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15 22:42 (월)
인사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림에 열중했다
상태바
인사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림에 열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7.21 17: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

그렇다면 얼마간 신세를 질게요. 다은 곳은 안 된다고 극구 만류하는 삼촌에게 점례는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혼자 호텔에 기숙한다고 하면 나중에 조카에게 내가 할 말이 없어요.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그애가 그런 말을 할 때는 아가씨가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알만 하지요. 점례는 조금 무안했다. 그래서 그 분이 돌아오시면 삼촌의 호의에 대해 다 말씀드릴게요. 점례는 유마를 그 분이라고 호칭했다. 딱히 달리 불러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삼촌이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내가 조카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것은 아니라면서도 점례의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해서 그 날 저녁 부터 점례는 삼촌집 이층의 방 하나를 배정 받았다. 

다음날 점례는 창가에서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보았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아침 일곱시 반 무렵이었다. 아래층에서는 아직 인기척이 없다.내려가 볼까 하다가 되레 그것이 실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점례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숙모와는 정식 인사도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는 몸 단장을 했다.다행히 집은 신식으로 지어져서 이층에도 욕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물기가 묻은 얼굴에 상큼한 바람이 닿았다. 그 바람은 좋은 바람이었다. 점례의 기분은 어느 때보다 위로 올라갔다. 그런 마음으로 아래를 보니 느긋한 사람도 있고 서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할 일 없이 나무 그늘에 앉아 노닥이는 사람들은 나이든 노인들이었다. 나이들면 잠이 없다더니 벌써 일어나서 세상구경을 하고 있구나. 그럴만도 했다. 그 시간에는 벌써 아침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들리는 말은 조선말이었다. 앞 말은 못 알아들어도 혹은 단어 하나만 들어와도 점례는 상인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조선에 왔어. 실감이 나. 조선말을 들으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지. 점례는 내 나라 내 땅에 온 것에 감회가 새로웠다. 살아서는 오지 못할 곳으로 여겼었다. 그 혹한의 시절에 점례는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살아서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조선을 느끼고 있다. 내 두발로 이렇게 서서 보고 있어. 조선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걸. 참으로 극적이야. 내 인생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전개될 줄이야. 뒤돌아 보면 운명 아닌 것이 없었다. 그걸 내가 개척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유마를 만난 것은 모든 상황 가운데 압권이었다. 완용에 속아서 팔려 왔던 것을 보상받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은 나빴으나 지금은 좋다. 그러니 좋은 것 아닌가. 고생은 지나갔고 지금은 내 인생의 황금기야. 그러니 그녀에게 유마는 생명이었고 빛이었으며 자신을 유지하는 존재 이유였다. 어찌 우리 그날을 잊을 수 있을까. 그가 날 진창에서 구했을 때 난 그의 진심을 의심했어. 그런데 그는 날 끝까지 믿었고 후원하고 있어. 내가 값아야지. 평생을 두고 값아도 못값는 빚이지만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갚아 나갈 거야. 어떤 겨우에도 심지어 부모와의 연을 끊어도 그와 연관된 것은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설사 그런 일이 와도 내가 결정하지는 못해. 난 그때까지 강철 같은 힘으로 버틸 거야. 담금질해야지. 그가 왔을 때는 난 더 강해져 있어. 하지만 그 앞에서는 언제나 유약한 존재지. 가벼운 힘만 줘도 빠져 나오는 물감처럼.

내 삶은 온전히 유마에 속해있어. 다른 사람이 누르면 되레 반발하지만 그가 하면 쉬워. 그게 나야. 점례 마사코라고. 그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어.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어. 더구나 일보인 삼촌의 환대라니. 이역만리에서도 그가 나를 향해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감사함, 고마움은 그런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그를 위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날 버려도 좋아. 재회. 기다리는 삶은 지금부터야. 난 매일 매일 그를 기다릴 거야. 이렇게 손가락을 꼽으면서. 그가 오면 내가 이렇게 컸어요. 봐요. 이 그림을. 나를 보던 그의 눈이 그림으로 달려가겠지. 놀라워. 많이 성장했어.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유마의 감격해 하는 모습. 유마는 예술을 보는 안목이 있어.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그는 가졌지. 예술을 사랑하고 그림을 알아. 나도 몰랐던 내게 손재주가 있다고 알려준 사람.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거야. 내 손에 붓을 쥐어준 사람. 밑그림은 그렇지 이렇게. 물감은 이렇게 짜야해. 심지어 그는 물감 짜는 것까지 알려줬다. 당신은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 점례 주위를 맴돌면서 유마는 늘 점례를 칭찬했다. 내 기억에는 칭찬밖에 없어. 그가 화 내는 것을 보지 못했어. 전쟁의 장수가 내 앞에서는 위험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살기를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평화만을 가지고 왔어. 

그는 살 가치가 있어. 험한 전쟁터도 그를 죽이진 못했다. 그는 올 거야. 그것도 살아서. 그가 와야 내가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어서가 아냐. 유마는 그 자체로 충분해. 내 삶은 내 그름은 온전히 그에 속해있어. 올거야.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에. 점례는 매일 밤 기도했다. 두 손을 모으고 천지신명께 유마를 살려 보내 주세요. 다치지 말게 해 주세요. 그래서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게 해주세요. 하고 빌고 또 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지. 그러러면 냉수 한 그릇. 매일 깨끗한 냉수 한 그릇 사발 가득 떠놓고 치성을 드리는 거야. 오케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점례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이 하는 것보다 사발을 앞에 놓고 엎드리니 기도발이 더 세게 느껴졌다. 염주도 있고 묵주도 있어.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자.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둘 중 한 분은 들어 주겠지. 빠지지 않고 할 거야. 산신령님도 넣자. 전쟁터에서는 어느 한 신만으로는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기 어렵다. 점례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 신을 번갈아 불러 내면서 총알이, 파편이, 독가스가 그의 몸에서 멀리 떨어져 나갈 수 있도록 손발이 닿게 비벼댔던 것이다. 한동안 그러고 나면 꿈자리가 뒤숭숭해도 마음이 진정됐다. 

그런 다음에는 정신을 차리고 화구 앞으로 갔다. 그에게서 배운 삽화를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렸고 물감을 칠했고 마르면 덧칠했다. 이 모든 것은 성스러운 것이었고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에 오른 행위였다. 삼촌은 점례의 그림에 대해 처음에는 아무런 평을 하지 않았다. 섣불리 판단했다가 망신을 당할 것을 염려했기 보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던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삼촌은 그림에 관한한 성급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평을 할 때도 물건을 사들일 때도 그랬다. 그는 언제나 신중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습관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세계 유명 화가들의 도판이 새겨진 커다란 책자 하나를 들이밀었다. 선물이야. 점례가 펼쳐 보기도 전에 삼촌은 급한 일이 있다고 나갔다. 점례는 겨우 그의 등 뒤로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손에 든 것은 제법 묵직했다. 나보고 공부하라고. 그렇지. 난 많이 부족해. 삼촌 눈에도 안 찰 거야. 칭찬을 기대했다면 소양이 부족한 거지. 그런 마음으로 점례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본 적이 있는 그림이 나오면 미소 지었고 처음 보는 그림은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감상했다. 그런 과정은 너무나 신기했고 즐거웠다. 마치 남의 일상을 훔쳐보는 것 같은 흥분이 일기도 했다. 이 정도는 돼야 책에 실리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점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가 그것을 부정하기도 했다. 이런 그림은. 나도 가능하잖아. 이미 그렸잖아. 점례는 도판을 보면서 자신감을 상실하기보다는 더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할 수 있어. 명암터치. 시선 처리. 구도. 난 이정도 까진 왔어. 하지만 주눅이 드는 그림 앞에서는 겸손을 떨었다. 멀었어. 멀었다고. 

자신과 비교 불가인 인상적인 그림도 있었다. 그런 그림은 보고 또 보았고 배울만한 작품이라면서 표식을 해 두었다. 재료는. 단순히 물감만이 아냐. 이 색깔은 물감으로 나올 수 없어. 금가루를 사용했나. 어떤 실마리를 찾기라도 하듯이 점례는 그런 그림 앞에서는 글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마치 범인을 찾는 순사처럼 점례는 어떻게 이게 나오지. 뭘 썼지. 이따 삼촌이 오면 물어보지. 이런 물감이 있으면. 나도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살아 움직이는 피부. 날 보고 있어. 이 눈동자를 그릴 때 화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나서는 만족했을까. 이건 또 뭐지. 너무 매말랐어. 죽은 나무처럼 까칠해. 표정도 그렇고. 사람을 이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무표정한 얼굴. 어쩌라고 나보고 삶의 찌든 때를 벗겨달라는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점례는 손으로 물기하나 없는 피부를 만져 보았다. 정마로 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적나라하군. 나뭇가지 같은 인간의 형상이라. 앞선 뽀얀 피부의 여자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살이 붙은 모델을 그린 화가. 뼈만 남은 모델을 그린 화가. 오호라 이름이 같네. 점례는 감탄했다. 같은 눈으로 다르게 본다. 이건 뭐지. 그렇다고 낙담할 건 없어. 모방과 창조 거기에 뭐더라, 덧붙이기. 아무렴 어때. 내가 갈길은 여러 갈래야. 아직 길은 많아. 선택지가 있어. 유가가 남겨둔 거지. 어딜 가든 알아서 가. 알았어요. 당신이 가라고 하니 갈게요. 명령을 수행하겠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명령. 점례는 힘이 더 났다.

그럴 때면 어떤 영감이 떠오르기를 시작했다. 나라면 사과 옆에 일본도를 놓을 것이다. 깎으라고 논 거야 뭐야. 관객들은 혼란에 빠지겠지. 그걸 노리는 거지. 사과 옆에 꼭 과일 깎는 칼만 놓으라는 법이 있나. 살찐 사람이 있으면 마른 사람이 있어. 실제로 못 깎을 것도 없지. 빈 접시 위에는 포크 대신 손을 놓자. 팔뚝은 없는 손. 뭘 하는 건지 의심을 가질 필요는 없어. 깎은 사과를 그 손으로 먹으라는 거지. 그 옆에 군침을 흘리는 아이와 그 아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늙은 신사를 넣어야지. 그래야 해. 늙은 남자는 어디서나 욕심이 많거든. 자신이 먹기도 부족한데 애가 먹는 것이 기분 나쁜 거지. 자신의 몫을 뺏기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늙은 남자의 눈에서 보여주는 것야. 서양의 늙은 남자는 특히 욕심이 많다고 해. 그 늙음에 덕지덕지 낀 욕심을 더해야 진짜 그림이 되는 거야. 그녀는 이런 식으로 도판위의 그림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이것은 그녀 혼자의 힘이기도 했지만  그림에 대한 설명이 뛰어난 도판의 도움을 받은 결과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평을 외우다시피할 정도로 자꾸 읽고 또 읽었다. 꿈보다 해몽인가. 원래 그래. 보는 눈이 다 각각이거든. 그래도 전문가 눈이라는 게 있으니 다듬기는 해야겠지. 자신의 그림을 이 잡듯이 뒤져보는 눈들을 상상하면서 점례는 삼촌에게 어떤 식으로 독후감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뭉갤수는 없어. 그냥 고맙다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삼촌이 준 것은 그냥 던져 놓은 것이 아니다.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좋은 기회아닌가.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마음속으로만 고맙다고 하는 것은 하나도 고마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각각의 그림에 대한 총평을 내리는 것도 그렇다. 한두 개만 꼭 꺼내서 말하면 좋을 것이다. 벨라스케스나 에곤 쉴레 정도. 너무 익숙한 그림인가. 누구나 하는 평말고 스치고 지나간 것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는 어떤가. 삼촌은 자신은 그림을 잘 모른다고 했다. 난 장사꾼이야. 사고 팔면 되는 거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 그게 내 그림에 대한 신조야. 그렇게 말했으나 삼촌은 좋은 그림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래서 조선의 국보급 그림들은 자기 수중에 들어오면 바로 일본으로 보냈다. 어떤 그림은 직접 들고 가야 안심할 정도로 애착을 보이기도 했다. 맞아, 도표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했어. 왜 그 생각이 이제에 떠올랐지. 유마가 말했어. 대단한 사람이야. 삼촌은. 아버지가 정치로 빠졌을 때 삼촌은 딴따라로 나섰어. 할아버지가 집안의 수치라고 법대 안들어 가면 내쫓겠다고 난리쳤지만 그러면 죽겠다고 대드는 삼촌을 막을 수 없었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지하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하나씩 떠올라. 이런 말도 했던가.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조선미술계에서 그는 최고의 화가로 통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꾸민 말인가. 대단한 사람이니 이 정도라고 넘겨 짚었나.

어쨌든 그것 까지는 유마가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가 일본이나 조선 미술계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책 잘 봤습니다. 설명도 좋고요. 곁에 두고 계속 읽어야 겠어요. 그래 어떤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딱 집어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다 좋았어요. 예술을 우열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제 능력이 아직은 거기에 따르지 못해요. 그러나 클림트나 그 제자로 알려진 에곤 쉴레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인정한다는 말인가. 삼촌한테 인정을 받으면 어느 정도 선에는 오른 것이다.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 점례는 욕심이 생겼다. 유마가 오기전에 나름대로 의미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자 유마의 조선행이 조금 늦었으면 바람도 있었다. 당장 오기만을 기다렸으나 아직 이렇다할 작업 성과가 없는 상태에서 유마가 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안전만 보장된다면 내 예상보다 서너 달 늦게 왔으면 싶었다. 그만큼 점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자신의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 

날 알아봐준 유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는다면 지원을 받을 때도 삼촌에게 덜 미안할 것이다. 나야, 내가 받다니. 나중에 그림 한 점이면 이 모든 것으로도 부족할 텐데. 이런 너스레를 받게 될 줄 누가 알겠어. 그러고 보니 삼촌은 성격도 괜찮은 거 같아. 숨길 것 없이 드러내니까. 나라서 편하게 얘기한다고 해도 그래. 나처럼 말하기 전에 여러번 가슴속에서 판단하기 않아. 더구나 얼굴만 보면 무슨 말을 할지 짐작 할 수 있잖아. 말하기전에 알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수도 있고. 나를 편하게 받아 준거야. 유마의 부탁이 있다고 해도 그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그냥  받거든. 그런데 삼촌은 아냐. 친 삼촘 같은 느낌이야. 잘 되면. 받은 것의 열 배 이상으로  갚아주지. 난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니까. 더구나 나는 빚지고는 못살아. 내 철학은 그런거야. 점례는 나름대로 예상도 하고 준비도 하면서 삼촌이 준 미술책을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 낸 표현들을 책의 빈 공간에 적어 놓았다. 여러날이 지났으나 삼촌과 마주칠 날은 많지 않았다. 점례가 일어났을 때 삼촌은 자고 있었고 점례가 자고 있을 때 삼촌은 작업을 했다. 

