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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8 15:11 (일)
인천항에 도착한 의원 일행은 수행비서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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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에 도착한 의원 일행은 수행비서를 재촉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02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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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기무라 대표 의원 일행은 정오가 조금 못 된 시각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워낙 거물급 인사의 행차라 조선총독부에서도 총독 다음가는 이인자가 직접 마중 나와 있었다. 의전 서열로 치면 일본 전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단한 인물이 밟은 조선 땅의 첫인상은 그저 그런 것이었다. 애초 어떤 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보자는 심사였기에 그는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가슴에 담았고 그런 것이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조선이라는 첫인상은 없었다. 행색이 초라한 흰옷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우마차가 비좁은 길을 통행하고 그들이 다니는 길은 마르지 않아 질척거렸다. 그가 보기에 이곳에 문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무라는 그들을 측은하게 여길 마음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조선 땅에 온 목적과는 큰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되레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대하려는 태도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아직 나라 구실을 하려면 멀었어. 사람들은 미개해. 내가 할 일이 많이 있다는 말씀. 선진 문명을 가져와야지. 본토보다는 못해도 야만인들을 속국으로 둘 수는 없어. 그러면 대일본제국도 망신아닌가. 일을 시켜 먹으려면 가르쳐야지. 그 정도 수준까지는 끌어 올려야 하는데 그것도 시간이 꽤 걸리겠는 걸. 하지만 해야지. 그것이 내 사명이라면. 

그런 면에서는 조선 땅이 일부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인답게 기무라는 자신의 속내를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보고 듣는 것에 일일이 평하지 않는 대신 속으로만 자신에게 판단을 내렸다. 이건 보고서 감이야. 탐험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낯설지만 낯설지 않아. 남의 나라 아닌 내 나라. 그래 여긴 중요해. 섬나라 일본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잘 닦고 활용하자. 기무라는 자신이 총독이라면 조선을 어떻게 다스릴지 스케치 하듯이 대충 대충 그려 나갔다. 긴 여행이었다. 기무라는 그러나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현해탄을 건너올 때 심하지는 않았으나 약간 멀지 증세를 느꼈다. 배가 흔들리면서 아침에 먹은 것이 울렁거렸다.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이유였다. 시간은 정오를 지나고 있었으므로 부관이 식사가 준비됐다는 말을 가져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음식이 기다리고 있나 하는 호기심으로 안내하는 식당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식솔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끼니 한 번 때우는 것도 여간 신경 쓰는 일이 아니었다. 기무라 일행이 준비한 말을 타고 지날 때 지켜보던 근처 백성들은 차림새가 보기에 놀라운 광경이라는 듯이 눈에 가득 호기심을 담았다. 저들은 왜 이리 촌스런운가. 상투를 틀고 머리를 올린 꼴이 꼭 원숭이 같지 않은가. 옷은 저게, 참. 흰옷이라니. 빨래도 제때 못하면서 금방 더러워지는 흰옷이라니. 그래 채색할 수 있는 기술이 있겠어. 저기 앉은 노인네를 봐. 일하기도 바쁜데 저러고 있으니. 기무라는 조선인의 저런 모습에서 게으름을 보았고 나라를 뺏긴 이유를 알았다. 식당 앞은 중국인 거리와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총독부 이인자는 조선에 왔으니 조선식 식사를 해보자고 권했고 기무라는 달리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기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생각보다 식당의 반찬은 정갈했다. 이조백자에 담긴 가짓수가 엄청났다. 무지막지하군. 이걸 다 먹는다고. 세어볼까. 기무라는 할 일도 없고 해서 상위에 차려진 반찬수를 눈으로 따라갔다. 얼추 스무 가지가 넘는 듯 했다. 조선인들은 원래 이렇게 많이 먹나. 그런데도 비쩍 말라 있다니 이게 무슨 이유냐. 

차린것의 절반도 비우지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기무라는 그들의 정성이 자신의 위치에는 걸맞는다고 판단해서는 인지 식당을 나설때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한결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멀미도 가셨고 기운도 조금 나는 것 같았다. 배도 대충 채웠고 반주로 먹은 막걸리라는 술도 일본의 술과 비교해 나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이 식사를 다 마치지 않았음에도 입가를 닦고 밖으로 나왔다. 식민지의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어서 아들을 보러 가야지. 그는 이런 마음으로 아들이 큰 부상을 입지 않고 건강한 모습이기를 바랐다. 편지에는 작은 부상이라고 했으나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믿기 어려웠다. 다행히 아들 유마는 그 전날 조선에 무사히 도착해 있다는 통보를 받은 터였다. 그는 급한 마음에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인천세관에 들러 전화로 동생이 운영하는 인사동 화랑을 연결했다. 그러나 전화는 불통이었다. 다들 자리를 비우고 어디를 갔담. 그래 뭐 전화야 안 받으면 어떤가. 얼마후면 가서 직접보는데. 그들은 왔던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경성쪽으로 말 고삐를 잡았다. 

기무라 일행이 떠나고 난 후 조선식당의 주인은 그들이 남기고 간 반찬을 보면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음식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날 총독부 관리로 부터 식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연락을 받고 쉬지 않고 준비한 음식인데 대접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기생들의 노래 솜씨가 부족했나.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게 차려놓고 흥청망청을 기대했던 주인장은 물끄러미 그들 일행이 떠나는 것을 허리를 깊이 숙인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생일 거야. 거기서 탈이 났어. 주인장은 방에 들어가 시중을 들었던 십여 명의 앳된 기생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다. 인천 바닥에서 용모가 제일 수려하고 노래 솜씨 또한 일품이다. 음식도 아니고 접대도 아니라면. 탈이야 나겠는가. 그래서 주인장은 안심을 했다. 자신의 책임이 아니니 추궁받을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얼마전에는 일본 순사들이 서너 명 찾아와서는 음식을 타박하고 기생의 수준이 왜 이 모양이냐며 음식값도 내지 않고 소란을 피운 적이 있어 주인장은 또 그같은 봉변을 당할 것을 염려했었다. 그래서 더 철저히 준비했고 새로운 기생을 뱃길을 이용해 개성에서 긴급 공수해 오기도 했다. 기무라 의원은 어린 기생의 움직임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저런, 꽤 괜찮은 걸. 저 정도라면. 음식을 먹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기무라는 그런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안았다. 더구나 유흥을 선천적으로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대낮에 그것도 도착하자 마자 오입질을 한다는 소문이 난다면 자신에게도 유리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멈춘 것이다. 그것은 원하는 시간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기에 잠시 뒤로 미룬 것뿐이다. 그는 저녁 늦게라도 화랑에 도착하기를 원했고 그의 일정에 따라 일행은 서둘렀다. 거기서 반주를 하면서 오찬에서 못다한 것을 즐기자는 심산이었다. 

어서 가자. 그는 머뭇거리는 수행비서를 재촉했다. 마차로 역까지 이동한 그들은 열차로 바꿔 탔다. 경기도 구로까지는 기차로 이용하고 거기서 내려서는 총독부에서 제공하는 군인 차량을 이용해 경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사전에 연락이 돼 있었다. 구로역까지는 예정된 일정대로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기차가 긴 경적음을 울리고 시끄러운 기찻바퀴 소리를 냈다. 여간 시끄러운 게 아냐. 브레이크 밟는 소리는 언제가 귀를 아프게 해. 기관사에게 저 소리좀 더 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해야겠어. 기무라는 대기하고 있던 짚차에 올라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오만가지에 관심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 느끼는 것 모두 눈길을 돌렸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어떻게 하면 저걸 그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군용차량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바로 출발했다. 느린 기차에 지친 의원은 군용차가 속도를 내기를 원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경성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로는 잘 닦인 도로가 아니었다. 거기다 차와 사람과 우마가 섞여 있어 진행은 더디기만 했다. 어, 저것들을 미리 좀 치워놓지. 의원은 짜증을 내면서 말고삐를 당기듯이 운전수의 어깨를 잡아 당기며  급하게 몰라고 다그쳤다. 그러겠다는 신호로 운전사는 차의 경적을 세게 여러 번 울렸다. 뒤돌아 보는 놀란 행인과 우마차가 펄쩍 뛰었다. 그래, 밟으라고 밟아. 저 까짓 것들 뭉개면서 가라고. 의원은 이렇게 말하다가 졸음이 쏟아지는지 고개를 숙이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시각 아버지를 기다리던 유마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점례를 만나 회포를 풀고 나서 느지막이 일어났으나 몸은 찌뿌둥했다. 긴 여행의 여독인가. 아니면 불쾌한 기억 때문인가. 그는 전쟁의 복판에서 조용한 아침의 한 가운데로 이동한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여기는 완전히 딴세상이야. 하지만 완전한 평화는 아직 일러. 이동하면서 당한 수모는 여기도 전쟁터라는 사실을 알려줘. 전방아닌 전선의 후방. 유마는 바로 하루 전의 일을 마치 수 년이 지나 추억을 더듬어 보듯이 떠올렸다. 인사동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유마는 이제 새롭게 시작될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펼쳤다.

모든 것은 원하는 대로 되리라, 그런 생각을 밑바탕에 두고 그는 수년 전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잠깐 지나쳤던 조선의 풍광이 지금은 아주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어서 전선에 투입되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에 둘러본 주변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쟁을 끝내고 오는 것이니 마음은 한결 들떴고 그래서 경성역이나 남대문 등을 거쳐 올 때는 이국적인 풍경에 마치 여행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겉모습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는 아버지가 느꼈던 것과는 달리 조선의 서민적 풍광이 좋았다. 개발이 덜 됐어도 나름대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높지 않고 크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삶이란 욕심이 크게 없는 것이다. 저런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야. 이런 그림이 서양 화단에 알려지면 멋있을 거야. 문화충격이겠지. 그래, 난 이곳에서 오래 머무를 거야. 그런 예감이 들어. 그러나 이런 유마의 기분 상태는 마차가 종로쪽으로 막 방향을 바꿀 무렵 깨지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차가 멈췄고 멈춘 마차 사이로 순사 서너 명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수색하겠다며 마차에 탄 유마에게 하차를 명령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군복을 입고 부관까지 대동한 일본 장군에게 일개 순사가 감히 검문을 핑계로 차에서 내려 땅을 밟으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유마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무슨 엉뚱한 일이 갑자기 터졌다고 해도 갈 길이 바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어야 했다. 나야, 나 유마라고. 유마는 그것이 자신과 연관되자 손은 어느새 권총집을 잡고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난 그는 그냥 눈앞에 어른거리는 물체를 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감히 나를 세워. 그러나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그러지 않는 것이 되레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저런 하급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상관을 찾아 역으로 명령이 내려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로경찰서장과 사전에 연락이 닿지 않은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뒤늦게나마 서장을 찾았다. 네 상관 서장은 어디 있느냐. 거기 있으면 면상을 들고 나오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서장은 없었다. 전화가 필요했다. 그들은 무전기를 소지하지 않고 온 것을 탓하는 유마에게 말단 순사에게 까지 무전기가 지급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돈이 많이 있다면 전쟁 물자 기부에 무전기 목록을 포함해 달라고 요구했다. 어쩌구니 없었다. 당신이라니. 하급 순사에게 당하는 모욕에 유마는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자괴감이 들었다. 미리 총독부에 연락할 걸. 그냥 편한 마음으로 오려고 했는데 일이 틀어졌네. 유마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으나 참았다. 애들아, 당장은 어렵고 저기 건물 보이지. 경성우체국에서 내리자. 거기서 전화를 하자. 그러면 되지.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을거야. 순사들은 그것까지는 양보했다. 그들은 마차를 따라 왔다. 

