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었요. 봐요. 살아 있어요. 지하로 내려가다 말고 여순은 창문밖에 쓰러져 있는 군인 하나를 발견했다. 가봐야 겠어요. 안돼. 거긴 노출이 됐어. 방금 전에도 총격전이 벌어졌잖아. 승리한 쪽이 이쪽으로 들이닥칠 거야. 우리도 안전하지 못해. 말수가 여순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여순은 완강했다. 버티는 힘이 잡은 팔뚝에서 드러났다. 마음을 정할 때 까지 좀 시간이 걸렸어요. 가야한다는 판단이 섯어요. 난 아직 귀신이 될 운명이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요. 걱정돼. 그러지 않아도 돼요. 말수는 좀 어이가 없었다. 이래도 되나. 그러나 틀린 행동은 아냐. 잡으면 난 뭐가 되고 그런 결정을 내린 여순은 후회할 지도 몰라. 말수는 난감했고 그런 얼굴로 여순이 결정을 바뀌기를 기다렸다.
잠깐 동안 난 아주머니를 만나고 왔어요. 접골 아주머니요. 굿을 잘해요. 아버지의 먼 친척이고요. 그 무당이 말했어요. 귀신이 왜 여기 있느냐고. 썩 꺼지라고 호통을 쳤는데. 나는 그러지 않고 버텼어요. 난 귀신이 아니고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때 내가 아주머니의 말을 믿고 뛰쳐 나갔더라면 난 정말 귀신이 됐을지도 몰라요. 말수의 눈이 커졌다. 이럴 때는 통영 뱃사람 같은 기운이 들었다. 그러나 살벌하기보다는 놀라눈 눈빛이어서 여순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그를 마주 보았다. 아직은 괜찮아요. 저런 사람을 두고 그냥 갈 수 없어요. 그가 필시 무슨 말을 할 거예요. 죽기 전에 잠깐 정신이 돌아온 거에요. 그런데 옆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봐요. 내가 그 옆에 있어야 해요. 우린 의사 잖아요.
그래도. 이 죽은 지도 몰라. 봐, 피가 군복옆으로 많이 흘렀잖아. 저 정도 양이 빠져 나갔으면 살기 어려워. 말수는 끝까지 말렸다. 자신의 임무를 다하겠다는 태도였다. 죽기 일보 직전에 잠깐 꿈틀거린거야. 저건 인도주의가 아냐. 당신이 나가지 않는다고 하나님조차 비난할 수 없어. 기습조였을 거야. 적진을 뚫기 위해 내달렸다가 마지막 까지 살았으나 몇 발자국을 남겨 놓고 저기서 저격당했어. 조금만 빨랐거나 늦었다면 창문을 넘고 여기로 왔을거야. 그가 죽어서 우리가 산 거야. 미군인가요. 여순이 확인하기 위해 아미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런 건 상관없어. 일본군이라도 마찬가지야. 그냥 구분하고 싶어서요. 일본군이라면 우릴 태우고 온 특공대 일지도 모르잖아요. 미안한 감정이 더 들어요. 우리 때문이잖아요. 그렇지 않아. 부상당한 군인들 때문이지. 그래도. 맞아. 미안하지. 검은 칠을 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젊은 그가 죽었다면 슬픈일이야. 말수의 말소리가 누그러졌다.
이럴때는 직선으로 가지 않고 우회해야 해. 소나기가 내리면 그쳤다가 가야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말수는 여순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정 그렇다면. 말수는 여순을 놓아주었다. 확인하고 금새 들어와. 여기, 마취약 가져가. 살아 있다면 잠시라고 고통을 덜어줘. 알았어요. 난 당신을 엄호할 게. 그러지 말아요. 군인도 아니면서 무슨 엄호에요. 엄호한다고 제가 살아나나요. 감이 라는 것이 있는데 적이든 아니든 지금 이 근방에 총을 들고 이쪽을 노리는 사람은 없어요. 확실한 거지. 자신도 모르면서 여순에게 묻고 있다. 믿도 끝도 없는 말을 말수는 했다. 안심이 되지 못하는 말이었다. 이쯤해서 대신 내가 갈께하는 타이밍도 놓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죽지 않고 할 말을 하고 죽을 병사라면 자신보다는 여순이 낫지. 여순을 보고 웃을 거야. 날 보고는 인상을 찡그리고. 말수는 자신을 변명했으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최후의 순간에 소 도둑놈 같은 얼굴이 노려보고 있는 것하고 천사의 눈을 가지고 엄마처럼 웃는 얼굴을 보는 것하고 당신이라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난, 지하통로를 확보하고 있을 게. 바로 돌아와. 이쪽으로. 말수는 여전히 미심쩍었으나 무사귀환을 확신하는 것처럼 자신이 가는 쪽의 방향을 여순에게 알려 주었다. 여순이 주사기 하나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병사는 죽어 있었다. 그의 몸은 따뜻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순은 죽은 병사의 눈을 감겨 죽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눈을 감을 시기를 놓쳤다. 여순은 일어섰다. 그러다가 풀썩 주저 앉았다. 자신을 태우고 온 일본군 특공대였다. 잠깐 아주 잠깐 여순은 젊은 군인과 눈을 마주쳤다. 고무보트에 올라탈 때 손을 잡아 주었었지. 해안가에 도착했을 때도.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아 주었던 병사의 손을 한동안 잡고 있었다. 잘 가시오. 부디 다른 세상에서는 총을 놓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아요. 그녀가 일어서려고 할 때 어디선가 검은 개 한바리가 어슬렁 거리며 다가왔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것이 사람한테 여러 번 당한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던 그 개는 피 묻은 혀로 쓰러진 병사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뜯어 먹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으나 그 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굶주림을 벗어났나. 숨 쉬는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나. 좀 전 까지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람인지 확인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싶었는지 검은 개는 여순에게로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사람의 마음을 개는 알고 있을까. 여순은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개가 공격할 기미가 없음을 알고는 조금 지체했다. 나도 네 주인이 아냐. 그러니 넌 가던 길을 계속가. 개는 가지않고 여순에게 다가와 몸을 비볐다. 처음에는 가볍게 나중에는 제법 힘이 들어간 몸짓이었다. 감히 핥지는 못하고 그렇게 개는 여순 곁에서 몸을 갖다 댔다. 여순은 또한번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몸의 감각, 이제는 자신이 내민 손을 핥는 끈적한 개의 혀를 느꼈다. 혀가 다가올때 마다 개는 거친 숨소리를 냈고 여순은 그 숨소리를 고스란히 개에게 돌려 주었다. 개도 여순도 서로 살아 있음에 안도 하면서 서로를 의지했다. 전쟁터에서는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았다. 난 살아 있어. 이건 명백한 사실이야. 삶과 죽음을 헷갈릴 이유가 없지. 이 개를 어쩌지. 여순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는 빠르다고 해서 혹은 그 반대라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순은 내민 손을 거둬들였다. 검은 개가 손을 따라 움직였다. 허리를 폈다. 두 손을 허리에 대고 고개를 젖혔다. 검은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네 모습이 저기에 보여. 너도 보이니. 