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리고 나서 말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기도발이 있을 거야. 무언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흔적을 찾자. 아까는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제대로 보지 못했어. 지금은 아냐. 십자가를 봤으니 조금은 안심이 돼. 지하로 돌아 올 때 난 생각했어.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거리의 공기도 그걸 증명했어. 이 신선한 공기를 마셔봐. 신선할 거야. 비록 썪는 냄새가 널려 있어도 지하보다는 낫지. 그러니 신선하다고 속삭이는 것이 틀린 말은 아냐. 간혹 다른 냄새도 실려오거든. 자유의 냄새. 어디든 갈 수 있는 벗어난 냄새. 난 지쳤고 그게 필요해. 나갈 볼게. 좀 자신감이 생겼어. 느낌도 나쁘지 않고. 여순은 또 나가느냐고 물으려다 몸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말했다. 절대 위험한 곳에 가면 안되요. 당신이 혼자가 아닌 걸 알고 있어야 해요.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조심할게. 괜찮을 거야. 기도했거든. 하늘이 우릴 봐줄거야. 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렇게 엎드려 있을게요. 아냐, 그러지마. 좀 쉬어. 토끼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야 쥐를 피할 수 있잖아. 내 걱정은 말고 조심해서. 아니다 싶으면 바로 들어오세요. 말수가 나갔다. 마치 출근하는 남편처럼 갔다올게 하면서. 그게 출근길이면 참 좋겠네. 여순의 배웅을 받고 밖으로 나온 말수는 창가에 우선 몸을 반쯤만 드러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조용했고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용기를 내보자. 전쟁이 이미 끝난 거야. 아닐 수도 있지만. 부서진 벽의 틈을 이용해 겨우 빠져 나온 말수는 나오자 마자 성당 벽에 몸을 바짝 기댔다. 자세가 나와. 영화를 찍어도 되겠어. 적군은 나를 모르고 다가오지. 그러면 잡아 당기는 거지. 말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 제대로 눈을 뜨지는 않았다.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다가 지금은 뜨고는 있지만 반쯤만 그렇게 했다. 적응이 필요해. 내 몸도 내 눈도. 좀 비벼대자. 그래서 말수는 손바닥으로 양쪽 눈에 압박을 가했다. 현기증. 아차하는 어지럼증. 넘어지지는 않겠지만 휘청거려.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런 상태로 말수는 조금 더 꾸물거렸다. 마음이 급한 건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에 돌아와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임무는 막중한 것이지만. 제 이제 눈도 제 역할을 한다. 나아가자. 도로 곁에 바짝 붙어서. 기왕이면 상대가 아닌 내가 먼저 발견하면 도움이 될 거야. 이 냄새, 여전히 역겨워. 코는 적응 기간이 필요없어. 바로 맡아지거든. 제 역학을 제대로 하는 것은 후각뿐이었다. 다리는 후덜거렸다. 술취한 사람처럼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몇 걸음은 의지와는 달리 똑바로 걸어지지 않았다. 한 달인가. 아니 보름인가. 꼼짝 않고 있었던 지하생활에 몸의 반쪽은 마비가 된 것 같았다. 그것이 풀린다. 말수는 다리에서 부터 시작한 피가 가슴을 거쳐 머리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빠르지 안고 천천히 올라와. 뇌까지 도달해야지. 그래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거야. 이건 서풍인가. 바람이 방향이 바뀌었나. 피냄새는 나지 않아. 대신 소금기 잔뜩 머금은 바닷냄새. 나는 알지 이 냄새의 정체를. 통영 앞바다에도 이 냄새가 났어. 아니 지겹게 맡았지. 지겨워. 그런데 그 지겨움이 이젠 정겨움으로 바뀌었어. 내 이럴줄 예전에 미쳐 몰랐었지. 좋아 출발이 좋으니 마지막도 좋을 거야. 그는 마침 길가에 있는 나무를 의지해 몸을 기댔다. 호흡이 나쁜 병자가 후하고 한 숨을 내쉬고는 겨우 짧아 들이마신 상태처럼 말수는 아직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 조그만 더 있으면. 그러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거야. 정말 그랬다. 나무에 기대로 나자 뺨이 나무에 닿자 말수는 생기를 얻었다. 링게를 줄을 타고 영양분이 들어오고 있다. 손으로 말수는 나무를 껴안았다. 이 느낌은 뭐지. 내가 살아 있구나. 팔뚝에 스치는 거칠은 촉감을 말수는 두 팔 가득 느꼈다. 그만 가자. 말수야. 정신 차려. 이러려고 나온 건 아니잖아. 정신을 차린 말수가 다시 걸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수월했다.달릴 정도는 아니지만 휘청거릴 정도도 아니다. 바람이 방향이 바뀌었네. 냄새가 나. 냄새는 이곳에 머물고 있어. 아직 바다로 빠져 나가지 못한 거야. 영혼도 떠돌겠구나. 영혼은 냄새와 함께 하거든. 근거 있는 말이야. 몰라. 나도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코를 쥔 손을 푼 말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코나 풀자면서 억지로 코를 풀었다. 자신의 귀로 코푸는 소리를 들으며 말수는 바리케이트 삼았던 나무를 떠나서 길을 따라 걸었다. 알 수 있겠지. 눈에 뭐든지 보이면 난 알아. 일본이 이겼는지 미군이 승장인지. 깃발이라면 확실한데. 아직 그걸 걸만한 높은 곳은 보이지 않아. 더 가야돼. 무언가 보이는 군. 저기 어슬렁 거려. 급한 것 없다는 태도지. 지난 번 하고 똑같아. 검둥이 녀석 죽지 않고 오늘 또 나왔구나. 말수는 반가웠으나 검둥개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보는 둥 마는 둥 시끈둥한 표정으로 말수 곁에 왔다는 그냥 가던 길을 갔다. 저 개가 왜 저레. 개 맞아. 맞아. 틀림없는 개라고. 개도 전쟁을 타고 있어. 진절머리가 나는 거야. 내가 이 정도인데 개는 어떻겠어. 냄새를 견디지 못하겠지. 처음에는 환장에서 눈이 돌아갔으나 사시사철 저러니 이젠 질린 거지. 한가지 음식만 먹을 수는 없어. 나처럼 그렇게 한 개가 어떤 꼴인지 봐. 생기가 없잖아. 식욕이 없어. 삼시세끼 같은 메뉴라니. 개의 처지를 말수는 이해했다. 오지랖도 넓다. 전쟁터 개의 입장까지 헤아리다니. 근거를 찾자 그나저나. 아직은 없네. 너무 많이 왔나. 뒤돌아 보니 성당의 잔해라고 할 수 있는 벽돌 무더기가 저 멀리 있다. 겨우 100미터 정도 왔나. 생각보다 많이 부서졌네. 그러니 지하가 안전했지. 돌아가서 여순과 같이 올까. 얼마나 답답할까. 난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데 여순은 쥐와 토끼 놀이를 하고 있어. 아무 소식 없이 갈수는 없어. 조금만 더 가보자. 이제 삼십분도 안됐어. 깃발이 있을 거야. 이긴자들은 항상 깃발을 꼽거든.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어딘가 있을 거야. 저쪽인가. 더 많은 잔해들이 있어. 시내 중심부로 가고 있나. 성당처럼 어떤 의미 있는 건물이 나올 거야. 시청이라든가 하는 뭐 그런거. 그러면 승자의 깃발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 기대를 가지고 말수는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거기까지 왔다. 아까 봤던 잔해가 많은 곳. 이곳도 그러나 깃발을 꼽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내가 지휘관이라고 해도 이곳에 꼽지는 않을 거야. 더 놓은 곳으로 가야 해. 아니면 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가던지. 그래야 확인할 수 있어. 전쟁은 끝난 거야. 승자가 정해졌어. 그렇다면 항복의 표시가 필요해. 말수는 옷 속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윗통을 벗었다. 나를 보는 자가 있어도 총을 쏘지는 않겠지. 적어도 그러고 싶어도 그러기 전에 항복해라 정도의 경고는 하겠지. 난 두 손을 들거야. 그리고 항복 항복 하고 외쳐야지. 그럼 우린 사는 거야.
말수는 왔던 길을 되짚었다. 돌아오는 길은 어지러웠다. 등졌던 해가 정면에서 말수를 공격했다. 따가웠다. 이 느낌. 통영에서는 느끼지 못했어. 그곳 바다는 뜨거웠어도 숨쉬는 것은 좋았거든. 그런데 여긴 달래. 뜨겁고 습해. 그래서 코가 막혀. 머리가 도네. 빙빙 돌아. 가만히 있자. 저기까지 가자. 아까 섰던 그 나무. 그늘이 졌어. 거기서 잠시 앉자. 힘을 보충하자. 쓰러져서 못 일어나면 검둥개가 올거야. 녀석은 이번에는 어슬렁 거리지 않고 직선으로 달려오겠지. 늘 먹던 거라서 식욕은 없겠지만 녀석도 살아야 하니까 먹는 걸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무언가 잡아야 해. 잡고 싶어. 걸음마 아이가 쓰러질 것 같아. 그러기 전에 엄마가 팔을 벌리고 있어야지. 저기까지는 갈 수 있어. 말수는 품을 벌리고 있는 엄마를 향해 팔을 펴고 비틀거렸다. 나무. 잡았다. 나무는 엄마야. 어쩔 뻔 했어. 이 나무가 없었으면. 죽으라는 법은 없다니까. 세상이 왜 이래. 소크라테스에게 묻고 싶어. 그는 모르는 게 없으니 알거야. 반겨주지 않은 세상. 야속에 세상에 대해 말해 주겠지. 그런데 대답을 해도 모를 거야. 내 귀는 들리지 않아. 말수는 나무그늘 아래 주저 앉았다. 반대편에서 검둥개가 그런 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냐. 누워서 가만히 있으니 흑 냄새가 올라왔다. 개미들이 지나 다녔지만 말수에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싶었다. 그들은 작은 구멍에서 나와 떼를 지어 이동했다. 비가 오려나. 개미들의 대이동 뒤에는 소나기든 뭐든 내렸어. 흑냄새를 맡고 개미들을 구경하면서 차차 말수는 기운이 차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 일어나서 걸어가야 할 때가 왔어. 지금이야.