그럭저럭 조선 생활도 익숙해 지고 있다. 삼촌의 친절은 처음과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상대를 안다고 생각할 만큼 시간이 지났어도 삼촌은 차별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점례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내용에 대해 유마가 삼촌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말끝마다 조카가 그랬다, 조카가 부탁했으니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당연하다는 말을 입에 달았다. 처음에는 유마가 고맙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유마가 나에게 부탁했어, 그러니 내가 잘해야지 이것으로도 부족해. 그것은 너 때문이 아니고 유마때문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말이었다. 너는 둘째고 아니 안중에도 없지만 모든 것은 유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점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유마가 없는 나는 아무런 존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점례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삼촌은 점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향이니 부모니 같은 것은 첫 날 슬쩍 넘어갔고 도쿄에서의 짧은 생활도 그렇게 대충 묻어갔다. 궁금한 것이 많이 있을텐데 삼촌은 정말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유마를 만났고 어떤 인연으로 자신과 엮이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관심 밖이었다.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점례로 보면 나쁠 것이 없었다. 괜히 거짓말 할 필요도 없고 과거를 끄집어 낼 이유도 없었다. 자신이 먼저 나서서 내가 이런 이력이 있어요 하고 떠들어 댈 점례도 아니다. 다행이다. 드러나고 싶지 않은 과거이지 않은가. 4년 전에 자신이 어떤 여자였는지 무관심한 삼촌에 대해 점례는 이 인물 역시 어떤 보이지 않는 내공의 작용한다고 판단했다. 그래, 과거가 무엇이 중요하지.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데. 과거의 점례가 아닌 현재의 점례만이 삼촌에게 각인돼 있으면 그만이야. 그리고 이것은 점례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었다. 

다른 걱정거리가 없어지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점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완성되는 그림은 자꾸 늘어났다. 생각보다 잘 되고 있었다. 작품이 쌓이면 점례는 작품이 갖는 의미와 이 작품을 그리게 된 화가의 심정을 글로 기록했다. 그것은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참고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읽다보면 자신의 그 때 그 감정을 나중에 알게 되고 혹시 관객들에게 선 보일 경우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림의 옆에 짧게 자신의 느낌을 서너 줄로 요약을 해 놓았다. 삼촌은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도판에 대한 이런 저런 설명에도 고개를 끄덕였으나 평론가의 평외의 평에 대한 입장은 내놓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을 좋게 보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점례는 궁금하기도 했고 그러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도 써보니 그림처럼 실력이 늘었다. 그림도 좋고 글도 좋다면 금상첨화 아닌가. 점례는 그림에 지치거나 싫증이 날 때면 책을 읽었다. 독서는 점례는 더 큰 사람으로 만들었고 깊이를 더해 주었다. 책을 읽기도 무료하면 근처 안국동으로 나가거나 창경원을 구경했다. 마부가 알려준 벚꽃 시기를 놓치기는 했으나 볼거리가 많았다. 조선의 왕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느낌은 뭔가 애잔하기도 했고 원숭이들이 손을 내밀면서 무언가를 달라고 할 때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저쪽으로 가지 말라는 말 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종로서 쪽으로는 가본 적이 없었다.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됐다. 

그 날도 점례는 오전 그림 작업을 마치고 잠시 출타하고 돌아왔다. 활에는 삼촌이 있었다. 오후 시간에는 주로 나가 있는 삼촌이 오늘은 왠일인지 손님과 함게 그림값을 놓고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확실히 기억은 없지만 화랑에서 한 두 번 마주친 적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삼촌의 안색이 좋지 않다. 흥정에 실패한 모양이다.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삼촌은 그림값을 놓고 따질만큼은 얼굴색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값을 받았는지 아니면 큰 돈을 벌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표정이 굳었는데 잘 된 흥정을 감추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둘은 한 동안 심각하게 앉아서 무언가 서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점례는 그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이층으로 바로 올라가기 전에 손에 든 자신이 쓴 일기 비슷한 공책을 삼촌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이미 여러차례 언급한 도판에 대한 감사함을 표했다. 이것은 삼촌의 준 책에 대한 저의 보잘 것 없는 기록입니다. 느낌인데요. 좀 거칠어요. 삼촌이 보고 평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이 아니고 글이니 잘 좀 봐주세요. 글은 제 전공이 아니잖아요. 어허, 독후감을 바란 건 아닌에. 삼촌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일부러 과장하는 듯 했다.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은 찰라에 제때에 내가 나타났고 삼촌은 그 기회를 이용했다. 제 조카에요. 안녕하세요. 이 분은 내가 모시는 큰 손이시다. 별 말씀을요. 처음 뵙겠어요.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늙은 남자와 악수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점례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 남자가 손을 빼기 전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요. 그림 천재라면서요. 내 다 들었어요. 한 번 모아서 그림을 볼 기회를 주세요. 아, 그 건은 내게 맡기시고요. 삼촌은 말을 막으면서 점례가 준 두꺼운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는 빼곡한 글씨를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용은 둘째치고 그 방대한 양에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눈앞에 닥치자 뭐 이런일이, 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한 두 줄이 아니라 책보다 더 많은 분량이었다. 삼촌은 놀라면서 대단하다는 인상으로 점례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렇다니까요. 이 꼼꼼함을 보세요. 곧 조선에 놀라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겁니다.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해요. 그 말이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는 것을 점례는 짐작했다. 잠깐 앉아요. 바쁜 건 알겠지만. 삼촌이 점례를 잡아 앉혔다. 무안했으나 점례는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이 느낀 감상평인데 형편없다면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지적해 달라고 삼촌에게 말했다. 겸손 할 것 없어요. 이 사람도 곧 보게 될 텐데. 점례는 고맙다는 표시인지 아닌지 모르게 고개를 잠깐 숙였다. 참한 색시로군요. 조카딸이라고 했던 가요. 아니올씨다. 조카의 그러니까 뭐, 조카가 아끼는 아가씨 정도로 합시다. 삼촌은 말을 골랐다. 다음말을 고를 사이 점례는 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그림에 대해 말을 했다.

이미 글로 적혀 있었지만 말로 한 번 더 설명을 해주는 친절을 베풀고 싶었다. 너무 말이 많지 않다면 적당한 말은 삼촌도 나를 좋게 평가할 거야. 더구나 삼촌이 데려온 사람이니 내가 어떠느냐에 따라 삼촌의 격도 올라가겠지. 말은 글과는 또다른 의미가 있어. 글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은 그럴 시간이 없어도 돼. 점례는 말에 자신이 있었다. 말을 품위있게 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이건 역시 유마와 생활하면서 다 배운 것이다. 그가 일기를 쓰라고 해서 썼고 이렇게 말하라고 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 지금 이 순간 빛을 발하고 있다. 점례가 입을 열때마다 늙은 손님은 입이 벌어졌고 그 모습을 삼촌은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점례는 길고 장황하게 말하지 않았다. 요점을 꼭 찍어서 말했는데 구사하는 단어도 적절하고 아무나 쓸 수 없는 고상한 표현을 빌려오기도 했다.

삼촌은 속으로 유마가 네게 빠진 이유를 알겠다며 방금전의 실망하고 난처한 기분을 완전히 떨쳐 버렸다는 듯히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웃기지도 않은데 점례가 말을 마치면 그렇다는 듯이 박자를 맞추어 주었다. 삼촌은 점례를 활용하면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올지 그때부터 심사숙고했다. 단순히 조카의 부탁으로 하숙생으로 받은 것에 머물지 않고 두 어걸음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쓸모가 있어. 이런 여자는 조선에서도 드물어. 내가 복을 받은 거야. 복덩어리가 굴러왔어. 반도인에 더구나 여자인데 그림도 그려 말도 잘해 글도 잘써. 이건 뭐지. 다들 놀라 자빠질만 하지 않은가. 희소성이 있어. 아주 드문 경우지. 그러니 값이 높을 수 밖에. 삼촌은 머리를 손으로 머리를 빗는 척 하면서 자신의 정수리 부근을 한 대 뚝 쳤다.

거래가 실패한 것은 벌써 다 잊고 새로운 거래를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새로 튼 거야. 그것도 큰 거래처. 우량 거래처. 수금도 잘 되는 손가락에 꼽을 만한 그런 거래처가 생긴거야. 화 다음에 복이라더니 이런 횡재수가 생겼어. 더구나 기획한 것도 아니고. 이 늙은이 하는 꼴을 좀 봐. 하나님을 만난듯이 감격해 하네. 알겠지.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점례 마사코를 소유한 사람이 바로 나야. 삼촌은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번창하는데 더 번창을 한다. 내가 바라는 바다. 난 더 큰 돈이 필요해.  그 돈은 도쿄의 형님에게 보낼 거야. 큰 정치인으로 성공하면 형님은 나를 잊지 못하겠지. 그러면 형님은 아, 우리 집안이 조선여자로 인해 커가고 있어. 조선은 이래저래 우리에게 황금알이야 하고 좋아하시겠지. 삼촌은 욕심을 냈다. 아니 욕심을 내자고 다짐했다. 

유마, 이 녀석. 누굴 닮아 사람보는 눈이 있지. 그러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어. 사랑이라거나 좋아한다거나 이런 말은 일체 없어. 그냥 소중한 사람이니 잘 부탁한다, 이게 전부야. 충분히 정치력이 있어. 아버지 따라 정치를 하려나. 지역구 하나는 꿰차겠지. 그런데 너무 유약해. 정치를 하려면 권모술수에 능해야 하는데 생과사가 갈린 전선에서 겨우 한다는 것이 여자를 부탁한다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육군 장성이니. 그런데 곧 전역하고 싶다고 하네. 군에 있으면 미래가 보장되는데. 알다가도 모르게써. 이는 분명 형님과 상의한 결과는 아닐거야. 그렇다면. 여자군. 점례 마사코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어.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쌓도록 그 여자가 힘을 쓴거야. 말되지 글되지 얼굴도 그런데로 더구나 그림까지. 넘어갈 수 밖에 없을 거야. 신기야. 대개는 그림이 되면 글이 안 되고 글이 되면 그림이 안 되는데 점례는 둘 다 되는 거야. 거기에 말을 또 얼마나 품위있게 해. 마치 훈련을 받은 왕실 여자처럼 세련됐어. 난 한 눈에 알아봤지. 화랑 문을 열고 들어 왔을 때. 첫인상은 그랬어. 한눈에 알아봤다니까. 나도 눈썰미가 있지. 내가 다 부러울 지경이야. 난 글이 안 돼. 신은 공평하다고 했는데 점례에게는 예외인가 봐. 두 가지 재주를 다 줬으니.

삼촌은 앞에 앉은 늙은 남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점례가 준 노트를 한 장 읽었다. 점례가 무안해 했다. 그래서 자신이 늙은 남자를 상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뭐라고 말하는 것도 실례인듯 싶었다. 남자도 점례를 의식했으나 질문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색한 순간이 한 오륙분쯤 지난뒤 삼촌이 말했다. 이 정도 솜씨라면 잡지에 기고해도 되겠다면서 아는 기자를 당장 불러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즉흥적이라고 해도 너무 나갔다. 기자회견이라니. 점례는 얼떨떨 했다. 기자는 뭐고 또 인터뷰는 뭔가. 아직 점례의 머릿속은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점례는 아직은 일러요. 배울 게 많은 걸요, 하고 사양했다. 점잖게 말했으나 진심이었다. 단호하게 안 돼요의 다른 의미로 말했으나 삼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 없어. 센세이션을 일으킬 거야. 요즘 다들 문화계 소식에 목말라 있거든. 특별한 이슈도 없고. 한 건 던져주면 기자들은 굶주린 승냥이처럼 달려들거야. 점례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안 그래요. 삼촌이 늙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는 형식적으로 그럼요 하고 대답했으나 자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인전도 열지 않은 제가 인터뷰라니요. 하면 삼촌이 해야지요. 난 질리게 했어. 다들 나라면 세살쩍 습관까지 다 알아. 할 이야기가 없어. 삼촌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점례는 자신의 입에 개인전이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개인전을 열다니.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솜씨도 그렇지만 적잖은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 까짓껏 개인전 열지. 열어서 실력을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즉석에서 아니면 뒤풀이 겸 해서 인터뷰 시간을 잡자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러나 삼촌은 말릴 브레이크가 없었다. 정중하게 부탁했으나 삼촌은 막무가내로 밀었다. 겸손은 거기서 뚝. 어린애 울음을 달래듯이 삼촌이 말했다. 점례도 더는 그 문제에 관한한 사족을 달기 어려웠다. 걱정마. 준비는 내가 할게. 조카는 그저 전시에에 나갈 작품을 손보고 한 두 점 준비하면 그것으로 족해. 아, 조카군요. 늙은 남자는 그제서야 반색을 했다. 눈앞의 젊은 화가에게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가 삼촌의 입에서 그 말을 듣고 반색했다. 조카님, 한 번 여시지요. 저도 미약하지만 힘을 보탤게요. 그러면 전시회가 더 빛나겠지요. 삼촌이 거들었다. 걱정 붙들어 매도 돼. 우리 조카님. 삼촌이 너스레를 떨었다. 다 내가 알아서 해줄게. 그냥 가서 앉아 있으면 돼. 점례는 그 말이 조금 불편했다. 마지막 말은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내가 인형인가. 그냥 앉아만 있게. 내가 할 말까기 다 준비하겠다고. 점례는 그러나 불쾌한 얼굴 표정이 아닌 미소로 그 말에 화답했다. 속마음과 겉이 달랐지만 그것을 삼촌은 눈치채지 못했다. 

