠올렸다. 완용도 있었고 점례도 여순도 있었다. 완용은 같은 편이어서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다. 둘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점례와 여순은 멀찍이 떨어져서 응원을 했고 간혹 박수를 치고 환호도 질렀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집에 돌아가야 할 때를 자꾸 뒤로 늦춘 것은 추위를 이겨낼 만큼 재미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불놀이 싸움은 말은 싸움이지만 다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긴다거나 진다는 의미도 있었으나 서로 어울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놀이의 마지막은 늘 화려했고 다정했다. 내편 네편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마지막 불깡통을 하늘로 던져 올리는 것으로 싸움은 끝나는 것이다. 화산 구경은 못했지만 그 광경은 그것에 못지않은 장관이었다. 불벼락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서서히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도 하나도 공포스럽지 않았다. 놀라움과 경탄만이 입가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휴의는 완용이 던지는 불깡통이 제일 높이 올라가고 제일 멋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는  팔의 힘과 정확도와 손을 불깡통에서 이탈 시키는 순간을 잘 포착했다. 완용은 불깡통 던지기의 일인자였어. 휴의는 쓴 맛을 다셨다. 완용의 깡통은 다른 아이들이 돌리는 것보다 곱절은 컸다.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가는 소나무 광솔의 양도 그만큼 많았다. 담는 그릇이 크니 마지막에 남은 붉은 재도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완용이 깡통 전체를 하늘로 높이 던져 올리면 가장 높이 올랐고 그것이 거꾸로 떨어져 내려오면서 수많은 불씨를 뿌렸다. 그 장면은 다른 깡통과는 달랐으니 압도적이라는 말은 이런 때 써야 한다.

점례나 여순은 완용이 불깡통을 던질 때까지 집으로 가지 못했다. 완용의 것을 보지 못하면 지금까지 본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완용은 짐짓 가장 늦게 깡통을 던져 충분히 애간장을 태운 다음 피날레를 장식하곤 했다. 어떤 아이들은 깡통이 정확히 거꾸로 서지 못해 불꽃이 약하게 떨어지거나 아예 불티가 날리지 못하고 깡통과 함께 추락하기도 했다. 완용은 언제나 정확했다. 한 번도 불깡통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가장 높이 올렸고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을 때 깡통은 뒤집어졌다. 자로 잰듯이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녀석은 던지고 나서 자리를 옮겼다. 자신의 손에서 떠난 불깡통을 보기 위해서였다. 늘 자신이 밟고 있던 땅으로 깡통은 떨어질 것을 알고 미리 피하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떨어지는 자리는 언제나 자기가 던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완용은 팔을 뻗고 나서 미리 봐둔 점례나 여순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성큼 성큼 옮겼다.  어머나, 둘은 작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자리를 비쳐주지 않고 버텼다. 완용은 이제 그녀들과 나란히 서서 자기가 던진 불깡통의 불이 아래로 수천 개의 별똥별 처럼 쏟아지는 것을 구경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멋진 광경이었다. 불깡통 던지기의 일인자였던 완용은 그것 말고도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 잘 했다. 비석치기나 자치기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휴의는 언제나 이등이었다. 발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짚으로 만든 축구공을 찰 때도 영락없이 아이들을 따돌렸고 멋지게 골을 넣었다.

완용아, 네가 제일 멋있어. 점례인지 여순인지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면 완용은 뒤돌아 서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밤하늘의 별빛과 불깡통의 재 사이로 완용이 세운 엄지 손가락이 빛났다. 유성처럼 짤라의 순간이 흘러갔다. 그러나 여흥의 여운은 길었다. 저 놈은 저 손가락처럼 우뚝설 거야. 그래 우뚝섰지. 친일파 왜놈 경찰로.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느냐고 한탄하지 말자. 그는 그의 길을 뚜렷하게 갔고 목적이 분명했다. 우뚝선 것이 고작 일제 순사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 잡느냐고 비난하지 말자. 어영부영 순사나 할 것이지 일인자가 됐느냐고 손가락질도 말자. 독립군을 고문하던 완용은 불깡통을 던지면서 환호하던 그가 더이상 아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붉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 때는 웃음이 있었고 지금은 살기로 덮였다.
골을 넣고 손뼉을 마주쳤던 그는 어디로 갔는가. 휴의에게 그는 죽은 자였다. 친구도 동료도 아니었다. 자신을 군대 보내는 친구의 우정은 없었다. 나중에 그것은 우정이 아닌 적의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과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휴의는 군인으로 성장했고 변절했다. 휴의가 토벌대의 일원으로 계속 있었다면 식민지 조선에서 완용과 서로 누가 더 높은 곳에 오르는지 친일 경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휴의는 제국의 군인이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무려 일년 삼개월 동안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이 독립군 조선청년을 취조만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일본군의 고급 장교로 다른 인생길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선인이 조선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이 왜 이상한가. 질문이면서 대답을 듣는 순간 휴의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았다.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수갑을 채운 조선인과 함께 군복을 입을 채로 도망쳤다. 그리고 이제는 상해 임정의 지령을 받고 조선총독부 습격에 나선 것이다.