그 사이 순사들은 네 명으로 불어 그들이 유마 일행을 연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마는 창피를 느꼈으나 그들이 자신의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고 있다고 보고 나중에 따로 불러 칭찬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는 잠시 틈이 나자 그들의 이름과 소속을 적었다. 짜증이 위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유마는 자신이 군인이었기에 하급병들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칭찬해 주고 싶은 의욕이 앞섰 상황이 있을 때를 상기해 냈다. 서전 통보되지 않고 얼굴을 모른다면 복장만으로 신원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헌병이나 초병 근무자나 서의 말단 순사는 이런 사람이 불양선인일 수 있으므로 검문을 해야 한다. 이것은 최근 총독부에서 내려온 지침이었고 마침 유마가 첫 케이스로 걸려든 들었다. 그러니 수모니 창피니 이런 것들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서와 전화가 연결되자 유마는 서장이 출타 중이라 대신 그 아래 경부에게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 일본에서 출발해 내일 인천을 거쳐 경성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도 말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던 경부 완용은 참의원 이름을 들먹이고 인천을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그 아들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참의원이 총독부를 방문하기 위해 조선에 온다는 사실은 극비랄 것도 없었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의 동정란에도 실린 내용이었다. 당연히 종로서는 참의원의 조선 방문 일정을 알고 있었고 그 의원이 총독을 예방하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경부 완용은 전화기 너머로 즉시 순사를 나무랐으며 자신이 최종 목적지로 마중을 나갈 터이니 호위해서 잘 모셔 오라고 부하에게 지시했다. 떨떠름한 얼굴의 순사 얼굴은 갑자기 긴장하는 표정으로 바뀌었고 유마 일행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마 일행에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저런 식의 변장으로 자신들을 따돌릴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휴의에게 휴의에게 단단히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휴의는 총독부를 들먹이면서 고바야시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참의원이라고. 그래 참의원 신분이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는 말자. 그래서 나쁠 게 없다. 경성에서 시가전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누가 예상했는가. 더구나 완용은 그렇게 하라고 했으면서도 조용히 그 사람을 계속해서 미행하라고 지시했다. 순사들은 당현히 유마보다는 완용의 명령을 따랐다.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 그들은 허락을 받고 유마가 마차에 올라타자 뒤를 따랐다. 호위인지 추격인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순사들은 앞선 마차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말을 몰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속았던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순사들의 긴장된 얼굴에 나타났다.

유마가 말단 순사에게 검문 수모를 당한 다음 날 그 아버지 대표 의원도 같은 꼴을 겪었다. 한강 대교를 넘고 용산역 앞에 이르렀을 즈음 헌병대 사령부의 소속 헌병들이 검문을 이유로 차를 멈춰세웠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나 탈 수 없는 차를 타고 총독부 소속임을 겉모습으로 확인했음에도 헌병들은 과감하게 차를 막아섰다. 그들이 막아서 차 앞에는 일장기와 욱일기가 양옆에 달려 있었다. 이걸 보고도. 참 겁 없는 행동이었다. 더구나 그 차 안에는 조선통독부의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오로라 이끼 경무총감이 있었다. 그는 조선 헌병대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어 수사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차 앞을 가로막은 헌병을 보는 순간 헌병대사령관은 기가찼다. 한 동안 말문이 막힌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람을 몰라보는 태도를 가장 격멸했던 그는 그 자리에서 호통을 치기보다는 내려서 바로 주먹이나 워커 발을 내지를 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자신이 불과 일주일 전에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의심이 되는 인물이나 차량 등 그 어떤 것도 검문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다는 것을 기억했다. 사전에 통보는 한거요. 의원이 질책하듯이 말했다. 이게 무슨 망신이오. 내 참 기가 막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에 탄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차를 들여다 보던 헌병 중 하나가 사령관의 신분을 알아보고 한 발 물러서서 급하게 경례를 붙였다.

저자들은 저렇게 늘 한 발 늦어요. 헌병대사령관은 그제서야 화가 풀린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 정도는 내가 미리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투였다.  그러나 웃고 있던 경무 총감은 곧바로 화난 얼굴로 표정을 바꾸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굵은 나무처럼 서있는 헌병들의 머리통을 지휘봉으로 가볍게 서너 대씩 치면서 그래 니들이 수고가 많다고 꾸중인 듯 칭찬인 듯 한 마디 했다. 누구라도 검문이 예외가 될 수는 없으나 사람을 보고해라, 응. 알았니. 그는 하이를 외치며 경례를 남발하는 자들에게 다시 지휘봉으로 머리를 서너 대씩 더 내리쳤다. 그리고는 차로 돌아와서는 실례했다고 의원에게 사관했다. 참의원은 자신도 인천항에서 그리고 구로역에서 기차를 내려 차를 타고 이동할 때 대방동 인근에서 검문 때문에 막힌 사실을 말하면서 어째서 조선에서는 이렇게 검문이 많으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차가 출발하자 그는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요새 조선 사정이 심각한가요.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잡고 검문하니 말이요. 참의원이 부하를 대하듯이 경무총감에게 말했다. 글쎄요. 그는 의원을 한 번 힐끗 보더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하고 말끝을 흐렸다. 요즘은 불량선인들이 많아요. 다 의원님 일행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예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잖아요. 참의원은 자신의 안전 때문에 그렇다는데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피곤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센징이. 아니 조센징이. 그렇게 날뛰다니. 푸념 하듯이 한 마디했다. 검문이 자신의 안전보다는 조센징의 범행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라니. 헌병대사령관은 아니라고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 그도 경성에서 발생한 두 건의 총격전 충격이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첩보에 따르면 만주의 독립군 잔당들이 경성의 총독부를 상대로 침투한다고 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래서 의원님도 그렇지만 총독님의 안위도 걱정해야 할 판입니다, 라고 말해버렸다. 그런 사실을 총독부는 왜 일본 정가에 보고하지 않아요. 참의원이 따졌다. 난 처음 듣는 말이오. 헌병사령관씩이나 하는 자가 고작 한다는 말이 독립군의 침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니. 조선이 이 지경이 되도록 너는 어디서 뭐하고 자빠져 있었니. 그런 목소리가 목구멍 가까이서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의원은 참았다. 의원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이런 자는 바로 해고해야 마땅하다고, 그래서 총독을 만나 경무 총감의 자질에 대해 넌지시 의견을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서 일본으로 돌아가면 이 자를 자르고 다른 자를 그자가 떠난 자리에 넣어야겠다고 속으로 계획을 짰다.

그런 식으로 참의원은 검문과 검문 과정에서 보인 경무 총감에 대한 불만을 삭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늦은 오후 인사동에 도착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동생이 운영하는 조선제일 화랑에 들렀다. 숙소는 조선호텔로 정했으나 그보다는 아들을 재회하는 것이 급했다. 그리고 그가 편지에서 언급한 조선여자 점례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다. 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아들이 빠져들었는지 그 스스로 보고 판단하고 싶었다. 용산 검문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내달린 덕분에 저녁 6시가 못된 시각에 의원은 아들과 식탁을 놓고 마주 앉을 수 있었다. 둘은 사내다운 굳은 악수를 했고 그 순간 남자들의 정을 느꼈다. 의원은 유마의 피가 링게르 줄을 통해 오듯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불쾌한 기분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갑자기 몸이 뜨거워졌다. 하마터면 그는 반가움 때문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외아들을 전선에 보내놓고 그는 한시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조선에 왔고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다. 이곳이라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다. 조선 독립군이 온다고 해도 걱정할 거리는 아니다. 파리채로 잡을 수 있는 파리 몇 마리 정도였다. 그것은 헌병대나 종로서가 할 일이지 자신이 할 일은 아니었다. 동생은 저녁 약속이 있어 나갔으나 형님이 온다는 전갈을 미리 받은 터라 일찍 들어오기로 했다고 유마가 말했다. 어깨는 어떠니.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유마가 걱정하는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다친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어깨를 위로 들어 빙빙 돌렸다.

정말 그렇구나. 그래도 총상이니 조심해야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쑤시지 않더냐. 아버지도 참, 내가 육십 먹은 노인입니까. 유마가 입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도 건강은 조심해야 한다. 내 아들아. 둘은 막걸리를 잔을 들어 건배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의원은 유마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꺼내 들었다. 그에게는 동생보다는 점례가 더 보고 싶었다.  그 말이야. 네가 편지에서 한.아 조선 여자 점례요. 이 층에서 아버님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요. 아니다, 난 조선호텔에 이미 숙소를 정해놨다.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우리들이 있는 이 집에서 하루 묵고 가세요. 우리가 자는 옆방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어요. 그리고 조선여자가 아닌 점례에요. 점례 마사코. 이 말과 함께 점례가 위에서 계단을 타고 유마가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의원은 이층에는 제수씨가 있는데 어찌 같은 층에서 방을 함께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점례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보다 먼저 들었다. 네 작은 어머니는 어쩌고. 돌아가셨어요. 참의원은 대꾸 대신 놀라는 얼굴로 유마가 무슨 설명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저도 여기와서 알았어요. 몸이 아팠잖아요. 그래서 점례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몇 개월 정도 숙모 수발을 들었지요.그랬구나. 그 숙모가 돌아가시고 세심한 점례의 태도에 삼촌은 아내 잃은 고통을 극복하고 지금은 거의 숙모의 존재를 잊었어요. 그때 점례가 인사를 하면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점례 마사코 입니다. 점례는 마사코 다음에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부를 뻔한 것을 두고 깜짝 놀랐다. 감히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나오질 않기를 다행으로 여겼다.

유마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음에도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고급 양복을 입고 서양 모자 아래 금테 안경을 두른 의원은 지금까지 그녀가 봐왔던 어떤 일본인보다 근엄했다. 그녀는 망설였다. 고개를 숙이고 빈자리에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가 주는 위압감에 주눅이 들어 꾸중듣는 보초병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삼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고 말하지 않아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그녀는 여기 앉아요, 하는 말에 기운을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유마옆에 앉았다. 몸이 떨려왔다. 억지로 참으려고해도 긴장한 몸이 잘 말을 듣지 않았다. 난 만주의 막사에서 병사를 기다리고있는 소녀가 아냐. 그렇게 다짐했어도 그녀 답지 않은 행동이 나왓다. 그만큼 유마 아버지가 주는 위엄은 대단했다. 이번에 점례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등상을 받았어요, 아버지. 이번에도 유마가 구해주었다. 유마는 점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특등상을 언급하며 아버지가 칭찬 대열에 끼어들기를 바랐다. 그래 대단하구나, 그림에 솜씨가 있다는 말은 유마에게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들었다. 만주에서 화랑을 하고 있는데 외박을 나온 유마가 반했다는 바로 조선 처녀가 너구나.

