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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8 15:11 (일)
광통교에서 휴의는 검문을 받았으나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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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교에서 휴의는 검문을 받았으나 빠져 나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7.2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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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패색의 짙은 그림자를 그들도 느꼈을까. 일제는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었다. 상해의 독립군이 조선으로 들어온다는 첩보를 입수한 후부터는 더 그랬다. 미군 특수전단의 훈련을 받은 수백 명 규모가 한꺼번에 경성에 들어와 시가전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일선 순사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그 소문은 진위와 상관없이 흰옷 입은 사람들 사이로 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일제는 그것을 경계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일제의 조선 식민지 정책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자신해서 식민지를 원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강탈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는 일본을 전범국가고 볼 지 모른다.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 독립군이 조선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그런데 벌써 경성에 잡입했다는 보고도 올라오고 있다. 언제 종로통에서 총격전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독립군이 갖고 있는 무기는 자신들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가공할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 일당백을 한다는 무시무시한 훈련을 견뎌낸 인간병기라고도 했다. 미군에게 지독한 훈련을 받았대. 얼마나 지독한지 훈련 중에 훈련생의 절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는군. 그러니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 실체가 있는 이야기야. 아니면 그런 수군거림이 돌겠어. 너도 들었잖아. 듣기는 했지만. 순사들이 두 셋이 모이면 이런 말로 서로의 불안을 확인했다. 유령같은 놈들이라 총알도 피한다고 하네. 말도 안돼. 독립군이 무슨 귀신들로 만들어진 집단도 아니고. 믿지 말자. 그런 미신은.  하지만 이런 미신 같은 말들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독립군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 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상의 이순신이 육지에서 독립군으로 다시 태어났어. 종로서 순사들은 급기야 이순신까지 소환했다. 일제는 그만큼 코너에 몰려 있었고 들려오는 태평양 전황은 이런 분위기를 부채질 했다. 대일본 제국이 질 수 있다는 불씨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점차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전연승이라더니 순 거짓말이었어. 이기는 것이 지는 것으로 바뀌고 있었으나 일제 수뇌부는 그것을 알리지 안았다. 끔찍해. 그런 공기가 담배연기처럼 스멀스멀 경성 시내를 돌고 있었다. 그러기 전에 바람을 잠재워야 해. 사전에 처단하자. 종로서는 하루 일과를 이런 구호로 시작할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니 만주로 갔던 완용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휴의 체포를 이유로 갔는데 그 이유가 사라졌으니 남을 사유가 사라진 것이다. 휴의가 만주를 떠나 경성으로 잠입했다. 완용은 토벌대장에게 전화 한 통화로 작별을 고했다. 토벌대장은 직접 찾아오지 않고 그렇게 한 완용의 태도가 못마땅했으나 잘 가시오라고 말했다. 

완용이 돌아오고 나서 경성 시내는 더 살벌해졌다. 거리의 아무나 붙잡아 검문하고 끌고가고 매타작을 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문화정치라는 유화책을 말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조센징은 말로 해서 안돼. 이것이 그것이 내세우는 무단통치의 이념이었다. 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해야 한다. 경성의 공기는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많았고 먹고 살기 위해 나갈 때는 각오해야 했다. 재수 없으면 끌려간다. 공포심으로 지배하겠다는 전략은 급하고 막장에나 쓰는 방법이었으나 먹혀들갔다. 매 앞에 장사없다고 굳이 매를 벌려고 밖으로 나돌지 않았고 막걸리를 먹다가 함부로 떠들지 않았다.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휴의만이 아니었다. 고비를 넘기자. 소나기를 피하자. 다들 이런마음이었다. 휴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으나 지금 휴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이거 큰 일 인걸. 나에게도 책임이 돌아올 지 몰라. 완용은 시내를 순찰하면서 그런 걱정에 휩쌓였다. 휴의 이놈, 내 손으로 기어코 잡는다. 설마 그 놈이 독립군 본진을 끌고 온 것은 아니겠지. 일차 타격 거점으로 종로서를 찍은 건 아니겠지. 어쨌든 잡아들이자. 그러면 뭔가 실마리리가 풀릴 거야. 그런데 중요한 정보는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다. 정보가 있어야지. 정보. 완용은 허리춤에서 철거덕 거리는 일본도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오른손으로 잡았다. 거추장 스러웠다. 그러나 일본도를 차면 왠지 모르게 권총보다 더 든든했다. 일어나자 마자 완용은 그 일본도를 갈았다. 시골에서 낫을 갈던 실력으로 그는 매일 칼을 점검했고 오늘도 일과를 그 일고 시작했다. 잡혀봐라. 날선 이 검으로 마구 살점을 찌르리라. 그러기 위해 지나 가는 행인은 아무나 잡아다 문초했고 아무 집이나 들어가 수색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게 하고 때로는 포상을 내걸었다. 수상한 자를 신고하거나 잡는 데 공을 세우면 쌀가마를 던져 주거나 누런 봉투에 싼 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우리편은 살고 적은 죽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자. 이것이 그 즈음 완용이 내거는 구호였다. 그런 상황에서 휴의는 말발굽이 바로 코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태연했다. 아니 태연을 가장했다. 그들의 습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대처하는 방법도 상세하게 숙지 했지만 어찌될지는 운에 맡겨야 한다. 하나가 꼬이면 연속해서 문제가 생긴다. 처음부터 제대로 나가야지. 다른 하나로 풀고 다른 하나가 들어오면 또 다른 무기로 쳐내는 것은 하수가 하는 짓이야. 말 발굽 소리가 멈췄다. 히힝하는 말 울음 소리가 그것을 대신했다. 휴의를 그들이 불러 세우지 않더라고 자신이 그들이 지목대상인 것을 알았다. 그는 멈춰섰다. 그러나 일경은 어이 거기 너, 서. 하고 이미 서 있는 휴의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나, 나 말이오. 그래, 네놈말고 여기 또 누가 있느냐. 휴의는 두리번 거렸으나 근처를 얼씬거리던 사람들은 어느 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정말로 자신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말 탄 순사는 앳되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험상궂은 얼굴로 자신의 나이를 속이려고 했다. 네 놈 말이야. 그 말에는 자신이 하는 일을 당연히 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무언가 새로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에 묻어 있었다.