조선에 온지 8개월 후였다. 그 사이 점례는 98여점의 유화와 그 보다 배는 많은 삽화를 그려 놓고 있었다. 삼촌은 틈틈이 그녀의 작업 상황을 지켜봤다. 그때마다 그녀에게 개인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다. 그럴 수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점례의 입에서 직접 그 소리를 듣고 나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하는 거야. 조선 속담에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몰아 붙였던 것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이것은 상대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것이었으나 점례는 나쁘게 보지 않았다. 나를 위해  해주는 것이니 고맙게 받아 먹으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누가 날 위해 그러겠어. 난 세상에 이름을 알릴 준비가 돼 있어. 그걸 알아본 거지. 점례는 그날 저녁 유마에게 편지를 썼다. 유마 호사카는 그 전에 보낸 편지에도 답장이 없었으나 점례는 게의 치 않고 다시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고 그럴 때면 점례는 몸도 마음도 정갈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를 대접한다는 마음보다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련 같은 것이 점례를 따라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저녁을 먹은 후에는 창밖의 어두운 풍경을 보는 것도 생략하고 책상에 앉아서 곧게 어깨를 폈다. 알 수 없지만 제대로 도착할 지 모르지만 그가 보지 않고 세상의 미아로 떠돌지라도 난 그에게 편지를 써야해. 그것도 정성껏. 한글자 한글자 빈 도화지에 글자가 채워지고 있다. 점례는 그것을 본다. 마치 밑그림을 그리고 난 후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비뚤어 지지 않았는지 맞춤법은 맞는지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문장은 더 그랬다. 그에게 인상적일 만한 문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막힐 때면 책의 어느 한 부분을 펴고 무작정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표현을 만들어 냈다. 

마음에 딱 맞는 문장을 썼다고 판단할 때면 그가 꼭 편지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설마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간 건 아니겠지. 주소지가 폭파돼 받을 사람이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곳 상황이 나빠져 편지마저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써 놓은 문장이 아까워 다른 종이에 옮겨 적기도 했다. 그러니 편지의 진도는 느리고 생각은 길어졌다. 늦더라고 받을 거야. 바빠도 편지를 썼을 거야. 지금쯤 현해탄을 건너오고 있겠지. 삼촌 눈치도 보여.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갔나 싶게 몇 달이 훌쩍 지났어. 나간다고 말했으나 그럴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은 했어도 얹혀사는 사람의 입장은 그게 아니거든. 유마, 당신 잘 있지요? 첫문장이 너무 상투적인가. 그래도 안부를 물어야지. 난 잘있어요. 두 번째도 그래. 하지만 그와 나의 안전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 패스. 그 다음은 아, 그래. 인터뷰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야지. 제가 드디어 개인전을 열게 됐어요. 100여 점의 그림을 출품 합니다. 어때요? 자랑스러운 가요. 그렇다고 말하고 있지요. 난 행복해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매일 들어요. 미안해요. 매일 죽음을 대하는 당신께 삶을 이야기 해서요. 지난번 편지는 받아 보았나요. 점례는 이 문장을 써 놓고는 괜히 썼어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써볼까 했으나 궁금한 부분이어서 그대로 뒀다. 삼촌이 잘 해줘서 이곳 생활은 무리없다는 말은 맨 나중에 써야지. 점례는 쓰다 말고 샛길로 빠졌다. 유마는 안전할 거야.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능력이 있어. 생존본능이라고나 할까. 당신 내 편지를 기다리다 목이 빠진 건 아니지요. 이 표현은 어때. 간질거려. 그래도 꼭 넣고 싶어. 목이 빠진 다는 대목에서 그가 손으로 정말 빠졌는지 자신의 목을 만지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점례는 쓴 웃음을 지었다. 

거기까지 써놓고 점례는 3개월 전에 온 유마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서랍의 맨 위에 놓고 언제나 읽어서 이제는 종이가 반질반질한 정도를 넘어서 매우 얇아졌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접은 것을 펼쳤다. 혹시라고 상하면 이를 어째. 나의 유마 자상도 하지. 무려 3장에 걸쳐 썼어. 그곳 전황에 대해. 우린 잘 싸우고 있어. 적은 도망가기에 바쁘고 우린 추격하다 지칠지경이야. 곧 전쟁이 끝날 거야. 나 말이야. 생각한 것보다 잘 지내고 있어. 곧 보게 될 거야. 승리의 마지막 관문만 남아 있거든. 한마디로 일본이 이기고 있다느 거였다. 그렇지 그가 갔는데 진다는 게 말이 돼. 당연한 거야. 둘째 장은 태평양의 어느 섬에 관한 내용이었다. 섬은 더워. 일본도 섬이지만 거기와는 상대가 안돼. 너무 더워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찰 정도야. 혀를 길게 빼고 헉헉거리는 내 모습을 상상해봐. 웃기지. 가만히 있어도 개처럼 늘어져. 대신 좋은 점도 있어. 다음 글을 읽기 전에 그게 무언지 상상해봐. 바로 맞췄어. 바로 경치야. 짐작했지. 이곳 경치 하나는 정말 끝내줘.  더위서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풍경때문에 더 그래. 아름다워. 같이 보고 싶어. 언젠가 평화가 오면 우리 그때 여기로 놀러오자. 내가 가이드 할게. 그걸 자격 있다고. 나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거야. 밤낮으로 돌고 있거든. 작전도 작전이지만 난 틈나면 경계병을 따라 다녀. 대충 그린 거야. 그러니 흉보기 없기. 야자수와 그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유마. 손엔 총대신 펜을 들고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내가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전쟁터지만 아닌 묘한 기분이 들지. 저기 누렁이 보이지. 혀가 길게 나와 있어. 저 녀석을 나를 보면서 헉헉 거려. 그렇지 않아도 더운데 길게 나온 혀를 보면 나도 입에서 꺼내고 싶어진다고. 보고 싶어. 삼촌은 잘해 주고. 일전에 한 번 연락이 닿았어. 점례를 칭찬하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어. 삼촌이 당신에게 빠진 모양이야. 믿고 의지할 사람이야. 난 곧 제대할 거야. 그런 기분이 들거든. 이런 때 내 예상은 늘 맞아 떨어져.

점례가 편지에서 눈을 들었을 때 눈에는 그럴려고 마음만 먹으면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이 맺혔다. 위에서 설명을 빼먹었지만 야자수 위에는 자신을 꼭 빼닮은 여자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나라나는 걸 의심할 이유가 없지. 늘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없어도.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해. 좀 미안하네. 그림 때문에 정신이 빨려 있었어. 그는 총을 쏘면서도 그러는데. 반성좀 하자. 점례야. 이런 때 하라고 있는 게 반성이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점례는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로 이렇게 분위기를 바꿨다. 좋아서 흘리는 눈물은 그녀에게 삶의 충만과 애정을 한 가득 품어 주었다. 그때의 눈물과는 달라. 암 다르고 말고. 난 웃을 일만 남은 거야. 점례는 서랍에게 꺼낸 유마의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유마의 따뜻한 품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숨소리와 체온이 그리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바르르 떨리는 편지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점례는 그 모든 것에 자신을 갈아넣어 화답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더 격해지면 곤란해. 아무리 그래도 편지인 것처럼 꼭 껴안다니. 조심하자. 이러다 편지 구겨진다. 그걸 점례는 깜박 잊었다. 그럴만 점례는 이 순간 유마와 자신이 한 몸인 것을 실감했다. 여운은 길게 갔다. 점례는 그렇게 남은 체온을 즐겼다. 

아직 안 끝난 거야. 끝났지만 이대로 더 있을 게. 따뜻한 네품이 그리워. 유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실제로 그가 그런다는 듯이 목을 약간 위로 들어 올리면서 움츠렸다. 아이 간지러워. 못 참겠어요. 그러니 스톱. 스톱이라고요. 그럴 수 없어. 조금만 거 간지르자. 내가 얼마나 잘 하는지 이번 기회에 보여주지. 그럴 필요없어요. 잘한다는 거 알거든요. 어떻게 알아. 이번이 처음인데. 그래도 못 참겠어요. 더는. 그럼 내가 이긴 건가. 그래요. 진 사람은 나에요. 그러니 정말 스톱. 그렇다면 유마가 떨어져 나갔다.  명령이라도 따르듯이 유마는 그 말에 복종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숨도 죽였고 그래서 가슴의 고동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울렸다. 감정이 가라앉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제 그녀는 가슴의 편지를 손에 들고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런 것은 나중에 그에게 구겨진 것을 보여주면서 가벼운 종이에 쓴 편지를 책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안해, 종이가 그것 밖에 없었거든. 전선은 모든 게 부족해. 그래서 종이 한장도 아껴야 해. 그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책망하려고 그런 것 아니에요. 점례는 그에게 더 숨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한다.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이 이렇게 했어요. 잠시 영문을 모르는 척 유마가 어떤 상황이냐고 말 대신 눈짓으로 묻는다. 그러면 점례는 부끄러워하면서 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벌써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다. 점례는 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바람을 맞았다. 그렇게 그녀는 또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지나가는 행인이 올려다 봤다면 막 감은 머리를 말리는 행위쯤으로 여겼을 것이고 그 머리에서는 봄 바람을 머금은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날 것이다.  그녀는 창문은 그대로 둔 채 작은 책상을 끌어당기고는 편지를 그 위에 놓았다. 그와 동시에 펜을 잡은 손이, 빨리 무엇이라도 적고 싶다는 듯이 편지지 쪽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그녀는 쓰는 것을 한 템포 늦췄다. 적기 전에 구겨진 편지를 바르게 펴고는 그것을 한쪽에 밀어 놓았던 것이다. 잡은 펜의 부드러운 느낌 그대로 여백이 검은 잉크로 채워지고 있었다. 

떠나올 때 유마가 그녀에게 가지고 가라고 한 서양식 만년필. 이제 점례의 눈은 백지에서 검은 빛이 반짝이는 만년필로 향하고 있다. 고마워요. 정말로. 검은 몸통과는 달리 금빛나는 촉의 끝을 잉크에 찍어 바르면서 그녀는 유마의 사랑이 여전히 뜨거운 것을 알고는 놀랐다. 바람이 불어와도 그녀는 달뜬 상태였고 그래서 그것을 누르려고 마구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고마운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맨 앞에 적은 다음 그녀는 조만간 개인전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을 표시했다. 생각해 봤어요. 내가 개인전을 한다고. 정말로 그래요. 내 이름으로 개인전을. 꼭 초대하고 싶어요. 그림도 한 점 사주실 거죠. 아니, 거기 걸려 있는 전부다요. 그것도 최고 값으로. 완판이네요. 개장 삼십문 만에 완판이라고요. 신문에 날 일이네요. 그러니 인터뷰가 잡혀 있지요. 점례는 여기까지 적고 나즉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성과가 좋았으니 대회에 출품하겠다는 뜻도 언뜻 비쳤다. 유마가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같은 건 전혀 쓰지 않았다. 분명 그는 그가 웃고 있을 것이다. 입에 시가를 물고 상체를 드러낸 그가 선글라스 너머로 엷게 웃고 있다. 찬성이고 말고. 난 안보고도 알아. 당신은 웃고 있네요.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대회 출품도 응원해 줘요. 작품을 다 사준 그런 마음으로. 서투른 솜씨로 망신당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고요. 그러면서 그것은 자신의 판단이 아닌 삼촌의 견해라는 것도 밝혔다. 

삼촌이 그러는데 괜찮대요. 겨뤄볼 만한 상대가 많지 않다는 군요. 그녀는 이 말을 적어 놓고 몇 번을 고쳤다 다시 썼다를 반복했다.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표현이 찾으면 더 있을 듯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장 다음에는 한동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한 것이다. 유마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뜻 전해 들은 전황에 따르면 유마의 편지글과는 달리 일본은 태평양의 여러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구축함이 파괴되고 전투기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삼촌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듣고 오는지 간혹 혼잣말 비슷하게 힘든 전쟁이야, 힘들어 하고는 점례의 눈치를 살폈다. 다 이긴 전쟁인데 늘어지면서 어려워지고 있어. 초전박살 내는 건데. 봐주다가 이렇게 됐다니까. 내가 사령관이었으면 날밤을 새더라도 진격 또 진격인데. 전쟁에 밀리는 것이 자신이 사령관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듯이 삼촌은 열을 올렸다. 전쟁에서 점례는 한 발 떨어져 있었다. 묻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유마가 있다. 그리고 나는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본 당사자가 아닌가.  참혹한 경험. 그런 것은 빨리 잊는 게 좋다. 그래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을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은 길어지고 있다. 거기다 일본이 불리하다. 일본이 지면 어떻게 되는지 점례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일본이 질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리고 유마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점례는 당황한 사람처럼 눈빛이 흔들렸다.