참의원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면서 두 눈은 뚫어져라, 점례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통해 그녀의 과거가 어땠는지 알아보기라도 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정말로 그렇게 살았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참의원에게 그런 일은 손쉬운 것이었다. 사람을 보고 첫눈에 그 사람의 됨됨이나 지식 정도나 인성까지도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경무 총감을 해임해야 한다는 소신도 이런 자신감에서 나왔다. 그녀는 그의 눈이 엑스레이처럼 자신을 관통해 과거 속에 있던 자신을 꺼내 들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기분은 없었다. 조선에 와서 당당하게 과거를 묻었다고 생각했으나 일본 의원 앞에서는 포승줄에 매달린 죄수 같은 신세였다. 숨이 갑자기 차올라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유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엑스레이 대신 그 몸 속으로 들어가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 줄 만큼은 놓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돌파해 내려는 의지로 두 눈에 힘을 모았다. 그런 모습을 의원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 어떤 그림이었어요. 나도 그림에는 제법 솜씨가 있지요. 사실 그리기보다는 보는 눈이 더 나아요. 의원이 해라 대신 여전히 존칭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마가 아버지도 제국대학 시절에 미술을 취미로 해서 지역 대회에서 상을 받은 사실을 언급했다. 그렇군요, 틈나면 저에게 지도 좀 해주세요, 사실 저는 많이 부족해요. 점례가 겨우 입을 뗐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일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같은 기분에 떨리는 입술에 물기가 말라 가기 시작했다. 그 일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자 목을 죄어오듯이 답답해졌다. 문을 열고 달려나가고 싶었다. 낯선 병사를 처음 대할 때 느끼는 그런 더러운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치 사형수를 감시하기 위해 어깨를 세우고 양팔을 쭉 펴서 무릎 옆에 놓은 헌병의 쏘아보는 눈초리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점례는 또다시 두려움이 밀려들어 유마가 나서주기를 바랐다. 할 수만 있다면 바닥에 엎드려서 펑펑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마는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면서 기댄 점례의 몸을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아버지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리고는 조금 전에 한 말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말이 필요했다. 지금은 침묵이 아니라 말을 해야 한다. 점례는 사력을 다해 아, 제 그림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이번에 상을 받은 제품은 좀 운이 좋았어요. 제가 만주에 있을 때 보았던 유마가 군복을 입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장면인데요. 지금 보면 닭살이 돌 정도로 부족합니다. 제 딴에는 정성을 기울였으나 보시면 실망할 거예요. 단순히 애국심의 고취가 아니라 어떤 심오한 질문 같은 것을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잘 표현하지 못했어요. 창의성이 부족했다고나 할까요. 그 말은 지나친 겸손이다. 수상 이유 중 하나도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해 본 적 없은 창의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보고 싶구나.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생각에는 제법 수준있는 그림이다, 거기에 나는 동의한다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요. 보이는 것만 표현하면 그것은 연습생이나 하는 그림이고 프로라면 그 이면을 담아야 해요. 메시지가 있어야하지요. 잘 알겠습니다. 이 말씀 평생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잊지 않고 머릿속에 간직할게요. 점례는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점차 점례는 평온을 찾았다. 의원은 그런 점례의 눈과 얼굴 표정을 세심히 관찰했다. 아직 판단을 하기에는 이른 걸. 그는 이런 생각으로 점례에 가서 박힌 시선은 풀지 않았다. 

그러나 의원은 속으로 민낯의 수수한 그녀는 태생은 비천할지 모르나 스스로 그것을 깨고 나온 알 같은 존재라는 마음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로 부족한 것이 많아요. 열심히 배우면서 채워 나가겠습니다. 의원은 어린애처럼 감춘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을 밀어놓고 살짝 웃었다. 아무나 상을 받는 건 아니오.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자랑좀 하고 다녀도 상관없어요. 안 그러니. 유마야. 그럼요. 아버지 제 입을 보세요. 침이 다 말랐어요. 너 군대에 오래 있더니 제법 늘었구나. 짬밥이 원래 그래요. 그런데 사실이거든요. 점례는 칭찬에 얼굴을 붉히고 이런 식이라면 좀 더 시간을 끌어도 괜찮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겸손할 때는 지극히 공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의원의 마음에 들었다. 조선 여자치고는 제법인걸. 몸에 뱄어. 표정과 태도가 마음에 들어. 말하는 솜씨도 그렇고. 그래서 검문에서 받은 모욕이나 헌병대장의 변병에 못마땅하고 제수의 죽음 소식을 갑자기 듣고 나서 들었던 마음 한구석에 있던 찜찜한 기분이 날아갔다. 총리대신을 노리는 그는 아들 유마가 자신의 길에 주춧돌이 되기를 바랐다. 전투에서 공과도 있고 위험한 지역에서 성과도 올렸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태평양 전선을 누비고 있을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실상은 자신의 입김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렇게 아들을 생각했다. 전역 보고서에도 그렇게 써있지 않은가. 부상때문이라고. 

그에게 유마는 일본 전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었다. 자랑스런 내 아들. 그런데. 참 좋기는 한데. 이를 어째. 비록 신분은 천하나 미술 솜씨가 조선에서 제일가는 수준인 점례와 그런 그가 어울릴까. 피카소나 고흐 같은 존재로 점례가 성장할 수 있을까. 미모나 수준은 배운 여자와 다를 게 없었다. 둘을 결혼시키면 어떨까. 의원은 그것이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 자신의 앞길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속단하지는 않았다. 노련한 정치인의 본성이 그 순간에도 드러났다.더구나 아직 유마의 뜻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조선에 있는 동안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보자는 것이 의원이 지금 내린 판단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판단에 흐뭇한 마음이 들어 이번에는 별 거 아닌 대화에도 입을 벌리고 소리 나게 웃었다. 아들의 여자에게 보이는 어느 정도의 긍정적인 신호였다.  잘 정리된 침구에 누워 의원은 제수와 점례가 머물렀던 이층 방의 분위기를 느꼈다. 경무 총감이 제의한 거나한 술자리보다 이 얼마나 좋은가. 기생질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참았다 하면 그것이 더 좋지. 의원은 이런 생각으로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곧 조선에서 자신의 행적이 누군가에게 기록될지 모른다. 절제 없는 행동을 하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당분간은 몸을 사리자. 잠곁에도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경무총감이 말했지. 종로서 완용이라는 자가 잘 아는 곳이 있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지. 종로서장이 바로 완용이에요. 조선인데 최근에 승진했고요. 제가 사인했지요. 주제 넘은 놈. 사인이라는 말을 듣고 내무 대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서장 승진은 조선총독이 최종 결정권자였다. 그걸 자신이 알고 있는데 사인했다고. 넌 곧 모가지야. 일본에 가서 발령을 낼 거야. 옷을 벗고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과연 저 자의 하는 일이 뭐지. 총독부일은 그렇다고 쳐도 헌병대는 잘 돌아가고 있는 거야. 도대체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독립운동 뭐 이런 말들이 떠돌아. 총독대신 저 자를 해임하면서 기강을 다잡아야겠어. 의원은 조선의 첫날이 이렇게 저무는구나, 시인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더 열심히 할게요. 귓가에 들리는 점례의 목소리는 잘 익은 가마를 두드릴 때 나는 청아한 소리였고 그 소리는 초보 엄마가 부르는 자장가처럼 달콤했다.

참의원이 눈이 뜬 것은 일부러 조심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어떤 소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귀를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때가 됐으니 일어나도 좋다는 새들의 지저귐처럼 나쁘지 않았다. 잘 잔 잠 때문인지 그는 뒤척이지 않고 바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행인은 많지 않았으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조선도 사람이 세상이구나. 참의원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잠을 깨운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잠시 귀를 기울였다. 분명 아래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는데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동생이었다. 형님, 일어나셨어요. 그가 반가운 얼굴을 하면서 다가왔다. 손에는 항아리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순백처럼 새하얀 것이었다. 그는 형님의 근황을 물어보는 순서도 잊은 채 손으로 들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이것이 조선백자예요. 척 봐도 대단하지요. 마치 아이를 안은 것처럼. 동생은 참의원 앞으로 손에 든 것을 조심스럽게 안고 갔다. 해가 비치지 않은 실내에서 그것은 새롭게 빛을 내면서 의원의 눈앞에서 아지랑이 처럼 어른거렸다. 그는 이런 류의 골동품을 처음 보았다. 그것의 쓰임새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요강으로 쓰기에는 입구가 너무 작았고 무엇을 담아 보관하기에도 거추장스러웠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그는 동생에게 물었다. 형님, 이것도 모르십니까 하는 표정으로 그는 지금 형님이 그 쓰임새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의원은 동생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것은 사용하는 물건으로써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감상하기 위한 예술품이었다.

그래 아름다운 빛이 나는구나. 이런 색을 내는 도자기는 저도 처음 봅니다. 어제 이곳 저곳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달라는 값의 절반으로 후려쳐서 가져왔는데 공짜나 다름없어요. 조센징들은 그 값도 감지덕지하면서 나중에는 더 좋은 것이 있으니 가져다준다고 허리를 굽신거렸어요. 참의원은 감식안을 가진 예술가의 눈으로 동생의 손에서 백자를 받아 들고 위아래로 살피면서 요리조리 뜯어 보았다. 어디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었다. 좌우 대칭이 완벽했으며 거꾸로 보거나 세워 놓고 보아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어떤 흠도 발견하지 못하자 참의원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말로만 듣던 조선 자기의 기품에 혀를 내둘렀다. 네가 어릴 적에도 잡동사니 모으는데 취미가 있더니 조선에서도 버릇을 버리지 못했구나. 아이고 형님,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해요. 잡동사니라니요. 이것은 조선백자 중에서도 최상급이예요. 이 무늬를 보세요. 호랑이와 용이 서로 싸우고 있지요. 둘 다 막상막하라 어느 쪽이 세고 약한지를 알 수 없어요. 거기다 싸움을 말리기보다는 붙이기 위해 서 있는 하늘에서 내려온 심판관이 물고 있는 담뱃대에서 연기가 나지요. 저도 한 대 피고 싶네요. 동생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조선백자에 대해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늘어놓더니 고려청자도 있어요. 형님, 하고 바싹 다가섰다. 지하에 창고가 있는데 백자와 청자가 삼백 점이 넘어요. 고려시대, 조선시대 것을 내가 다 모았어요. 어마어마하게 돈이 들었지요. 거기다 그림도 수백 점이 넘어요. 김홍도나 신윤복 겸재 같은 내로나 하는 조선 천재 화가들 그림이 산처럼 쌓였어요. 형님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조금 보낼 테니 잘 좀 보관해 주세요.

그는 자신이 말을 하고도 놀라는 표정을 짓고는 연설가가 다 된 듯이 자기 말에 만족감을 표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신중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 앞에서 재롱을 떠는 동생에 불과했다. 형은 그런 동생을 혈육의 정으로 바라보면서 동생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 조선 것을 싹 다 긁어모아라. 일본에 큰 박물관 하나 짓자. 형제 이름으로. 대일본제국 형제 박물관 어떠냐. 하하하 형님 좋아요. 영국이나 불란서 박물관도 다 남의 나라 유물을 뺏은 것으로 채운 것 아니냐. 형님, 뺏다니요. 돈 주고 다 산 겁니다. 비록 헐값이지만요. 둘은 다시 껄껄 웃었다. 조선의 행복을 모두 독차지 한 것처럼 이른 아침 인사동의 한 화랑은 웃음으로 넘쳐났다. 참의원은 동생이 조선의 유물에 관심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서너 달 전에 고려 시대의 팔각 구층의 청동탑과 화강암에 새겨진 정교한 문인석, 무인석 한 쌍을 배 한째를 통째로 전세내 보내온 것을 기억해 낸 의원은 그 많은 것들을 처분하기 위해서도 박물관이 필요하다는데 동감했다. 하지만 정말로 네가 박물관을 차릴 것은 아니잖느냐. 형님은 조금 전에 한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듯이 말했다. 동생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형님, 저는 조선의 제일 갑부가 되고 싶어요. 그래야 형님 정치하는데 제가 좀 보탤수도 있고요. 그 말에 의원은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그래 네가 우리 집안을 그런 식으로 돕는구나 하면서 형제애를 보여 주기라고 하듯이 어깨를 다독였다. 동생은 모은 것을 수 백 배 더 붙여 되팔 작정을 하고 있었다. 왕실의 것은 형님이 손을 좀 써주세요. 총독부를 움직여 압수수색하듯이 좀 가져옵시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요.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렇지 않아도 총독 예방 일정이 잡혀있다.넌지시 말해보겠다. 아니면 경무총감을 앞세우고 한 번 내가 들이닥치마. 형님 고맙습니다. 