나를 잡겠다고. 너희 조무래기들이. 그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휴의에게 신분증을 요구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이것은 휴의에게 가당찮은 질문이었다. 그는 맞받았다. 너희들 소속은 어디고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로 가는지 되물었다. 그리고는 임마. 네 소속부터 말해야 하는 게 정석 아니야. 네 놈들이 말을 탔으면 탔지 네 놈이 순사인지 독립군 나부랭이로 위장한지 내가 어떻게 아니. 휴의가 기세좋게 반말로 치고 나왔다. 대놓고 하는 하대에 말탄 순사들이 말에서 내렸다. 이 제복과 이 일본도를 보고도 모르시오. 기가 조금 질린 그들은 반말에서 존대로 말을 바꾸었으나 여전히 등등한 기세는 풀지 않았다. 이놈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내게 대드느냐. 휴의가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깜짝 놀랄 만한 크기로 고함을 질렀다.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으면 강한 상대라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치다. 그들은 그의 능숙한 일본어와 품위가 섞인 단어 사용, 그리고 위엄있는 태도에 일단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강자에게 숙이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놈들이라고. 이건 품위있는 단어가 아닌데 저자가 하니 웬지 모를 무게감이 느껴져. 순사 둘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먼저 질문했다는 것도 잊고 상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질문한 것에 대해 술술 불었다. 네, 저희들은 종로서 소속 순사로 지금 순찰중입니다. 불순한 자들이 하도 많아서. 그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임마, 그건 나도 알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말꼬리를 내렸던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확한 어조로 군기가 바짝들어 있었다. 네, 저희는 종로에서 출발해  광교를 거쳐 경성역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 아무나 붙잡고 검문한다고 치자. 그러면 내가 그 아무나에 속한 사람으로 보이냐. 이 같잖은 순사새끼들아. 이건 뭐지? 칼을 빼야 하나. 아니면 납짝 엎드려서 사죄를 해야 하나. 순사들은 갈팡질팡했다. 이때를 노리고 휴의가 점잖게 나왔다. 그래, 니들이 수고가 많다. 니들이 무슨 잘못이 있니. 하급자들이야 언제나 상관이 시키면 따라야지. 그리고 하나 더 염두해 둬야 할 것이 있다. 항상 묻는 말의 요점을 파악해야 한다. 나 같은 바쁜 사람을 불러 세웠으면 너희의 신분은 물론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 쯤은 물어보지 않아도 먼저 나와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것 안 배웠니. 네 배웠습니다. 배웠으면 제대로 써야지. 이 점을 잘 명심해. 휴의는 이렇게 말하며 고생한다고 어느 새 말에서 내려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들의 그어깨를 차례로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리고 사람 봐가면서 검문해라. 다음에 또 걸리면 한 대 맞고 코피가 흘려도 나를 원망하지 말고. 내가 분명히 경고했다. 마지막 말을 할 때 긴장감이 돌았다. 순사 중의 한 명이 눈을 작게 뜨고 자신을 노려 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말을 마친 휴의가 못 본 것처럼 점잖은 걸음으로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려고 할 때 그 중 한 명의 순사가 무슨 미련이 남아 있다는 듯이 휴의를 불렀다. 눈을 작게 뜬 자였다.