말수는 여순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것도 집이라고. 내가 돌아왔어. 퇴근 하고 집에 왔어. 그런데 음식 냄새가 없어. 맛있는 냄새. 난 배가 고픈데 아내는 어디 간거지. 원래 있던 곳으로 내가 왔는데. 말수는 축 쳐졌다. 지친 몸이 자꾸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기 때문인가. 아냐, 성과가 없는 건 아냐. 아무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야. 여순에게 딱히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할 말이 많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지만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 그 반대편으로 가자. 거기가면 달라질까요. 그러길 바래야지. 거기서 더 멀리 갔으면 어땠을까요. 더 가려고 했어. 그런데 가면 돌아오지 못할 거 같았어. 힘이 하나도 없었거든. 내 몸에서 진약이 빠져 나갔고 채워지지 않았어. 그래서 돌아온거야. 잘했어요. 이렇게 온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요. 당신이 가고 나서 뭐 먹을 게 있나 찾아 봤어요. 집에 오면 남자들은 먹을 걸 찾잖아요. 기어요. 남은 거 하나 찾았어요. 촛불 앞으로 여순이 손을 내밀었다. 설마 죽은 쥐는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요. 보지 않으래. 말수가 칭얼댔다. 아직은 그 정돈 아니에요. 마른 무화가 열매에요. 무화과. 알지 모화가. 통영 섬에도 있었어. 딱 한그루. 숲 속이어서 사람들은 몰라. 나 만 알지. 그게 익을 때면 난 몰래 찾았어. 무화과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거기도 성당이 있었거든.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인데 어느 날 나는 설교에서 감명을 받았지. 제일 좋은 것을 갔다 드리지. 생선은 흔하니 이거면 그도 놀랄거야.
선교사가 말했어. 이건 유럽에 흔한 과일이야. 무화과. 그래서 더 고마워. 한국에서는 처음이거든. 넌 내게 고향을 생각나게 해줬어. 학생부원이었던 나는 그 때부터 신부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어. 외국은 어떤 모습인지. 프랑스는 어떤 나라인지. 떠나고 싶은 마음이 그때부터 생겼는지 몰라. 난 늘 떠나고 싶었거든. 아 맞아. 지금 생각났다. 그 신부님. 진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했던. 그 신부님이 그 신부님 인가요. 아마 그럴거야. 틀림없어. 틀림 없다고. 신부님도 당신을 알아 봤어요. 그랬어. 알아 본거야. 그래서 짜증을 냈던 거지. 내가 알던 말수가 사람을 죽였을리 없다고. 그래서 피하려고 했던 거야. 순진한 학생이 배를 탔고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믿지 않았어. 신부는 자신에게 무화과를 준 어린 학생이 살인자로 큰 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나눠 먹자. 그러려고 두개로 쪼개 놨어요.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차라리 죽었으면 그러면 내가 다 먹을텐데. 이런 생각까지 했어요. 여순아, 정신차리자. 우리 그러지 말자. 자 먹고 나가자. 이번에는 둘이 가자. 절대 혼자 떨어지지 않을 거야. 남은 포도주 있지. 그건 얼마든지 있어요. 많이 먹지 말아요. 딱 한 모금만. 걷다 쓰러지지 않으려면. 완장 있지. 항복의 표시로 흰 천 같은 거. 당신 광목 속곳을 좀 쓰자. 그래요. 그렇게 해요. 작은 깃발을 만들고 그걸 하나씩 들고 나가자. 어떤 미친 놈이 쏘고 보자는 식으로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니. 지금 당장요. 그래. 하루 이틀 기다릴 필요없어. 떠나기에 이른 시간은 없어. 설마 여기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건 아니지. 당근. 그럼 가요. 여순이 재촉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식이군. 그럴 마음이 생겼을 때 해야죠. 죽을 때까지 나가지 말자고 다짐한 건 며칠 전이죠. 나도 몰라. 안전한 곳에서 숨어 살자고 했던 기억은. 전혀 기억이 안나. 한시바삐 벗어나자. 일단 일층으로 올라가자. 멀리서 보니 완전 폭삭 가라앉았어. 지하가 아니라 일층으로 오려는 사람도 없을 거야. 개도 안 오잖아. 그럼 일단 일층에 가서 깃발도 만들고. 다 챙겼어. 챙길게 어디 있어요. 촛불도 필요없고. 그냥 나가면 끝이군. 찍찍이들아 안녕. 너희들도 고생많았어. 다 내주지 못해서 미안. 여순이 작별인사를 했다.
막힌 벽돌을 열고 계단을 통해 일층에 오자 딴세상이 펼쳐졌다. 눈이 부셔. 나도 그랬어. 감았다 떴다 반복해봐. 실눈을 뜨고 가만히 봐. 눈에 충격을 최소화해. 여순은 말수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렇게 하고 있었다. 두 눈을 다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좋아요. 공기. 한 단계 올라왔을 뿐인데 이렇게 공기가 다르네요. 진작 여기서 살 걸 그랬어요. 화장실 갈때와 나올 때 사람 마음은 다른 거야. 그때는 일층이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했잖아. 허겁지겁 지하로 내려올 때를 생각해봐. 여기서 깃발을. 말수가 이 말을 하고 여순을 보았을 때 여순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자고 있군. 나도 그랬어. 나무 그늘에서 아마 잤을 거야. 자고 일어나면 나아 지겠지. 신선한 공기를 갑자기 마시고 폐가 놀란 거야. 이게 왠떡이냐고 허겁지겁 먹다 조금 체했을거야. 체증이 내리면 다 해결되는 거야. 안쓰럽지만 어떻게 해줄게 없어. 보챈다고 될 이리 아닌데 너무 서둘렀나. 그런 것도 아니고. 지하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말수는 여순이 손에 쥐고 있는 찢어진 광목 천을 집어 들었다. 흰옷이니 항복의 표시로 딱이지. 그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막대기로 쓸만 한 것을 찾았다. 지팡이가 눈에 띄었다. 신부님의 지팡이, 아니면 늙은 신자가 다음에 오면 가져가려고 놓고 간 지팡이. 일단 이것으로 하나는 됐고. 다른 하나는. 어디 보자. 어디 있을까. 지휘봉 같은 게 있으면 좋은 데. 하다 못해 각구목이라도. 아냐 각구목은 들기 힘들어. 종이장 조차 무거울 텐데. 그건 어림 없고. 하나는 밖에 나가 나뭇가지를 꺾어서 만들자.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눕고 싶네. 피곤해. 살인 고백을 한 게 어제 였나. 그제 였나. 도통 생각이 안나. 하지만 시원해. 다른 누구도 아닌 여순에게 했던 것이. 홀가분한 기분을 이제 알겠어. 나가려는 의지가 생긴 것도 다 그것 때문이야. 무게를 덜어낸 거야. 나를 짓눌렀던 살인의 무게를.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 가려고 했었는데. 아직도 갖고 있었더라면 난 아직도 지하에 있었을 거야. 여순이 나를 이해했고 용서했어. 그거면 다야. 더 필요없어. 앞으로 내 생애서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단정하지 말라고. 아니 단정할 거야. 그 어떤 경우라도 살인은 없다고. 대신 살릴 거야. 더 많은 사람을. 그는 팔뚝에 매달려 있는 군의관을 상징하는 십자를 보면서 거기에 손을 갖대 댔다. 풀 죽을 일은 없어. 골똘하게 그 문제를 생각할 이유도 사라진 거야. 그런데. 하나가 더 있네. 뭐지 이 기분. 말수가 눈을 떴다. 천장에서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다 보고 있다. 누가 그렸지. 저 그림. 처음 봐. 처음에 왔을 때도 보지 못했는데. 누워서 보니 보이네. 여순에게 자랑해야지. 눈뜨고 일어나면 제일 먼저 저기를 봐. 저기. 멋있지. 잘 그렸지. 저 그림.
내일은 함께 나가보자.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네가 볼지도 모르니. 다만 나가면 몸이 휘청이다가 쓰러질지 모른다. 눈을 바로 뜨지도 못하니 미리 연습을 해두는 게 좋아. 그래야 겠지. 여순은 말수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꿈결처럼 아득하게. 쥐도 없어. 여긴. 밤이면 모르지만 지금은 옷 속으로 들어와서 핥퀴고 물어뜯지 않아. 내가 지켜줄게. 그러니 조금 더 자. 더 자라고요. 잠이 달아났어요. 일층에 올라 온 건 아는데 깨어나 보니 누워 있었어요. 어떻게 된 거에요. 나도 몰라. 같이 올라왔고 내가 창밖에 정신이 없다가 뒤돌아 보니 자는 듯 쓰러져 있었어. 그래서 그렇게 내버려 둔 거야. 일어나지 마. 거기서 몸을 똑바로 누워. 이렇게 말수가 여순 옆에 가서 누웠다. 보여. 보이지. 뭐가요. 저기 천장에 그린 그림. 보이네요. 누가 그렸을까요. 누군가가 그렸겠지. 평화로운 모습이네요. 그런데 덜렁 거려요. 저게 언제 떨어져 내릴지 몰라요. 괜찮을 거야. 철근 보이지. 저것이 지탱하고 있어. 콘크리트를 걸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 나머지 그림이 궁금해요. 떨어져 나간 부분에 천사들이 있을 거야. 나팔을 불며 삶에 생기를 불어 넣겠지. 그러게요. 나팔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불수는 있고. 입에 대고 불면 되는 것 아닌가요. 천사도 부는데 나라고 못하겠어요. 못 말리는 군. 그나저나 밖은 어때요. 오전과 달라진 건 없어. 여순이 일어났다. 일어나는 반동을 이용해 허리를 구부리고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렇지. 유연하게 하면 도움이 될 거야. 몸을 풀고 나갈 걸 그랬어. 그랬다면 나도 휘청거리지 않았을텐데. 자, 기운을 내자. 한 잔 모금씩 먹자고. 그건 어때요. 묵직해. 좋은 걸로 가져 왔거든. 어떻게 알아요. 그냥. 연도를 보고. 오래된 걸로 골랐어. 여기를 떠나는데 기왕이면 제대로 된 것을 맛봐야지. 잘 골랐네요. 맛을 알겠어. 여러번 먹어 봤잖아요. 이건 가볍지가 않네요. 뒤끝도 좋구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안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것만도 감지덕지 하세요. 아까 먹은 무화과시가 목구멍 어딘가에 있을 거에요. 아니면 이빨새에 있던지. 그걸로 안주 삼으세요. 참 자린고비가 따로 없어. 씨로 안주를 삼으라고. 자, 한잔씩 했으니 기운이 나지. 더 먹으면 쓰러져요. 나중에요. 밖에 나가 뭔가 먹을 게 있으면 그걸 먹은 다음 먹어요. 그래야겠지. 촛불을 왜 들고 왔어요. 혹시 알아. 저녁에 켤 일이 있을지도. 안 되요. 여기 지하실이 아니에요. 일층이잖아요. 불은 멀리서도 보이고 틈으로 새어나갈 수 있어요. 그러니 어두워지면 암흙에 우릴 맡기는게 차라리 나아요. 그렇군. 통조림을 먹을까. 그만요. 그만. 여순이 통조림이라는 말에 손을 입게 대고 토할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깡통만 보면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손으로 그것을 따기 위해 마개 부분을 위로 들어 올릴 때면 벌써 아랫배에서 신호가 올 정도였다. 그만큼 역겨웠다. 생각해 보라. 며칠인지도 모를 날들을 모두 깡통 음식으로 배를 채웠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면 말수나 여순의 입장도 이해할 만하다. 전쟁통에 배부른 고민이 결코 아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니다. 말수는 어제보다 오늘 술을 더 먹는 것 같다. 그만 먹는다고 하면서도 꿀꺽꿀꺽 넘어가는 소리를 여순은 들었다. 그러나 여순은 말리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덩달아 한 모금 더 먹었다. 꿀걱하고 넘어갈 때는 맛있는 양념갈비가 넘어가는 것처럼 배부른 느낌이 들었다.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으나 상관없다. 취기밖에 더 오르겠는가. 술기운으로 푹 자고 싶은 생각도 있고 이참에 만사를 잊고 싶은 마음도 있다.