이층에서 의원 형제가 이런 일로 아침잠을 깨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는 점례가 식사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그는 조선식의 아침상을 의원에게 올릴 참이었다. 깻잎이며 마늘종 등의 밑반찬과 취나물이 포함된 서너 종류의 나물, 갈비찜과 굴비구이, 된장찌개와 미역국이 올라왔다. 아침상을 받아든 의원은 눈이 둥그레졌다. 이 많은 음식을 점례 혼자서 차려낸 것이다. 수저를 들고 그는 어떤 것부터 먹어 볼까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가 잡채를 한 젓가락 들어 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어라, 인천의 고급 음식점에서 먹은 것보다 낫네. 참 대단해. 점례는 어떤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녀가 직접 만든 잡채가 들어간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삼촌이었다. 우리 점례 음식 솜씨가 대단하지요. 조선 최고예요, 아버지. 유마가 옆에서 거들었다. 너는 뭐든지 조선 최고구나. 그림도 최고 음식도 최고 또 뭐가 있지. 그래 미모도 최고가 최고. 하나가 빠졌네. 말솜씨. 하하하. 아버지도 참. 정말이세요. 내가 네 앞에서 거짓을 말하겠느냐? 하하하. 

웃음과 동시에 넷 중 셋이서 엄지손가락을 세우자 점례는 어쩔 줄 몰랐다. 이런 음식을 만들다니. 의원이 이번에는 갈비에 젓가락을 대며 물었다. 몇 시에 일어난 것이냐. 점례는 머뭇거리면서 새벽 4시부터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럴 것 없다. 애야. 나 때문이라면 이제 내일부터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런 시간이 있다면 그림을 그려야지. 여자라고 해서 재주를 썩혀서는 안 된다. 겨우 밥이나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아버지. 점례는 조선 최고의 화가로 곧 유럽에도 진출할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요.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싶어요. 유마가 내친김에 말을 꺼낸다는 듯이 파리행을 이때다 싶게 아버지의 의중을 떠보았다. 삼촌도 거들었다. 점례 솜씨가 보통이 아니예요. 조선 땅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어요. 투자한다는 셈 치고 유학을 보내시지요. 의원은 얼떨결에 아무말이나 대답했다가 나중에 낭패를 볼까봐 머뭇거렸다. 그 얘기는 나중에 또 하자. 의원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기분좋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자 밥이 술술 넘어갔다. 불과 하루 전에 조선 땅에 도착했는데 그 사이 많은 것이 일어났다. 동생의 골동품 수집과 아들의 프랑스 유학 그리고 조선식의 식사에 의원은 마치 몇 개월을 보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러면서 진작 조선 땅에 올 것을 하는 후회했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조선총독을 하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조선에 대한 좋은 인상은 여운이 길었다. 식사를 마친 의원은 일어섰다. 눈앞의 장식장 속에 든 잘 조각된 부처님상 여러 개가 일어서는 그를 웃음으로 맞았다. 어제는 보지 못한 것이 오늘에서야 보였다. 그는 부처님의 은총으로 조선에 온 자신의 목적이 잘 성사되기를 빌었다. 그는 모자를 집어 들었다. 밖에서는 십 여 분 전에 도착한 헌병대사령관이 보낸 차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의원은 호위를 받으며 열려 있는 차량에 탑승했다. 

의원이 차에 타는 것을 보고 헌병대원 둘이 경쟁하듯이 씩씩하게 손을 이마에 올려붙였다. 차는 남산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헌병대사령관은 참의원이 무시당해 서운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점심 만찬에 초대했던 것이다. 신사참배도 할 겸 참의원은 마지못하는 척 하면서 사령관의 초대에 응했다. 차가 산자락을 돌아 오르고 있을 무렵 무렵 인왕산의 팔부 능선 쯤에는 무장한 독립군 소대병력이 세 개 조로 짝을 나눠 어떤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그 초조함은 늦으면 낭패를 본다는 조급함은 아니었다. 일찍 시작하든 조금 늦게 출발하든 시간의 문제는 아니었다. 작전의 성공을 높이는 적당한 때냐 아니냐 하는 것이 움직임의 판단 근거였다. 그 시기를 저울질하는 휴의는 다른 곳의 분대장들 역시 자신과 같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투 시간이 동일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고뇌의 시간이 길어지자 들었을 뿐이었다.

그랬다면 시기를 놓고 이제니 저제니 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동시 공격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화력의 집중으로 적에게 미치는 타격도 크겠지만 독립군에도 적잖은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여기서 하루가 더 늦는다면 병사들은 동요할 것이다. 서두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준비를 물릴 수는 없었다. 가서 격파하시오. 침략자 무리를 박살 내시오. 그런 지시를 내리기 위해 휴의는 기다렸다. 오후의 해가 석양으로 지려면 아직 30분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 부서진 성곽을 따라 휴의는 위쪽으로 몇 계단 더 올라갔다. 그러자 나무 사이로 가렸던 북한산의 봉우리들이 멀찍이서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림자와 역광을 받은 부분이 교묘하게 겹쳐지면서 산세는 한층 위세를 더하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휴의는 무너진 돌을 하나 꺼내 들었다. 묵직했다. 힘을 주자 허리 쪽에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삐긋하는 통증이 왔다. 그러나 휴의는 그것을 무시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는 들어 올린 돌을 아귀가 맞게 무너진 쪽에 쌓아 올렸다. 성벽을 보수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게 서너 개를 더 쌓자 그럴싸한 모양이 나왔다. 백 년 전 혹은 세월을 알 수 없는 어느 날 적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선조들이 세운 성곽에 붉은 노을이 사뿐이 걸터앉았다. 휴의도 따라했다. 산속 깊은 곳에 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고추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성곽 주위를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일부는 볕을 쬐기 위해 돌의 끄트머리에 앉아 날개를 내리고 쉬고 있었다. 잠자리를 잡아 볼까.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면서 휴의는 엄지와 검지를 모으고 붉은 꼬리 쪽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빠르게 집게를 모은 순간 숨소리가 들렸던지 눈치를 챈 잠자리가 훌쩍 자리를 박차고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대장님, 좀 더 빨랐어야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년 병사가 자신이라면 자신 있다는 듯이 휴의의 느린 동작 때문에 실패한 작전을 지적했다. 이보다 더 빠를 순 없어, 잠자리가 운이 좋았을 뿐이야. 휴의가 멋적은 듯 이렇게 대꾸하면서 다음에는 잡아서 실력을 보여 주겠다고 웃었다. 소년 병사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뻗은 다리를 오무리면서 고향의 들판의 고추잠자리 모습을 상상하느라 고개를 숙였다. 휴의는 뭐라고 말하려다 말고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상하이를 출발할 때 선생이 주신 것이다. 선생은 시계를 손목에서 풀었다. 중요한 순간이 오면 손목에 있는 것을 지금처럼 풀어서는 일을 추진하는 당사자에게 건네주었다. 윤봉길 의사도 선생이 주신 시계를 갖고 작전에 임했었지. 시계는 말하자면 선생과 임무 수행자와의 결의였던 셈이었다. 시계의 둥근 테두리 안에 선생의 얼굴이 비쳐들었다. 휴동지, 성공하고 돌아오시오. 휴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동지의 성공이 임정의 성공이며 조선독립의 성공이 될 것이오. 너무나 비장하고 절절한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가 시계속의 얼굴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성공하고 살아서 돌아오시오. 휴의는 선생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면서 시계를 조심스럽게 눈 가까이에 갖다댔다. 시계는 선생 그 자체였고 임무 완수의 상징물이었다. 그는 이 시계를 잘 간수했다가 자신보다 더 소중한 인물이 험난한 길을 가게 될 때 주고 싶었다. 자신이 이봉창 의사보다 먼저 태어났더라면 그를 만나 선생 대신 주는 시계라면서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건네 주고 싶었다. 그랬다면 의사는 체포되지 않고 다음 작전에 투입됐을 터인데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의사를 체포했던 자들의 손에 넘어간 시계의 행방이 궁금했다. 그것은 왜경이 증거품이라고 책상 위에 나열해 놓고 수모를 당할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휴의는 눈앞의 시계에 눈을 대고 초침을 유심히 보면서 자신과 시계가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이것은 자신을 지켜줄 부적은 아닐지 몰라도 어떤 위안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물건이었다. 이번에는 귀에 갖다 대고 소리를 포착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잠시 후에 째각 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휴의의 귀를 자극했다. 시계는 죽지 않고 잘 가고 있었다. 시계 소리를 휴의는 지체하지 말고 즉시 출동하라는 다그침의 명령으로 또 한편으로는 서두르지 말고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붙잡는 명령으로 여기면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시계가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시계와 눈을 맞추고 귀에 대고 하면서 저물어 가는 총독부의 긴 그림자 위로 눈길을 돌렸다. 그 때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서너 대의 군용차가 총독 관저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에 눈에 띄었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총독이 사는 총독부의 회색 건물 앞에 차는 연달아 멈춰섰다. 중요한 인물이 본토에서 총독을 방문하기 위해 온 것인지 헌병대사령관이 긴급 호출을 받고 오는지 아니면 지방의 고관대작들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 온 것이지 여기서는 알 수 없었다.

일제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조선의 왕이나 그 부스러기 혹은 대신들이 선물상자를 들고 아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막 도착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러 대의 차를 나눠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총독에게 중요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만약 일본에서 온 총리 일행이거나 왕실의 사람이라면. 호기도 이런 호기가 없다. 기다린 보람인가. 인왕산의 거대한 바위를 등지고 있던 휴의는 잽싸게 일어나 창의문 인근에 대기하고 있는 또 다른 일행에게 암호를 타전했다. 북악산 언저리와 북촌방향에 있는 특공대에게는 즉시 출동을 명령했다. 이들이 선수를 치면 뒤이어 창의문에 대기하고 있던 이공수 조선 특공대가 들이닥치고 이어 북악산의 삼공수 조선 특공대가 연달아 치기로 했다. 