그러나 검둥개는 보이지 않았다. 여순은 무엇을 잃어 버린 듯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개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순은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가야할 길을 안 개저첨 자신도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야 했다. 여순은 그러나 지하실로 바로 가지 않았다. 여기서 더 여기서 있고 싶었다. 그래서 무너진 창가까지 와서는 그대로 주저 앉았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 오래 살아남아서 전쟁을 기억하지. 여순은 기억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자 보령 죽마을 앞 해변의 해당화가 눈앞에 어른 거렸다. 제 버릇 개 못주지. 여순은 고향이 떠오르자 이렇게 중얼 거리면서 실없이 웃었다. 개가 떠나고 나니 개 속담이 생각난 거야. 이것도 버릇이라고 저도 모르게 나왔다. 그녀는 내려간 흰옷을 끌어 올려 팔뚝을 다시 드러냈다. 흰 옷보다 더 흰 살이 훤하게 드러났다. 시원한 바람이 흰 피부를 슬쩍 치고 지나갔다. 땀 냄새가 뜨거운 열기에 섞여 훅하고 끼쳐 올라왔다. 그래, 이 냄새야. 반가운 나의 냄새. 여순은 그 냄새를 기억하고는 히죽 웃었다. 거울이 있다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자신이 잘 웃는지 거울은 알고 있다. 여순은 그런 기분으로 몸서늘한 기운을 동시에 느끼기 위해 그늘이 지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여순은 이제 완전히 여유가 생겼다. 삶은 운명이야. 이렇게 편한 상태라면 총알이든 폭탄이든 그 무엇이든 온다고 해서 그리 기분나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들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눈꺼풀이 감겨오자 여순은 잠시라고 눈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말수가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날 기다려. 걱정을 덜어줘야지. 일어나서 가자. 그러나 몸은 어느 새 스스로 잠결에 빠져들었다. 내가 내 몸을 다룰수가 없어. 움직일 수 없어.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자. 여순은 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등에 박히는 작은 돌이 을 빼내야 한다고 손을 뒤로 돌렸으나 그러지 못하고 곧 잠이 들었다. 자세가 잡혀서가 아니라 아픈 것도 잊을 만큼 졸음이 위세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다시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발음이 산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지축을 흔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순의 몸은 생기가 돌았다. 짧은 수면이 그녀에게 다시 삶의 의욕을 방아쇠처럼 당겼다. 그때 바로 머리 위에서 굉음이 터졌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비행기가 무언가에 맞아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추락하고 있다. 일장기가 보이는 비행기 한 대가 꼬리에 불이 붙었다. 경험상으로 저 정도면 곧 땅에 떨어진다. 빙글빙글 돌다 급하게 부닥친다. 여순은 그 지점을 눈으로 따라갔다. 검은 물체는 기수를 바다로 급하게 바꿨다.
아직은 계기판이 일부 작동하고 있었다. 조종사는 살아서 자기가 움직일수 있는 힘으로 비행기를 마지막까지 조종하고 있었다. 안간힘을 쓰겠지. 얼굴은 일그러지고 마지막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의만 남았겠지. 자신이 죽는지 뭐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돌진하겠지. 기수를 바꾼 곳에는 커다란 군함 두 척이 섬 쪽으로 무수한 포를 발사해 댔다. 비행기는 곧장 거기를 조준했다. 애초 목적지가 그곳이라는 듯이 한치의 망설임없이 배의 중앙부를 향해 급하게 낙하했다. 비행기가 목표물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군함은 화염과 함께 검은 연기에 휩쌓였다. 붉은 것과 검은 것이 섞인 연기가 하늘로 솟아 오르고 있다. 장관이 따로 없었다. 여순은 팔을 머리에 대고 다시 누웠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를 포처럼 맞은 군함의 갑판위는 피바다가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순은 미군 군함에는 의사가 몇 명이나 타고 있을지 궁금했다. 적어도 저 크기라면 두 세명은 있어야 겠지. 간호사도 그 정도가 필요하고. 그래도 죽음을 막기는 어려울 거야. 살릴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자신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는 의사의 마음은 착잡하겠지. 여순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열기로 뜨거운 갑판 위에서 붕대를 들고 뛰던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까.
그때처럼 똑같이 사이렌이 울리고 의사들이 분주하고 비명소리는 거친 파도를 압도하겠지. 여순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서는 안돼. 제발 그러지들 말라고. 그때 또 한 대의 비행기가 고사포에 맞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이번에도 일본기다. 일장기가 선명할 정도로 산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급강하 하고 있다. 이번에는 굴로 떨어질까. 아냐, 바다로 가고 있어. 아까 그 군함이 이번에도 표적일 거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여순은 그 광경을 마치 미술품 감상하듯이 바라 보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옆에 누구라도 있다면 같이 보자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눈을 가리고 피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저것은 실화인가. 그럴거야. 여순은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순간포착이 가능하다면 비행기의 밑면에 붙은 화염이 위로 치솟는 저 모습은 분명 잡지에 실린 만한하다. 그러면서 여순은 조종사를 생각했다. 죽을 맛이겠지. 살아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그래서 두 번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리겠지. 그 순간에도 이런 여유가 있는 자신이 참으로 멋지다고 스스로에게 칭찬 세례를 퍼붓겠지. 그래 그래야하고 말고. 지금 이 순간 자신말고 자신을 추어 올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편대장일까. 노, 그는 조금 전에 자신보다 먼저 추락했다. 그래도 그는 정신 승리로 최고의 흥분 상태일거야. 천황을 위한다는 대일본제국을 위한다는 동아시아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이 있는 나의 죽음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덴노 반자이. 그의 최후는 엄마를 외치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일까.