여보, 여순이 말수에게 기댔다. 이런 상태로 눈을 감고 잠이 들고 싶어요. 그럼 자. 그런데 너무 많이 자는 거 아냐. 일어난 게 방금 전이야. 삼십 분도 안됐다고. 그 사이 포도주 서너 모금 먹은 게 우리가 한 것의 전부야. 누워서 찢어진 그림도 봤잖아요. 말수가 고개를 들었다. 찢겨진 그림이 한쪽으로 더 기운 것 같았다. 잔해 사이로 하늘인지 구름인지가 지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기대 있으니 좋다. 천사의 나팔도 보고. 저기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도 있어. 어디요. 여순이 물었고 말수가 손가락질 했다. 정말 그렇네요. 제대로 그린 그림이었나 봐요. 화가가 봤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몇 날 며칠을 목이 빠져라 하면서 그렸는데 폭격으로 처참하게 부서졌으니. 누가 보상해 주죠. 누구에게 청구해야 할까. 미군 혹은 일본군. 다 틀렸어요. 하나님. 값아 줄까. 지어 주겠지요. 그림도 원상 복구해 놓고. 그러길 바래. 그런데 여순아, 이렇게 있으니 또 할 말이 생각났어. 여순이 얼굴을 들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어깨에 기댔다. 나 또 할 게 있다고. 또 있어. 뭐가. 뭐가 있어요. 여순이 잠꼬대 같은 소리로말했다. 무슨 말을 하든 듣는 척 하면서 잠에 빠지면 그의 말은 그대로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가 아닌가. 할 게 더 있어. 여순은 무시하고 잠에 다시 몸을 맡겼다. 그러기 전에 말수가 짦고 굵게 한 마디 했다. 살인 고백. 알았어요. 해봐요. 그 소리를 듣고 여순은 자던 잠을 다시 현실로 불러 들였다. 남은 게 있으면 다해요. 몇 사람이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죽인 사람이라면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고요. 당신은 신을 대신해 인간을 처단한 거에요. 그렇게 생각해. 아닐 수도 있어. 다 듣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아. 들으나 마나에요. 당신이 아무나 아무 죄없는 사람을 죽이겠어요. 난 당신 속에 있는 천사의 마음을 알아요. 천사가 화가 나면 어떤 줄 아세요. 불던 나팔로 무기를 만들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런 거에요. 그러니 당신은 천사의 일을 대신했어요. 이건 아버지 일이야. 우리 가족 전체의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하자면 이게 첫번째 인가. 모르겠어. 시점이 헷갈리네. 석양이 지고 있어요. 붉은 빛이 부서진 벽 사이로 들어와요. 이 순간이 가장 밝아요. 어둡기 전에 말해봐요. 그냥 넘어갈까. 말수가 머뭇거렸다. 여순은 가만히 있었다. 넘어가든 말하든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어깨에 기댄 머리가 자꾸 아래로 쏠렸다.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말수가 입을 열었다. 후회의 싹을 다 자를 거야. 성당을 나가면 난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해. 영원히. 그래 뜸 들이지 말고 시작하자. 그래요. 시작해요. 여순이 약간 고개를 들고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듯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눌린 자세를 펴니 한결 몸이 편해졌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 이야. 다 해. 나중에 또하기 없기. 알았어. 더는 없어. 내일도 나 있어. 하지 않은 게 남았단 말이야. 이런 말 없기. 알았어. 알았대도. 사람을 뭘로 보고. 나 말수야. 말수는 한 입가지고 두 말안해. 여순이 입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을 말수가 봤다면 귀여운 아이의 장난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살인을 이런 기분으로 풀 수 있구나. 이런 상태로 살인 이야기를 마구 할 수 있구나. 좋은 세상이야. 좋은 세상이라고. 그런 좋은 세상을 생각하면서 말수는 이번에는 그냥 살인이 아냐. 살인에 방화라면서 여순을 눈치를 살피는지 조금 망설였다. 그러지 마. 얼른 해. 당신이 했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아까 말했지. 천사대신 당신이 나선 것이라고. 선장을 해치기 한 해 전 이었다. 그러니까 말수의 살인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 왔다.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이 통영 촌구석에 그들이 온 이유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 입구에 오래전에 부서져 방치된 성황당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수리해 집으로 사용했다. 돈을 제법 줬다고 했다. 동네 부자가 자신의 토지에 있는 골칫거리를 처분할 기회를 얻자 싼값에 팔았다고 했다. 성황당을 팔다니 천벌을 받을 거야, 이런 수군 거림이 있었지만 천벌 같은 것은 없었다. 성황당을 집으로 쓰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새로 이사온 사람들은 곧 마을 유지 행세를 하면서 큰 소리를 쳤다. 알고보니 그 사람들은 부자의 오촌 뻘 되는 사람들이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다고 그럼 그렇지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곳에 올리가 있겠어,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게 떠들었다.
60대 부부와 30대 아들 둘 이렇게 4명은 그곳에 터를 잡았다. 처음 본 모습은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촌구석에 온 그들이 돈을 들고 왔을리도 없고 권세가 있을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곳보다 큰 도시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큰 소리를 쳤다. 촌 동네 사람들이라고 우습게 보고 자신들이 부산에 큰 집과 토지가 있고 거기 지서에서 순사 노릇을 하는 동생이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 돈과 권세가 있으니 내가 하는 방식에 대해 토를 달지 말라는 일종의 위협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올바른 품행을 논할 수 있을까. 천박해. 하는 짓이. 말수는 그들을 보고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오죽 먹고 살 게 없으면 이곳까지 굴러 왔을까. 굴러 왔으면 조용히 박힌 돌과 어울려 살 생각을 해야지 빼내려고 들어. 같잖아서 못보겠군.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이런 비난을 받는 줄을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든 크게 떠들어서 이득이 볼 게 없는지 눈을 뻘겋게 뜨고 덤벼들었다. 그들 삼부자는 제세상 만난듯 마을 활보했고 그런 꼴에 벨이 꼬였지만 대놓고 대들지 못했다. 원래 순박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작은 반농반어촌이 대개 그렇듯이 말수네 고향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런 것을 눈치챈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아마도 친척으로부터 이곳 생활과 사람들에 대해 미리 언질을 받은 모양이다. 다들 순해 빠졌어. 그러니 미리 제압하라. 뭐 이런 지령이라도 받은 듯이 뱉는 말은 거칠었다. 마을에 와서 동화하면서 살려는 의도가 없다는 듯이 걸리는 사람 누구나 시비를 걸었다. 마을 길을 마치 자신의 사유지 땅 인듯이 사용했고 길가에 어구를 함부로 늘어놓았다. 말수네가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집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자들은 어떤 날은 길을 아예 막기도 했다.
치우라고 해도 되레 남의 땅으로 다니니 돈을 내라고 소리쳤다. 늙은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아들도 가세해 이런 경우가 어디있느냐고 따지는 말수 아버지에게 욕설을 해댔다. 어쩌구니 없었다. 어린 자식에게 까지 욕설을 먹은 아버지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어떤 때는 눈에 초점을 잃었다. 하지만 어떤 대책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나오는 그들을 상대하기가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말수도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막연했으나 부당하게 당하고 있다는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왜놈들이 판치니 별 쓰레기 잡것들이 다 모여들어. 엄마는 한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말수가 퍽 줄어들었다. 이런 때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한 마디 해주면 좋으련만 순한 그들은 행여 자신들이 헤코지 당할까봐 거리를 두었고 집을 오가는데 큰 불편을 겪는 말수네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말수 아버지가 보기에 대대로 내려온 길을 자신의 땅이라고 하고 다니려면 돈을 내라고 길을 막는 행위는 온당치 않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다들 쉬쉬했다. 자신들은 그 집 앞을 지나갈 이유가 없으니 이것은 이사온 집과 말수네 두 집의 문제라고 했다. 참 이런 꼴을 다 보고 사네. 말수 아버지는 한탄했다. 말수는 자신 앞에서는 말을 아끼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때는 어쩌면 좋으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립을 풀어야 하지만 돈을 내고 길을 걸어다닐수는 없었다. 나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다니는 길이 아닌가. 하루는 말수 아버지와 이사온 부부와 대판 싸움이 붙었다. 논을 갈고 늦은 시각 서둘러 오는데 사람 하나 비켜 갈 공간도 남겨두지 않고 그물을 깔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놓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갈 길이 막혀버렸다. 지치고 힘든 몸인데 길 까지 막혀 있자 아버지도 화를 참지못했다.