선생님. 저 선생님. 돌아보는 휴의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알았다. 그래도 신분을 밝혀 달라고 그것이 우리 임무이고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어요. 뭐 이런 개뼉따귀 갈아먹는 소리일 것이다. 이 정도는 휴의의 머릿속에 다 들어차 있었다. 휴의는 멈춘채 한 삼 사초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무엇을 잊은 듯이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 참 내가 깜박했구나. 네 직속 상관인 완용이는 잘 있지? 광교통에서 만난 미스터리가 안부를 물었다고 전해라. 그 자식이 내 조카다. 그 제서야 순사는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는 듯이 하이, 하이를 연속으로 외치면서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완용이라는 이름이 나온 이상 그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상관을 아는 자는 그와 친분이 있거나 적어도 총독관저에서 일하는 본국의 파견 관리임에 틀림 없었다. 조카라고. 히히. 순사 중의 한 명이 히죽댔다. 자신이 언제나 형님 행세를 하더니 이런 녀석의 조카라고. 조카님 하고 부르면. 서장님께 알려야지. 완용 순사부장의 삼촌이 있다고. 하하하. 어쨌거나 완용의 삼촌이 적과 내통할 리는 없다. 검문에 걸려들 불순분자는 아니었다. 우리 편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그들은 휴의가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휴의는 빠져나왔다. 독자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일경이 그 정도로 순진한가. 그러나 그 상황에 처했다면 그 반대인 의심덩어리 순사라도 휴의를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순사부장은 순사들에게 하늘 같은 존재가 아닌가. 더구나 완용은 차기 서장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강한 자에 약한 것은 강한 자들의 특징이 아니던가. 순사들은 책에서 배우지 않았더라도 실전에서 그것을 체득했다. 실전 경험은 그 어떤 경험보다 앞서는 것이다. 자신들보다 힘이 센 것을 확인하는 순간에 납짝 엎드리는 것은 그들의 생존전략이었다. 이번에도 그 전략을 쓴 것일 뿐이니 순진하다고 손가락질 할 필요는 없다. 휴의는 광통교를 지나 남대문의 혼란한 시장통에 들어가고 나서야 안도하는 심정으로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옷을 갈아 입은 상태였다. 당당하게 행동했으나 속으로는 떨려오는 것을 그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뿔싸. 모든 것이 엉망이 될 뻔 했어. 막무가내로 나와 서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돌변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휴의는 먹기전에 눈으로 말린 가락이 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이자 코도 아래로 따라 내려오면서 멸치를 우려낸 국물의 냄새를 기분좋게 들이마셨다.

식욕을 당기는 모양과 냄새, 먹음직 스러운 것이 맛도 좋다. 검문에서 벗어난 탓에 긴장이 풀렸는지 휴의는 젓가락을 집자 마자 한 번 감아올려서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면발을 끊지 않고 끝날 때까지 젓가락질을 위로 계속 밀어 올렸다. 일명 면치기 기술이다. 그는 이 기술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명할 때 익혔다. 후루룩, 후루룩거리는 소리를 휴의는 자신의 귀로 똑똑히 들었다. 이 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그와 동시에 찰진 면발이 적당한 온도와 만나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고 돌았다. 춥고 사납던 바람이 불던 국경의 겨울 초저녁 어느 날 먹었던 그 맛이 갑자기 생각났다. 일경에게 쫓겨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가 삼일 만에 먹던 그 국수 맛이었다. 맛이라는 것은 이렇게 위급을 벗어났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편하고 느긋할 때라면 진정으로 이 맛을 느끼지 못한다. 먹다 말고 휴의는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탐색했다. 그러다가 훗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옆 사람도 눈치채지 못한 가벼운 것이었으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것이어서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경을 따돌린 만족감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애초 휴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숱한 경험으로 순사들이 어떻게 나오고 그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겪었던 그를 순사 정도가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휴의는 잠깐 긴장했었다. 그 순간이 또 오면. 휴의는 먹다 말고 그때는 이렇게 하지 뭐, 하고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는 머릿속에 없었다. 

닥치지 않은 일을 먹다 말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썼던 수법을 한 번 정도는 더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임마. 참 좋은 조선 말이었다. 임마라고 불렀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제국의 경찰이 임마로 불릴 때면 상대가 누구인지 감이 저절로 오기 마련이다. 임마라니. 순사는 듣는 제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순사는 속으로 임마를 따라 부르면서 잘못 걸려들었다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사람을 보고 검문을 해야 했어야 했다. 아무나 붙잡고 신분증을 요구한 자신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탓했다. 낮잡아 부를 수 없는 존재는 과연 얼마나 큰가. 그의 입에서 완용이 나왔을 때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친구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아니고 조카라니. 고바야시라고 부르지 않고 대놓고 완용이라고 한 것은 삼촌이 아니면 할 수 없은 당당함이었다. 고바야시가 누군인가. 다음 종로서장으로 유력한 조선인 완용이 아닌가. 그는 현재 수석 순사부장으로 있다. 순사들도 그 이름을 들으면 몸을 바짝 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무서운 존재가 고바야시 였고 휴의의 입에서 감히 고바야시가 나왔을 때 게임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이만한 게 다행이다. 그들은 휴의가 돌아가고 난 뒤 이런 마음으로 경성역으로 가지 않고 종로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쭉 처진 어깨를 보는 행인들은 그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으러 가거나 좌천된 것으로 알았다. 선생님, 하고 얼른 받은 것은 순발력이었다. 그 말을 한 순사는 내가 그렇게 해서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을 다행으로 알라고 다른 일행을 윽박질렀다.그들은 이날의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실수를 드러내 위신을 추락시킬 이유가 없었다. 의기투합이 끝난 기마순찰대는 행인들을 더는 심문을 하지 않고 교대 시간을 기다렸다. 그들중 눈을 가늘게 뜬 순사는 조카라는 말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약속을 깨고 완용과 단둘이 있을 때를 노려 순사부장을 조카라고 부르는 분을 만났다고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언젠가는 들통날 거야. 저 녀석이 나보다 먼저 고자질 할지도 모르고. 당장 기회를 엿보자. 눈이 순사가 이런 결심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을 때 식사를 마친 휴의가 이쑤시개로 이빨 사이에낀 고춧가루를 꺼내기 위해 쑤시고 있었다. 이 일만 끝내면 계산을 하자. 마침내 고춧가루가 빠지고 막 일어서려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등 뒤에 박혔다. 뒷자리의 신사 두 명을 휴의가 의식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휴의는 잊은 것이 없나 살피는 시늉을 하면서 잠깐 뒤로 눈길을 주었다. 눈이 마주친 그들 중 하나가 아리 아리, 아리랑. 들릴락 말락한 소리를 내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는 모양새를 휴의는 보았다. 소리라기보다는 이 사이로 나온 의미 없는 재채기 같은 것이 한 번더 반복됐다. 아리 아리 아리랑. 입술을 약간 벌리고 혀가 입천장을 가볍게 세 번 때리고 한 번은 혀를 둥글게 마는 동작. 이런 순간에 휴의의 눈에 이것이 들어왔다. 참, 별난 인물이다. 그는 사람의 표정을 이런 식으로 즐겼다. 정확하게 아리를 두 번 부르고 아리랑을 한 번 외친 후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저 식사에 열중했다. 휴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친사람이었거나 혼자 중얼 거리는 이상한 사람 취급했을 것이다. 국수 가락을 넘기는 쩝쩝거리는 소리가 방금 전에 했던 아리 아리 아리랑과 겹쳐 묘한 소음으로 변했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상태라면 들을 수도 없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이상한 소리. 아리 아리 아리랑. 얼마나 애타게 듣고 싶었던 소리였나. 나도 사랑해요. 이렇게 말하는 점례의 목소리만큼이나 반갑다. 아리 아리 아리랑. 백만금의 가치보다 더 소중한 독립군 암호. 바로 상해에서 받은 지령이 드디어 접선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휴의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눈짓을 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광화문 쪽을 향해 걸어갈 때 오른 손을 위로 한 번 들어올렸다 내렸다.