휴의가 속한 본부 특공대는 창의문 특공대와 함께 앞선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실제로 전투에 투입되거나 아니면 후퇴할 경우 특공대의 후방을 맡아 퇴로를 터주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따라서 휴의의 부대는 공격에 가담하더라고 가장 늦게 뛰어들게 돼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현장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공격 유무가 결정되므로 휴의의 대원들도 총독부 경내로 들이닥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회와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숱한 전투 경험이 있음에도 이런 때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공격이 시작되면 되레 긴장은 사라지고 숨어 있던 용기마저 튀어나오게 된다. 그러기 전에 휴의는 어떤 운명이나 예감에 자신은 물론 부대 전체의 몸을 맡기도 싶었다. 휴의는 추격과 도피과정에서 그것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경험으로 알았다. 행운의 여신은 우리편이다. 휴의는 자신에게 이렇게 주문을 넣었다. 아무리 수가 많아도 지는 경우가 있고 적은 수라도 이기고 만세를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돌아보면 졌을 때의 이유는 분명했지만 이겼을 때의 경우는 반반이었다. 작전이 반, 운이 반이었다. 휴의는 짚차를 뒤따라 들어간 군용 트럭 서너 대가 이번 작전의 승리를 예감하는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왜 그러너 예감이 갖게 됐는지 작가도 독자들도 모른다. 다만 군용트럭이 멈추고 나서 내린 군인의 수가 불과 서 너명에 불과했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싶다. 경비가 강화되거나 적의 수가 많으면 아무래도 싸움은 어려워진다. 휴의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이거 잘하면 총독도 제거할 수 있겠느걸. 이런 자신감이라니. 총독이 아니라면 이인자인 경무 총감은 물론 그 아래에 있는 자들도 쓰러트리자. 그러기 위해서는 북촌방향에 있는 일공수 조선 특공대의 전투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제타격으로 적의 기세를 제압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들에 비하면 휴의는 안전한 후방에서 진을 치고 작전이 성공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는지 관전하면서 지휘하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대장이 할 일이었으나 휴의는 먼저 희생될 대원들에게 미안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경복궁 뒤의 거대한 회색 건물이 음산하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폐허 위에 서 있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은밀한 작전이 진행되기에 좋은 징조였다. 이런 감정을 적들도 가지고 있을까. 적들의 심기를 살펴야 한다. 곧 묘지 속을 집으로 삼아야 하는 적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까. 모르니까 저렇게 짚차로 트럭으로 움직이면서도 태평하다. 아니면 알고 있어서 일까. 연막작전 같은 거. 짚차는 몰라도 트럭에서 내린 적은 수라고 해도 군인들이 휴의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 언뜻 보았을 대 그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포기할까. 어림없다. 여기까지 오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낭패를 보아서는 안 된다. 적이 알고 있다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간다. 방어를 하고 들이닥치를 기다리고 있다면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우리는 전멸 내지는 거의 전멸 수준에 이를 것이다. 그때 부관의 무전기가 가볍게 떨렸다. 13명을 통제하고 있는 북촌방향 분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는 암호를 풀어서 독자들에게 그 내용을 전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알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목소리는, 군인의 목소리는 암호병의 소리는 바로 이래야 한다는 시험을 보여 주는 것처럼 바르고 또박또박 이어졌다. 지금 바로 정문 쪽으로 진입합니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다음 무전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알아서 작전을 개시하세요. 특히 사공수 조선특공대는 즉시 하산해 수성동 계곡에 진을 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팀의 퇴로는 그곳이니까요. 이상. 무전기는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제 닫겠다는 신호로 투투투 가볍게 세 번 울렸다가 더 이상 신호음을 보내지 않았다. 휴의는 벌떡 일어나 대원들을 가까이 모이도록 했다. 이 일은 전체를 맡고 있는 대장인 내가 앞장서야 한다. 그는 무전기처럼 말을 끊어가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작전 시작이다. 들었지. 모두 수성동 계곡 초입으로 내려간다. 말을 마친 그가 앞장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그에 맞춰 빠른 속도로 성곽을 타고 아래로 이동했다. 흙먼지가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눈에만 겨우 띌 정도였다. 그 사이 어둠이 더 내려앉았다. 그들이 더 어두워 지기 전에 산을 타고 빠르게 하산 하는 동안 휴의는 생각을 달리 먹었다. 그래서 우리도 공격 대열에 참여한다고 사공수 조선특공대에 알렸다. 후퇴는 각자 알아서 하라. 우리 생명보다 총독을 해치는 것이 우선이다.

휴의는 이런 말을 남기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누가 먼저 총독부에 들어갈지 지금 상황에서는 알 수 없었으나 휴의가 한 발 빨랐다. 그는 총독부 근처에 당도해서는 차분하게 대열을 정리했다. 이미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힌 그들은 두 명씩 짝지어 초소 쪽으로 이동했다. 씩씩하고 절도있는 행군 모습에 지나는 행인들이 눈여겨보다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급하게 몸을 비켜섰다. 쉽게 갈 수 있도록 길읕 터준 것은 그들이 공무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군복을 입고 중무장한 일단의 부대원들이 움직이자 초소에서 밖을 보던 초병 둘이 앞으로 나왔다. 사전에 연락받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휴의 부대가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하기도 전에 멈추시오, 하고 제동을 걸었다. 초병은 그들이 어떤 부대 소속이고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다. 휴의가 거칠게 한 발 앞으로 나와 말을 한 초병을 향해 가타부타 없이 쌍소리를 하면서 비켜 새끼야 하고 고함을 질렀다. 놀란 것은 비켜의 대상으로 지목된 사병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고참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분명 자기보다 윗선의 계급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 경례부터 올려 붙인 다음 붉은 견장과 견장 아래에 달린 계급을 보았다. 거기서 그는 대일본제국의 장교 계급장을 확인했다. 별 하나가 반짝거렸고 그것은 주인이 움직임에 따라 빛을 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면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준사관인 그는 순간 대좌님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을 열어라. 너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 네, 대좌님. 그러나 그는 문을 열러 가다 말고 뒤돌아서서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는 인원이 몇 명인지 물었다.

13명이다. 세 보면 알 것이다. 내가 일일히 세어 줄까. 준사관은 눈에 띄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수가 많았다. 허가증을 보여 주세요. 대좌님,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요. 그 말을 들은 대장이 순간 머뭇거렸다. 이런 경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곧 정신을 차리고 임마, 내가 너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니. 이런 개새끼. 그는 말과 함께 주먹으로 준사관의 명치를 가볍게 쳤다. 준사관이 넘어질 듯 간신히 몸을 세우고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안 열면 강제로 열고 들어간다. 우리가 뭘로 보이니. 뭔가 나쁜 짓을 하러 온 사람들이 있다는 첩보를 받고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온 특공대다. 대장은 그러면서 옆구리에 찬 총신이 짧은 기관총을 슬쩍 보여줬다. 지금 총독님이 위험에 처해있다. 그러니 급하게 들어가는 거야. 우리가 들어간 다음에는 어떤 병력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 알겠지. 빨리 열어. 더 까불면 죽는다. 이래도 안 열어. 좋아. 너 총독님 신변에 무슨일이 생기면 다 너 때문인줄 알아. 정 그렇게 우리 부대가 의심스럽니. 그렇다면 확인해 봐라. 위병소에 들어가 전화하란 말이다, 개만도 못한 놈아. 너 아까 짚차 세대와 그 수만큼 군용 트럭이 들어갈 때 여기 있었지. 네, 대좌님. 이유가 뭐겠어. 네가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특공작전의 비밀까지 알고 싶은 거야. 응 그런거야. 죄다 털어놓을 게. 개 놈의 자식아.

준사관은 더 실랑이 할수록 자신이 손해라는 것을 알았다. 똥 밟은 샘치고 들여보내자.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더구나 이들은 총독님과 아까 들어간 참의원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한 특공대라고 하잖아. 준사관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통과, 하고 졸병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위병소에 들어가려다 마침 개놈이라는 그 말을 상기하고는 문 열어라, 시발하고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될 욕을 먹은 것이 억울해서였다. 앞서 참의원은 정중하게 사전 연락을 받았음에도 신분을 밝혔고 뒤이어 들어온 트럭도 사전 공지가 된 상태였으나 그들은 자신이 들어오는 이유를 분명히 말했다. 총독님과 약속이 되 있다. 참의원 일행이 도착한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그런 것이 일체 없다. 그들은 직위에 맞게 자신들이 위병소에 근무한다고 깔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자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래 호통을 치는가. 그래서 군바리와 정치인은 다르다니까. 무식한 군바리 새끼. 준사관은 불쾌한 얼굴로 자신의 일을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근무지인 위병소 안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려고 몸을 돌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씨발 이리와 새끼야. 내가 군복 벗는 일이 있어도 너 같은 새끼는 작살을 내고 말겠다. 맨 마지막으로 통과하려던 휴의 대장이 그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들어간 줄 알았던 대장이 다시 돌아나와 기세가 등등하게 나서자 준사관은 그 제서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잠깐의 실수를 너그럽게 봐달라고 간청했다. 너, 이 새끼 우리가 나올 때도 이런 식이면 넌 그때는 죽어. 협박을 하고는 대장은 불끄러온 소방대장처럼 급하게 열린 문을 통해 총독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독립군 대장의 등골에 서늘한 냉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졸병은 물론 준사관도 알지 못했다. 그랬더라면 저자들을 잡아라, 소리 치거나 위병소 안의 무기를 들고 선제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전화기를 들고 괴한 침입을 외쳤을 텐데. 그러지 못한 그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었다. 휴의 부대는 넓은 연병장 같은 빈 공간을 들어가면서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질서를 유지했다. 그런 자세로 참의원 일행이 타고 내린 세 대의 검은 색 짚차 옆을 지나쳐 갔다. 휴의는 힐끗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차에 탄 자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높은 자일수록 좋다. 거물이지만 확실히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그에게 전투의욕을 고조시켰다. 빠르게 뛰었던 심장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매일신보에는 일본에서 의원일행이 방문한다는 기사가 났다. 쪽바리 의원 나부랭이가 오나. 휴의는 그런 생각과 동시에 지금쯤 준사관이 총독 관저로 들어간 특공대에 대해 연락을 취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들이 전화를 받고 대책을 세우기 전에 우리쪽에서 먼저 일을 시작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조금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십여 미터를 더 전진하다 관저로 들어가는 계단이 특공대의 앞을 가로 막았다. 저기를 바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주변에 흩어져 있다가 상황에 따라 움직여야 할지 휴의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트럭에서 내린 황군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모두 관저에 들어간 것은 아닌데 하고 소대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벚나무 아래에 십 여 명의 군인들이 열을 지어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일부와 대장이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그들은 대장 일행을 보고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군인이 군인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장은 부관에게 지시했다. 너희 분대는 들어오지 말고 저들이 무슨 소리를 듣고 들어오려고 일어서면 처리해라. 그 말과 동시에 대장은 나머지 대원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부관은 그들의 등을 보면서 벚나무가 아닌 소나무 아래로 몸을 이동했다. 그러면서 벚나무 아래에 있는 자들을 보니 그들 손에는 총이 없었다. 아까는 분명 가지고 내렸는데. 의문은 곧 풀렸다. 그들의 오육미터 후방에 가지런히 총을 세워 놓고 있었다. 지휘관인 듯한 자는 권총을 옆에 차고 있었다. 수는 좀 많았으나 여섯 명이나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세 명만 남아도 충분히 제압할 만했다. 

그래서 부관은 대장의 명령을 어기고 대장이 지시한 여기 어슬렁 거리다가 총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자들을 처리하라고 부사관에게 지시하고는 휴의를 뒤따라 총독부 안으로 들어갔다. 날센돌이 세 명이 부관 옆에서 같이 움직였다. 부관은 어떤 예감에 따라 너는 여기 남아있어라는 명령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한 것이다. 그 시각 화가 덜 풀린 총독 초소의 준사관은 총독 관저에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방금 통과한 자들에 대한 신상과 그들이 들어갔으니 확인해 달라는 말을 입속에 중얼 거리면서 저 쪽에서 하이 하고 받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화는 신호음이 여러 번 가도 받을 기미가 없었다. 끊으려고 할 즈음 상대방이 급한 듯한 목소리가 짜증이 되어 준사관의 귀에 흘러들었다. 그는 생각해 둔 말을 저 쪽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알았다, 여기 일이 바쁘다. 총독과 참의원 일행이 지금 다과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을 보호하려는 외곽경비대가 출동한 모양이다. 하면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준사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자신이 더 붙잡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부대의 이동을 허락한 것을 잘한 결정으로 여겼다. 시비가 붙었다면 자신에게도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그는 오랜 군 생활 동안 체험으로 알았다. 좀 자야겠다. 밤새 근무를 서려면 조금 자두는 것이 좋다. 준사관은 졸병에게 이렇게 말하고 책상에 전투화 신은 그대로 다리를 올렸다. 총소리가 울린 것을 바로 그때였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지 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으나 곧이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총소리라는 것을 준사관은 알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사이렌을 울리고 벽에 세워둔 개인 소총을 들고 반사적으로 밖으로 나갔다.