말수 아버지는 소리쳤다. 이런 상황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늙은 부부가 나와 맞고함을 쳤다. 상소리도 했다. 그런 욕은 세상에 들어보지 못했다. 아주 저질이었고 천박했으나 그렇다고 맞대응하면서 욕지기로 받을 수는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아들들은 그 상황을 말리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구경하고 있었다. 어떻게 젊은 놈들이 저런 행세를 하지. 말수 아버지가 소리 한 번 지르고 역공에 기가 질려 있을 때 아들 하나가 나서서 내 땅 내 마음대로 하는데 영감이 왠 잔말이냐고 대들었다. 자식뻘 되는 놈한테 삿대질까지 당하자 말수 아버지도 뻣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길은 내가 젊었을 적에 품을 내서 낸 마을 길이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길이 있었다. 그러나 젊은 아들은 그런 말은 듣지도 않고 내 땅을 지나가려거든 돈을 내라고 아가구니를 썼다. 언성이 오가는 와중에 늙은 부인이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동네사람 다 들으라고 소리쳤다. 남편도 따라나섰는데 세상에 그런 욕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말수도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나왔다. 뱃놈 욕설이 걸쭉하긴 해도 자신도 생판 처음이었다. 이것들은 별종이다. 말로 싸울 수 없다. 주먹으로도 안 된다. 일단 아버지를 모시고 가자. 뒷짐을 지고 있는 다른 아들이 달려드니 네 명을 상대할 수 없다. 그 젊은 놈은 아버지의 멱살을 잡지는 않았으나 낫이나 어구를 들고 위협했다. 네 깟 놈 하나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다. 읍내 순사가 내 오촌 당숙이다라고 소리쳤다. 말수 아버지는 그날 몸저누웠다. 삼 일을 앓고 일어났을 때 말수 아버지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그는 헛소리를 했다.
말수를 불러 놓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말수야 네 말 신중하게 들어라. 네, 아버지. 네 엄마 말이다. 돈을 갖다 바친다. 누구에게요. 저 앞집 이사 온 놈 있지 않니. 그 놈들에게 준다. 어머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줘요. 그리고 있다 손 치더라도 그 원수 같은 놈들에게 줄 이유가 없잖아요. 말수는 펄쩍 뛰었다. 아니다,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낌새라는 것이 있다. 틀림없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요. 그 놈들한테 엄마가 돈을 주다니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 놈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런 놈은 돈은 커녕 상대도 안해요. 밖에서 달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준비하는 엄마가 내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고는 말을 뚝 그쳤다.그리고는 조용히 말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가 쌀독에서 쌀을 퍼서 장에다 내다 팔려나 보다. 엄마를 잘 살펴라. 말수는 어이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 말 이후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말수는 불현듯 의심이 들었다. 그럴리가 없지만 혹시 어머니가 그들에게 무슨 약점을 잡혀 돈을 뺏겼나 걱정했다. 그리고 다시 삼 일이 지났고 아침상을 물리고 어머니가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에 아버지가 다시 말수를 불렀다.
말수야, 너 아버지 말 진지하게 들어. 네 아버지. 네 엄마가 저놈들하고 친하게 지낸다. 무슨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 안다. 보셨어요.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아니 보지는 못했다. 보지 못한 것을 왜 상상을 해서 말을 하세요. 낌새가라는 것이 있다. 아버지는 이때까지 그런 낌새로 세상을 살아왔다. 지금 네 엄마가 어디 간줄 아니. 그 놈 집에 갔다. 그 집에서 자고 오려나 보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말수야, 너 가족이 뭔지 아니? 말수는 머뭇거렸다. 뜬금없이 가족이라니. 가족은 말이다. 어려울 때 같이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네 엄마는 아니다. 길을 막고 낫을 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말이세요, 아버지. 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것을 아버지가 봤어요. 보지는 않았다. 그럼 왜 지어내서 하세요. 지어낸 것 아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그놈들 나쁜 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네 엄마가 뭐라고 했는 줄 아니. 뭐라고 했는데요. 왜 그 사람들을 그렇게 미워해요, 하고 말하더라. 어처구니가 없더구나. 이 말을 하면서 아버지는 손을 조금 떨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조금 지나면 그 사람들도 잘못을 인정하고 막아 놓은 길을 풀겠지 하는 생각을 했겠지요. 생선 몇 토막 가져와서는 그동안 잘못을 사과하고 친하게 지내자고 할지 모르니 대립하는 대신 조금 기다려 보자, 이런 의미 아니겠어요. 아시잖아요. 어머니 마음 여린 거. 아버지가 행여 그 사람들과 싸우다 주재소 같은데 잡혀 갈까봐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랬겠지요.
너 태평한 소리를 하는구나. 아버지, 왜 그렇게 억지를 부리세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도 알잖아요. 그래 너도 네 엄마와 한패구나.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 놈들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다니. 그 이후 아버지는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몸도 예전만 못했다. 어떤 날은 가다 쓰러져서 한 참 만에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기도 했다. 밤에 자다 일어나서는 등긁개로 마루를 치면서 뱀이 달려든다고 소리쳤다. 말수야, 이번에는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망령 들렸나 보다. 뜨끔했다. 망령이라니. 그 전까지 말수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머니 말을 듣고는 정말 그렇구나 생각했다. 노망이 들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을 아버지가 하고 있다. 한 번은 마루에 앉아 새끼를 꼬고 있는데 아버지가 다가왔다. 그 날은 그냥 평범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설걸이를 끝내고 밭일을 나가기 위해 옷을 갈아 입으려고 방으로 들어간 직후였다.ㅜ네 어머니와 65살 까지 관계를 했다. 작년까지. 그런데 지금은 어림없다. 나도 이제 늙었다. 그래서 네 엄마가 젊은 놈한테. 나는 이제 썩은 생선이다. 말수는 귀를 의심했다. 관계를 했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자식에게 할 수 있나. 정말 제대로 망령이 들었구나. 이를 어째, 말수는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을 모두 새로 이사 온 사람들 때문으로 돌렸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이사 온지 세 달이 지나도 그들은 여전히 길을 막았고 지나는 아버지에게 욕을 멈추지 않았다.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급하게 늙었다. 몸이 쇠약해지자 머리도 따라 약해졌다. 어머니 눈치를 봤다. 그리고 말수와 있으면 예의 그 이야기를 했다. 네 엄마가 돈을 갖다 바친다. 내가 돌아와 보니 네 엄마가 없더라. 필시 그 놈 집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거다. 아버지. 넌 누구 편을 들기 어렵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라. 집 마저 다 빼앗기게 생겼다.
아버지가 망령 들렸다. 다 이사 온 놈 때문이다. 말수는 분노를 키웠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의심이 더해갔다. 돈을 갖다 바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잠시만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도 어디갔는지 찾아 나섰다. 한 번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 놈 집에 갔다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웃에게 호소했다. 내 아내가 바람났으니 어떻게하면 좋으냐고 상의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말수 아버지가 망령들렸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이 망령으로 확대됐다. 의처증은 무서운 것이었다. 한 번 의심이 가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증세는 심해졌다. 밤새 잠을 안 자고 어머니를 볶았다. 가족을 들먹이다가 들어주지 않으면 밤에 어디 갔다 왔느냐, 그놈 어디서 만나고 왔느냐. 나는 썩은 고기다. 한 탄을 하다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어느 날은 우는 소리가 말수가 자는 사랑방까지 들려왔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어머니도 이러다가는 큰 탈이 날 것만 같았다. 평생 일 만 하신 아버지. 말년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요. 아버지, 제가 불효자입니다.
뱃일을 하고 들어온 어느 날 말수가 마당에 도착하자 짐꾸러미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모자를 쓰고 말끔한 새옷으로 갈아입은 아버지는 급하게 대문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네 엄마와 갈라서러 간다. 말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네 엄마와는 살 수 없다. 이혼하기 전에 지서에 고소하러 가겠다. 아버지, 제발 정신 차리세요. 내가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데도. 아버지, 제발. 그래 너는 누구 편도 들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은 나와 네 엄마의 문제다. 말수는 겨우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주재소에 가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주재소에는 왜 가려고요? 네 엄마를 간통죄로 고소해야지. 말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미친짓 그만하세요. 말수는 버럭 화를 냈다. 그래, 내가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네 어미를 고발하겠니. 그 심정은 너는 모를 거다. 네 여자가 바람피는 것을 보고도 눈이 돌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니. 바보 천치 빼고는. 너도 내 심정이라면 아마 그럴걸. 말수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하다하다 나까지 끌어 들이는 구나. 난 아직 그럴 여자가 없어요. 그래서 그 기분을 몰라요 아버지. 이제 됐어요. 문을 박차고 나올 때 이를 가는 바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아버지보다도 이사온 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말수가 뒤돌아 아버지를 심하게 노려보았고 아버지는 그만 꼬리를 내리고는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나와서는 작은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뻔한 것이다. 동생에게 하소연 할 것이다. 바람난 아내와 헤어져야 하는 내 심정을 헤어려 달라고. 올라오면서는 조카네를 들렀다. 작은 아버지 집에서, 조카네 집에서 아버지는 말수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했다. 다를 놀랐다. 설마. 원수 놈과 좋게 지낼 수 있을까. 그게 말이 되나.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아버지의 의처증은 지치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다음날도 같은 말을 하자 작은아버지처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던 조카는 삼촌이 망령 들렸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그런 말 하려거든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 말라고 내몰듯이 했다. 그 날 이후로 마을에는 아버지가 노망에 들렸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
아버지는 앓아누웠다. 아버지가 며칠 모습이 보이자 않자 이사 온 사람들은 아예 길을 삽으로 뚝 잘랐다. 마치 무 자르듯이 잘라서 사람이 건너뛰어야 갈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땅이 자기네 땅이니 가려면 통행세를 내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인심이 어디 있느냐고 내가 사람이 좋아서 여태 공짜로 봐줬지 앞으로는 어림없다고 삿대질을 했다. 마을 사람가운데 측량을 해보라는 사람이 있었다. 대대로 그 땅이 서울로 떠난 아무개 땅일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측량은 돈이 드는 일이었다. 말수 네는 그런 돈도 없었고 돈을 내서 측량할 마음도 없었다. 대를 이어 백 년 넘게 사용해온 길이었다. 돈 보다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말수네가 무릎꿇고 돈을 내면 이사온 그 자들은 더 신이나서 또다른 흉계를 꾸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말수네가 싸워서 이겨주기를 바랐으나 어떤 도움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도 조카도 순해 빠져서 거칠게 나오는 그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지속됐다. 우격다짐을 이겨내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들이 이렇게 날뛰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주재소에 근무하는 순사 가운데 한 명이 정마로 그들과 친척인 것이고 다음은 인간이 워낙 안 되 먹었기 때문이다. 천하게 태어났다고들 했다. 특히 젊은 아들의 행태가 더 심했다. 자기 부모뻘인 아버지에게 쌍욕을 해댔다. 그러나 노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말수 앞에서는 자제했다. 자기 또래 보다는 어리지만 사리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말수 앞에서는 조심하는 눈치였다.