계산을 한 그들이 자신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휴의는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드디서 자신이 경성에 온 목적을 달성할 기회가 왔음을 실감했다. 뒤돌아보지 않았으나 두 명의 신사도 국숫집을 나와 따라 온다는 것을 휴의는 알았다. 경성우체국 못미쳐 인왕산 찻집으로 가야한다.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접선자와 접촉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무슨 일이 일어날 때면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묵직한 권총의 쇠뭉치가 차갑게 느껴졌다. 그것은 위험에 빠트리는 물건이기도 했으나 위험으로 부터 지켜주기도 했다. 휴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우체국 쪽을 향해 걸었다. 누가 옆에서 보면 서두르거나, 아무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목적한 대로 움직이고 있는 의지가 엿보였다. 광화문 쪽에 있는 사복 경찰이 보기에도 그는 단정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으로 의심을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휴의는 그런 몸가짐으로 주변의 시선을 받지 않고 우체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휴의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뒤를 밟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상해서 출발한 또래의 여성 독립군 동지였다. 그녀는 아주머니로 변신했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60대 노파처럼 늙었다. 지팡이를 짚은 구부정한 어깨를 펴지 않은 것이 영락없는 늙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속은 팔팔한 이십 대였다. 훈련으로 단련된 그녀는 휴의가 위험에 빠지면 도울 유일한 경성의 조력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부호의 글씨체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 작전의 성공에는 그녀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경성에 들어온 후 휴의와 여성 독립군은 서로 은신처를 바꿔 가면서 떨어져 생활해 왔다. 그러나 이 삼일 연락이 없으면 특정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으므로 근황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오늘 휴의는 그녀가 자신을 뒤따르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도 당황했었다는 증거였다. 아니면 그녀가 노련했다. 나이가 어려도 그녀는 독립운동 경력이 휴의에 앞설 만큼 일찍 부터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경륜은 무시할 수 없었고 그 점을 상해 임정은 인정했다. 부자이면서 어려운 일을 하기는 어렵다. 특히 목숨을 거는 일에 부자들은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독립군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 십대 부자이면서 가장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놀라운 일은 이런 것이다.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이주한 것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위해서였다. 일제는 그들을 회유했으나 여성독립군의 아버지 육형제는 그러기를 거부했다. 다 가지고 간 재산 가운데 일부를 이번에 처분해 상하이로 가져가야 한다. 그녀 말고 적임자가 누가 있겠는가. 앞선 남자 두 명은 처분한 돈을 가지고 있는 장본인들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받아야 한다. 그녀가 두 사람과 먼저 접선한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성독립군은 휴의가 광통교에서 검문 당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깔끔하게 따돌리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꼭 내 남편 같아. 겁이 없고 당차고 씩씩해. 남편은 말했었지. 토벌대에 잡혔다 구사일행 빠져 나왔다고. 그 남자와 산 능성이 여러개를 넘고 넘어 어느 마을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고. 다음날 메모 하나를 발견했어. 남자는 떠났지. 그 남자가 바로 저 남자다. 휴의. 어쩌면 우리는 알지 못한 어떤 운명의 끈으로 묶여 있는 거야. 여성독립군은 주마등 처럼 스쳐가는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휴의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진심을 의심한 것은 아니라 안전을 위해 이중막을 설치한 것이다. 인사동에서 잠깐 멈춰서서 낯선 여자와 대화를 나눌 때도 여성독립군은 휴의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이때 그녀는 그가 만난 여자를 그가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공작원에게 사랑은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작전이 끝나면 임정에 휴의의 여자에 대해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휴의라는 요원을 정말 믿어야 하는지 잠깐 고민에 빠졌다. 미행을 더 열심히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바로 조금전 광교통에서 기마순사의 검문을 받을 때도 그녀는 불과 십 여 미터 후방에서 그들을 관찰했다. 정말 믿을만 한가. 임정이 밀정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휴의가 적당히 따돌리지 못했다면 그녀가 개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휴의에 밀착했다. 독립자금을 받아 인수한 후 최종 목적지인 상하이까지 가는 것은 휴의의 몫이었다. 그녀는 경성에 남아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로 임정과 사전에 모의했고 이를 휴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임정의 선생은 이같이 철저하게 이중 공작을 펴고 있었다. 그만큼 각자의 역할과 임무가 막중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둘 중의 하나가 체포되면 나머지 하나는 살리자는 의도였다. 