조종사는 생각하겠지. 난 산다는 것이 뭔지 확실히 알아.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산다는 것. 천황을 위해 죽는 순간이 다가오면 이리저리 잴 필요가 없어. 구멍속에 숨어 나갈까 말까 재는 생쥐는 필요없다고. 좌고우면 하지 않고 직선으로 날아가는 거야. 이런 기분 누가 알겠어. 난 충성을 맹세한 가미카게 특공대. 여순은 방금 전 죽은 특공대원의 말을 복기했다. 그가 즐겼어. 그의 마지막 순간은 즐거움이었어. 난 알아. 안다고. 그러니 나도 즐겨볼까. 연출되지 않은 극적인 순간을 즐길 권리가 나에게는 있다. 이것은 전쟁에서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었다. 여순은 그러나 죽음의 순간이 뜨겁지 않았으면 했다. 살아 있을 때도 뜨거웠으니 죽을 때는 시원했으면 싶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이마에 난 땀을 식히는 그런 상태라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이런 공상에 빠진 나를 야만이라고 불러도 좋다. 야만인의 상태로 여순은 바지를 까고 오줌을 누었다. 다시 추락이다. 급하게 수습한 여순은 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떨어지는 비행기는 비슷한 궤적을 보였다. 처음에는 갈팡질팡 하다가 일직선으로 목표물을 행한다는 것. 하일라이트는 비행기가 배와 접촉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런데 너무 많이 떨어져. 잠깐 동안 세대를 보았어. 이건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거야. 살아서 나가면 인터뷰 해야지.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사이판에서 미군이 격추한 가미카제가 군함을 향해 돌진한 그 장면을 나 처럼 실감나게 연출할 사람이 있을까. 이런 모습도 보았어. 낙하산. 멋있더군. 아래서 보는 그 모습은.
그런데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건 미군 뿐이야. 태평양 가운데로 떨어져도 그들은 비행기와 함께 폭사하진 않지. 글쎄, 모르겠어.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지. 난 그저 보고 있어. 군함을 향해 돌진하는 비행기와 비행기와 따로 떨어진 낙하산을. 어떤게 용사의 최후에 가까울까. 낙하산은 비굴함일까. 군함으로 돌진은 용감함일까. 도마위 생선처럼 재단할 수 없어. 죽는 것은 좋은 것이고 포로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일까. 그 순간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 젊은 군인의 의식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인지 여순은 그것이 궁금했다. 죽음은 하찮은 것이고 삶은 가치가 있는가. 그나저나 말수는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개척했을까. 말수에게 생각이 미치자 여순은 일어섰다.
먹을 걸 챙겨보자. 하다 못해 물이라고 넣어야지. 여순은 허리춤에서 덜렁 거리는 수통을 만져 보았다. 그래, 온전한 물이 있을지도 몰라. 훤할 때 지형지물을 익혀 두면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있을 거야. 저쪽에 부서진 잔해들이 모여있어. 관공서나 중요한 건물인지도 몰라. 거기가면 물도 있고 약도 있고 과일도 있을지 몰라. 과일. 열대 과일. 여순은 바나나나 파인애플을 떠올렸다. 입에서 침이 고였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왕 늦은 것 저기까지만 가보자. 여순은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부서진 잔해를 피해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 그 생각이 이제야 났지? 다른 것은 다 필요없어. 일단 먹고보자. 혀에 백태에 낀 것처럼 껄끄러운 것은 앞니를 이용해 몇 번 쓸어낸 여순은 시원한 물과 과일을 생각하면서 계속 걸었다. 이런 내 행동은 부끄러운가. 말수는 나를 기다리면 걱정할까. 지하로 가는 안전통로를 만들었을까.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삼십 분만 더 쓰자. 그에게 무언가 만들어 줄 것을 찾으면 좋겠어. 그러나 여순은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걸었다. 사실 빠르게 걸을 힘도 없었다.