휴의는 자신이 이쪽이 아닌 저 쪽에 있어야 정상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저쪽에 있어도 이쪽에 있을 때만큼이나 어색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휴의는 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쪽은 갈 수 없는 길이 됐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기왕 독립군으로 싸우는 만큼 조선특공대장의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자신처럼 경험이 많고 실전에 능한 사람이 선두에 섰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비록 아끼는 소년병사를 잃었지만 말이다.  이런 저런 잡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조금은 한가하지 때문이다. 움직이고 뛰고 달리고 전진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는 딱히 생각이라는 것이 들어올 틈이 없다. 어쩌다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고작 살아서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 다음의 생각은 할 수 없다. 그런데 휴의는 그 이후에 매달려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이 시계를 보았다. 임정의 선생이 준 시계. 오후 7시 3분이다. 소년은 숨을 거뒀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휴의는 아직 온기가 있는 그를 품에서 떼어내지 못했다. 스님, 이 아이를 부탁합니다. 틈나면 찾아오겠습니다. 화장해서 유골이라도 보관해 주세요.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은혜는 갚겠습니다. 아닙니다. 다 부처님 뜻입니다. 어서 가고자 하는 길을 계속 가세요. 뒷일은 저에게 맡기시고요. 나무관세음보살. 휴의는 일어섰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산 너머에서 포사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헌병대사령부가 마구잡이 포격에 나섰다. 도주하는 독립군의 후방을 노리고 포는 인왕산 정상부근과 그 너머까지 떨어졌다. 절에서도 이제는 그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휴의는 합장을 하고 절을 떠났고 

휴의와 완용이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을 때 상하이의 여순 부부는 환자 맞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당탕탕 건물 아래 쪽이 시끄럽다. 응급환자가 생긴 모양이다. 여순은 퇴원한 환자의 침상을 정리하다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럴 때는 말수가 필요하다. 그의 도움없이 병원을 운영할 수는 없다. 제발로 걸어오는 환자라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지만 지금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거나 들것에 실려 올 때는 대책이 없다. 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란을 잠재우는데 말수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이렇게 떠든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일행을 진정시켰다. 환자의 몸에서는 선혈이 낭장했다. 흰 옷 때문에 피는 더 선명했고 확실했다. 조선족인가. 말수는 환자를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 등 인종을 가리지 않고 환자들이 왔지만 흰옷 입은 사람이 피를 흘리면서 들어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수는 일행가운데 조선말을 쓰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는 환자와 연관된 보호자라고 판단했다. 그 사람의 얼굴대신 환자의 상태를 살피면서 말수는 물었다. 무슨 일이오. 뻔한 질문이었지만 대충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보호자인듯한 여자는 다른 나라 말이 아닌 조선말이 반가운지 대답에 힘이 실렸다. 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무슨 말이라니 말이 안 되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차분하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말을 알아 듣는 사람에게 하는 동지 의식같은 것이 작동했다. 