점례는 거기까지 자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을 나무랐다. 설마 그럴리가 있겠어요. 이렇게 말을 해 놓고 혹시 그렇게 되면. 점례는 말꼬리를 내리면 삼촌을 쳐다봤다. 삼촌은 일본이 져도 나는 조선에 남아 있을 거야 하고 말했다. 이곳보다 좋은 데는 없어. 터전이 이곳인데 어디를 가겠어. 그는 언제나 조선은 나의 제2 조국이라고 말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내국에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벌려놓은 일이 많은 삼촌은 조선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양 조선찬양을 수시로 했다. 조선은 나에게 기회의 땅이야. 이만한 나이에 이런 업적을 이룬 건 다 조선 때문이지. 그림, 여기 걸린 그림. 이건 약과야. 일본에 보낸 그림의 십분의 일도 안돼. 점례는 삼촌이 조선의 그림을 일본으로 많이 옮겨간 것을 그 말을 통해 유추했다. 삼촌은 그림 뿐만이 아니라 도자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청자니 백자니 하는 말들이 자주 들렸고 얼마에 사서 혹은 어디서 구해서 인천으로 보낸다는 말을 했다. 거기서 배편으로 본국의 자기 집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불상같은 골동품에도 삼촌은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석상이나 금동상 같은 것을 가지고 화랑으로 들고온 적도 있었다. 다 박물관에 갈 것들이야. 이 만한 것이 없거든. 내 눈에 걸려들면 다 내것이 되는 거지. 그런데 왠 조센징이 간혹 심술을 부리네. 나보다 먼저 사고 사서는 절대 내놓지를 않아. 소문으로만 그가 조선의 국보를 싹쓸이 한다고 해. 기가 찰 일이야.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점례가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표정을 짓자 간송인가 뭔가 하는 자야. 돈이 얼마나 많은지 마음에 들면 부르는 가격을 다 준다는 거야. 서화는 물론 골동품, 고서적, 석조물, 자기까지 싹쓸이 하고 있어. 내 몫을 뺏는 거야. 이 처죽일 놈이. 삼촌의 입이 거칠어 졌다. 미안해, 내가 좀 흥분했나 봐. 조선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있으니까 지금 내가 열을 내는 거 아냐. 

일본에 유학와서는 배운거야. 거기다 민족문화재를 보존해야 된다는 얼빠진 스승에 빠져서 그자를 따라다니다가 그렇게 됐다는 군. 하여튼 돈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가 봐. 조선의 제일 갑부에 들겠네요. 그 아비란 자가 미곡상을 하면서 떼돈을 벌었다는 군. 저기 종로통있지. 그 상권을 그 놈이 죄다 지고 흔들면서 돈이 생기면 미술품을 사러 미친듯이 조선팔도를 다닌다는 거야. 이거 원 참. 삼촌이 아까보다는 험한 말을 줄였으나 여전히 화를 풀지 않았다. 점례 마사코도 이름을 들어봤을 거야. 아니 제법 접했지. 추사나 겸재는 물론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 조선 사람이 그린 건 다 사들이나 봐. 특히 신윤복 화첩은 그가 내놓지 않으면 구경조차 할 수 없어. 그런 걸 다 구입해서 어디에 보관한데요. 그러게 말이야. 미친 놈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어. 제정신이 아닌 거지. 골짜기 어딘가 성북동인가 하는 곳에 아예 개인 박물관을 지어 놓고 거기에 쟁여 놓은가봐. 조선것만 아니야. 고려나 일본, 심지어 중국까지 손을 뻗쳐. 내 살다 살다 이런 놈은 처음 본다니까.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점례는 삼촌이 이렇게 까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만 했다. 좋은 것은 다 삼촌이 가져야 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일이 틀어지고 있다. 민족문화 전통을 살린다고. 민족이 어디있어. 우린 한 민족 아닌가. 일본이나 우리나. 점례는 그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본도 조국이고 조선도 조국 아닌가.

하여튼 난 안떠나. 그럴일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일본이 져도 난 여기 남을 거야. 그땐 조선인인 점례덕을 봐야지. 날 모른 척 하진 않겠지. 삼촌도 참. 별 걱정 다하세요. 그렇지. 설마 지겠어 하는 안도감을 깔고 하는 말이었으나 삼촌은 실제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조금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아서 틈나는대로 일본으로 보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본이 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한 다음 날 삼촌은 경시청에 갔다 온다면서 종일 화실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점례는 한동안 잊었던 전쟁에 대한 생각에 몸이 오그라들었다. 잊었던 것이 불쑥 나타나서는 손목을 잡아채서 다시 트럭에 구겨 넣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일었다. 그러나 그럴리가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런 일이 있어도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 난 더이상 그 옛날의 점례가 아니야. 하지만 몸가짐만은 잘 간수해야지. 그리고 내 일을 하는 거야. 그런데 간송이라는 사람이 궁금하군. 한 번 만나보고 싶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고미술 말고도 현대미술에도 관심이 있는지. 이쪽에서 일한다면 한 번은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사람 눈에 띄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할까. 그럴거야. 좀 더 분발하자. 점례야. 그 대단한 사람이 내 그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고 싶네. 입이 벌어지면서 내가 사겠소. 값은 얼마든지 부르시오. 이런 말을 듣고 싶어. 

원근법 같은 것은 이제 식은죽 먹기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보이는 사물을 비틀어 현실과 꿈 속의 중간 어디쯤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의력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어느 정도 선까지는 올라왔다. 봐, 이 그림. 여인의 작고 가는 손이 잡고 있는 옷자락은 방금 다린 것처럼 각이 섰잖아. 날이 잡혀 낫을 갈아도 쓸판이야. 옷이 살아 있어. 인상파 화가들이 그는 도판의 그림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아. 어디까지난 내 판단이지만. 그녀는 전쟁과 그 날의 어두운 과거가 떠오를 때면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열의로 그것을 막아냈다. 그림으로 밀어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점례가 속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그녀는 이제 알아주는 여류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아니 남자 화가를 포함해도 손가락에 꼽는 정도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알고 점례도 알고 있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다면 특선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인류를 밝힌 세계의 화가> 도판에 실린 명작의 기준에 견주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게 일었다. 그녀는 그림의 제목을 생각하는데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부터 어떤 식의 이름을 붙여야 할지 고민했다. 제목도 그림에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례는 무제라는 제목을 혐오했다. 그것은 화가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그림에 제목이 없는 것은 글에 작가 이름과 책 제목이 없는 것과 같았다. 책을 만들어 놓고 작가 미상이라거나 무제라고 해봐. 이건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 반대야 반대. 관객 모독. 

점례에게 완성되지 않은 작품의 제목은 고상한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 더 집중이 됐다. 결과도 만족스럽게 나왔다. 완성된 작품에 미리 정한 제목은 그대로 가져가서 썼다. 직접적인 설명이라서 누가봐도 그런 그림도 있다. 병사와 소녀 혹은 전쟁과 악몽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림과 전혀 동떨어진 제목도 달았다. 상상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대로 어울렸다.  어떤 작품은 일정한 거리를 두는 대신 한 번 들으면 기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제목을 달기도 했다. 그림에 제목은 점례에게 매우 중요했다. 어쩌면 그림보다 더 정성을 쏟기도 했다. 처음에 그녀는 '천황에 바치는 조선 청년의 붉은 피’ 같은 극적인 제목을 떠올렸다. 역사에 남겨야지. 이 얼마나 멋진 글인가. 써놓고 나서 점례는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곧 흔한 이름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마음은 끓어 오르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산 사람은 선동할 수 있으나 예술성은 떨어진다고 보았다. 잘 본 것이다. 드러난 뼈처럼 노골적인 것은 가치가 떨어졌다. 제목을 박아서 주문해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점례는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단어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급진 것은 흔한 것이 아니야. 애국가요와 다를 게 뭐가 있어. 그림은 그것과는 달라야지. 한 단계 높은 거야. 점례는 자신이 하는 분야를 높게 평가했다. 아류는 아무리 좋아도 영원한 아류야. 모나리자 같은 외국식 이름은 어때. 그것도 식상해 보여. 과연 당대를 지나 후대에도 기억이 날까. 아니야, 점례는 고개를 저었다. 난 정밀하게 대상을 그려. 디테일 한 거지. 그러니 제목도 그에 따라가야해.

점례는 손에서 붓을 놓았을 때는 이런 고민을 했다. 지금도 그렇다. 자신이 막 완성한 그림 앞에서 어떤 제목을 붙일지 이리저리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구상하고 스케치하고 마무리 하는 과정에서도 제목에 대한 갈등은 이어졌다. 여기 이 그림을 보자. 등을 보이고 있으나 총을 잡은 손에서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이번에도 이겼다. 다음번에도 승리하겠다는 다짐이다. 다음 전투도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겠어.그래서 천황에게 한 충성으로 맹세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해. 그림을 보는 관객은 젊은 황군의 이런 각오를 느낀다. 이런 그림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보는 관객이나 모두 가슴을 뜨겁게 한다. 뭉클한 그 무엇이 가슴 아래서 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더구나 군인은 일본인이 아닌 조선청년이다. 그래야지, 한 나라 한 국민이니. 본토인, 조선인 가릴 필요가 없지. 보는 순간 애국심이 올라 너도 나도 총을 잡을 각오를 하지. 멋지잖아. 나의 다짐, 조선청년의 전과앞에서. 그림이 쉬우니 제목도 쉽게 가자. 다짐 앞에 피끓는 정도만 넣자. 이만하면 됐어. 등, 그래 굳이 정면을 볼 필요가 없어. 뒷모습만으로도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줘. 약간의 숨기는 맛도 있고. 점례는 스스로 이런 평을 놓으면 기지개를 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점례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꿈속에서 편지가 보고 싶다고 어서 편지써, 나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하는 유마의 외침 비슷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뜨자 마자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일어나 앉은 것이다. 거울속의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화장을 하지 않고 물로 빗어 내렸을 뿐인데 단정한 머리와 붕어눈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눈섶이 특히 보기에 좋았다. 그녀는 뽐내는 듯이 얼굴을 이러저리 돌려 보았다. 흥, 나야 거울속 보다 실제가 더 이쁘지. 그녀는 혼잣말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그 날은 대개 잘 풀렸다. 날 내가 위해야 다른 사람도 날 그렇게 대할거야. 그것은 점레의 믿음이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날 칭찬하자. 그런 마음으로 거울 속을 들여다 보믄 점례는 이제 숙녀의 티를 벗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완숙한 미가 있다면 그녀일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표정을 가지런히 하면서 얼굴에 힘을 주면 나타나는 기품에 자신이 있었다. 이게 나야. 이런 폼을 계속 유지하자. 이제 거울은 옆으로 치워 놓을까. 아니 그러지 전에 한 번 더 나를 보자. 뚫어지게 볼 것 까지야 없어. 그냥 정성스레 보면 족해.

자, 오늘도 상쾌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는 일도 진척이 있고 평가도 높아지고 있다. 여기 일도 편안할 정도로 안정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때 사람들은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는 법이다. 그녀는 다시 거울 앞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유마가 이런 머리 스타일을 좋아했지. 뒤로 땋아서 들어 올린 머리에 비녀를 꽂은 모습을. 이것은 일본 스타일이아닌 조선스타일이야. 유마는 조선을 좋아해. 그래서 나도 좋아하나 봐. 점례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 거울을 당겨 얼굴을 가까이 대고 비춰 보았다. 이마의 잔털이 막 들기 시작한 햇살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은빛 비녀 역시 은은한 색으로 물들어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본국의 여자들도 이랬으면 좋겠어. 언젠가 유마는 점례가 오늘처럼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상을 물리자 이런 말을 하면서 조선 여자들의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예술적이야. 섬세하거든. 난 그런 것이 좋아. 거칠고 힘있고 치고 나가는 것 같은 건 나와는 거리가 있어. 점례는 그 말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유마는 여성스러워. 저런 사람이 장군 계급장을 달고 전쟁에 뛰어들다니. 비록 전투와는 다른 작전쪽을 한다고 하지만. 다른 스타일도 있어요. 여자 머리는 드라마틱해요. 당신은 내 얼굴이나 마음보다 머리 스타일하고 연애하나 봐요. 점례가 웃으며 말하자 유마는 정색을 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잖아. 난 그저 좋을 뿐이야. 이렇게 좋아 죽는 시늉을 하잖아. 그가 머리 뒤의 비녀에 손을 댔다. 대칭이 완벽해. 대칭이 있는 것은 비뚤어지면 모양이 살지 않아. 그런데 보이지 않은 뒤쪽도 어떻게 이렇게 자로 잰 듯이 좌우가 똑같아.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유마는 이렇게 놀라고 감탄했다. 점례는 이건 식은 죽 먹기죠. 하면서 입을 샐쭉 앞으로 내밀었다. 그 때를 떠올리며 점레는 거울 앞에서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보아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래 역시 유마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노리개를 품평하다니. 옷도 아니고. 세련된 남자. 파리에서 패셔쇼에 나가야 할 남자. 잡지 속의 짙은 화장을 하고 무대위를 성큼 성큼 걷어가고 있다. 유마는 거기가 더 어울렸다. 그는 예술가의 기질이 충만해. 그가 어떤 길을 갈 지 궁금해. 전쟁이 끝나고 군복을 벗고 민간이 됐을 때 그는 나에게 어떤 말로 자신의 결정된 거취를 말할까. 통보일까, 아니면 상의하면서 내가 이런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혹은 내가 무엇을 하면 잘 할 것 같아. 내 직업으로 말야.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마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고 쓴 내용을 붙이기 전에 여러번 읽고 또 읽고 다듬어 보았다. 전선의 유지가 기뻐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당신이 칭찬했던 그 스타일로 머리 모양을 냈으니 상상해 보세요. 자신은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이니 어디서든 나를 만나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당신. 나는 이곳에서 전쟁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당신의 고마움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당신을 두고 나만 홀로 와서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당연히 미안하겠지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웃음을 주세요. 살아 돌아와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꼭 약속해요. 당신은 전쟁보다는 예술을 해야 합니다. 총은 어울리지 않아요. 사람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제 길 대신 다른 길을 가고 있어요. 최전방을 고집한 당신의 천황을 향한 충정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전선에서만 꼭 애국하는 것은 아니 잖아요. 당신은 도쿄나 조선에서 얼마든지 애국할 다른 방법을 찿을 수 있어요. 총칼 대신 펜이나 붓을 잡아요. 그러니 아버지께 연락해(부탁해) 이곳으로 속히 오세요. 제 욕심만 차린다고 나무라지 마시고요. 살고 나서야 애국도 있고 예술도 있는 겁니다. 아녀자의 섣부른 호소라고 여기지 마시고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더 큰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여기까지 쓰고 나서 점례는 가만히 있었다. 눈물이 흘러 더는 써 내려갈 수가 없었다. 창가는 이제 훤하게 밝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 익숙한 소란이 일고 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다시 창가로 갔다.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과연 분주히 움직였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볼때마다 흥미로웠다. 저들은 각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저 속에 유마가 있어 자신을 찾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를 올려다 보면서 소리치는 대신 손을 흔들어 준다면. 행인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유마를 데생하고 싶다. 주변은 흐릿하게, 그는 뚜렷하게 윤곽에 힘을 주면 좋은 풍경이 될 것이다. 눈물을 닦은 점례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마무리를 서두르고 싶다. 더 길게 늘어지면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편지를 끝내면 좀 전에 구상했던 것을 하자.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점례는 마음이 급해졌다. 무언가 일을 해야해. 난 한시도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심란해져. 혼란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 내 생각은 충분히 정리했다. 결정은 그가 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는 언제든지 귀국을 할 수 있다. 그런 힘이  전선에 더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는 아니 그의 아버지는 힘이 도쿄의 아버지에게는 있다. 오로지 걸리는 것은 유마의 결심이 흔들리는 것이다. 분윅에 휩쓸려 가자, 싸우러 가자 외치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러는 것은 너희들 몫이고 나는 아냐, 하면 아닌 것이다. 이쯤해서 점례는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침표를 찍었다. 당신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경성에서 점례 마사코 드림. 1943. 11월 어느 날.