가는 길은 처참했다. 파괴된 것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조심해서 여순은 그것들을 피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여순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길은 거기서 끝겼고 우회로를 찾을 수 없었다. 여순은 돌아섰다. 부서진 성당이 저 멀리 보였다. 다른 생각말고 가자. 십자가가 달린 첨탑이 거꾸러져 있었다. 하늘이 아닌 땅을 보고 십자가는 누워 있었다. 가자. 저기로. 그런데. 성당쪽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시 폭격을 맞았나. 여순은 언뜻 생각했다. 자신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리다가 말수는 말했었지. 밖이 여기보다 안전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러니 가. 둘 중에 하나라도 살아야지. 여순이 갈 수 있도록 한 것은 말수의 이런 계산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냐, 내가 줄곳 근방에 있었어. 포탄은 없었어. 비행기를 떨어졌지만 포탄이 성당을 공격하지는 않았어. 다 허물어진 것에 신경쓸 군대는 없어. 여순은 안심했다. 그러자 발걸음이 조금은 빨라졌다. 그래도, 혹시. 말수의 안전이 걱정됐다. 말수마저 없다면 여순은 생존의지를 잃을 것이다. 여순이 부서진 성당의 문으로 몸을 조심해서 들이 밀었다.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의자에 손을 의지하면서 중앙통로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저기가 설교를 위한 탁자가 있었지. 제자리를 찾았네. 십자가를 뗀다고 가져 가더니. 여순은 그곳을 지나 말수가 가르켰던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때 앞쪽에서 약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여순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순을 보고 말수가 손을 흔들었다. 부상병이야. 그런데 방금 전에 죽었어. 이 피봐. 손을 씻어야해. 물은. 그가 피묻은 얼굴로 주변에 우물이 있기라도 한 양 두리번 거렸다. 여순이 다가갔다. 병사의 허리춤에 걸린 수통을 흔들었다. 묵직했다. 여기 물이 있어요. 그 생각을 왜 못했지. 일단 씻기 전에 먹자. 말수가 한 모금 마셨다. 여순이 수통을 받아들고 한 모금 먹었다. 쩍 갈라진 논에 물 한줄기가 지나갔으나 금새 스며들어 다시 마른 논이 됐다. 여순이 입안 상태가 바로 그 상태였다. 그러나 여순은 더 마시지 않고 눈이 안 보인다고 칭얼대는 말수의 손에 물을 조심해서 따랐다. 피가 눈으로 들어갔어. 지난 번에는 용케도 피했는데. 말수가 온갖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거면 될 거에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닦아내요. 일단 병사를 저쪽으로. 말수가 여순에게 다리쪽을 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곧 그는 그러지 않고 두 손을 잡고 움직였다. 여순이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같이 있는 게 낫지. 손들이 있는 곳으로 말수가 병사를 끌고 갔다. 어찌된 영문인지 여순은 묻지 않았다. 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밖의 상황이 어떤지 관심없다는 태도였다. 갑시다. 말수가 여순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순이 지하 계단쪽으로 가기 위해 그쪽으로 가자 악취가 풍겨왔다. 팔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는 쪽에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말수는 코를 막았다. 여순도 말수를 따라했다. 참기 힘들었다. 이런 냄새가 있을까. 지옥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 때문에 말수는 피가 덜 닦인 손으로 코를 잡았다. 이것은 부상병의 섞어가는 살에서 나는 보다 더 지독했다. 그는 손을 외면하고 지하 계단의 입구로 내려갔다. 여순이 뒤따랐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은 없었다. 산 동료들은 이미 떠났고 죽은자들만이 제세상인 것처럼 누워있을 뿐이었다. 여순은 말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짝 등뒤에 붙었다. 그런데 자신의 뒤에 누군가 자신처럼 붙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개였다. 개의 옆구리가 여순의 다리을 비벼댔다. 검둥이. 여순은 반가워 검둥이의 등을 쓸어 내렸다.
충분히 배부른 개는 말수를 보자 경계하기보다는 뒷걸음질 치다가 다시 여순 옆에 붙었다. 말수에게는 이제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짖는 것도 피하는 것도 다 귀찮다는 듯이 계단 참에서 서서 혀를 길게 빼고 헉헉 거렸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배를 드러내고 벌렁 드러누웠다. 불룩한 배가 숨 쉴 때마다 위로 아래로 흔들렸다. 거대한 군함이 엄청난 파도에 이리저리 쓸리는 것처럼 위로 아래로 헐떡였다. 그 옆에 여순이 쪼그리고 앉았다. 개가 일어나 밖에서 처럼 여순의 손을 핧기 시작했다. 여순은 그 때처럼 내버려 두었다. 혀의 감촉이 껄끄러웠다. 검둥이도 물이 필요한가. 여순이 수통의 물을 손에 조금 따랐다. 검둥이에게 내밀자 그가 몇 번 핧았으나 목마르지 않은지 금방 멈추었다. 물 대신 피를 많이 마신 탓이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말수가 벽돌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여순이 거들려고 했으나 벽돌을 잡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검둥개에 의지해 몸을 반쯤 뉘었다. 몸이 편해지자 여순은 다시 잠깐 잠이 들었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여순은 잠이 깼다. 오분. 길어야 십분이다. 그러나 여순은 몸이 좋아진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두어번 쓸어 내리고는 말수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구멍이 보였다. 말수는 안쪽에 있었다. 내려 오지 말고 거기 있어. 정리좀 하고. 말수가 말했다. 여순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제 됐어. 들어오고 나서 통로를 막자. 혹시 아까 부상병처럼 누군가 들이닥칠지도 몰라. 부상병이었으니 망정이지 산 군인들이었다면 나도 지금쯤 냄새를 풍기고 있을거야. 말수가 그것도 농담이라고 꺼내 들었다. 들어와. 개는 어쩌고요. 개까지. 그럴 수 없어. 개가 있으면 우린 들킬거야. 여기서 오래 버텨야 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요. 어쩌면. 그러니 개는 밀어버려. 그럴 필요 없네요. 그럴 줄 알고 저 쪽으로 나가고 있어요. 들어와. 손 잡고. 말수의 손이 길게 뻗어 나왔다. 마치 죽은 자의 손처럼 그것은 어둠 속에서 나왔다. 팔의 나머지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처럼 말수는 몸통을 숨기고 있었다. 여순이 내려갔다. 기적이군. 통로를 쉽게 만들었어. 자, 여기 지하 계단이야. 먹을 게 있을 거야. 곡식 냄새가 나. 신부님이 포도주가 있다고 했어. 통조림도 있을 거야. 우린 살았어. 언제는 죽었나요. 죽었으면 여기 올 수 있겠어요. 여순은 자신의 농담의 말수의 농담보다 차원이 높다고 생각했다. 여순이 다 내려오자 말수는 통로를 막았다. 들어온 쪽을 허물어 뜨릴때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돌을 놓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나무로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을 만들었다.
이제 출입구는 봉쇄됐다. 추격자들은 이곳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멋지게 따돌렸다. 누구도 이곳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됐다. 그렇다면 여러날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다.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안성마춤인 셈이다. 누울 자리를 정해 놓고 말수가 여순을 안내했다. 여기야, 오성급 호텔이라고 생각해. 최고급 호텔을 말하는 거야. 그런 곳에서 자면 잠이 잘 오나요. 몰라. 나도. 그런 경험이 없어. 하지만 경험해 본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야. 기회가 있다면 좋겠어요. 비교해 보고 어떤 잠이 더 좋은 잠이었는지 그때 가서 말해줄게요. 그 말은 희미했다. 나머지 하려고 했던 말들은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여순이 눈을 떴을 때 밤인지 낮인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은 빛 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밝은 쪽이 있는지 살폈으나 어디에서 그런 흔적은 없었다. 말수는 등을 돌리고 있다. 그것 역시 눈으로 보아서 안 것이 아니다. 손으로 더듬어 보아서 알았다. 적막. 빛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성당의 지하실에는 소리조차 없었다. 애초에 세상에 소리가 없었던 것처럼 어떤 움직임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요인가. 소음에 귀를 막았던 것이 언제인가. 이제는 다 열어 젖혀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리운가. 소리없는 전쟁의 소리가.