종로서의 완용은 그 시각 정처 없이 걸었다. 하염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갈곳 없는 나그네 처럼.서장이 됐지만 그 순간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책임은 더 무거워 졌고 일거리는 그만큼 늘어났다. 휴의는 마치 유령처럼 그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지만 눈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왠지 자신이 그와의 싸움에서 진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휴의를 이길수 없다. 그를 잡을 수 없다. 그는 명분을 가지고 싸운다. 나에게도 명분이 있다. 그런데 왜 나는 패배의 그림자를 밟고 섯는가. 완용은 오늘은 일거를 놓고 그냥 걷고 싶었다. 끔찍한 일은 늘 일어났다. 경찰서 지하 바닥은 언제나 피로 흥건했고 비명은 그칠새가 없었다. 무고한 자들도 간혹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 따지면 언제 질서가 유지되고 평화가 올까. 소수의 희생양은 늘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그저 잊자. 아무 생각없이 걸어보자. 그는 부관도 없이 사복차림으로 지서를 나와 그야말로 정처 없이 종로통을 거닐었다. 그가 걷는 것은 몸의 열기 때문이었다. 이유도 없이 요즘 들어 불쑥 불쑥 화가 솟아 올랐다. 화난 몸을 달래기 위해 걷는 것 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의 걸음은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제대로 되지 않은 일에 대한 불만을 삭힐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혼자 걸으면 이런 저런 가벼운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고 업무에서 잠시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 한 참을 걷고 나자 몸속의 불 같은 것이 자꾸 머리 쪽으로 올라와서 곧 터질 것만 같더니 어느 새 아래쪽으로 쑥 내려갔다. 그래서 정신을 좀 차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걷고 있는 것인지 넘어지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바로 잡아야 했다. 그래야 술 취한 사람이 쓰러지기 직전에 보이는 휘청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몸은 피곤했으나 자꾸 걸으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였다. 나오기를 잘했어. 지서에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제풀에 쓰러졌을거야. 

자 내가 가는 앞길에, 정의로운 길에 사사로운 정이 가로 막을 수 없다. 잠시 약해진 마음을 그는 이런 생각으로 몸을 지탱해 나갔다. 어젯밤에는 너무 심했어. 그 자는 죽었을 거야. 병원으로 데려 갔으나 바로 영안실로 향했겠지. 완용은 불량선인으로 잡아온 자를 심하게 고문한 것을 상기했다. 휴의를 잡지 못한 분풀이를 다른데서 풀었던 것이다. 죽었을 거야. 죽었어. 하지만 난 내일을 한 거야.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했을 것이고. 심했어도 할 수 없어. 어차피 그는 죽을 목숨이었어. 그러니 내가 혹시 모를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릴 필요가 없지. 난 그걸 떨쳐 내기 위해서 정의를 내세워야 해.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서는 안 돼.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 전에 불어야지. 왜 말로하면 안 듣는 거야. 내 정을 시험하지 마. 난 무정한 사람이거든. 완용의 발걸음은 어느 새 종로 삼가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제비다방이나 들러볼까. 아니면 낙랑파라에 들러 커피나 마실까. 완용은 그러나 다 그만두었다. 거기에 어제처럼 잡아 들여서 고문할 불령선인들이 드나들고 있으나 오늘은 왠지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냥 걸으면서 조센징들을 관찰하고 싶었다. 여기도,저기도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손에 들고 등에 지고 마차에 싣고. 손에 든 것이 등에 진 것이 마차에 실은 것이 무엇인지 다 파헤쳐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것도 그만두었다. 무지렁이 같은 저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살아가는지 과연 그들의 삶이라는 것도 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완용은 잠시 쉬면서 생각했다. 파고다 공원의 경계석은 따뜻했다. 

누군가 방금까지 앉아 있다 떠난 모양이다. 그는 그 자리에 자신이 앉는 것도 불쾌했다. 그들과 동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날까 했으나 몸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그만 두고 조금 더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눈에 들어온 희미한 풍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기와 지붕의 출입구와 그 안에 있는 작은 공원, 그리고 제법 높게 서 있는 탑과 나무 등이 고개를 뒤로 돌리자 한 눈에 들어왔다. 저런 것들은 다 무엇인가. 다 쓰잘데기 없는 것들 뿐이야. 파리나 꼬이지 어디에 써먹겠어. 쓸모없는 것을 떨쳐 내기 위해 완용은 일어섰다. 여기서 삼일만세 운동 같은 것이 일어났다는 것이 불쾌했다. 싹 쓸어 버려야지. 내게 그럴 힘이 생기면 그래야지. 난 더큰 힘이 필요해. 종로서장으로는 성이 안 차거든. 겨우 조무래기 같은 것이나 잡아와서 고문하면 내 정신만 혼란해져. 어제 그 눈빛. 그자가 감히 나를 노려봤어. 죽으려고 환장한 거지. 그런다고 내가 물러설까. 그 눈을 나를 보는 그 눈을 더는 볼 수 없도록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야. 그걸 그는 왜 모르고 있었을가. 완용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현듯 창경원으로 가고자 하는 욕구가 일었다. 호랑이나 원숭이가 반겨줄 것이다. 흰옷입은 짐승보다 차라리 그것들이 더 낫고 소중했고 볼만한 것이 아닌가. 나를 웃겨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해. 조선땅에는 조센징 대신 그런 짐승들이 우글거린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본토인들이 들어와서 동물이나 구경하면서 쉬고 가는 그런 장소로 조선이 제격이었으면 싶었다. 굳이 사람이 개미떼처럼 모여 살 필요가 있을까. 완용은 조선인은 물론 조선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싫었다. 사라져야 할 것이 그러지 않고 버티는 꼴이라니, 그는 혀를 찼다.

증오심은 더 커졌다. 기회가 되면 저런 낡아 빠진 초가집이니 쓸모가 떨어지는 한옥 같은 것을 죄다 헐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순사 회의 때 이런 것을 건의 좀 하라고 떠들어야 겠다. 그런 쪽으로 완용은 계속 생각의 끈을 이어갔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아도 생각은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도로도 넓히고 집도 다 헐고 사람도 다 이주시키거나 어떻게 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건물을 짓고 아니 일본식으로 짓고 동물을 풀어 놓고 그러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은근 슬쩍 사라지겠지. 왕이라는 자가 백성을 억압하고 호의호식 하던 궁궐에 동물원을 만든 것은 일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얼마나 잘한 결정인가. 언제나 완용은 일본이 하는 일이라면, 한 일이라면 옳다고 여겼다. 최상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뿌리 깊은 친일사상은 그가 존재하는 이유의 모든 밑바탕이었다. 독립운동하는 자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동물이 차지한 꼴을 보면 참으로 고소할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생각이라는 것이 있는가. 우리를 도와주고 근대화 시켜주는 일본에게 고맙다고 매일 삼천 배를 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독립이니 주권이니 하고 외치고 다닌단 말인가. 완용은 웅변하는 연자처럼 감정이 끓어 올라 주먹을 쥐었다. 

독립만 외치지 않으면 그런대로 흰옷입은 사람들도 봐줄만했다. 짐승보다 못하다고 했지만 그럴리야 있겠는가. 일을 하는데는 동물보다는 낫지. 말귀를 알아 먹으니 안 그래. 그는 말상대가 앞에 있기라고 한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주권 어쩌고 저쩌고 나불대지만 않으면 어쩌면 완용은 그들과도 같이 살 수 있을 것 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휴의가 더욱 미워졌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그런 짓에 목숨을 걸고 있다니. 재산을 던지고 가족까지 팽개치고 있다. 개돼지 만도 못한 것들이다. 사상이 어떻다고. 사회주의가 다 뭐야. 가족도 내칠만큼 가치가 있는 건가. 돈보다 더 중요한 그 사상이라는게 따지고 보면 껍데기 아닌가. 완용은 아니 고바야시는 탁 하고 침을 뱉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분을 참지 못한 그는 급기야 지나는 행인에게 발길질을 했다. 처음에는 화를 내고 대들려던 사람은 완용이 권총을 꺼내들자 서 너명이 한꺼번에 줄행랑을 놓았다. 혼자라서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가 판단이 잘못된 것을 알고는 날 살려라 도망갔다. 저런 무지렁이들. 여럿이서 한 놈이 무서워 도망간다. 저런게 조센징이지. 어떤 자는 완용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서서는 고개를 숙였다. 아예 땅에 엎드리고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누구에게 하는 지도 모르면서 두 손을 비는 자도 있었다. 참 별꼴 다보는 풍경이다. 총알이 아깝지 안다면 그냥 쏴 버리고 싶었다. 그래 너희들은 죽을 만큼 큰 죄를 지었어. 이런 무지렁이들아. 하지만 오늘은 봐준다. 손에 피가 아직 씻겨 나가지 않았거든. 용서하마. 일어서라. 그는 이런 말을 엎드린 자가 들었는지 말았는지 신경쓰지 않고 내뱉고는 그냥 지나쳐갔다. 지렁이만도 못한 것들 천지인데 어쩌자고 휴의같은 인물이 나타났을까. 그자 때문에 내 신변이 위협받고 대일본제국이 신경을 쓴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나 되는가. 아니다. 완용은 완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모두가 지렁이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무지렁이, 상무지렁이들.

창경원 동물을 구경했으나 생각보다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름대로 기분은 좀 나아졌다. 완용은 다시 느릿한 걸음으로 인사동으로 접어들었다. 딱히 그곳에 가려는 목적은 없었다. 그냥 심심해서 혹은 오랜만이라서 발길이 그리로 이끌었다. 지서로 갈까 하다가 방향을 틀었으니 국밥이라도 하나 먹고 싶었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서 그는 눈에 제일 먼저 띄는 곳에서 밥을 먹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경성역에서부터 오후 내내 걷느나 그는 지쳤고 그래서 약속한 대로  눈에 먼저 걸려든 선술집에 들어가 이른 저녁과 술 한잔을 마셨다. 그가 몇 술 뜨고 나서 한숨을 돌리는데 어디선가 미술대회니 유화니 골동품이니 불란서니 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조선말과 일본말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잡탕 모임같았다. 이 시각에 이런 곳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은 일본인들 가운데서도 드물고 특히 조선인들이 그러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문득 그는 그들이 궁금했다. 어떤 자들인가. 자신은 공무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가라앉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완용은 느꼈다. 조센징 주제에 무슨 화가니 그림 타령인가. 같잖은 그들을 완용은 쏘아보기 위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서양식 옷을 잘 차려 입은 남자 둘에 젊은 여자 하나가 한 쪽 구석에서 웃고 떠들면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들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춘 듯 싶었다.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보자 목소리는 또 한계단 내려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하는 대화였다. 