여성독립군은 휴의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걷는 동안 그와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 그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아직 의심을 살만한 다른 행동은 없었다. 남편은 말했어. 그는 낭만적 혁명주의라고. 그래서 어떻다고요. 믿어 말어.나도 몰라. 그런 인물은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수도 있어. 나와 비슷하거든. 운동에 재미를 가미해. 산을 타고 달릴 때 그는 노래를 불렀어. 가수가 따로 없더군. 그에게 총이 아닌 마이크를 들이 밀었어도 충분히 자기 일은 할 거야. 여성독립군은 아리송했다. 남편도 아리송하다고 대답했다. 더구나 이미 그는 신분을 세탁한 적이 있지 않은가. 독립군을 잡는 토벌대에서 활동하다 독립군이 된 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변절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진성성의 문제지. 잘못을 얼마나 인식했느냐 하는 것이고.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인지 아닌지를 봐야해. 그런 사람이라면 또다른 변절을 가져 오거든. 이런 일은 먹고 사는 것과는 달라. 신념, 투지와 용기. 확고한 철학이 있어야 해. 자기 철학이 부재한 자는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돌아설 준비를 하거든. 그런데 휴의는 그게 아니야. 먹고 살려면 토벌대의 길을 계속 갔어야지. 독립군에서 토벌대로 가는 길은 쉬워도 토벌대서 독립군으로 넘어오는 것은 어렵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낸 거야. 누구나 아는 공식인데 그가 이런 것을 깨버렸다. 토벌대 일호 귀순용사가 바로 휴의라는 것을 여성 독립군도 알고 있었다. 밀양출신인 그녀의 남편이 경성으로 파견할 때 참고하라면서 전해준 휴의에 대한 전력이었다. 

이런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믿기로 했다.임정의 선생이 신원을 보증한 것이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차 안에서 함께 여행하다보니 그의 됨됨이를 알 만 했다. 내면이 강하다. 이런 인간은 잠깐 잘못된 선택을 해도 원래대로 복귀한다. 그 잘못된 선택도 잘못인지 알지 못하고 하는 수가 있다. 그걸 깨닫고는 돌아선 자는 과거로 다시 안 돌아간다. 여성독립군은 이런 근거를 가지고 그가 제대로 자기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다만 이 길은 험란해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세월이 수상하지만 않다면 휴의 같은 인물은 자기 인생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힘없는 조국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을 탓할 수 밖에. 과연 여성독립군 다운 태도였다. 그녀는 그에게 일종의 모성애를 느꼈다. 이것은 낭만 만큼이나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본성인 것을. 그녀는 지금 휴의를 10미터를 사이에 두고 경호하고 있다. 그가 잘못되면 임정의 계획 역시 틀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어느 생 인사동에서 휴의에게 실망한 것을 잊었다. 젊음의 패기가 자칫 일을 그르친다고 여겼으나 지금 그는 제대로 제 일을 하고 있다. 독립운동이 큰 일이지만 남자에게 사랑하는 여자 역시 그 못지 않게 큰 일인 것은 분명하다. 인생이 달린 문제가 아닌가. 다만 사랑때문에 실수를 할 까 두려운 것이다. 