이것이 가능한가. 꿈일 거야, 동화속 이야기겠지. 그러나 꿈도 동화도 아닌 현실이었다. 소리가 사라진 곳에 냄새가 스며 들었다. 약하게나마 다시 후각이 작동하고 있었다. 촛농이 떨어져 내릴 때 나는 그런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여순은 말수가 촛불을 켠 사실을 상기했다. 켜볼까. 아냐, 이대로가 좋아. 촛불도 아끼자. 그보다도 말수가 깰 때까지지 그대로 있자. 잠이라도 실컷 자야지. 남는 게 잠이라고 하잖아. 그러면서 여순은 촛불을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녹아내리는 촛녹이었다. 촛농이 한 두 방울씩 아래로 흘러 내일 때 나는 냄새. 그 냄새를 여순은 기억하고 있다. 접골 아주머니가 춤을 출 때면 박자를 맞추듯이 촛불도 일렁였다. 눈물처럼 흘러 내리는 촛농에서는 싫지 않은 냄새가 났다. 바로 그 냄새였다. 익숙한 것에 여순은 용기를 냈다. 그 덕분인지 시각도 점차 돌아왔다. 여순은 눈에 힘을 주고 이물질을 손으로 빼내려는 듯 손에 눈을 대고 여러 번 깜박임을 계속했다. 조금 나아지고 있다. 검은 장막 속에서 희미한 무엇인가가 보인다. 노력한 보람이 있다.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여순의 눈앞에 과연 작은 불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밤하늘의 은하수. 먼동이 틀 무렵까지 참았다가 자신의 잠자리로 떠나는 행위였다. 왜 은하수는 그랬을까. 미리 잘 수도 있잖아. 사람이 구경할 수 있도록 그랬던 거지. 밤하늘을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잠을 참은 거야. 간혹 새벽까지 보는 사람이 있거든. 물체는 선명해 지고 있다. 다가온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나중에는 두 명이 그 다음에는 여러 명이 등장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어 올랐다. 순식간에 무대를 장악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어. 손을 잡고 있나. 따로 놀고 있네. 그런데 어느 순간 춤을 추는 사람은 혼자였다. 착각이었다. 혼자서 이리저리 홀을 휘젓고 다녔다. 여순은 넋 놓고 그 모습을 응시했다. 누군가. 누가 저렇게 멋진 폼으로 춤을 추는가. 여순은 박수를 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 까지는 아직 허용되지 않았다. 마음은 여러번 박수를 쳤지만 지친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대는 사라졌다. 댄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음악은 계속 울리고 있다. 점점 커진다. 그만. 이제 그만. 여순은 박수가 아닌 머리를 감싸쥐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직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순이 어둡고 긴 터널의 끝을 통과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직 덜 깨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마취가 덜 풀렸나. 환영을 보고 있다. 아직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정확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느낌은 싫다. 차라리 아픈 것이 낫다. 벗어나자. 여기를 빠져 나오자. 난 최면에 걸렸어. 벗어나야 해. 여순은 발버둥 쳤다. 그러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빛이, 형형색색의 빛이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발버둥 칠때는 감각의 끈을 잡을 수 없었으나 포기하고 드러누우려고 하자 점차 기운이 돋았다. 내 마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어. 하지만 결과가 좋으니 불만은 아냐. 일어나 보자. 아니 그러기 전에 앉아 보자. 여순은 두 팔을 올려 기지개부터 폈다. 그러자 아침잠에서 깬 것처럼 놀랍지도 않게 정신이 돌아왔다. 그런 상태로 여순은 자신의 의지대로 일어나 앉았다. 그 순간 여순은 지상의 어디에도 없는 안전한 곳을 발견한 기쁨에 몸이 들떠 올랐다. 그것은 살았다는 원초적인 안정감이었다. 죽지 않고 살았어. 그녀는 팔뚝을 쓸어 내렸다. 여전히 붕대가 있지만 감촉이 느껴져. 살아 남은 자의 촉감은 이런 거야. 어떻게든 살려고 했더니 정말 살았어. 죽지 않고 산거야. 그래서 썪지 않고 악취도 없고 이렇게 있어. 정말 용해. 용도 하지 우리 여순이. 여순은 자신을 추켜세웠다. 그래 난 산거야. 살았다는 것, 아프지 않고 온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여순은 두 손을 위로 뻗어 올리며 만세를 불렀다. 만세 대한독립 만세다 만세.
이것은 봄의 햇살이 푸른 들판을 뒤덮고 있는 것이었다. 아지랑이 너머로 온각 꽃들이 출렁이고 있어.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와. 한꺼번에 나에게 달려 들고 있어. 온통 노랑으로 바뀌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아. 좋군. 목이 마르네. 여순의 눈이 그런 모습을 따라가면서 정신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바싹 말라 타는 여름날의 갈라진 논처럼 세로의 줄이 여기저기 얽혀 있었다. 피가 나와. 입에서. 아니 입술에서. 말을 하려고 입을 떼지 말자. 생각만으로도 족해. 아니 생각은 이쯤에서 그치자. 물을. 물 좀 줘요. 물 말이에요. 여순이 할 수 있는 간청의 말은 여기까지 였다. 그 말을 하고 나자 갈라진 입술에서 세 갈래로 피가 맺혔다. 나야 여순아, 말수가 있어. 네곁에 있잖아. 네가 찾는 말수가 왔다고. 말수는 이 말을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내가 찾는 말수라니. 정말로 여순은 말수를 애타게 찾았을까. 말수도 일어나 앉았다. 부스럭 거림과 움직임으로 여순은 알았다.