나에게는 주재소에 다니는 순사가 있다. 이것은 그 어떤 법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대들려면 대들어라. 그들은 말끝마다 주재소와 순사를 들먹였다.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다들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쉬쉬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마을의 못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유없이 말수네를 싫어하는 자는 이웃한 논을 가진 박가네 였다. 물꼬 문제로 가끔 다투기도 했다. 그는 말수네가 사라지거나 없어지면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바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꾸 이사온 사람을 충동질했다. 그 집은 볼 것 없어. 이 참에 걸어서 논과 집까지 뺏어 버려. 그들은 정말로 그럴 심산이었다. 말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마을이나 그런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끼리끼리 알아 본다고 못된 놈들은 서로에게 있는 악마의 마음을 공유했다. 허우대가 크고 말술을 하는 말수네 이웃논 사람은 싸움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들이 이사를 오자 길부터 끊으라고 종용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말수네와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원수진 일도 없었다. 나중에 사주한 자가 허우대인 것을 알았어도 말수 아버지는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천하에 죽일 놈이라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들은 작당을 하면서 말수 네를 고립시켰다. 사면초가가 따로 없었다. 보기 싫다고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었다. 바다를 가거나 일을 나가려면 반드시 그 집 앞 길을 통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끊긴 길을 보면서 말수는 울분을 삭였다. 누구도 이 상황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분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상황은 달라질 기미가 없었다. 막무가내는 여전히 막무가내 였고 허우대를 빼고는 모두 마주 치기를 꺼려했다. 말수네와 친하게 지내던 옆집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제는 내왕을 하지 않는다. 마음이야 아프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에 말수는 시무룩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상황은 고착되고 되돌릴 수 없다는데 있었다. 말수는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작은 아버지나 사촌형은 너무 착하고 나약해 기대할 것이 없었다. 이사온 사람들에게 눈짓은 커녕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일가친척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고 아버지는 정신이 나갔고 어머니는 그냥 저냥 살자고 했다. 그러니 말수의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그냥저냥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노망과 이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말수는 자신이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이 알게 됐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우대와 이사온 사람은 집앞 길거리에서 술판을 벌였다. 말수는 모른 척하고 길을 돌아서 집으로 왔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웃는 모습은 모욕적이었다. 그날 밤 말수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계획한 것을 실천하려고 두 주먹을 쥐었다. 당장 달려들어야 한다. 더는 참을 수가 없다. 기다리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엄마의 판단은 틀렸다. 그들은 이웃이 아니고 원수다. 연놈 네 명을 감쪽같이 해치울 방법은 간단했다. 불을 질러 형체도 없이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 이제 막 청년기를 벗어난 말수의 심장은 세게 뛰었다. 야심한 밤, 그는 가져온 석유병을 조심스럽게 기울여 문틈으로 흘려 넣었다. 석유가 나오면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전등불로 쓰는 비싼 석유가 마구 흘러갔다.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옆방에도 석유를 쏟아부었다. 불길이 번지면 먼저 깨어난 놈은 뒷문으로 달아날 것이다. 그걸 예상해 미리 나무 작대기를 문고리에 받쳐 놓았다. 괴어 놓은 작대기를 힘을 주어 땅에 조금 박았다. 이렇게 하면 열리기는 하겠지만 단번에 열 수는 없을 것이고 허둥대면서 나오면 그때 손도끼로 찍으면 된다.
석유 대병을 골고루 쏟아붓고 나서 말수는 긴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멈추고도 싶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그는 성냥을 그었다. 불길이 흘러간 석유를 따라 삽시간에 붙었다. 불은 빠른 속도로 방을 덮쳤고 술에 취한 남녀들은 뒷문으로 나오지 못했다. 도끼를 쓸 일이 없었다. 한 십여 분만에 초가지붕에 붙은 불은 서까래를 아래로 쏟아냈다. 그때까지 마을은 쥐죽은 듯했다. 아무도 불이 난 것을 알지 못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말수는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뺐다. 달은 높이 떴고 바람은 동풍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낭패다. 달빛에 드러난 몸을 감쪽같이 숨기기 위해 말수는 달렸다.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급했다. 애초 산속에 숨어 있을까 생각도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서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자신이 사라지면 의심을 살 것이다. 백구 럭키가 꼬리를 흔들었다. 뒤돌아보니 불 붙은 지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래 묵은 나무집이 삽시간에 불길을 먹었다. 그때쯤 돼서야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났다. 백구도 미친듯이 짖어대며 밖으로 나갔다.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죽어가는 자들이 지르는 소리인지 작은 일에도 잘 놀라는 마을 아낙이 내지르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날이 밝아왔다.
말수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가슴은 벌써 진정됐다.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 틈에 끼어서 무슨 일이냐는 듯이 호기심 어린 눈을 두리번거렸다. 불쌍한 그들을 위해 어른들처럼 혀를 끌끌찼다. 그날 오후 늦게 주재소에서 순사 두 명이 나왔다. 그들은 새까맣게 탄 네 구의 시체를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마을 사람들은 화재가 아닌 방화라면 의심을 살까봐 묻는 말에 서로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시체의 주인과 오촌 간인지 아닌지 모르는 사람들은 순사가 내뱉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조사하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알지 못했다. 형식적으로 조사를 마친 그들은 부엌에 있던 잔불로 인한 화재로 사건을 종결했다. 귀찮은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성황신이시여, 용서해주세요. 한꺼번에 네 명을 죽였습니다. 말수는 그렇게 용서를 비는 말을 했다. 그러나 용서는 죽은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살인자를 둔 부모에게 비는 용서였다.
그래, 난 죽은 자들을 위해 용서를 빌지 않았어. 말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잘했어.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은 살아서는 안 되거든. 그러니 걱정마, 여순의 손이 말수의 어깨에 닿았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이제라도 했으니 됐어. 속이 시원하지. 그래 정말 오래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야. 이럴 때를 위해 하느님이 필요한 거야. 이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찾겠어. 고해성사만 해도 그렇지. 십자가 매달린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잖아.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오라, 그 말 아니겠어. 왜 아냐, 내 말이 그 말이야. 이처럼 유쾌한 살인 고백이 또 있을까. 여순은 또 이렇게 말해서 말수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앞으론 절대 말아지 않기. 더는 없지. 뭐? 살인. 지겨워. 이젠 누구든 내 손으로는 죽이지 않을 거야. 심지어 군인이라도. 맹세는 하지마. 어쩔 수 없는 때가 오거든 반드시. 대신 이런 건 어때. 될 수 있으면 안 하기로. 할 때는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뭐, 이런 단서가 필요해. 그렇지. 정말 우리 여순은 대단해. 내가 모르는 것을 알잖아. 사람 마음 깊은 바닥까지 파고들어가니. 운명이 장난이 치면 그땐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알아, 알아 모시겠어. 여순아, 나 졸려. 응. 그래, 나도 졸려. 눈뜨면 여기를 뜨자. 그래. 약속. 두 사람은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이곳에선 더 할일이 없어. 맞아.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거든. 여순은 말수와 자신이 맞아 간다고 생각했다. 한 성질 하는 그에게 어떤 때는 소심함과 여린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그것이 여순의 마음에 들었다. 코 고를 소리가 들렸다. 찍찍 거리는 쥐소리는 약과였다. 세상 모르게 자는 말수가 여순은 부러워 잠을 쉬 이루지 못했다.
마음은 자려고 해도 자꾸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자신만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을 안고 산다고 했으나 말수는 그 이상이었다. 도대체 몇 명을 죽였지. 그 영혼을 내가 책임져야 해. 그가 때로는 성질이 더럽고 욕을 해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나. 그러나 여기서는 성질도 욕도 하지 않는다. 갑판위에서 보였던 거칠고 큰 소리내는 사내는 어디로 갔지. 야수의 마음도 시간과 장소 앞에서는 무뎌지기 마련이야. 좋아, 좋은 쪽으로 변하거든. 그것이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야. 말수는 변하고 있다. 살인 고백을 하기 전과 하고 난 후의 말수는 달랐다. 심지어 얼굴까지도 바뀌고 있다.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고 빠른 말은 또박또박 끊어져서 나왔다. 날카로운 살인자에서 눈매가 부드러운 청년으로 바뀌어 있었고 말투나 걷는 폼이나 말하려고 입을 열 때 내는 입술 모양도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 있었다. 그래, 잘 된 일이야. 여순은 자신도 말수처럼 그러기를 바랐다. 나도 그럴거야. 내 과거는 나의 잘못이 아냐. 나는 이겨낼 거야. 그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신 앞에서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는 다른 삶을 살기로 약속한 거잖아. 오늘의 고백을 통해 여순은 말수에게 더 기대고 싶었다. 그런 용기 있는 과거를 들추어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믿음이 갔다. 그녀는 몸을 돌려 말수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작게 내던 코 고는 소리가 멎었다. 쥐가 올라타서 자신을 깨우는 것으로 알았던지 말수는 여순의 손을 뚝 쳤다. 여순이 깜짝 놀라면서 나야, 나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팔까지 길게 뻗어 말수의 몸을 감싸 안았다. 말수는 가만히 있었다. 안 잔 거야. 잠이 안 와. 그래도 자야지. 자고 일어나서 가기로 했잖아. 때가 되면 자겠지. 잠은 네가 알아서 해. 네 잠까지 내가 대신 자 줄수는 없어. 그런데. 응. 그 허우대는 어떻게 됐어. 살고 있겠지 뭐.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저냥 살겠지 뭐.