광통교에서 그는 멋지게 자기일을 해냈다. 일경을 따돌린 것에 그치지 않고 한 방 먹였을 때 나까지 속이 시원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믿음의 팔부 능선을 넘었다. 여성 독립군은 휴의가 들어간 후 일 분 정도 시차를 두고 우체국으로 안으로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휴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그와 비슷한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성 독립군은 반대쪽 출입문을 순간적으로 응시했으나 여닫는 문 사이로 그는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임무를 마치기도 전에 벌써 우체국을 빠져 나갔을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도망치기 위해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그 안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디 있지. 이제는 그의 안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안전이 문제였다. 그가 도주했다면 나의 신변도 무사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노련한 지라 그런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분주하게 제 일을하는 직원들의 몸과 소음을 눈여겨 봤다. 그녀는 순간 앞이 아닌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섬뜩한 기운이 달려들었다. 광화문 쪽에서 자신을 스쳐 내려오던 바로 그 사복 경찰이었다. 그는 돌아본 여성의 눈에서 두려움 혹은 어떤 의심의 눈초리를 발견했다. 아닌척 했지만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물었다.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여성독립군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대신 품 속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도쿄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어떤 내용이냐고 그가 물었다. 그녀는 동경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도쿄와 남편을 강조했다. 편지를 받아든 그는 주소지를 한 번 쑥 훑어보고는 어디로 보내는지 동경의 주소를 말해보라고 했다. 사복경찰은 미심쩍은 마음을 해소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그것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동했다. 남편이라면 주소 정도는 당연히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여성독립군은 능숙한 일본어로 주소지를 말했다. 편지지 대신 일경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그리고 남편이 와세대 법대를 졸업하고 막 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첫 근무지로 조선을 희망한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어디 소속인가요. 이번에는 여성이 거만하게 다가섰던 그에게 공손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물었다. 사복경찰이 머뭇 거렸다. 남편이 경성에 오면 당신의 친절에 대해 이야기 하겠어요. 일경은 머리를 숙이고 편지를 돌려주면서 자신은 총독부에 근무하는 고바야시라고 했다. 고바야시. 여성 독립군은 순간 뜨끔했다.

휴의가 써먹은 바로 그 고바야시가 이 고바야시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는 휴의의 죽마고우 친구인 완용이다. 완용의 일본식 이름이 고바야시. 하지만 휴의가 말한 인상착의나 목소리, 태도 등이 그와는 영 달랐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것 같다는 처음의 판단을 뒤집을 만한 근거는없었다. 이제 됐나요. 네, 사모님. 형사님에게 아들이 있다면 미남이겠어요. 여성독립군이 아쉬운 듯 한 마디 했다. 형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를 닮아 잘 생기기는 했지요. 아빠를 닮았군요. 예상대로네요. 사복 경찰은 누가봐도 중년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성독립군은 이렇게 지레짐작하면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여성 독립군 만큼이나 긴장했던 고바야시의 얼굴이 풀리면서 입이 조금 벌어졌다. 아들 하나인데 경기중학교에 올해 입학했어요. 어학에 특히 소질이 있는데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조센징 말을 줄줄 합니다. 영어도 곧잘 하고요. 조센징 말. 여성 독립군은 뜨끔했다. 그러나 역시 내색하지 않고 경기중이라면 조선 제일의 학교지요. 그녀가 받았다. 왜 일본 학교를 보내지 않았느냐고 여성독립군은 묻지 않았다.

고바야시는 아들이 일본어와 조선어에 능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야 조선에서 한 자리 크게 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경기중에 보낸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서투른 조선어로는 조선인들을 제대로 알 수 없지요. 알 수 없으면 다룰 수 없고요. 일본어로 학교 수업을 하고 일본어가 공용이 됐어도 상당기간 조선어는 은밀하게 조선에서 쓰일 것이다. 고바야시는 그렇게 봤다. 맞아요. 조선말을 알아야 조선인을 제대로 다스리지요. 그는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수긍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는 무언가 자신이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총독부로 찾아오라고 했다. 여성 독립군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볼 일을 보러 접수계 쪽으로 갔다. 능숙하게 업무를 보는 그녀를 지켜보던 고바야시는 조선에서 제대로 된 끈 하나를 잡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주소를 외웠다. 편지를 집어 들었을 때 발신자의 주소를 이미 머릿속으로 암기해 놓았던 그 주소를 다시 상기했다. 처음에는 의심하는 마음으로 나중에는 출세를 위한 기대로 외웠던 주소지였다.

외워둔 도쿄 주소로 한 번 찾아갈 것이다. 경성 우체국의 인연을 대면서. 우연이 들른 것처럼 가장하면 그녀도 반가워 할 것이다. 한 달 후쯤 도쿄에 갔다가 남편과 다시 온다고 했다. 마침 나도 한 달 후쯤 고향에 갈 일을 만들면 된다. 고시에 합격한 법대 졸업생이 조선에 오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에 고바야시는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라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까지 이런 형사질로 시간을 보낼 순 없어. 책상 머리에 앉아 호통이니 치면서 가지고 온 떡고물이나 먹어야지. 고바야시가 이런 헛꿈을 꾸고 있을 때 여성독립군은 우체국을 뒤로 두고 인왕산 다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것은 아니었다. 바로 조금 전 그녀는 휴의가 다방을 지나쳐 경성우체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다. 접선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것은 휴의의 트릭이었다. 그녀 말고 또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미행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따돌리기 위해 우체국을 통해 역으로 다방에 들어갔던 것이다. 과연 거기에 휴의가 있을까. 여성 독립군의 심장이 다시 요동쳤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다방으로 들어가는 발길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보따리 하나를 들고 다방을 나섰다.