저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의심스러워.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돌린 완용은 또한 번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술잔을 탁하게 놓고 기세 좋게 주모를 불러 한 병더를 외쳤다. 주모, 한 병 더 가져와. 빨리. 그는 일부러 큰 소리를 질렀다. 취하고 싶었다기보다는 호기를 부려본 것이다. 조선 팔도에서 총을 가진 서장에게 대들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복을 입었어도 그는 자신이 경찰 간부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더구나 여기는 자기의 관할 종로 아닌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는 되레 드러내고 싶었다. 그는 거칠 게 없는 잔잔한 바다 위의 함정처럼 당당하게 행동했다. 누가 있거나 말거나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벨이 꼴려서 더는 이런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고 그런 모습에 주모는 주눅이 들었다. 일본인이 있다고 해도 잡상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죄를 짓고 거기서 살수 없어 도망친 범죄자들이 조선땅에서 활개를 치다니. 같잖았다. 완용은 이 순간 자신이 조센징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건달이나 깡패도 일본인이라면 행세를 하다니. 어디서 굴러먹던 수작이야. 당장 체포해 버릴까. 그러기 전에 한 번 더 상판대기를 보자. 그런 마음으로 슬쩍 뒤돌아 본 그 순간 어디선가 본 모습의 여자라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우리가 처음은 아냐. 분명 어디선가 마주쳤어. 아니 그 이상이야. 누구지. 어디서 봤지. 정신을 차린 완용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 내려고 머리를 짜냈다. 그의 거친 행동은 그 순간 멈췄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숨을 죽였다. 확실히 전에 본 얼굴이 틀림없었다. 옷이 바뀌고 머리 스타일이 다르고 말하는 투가 변했다고 해도 본 바탕은 남아 있었다.

누구지. 누구냐고. 쉽게 떠오르지 않는 이름 때문에 완용은 또다시 화가 났다. 이 돌대가리. 그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돌대가리를 외쳤다. 주먹으로 치고 싶었다. 그렇다고 돌대가리에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리 없었다. 화가 났으나 이번에는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속으로 곱씹으면서 기어이 그 여자가 누구이며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뻔뻔 스러운 표정으로 한 번 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뻔한 수작같기도 하고 상대가 무안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너무 노골적이야. 지금쯤 저들도 내가 뭐하는 놈인지 알려고 애쓸 거야. 아무리 날고 기는 왜경이라고 해도 간혹 체면이나 뭐, 그런 것이 있잖은가. 그에게는 그것말고도 염치라는 것이 아주 조금은 있었는데 그걸 지키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자신은 숨기고 남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왜경이 취할 행동이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아도 너는 나를 알아 봐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술을 가져온 주모가 다시 원래 왔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손을 잡아 옆에 앉혔다. 그리고 쓸데 없는 소리라거나 하나마나한 말을 하면서 뒷자리의 손님이 자신에게 시선이 옮겨지기를 기다렸다. 당연히 그녀도 자신쪽을 볼 것이고 그러면 완용은 안 보는 척 하다가 기억나지 않는 얼굴과 마주칠 기회를 얻는다. 두 세번이라면 한 번으로는 알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을지 몰랐다.

주모, 여기에 여기 이 술잔에 술 부어. 빈 잔이 자네 눈에는 안 보이는가. 그가 호기롭게 말했다. 마치 양반이 종에게 하듯이 거드름을 잔뜩 피우면서 완용은 그 말을 하는 자신이 예삿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뒷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떠들었다. 연극을 하는 듯한 지나친 꾸밈에 주모는 약간 망설이다가 왜놈 경찰 위세에 밀려 속으로는 조선개새끼라고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굽신 거리면서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잔을 따라 올렸다. 그래 너 몇 살이냐? 다짜고짜 완용은 주모의 나이를 물었다. 주모가 당황했다. 처음 들어보는 너라는 말은 그렇다 쳐도 나이를 물어보는 것에 대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나이로 치면 너보다는 이십년은 더 먹었다 이놈아. 이년이 귀 처먹었나. 너, 몇 살이냐고? 주모는 머뭇거렸다. 말하기 싫어서 혹은 아니 꼬아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 주모는 잘 알지 못했다. 남편이나 자식의 나이는 알아도 본인의 나이가 몇 살인지 몰라서 주모는 대답을 주저했다. 빠가야로, 조센징. 조선 것들은 늙으나 젊으나 양반이나 상놈이나 다 똑같아. 완용이 떠벌였다. 취기가 오르기도 했고 괜히 심술도 부리고 싶었고 뒷 좌석의 사람의 관심도 끌고 싶었다. 술잔을 옆으로 밀쳐 놓고 그는 느닷없이 주모의 뺨을 후려 갈겼다. 중심을 잃은 주모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탁자에 있던 술병을 깨트렸다. 주사가 심한 자였다. 저런 자가 대일본 제국의 고위 경찰이라는 것이 못마땅햇다. 유마는 생각같아서는 한 방에 쥐어 박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막 군복을 벗고 조선에 온 지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참아야지. 참을인자를 세 번 쓰면 성인이 되느니라. 유마는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러나 그 보다는 나서고 싶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매일 싸웠다. 그런데 여기서 까지 와서 우격다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할지어다. 유마는 자리에 합석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말은 조용했으나 끊어 오르는 분노 같은 것을 유마는 억지로 참았다. 그는 점례와 삼촌과 함께 그동안의 마저 못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화실 근처에 있는 주막에 들러 막 술 한잔을 하고 기분이 좋아지려고 할 때 였다. 그런데 낮술을 하는 저런자와 마주치다니. 유마는 불쾌했다. 미술에 관한 이야기도 김이샜다. 분위기를 눈치 챈 삼촌이 삼천포로 빠져 태평양 전쟁이나 그곳 원주민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질문해도 유마는 누구나 알 수 있고 추측할 수 있는 그런 형식적인 대답만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쟁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렸다. 파리 유학에 대해 유마는 아버지에게 했던 말을 삼촌에게 다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유마의 화난 얼굴을 보고 삼촌이 나서려고 일어섰다. 어디서 본 듯했고 소문으로 들었던 종로서장 완용이라고 삼촌은 지레 짐작했다. 그자는 몰라도 그가 하도 날뛰어서 삼촌도 말은 듣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아마 통성명 정도는 했을 것이다. 삼촌 정도라면 완용정도는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마가 제지했다. 저자가 어떻게 하는지 더 두고 보고요. 삼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화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손님이라고는 저자와 우리 뿐인데 저런 식의 행동은 동행자에게도 불쾌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라고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주모는 일어나면서 비틀거렸다. 그 와중에도 잘못을 비는 행위만큼은 잊지 않았다.

네년이 뭘 잘못했어. 경찰 간부는 조선말로 욕지거리를 해댔다. 너무나 익숙한 조선말이어서 삼촌은 그 자가 예상했던 대로 조선인으로 일본 경찰이 된 종로서 완용임을 확신했다. 경찰 간부라면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유마는 일단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돌아본 것이다. 고급 장교가 저런 행패를 부린다면 낭인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저자는 형편없군. 저런 태도로는 대일본제국의 유능한 경찰이 되기는 글렀어.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나 한편으로 유마는 달리 생각했다. 무슨 곡절이 있나. 센자가 기껏 술이나 파는 아녀자에게 할 짓이 아닌 것을 태연히 저지르다니. 삼촌이 다시 일어섰을 때 유마는 말리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삼촌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유마는 그런 것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술상을 엎고 군홧발로 음식을 짓이긴 일이 있었다.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날 부하들의 사기를 돋구기 위해 일부러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이번 건도 그와 비슷한가. 그런데 우리는 그자의 부하가 아니지 않은가. 돌아가는 꼴이 우습군. 어쨌든 기분은 잡쳤어. 그 사이 삼촌은 화난 얼굴을 숨기고 점잖은 걸음으로 아직도 성난 황소처럼 씩씩대는 완용에게 다가갔다. 형씨,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왠 행패요. 행패라니. 완용은 말을 받아 치다말고 격조 높은 일본어를 구사하는 그에게서 어떤 위압을 느꼈다. 그래서 급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저 년이 손님에게 말대꾸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엄마뻘 되는 여자에게 욕을 하다니요. 그렇다고 해서 화가 풀립니까. 삼촌은 여전히 점잖은 태도를 유지했으나 나무라는 투가 역력했다. 완용은 자신의 체면이 손상된 것을 즉시 느끼고 예의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상대가 바라볼 수 있게 위로 추어 올렸다. 여기서 더 나가면 어찌 해 볼 수 있느니 멈추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삼촌은 그 정도로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총독부에 끈이 있었다. 더구나 일본 유력 정치인을 형으로 두고 있고 그 형은 지금 총독과 면담하기 위해 광화문에 들어간 상태였다. 완용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무서워할 대상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 자는 대담하게도 근무중에 술을 먹고 있다. 경계에 실패한 자가 아닌가. 용서 할 수 없어. 입맛을 다시며 삼촌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버티고 서 있자 완용은 자신도 일어서야 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마주 서니 키가 엇비슷했다. 신분증 좀 봅시다. 완용이 공무를 집행하겠다는 듯이 목소리를 깔았다. 그러기 전에 당신은 어디 경찰서 소속이오. 완용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식의 대꾸는 경찰 인생에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무리 일본이이라고 해도 건방졌다. 백번 양보한다는 듯이 그가 입을 비죽 거리면 입을 열었다. 나 종로서장 고바야시요. 여기는 내 관할이고. 제일 높은 자리군요. 경시정이라니 이거 몰라뵙습니다. 완용이 움찔했다. 경찰 직위를 알고 있다면 이 자도 나와 비슷한 소속인가. 완용은 순간 머리를 굴렸다. 아니면 돈 많은 일본 지식인인가. 설마 검사 나부랭이 그런 건 아니겠지.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 자는 아직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나 조선제일일등화랑 주인이오. 그건 그렇고 주모에게 사과하고 일을 끝냅시다. 일을 끝내자고. 완용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이 꼬여 가고 있었다. 그 자들의 관심을 끄는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어디선가 본 듯한 여자의 신분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신분은 커녕 얼굴도 마주 보지 못했다. 일이 글러가고 있었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오. 동행에게 미안하오. 무슨 중요한 회의인 모양인데 내가 실수 했소. 그리고 그 화랑이라면 나도 알고 있어요. 우리 서가 잘 보호해 주겠어요. 완용이 말은 점잖게 했으나 태도는 여전히 빳빳했다. 그는 빠져 나올 기회를 적절히 잡았다. 이 자와 대꾸했다가 괜히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작에 말씀하시지요. 그곳 화랑에서 이번에 조선미술 특등자가 나왔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결례가 있었다면 용서해 주시오. 완용은 내친김에 꼬리를 내리고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이것 미안하게 됐습니다. 저기 있는 저 신사분과 숙녀분에게 죄송하다고 전해주시오. 그러고 보니 우리는 한 번 만난 적이 있소이다. 아, 그럴 겁니다. 다음부터는 알아 모시겠습니다. 완용은 아직 일어서지 않고 여전히 자리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남자의 쏘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걸려 이렇게 말했다. 그 자의 태도나 품위는 언뜻 본 것으로도 자기 눈 앞에 있는 자보도 더 귀해 보였다. 그러니 부하를 내보내고 자신은 앉아 있지 않은가. 젊은 녀석이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내세울 때는 그 자의 지위를 생각해야 한다. 화랑 주인보다 높은 자라니. 누구지. 이거 잘못 하다가는 큰 코 다치겠는걸. 그럼. 