고문 당했거든요. 일본 경찰한테요. 이 상태로 집 앞에 버려졌어요. 고문과 일본 경찰이라는 말에 말수는 순간 움찔했다. 그의 귀에 들려온 단어치고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고약하다고 할 수 있을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에 말수는 뜨끔한 기운이 올라 왔으나 목소리와 표정은 그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무슨말인지 알아 들었거나 못알아 들었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우선 응급처치 부터 했다. 빠진 팔을 집어 넣었고 찢어진 다리의 상처를 씻어냈다. 그런다음 꿰맸고 상처에 붕대를 감았다. 감염을 막기 위해 필요한 항생제를 주사기로 찔러 넣었다. 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거드는 여순도 옆에서 지켜보는 간호사도 말수의 솜씨에 감탄했다. 말수에게 말했던 환자 보호자는 안도했는지 그제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닥친일을 알지 못해 손을 씻은 다음 수건을 들고 나오는 말수에게 하소연 하듯이 말했다. 두려움이 아까보다는 조금 덜했다. 남편은 고문받을 짓을 하지 않았어요. 이 무슨 꼴인지 모르겠어요. 잘못이 없는 남편을 그렇게 한 일본 경찰을 자신을 대신해 말수가 따져 주기를 바라는 듯한 말투였다. 조선어를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말수를 신뢰하면서 배상이라고 받아야 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당장 치료비가 걱정인지 눈물을 흘리면서 마주잡은 두 손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연신 꼼지락 거렸다. 급한 환자가 치료를 받고 나자 다른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침상앞에서 환자가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어떻게 하느냐고 말수에게 물었다. 말수는 여순을 불렀다. 여기요. 이 환자 보호자에게 설명좀 해주세요. 수술 도구를 정리하던 여순이 다가왔다. 그녀는 환자 보호자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즉한 목소리로 이런 환자 받아도 되나 몰라요, 하고 말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요. 환자를 골라 받을 수야 없지. 하지만 여긴 일본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곳이 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집 앞에 버렸다고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내 보낸 거잖아. 알아 낼 것 다 알아 냈거나 아니면 잘못 잡은 거지. 여순은 말수의 판단이 옳았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안심이 된다는 투였다. 치료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다. 설사 밀정이었거나 역적질을 했다손 치더라도 다 끝난 일이었다. 그러나 여순은 상해에 병원을 열고 나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정리해야했다. 이제 겨우 3개월 지났다.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고 여겼는데 느닷없이 조선인 환자가 들이닥쳤다. 경찰에 잡힌 고문환자. 여순의 입가에는 고문환자라는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워낙 험난했기 때문에 고문환자는 이제 막 이루기 시작한 병원을 허물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심하게 있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남아 상해에 왔고 운 좋게도 전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병원을 개업했다. 털어 버리자. 잊어 버려. 앞으로 이보다 험한 꼴을 더 볼 수도 있어. 말수의 말이 옳다. 설사 조선인 독립군이라 해도 하부조직의 피라미에 불과하다면 덜 신경써도 된다. 버린 환자를 치료한 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순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뭔가 꺼림찍한 것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성사셨다. 여순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개원하기 전까지  숨가빴던 순간들. 필요한 약품을 싣기 위해 군함에서 내렸고 그곳이 사이판인 것을 알았다. 그들은 구겨진 성당에서 숨었고 신부도 없이 결혼했고 쥐에 물어뜯겼으며 미군에 의해 구조됐다. 미군 대령을 대충 살렸고 포로로 잡힌 함장을 치료했다. 대령은 완전한 치료를 원했고 함장을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말수 부부를 군용기에 태웠다. 종군의사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상하이에 도착한 함장은 일본 영사관의 보호하에 놓였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미군은 그를 인계했고 대령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함장은 다른 의사 아닌 말수를 선호했다. 여순의 면밀한 간호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수와 여순은 상하이에 정착했다. 정성을 다한 덕분인지 함장의 운명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연장됐기 때문인지 몰라도 함장은 보름 후부터 열이 내리고 허벅지를 관통당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덫나거나 감염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순전히 말수와 여순의 치료 덕분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함장은 말수와 여순을 생명의 은인으로 삼았다. 함장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여기에 남기를 바라는 것을 알았고 그도 아직 완쾌된 것이 아니어서 그들이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어떤 이유를 댔는지 모르지만 말수 부부의 전선으로의 복귀 명령서는 해제됐다.

이제부터는 철저한 신분세탁이 필요했다. 의사면허증도 있어야 했고 허가증도 만들어야 한다. 군함의 함장은 그것도 알아서 처리해줬다. 사실 세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여순은 일본 유학파이면서 경성제대를 졸업했고 말수 역시 연희전문 의과를 졸업한 어렷한 의사로 행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실력이 증명했다. 그까짓 종이쪼가리가 무슨 대순가. 전쟁터에서 수술 잘하고 간호잘하면 그것이 의사 아닌가. 어쨌든 제대로 면허증을 확보한 그들은 떳떳하게 상하이 본부부병원의 간판을 내걸었다. 그날 저녁 말수와 여순은 죽을 때 까지 함께 부부로 살기로 언약한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했다. 사이판 성당 지하에서 맺은 언약을 재확인하면서 부부는 짧은 눈물을 보였다. 그것은 고난 끝에 온 행복의 결과물이었다. 부부병원을 개업한지 한달 후 쯤 일본군 함장은 옷을 벗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함장이 돌아가서 자신을 보호해 줄 끈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되레 좋은 기회였다. 함장말고 자신들의 신분을 어렴풋이 나마 의심하는 사람이 상하이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선인이지만 일본인이었고 중국인 행세를 했다. 상하이 당국으로부터 의사면허증을 받은 것은 물론 정식 병원간판을 달았으니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부는 정식 의사 면허증을 병원 현관 위에 걸었다. 환자들이 들어오면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 걸린 그것을 부부는 하루에도 여러번 보고 또 보았다. 자신들의 이름이 박힌 의사 면허증을 쳐다 보면서 자신들이 진짜 의사라는 것을 말수와 여순은 언제나 상기했다.  고마운 다마고치 상. 여순은 이따금 그 말을 했다. 다마고치는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 함장이름이었다. 부부를 신뢰한 일본인 함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여순은 그런식으로 표현했다. 병원 이름에 본이 들어간 것은 일본의 그 본이었고 설명을 들은 함장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함장은 골치아픈 서류를 일사천리로 처리해 준 것은 물론 두 사람의 결혼식도 그럴듯하게 치러 주었다. 상하이 조계지의 유명 호텔을 빌려 결혼식을 했다. 초청인사는 수 십명에 불과했지만 말수와 여순은 셀 수 없을 만큼의 하객이 축하해준 것보다 더 큰 만족을 느꼈다. 일본영사관이 보내준 축하화환은 제일 앞쪽에 배치했다. 영사관이 직접 나와 축사를 하기도 했다. 대일본 제국의 위대한 의사부부의 결혼을 축하한다고. 함장은 자신이 주례를 서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는 주례사에서 대일본제국의 유능한 의사 부부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했다. 불이 붙은 군함의 갑판위에서 그가 살린 일본군 병사 수만해도 일개 대대는 될 것이라고 추어 올렸다. 그리고 지금도 부상당한 일본인들은 부부의사의 탁월한 의술 덕분에 걱정없이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참석했던 영사와 영사관 직원은 큰 박수로 둘의 결혼을 축하했다. 