여성 독립군이 밖으로 나와 광화문쪽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건물의 뒤쪽에 몸을 숨기고 다방쪽을 주시했다. 오분 후쯤 휴의가 다방에서 나왔다. 그 순간 고바야시가 휴의 뒤에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는 고바야시가 필경 휴의를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휴의가 더 위험해 보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녀는 품안의 권총을 만지작 거렸다. 땀이 났다. 그러나 이것을 쓴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았으나 그는 휴의를 구해야 한다면 고바야시와 다시 웃는 얼굴로 만나야 한다. 그 능글거리는 구렁이 웃음을 보는 것은 싫었으나 좋은 일을 위해 싫은 일을 해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일지도 몰랐다. 제발 너를 다시 볼 수 없기를. 그냥 가라. 그녀는 금속의 쉿덩이를 만지면서 자식을 대하듯이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접선은 적이 모르게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애초 목적은 일경 한 두 명을 죽이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사냥 성공을 위해 은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지금은 위험한 순간이다. 죽을 수도 있다. 누군가 죽는다면 휴의이거나 나일 것이다. 삼십도 안된 어린 나이에 죽을수는 없어. 여성독립군은 남편인 조선청년을 떠올렸다. 그라면 지금 어떻게 나올까. 목숨을 걸고 달려들까. 아니면 목숨을 걸고 탈출할까. 목숨이 아깝다. 그리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임정은 당황할 것이다. 돈이 없는 독립운동은 일단 멈춘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돈보따리를 들고 무사히 상하이로 잠입해야 한다. 그 순간 여성 독립군의 몸은 무겁기도 했고 가볍기도 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성공해서 요인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장면이 겹쳐졌다.

다행히 그는 고바야시를 따돌렸다. 고바야시는 자신이 조선땅에서 대를 이어 출세하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휴의를 등한시했다. 휴의가 자신의 이름을 팔고 위기를 모면한 사실과 여성 독립군 역시 자신을 이용하려는 속셈을 모른 체 고바야시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가 조선땅에서 무르익고 있는데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  바로 인왕산 다방을 들르지 않은 것은 휴의가 내린 신의 한 수였다. 만약 그가 그곳에 들어갔다면 접선자는 물론 그도 체포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다방의 모든 시선은 흉악범에 쏠리고 그는 포승에 묶여 대로변을 따라 끌려가야 한다. 고바야시는 애초 휴의를 불량선인으로 찍지 않았다. 다만 멀리서 걸어오는 그가 변장한 독립군 끄나풀은 아닌지 주의 깊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성 독립군이 들어왔고 그녀에게 한눈을 판 사이 휴의는 애초 약속한 다방으로 들어가 있었고 돈 보따리를 뒤늦게 들어온 여성 독립군에게 전달한 후 자신은 나중에 빠져 나왔다. 고바야시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라며 어디서 봤지하고 머리를 굴렸으나 이내 아들과 와세다대를 졸업한 예비 검사에서 생각에 옮겨 지면서 휴의가 사라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난 감방으로 가지 않아. 안전지대에 도착한 휴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최악의 상황에 빠진 자신을 그려 보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여성 독립군 역시 휴의가 탈 없이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다음 장소로 서서히 이동했다. 노상에서 담배 한 대를 피고 여유로운 상상을 마친 사복 경찰은 두 사람이 나간 인왕산 다방으로 들어갔다. 차나 한 잔 마시면서 못다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형사질의 일환이었다. 업무 중에 농탱이 피는 것이 아니고 순찰의 일부 였으므로 그는 당당하게 다방문을 열었다. 담배연기와 시끄러운 음악과 커피향이 이곳이 밖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방은 활기가 넘쳐났다. 운이 좋은 휴의와 운이 좋은 여성독립군이 가고 난 자리에는 불심검문 대상은 없었다. 이 무렵 종로서 기마 순찰대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실수인지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광통교에서 ‘임마’라는 호칭으로 굴욕을 당했던 말 탄 순사는 입맛이 써 도무지 밥 먹을 기운이 없었다. 임마라니. 오사카에서 조선에 온 지 3년 만에 듣는 욕설이었다. 순사인 주제에 어느 놈인지도 모를 자에게 임마라는 소리를 듣고 그만 선생님 하면서 넙죽 엎드렸던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경찰서로 복귀했다 다시 순찰을 돈다는 명목으로 두 명의 일경은 다시 청계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바야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자신을 굴복시킨 그 젊은 남자의 행적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완용은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완용에게 조카라고 불렀던 삼촌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완용을 기다리지 않고 두명의 일경은 다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휴의는 총독부에 근무한다고 했다. 이토 고바야시가 자신의 이름이라고 했다. 눈이 작은 형사는 정말로 총독부에 이또 고바야시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설사 있다고 해도 그와 종로서 완용 고바야시가 정말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아야 했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들이 국숫집으로 막 들어섰을 때 총독부에서 근무하는 진짜 고바야시도 그곳에서 일행과 뒤늦은 점심을 들고 있었다.