말수의 부드러운 음성은 이어졌다. 내가 왔다고 말수가 있다고. 마치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부르면서 말수는 여순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말수의 눈에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살았다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보지 않아도 안다. 그 표정. 여순은 가만히 그의 어깨쪽으로 몸을 기댔다. 촛불을 켜요. 그래. 어디 있드라. 여기 있군. 딱하는 소리와 함께 화약냄새가 연하게 나면서 불이 확 피어 올랐다. 눈이 부셨다. 여순은 고개를 돌렸다. 다시 고개가 원위치로 왔을 때 촛불이 가볍게 흔들렸다. 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기가 드나들고 있었다. 말수는 촛불이 그녀 주변에 너무 가까이 있자 초를 들어 옆으로 옮겼다. 불빛이 여순의 얼굴을 한 번 더 가볍게 스쳤다. 말수가 여순을 보았을 때 여순도 말수를 보았다. 우린 죽지 않고 살았어요. 당신 혈색이 좋군요. 당신도 그래. 희지 않고 촛불처럼 붉다.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다. 경험으로 말수는 그것을 알았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왔다. 그는 자신이 이제야 철들고 있다고 느꼈다. 완전한 어른이 됐다고 여겼다. 툭 하면 욕설을 하고 침을 뱉던 천한 사람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이제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완전한 남자를 말수는 보았다. 자신이 자신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수는 알았다. 내가 나를 보고 있어. 그것은 너무 늦게 왔지만 지금이라도 왔으니 얼마나 좋은가. 조금 일찍 왔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되레 나빠졌을 수도 있다. 그래 나는 운명을 따랐고 운 좋게도 그 운명이 나를 여기로 인도했다. 안도감에 말수는 울컥했다. 그녀를 혼자 밖으로 나가게 했던 괴로움이 일순 사라졌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홀로 둘 수없어. 이렇게 작고 여린 여순을 내버려 두다니. 미안해 여순아, 다신 그러지 않을 게. 무엇을. 여순을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자신을 물론 말수를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그는 한 여자 앞에서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다. 용서를 빌고 있다. 느닷없이 그런 마음이 들었다. 걷잡을 수 없는 파도처럼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왔다. 마침 장소도 그러기에 적합한 예배당이다. 이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하나의 질긴 끈으로 묶여 있었다. 까만 밤의 어둠은 지나갈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월의 달콤함 뿐이다. 말수는 온기가 차오르는 여순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때 그녀는 작은 제단 앞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보았다. 왜 그가 나를 쳐다보는가. 여순은 살아 있는 예수가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살아 있는 진짜 예수였다. 성당 안에 가짜가 아닌 진짜 예수가 있었다. 예수는 엄청한 소란이 아닌 정적 속에서 왔다. 그가 여기서 부활했다. 못이 박힐 때 지었던 험상궂은 표정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순은 자신에게는 예수를 구원할 힘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난 그럴 힘이 없어. 내 꼬라지를 보라고. 옷은 찢어지고 얼굴은 상처 투성이야. 팔목의 붕대는 풀지 못하고. 잘 차려입어야지. 행색도 바르게 하고. 팔도 낫고. 그래야 구원을 하지. 그래, 난 그럴 아직 상태가 못돼. 한마디로 이 광경을 즐길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 모든 것은 혼란 그 자체였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곳에 머무를 자격이 그녀에게 없었다. 이곳의 주인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였고 자신에게 구원을 바랐던 바로 그 예수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내민 손을 잡아야 한다. 여순은 또 한 번 안간힘을 썼다. 의식의 저편에서 조금 더 힘을 써보면 어떻게 될지 아느냐고 스스로 몸의 뒤를 밀었다. 그러나 미는 힘은 약했다. 그녀 스스로 바닥을 치고 있는 몸 상태를 끌어 올려야 한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었다. 벽을 집고 일어서려고 용을 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이 움직였다. 의아했다.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다니.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달라질 것이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나아가야 한다. 내가 그러지 못하는 것은 부러진 돛 때문이 아니다. 항해사는 필요 없다. 그 정도는 스스로 해낼 수 있다. 여순은 쓰러진 것을 어깨에 매고 무엇을 매달기에 좋을 만큼 똑바로 세웠다. 돛이 서자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배가 움직였다. 움직이고 있어. 그래 이제부터 항해를 시작하는 거야. 말짱한 상태는 아니어도 그런대로 괜찮다. 괜찮아. 봐, 손도 움직이잖아. 손을 꼽아 숫자를 셀수도 있다고. 더구나 이곳은 성당이고 안전하기도 하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좋다. 소리로 깨우칠 것도 없으니. 어둠이 더 깊은 곳으로 잡아끌지도 않았다. 도와달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듯이 애초 그대로의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보여. 십자가. 그렇지, 그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일은 없어. 내가 해야지. 그래 무엇을 할까. 여순은 말수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잡은 손의 온기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미워했다가도 그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마음 때문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말수를 보고 맨 처음 마음이 움직여서 보인 행동은 눈물이었다.
눈물은 용서를 의미했다. 자신을 용서했고 말수를 용서했고 신을 용서했다. 그런 마음이 왜 이제야 왔느냐는 타박이 아니었다.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 여순은 이제 그 어떤 것이 와서 마음을 흔들어도 중심을 잡을 것이다. 이것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모두 사실이었다. 말수도 진실이었고 여순도 진실이었다. 진실앞에서는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둘은 서로에게 존재가 선명한 사람이 되자고 손가락을 걸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두 사람에게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이런 자신은 자신을 끝장내기위해 작정하고 달려드는 자도 막아낼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러나 며칠을 굶주인 여순은 다시 정신줄을 놓았다. 매달린 예수가 자신을 또다시 내려다보는 눈길과 마주쳤고 이어서 어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여순은 말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을 누구한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두려웠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 다시 찾아왔다. 지금까지는 잘 막아냈으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이것이 동화 속 이야기라면. 꿈에서처럼 깨고 나면 지나가겠지. 여순의 어깨에 두 팔을 얹은 말수는 여전히 그 팔을 내려 놓지 않았다. 그래, 이 두 팔. 나는 결코 두 팔을 내려 놓지 않을 거야. 두 팔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지도 않을 거야. 두 팔을 옆으로 벌리지도 않을 거야. 그러면 여순에게서 손이 떨어지고 말거야. 말수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여순을 세게 안았다. 아, 그 모습. 나는 보았지. 몸을 구부리고 우뚝 솟은 바위를 향해 몸을 던지는 많은 사람들. 그때 바위 주위에는 흰 포말이 성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어. 그것을 보면서 떨어지는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지. 그리고 바로 수직낙하. 그것은 전투기의 돌진과는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든 살려고 하지 않고 죽으려고 발버둥쳤어. 그 사람들은 죽으려고 뛰어든 게 아니었어. 집단 최면, 구석에 몰린 강요. 번지점프에 나선 연예인들처럼 그들은 반자이, 덴노 반자이, 반자이 하면서 쉴 새 없이 낙하했다. 떨어져 내리는 것은 꽃잎이 아니었어. 새들의 먹이 활동도 아냐. 그것은 생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뛰어내리고 있다. 수도 없이. 수도 없단 말이야. 셀 수가 없어. 달려가서 그러지 말라고 말려야지. 그러나 말수는 그들을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돌봐줘야 할 상태가 아니었다. 오금이 저려오자 말수는 소변을 참기 위해 다리를 꼬았다.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왔다. 말수는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그들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보기까지 했으나 헛수고 였다.