점례는 점례 뒤에 마사코를 붙여넣어 유마가 자신에게 준 일본식 이름을 일부러 눈에 띄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음에 들지 모른다. 편지를 가지런히 접은 다음 점례는 종이 한 장을 더 폈다. 비녀가 드러난 그녀의 옆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편지만 달랑 보내면 성의가 없다고 나무랄지 모른다. 그리고 편지에 삽화를 그리는 것은 이제 점례의 루틴이다. 그것이 없으면 앙코 없는 찐빵. 찐빵이 먹고 싶다. 오후에 청계천으로 나가 진빵을 사먹자. 우체국에 갔다 오는 길에 들르자. 오후 계획까지 짜고 나자 연필을 잡은 점례는 거침없었다. 쓱쓱 힘차게 붓질을 하듯이 손을 놀리자 어느새 자신의 옆 모습을 완성할 수 있었다. 눈동자를 그릴 때는 조금 정성을 들였으나 나머지는 거칠은 상태로 그대로 두었다. 유마가 보고 평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 것이다. 그리고 아까 잠깐 떠올렸던 거리에서 고개를 들고 이층 창가를 보고 손을 흔드는 유마를. 군복은 아냐. 소매를 걷어 붙인 와이셔츠. 모자는 뒤로 넘어갈 듯 위태롭지만 그러지는 않아. 시계찬 왼손을 흔들자. 오른 손을 옆구리에 얹어 놓고. 됐어. 난 왜 이리 잘 그리지. 그것도 빨리. 

그녀는 편지를 들고 일찍 집을 나섰다. 광통교 다리 아래까지 왔을 때 아침을 물린 부지런한 아낙들이 설거지나 빨래를 하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청계천은 아낙들의 다듬이 소리와 물방울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점례는 눈을 돌렸다. 다닥다닥 게딱지처럼 엉겨 붙은 초가집과 그 집들과는 달리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거로 엉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모습 눈에 익다. 만주에서 마차를 타고 올때도 보았다. 그때는 신선했었지. 지금도 여전히 그래. 활기가 넘쳐. 그 안의 사정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일단 겉으로 보면 그렇지. 먹고 사는 모습은 다 그런 거야. 점례는 인사동에서 경성우체국까지 걸어가자고 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그녀는 간혹 마차나 전차를 타기도 했지만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보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조금 거리가 있지만 우편국까지 걸어가고 있다. 걸으니 좋아. 두 다리가 오늘도 걷게 해줘 고마워 하고 인사하잖아. 걸으면 다 볼 수 있어. 부자와 가난한 자까지 다 보여. 대개는 남루해. 흰옷 입은 사람들이 그래. 멀리서 보면 활력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무력이다. 무력해. 그래도 다들 바삐 움직여. 어디로 가는 지 물어볼까. 아냐, 그건 아니지. 어디를 가든 내가 그걸 물어볼 권한이 어디 있어. 순사라면 모를까. 순사. 점례는 순사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동시에 이맛살이 찌푸려 졌다. 나쁜 놈, 순사들. 그녀는 이렇게 중얼 거렸다.

저기 뽐내며 걷는 사람은. 요즘 벼락 부자가 됐다고 떠드는 부동산 신흥부자들인가. 십중팔구 그렇겠지. 신식 집들은 저들이 지었고. 싸게 지어서 비싸게 팔면 누구나 부자가 되지. 짓는 것이 어렵지 짓고 나서 파는 것은 쉬워. 다들 좋은 집에서 살고 싶으니까. 누군 초가집에서 살고 누군 기와집에서 살까. 저기 모던 걸이 지나가네. 요즘 간혹 눈에 띄어. 점례의 시선이 거기에 오래 머물렀다. 나도 저런 여자처럼 보일까. 양복에 입고 지팡이를 들었어. 중절모가 어울리는 군. 저런 신사는 인력거를 끄는 잡부들과는 달라. 한데 어울릴 수가 없어. 그런데도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지근 거리에 있었다. 참 기이한 풍경이야. 나야 좋지. 그릴 대상이 많으니. 저기 마차가 지나가네. 혹 나를 태웠던 마부가 아닐까. 잘 있겠지. 그런데 너무 말이 많아.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지. 정치에도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종로서 근처는 가지도 말라고 했지. 염려해 줘서 고마워요.  발길은 어느 새 우편국에 앞에 멈춰섰다. 거기서 점례는 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머뭇 거렸다. 그것 역시 습관이었다. 어느 곳이든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는 점례는 그렇게 했다. 경성 우편군 건너편으로 미쓰코시백화점이 눈에 띄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야. 벌써 북적인다고. 무엇을 살까. 사는 물건값은 어디서 벌었을까. 가난한 사람들은 그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수는 있을까. 그들은 왜 그 앞을 지나면서 죄지은 사람들처럼 주눅이 들어 송구한 마음을 가질까. 자신의 발걸음이 행여 안에 있는 귀중한 물건을 더럽힐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그래서 그 앞에서는 멈추지 않고 서둘러 가나. 그렇겠지. 위압적이지. 위에서 내려다 보는데, 저렇게 큰 것인데 겁이 나겠지. 

그들을 시야에서 떠나보내자 대각선으로 조선은행이 보였다. 점례는 만주를 거쳐 경성역에서 마차를 타고 올 때 느꼈던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자 몸에서 싸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음산한 날씨가 몰려 올 때 느끼는 신경통 환자의 느낌 같은 그런 울적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당당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밖과는 달리 포근한 느낌이었다. 사무원들도 안정적으로 제 일을 했고 점례역시 편지를 붙이는 일을 쉽게 마무리 지었다. 접수 받는 여직원이 점례가 보내는 주소를 보고는 전선에 계시는군요, 한마디 했을 뿐이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점례는 우편국을 나왔다.

원래는 다시 인사동 화랑으로 가는 일정을 생각했으나 그러지 않고 남산을 가기로 했다. 가을 바람이 점례의 마음을 그리고 이끌었던 것이다. 한 번은 오르고 싶었던 길이니 시간 있을 때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점심을 먹었다. 시장통에서 국밥을 말아먹었다. 경성역에서 보았던 남대문 시장안쪽으로 들어가자 많은 인파들이 오고갔다.점례는 물어 물어 샛길을 타고 남산을 올랐다. 쩌기로 가다가 저쪽으로 돌아서 가면 산길이 나와요. 다 쓰러져 가는 하꼬방 집에서 코에 콧물을 줄줄 흘리는 어린애가 이렇게 말했다. 애야, 넌 거기 올라가 봤니. 틈나면 가요. 나무도 줍고.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서 올라간 적도 있어요. 꼬마는 신이 났고 그 말을 할 때마다 콧물이 입으로 흘러들었다. 점례는 꼬마가 알려준 길을 따라 가니 정말로 산으로 오르는 샛길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딱 그 수준이었다. 쉬엄 쉬엄 오르니 한 시간 정도 걸린 느낌이었다. 조선신사에서는 고개를 깊이 숙였고 헌병대사령부 옆을 지날 때는 군인들이 무서워서 돌아서 갔다. 그렇게 정상에 올라선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하얀색의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그것은 대단했다. 크고 웅장했고 멋들어졌다. 유마가 있어야 할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저곳이어야 한다. 퇴근하는 유마를 마중가야지. 그녀는 꼭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여러 번 손을 모으면서 오면서 보았던 신사쪽을 향해 또 한 번 참배를 했다. 그녀 말고도 신사를 향해 두 손을 모으는 일행들이 있었다. 그들의 정성만큼이나 점례도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두 손을 세우고 손끝을 입술 가까이 대기를 여러차례 되풀이 했다. 

그런 정성이 효과를 본 것일까. 유마에게는 좋은 일이 닥쳤다. 그는 또다른 전선으로 떠나기 바로 하루 전에 점례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극적이었다. 사이판의 전선에서 조선에서 보내온 편지를 부관이 가져 왔을때 유마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말 점례는 대단해. 내가 오늘까지 여기 있는 것을 어찌알았을까. 하루만 늦었어도. 벌써 난 두번째 부대를 이동했어. 군함도 탔고 비행기도 탔고 그리고 짚차는 수도 없이 탔지. 그리고 잠시 상황을 체크하러 들었을 뿐인데 용케도 내가 있는 이곳에 그녀가 편지가 도착했다. 유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가 무슨 부적이나 되는 듯이 그것을 들어 올리고는 한동안 뜯지 못하고 점례의 글씨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틀림없어. 나에게 온 거야. 요지경 속에서도 편지를 받았어. 이런 난리통에서 편지가 오다니. 도대체 누가 날라다 준 거야. 길을 잘 못 돌아다니면 바로 황천길인데. 그걸 다 피하고 내 손에 이게 있어. 믿기지 않는 듯이 유마는 중얼 거렸다. 어떻게 이것이 이곳에 올 수 있지. 날개를 달았어. 그러지 않고는 불가능해. 유마는 편지를 든 채 멍하니 있었다. 그는 급할 것이 없는 태도로 천천히 편지를 개봉했다.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고 접어진 종이를 펼치는 것 역시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급하게 아래까지 단번에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음미하듯이 읽었다.

흡족했다. 이런 내 모습을 점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편지를 받고 웃고 있어. 마음에 든다는 거지. 내용도 그렇지만 정성에 감복했다고나 할까. 그녀가 그린 삽화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야. 예술이야 예술. 그 자체로. 이건 버릴 수 없어. 그녀가 유명 화가가 되면 이 삽화를 언론에 낼 거야. 이것 보라고요. 전선에 있을 때 누군가를 향해 점례 마사코가 보낸 편지에 실린 삽화입니다. 유마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라는 단어를 생각하고는 멈칫했다. 그러나 곧 누군가는 유마 호사카로 바뀌었고 그것을 다시 바꿀 생각이 없었다. 유마는 멀리서 남이 봐도 웃는 사람인 것처럼 입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편지를 든 채 모처럼 혼자 자기 방에 들어가 크게 웃었다. 그가 살아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할 이유가 보다 더 분명해졌다.
 

전선이 밀리고 있을 때 이런 짓은 무모했지만 유마는 그렇게 했다. 너무나 기쁘고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웃었다고 승패가 바뀌지 않아. 난 웃을 자격이 있어. 만족한 마음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고. 그녀의 그림은 애초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볼수록 빠져 드는 무언가가 그를 잡아 당겼다. 당장 파리의 거상들이 서로 사려고 앞다투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유행을 따라가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체취를 점례는 화폭에 표현했다. 모방의 단계를 벗어나 확실히 자신만의 화풍을 가슴에 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아버지는 말씀하셨어.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중요해. 특히 그 다른 사람이 너와 연관됐다면 반드시 그것이 필요해. 능력은, 앞으로 가능성은. 태도는 관상은. 어릿적 부터 들어온 말이 귀가 박힐 즈음 더 말하지 않아도 유마는 사람을 보는 눈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섰다. 그가 막사의 그녀를 자신과 함께 있도록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신뢰와 애정이 덧칠해 졌다. 이것은 쉽게 벗겨지지 않아. 오랜 세월이 지나면 더 은근해지지. 난 조선 제일의 화가를 소유하고 있어. 아니 세계에서 주목받은 화가를. 그것도 화단에서 드문 여류 화가. 기뻐. 기쁘다고. 유마는 일어나다 말고 앉은 자리에서 탕탕 소리나게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유리잔이 출렁거리면서 일부가 넘쳐 흘렀다. 그래도 유마는 몇 번 더 쳤다. 밖에서 부관이 무슨일인지 하고 살짝 문을 열었다. 걸레 가져와. 하이. 여기 좀 닦아라. 유마는 흡족한 표정으로 명령투가 아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의 기분은 바로 부하의 기분이다. 그도 슬쩍 웃었다. 그러나 입이 무거운 부관은 입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넘어야 할 선을 넘어서 괜히 모처럼 기분이 좋은 유마 장군의 심기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 볼 줄 알았던 유마는 자신보다 점례가 치고 나가는 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난 그림은 어려워. 내가 나를 알지. 그러니 나는 아는 사람이야. 중국의 어느 학자가 말했다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난 내 실력을 알아. 그림은 점례를 따라 갈 수 없어. 그러니 그건 그녀에게 맡기고 나는 내 일을 하는 거야. 뭐냐고. 쓰는 거지. 글은 내가 나아. 난 글을 알아. 어느 날 그것이 보이더라고. 남의 것과 내것을 비교해 보니 떨어지지 않는 거야. 인쇄된 글이 아직 서툴게 휘갈겨 쓴 내 일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안 거야. 그 날 이후로 난 점례의 그림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어. 그것으로 족해. 아무렴, 괜찮고 말고. 역할 분담을 하니 더 좋아. 난 글을, 점례는 그림을. 이런 궁합도 있을까.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경쟁하자. 누구에게 이득을 바라고 하는 게 아냐. 이건 예술이고 예술에 그런 건 없어. 있다면 해보지 뭐. 난 지더라도 좋아. 점례에게 지는 건 창피한 것이 아니거든.다. 그런 확신이 유마를 웃음과 환호의 상태로 만들었다. 그림에서 눈길에 떼고 글자에 눈을 고정 시킨 유마는 그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양 껴안기 위해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워. 조만간 가야지. 조선으로. 