완용이 이렇게 나오자 삼촌도 더는 할 말을 잊었다. 주모는 그 사이 바닥에 떨어진 술병과 음식 잔해물을 치웠다. 완용은 호탕하게 술값 이상을 지불했다. 주모는 인상을 펴고는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것은. 저기 신사 숙녀분들 값이오. 이거 미안하게 됐어요. 완용은 순찰 때문에 이만 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뜨기 위해 유마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또 만날 날 있겠지요. 그 때 정식으로 사과 하리다. 삼촌은 어이가 없었으나 이쯤에서 일이 마무리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시지요. 악수를 청하면서 완용은 의식적으로 점례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점례도 이쪽을 보고 있어 두 사람은 잠깐 동안 눈길을 교차했다. 경시정이 나가고 나서 삼촌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 자가 이걸 주더군. 삼촌이 완용이 건넨 명함을 유마에게 주었다. 점례가 보기 위해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종로서장 완용 고바야시가 선명했다. 고바야시라고. 점례는 완용이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 그래 휴의가 말했던 바로 종로서 완용이었다. 점례는 그러나 명함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셋은 그 자리에서 더는 이야기 할 거리가 없었다. 삼촌은 가게로 돌아갔고 유마와 점례는 종로에서 한 잔 더 하기 위해 종각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유마 호사카는 생각이 많았다. 옆에 점례가 바짝 붙어 따라 걷고 있는 것도 잊은채 이런 저런 상념에 골몰했다. 특히 경찰 간부라는 자의 태도에 대해서 그는 이런 자들은 어째서 늘 승승장구 하는지 궁금해 했다. 대낮에 술을 먹고 큰 소리치고 행패를 부리는 자들이 높이 오르는 이유를. 군대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 불 가리지 않고 마구 들이치는 자는 어느 날 승진 발표날이면 어김없이 명단에 들어있었다. 합리적인 사고와 토론을 중시하면서 신중하게 공격을 결정하는 상관은 늘 물을 먹었다. 나중에 그런 결정이 부하들을 죽음에서 건져 냈다는 명확한 근거가 있음에도 그런 것은 승리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장은 물론 다음 기회에도 정상 참작이 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맞딱트린 이런 질문이 유마는 불쾌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현상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알고 나면 모르고 있을 때보다는 마음이 편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정리하니 나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은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경찰 간부가 저 정도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 아래 순사들의 행동거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는데 이르렀다.

물론 그들은 흰 옷 입자들이 무서워하고 피해야 하는 존재로 각인되는 것이 맞다. 두려워하는 존재가 없다면 통치는 불가능하다. 생각만 해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악마가 있어야 한다. 치안이라는 것이, 식민지 국민을 다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유마는 잘 알고 있었다. 순한 양으로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빨을 드러내는 늑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강약은 조절할 수 있다. 이제 수 십년이 됐고 누구도 조선이 일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데 저렇게 까지 거만하게 굴 필요가 있을까. 방법을 바꿔도 될 것이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백성은 확실한 우군이 아니면 언제든지 적군으로 바뀔 수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하루를 살아가는 민초들이 갖는 생존 방식이었다. 저들을 화나게 해서 완용이 무엇을 얻었을까. 개인적 화풀이는 했을지 몰라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손실이다. 유마는 아버지가 총독 관저에서 돌아오면 그런 이야기를 해 볼 참이었다. 그것은 그가 훗날 정치적 욕심을 미리 채우기 위해서 내세우는 조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유마는 정치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의 눈도장을 미리 받아 총독부에 심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총독부에서 근무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다만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사를 건네는 것으로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안에 있는 선한 행동이 작동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치나 정치적인 것에서 되도록 멀리 있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추구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은 일생을 살겠다는 것이 전선에서 조선으로 오면서 그가 수없이 되풀이 한 다짐이었다. 난 누구위에 있지 않아. 그저 나로 살 뿐이고 좋은 것을 사랑할 뿐이야. 점례가 여기 내 옆에 있는 것도 점례가 그것에 합당하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내 존재가 없는 것처럼 점례 역시 존재 가치가 없을 거야. 

죽고 죽이는 피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그것을 경험했고 그 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어울렸다. 그러자 완용 같은 천한 인간이 거기에 딱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누군가는 해야 할 일 더러운 일은 완용 같은 천한 인간이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의 경찰간부 직이라는 것이 무턱대고 떨어진 나무 아래의 곶감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에게 그것은 적합한 것이었고 조직은 그에게 그것을 원했다. 경시정은 자기 할 일의 일부를 한 것이다. 술집 주모에게 한 행동은 곧 수십 명 아니 수백명으로 전파될 것이다. 전시효과는 술집에서 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유마는 그런 생각이 들자 화가 나기보다는 차분히 가라앉은 기분이 되레 이상했다. 그래서 점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우리 조금 천천히 걷자. 주변을 보고 무엇이 있는지 살펴서 약속 장소를 정할 때 다리 위라고 막연히 말하지 말고 수표교 앞 혹은  보신각 안에서 처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 어때, 내 제의가. 그럴싸하지. 좋아요. 점례는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지금껏 유마의 말을 반대한 적이 없었다. 일단 찬성해 놓고 다른 의견을 말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하자고 하는데 아니라고 그 자리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점례는 이번에도 천성적으로 순종하는 여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게 좋아요. 장소가 헷갈릴 이유도 없고. 점례는 그렇게 말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유마는 그런 것이 좋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을 행동으로 직접 옮겨 보여주는 점례가 현명한 여자였다. 자신이 통치하고 싶은 백성이 있다면 바로 점례가 같은 여자가 아닐까. 통치당하는 쪽도 마찬가지 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도 좋고 상대도 좋은 것. 그러고보니 나나 점례가 함께 하는 이유도 이런 것이겠지. 오늘의 일이 의미가 있고 내일을 설계하는데 점례가 없다면 가능한 일인가. 유마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점례의 존재가 소중하게 자신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둘은 어느 덧 광화문 사거리에 도착했다. 시계는 늦은 오후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새 경시정의 일은 까마득히 잊었다. 다시 만날 일이 있겠는가. 있다 손 치더라도 그 때는 유마가 나설 것이다.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말이다. 단단히 혼을 내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내 생각 어때.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하기도 시간이 부족해요. 넌 날 항상 부끄럽게 만들어. 아버지까지 끌어들이면서까지 난 날 드러내려고 했어. 점례가 그런 나는 막아 세운 거지. 백번 생각해도 그렇지. 좋은 말 하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여긴 군대가 아냐. 전쟁터가 아니라고. 그러니 좀 더 여유를 갖고 사람을 대하자. 일본도 아니고 조선이잖아. 어쩌면 난 이곳에서 이방인일지 몰라. 눈감고 귀닫고 그렇게 지내볼까. 파리로 떠나기전까지 난 관찰자로 그들을 볼 거야. 그게 낫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끼어들지 말자. 점례의 말 한디에 자신을 돌아보게 된 유마가 이런식으로 자기를 합리화 하고 있을때 완용은 머리를 굴리다 굴리다 마침내 희미한 여자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기쁜 나머지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해냈어. 알아 냈단 말이야. 점례다, 점례다. 가능성이 팔 할이다. 팔할이면 끝난 거다. 완용은 자신의 눈대중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보령 죽마을을 떠나 올 때 가장 최근의 점례 모습을 상상했다. 8년 전의 일이지만. 그 때 점례는 단발머리였다. 머리를 뒤로 묶었다고 해서 못 알아볼까.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고 해서 눈치채지 못할까. 맞아. 그 눈. 내가 달려들면 그러지 마, 난 네가 싫어 하는 눈초리로 날 피하곤 했어. 그 외면하는 듯안 눈꼬리를 내가 왜 잊게써. 그나저나 이마의 빛은 여전한 걸. 앞으로 조금 나온 이마는 의지가 굳은 소녀의 표식 처럼 보였고 조금 두툼한 입술은 여자라면 선망하는 선홍색이었다. 볼은 이마처럼 약간 앞으로 나왔고 두 눈, 어둠 까지 쫓아낼 듯한 밝은 두 눈이 틀림없는 점례였다. 그녀는 자신을 보지 못했다. 일어설 때 완용은식탁위에 벗어 놓은 모자를 깊숙히 눌러썼고 그로 인해 자신은 감추고 상대를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단 1초 정도 였으나 그는 점례라는 사실말고는 다른 것을 추측할 수 없었다.

점례라니, 놀라웠다. 그녀는 일본에 있지 않은가. 그래 일본으로 자신이 보냈다. 일본에서 돌아온 것일까. 돌아왔다면 죽마을에 있어야 맞다. 그런데 여기 인사동에서 일본말을 유창하고 구사하는 남자 둘과 함께 술집에 있다. 더구나 그림을 이야기 하고 파리 유학을 말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고 이런 저런 짱구를 굴려도 그 전의 점례와 지금의 점례는 일치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 전쟁터이고 식민지 시대라고는 하지만 점례의 변신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하기사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흐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어. 한 번 각인된 이미지는 백년이 가도 잊어지지 않아. 조센징 말처럼. 아, 지겨워. 아무리 본토말을 써도 순간적으로 나오는 말은 조센징 언어잖아. 그런 것과 같은 거지. 뼈속까지 새겨져 있어. 내가 너를 어찌 잊겠니. 점례. 네가 내 눈앞에서 얼짱거리고 있어. 잡아 잡수세요. 하고. 하지만 난 살모사가 아니거든. 널 먹는 순간 나도 죽어. 넌 독이 있는 여자야. 살모사 대신 능구렁이를 네 앞에 던져주마. 피하지 못할 걸. 이제 백 프로다. 비록 흰 옷과 검정치마 대신 양장 옷으로 빼 입고 머리를 조금 볶아서 귀뒤로 넘겨 묶었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네가 머리를 밀고 콧수염을 달았다고 해도 난 알아봤을 거야. 넌 네 손바닥안에 있어. 원숭이 주제에 부처님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니. 괘심하도다. 바로 알아 내지 못한 건 내 불찰이 아니라 세월탓이다. 그건 인간인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것이거든. 하지만 내 본능은 잠재지 않고 깨어났어. 냄새치고는 나쁘지 않단 말이야. 완용은 코를 벌름 거리면서 먹을 것을 찾는 돼지처럼 끙끙거렸다. 

완용은 자신의 감각과 눈썰미를 이번에도 믿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완용은 점례가 맞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일본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산다고 해도 아니면 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무슨 요정의 마담으로 활동한다고 해도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득실과 연결을 짓고 싶어하지 않았다. 뭐 별로 이득이 있겠어. 그런 인생이 점례의 몫이라면 그런 것이지. 완용은 점례에 대한 흥미를 거기서 멈추고 싶었다. 독이 든 성배는 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니까. 그러다가 집히는 것이 있기라도 하듯이 이마를 가볍게 주먹으로 치고는 비뚤어진 모자를 바로 썼다. 점례와 휴의가 서로 어른거렸다. 저들이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닌지 궁금했고 그 궁금증을 바로 풀고 싶었다. 틀림없어. 저게 경성에서 얼쩡거리고 난 후 휴의가 난리를 치고 있어. 둘이 아마 짝짜궁일 거야. 그러면 화랑 주인은 뭐지. 그 자는 태생이 일본인이고 형이 일본 정계에 있고 조카가 태평양 전쟁에서 장군으로 제대한 전쟁광 집안인데. 실체를 알고도 점례를 그냥 둔다고. 휴의와 연결됐다면 점례는 그들 틈 사이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알고서도 모른척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르는 게 맞다. 그럼 가서 알려 줄까. 미심쩍은 것은 바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완용은 늦은 밤이었지만 서로 복귀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와 주의를 주었던 화랑 주인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술기운이 확 사라졌고 완용은 이제 말짱한 정신으로 몸을 똑바로 하면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화랑 간판이 보였다. 10미터 까지 간 그는 무슨 생각이 나서인지 더는 발길을 앞으로 옮기지 않고 왔던 길로 되돌아 갔다. 오늘은 위치만 확인하자. 작전을 짜서 행동하자. 그는 화랑 주인과 주인과 같이 있던 여자는 점례라고 확신하는 여자뒤를 미행하기 위해 믿을 만한 부하 셋을 차출했다. 일대일 전담 미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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