군복입은 사람과 치마 잎은 여자와 우는 아이들이 지르던 불과 하루전의 그 함성에 대해 말수는 오만 인상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빨리 잊을 수 있을지 머리를 가로젓기만 했다. 여순. 그가 돌봐야 할 대상은 뚜렷했다. 봄의 꽃처럼 낙하한 사람들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만져지는 온기가 있는 여순이었다. 그날 밤 말수는 흰 포말 위에 붉은 피가 일렁이는 절벽이 벌떡 일어서서는 자신을 덮쳐 오는 꿈을 꾸었다. 절벽처럼 벌떡 일어난 그는 이마가 온전한지 손으로 집어 보았다. 그만큼 꿈이 현실적이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꿈을 꿔 본 사람들은 안다. 제일 먼저 깨어나서 하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수는 이마에서 뗀 손을 눈 가까이 가져왔다. 다행이 피 대신 땀이 번들거린다. 괜찮아, 말수는 그런 말을 입으로 되풀이하면 안심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을 위해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한편 경성에 발을 디딘 점례는 뛰는 가슴의 고동을 느꼈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사지에서 돌아왔을 때 받는 느낌은 남다른 것이다. 고향도 이런 고향이 없다고나 할까. 지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점례는 이제 자신은 살았다는 것에 확실한 안도감을 느꼈다. 조선사람이 조선 땅에 왔으니 제나라에 온 것이다. 금의환향은 아니어도 돌아온 탕자처럼 거지꼴로 온 것은 아니다. 더구나 유마와 함께 있었던 시절까지 연장하면 점례의 경성 도착은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남들이 보면 그랬으나 점례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경성역을 확인한 순간 잠지 술렁였던 가슴은 진정됐고 마음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보다 더 한 꼴도 있었는데. 경험은 점례를 차원 높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경성역에 도착해 광장에 나서자 기차역에서 내린 사람답게 일단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대했던 경성역이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확인해 보니 다른 데 가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들고 나는 사람들은 그때처럼 분주했고 하늘은 더 맑고 푸근했다. 광장은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몇 대의 인격거가 한쪽에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점례는 한동안 광장의 중심부에 서서 어디로 갈지 막연한 사람처럼 서성였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중나온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애초에 없었던 것이 갑자기 나타날리 만무하다. 이 많은 사람가운데 나를 아는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이건 다행인가 불행인가. 가만 있어보자. 그러면 혹시 아는가. 불쑥 누군가 나타나서 자신의 손가방을 받아 줄 사람이 있을지. 그래, 맞아. 조선 청년. 그가 먼저 와서 오래 기다리셨죠. 워낙 사람이 밀려서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말하고 있다. 어림없는 소리. 가자. 이쯤해서 내 감정은 다 정리됐다. 설레는 마음은 여기에 내려두고. 그러나 점례는 쉽게 광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변을 한 바뀌 둘러보았다. 이곳이다. 내가 떠난 곳이. 그러면서 점례는 줄지어서 트럭을 기다렸던 그때의 일을 기어이 떠올렸다. 여기서 끌려간 거야. 여순은 어찌됐나. 여순아. 잘 있는 거지. 잠례는 혼잣말을 했으며 그 여순이 자신을 찾고 있기라고 하는 양 다시 사방을 관찰했다. 그리고는 일부러 몇 차례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반갑게 웃어 보이기도 했고 왜 이제야 왔느냐고 그런 언찮은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나를 맞이하는 그녀의 태도가 불만인 것처럼 점례는 반짝이는 가죽구두의 끝으로 땅을 몇 번 차기도 했다. 그 행동에는 여유가 있었다. 만족감이 듬뿍 묻어 있었다.
경성에 도착한 기분은 이런 것이었다. 새로운 기분,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알리는 그런 산뜻한 기분이 점례의 전신으로 봄햇살처럼 파고들었다. 그녀는 사 년 전의 점례가 아니었다. 보따리 하나를 가슴에 품고 겁에 질려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무언가 다가올 공포에 질려 처분만 기다리던 점례는 거기에 없었다. 세련된 옷차림으로 가죽 가방 하나를 든 그녀가 광장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렀다. 방금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뜨기 행세로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도 이제는 싫었다. 도착한 기분을 다 냈으니 내 일을 해야 한다. 내 일, 그래 내일이 있어. 남이아닌 내가 주도하는 내일 말이야. 그녀는 외국물을 먹고 경성에 막 도착해 누군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모던 걸의 발자국을 뽐내면서 앞으록 걸어 나났다. 멀리서도 그녀가 제법 걷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뿐했다. 목적지는 정해졌다. 이제 멈추지 말고 일직선으로 가자. 그녀는 잊은 것이 느닷없이 생각났다는 듯이 빠르게 몸을 재촉했다. 그래, 삼촌을 찾아 가야지. 유마 삼촌. 삼촌을 떠올리자 유마가 따라왔다. 나의 은인. 그는 잘 있겠지. 그에게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써야해. 서두르자. 그렇지 않아도 빠른 걸음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 날렵해졌다.