전쟁의 승리보다도 당신의 안위가 더 중요해요. 내게는. 불순한 내용이었다. 검열에 걸릴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유마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당신의 안위에 눈길이 머무는 동안 그리운 나의 점례라는 말이 절로 입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 흔해 빠진 그래서 마음속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조국이니 명예니 천황이니 하는 구호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전쟁의 승리보다 내 안위를 걱정하고 있어. 달리 말하면 전쟁에는 져도 나만 건강하게 살아오면 좋다는 거지. 그래, 이것이 사랑이야. 찐 사랑. 아니라면 다른 말을 했겠지.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한 목숨 초개와 같이 조국에 바쳐요. 싫어요. 난 그렇게 못해. 아니 이렇게 말해도 되나. 이건 속으로만. 유마의 눈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소중한 당신, 속히 내게로 와요. 당신에게 전쟁은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은 총대신 펜을 들어야 하고 물감을 칠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알다마다. 그 말을 모를까봐. 내가 바보야, 난 바보아냐. 바보 아니라고. 그는 부관이 없는 방에서 환장해서 미친사람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어디 천장까지 머리가 닿나 보자. 다시 한 번 펄쩍. 유마는 두 다리를 모으고 경기에 나서 선수처럼 다시 한 번 위로 뛰어 올랐다.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누가 시켜서 마지 못해 따라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진실된 것이다. 유마는 집단 체면의 광기에서 자신이 한 발 빠져나오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은 그가 보기에 바람직한 것이고 빠를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런 나를 비웃지 말아 달라고 점례는 호소했다. 아녀자의 속좁은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왜 내가 너를 비웃니? 넌 속이 좁지 않고 넓어. 난, 전쟁이 싫어. 예술이 좋단 말이야. 그리고 충분히 했어. 참의원 아들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전쟁에서 공을 세웠어. 무려 9년동안 난 누볐어. 자원해서 이곳 섬에 왔고 사이판의 최전선에서 미군과 맞서고 있다고. 이런 나를 누가 감히 비난하겠어. 그만. 난 그만. 다른 사람이 해야해. 내 임무는 끝난 거야. 그러니 전역을 명 받고 물러나는 거야. 알았지. 그게 정답이야. 전쟁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어. 난 아니야. 난 싸워서 이기고 싶지 않아.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 유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어.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지. 해답을 준거야. 점례가 바로 내 구세주야. 흔들리는 방향을 조선으로 돌리게 한 거야. 암, 백 번 이해하고 말고. 작은 부상이지만 부상을 당했어. 난 부상자라고. 그래서 전역하는 거야. 더 싸우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조선으로 가는 거야. 거기서 점례와 함께 싣컷 그림을 밤새 책을 일고 종일 글을 쓰고 그리고 파리로 떠나야지. 내 가슴에는 적에 대한 증오보다는 예술혼이 더 세게 타오르고 있어. 그걸 누가 끄겠어. 못끄지. 절대 못꺼. 

조국을 위해 산화하라고 했으면 편지를 찢었을지도 모른다. 유마는 갈수록 점례가 좋았다. 딸어져 있으니 가치가 더 커보인다. 당장 만나서 못다한 회포를 풀어야 한다. 방에서 나온 유마는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이미 유마는 본국 철수를 명받고 상해로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전투 중에 입은 것은 아니었다. 벙커 일부가 무너지면서 어깨쪽에 부상을 입었다. 앞쪽에 있던 서너 명이 사망할 정도로 강력한 폭발음이었다. 전쟁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고 했어요. 더 남아서 작전을 지휘하시오. 이것은 명령이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명령이었다. 본국은 유마 장군의 귀국이 필요하다는 짤막한 서신을 사이판 주둔 일본군 최고 사령관에게 보냈다. 사령관은 유마가 불명예 제대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유마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사령관이 잡는 시늉을 했고 유마도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죽일놈 입니다. 아니요. 장군은 최선을 다했고 불행히 부상을 당했을 뿐이다. 부상은 흔한 일이고 그건 명예에 관한 문제가 아니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사령관은 이미 유마에게 전역증 줄 전역증을 작성해 놓고 있었다. 그런 것이다. 이것으로 유마의 10년 가까운 군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아버지 고마워요. 하나뿐인 아들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라셨어요. 정치인 후계자로 저를 점찍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도쿄에 가면 아버지를 돕겠다는 약속을 듣고 싶겠지요. 그러나 저는 저의 길이 있어요. 아버지는 삼촌도 자신을 따라 왔으면 했지요. 그러나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저도 저의 길을 갑니다. 유마는 이런 말들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곱씹었다. 

군인의 짐이야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단출한 군장 하나와 장군에게 어울리는 서류가방 하나면 족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더 꼼꼼히 점검했다. 점례에게 줄 그동안 그렸던 그림 몇점과 그녀에게 배운 자수 로 만든 흰 천에 그려진 자신과 점례의 모습. 이건 내가 뜬 거야. 믿을 수 있겠어. 널 보내고 밤이 길다고 느낄 때 한 땀 한 땀 떴어. 넌 내 정성을 알지. 이건 그래서 볼수록 정겹다. 내가 그때 얼마나 정성을 기울인지 알아. 그 정성을 회상하면 난 웃음이 나와. 내가 그렇게까지 자수에 공을 들이다니. 그러면서 유마는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얼굴을 이리저리 굴렸다. 고마워, 아빠. 부상이라는 말 한마디에 아빠는 나를 전역자 명단에 넣었어. 내 책임이 막중하지만 나보다 더 열성인 군인은 많고도 많아. 그들은 나의 전역을 환역할거야. 새로운 장군은 나보다 더 잘해 나갈 거야. 길을 비켜준 거지. 무능한 장군이 물러나고 능력있는 장군이 지휘하면 그게 더 군대에는 이득이야. 이렇게 유마는 짐을 만지작 거리면 흥얼거렸다. 그는 계속 흥얼거렸다. 어깨를 흔들기도 했다. 부하의 찾는 소리가 없었다면 유마의 그런 행동은 얼마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그는 곧 표정을 바꾸었다. 웃던 얼굴은 금세 초조한 사람의 기색으로 바뀌었고 곧 쏘아보는 눈빛으로 변하더니 무슨 일이냐, 입으로는 이렇게 물었다. 혹시 일이 틀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럴리야 있겠어. 과연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부하의 말은 지금 당장 베이징으로 가라는 본국의 명령을 신속히 수행하라는 전갈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곧 죽을 자 앞에서 살아서 돌아가는 자가 해서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겉으로는 표정을 엄하게 하고 속으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웃음을 감췄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나의 행복과 타인의 불행은 비교할 수 없었다. 더구나 부하는 나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 각오까지 했고 실제로도 그런 행동을 여러 차례 했었다. 내가 너를 잊을 수 없다. 다 반납하고 이것이 남았어. 그는 혁대의 권총을 풀었다. 너에게 주는 거야. 일본도는 사령관님께 어제 드렸다. 혹시 나 떠나고 남은 것이 발견되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아, 참 그리고 이것은. 그가 지갑을 열고 남은 돈을 꺼냈다. 난 필요없어. 너의 수고로움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주고 갈수는 없어서 그런거니 부담없이 받아.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유마의 말을 부하가 감히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는가. 이런 장군을 모신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부하는 제국주의 일본을 위해 끝까지 헌신한 한 장군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잘가요. 나의 우상. 인수인계는 형식적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선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조국과 건강 딱 두마디였다. 싸워서 승리하시오. 그러려면 몸을 잘 간수하여야 합니다. 저기 온다. 검은 색 군용 차량에 일장기를 단 짚차. 저기 올라타면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가겠지. 그러면 몇 시간 후면 중국땅에 도착한다. 갈아탈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을 거야. 점례야, 내가 간다. 넌 나에게 행운의 여신. 네가 나에게 온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유마는 한 없는 감상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가 짚차에 올라타고 그를 배웅하는 병사들이 경례를 할 때는 지을 수 있는 최대의 엄숙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경례에 답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마는 전날 사령관과 만났던 일과가 떠올랐다. 

내가 떠나는 것은 신상의 안위 때문이 아니라 더 큰 대업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유마는 그 전날 사령관과 차를 마셨던 것이다. 거기에는 대령에서 막 진급한 후임 장군이 배석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사지를 벗어난다는 것.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 했기 때문인 것을 한 번 더 내세우기 위해 붕대를 감은 팔을 탁자 쪽으로 뻗었다. 어깨뼈는 괜찮은 거지요. 지금도 통증이 심한가요. 그만하면 다행이오. 내가 총리대신께 훈장을 상신했어요. 유마 장군은 그걸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어요. 터무니 없이 부족한데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마가 고개를 숙였다. 부친이 내무대신이지요. 잘 말씀해 주세요. 제가 대장으로 가는데는 정치인의 관심이 필요해요. 사령관은 시간이 없어 쫒기는 사람처럼 말했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한 그만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보다도 진심인 것을 유마가 알았다. 사령관은 자신과 달리 군인 진짜 군인이었다. 전쟁을 원하고 잘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같이한 삼년 간은 고욕이었다. 그러나 유마는 내색하지 않고 자신도 그를 닮아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의 마음에 전쟁이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명령, 이것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무규칙적이고 대화를 그는 원했다. 

전쟁이 끝나고 저들 가운데 몇 명이 살아서 올까. 먼지가 사라지고 나서도 도열을 풀지 않은 부하들을 보면서 유마는 쓸쓸한 생각에 젖어 들었다. 어서 끝났으면. 그러면 살아 날텐데. 하지만 이제 전쟁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 되고 있다. 잊어 버리자. 전쟁이 나를 바꿨다기 보다는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야. 변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전쟁이야. 더구나 점례가 오니 나는 그걸 바로 실감한 거지. 하지만 그녀가 없었더라도. 시기의 문제일 뿐이지만 난 빠져나왔을거야.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말하자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불길은 쉬 꺼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가 사이판 하늘을 벗어날 때까지도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렸다. 

예술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충만했다. 그는 이미 수백 장의 삽화를 완성해 놓았다. 전쟁의 참상에 관한 것도 승리에 대한 환호의 순간을 기록한 것도 모두 군대가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난 찰라를 기록했어. 소중한 자산이지. 내가 놀지는 않은 거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했고 이게 그 증거의 일부야. 아버지가 걱정할 거야.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비밀로 하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야. 난 아버지보단 어머니를 닮았어. 내가 부상당해 전역하는 걸로 안다면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큰 부상은 아니라고 신경 쓸 거 없다고. 그 말을 믿겠어. 나로도 그러지 않을 거야. 당장 전역 시키시오. 아버지는 단호했어. 사령관은 명령을 받고 바로 실행에 옮겼지. 베이징을 거쳐 도쿄로 귀환 하시오. 명령서를 받았다는 전갈을 듣고 아버지는 그때서야 어머니에게 알린 거야. 유마가 곧 당신 품으로 와요. 놀라겠지. 설마 하얀 뼛가루로 오나. 그런 거 아냐. 상처는 다 나았어. 경미한 부상이야. 내가 손을 좀 썼거든. 한시름 놓았어. 어머니는 여전히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지 못했다. 정말 인가요. 이 사람, 내가 언제 허튼 소리 하는 것 봤어. 늘 하잖아요. 그건 정치적인 거고. 언제 오나요. 베이징에서 조선으로 가나봐. 거기서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네. 누굴 만나는 모양이야. 누군데요. 여잔가요. 어머니의 직감은 날카로웠다. 그야 나도 모르지. 아버지는 시치미를 뗐다. 편지에서 유마는 아버지에게 점례의 존재를 알렸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숨겼다. 이 참에 나도 조선 여행좀 해보려고. 당신은. 난 여기 있을게요. 누가 정원을 가꿔요. 하인들 있잖아. 그래도 내가 할 일이 있어요. 당신이 가서 잘 모시고 와요.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유마의 조선 도착에 맞춰 내무대신의 조선 여행이 결정됐다. 내부대신은 동생이 운영하는 화실도 구경할 겸 조선 나들이를 위해 10여 명의 동행자를 꾸리고 조선길에 올랐다. 그가 조선에 도착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유마도 조선에 당도할 것이다. 부자는 재회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 무렵 휴의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일대를 떠돌았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함께 했던 조선청년과 전략상 헤어졌다. 전략상이라고 했지만 조선청년은 오래 은신하면서 건강을 회복해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고문 후유증은 상당기간 요양을 필요로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것은 타고난 그의 체력이었고 배짱 때문에 가능했다. 산을 달릴 때 그는 힘들어 했지. 그러나 내색 하지 않았어. 그런 정신력도 한계가 있거든. 아마 여관에서 하루 꼬박 잠을 잘거야. 그래서 내가 주인에게 미리 하루치 숙박비와 식비를 줬지. 깨우지 말라고. 알아서 나올 거라고. 그리고 나서 나의 메모를 볼 거야. 어느 정도 몸도 마음도 가벼진 상태로 읽겠지. 메모 한 장 달랑 놓고 온것이 잘 한 것인지는 모르겠어. 아쉬운 대로 헤어지는 게 맞아.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다. 가는 길은 같아도 함께 하기는 어려웠다. 조선청년은 그의 길이 있고 나는 나의 길이 있다. 목표점에서 함께 만나면 서로 돌아온 길을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휴의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를 동지라고 부를거야. 그래도 된다고 했어.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사람이야. 평온하게 자고 있더군. 불안해 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어. 그러니 내가 여기있고 그가 저쪽에 있지. 그런식으로 휴의는 자신이 조선청년과 이별한 것을 정리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그가 자꾸 어른 거렸다. 부리부리한 눈이 이렇게 헤어지는 게 어딨소. 하고 핀잔을 줄 것만 같았다. 날 살려 놓고는 혼자 살겠다고 팽개친 거요. 그게 아니올씨다. 내 마음을 알 것이오. 모른다오. 그렇다면 할 수 없어. 잘 가시오. 일어나서는 얼마나 황망했을까. 밥은 먹고 다닐까. 그건 나도 모르지. 살아 있다면 막걸리 한 잔 할 시간은 서로에게 내놓을 준비가 돼 있을 거야. 운명의 신이 그렇게 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너에게 두고두고 사죄할 수 있어. 한 인간의 신념을 고문으로 꺾으려한 내 우둔함을 비난해줘. 평생두고 값아도 부족한 빚을 진거야.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족해. 넌 이미 속죄받았어. 내가 용서했거든. 당사자가 신보다 먼저 용서했으니 절대 마음에 두지 마. 이겨내. 지금 가지고 있는 그 마음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나를 고문하던 그 잔인한 마음으로 돌아가봐. 그러면 모든 것이 하찮게 보일거야. 그 마음이라. 넌 그런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뭐, 그냥 책도 보고 다른 사람 말도 듣고. 그런거지 뭐. 넌 어디로 갈 거야. 일단은 토벌대 추격을 피해야 해. 그들은 워낙 강해. 토벌대장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조선인이지만 일본인 보다 더 악랄하게 독립군을 탄압해. 베이징에서 돌아온 그는 새로운 추격대로 날 쫒을 거야. 그의 집념을 난 알아. 내 가죽을 벗기고 시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포기가 없을 거야. 당분간 만주를 떠나 국경을 넘어야지. 거기서 좀 정리라는 것을 해보려고. 무작정 군인이 됐고 토벌대로 보내졌고 내 정신은 온통 토벌대장이 주입한 이론으로 채워졌어. 그걸 하나하나 무너뜨리려면 나도 내 철학이 필요해. 생각이 정리돼야 어떤 행동을 해도 버텨낼 힘이 생겨. 그건 그래. 그게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지.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하거든. 당장 일본군에서 독립군으로 옷을 갈아 입었으니 왜 그랬는지 정리가 꼭 필요하지. 이론이 없는 실천은 모래성으로 금방 무너져. 나를 지탱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씀. 전향의 이유를 알아야 해. 그런 건 이론보다 마음이 앞서. 그래도 쌓아놔야지. 마음은 언제나 흔들려. 갈대처럼. 그럼 또 변신할 거야. 그래, 알았어. 우리 너무 떠들었다. 굿바이. 그러기 전에 넌, 고향이 어디야? 난 밀양 사람이야. 너는. 난 보령. 그렇군. 살아서 만나자. 그땐 독립된 조국에서 술 한잔 어때. 잘가라 동지. 잘가 동지. 이런식으로 휴의는 조선청년과 떨어져 나왔다. 