고바야시는 풀이 죽은 그들과는 달리 한껏 기분이 고조된 상태였다. 일본 검사의 부인을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여기면서 일행에게 점심값을 대신 내겠다고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애들아, 니들이 고생이 많다. 음식값은 내가 쏜다. 기마 순찰대원은 얼굴이 갑자기 환하게 펴졌다. 이게 왠떡이냐 싶었다. 오늘 식사 값은 공짜다. 이거 완전히 재수만 없지는 않는 걸. 공짜로 먹는 국수맛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더니 정말 그렇군. 고바야시는 그들의 만족에 화답하면서 일본 검사가 조선에 오기 전에 그 부인엑 호의를 다해 미리 눈도장을 찍어 놓을 방도를 생각했다. 총독부 근무하는 고바야시라고 훌륭한 형사에요. 열도 있고 성도 있고 무엇보다 능력이 있어요. 관심있게 보겠어. 그런 사람이 승진해야 조선이 안정되지 않겠어요. 식민 정책도 원활할 테고요. 고바야시는 검사 부부의 이런 대화를 그려보았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라더니. 우체국에 가기를 잘했지. 거기서 그 부인을 만나다니. 내 승진을 부인에게 맡겨보자. 얼굴도 참하고 예쁘장하게 생겼던데. 고바야시는 부인을 떠올리면 또다시 히죽하고 웃었다. 

넓은 얼굴이 더 넓어졌다. 어서들 들어, 더 먹고 싶은 것 있어. 내가 쏜다고 했잖아. 고바야시가 곁눈질로 이미 수저를 놓은 기마순찰대에게 소리쳤다. 겨우 국숫값으로 이 정도 생색이라니. 눈이 작은 기마 경찰대원 하나는 그런 생각보다는 아까의 수치를 만회하기 위해 어떤 좋은 방도가 없을까 궁리했다. 그러다가 고바야시 총감님 감사합니다. 어추, 네 놈들이 날 어찌알고. 종로서에서 고바야시 총감님을 모르면 간첩이지요. 그래, 하하라. 가서 일봐라. 하이, 하이. 그들은 넙죽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바로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지 않고 고바야시가 음식점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휴의라는 자를 아는 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종로서 완용이 조카이고 같은 이름의 총독부 고바야시 역시 도쿄 유학 시절 절친이라고 했다. 그냥 한 번 물어보는 거지 뭐. 그러면서 이참에 총독부 인사와 끈을 대면 총독부로 발령날지 몰라. 조센징 놈을 상관으로 모셔야 하는 종로서보다는 백번 낫겠지. 멋들어진 건물에서 근무하는 것도 좋고. 후질근한 곳에서 잡범들의 비명 소리 듣는 것도 지겨워. 기마순착대원들은 이런 말을 하면서 고바야시를 기다렸다. 구두끈을 맨 고바야시가 나왔다.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씹어 대면서 거만하게 팔을 휘젓고 있었다. 

고바야시 총감님 맞으시죠.  고바야시가 눈을 들었다.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국의 순사들이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어, 그래 니들 아직 안갔니. 뭐, 문제라도 있어. 설마 주인이 밥값을 따로 받은 건 아니지. 고바야시는 대뜸 반말을 하면서 작은 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총감 고바야시라는 것을 니들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뒷말을 더 듣기도 전에 작은 눈의 사내가 그냥 짐작했다면서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았다. 과연 내 짐작이 맞았어. 순사는 마음으로 고바야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호탕하게 웃고난 고바야시는 그래 니들 소속이. 종로서라고 했지. 하이. 거기 고바야시는 잘 있나. 하이. 나중에 내가 한 번 찾아가마. 그러기 전에 니들이 한 번 놀라와라. 내가 총독부 구경한 번 시켜 줄게. 말을 마친 고바야시는 볼 일을 다 봤으니 이제 가봐야겠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공손하게 손을 모았던 작은 눈이 고바야시에게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눈짓을 주었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 하기 어려운 어떤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였다. 눈치 빠른 고바야시가 시계를 들여다 보면서 잠깐이라면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람들을 피해 잠시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작은 눈은 고바야시의 귀에 손을 모으고 오전에 있었던 검문 과정의 일을 조용하게 그러나 상세히 설명했다. 젊은 청년을 검문하는 과정에서 총감님 이름이 나와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종로서를 들먹이고 그것도 부족한지 나중에는 총독부의 고바야시도 내 조카야 그러던데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이 간다며 혹 젊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유람온 삼촌이 있는지 물었다. 내게 삼촌이. 있기는 있지만. 조선 여행을 올 여유로운 삼촌은 없어. 그래 그 삼촌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드냐. 키와 몸매와 눈초리를 설명하는 것을 자세히 듣던 고바야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바야시는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래 나도 좀 전에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수상쩍다 싶어 미행을 하다가 젊은 여성을 만났었지. 검사 아내라는. 뭔가 이상하군. 일이 꼬이는지 풀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그는 젊은 여성과 미행했던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혹시 그 여자도 그 자와 한패일까, 고바야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릎을 딱 쳤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작은 눈이 물었다. 아니다. 아니. 너희들. 수고 좀 해줘라. 그는 외워두었던 여성의 일본 주소를 그들에게 적어 주면서 거기 사는 사람의 인전사항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그것을 왜 우리에게. 네가 하지. 하지만 그는 무슨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부하처럼 하이하고 고개를 숙였다. 직속은 아니어도 상관인 것은 분명해 작은 눈은 거절하지 못했다. 결과는 어떻게 알려드릴까요. 전화해. 아니면 찿아 오든지. 보름이면 되겠지. 네, 그 정도시간이면 넉넉할 듯 싶습니다. 말발굽 소리가 사라지면서 이럇을 외치는 소리가 수표교 거리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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