이사온 사람을 충동질 했던 허우대는 순가가 가고 나자 죽은 자들을 강하게 성토했다. 새로운 길을 내줘도 모자랄 판에 대를 이어온 길을 끊은 행위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천벌 받아 죽었어. 그런 놈은 그래야 해. 안 그래요, 동네 분들. 내 말이 맞지요. 그래서 불타 죽었다고요. 하늘은 공평하다니까요. 그동안 말수네가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죽지만 않았으면 내가 나서서라도 죽였을지 몰라요. 세상에 그런 나쁜 놈은 살다살다 처음 본다니까요. 그가 이렇게 열을 올릴 때 마을 사람들은 맞장구를 치기도 했으나 대개 먼 산을 바라 보았다. 부처님, 하나님이 괜히 있나. 저런 놈들 태워 죽일라고 있지. 암, 암.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동조했다. 말수는 허탈했다. 쓴 웃음을 지었다. 너 같은 놈도 저렇게 될 거야. 그러나 내 손에는 아냐. 이제 말수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순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지 않았으나 그 일로 인해 자신에게 쌓아왔던 벽 같은 것이 무너졌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사에 놓인 벽이 무너진 거야. 말수는 자신이 여순과 한 곳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누가 자신의 영혼을 위로해 주나. 여순 말고는 누가 있지. 없다.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여순은 이제 완전히 내 사람이 된 거야. 그는 내 친 김에 여기서 하고 싶었다. 비록 쥐들이 하객이 되겠지만 성당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싶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신부님 단상을 부숴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어차피 축복해 줄 신부님이 없으니 그런 것은 상관없다.
여순아. 응. 나랑 결혼할래. 결혼. 뜬금없기는. 우린 이미 수도 없이 했잖아. 그런 거 말고. 정말로 하자고. 그래 십자가 앞에서. 여순은 결혼이라는 말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결혼, 내가 이 몸으로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내 몸으로 결혼을 한다고. 나는 깨끗하지 않아. 누구보다도 말수가 증인이야. 여순은 눈을 감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말수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구나. 이건 장난이 아냐.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고. 절망에 빠져서, 죽기 직전에 갑자기 사랑이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고비를 함께 넘기면서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지켜줬구나. 언젠가 해야할 말을 지금 하고 있구나.
울먹이는 소리로 여순은 당신만 좋다면 나는 언제든 오케이라고 화답했다. 고맙다. 여순아. 나 같은 놈의 청혼을 받아줘서. 고마운 건 나야. 후회할 일인지 생각할 기회를 줄게. 하루 이틀 생각한 거 아냐. 너를 간호원으로 빼고 함께 의사질 하고 군함을 타고 생사를 넘나들고 너에게 살인고백을 할 때 나는 이미 너와 결혼하겠다는 다짐을 골백번도 더 했어.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 아닌거지. 진심이라는 말이야. 반지는 있어. 결혼 반지. 여순이 코 맹맹이로 소리로 반지를 외쳤다. 다른 건 몰라도 반지가 필요해. 그래 결혼 반지는 있어야지. 양가 부모는 없어도. 정말 반지가 있는 거야. 난 그냥 해 본 소린데. 반지도 없이 청혼할까봐, 내가 그런 비열한 인간이기를 바란거야. 말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준비했다. 이런 날을 미리 대비했거든. 나의 신부는. 여순아, 내 신부 여순은 준비했어. 난 없어. 그럴 줄 알고 내가 둘 준비했다. 말도 안돼. 반지는 서로 주고 받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내 것은 보험을 들어둔 걸로 치고. 나중에 의미 있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그 날에 나에게 줘. 그럼 됐지. 여순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웃었다. 웃고 울고 그러면 호랑이가 장가간다. 가라지 뭐. 걔내도 결혼 적령기에 들었다면 해야지. 우리 상하이에 가서 병원 차리자. 병원장은 내가 하고 당신은 부원장하고. 돈 벌자. 우리 돈 벌어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반지를 그 때 다시 하자. 오케이.
말수가 여순의 손을 잡아끌었다. 약지를 찾아 손에 잡았다. 잡은 그 손에서 작은 쇠붙이가 여순의 왼손 약지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난감이 아니었다.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 어 꼭 맞어. 조금 큰가. 아니 맞아. 이 정도면 딱 맞아. 손가락은 어떻게 잰 것야. 그리고 어떻게 딱 맞게 만들었어. 자기 연금술사야. 하나씩만 질문해. 그보다 재료가 궁금하지. 엉. 이거 탄피로 만든거다. 탄피로 만들었다고. 정말 대단해 대단해. 당신 손 솜씨는 정말 대단해. 외과의사로 명성을 날릴거야. 당신이 못하면 세상 누구도 수술을 못하는 거지. 그만 추어 올려. 아니야. 당신은 최고야. 희미한 어둠 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입술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식 신랑, 신부가 된 것을 자축하듯이 서로의 입술을 상대의 입술에 가볍게 갖다 댔다. 우리 결혼했으니 여보, 당신으로 부르자. 그 전에도 했잖아. 간혹. 하지만 지금부터는 서로를 부를 때면 매번 그렇게 하자. 당근 이쥐. 그게 뭐야, 당신이라고 불러봐. 그래 당신. 좋아 여보. 여순은 오늘의 신부는 예뻐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말수가 그런 말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오늘은 결혼식 날 아닌가. 여순아, 아니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여순은 눈물을 흘렸다. 주책없이 또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조금씩 울다가 흐느끼다가 펑펑 울었다. 말수도 울었다. 둘은 껴안고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 오늘 다 울고 평생 울지 말자. 둘은 울다가 웃다가 소리 질렀다가 다시 울었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싶어. 그리고 여순을 소개해야지. 아버지의 못난 아들이 이렇게 잘난 색시를 데리고 왔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대답 대신 돼지우리 쪽으로 눈부터 돌리시겠지. 제일 크고 튼실한 놈으로 잡아서 잔치를 벌일 생각에 입은 저절로 옆으로 벌어지고 어머니는 한 쪽에 서서 옷고름을 들고 눈물을 찍고 계시고. 어무니, 제 색시 어때유. 네가 골랐으니 오죽하겠니. 그것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었다. 말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웃음도 그런 칭찬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상주도 없이 쓸쓸히 묻힌 아버지 모습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버지의 적수가 땅속으로 사라졌어도 아버지의 의처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타 죽은 사람의 이름 대신 허우대로 시선이 바뀐 것이다. 허우대가 죽은 자를 비난할 때 어머니의 눈이 한번 그쪽에서 멈추었고 이는 공격 빌미를 제공했다. 죽은 자를 욕하는 허우대의 기세에 거기 모인 마을 사람들이 전부 허우대로 눈이 기울었을 때 아버지도 허우대를 따라가는 어머니의 눈을 본 것이다.
어머니도 그런 것인데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는 눈이 돌아 간것은 허우대와 이전부터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들이밀었다. 말수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라. 네, 아버지. 네 엄마가 허우대와 만나고 있다.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어제는 아니라면서요. 꿈 꾼 것을 착각했다면서요. 어디서 봤건 간에 본 것은 본 것이다. 아버지,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어머니 생각을 하시고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라고 내가 닦달하고 있다. 제 가슴이 찢어져 봐야 상대 마음도 안다. 밭일을 나가도 아버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겨우 잠든 어머니를 깨워서는 어디 갔다 왔느냐고 다그쳤다. 신경쇠약에 빠진 엄마는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해. 아픈 곳을 찔리니 그렇지. 아버지의 추궁은 집요했고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 옛날의 이말네는 어디로 간 거야. 내가 아는 이말네는 이미 죽고 없어. 아버지는 비웃었고 의기양양했다. 꼬투리를 잡고는 자신의 말이 그럴듯했던지 옛날의 이말네가 죽고 없어. 하면서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했다. 말네는 어머니 이름이었다. 이말네, 말수는 조용히 어머니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마도 이번이 처음인가. 엄마 이름을 부른 것이. 말수는 하직 인사도 없이 새벽달을 보면서 집을 나섰다. 발걸음이 무거워 말수는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의처증이 마을에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늙은 어머니에 대한 모욕은 여기서 그쳐야 한다. 명예롭지 못한 일에 어머니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노망난 아버지가 추궁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끔 꿈에서 보인다. 꿈속에서 두 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 계시다면 부모님은 나를 반기실까. 그럼, 당연하지. 많이 늙으셨을거야. 돌아가셨을 거야. 그렇구나. 내가 떠나올 때 그럴 거라고 직감했어. 꿈속에서도 이승을 떠난 걸로 보여. 장인, 장모님은. 우습다. 장인 장모라니. 살아 계실거야. 당신을 보면 춤을 출거고. 우리 여순이 뱃놈과 시집 간다고. 조선 땅에서 제일 노를 잘 젓는 신랑을 데리고 왔다고 온 동네 자랑하고 다니시겠지. 그래, 고향에 가면 찾아뵙고 인사드리자. 여순은 자신 못지않은 가혹한 운명을 안고 사는 말수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가 더는 상처 받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 잠은 글렀다. 말수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여순은 일 층에서 대기했다. 말수가 떠나자 벽돌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고 여순은 반사된 빛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별 몇 개가 반짝였다. 내가 별을 보고 있어. 여순은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눈을 떴다 감았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니 주변이 눈에 익었다. 밤이 아냐, 낮이구나. 내가 본 것은 별이 아니라 깨진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구나. 밤으로 알고 있던 것이 낮이야. 알고 있는 것과 아는 것은 달라. 정말로. 낮이라니. 그래 잘 된 거야. 낮이라면 밤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으니.