국경을 넘은 휴의는 배고픈 개처럼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정말로 그랬다.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한끼를 채울 식량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구석진 곳만 돌았으니 음식은 쉽게 그의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이방인 이었다. 스스로 자처한 이방인이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쓸쓸함으로 객사했을 것이다. 운 좋게도 어쩌다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 걸리면 휴의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난 동물이 아냐. 먹었으니 쉬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야지. 배부른 안도감. 난, 사람이라고. 동물 아냐. 개나 고양이가 아니라고. 그렇게 그는 하루 하루를 이겨냈다. 어떻게든 살아와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간혹 조선인을 만나면 휴의는 시베리아 강제 이주 한인으로 행세했다. 여기는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좋은 날에 봅시다. 이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했다. 흰 옷 입은 사람들은 어디서나 표가 났다. 구부정한 등허리로 바짝 마른 몸에 뀅한 눈, 난 조선사람이오. 말 하지 않아도 안다오. 그렇게 식민지 조선사람들은 중국으로 러시아로 마구 흩어졌다. 살기 위해 또는 죽기 위해 그들은 자기가 태어난 땅을 떠나 정처없는 유랑의 길로 접어들었다. 댁은 어찌 혼자유. 가족은 연해주에 있어요. 여기는 어떤지 보려고 왔는데 거기보다 나을게 없네요. 다시 가기도 그렇고 좀 더 다녀 보려고요. 어디 일자리가 있나 하고요. 휴의는 때에 따라서는 남만주 조선족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혈혈단신 조선을 떠나 온지 십 년이 지나 이제는 고향 생각 같은 것은 나지도 않는다고 둘러댔다. 혹시 모를 첩자나 일경의 끄나불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도피생활에 지칠 즈음 그는 어렵게 임정 요인들과 끈이 닿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청년과 떨어지고 난 후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으나 나서지는 않았다. 

쫓고 쫓기는 삶에 대한 환멸을 아직 떨치지 못할 때였다. 그들이 먼저 휴의에게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다면서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일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런 제의를 한 자가 토벌대 사복요원인지 아닌지 휴의는 의심하는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휴의는 지쳐 있었던 것이다. 먼저 그는 이렇게 물었다. 나를 믿을 수 있어요. 어떻게 나를 알고 그런 말을 하지요. 믿지 못하니까 제의하는 겁니다. 믿었다면 동지하고 덥석 손을 잡았겠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갑시다. 가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눈으로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요. 하지만 휴의는 그 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들이 알려준 주소와 접선 방법 등을 숙지한 후에도 한동안 홀로 지냈다.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토벌대장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지금이라도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 받아 줄지 모른다. 그래, 등 따뜻하고 배부른 토벌대로 다시 돌아갈까. 돌이켜 보면 잘못한 것이라고는 대장님도 짐작했겠지만 이미 죽은 청년을 풀어 준 것 뿐이라고 하소연하면 된다. 그것도 자신이 풀어준 것이 아니라 다른 내통자가 있었는지 한 눈 판 사이에 사라졌다고. 그래서 추격하다가 실패하고 후환이 두려워 홀로 탈영했다고 하면. 아냐, 먹히질 않아. 내가 봐도 너무 조잡해. 완벽하다면. 그래도. 거긴 아냐. 먹고 살려고 하는 짓 치고는 너무 잔인해. 내가 동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한 토벌대는 친구가 아닌 적일 뿐이야. 그런데. 이곳은 너무 춥고 늘 배가 고파. 돌아갈까. 사전 보고 없이 부대를 이탈한 죄가 그렇게 클까. 물론 이것 저것 뒤집어 씌운다면 살아 남기 어렵다. 토벌대장이 그렇게 어리숙한가. 아니다. 어리숙하지 않으니 그걸 이용할지 모른다. 받아주면서 역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립군에 대한 첩보를 활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만큼 그는 어떤 경우에도 독립군 토벌이라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믿었다. 

살려주려고 마음먹으면 죽일 이유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내친 김에 동지라고 부르는 자들을 따라 가서 임정의 아지트를 확인해 볼까. 그리고 나와서 확 불어 볼까도 생각했다. 이것을 위해 자신이 일부로 꾸민 자자극이라고 연극할 수 있다. 대장께 보고 하지 않은 것은 상황이 급했고 아직 베이징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가 믿어 줄까. 결과가 좋아 임정의 우두머리나 아니면 간부급을 체포하면 그동안의 죄가가 사라진다. 그러나 의심마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휴의를 과거의 편했던 시절로 이끌었다. 쫓기는 삶보다는 쫓는 삶이 좋았다. 눈알을 부라리면서 억압하는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휴의는 그런 결정을 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을 있었다. 조선청년 같은 신념은 없어도 자신이 조선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조선사람이 왜 일본사람 편에서 조선사람을 잡아들이냐는 질문에 휴의는 여전히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안에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민족이라는 이름 말고. 그래서 휴의는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미워졌다. 완용같은 인물과 토벌대장이 뭐가 다른가. 그들은 같은 패거리다. 난 다르게 갈거야. 조선청년은 그걸 나에게 알려 준 거야.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넌 지금 있는 그 길에서 벗어나서 나와 같은 길로 가야 한다고. 맞아. 나는 내 길을 향해 가야 해. 휴의는 미행자가 있는지 살피면서 임정 요원이 알려준 국경 근처의 비밀 장소를 찾았다. 그곳은 상해 임정의 임시 거쳐 였으며 새롭게 마련한 안가였다. 

동지라고 부르는 요원과 접선을 한 지 삼 일 만이었다. 그러기 전에 휴의는 독립군 아지트를 여러번 스쳐 지나가면서 자신에게 닥친 어떤 운명을 예감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여기 있겠어. 대개는 음지에서 양지로 전향하는데 나는 거꾸로 가고 있어. 내 몸에는 미안하지만 정신은 그 반대거든.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러니 몸이 피곤하고 고달파도 이해해줘. 이런 다짐에도 휴의는 최후까지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기를 여러차례 했다. 그러다가 이 길이 아닌 길을 갈 수 없다는 확신이 섰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독립군 일원이었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난 그런 사람이었어. 그러니 이생에서 끈을 이어가는 것은 당연해. 내 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니면 다시 나오면 되는 거야. 한 번 빠졌다고 평생 빠지란 법은 없어. 그렇게 퇴로를 만들어 놓자 한결 차분해 졌다.  토벌대장처럼 더 배울게 없다면 하산하면 그만이야. 마침내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내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임정은 휴의를 처음부터 신뢰했다. 눈빛이 그랬다. 그곳 사람들의 선한 눈빛. 고문자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사람들의 표정치고는 밝았다. 어떤 신념이 그렇게 이끌었을까. 휴의는 일단 안도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임정은 제발로 들어온 휴의를 요긴하게 썼다. 아껴두는 대신 적극적으로 일에 가담시켰다. 그도 궂은 일을 자청했다. 해보지 할 만했다. 그래서 위험하고 어려운 작전에 곧잘 참여했다. 나갈 때는 살아 돌아 올 수 없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몸에 넣을 수 있는 태극기를 손수건 처럼 챙겼다.

그는 일단의 독립군 훈련에도 참여했다. 토벌대에서 배운 전술을 가르쳤다. 전투 지휘를 하고 왜경을 암살하는 일도 그의 몫이라면 외면하지 않았다. 신참을 훈련 시키고 정규군으로 키우는 일도 휴의가 담당했다. 그는 활동가였다. 처음에 임정은 그를 철썩 같이 믿지않고 일제의 밀정일지 모른다며 이중의 감시망을 짰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임정에서 그는 활용가치가 높았다. 설사 밀정이라고 해도 괜찮다. 이중간첩으로 활용할 수 있다. 거기까지 임정 수뇌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뇌부는 휴의를 믿었다. 휴의를 접촉한 것도 우연히 아닌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조선청년이 임정의 선생과 단독 면담을 하고 휴의의 신상에 대해 털어 놓았던 것이다. 그라면 믿을 수 있어요. 한 때 철모르는 상태에서 정신이 나갔으나 그것 이상으로 우리 민족에게 보상을 할 거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조선청년의 말이었으므로 선생은 비밀리에 조직을 가동해 야생의 늑대처럼 떠돌던 휴의와 우연을 가장해 접선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번에 휴의가 큰 일을 맡은 것은 아니었다. 잡혀도 조직에는 아무 문제 없는 하찮은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일이 늘어났다. 일을 하기 전에 세심하게 준비했다. 그 과정을 선생은 지켜봤다. 거기에 진심이 더해졌다. 휴의의 마음을 선생은 읽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의 선한 행동이 요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선한 것은 타고난 것이었다. 외출했던 악한 마음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작전에 없을 때도 휴의는 늘어지지 않았다. 일거리를 찾아 약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었다. 자기보다 급한 사람에게는 밥을 양보했다. 옷을 주고 신발을 내주었다. 이런 사람은 옳은 일이라면 쉽게 배신할 수 없다. 임정의 선생은 그의 선한 눈을 마주할때마다 밀정이 아니라는 확신을 했다. 큰 일을 할 때는 그래서는 안 되지만 직감을 선생은 믿었다. 다급한 순간에는 그것이 쌓아 놓은 첩보를 앞지르기도 한다는 것을 선생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업적이 쌓여가면서 임정에서 휴의는 중요한 인물이 됐다. 토벌대에서그랬던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여러 번 목숨을 잃을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번번히 살아 돌아왔고 전과를 올렸다. 전투에 나가서는 부상병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했다. 현장을 보지 않은 요인들은 그 말을 작전에 투입됐던 동료들부터 들었다. 그들의 입에서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처음봐요. 다들 자기부터 챙기잖아요. 특히 생사가 달렸을때는요. 그런데 휴 동지는 달라요. 자신도 보지만 동지도 봐요. 이런 기운이 퍼지면서 부대에 생기가 돌아요. 한 두 번도 아니어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는 수시로 벌어졌다. 어렵게 훈련한 병사들이 죽어 나갈때는 이대로 무너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승기를 잡으면 한 번 해 볼만하다고 사기가 올랐다. 전투에서는 늘 이런 일이 반복된다.