함장은 주례를 마치고 나서 간다고 말도 없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짧은 엽서 한 장을 보내왔다. 덕분에 일본에 잘 왔고 정부의 도움으로 도쿄에 큰 집을 마련했다. 틈나면 일본에 와라. 사케를 먹으면서 대접하고 싶다. 부부는 그런 편지글을 읽으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때로는 그 둘이 혼합된 것인지 간혹 환자가 없는 시간에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 봤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빠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 비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환자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돌봤다. 그들은 이제 상하이에서 실력있는 의사부부로 인정받았다. 특히 외상 환자 치료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서 상하이는 물론 은근의 다른 도시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왔다. 소문대로 말수는 부러지거나 째진 환자 치료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런 상처는 그의 손길을 거치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치료됐다. 소문은 널리 나서 그들이 일본 제국대학 출신으로 조선 경성에서 큰 병원을 했고 자발적으로 종군 의사를 하는 등 남다른 길을 걸어 왔다는 이야기가 환자들 사이에서 이리 저리로 전달됐다.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여순은 주로 산부인과 등 여성질환과 내과 전문의로 활약했다. 외과과장이며 대표원장인 말수는 좀 더 안정이 되면 보조 의사를 채용할 계획을 세웠다. 내외과를 통합한 이른바 종합병원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한 번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상해본부부병원은 개원하면서 진 빌린 돈을 금방 값았다. 병원 이름에 본자를 넣은 것은 신의 한 수 였어.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상하이에서 어쩔 수 없는 병원이름이었고 자신들이 하나인 것을 새기는 부부라는 명칭에 만족감해. 본은 일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근본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으나 누가 물으면 일본의 본이라고 둘러댔다.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가 된 여순은 말수보다는 늦었으나 서서히 삶의 안정을 찾았다. 그는 조선을 잊고 싶었다. 흰 옷을 될 수 있으면 피했다. 어쩔 수 없이 가운을 입을 때도 가운 앞에 붉은 색이나 노랑의 스카프를 걸쳐 흰 옷의 이미지를 가렸다. 공장도, 막사도 잊으려고 노력했다. 

말수도 그랬다. 남양군도의 막장생활과 노가다는 그의 의식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말수나 여순이 잊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간호사와 의사보조라는 직업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줬고 그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다시 태어난 그들은 정말로 환골탈퇴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환자가 없거나 잠시 소강상태를 보일 때면 둘은 억척스럽게 공부했다. 특히 영어에 매달렸다. 서양의술은 영어를 모르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어려운 의학용어를 사방천지에 붙여 놓고 잠을 잘 때도 사전을 끼고 잤다. 다행스럽게도 여순도, 말수도 노력한 보람이 있는지 의사 흉내를 낼 수 있는 영어실력을 터득했다. 누가봐도 그들은 이제 완벽한 의사였다. 임상적 실력은 더 물을 것도 없고 연구적 실력도 나날히 늘어갔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 동안 그들은 삶이, 인간의 삶이 이토록 드라마틱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주인공인 그들 조차도 이런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죽마을 처녀에서 위안부로, 전선의 간호사로 태평양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아서 이 자리에 섰다. 통영 뱃놈이며 살인자이며 남태평양 섬의 광부였던 말수는 곡괭이보다 흰 가운이 더 어울렸다.

일년 만에 부부는 상해 조계지의 어렷한 삼층 건물을 병원으로 쓰고 있다. 밀려드는 환자때문에 병원은 간호 보조원 두 명을 두었고 청소 등 잡일을 처리하는 하인 두 명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곧 병원 식구가 10명을 돌파할 것이다. 꿈을 꾼다면 이런 꿈을 꿔야 하는가. 전쟁통에서도 꿈은 이루어 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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