말수가 신호를 보냈다. 아니 소리를 질렀다. 나와. 나와 봐. 밖으로 나온 여순은 말수처럼 부서진 성당 벽에 몸을 기댔다. 아찔한 현기증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자신도 그렇고 다른 물체도 움직임은 없었다. 사방도 고요해 살아 있는 것은 이 섬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굳이 떠날 이유없지. 이곳이 전부 우리집이고 마당이니. 여순은 그 틈에도 우리집을 떠올렸다. 예쁜 집을 지어야지. 기왕이면 이층이면 더 좋고. 여순은 결혼이라는 것이 현실화 되자 나 아닌 우리를 먼저 찾았다. 그나저나 쥐들은 어디로 갔을까. 다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군인들과 트럭과 쏟아지던 폭탄들은. 어디에 꼭꼭 숨었나. 보이던 것과 듣던 것이 사라지자 여순은 이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안심한 그들은 일단 걷기로 했다. 말수는 처음 길과는 달리 애초 정한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을 걸어갈때 그들은 손을 잡고 걸었다. 잡은 손을 가만히 두지 않고 흔들었다. 말수의 다른 손에는 여순의 속곳으로 만든 흰 천이 지팡이 끝에 매달려 있었다. 기이한 장면이군. 영화에 넣어도 되겠어. 기이할 거야. 여순은 그렇거나 말거나 잡을 손을 흔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곧 힘이 빠졌다. 여순은 걷는 게 벅찼다. 오래 걷지 않은 다리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듯이 간혹 두 사람의 무릎을 꺾어 넘어질 뻔 하게 만들었다. 패잔병 보다 더한 몰골로 더 힘이 없는 발걸음을 힘겹게 떼면서도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웨딩 마치를 울렸다.
잠깐 쉬자. 단서가 있을 지도 몰라. 가만. 저기 뭐가 보이나. 여순이 이마에 손을 대고 두리번거렸다. 부서진 탱크들, 뼈만 남은 시체들, 이제 막 부패를 시작하려는지 부풀어 오른 배를 하늘로 내밀고 있는 험상궂은 얼굴들. 그것을 먹다 그 옆에서 죽어 같비뼈를 드러낸 검은 개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었다. 조금 더 가보자. 얼마를 더 가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운동장이었다. 주변에 널려 있는 부서진 잔해는 학교 건물이었다.
운동장 한쪽에는 우물도 있었다. 먹는 물인지 확인하기 위해 말수가 힘겹게 두레박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물은 깨끗했다. 우물에 파란 하늘이 비쳐 들었다. 물 한 모금씩 마시고 둘은 벤치에 앉았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걸린 구름은 여유가 있었다. 산은 작고 아담했고 시야는 멀리 까지 퍼져 나갔다. 둘이 앉아서 보는 풍경은 좋았다. 이 좋은 곳에서 살면 어떨까. 군인들이 없고 세상이 평온하다면 그럴 수도 있다. 잔해를 치우는 일은 시간이 걸려도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 둘만의 천국을 세우자. 아직 우리는 젊다. 스스로 생각해서도 그렇고 남이 봐서도 그렇다. 제발 이 섬에 인간의 발자취가 사라졌으면. 동물도 없었으면. 아니, 개 한 두마리 혹은 고양이 두 세마리 정도는 괜찮다. 여순이 꿈꾸는 모습으로 하늘을 봤다.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래 새들은 까마귀라도 상관없어. 그 위에는 독수리 여러 마리가 원을 그리면서 어디로 내려야 할지, 먹이가 있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래 독수리도 좋아. 새들은 얼마든지 있어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말수가 어깨를 밀착해 왔다. 여순은 자신의 본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놀라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뭐가 있어요. 뭐,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제 딴에는 제법 재치있는 답변이라고 여순이 말했다. 의자에 앉아서 푸른 하늘을 보니 사라졌던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당신도 그런 말을 해보라는 뽐내는 듯한 태도로 여순이 말수를 뻔히 쳐다봤다. 그게 아냐. 저기, 저기 봐. 말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여순이 자신이 가리키는 곳을 보는 것을 확인하고 어떤 대답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여순은 건물의 위쪽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다. 희미하지만 그것은 식별할만 했다. 성조기였다. 미국의 깃발이 펄럭인다. 본능적으로 여순은 말수의 복장을 확인했다. 일본 군복도 미군복도 아니다. 민간인 복장에 팔뚝에는 십자가를 단 민간 의사차림이었다. 언제 저런 것 챙겼지. 정말 못말려 하면서도 여순은 말수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했다. 여순도 자신을 둘러 봤다. 왼쪽 팔에 단 붉은 열십자가 자신도 의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 이게 언제 달려 있었지. 그녀는 놀랐다. 말수는 자신뿐만 아니라 여순의 옷에도 의사 완장을 달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린 의사야. 그게 중요해. 전쟁터의 피난민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어도 의사는 의사야. 이런 복장은 아군은 물론 적에게도 불쌍한 존재로 인식될 것이 틀림없었다. 의사 부부. 어떤 식의 시나리오를 써야 할까. 그들은 입을 맞추지 않아도 어떻게 처신할지 알고 있었다. 미군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투른 영어와 능숙한 일본어로 그들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그대로 말할 참이었다. 태생은 조선인이나 일본군에 의사로 끌려 왔고 사이판에 상륙해 의약품을 챙겨 다시 본대로 돌아가려다 실패하고 성당 지하실에서 피신해 있었다고. 생각하고 나니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거짓이 없는 진실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한 사이요. 언제 결혼. 어젠가 그젠가. 아니 오늘인가. 여하튼 아직 허니문 기간이오. 틀린 말 하나도 없다. 진실을 말하자. 그것이 소중한 목숨을 지키는 지름길이었다. 이들은 살고자 하는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해 안전하게 미군들과 접촉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는데 그것은 쉽게 풀렸다.
저쪽에서 두 명의 미군이 걸어오고 있었다. 옆구리에 서류철을 끼고 한 손에는 파이프 담배를 손에 쥔 이가 옆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말하는 그가 상관인듯 싶었는데 듣는 사람이 연신 그쪽을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사람과 한마디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바싹 붙어서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의 모습은 폐허가 된 전쟁터의 모습과 기묘하게 어울렀다. 그들은 폐교를 사무실로 두고 막 회의를 끝낸 부대장과 참모였다. 그들을 호위하는 병사는 없었다. 옆구리에 각각 권총을 차고 있었으나 경계의 눈빛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안전지대 안에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점심을 방금 끝낸 그들은 배부름이 가져오는 포만감 때문에 걷는데 여유가 있었다. 그들이 여순쪽으로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등나무 아래 벤치가 목적지인 듯 싶었다.
그들은 먹은 음식을 삭이면서 휴식을 원했다. 여순이 말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말수는 그때까지도 운동장 쪽이 아닌 그보다 더 위쪽에서 희미하게 나부끼는 성조기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미군의 승리가 가져온 전황과 자신의 운명을 대비시켜 놓으면서 유리한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일본의 패망은 그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말수는 담담한 심정으로 가볍게 펄럭이는 깃발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것이다. 말수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자 여순은 이번에는 더 세게 같은 자리를 찔렀다. 말수가 대답대신 정신을 차린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도 연병장을 가로 질러 오는 두 명의 미군이 자신들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말수는 본능적으로 움찔했으나 곧 총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런 일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들이 먼저 눈치채고 놀라기 전에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써, 핼로우 하면서 한 손에는 지팡이에 달린 하얀 깃발을 들고 나머지 손은 여순의 손을 잡고 두 손을 하늘로 올렸다. 위험한 상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적절한 행동이었다. 해칠 의사는 커녕 항복하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이런 식의 행동은 미군을 당황하게 했으나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닥칠 수 있는 위험은 어느 정도 제거됐다.
그러나 그들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권총을 빼고 천천히 자신들 쪽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손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고함도 이어졌다. 그들이 겨눈 총구 쪽에 바짝 다가섰을 때 미군들은 얼마 남지 않은 민간인이 위수 지역을 이탈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위장한 적의 잔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처음과는 달리 몹시 흥분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양쪽으로 갈라놓고 말수의 상의를 벗게 했다. 말수가 그들의 말을 따르기 위해 옷으로 손을 가져가자 팔뚝에 걸린 병원을 상징하는 십자가 문양이 드러났다. 미군은 눈을 여순으로 돌리자 여순도 역시 같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닥터. 예스, 유아러 닥터 투. 예스 커플 닥터. 말수가 흥분하듯이 외쳤다. 그런 짧은 영어가 이어졌고 그들 중 부관이 다가와 두 사람을 수색했다. 무기가 없음을 거듭 점검한 그들은 두 사람을 자신들이 데리고 온 사무실로 앞장 세웠다. 사무실 안의 의자에 앉아서도 말수와 여순은 머리 위의 손을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의사지 병사가 아니며 누구를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서 너 명의 미군이 그들 주위로 몰려 들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한 마디씩 뭐라고 지껄이더니 이내 부대장이 그만하라는 주의에 일시에 입을 닫았다. 그가 두 사람을 보면서 팔을 내려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말수는 비로소 고통을 끝내고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여순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으나 바뀌고 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었다. 심문에 앞서 그들은 음식과 시원한 주스를 내왔다. 적으로서가 아니라 우군으로 두 사람을 대하겠다는 태도였다. 피해를 주기보다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인식한 때문이었다.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은 결정적인 패배를 했다. 전쟁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싸움에 진 일본은 위기를 돌파할 힘을 잃었다. 두 달 정도의 전투에서 일본군 중 살아 있는 자들은 거의 다 죽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포로가 됐다. 부상병들의 극소수는 마지못해 호의를 베풀고 싶은 미군에 의해 후방으로 옮겨졌고 나머지는 다수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이곳에서 사망했다.미군은 처음에는 두 사람을 같이 심문했으나 나중에는 따로 했고 그 다음에는 또 같이 했다. 진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두 어 시간의 심문이 끝나고 미군이 내린 결론은 이들은 부부 의사로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 사람이었다. 이들이 원하는 행선지는 상해였고 종국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 중이고 민간인 의사가 전선을 마음대로 이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들은 임시 병원에서 다른 의사들과 이들을 같이 생활하게 했다. 보름 후 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수송기가 베이징으로 떠나는데 같이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말수는 또한 번 운명을 생각했다. 여순은 자신들에게 행운이 왔음을 직감했다. 베이징에서 어떤 임무가 주어지고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몰라도 일단 섬에서 탈출한다는 오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은 조선과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걸어서라도 갈 수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심리적으로 고향과 하나로 만들었다. 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오. 심문이 끝나자마자 말수가 한 말이었다. 돌 볼 환자는 어디에 있나요. 여순도 말수와 같은 말을 했다. 미군들은 이들 부부에게서 진정한 의사의 정신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들에게 잡힌 포로의 위치라는 것도 잊고 부상병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것이 미군의 신뢰를 얻었다. 말수는 빼어난 수술 실력을 과시했다. 여순도 지지 않았다. 말이 아닌 행동에서도 그들은 환자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베이징행 수송기에 올라타기 불과 한 시간 전까지도 말수와 여순은 손에 피를 묻혔다. 태어난 이유가 환자를 돌보는 것이라는 듯 그들은 한시도 피비린내와 비명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미군들은 식민지 조선태생 의사의 헌신에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베이징행은 우연히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말수가 제일 처음 맞은 환자는 영관급 최고위 미군 장교였다. 부러진 미군 대령의 다리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은 썩어들어가고 뼈까지 균이 침투했다. 유능한 지휘관을 살려내려는 군의관들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말수가 등장했다. 대령은 운이 좋았다. 담당 군의관이 응급환자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대령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다리를 살핀 그는 돌아온 군의관에게 한시바삐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자칫 잘못해서 고급장교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질 까 두려워 망설이고 있었다. 늦으면 잘라야 한다. 유노. 군의관은 망설였다. 알았어. 수술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한다. 균이 뼈까지 침투했어. 살을 째고 긁어 내야 해. 그리고 항생제. 항생제 있지. 그럼 됐어. 어떻게 할래.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죽으면 내 책임은 아니오. 너에게 책임을 물을 사람 없어. 책임이라니. 이런 상태의 환자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이 나오니. 그러고도 네가 의사야. 이런 환자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말수는 대령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읽었다. 군의관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자신이 못하는 일을 한다고 하니 맡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능숙한 솜씨로 말수가 상처를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심각했다. 수술 부위가 썩어가고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군의관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햇병아리. 말수는 이렇게 조선말로 지껄이면서 그를 제켜 놓고 여순을 보조로 삼아 수술을 시작했다. 여순은 부어오른 살의 이곳저곳에 마취제가 들어간 주사기를 여러차례 찔러 넣었다. 이제 째고 수술하는 것은 말수에게 맡겨야 한다. 조금만 참아요. 그래요. 잘 하고 있어요. 여순이 장교를 어린애 달래듯이 달랬다. 자, 칼. 여기 있어요. 말수가 상처 부위를 절개했다. 그것은 그의 전문이었기에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뼈가 드러났다. 뼈까지 균이 침투했다. 말수는 검게 변하기 시작한 뼈에 붙은 곰팡이를 힘차게 북북 긁어 냈다. 생각보다 심했다. 죽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한가지 희망은 강한 항생제에 의지하는 길 뿐이다.