곧 해가 질 것이다. 아무리 제나라라고 해도 여자 혼자서 밤을 맞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여관에 들면서 허물없이 혼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해지기 전에 삼촌을 만나 유마의 말을 전해야 한다. 전선의 유마 대장이 보낸 점례 입니다. 이렇게 그래 이렇게, 나를 소개해야지. 첫인상이 중요하잖아. 유마에게 어울리는 그런 여자로 인정받아야 해. 점례는 마음이 급해졌다. 약속에 늦은 사람이 목적지을 찾아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이 점례였다. 그래 유마, 나의 유마. 유마 생각이 점례의 머리에 한 번 더 머리를 스쳐 지나가자 다른 것은 시시해졌다. 이제 그 생각만이 점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녀가 광장을 질러 종로 쪽으로 방향을 잡을 때 저쪽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군용트럭이 줄지어 들어왔다. 점례는 시선을 돌리고 싶었으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추 보아 십여 대였는데 그곳에는 짐대신 군인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한편으로는 막 도착한 트럭에서 수십 명의 여자 애들이 내리고 있었다.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고 말았어. 눈을 돌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여자들이 올라타고 있어. 총을 든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네. 높은 차를 타는 것도 처음이어서 그들의 행동은 굼뜨고 어색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했으나 되레 그 행동이 위태롭게 보였다. 지난날 자신의 모습과 그대로였다. 점례는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구 떨려와서 모던 걸의 걸음걸이는 어느 새 사라졌다. 술꾼처럼 발길이 비틀거렸다. 잡아야지. 점례야 정신 차리자. 저기에 너는 없고 여기에 너가 있어. 그러니 구멍이 있다면 숨어드는 쥐처럼 눈치를 살피지 말고 당당히 가자. 그러나 마음이 그렇다고 행동이 바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호각소리. 아주 친숙한 소리. 같은 호각 소리라도 점례는 그것이 주는 각기 다른 의미를 알았다. 아, 짜증이 잔뜩 묻어 있어. 그래. 그렇지. 다급한 군홧발 소리가 따라오는 건 그것을 증명해. 아, 이를 어째. 겨우 승차한 그녀들은 트럭의 양쪽에 있는 나무 의지에 줄지어 앚았다. 여순은 그 자리에 못처럼 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저렇게 내가 저렇게 내가 앉았어. 변함게 없네. 그때나 지금이나. 점례는 어쩌나 보려고 가던 길을 돌려 그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왜그랬는지는 모른다. 저도 모르게 따라 했다는 표현처럼 점례가 딱 그런 상태였다. 그때 보따리 하나를 가슴에 안고 주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눈과 점례의 눈이 마주쳤다. 그 뜻을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소녀의 눈. 그 눈. 바로 그 눈이야. 점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내 눈이 저 눈이었어.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호기심. 점례는 가방을 든 손을 꽉 쥐었다. 가방대신 보따리를 안았다면 바로 저 트럭으로 실려갈지 몰라. 입술이 타네, 혀가 뱀처럼 두 갈래로 갈라지는 느낌이야.
뜨거운 불기둥이 갑자기 점례의 가슴을 치고 달아났다. 숨이 꽉 막혀왔고 심장의 고동이 기차 연기처럼 솟구쳐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들이 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지마. 소녀들을 트럭에 싣지마. 어디로 데려가려고. 목적지는 알려 준거야. 거기 도착해서 하는 일이 어떤 건지 알려는 줬냐고. 제발, 눈치를 보고 뛰어 내려. 도망가. 어디든 그곳 보다는 나아. 고향에 갈 수 없다면 이 경성 바닥에서 기회를 노려. 제발 그 보따리를 던져. 그리고 트럭에서 내려. 점례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갈라진 입술 사이로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 보따리를 저 소녀가 안고 있다. 저 여자가 안고 있다고. 저 소녀는 나인가, 아닌가. 이런 혼란에 빠져들었다. 현기증이 심해진 그녀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잠시 서서 머리에 손을 댔다. 이마에서 불이 났다.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깊은 바다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올라가자. 더 지체 하면 숨쉬지 못해 죽을 거야. 그 일은 내 일이 아냐. 할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해 있지 않아. 그녀는 가방든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어찌할 줄 몰라 가방을 잡지 않은 남은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서너 번 쳤다. 그러자 막혔던 것이 뚫렸는지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직 트럭에 오르지 않은 대오를 맞춰 줄 선 여자들이 그 대오를 유지하면서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저쪽에서도 십여 명의 젊은 여자들이 마주 와서 합쳐졌다. 도합 30여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점례는 눈을 감았다. 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저절로 그렇게 됐다. 이런 모습을 보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경성역에서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억은 줄기차게 살아났다. 사라지려는 기억을 살린 것은 만주가 아닌 경성이었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닌데 마치 그런 처지에 몰린 것처럼 점례는 체념의 시선을 그녀들에게서 서둘러 거두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누구도, 내가 아닌 그 누구도 그녀들이 어디로 가든 상관할 수 없을거야. 낙담한 그녀는 어찌해야 할 지 몰라 광장에 우두꺼니 서 있었다. 그 시간은 짧았으나 어떤 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들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지체했다가는 어찌될지 알 수 없었다. 경성역에서 객사한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인가. 이런 일이 진행되는 동안 해는 자꾸 뒤로 밀려났다. 상쾌한 기분은 불쾌한 시선에 급하게 식었다. 짧은 도취의 순간을 뒤로 하고 점례는 종로 3가를 조용하게 외쳤다. 어쨌든 이제 시작이야. 내 인생은 다시 시작하는 거야. 빠를수록 좋아. 잊는 것은. 새로운 기억을 채워넣자. 그 기억은 이전의 기억보다는 좋은 거야. 그럴거야. 당연하지. 난 그림을 그려야 하고 유마는 곧 전역할 거야.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나도 몰라. 하지만 지금보다는 곱절은 나은 인생이 될 거야. 그러니 점례야, 나아가자. 앞으로 가는 거야. 말밥굽 소리를 들으며 점례는 귀부인이 된 듯이 등을 가볍게 뒤로 뉘었다. 그래 난 그때의 내가 아냐. 이곳 경성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없어.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주눅들지 말고 당당히. 그림의 열정하나만 붙잡고 가는 거야. 고흐의 열정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