휴의는 그런 감정의 기복을 잘 다스렸다. 그는 얼마지나지 않아 임정 산하 부대의 부대장이 됐다. 20여명의 부하들은 그에게 생사를 맡겼다. 그런 부하들을 휴의는 잘 다뤘다. 훈련은 독하게 했으나 이후의 생활에서는 형처럼 동료처럼 지냈다. 동지의식.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를 알아 주는구나. 인정받았다는 느낌은 부족한 의욕을 채운다. 그러니 전투력은 날로 상승하고 있다. 해 볼 만 해. 선생은 이런 말을 하면서 조선에 전투병 파병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생겼다는 말이다. 휴의 혼자서 한 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만주와 연해주 등에서 벌어지는 산발적인 전투는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들 가운데 일부를 차출해 특공대를 조직하면 경성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점령은 못하더라고 파문을 일으키자는 것이 임정의 생각이었고 주석은 그거슬 앞장서 계획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일제는 독립군에 이를 갈았다. 미군이나 영국군과 싸울 때보다 더 독하게 나왔다. 배신감 같은 것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잘 살게 해주는데 대드는 꼴을 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배은망덕한 놈들. 조센징은 안돼. 그들은 조센징을 말하기도 전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민족과 싸우는 것도 힘든데 내부의 적을 상대하니 짜증이 났다. 조선 게릴라와 싸우다니. 일본의 입장에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같은 나라끼리 이게 무슨 짓이냐고 사령관은 토벌대장을 윽박질렀다. 토벌대장은 감히 눈을 들지 못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것은 아니지 싶었다. 왜 조센징이 일본에 대드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미년 운동 후 잠시 풀어준 것이 화근이됐다. 그래서 토벌대장은 운동 이전의 무단통치를 주장했다. 어, 지금은 그 말할 때가 아냐. 사령관이 막았다. 아직 내 말 안끝났거든. 들어봐. 입 다물고. 

너희 반도인들 때문에 우리가 수세에 몰린다면 넌 어떻게 책임질래. 그리고 우리 대원이 이탈해서 독립군쪽에 있는데 여태 체포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고 넌 도대체 뭐아는 놈이냐. 정치에 끼어들면서 무단통지 하라고. 넌 싸우기나 해. 정치는 본국에서 알아서 할테니. 일본인 사령관은 토벌대장을 세워놓고 분이 풀리지 않았다. 어제는 탈출한 토벌대 휴의의 소식을 들었다. 그가 여기서 배운 전투 훈련을 독립군 조련에 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맨 앞에서 일본군을 유린한다고 했다. 세 번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한 것은 부대장인 휴의의 작전에 말려 들었기 때문이라는 보고서를 읽었다. 사령관은 분노했다. 이 자식, 일본 육사를 껌으로 먹었니. 왜 이리 허접해. 사령관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조선인 토벌대장의 조인트를 깠다. 부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지만 사령관은 그만큼 독이 올라 있었다. 일본 육사 후배인 토벌대장은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책임을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장은 휴의를 잡는 자에게 큰 현상금을 걸었다. 일계급 특진 시키겠다.

그러나 휴의는 잡히지 않았다. 그는 신출귀몰하게 토벌대를 괴롭혔다. 마치 원수인 것처럼. 휴의야 그러지 마라. 정이라는 게 있거든. 너도 알잖아. 내가 널 군인으로 키워줬고 인생이 어떤 것인지 알려줬어. 넌 나를 아버지라고 따르고.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다니. 그럴 수는 없어. 지금이라도 와라. 아니면 자결하든지. 그도 아니면 우리쪽 총알에 맞아 죽든지. 그래야 내가 산다. 내가 없어져야 내가 산다고. 토벌대장은 분에 못이겨 땅을 차고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조인트 맞은 것에 대한 아픔보다는 부하들 앞에서 당한 것이 못내 분하고 아쉬웠다. 꼭 그래야만 했나. 나도 어렷한 대령이다. 별을 단다고. 곧. 그런데 일개 위관급 앞에서 나를 찼어. 일본놈들은 왜 질서라는 것을 모르지. 정 하고 싶으면 너하고 나하고 단둘이 있을때 해. 그때는 얼마든지 맞아줄게. 조인트는 물론 따귀라도 때리라고. 한 대 두 대 세 대. 그런데 이건 아니지. 토벌대장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피가 위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 혈관이 터져서 죽겠는 걸. 그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육사 시절 혈서로 맹세한다는 그 때를 떠올렸다. 천황을 위해 내 열의가 부족했어. 그랬던 거야. 휴의가 도망간 것도 다 내 불찰이고. 베이징에서 하루만 일찍 왔어도 됐는데. 그는 자신에게 잘못을 돌렸다. 사령관에서 마음속으로나마 따졌던 것을 후회했다. 그나저나 휴의를 어떻게 잡나. 사상전향이 제일 좋은데. 그를 사로 잡아서 다리 돌려놓는 거야. 뇌를 거꾸로 박아서 원래 자리를 놓는 거지. 그러면 조선 임정도 일망타진 할 수 있고. 제일 좋은 방법인데 어떻게 손을 쓸수가 없어. 도대체 상하이 일본 영사관 놈들은 뭘하고 있지. 정보를 줘야지. 그래야 급습을하지. 우린 밤낮없이 수색이다 출동이다 하면서 녹초가 되는데 그 놈들은 놀고만 있어. 에잇, 내가 한 번 상하이로 출장을 가봐. 아니지. 출장 간 틈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라. 토벌대장은 진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정신을 개조하려는 토벌대장의 생각과는 달리 휴의의 독립열기는 날로 고조됐다. 그는 그런 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해야지, 잊었던 나라를 되찾는 거야. 우린 무력으로 점령할 거야. 경성으로 쳐들어가서 일제를 제압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어. 나라를 돌려 주세요. 한들 돌려 주겠는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조선은 강제로 빼앗겼으니 조선땅에서 일본군을 몰아 주시오. 한다고 해서 되겠느냐는 말이다. 휴의는 처음 토벌대에 들어와서 했던 그 무모한 용기를 독립군에 쏟아 붇고 있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길로 이끌었는지 따지지 않고 그는 운명에 모든 것을 맡겼다.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한 반발심은 아니었다. 잘못을 뉘우쳐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성직자 같은 본보기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독립운동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조선인 토벌대장 밑에서 이인자 노릇을 하던 휴의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았다. 한 때의 실수 였으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됐어. 만회하려면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냐. 그랬다면 벌써 나가 떨어졌을 거야. 내 앞길은 오로지 행동이야. 내가 보여주면 따라올 거야. 이건 영웅주의가 아냐.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낼 뿐이지. 조선청년은 어디 있을까. 그가 의열단을 조직해 전과를 올린 다는 소식을 들었어. 한번은 마주치겠지. 그는 잘 참았어. 고문으로 살점이 뜯어지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보호했어. 과연 나도 그럴수 있을까.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잡힐 걸 왜 걱정하니. 조선인. 그가 말했었다. 우린 왜놈이 아니고 조선인이라고. 그게 뭐라고. 그 한 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다른 것은 없었다. 조선인이 왜놈을 위해 충성하는 것에 대한 직설적인 거부감. 그것 외에는 달리 나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휴의는 조선청년 말고 또다른 사람을 자주 떠올렸다. 바로 점례였다. 점례가 그리웠다. 점례는 그의 가슴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경성에 가면 만나리라. 일본으로 돈 벌러 간 그녀가 만주에서 화가가 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점례를 확인하고 싶었다. 종로 화상을 수소문하면 그녀의 존재는 쉽게 파악 될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경성행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삼엄한 경계를 뚫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일경의 감시가 심해도 방법은 있다. 그러나 임정도 그렇고 휴의 자신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제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독립군과 산발적으로 벌이는 전투에 질렸는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일망타진을 선언했다. 때려잡자 독립군 이기자 토벌대. 그들은 작전에 나가기 전에 이런 구호를 외쳤다. 한 번은 휴의가 안가를 나와 시내를 돌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런 외침을 듣고는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그들은 이제 전선을 시내 쪽으로 좁히며 압박해 왔다. 임정 요인과 독립군에 대단한 현상금이 걸렸고 누구든 독립과 관련된 조선인을 잡아오면 포상하겠다는 포고문이 만주 시내 여기 저기 나붙었다. 만주에서 근거지를 잃은 독립군은 다시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토벌대의 일부도 조계지 인근으로 접근했다.

임정은 몸을 사렸다. 꼭꼭 숨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나기는 피해야지. 일단 우리가 불리해. 정면 승부는 어림없고. 설상가상으로 독립자금은 바닥이 났다. 밀정을 파견할 기차표 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신세였다. 화와이의 동포 들이 보내는 자금과 국민당 정부의 지원은 마른 하늘의 단비와 같았다. 이국땅에서도 독립을 원하고 있어. 그들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라도 보여줘야지. 우리가 더 분발하자. 한끼를 줄이자. 그럴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하자. 그러나 날로 커지는 조직을 갖춘 임시정부 요인들의 쪼들림은 비참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적단 처럼 민가를 습격하거나 은행을 털 수도 없었다. 독립군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행동할 수 있는 독립자금이었다. 그 때 소식 하나가 휴의의 귀에 들어왔다. 조선의 거부가 거액의 자금을 헌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경성에 잠입하는 임무를 휴의가 맡았다. 당사자를 만나 거금을 가지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일을 담당할 사람은 누구인가. 임정은 고심끝에 휴의를 선택했고 그와 동행할 인물로 젊은 여성을 추천했다. 이 여성은 일제에 부모를 잃은 원한을 품기 위해 자발적으로 임정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남은 생을 원수를 갚는데 쓰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여성 독립군의 이름은 차말려. 그러나 누구도 그게 본명인지 가명인지 묻지 않았다. 검문을 피하기 위해 하도 여러 개의 이름을 쓰고 있어서 말려 자신도 말려가 진짜 이름인지 가명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어쨌든 여성독립군은 음식이나 빨래며 부상병 치료까지 손이 안가는데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코 위에 안경을 쓴 임정의 지도자는 경성으로 떠나기 하루전 둘을 한 자리에 불렀다. 동지들, 이 번 일은 우리 조선의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임무요.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바라오.

그러면서 그는 손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러 휴의에게 주었다. 그러기 전에 여성에게는 봉투 하나를 주었다. 공작금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단발머리 대신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공손하게 봉투를 받았다. 그래야지요. 받드시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오겠어요. 여성 독립군이 당당하게 말했다. 말려 동지. 휴 동지와 함께 꼭 성공해서 다시 만납시다. 지도자는 두 사람을 양쪽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우리 정부의 공식 일정이요. 국무위원들의 승낙까지 다 받은 사안이니 책임감 있게 해 나가시오. 둘은 부부지간으로 위장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둘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했다. 남편도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요. 그와 난 일년에 한 두 번 겨우 만날 정도로 서로 바쁘게 살아요. 지금 그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그러면 혹시. 네 짐작한대로 입니다. 의열단장이 제 남편 입니다. 조직에 몸 담는 걸 싫어하는 남편이 혼자서는 도저히 일을 도모할 수 없어 조직을 꾸렸어요. 처음에 임정과 일정한 선을 둔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 사람은 오로지 무장투쟁으로써만이 독립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말로는 안 됩니다. 보여줘야지요. 그런데. 아 여자가 어떻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느냐고요. 성만 다를 뿐 마음은 남편이나 휴동지처럼 같아요. 되레 더 열성적인 여성독립군도 많고요. 훈련 교관을 하면서 늘 느끼지요. 총 쏘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요. 하지만 해내야지요. 심지어 우리는 수류탄 훈련도 했어요. 휴의가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엄지를 조용히 들어 올렸다. 굳은 표정의 여성독립군이 연하게 웃었다. 전 아직 솔로에요. 결혼할 여자도 없고요. 좋은 시절이 오면 친구를 소개할게요. 신념이 있고 무엇보다 잘 생기셨잖아요. 여성 독립군이 이번에는 휴의를 보고 엄지를 세웠다. 휴의가 엷게  웃었다. 마음에 둔 여성동무가 설마 없지는 않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매사에 휴 동지는 똑 부러지지 않아요. 남편도 그래요. 언제나 무엇을 남겨두는 스타일이지요. 쫒기는 사람의 공통점이라고나 할까요. 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과를 받으려고 한 건 아니고요.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이런 말도 해서는 안 되는데. 여성독립군이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을 담아서 말끝을 흐렸다. 아니에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신의주를 출발한 기차는 달리고 달려서 경성에 도착했다. 경성에 내린 휴의는 그제서야 점례를 생각했다. 잊었던 소중한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작전도 작전이지만 꼭 점례를 봐야지. 보지 못하더라도 생사라도 확인하자. 그런데 만났다고 치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만나기도 전에 휴의는 걱정이 앞섰다. 

임정 지도자에게도 이것은 비밀이었다. 물론 여성독립군에게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말하고 싶은 마음도 손끝만큼도 없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편하게 만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도 그는 점례를 만나야 한다. 경성에 도착한 후로 휴의는 그 사실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다. 역에서 모처로 이동하면서 휴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태평한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칼 찬 헌병들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더 빨리 움직일 것을 종용했다. 군인들이 사라지고 나서 한 무리의 또다른 군인이 박자를 맞추면서 역 구내를 순찰했다. 휴의는 저 무리 속에 완용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하면서 그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이제 완용은 친구가 아닌 적이다. 만난다면 적으로 상대할 것이다. 그는 일제 조선인 경찰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완용아. 더러운 짓 그만 하고 손을 떼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떼게 하마. 네 소식은 많이 들었다. 일제의 칭찬을 듣고 있다니. 그건 조선인을 억압한 결과겠지. 넌 지금 어디있니. 당장 종로서로 돌진할까. 그러면 좋겠지. 그건 조금 후에. 난 할일이 있거든. 경성에 없다고. 어라, 만주 관동군 지원 병력으로 갔다고. 엇갈렸군. 군경이 한 몸이 돼 만주국을 지워나고 독립군 잔당을 소탕한다고. 우린 잔당 아니거든. 헛다리 집지마. 우린 사단 병력이야. 넌 수배됐어. 일급 살인범으로 임정이 지시를 내렸거든. 널 만나면 즉시 처단하라고. 난 명령서를 외웠어. 그러니 우리 아는 체 하지 말고. 제거 대상 일호라는 불명예가 부끄럽지. 일호라서 기가 산다고. 그럴 거야. 넌 죽을 때도 먼저 죽기를 원하겠지. 그렇게 해 주마. 네가 뻣는 마수의 손길은 가벼워. 하찮은 거야. 그래서 난 그걸 자를 거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