다행히 이 무렵 좋은 항생제가 미국 본토에서 날아왔다. 이제는 항생제의 시간이다. 그래 항생제가 너를 살릴 수 있을 거야. 대령은 까무라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도 다리를 절개할 정도의 큰 수술 앞에서는 무력했다. 대령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수술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는 수술전에 최소한의 마취를 주문했다. 전신 마취는 사절했다. 아무리 아파도 견딜 수 있다고 최소한의 마취제만을 요구했다. 마취는 회복을 더디게 할 뿐만 아니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말짱한 정신으로 이겨내고 전선에 다시 투입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했다. 처음에는 다리 부분도 거절했다. 그러던 그가 막상 수술이 시작되자 정신을 잃은 것이다. 마취가 필요해요. 전투는 당신이 명령하지만 수술은 내가 명령해요. 여순이 당차게 나왔다. 정신을 잃으면 회복이 더뎌요. 대령은 진정한 전사였다. 통증이 심하다는 말보다 회복이 느리다는 말에 대령은 자신이 조금전에 한 말을 자신이 스스로 꺾었다. 말수와 여순이 이마의 땀을 닦고 보니 두 시간이 넘게 걸린 수술이었다. 체력은 소진됐다. 어떻게 수술했더라. 상처를 꽤메고 장갑을 벗었는가 싶었는데 말수와 여순은 야간 침대에서 고꾸라 지듯이 잠에 빠졌다. 그날 밤 대령은 밤새 앓았다. 총알이 뚫고 나가 피가 솟구칠 때보다도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고함에도 눈을 비비며 일어난 말수는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누구라도 너 처럼 고함을 칠거야. 대령은 그 말에 위안을 얻은 듯 했다.
회복기에 접어들자 대령은 총상을 입은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현장에서 3초만 일찍 떠났어도 총알을 피할 수 있었어. 그는 자책했다. 자신이 그러지 못한 것을 적의 탓이 아닌 자신의 문제로 돌렸다. 그는 항생제 옆에 걸린 권총집을 잡더니 권총을 꺼내서 자신을 쏜 자들을 쏘려는 시늉을 해보였다. 어이 없는 짓이었다. 수술한 사람이라면 취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대령아니라 장군이라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대령은 분을 참지 못하고 권총 든 손을 위로 치켜 들면서 퍽 큐우 퍽 큐우 하고 외쳤다.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다. 손에서 권총은 떨어져 나갔다. 부관이 그러는 대령을 저지했다. 마지 못해 권총을 맡긴 대령은 대신 아픈 다리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필 다리야, 왜냐고. 차라리 내 몸통의 다른 곳을 뚫었으면 나았을 것을. 머리라도 좋았어. 다리만 아니라면. 진정해라, 마이클. 말수가 서툰 영어로 그를 저지했다. 그러고보니 성당에서의 생활이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그곳에서 말수는 신부님이 놓고 간 기초 영어회화 공부를 했다. 여순과 둘이서 일어로 번역한 영어책으로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이럴 때 써먹는다. 마이클.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야. 말투가 그게 뭐니. 너를 살려 줬더니 생명의 은인에게 이거 너무 하는군. 여순이 말수 편을 들었다. 대령은 여순에게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
진정해, 마이클. 여순이 환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너는 이겨낼 수 있어. 지르고 싶으면 질러. 겨우 그 정도야. 더 크게 질러봐. 그런다고 용감한 군인이 어디 가겠어. 죽음으로 가득찬 마이클의 잿빛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돌았다. 대령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 삼 일째 되는 날부터 다리의 부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균이 잡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령이 말했다. 통증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어. 내가 그랬지. 어쩌면 살 수 있다고. 그 어쩌면이 너에게 온 거야. 그것은 행운이야. 네가 이긴거야. 행운을 잡은 거지. 아냐, 너희들이 이겼어. 니들이 아니었으면 난 죽었어. 부부에게 행운을. 말수는 여순을 쳐다봤다. 서로는 서로에게 우리는 이겼다고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대령은 한 동안 웃음띤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 너희들. 부탁한다면 들어줄 수 있니. 나에게 하면 가능하다. 아직도 살아 있는 나에 대한 보답을 너희에게 하고 싶다. 우선 우리 몸을 돌보고 싶다. 너도 알다시피 우린 끌려온 존재다. 원래의 상태로 우리 몸을 돌리고 싶다. 무슨 말이지. 처음으로 가고 싶다고. 맞다, 베이징. 그곳이 중간 기착지다. 종국에는 조선 땅 통영이 목표라고 했지. 그런 다음 보령에 갈 거야. 거기가 내 친정이거든. 여순이 말했다. 친정이라고. 거기에 간다고. 여순은 그 말을 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조선말 못 알아듣는 마이클 앞이라고 막 말을 했다. 아냐, 내 고향은 아냐. 난 거기를 잃은지 오래야. 마이클은 통영이나 보령이라는 말은 알아 듣지 못했다. 베이징은 왜. 그래야 상하이로 갈 것이고 거기서 병원을 차릴 생각이다. 고향은. 그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다. 가까운 미래는 병원을 여는 거야. 너처럼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게 우리 직업이잖아.
전시에 개업이라고. 왜, 그러면 안돼. 거기라면 다치거나 아픈 조선인을 치료할 수 있다. 마이클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말수는 만주와 상해에서 싸우다 다치는 독립군들을 치료하고 싶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거기로 이주해온 조선인이 많고 그들을 치료하는 것이 자신이 지은 죄업을 씻는 길이라고 믿었다. 옆에선 여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이름도 지었다고 했다. 상하이 부부병원. 악마처럼 괴성을 질러대 정말로 입이 악마처럼 비뚤어진 마이클이 희미하게 웃었다.이름 좋다. 전쟁이 끝나면 찾아갈게. 의사를 많이 봐 왔지만 그는 이들 부부에서 가짜 의사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너희들을 보내줄게. 내가 할 수 있어. 말수는 목구멍을 통해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마이클의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의심스러웠으나 일단 믿기로 했다. 다음 날 마이클은 더 기운차 있었다. 원래의 그로 거의 돌아왔다. 그는 비명 대신 돌격 앞으로를 외칠 준비 태세를 완료했다. 대령은 그들을 수송기에 태우는데 사인을 했다. 밤새 비가 내렸다. 아침에 그들은 수송기에 탈 일단의 부상당한 미군들과 함께 트럭에 올랐다. 도로는 진흙투성이였다. 임시 비행장까지 가는데 바퀴가 빠져 고생을 했다. 멈춘 곳이 바로 성당 앞이었다. 성당의 지붕은 아예 무너져 내렸다. 그곳이 성당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삐죽이 나온 십자가가 전부였다. 더 부서졌어. 아예 가라 앉았네. 저곳에 계속 있었다면 우린 지금 여기에 있지 못했을 거야. 차에서 내려 뒤에서 트럭을 밀고 다시 제자리로 온 말수가 여순에게 말했다. 지면과 붙었어. 빠져나올 수 없었을 거야. 여순은 그 말을 들으면서 시선은 폭삭 가라앉은 성당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겨우 버티고 있는 천장이 밤새 내린 폭우에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말수는 운명을 생각했고 여순은 베이징에 내리면 제일 먼저 국수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우리 여순이 시집가는 날에 국수를 삶아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돼지도 잡겠지. 그래 아버지는 그럴거야. 돼지를 잡아서 술파티를 열거야. 그런 생각이 왜 지금 났는지 모르겠다. 멸칫국물로 우려낸 국수를 먹고 나면 무언가 할 용기가 생길 것이다. 돼지 국밥을 먹으면 온전한 나로 돌아올 용기를 얻을 것이다. 흙과 시체가 빗물에 반반씩 섞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데도 여순은 먹을 것을 생각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국수를 먹을 운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여순은 확신했다. 뼈 가득 붙은 검은 곰팡이를 긁어 낼 때 옆에서 느꼈던 역겨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