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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같은 침묵을 여순은 성당안에서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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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같은 침묵을 여순은 성당안에서 목격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7.1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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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리고 얼마후 또다시 잠과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여순은 알다가도 모를 일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금방이라도 절멸할 것 같은 기세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푹 꺾여 버렸다. 이게 가능하냐고. 귀를 막아도 소용없던 소리가 두 귀를 다 열었는데도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 문제가 생긴걸까. 두 귀 모두 먹은 것은 아닐까. 안 들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말수는? 어디있지. 눈도 이상한가. 시력에도 문제가 왔나봐. 여순은 제멋대로, 떠오르는대로 생각의 끈을 이어갔다. 방금 전에는 지옥이었어. 지금은 천국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야. 아무런 위협도 없어. 고요의 방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아. 휴가라도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지옥과 천국은 따로 있지 않고 늘 같이다닌다고 하더니. 지옥은 사라지고 천국이 왔어. 맞아, 세상은 시끄러움만 있는 건 아냐. 이것봐. 이렇게 조용하잖아. 늦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부모님과 식구들은 모두 일터에 나가고 혼자 남은 방안에서 이게 무슨일이지? 세상은 왜 멈춰있지? 하는 유년의 기억 한자락이 올라왔다. 그래, 그때와 같은 침묵이 지금 왔어. 여순은 그 때의 일이 우연찮게 찾아온 이후로 곧잘 그 순간과 연결 시킬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렇게 했다. 

기세좋게 쏟아지던 총소리의 연주가 멈추자 하늘의 구름도 사라졌다. 숨어있던 해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대기는 용광로 속처럼 다시 절절 끓어 올랐다. 좋은 게 아니구나. 더워. 너무 덥다고. 여순의 손을 부채인 것 처럼 하고 얼굴쪽을 향해 부쳤다. 그것도 바람이라고 조금 시원해 지는 것 같았다. 땀이 말라가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말이 된다. 말이 안 되는 것은 없다. 사실이니까. 눈앞에서 확인한 것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더워. 이렇게 덥지. 말수가 말했다. 어디있다 왔어요.어디 있긴. 곧장 여기 있어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정신이. 괜찮은 거에요. 내 걱정은 말고 널 걱정해, 여순아. 말수는 부드러워져 있었다.아니 늘 부드러웠다. 이 사람 이래도 되는 거야. 그는 원래가 이런 사람이었다. 뱃일 하면서 잠시 나갔던 실체가 회복된 거야. 난 괜찮아. 팔은. 어 그러고 보니 소독해야 겠어요. 어디 보자. 붕대를 풀었다. 굴 속에서 맡았던 냄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물고 있어. 보이지. 고마워요. 함장에게 해야지 그말은. 아직도 함장을 생각해요. 며칠이나 됐다고. 난 벌써 잊었어요. 몇 십년의 세월이 흐른 것처럼. 함장의 얼굴 생김새나 목소리 전혀 기억 안나요. 그래도 고마운 거는 고마운 거지. 알아 모시지요. 함장님, 고마워요. 살아서 도쿄로 돌아가세요. 이 걸로 신세는 갚았어요. 그런데 너무 덮지 않아요. 왜 안 그러겠어. 나 좀 봐. 얼굴이 화근 달아 올랐지. 그러네요. 기름기가 번져요. 피부는 이상무. 한 군데라도 정상이니 다행이야. 

몸에서 나는 열기는 온도로 증명되고 있었다. 기온은 급상승하고 있었다. 체온계를 대봐. 약통을 열어야 해. 힘들면 관두세요. 하라는 말보다 더 심하네. 말수가 잔소리를 하면서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걸어가기보다는 기어서 몇 걸음 옮겼다. 어라, 40도가 넘었어. 벗어놓은 옷은 다 말랐어. 축축하던 것이 일시에 말라버렸다. 그러게요. 쑤시던 신경통도 씻은 듯 나은 듯 싶고. 그게 뭐에요. 응, 뱃사람의 일기예보. 설명이 필요해요. 이렇게 날이 건조하면 쑤신 다리가 거뜬 하거든. 비가 며칠 연속해서 내려 대기가 축축하면 미칠듯이 쑤셔대지. 마치 송곳으로 종아리 곳곳을 찌르고 다니는 거 같아. 난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건강하다는 증거야. 다행이군요. 

이곳의 날씨는 전쟁을 닮았다. 축축한 것도 예고 없이 왔고 마른 것도 그랬다. 전쟁과 날씨. 천국과 지옥. 반대되는 개념은 이렇게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화창한 대기는 눈을 시리게 했다. 시력만 좋으면 지구끝까지 보일 기세였다. 저 끝에는 고향 죽마을이 있을까. 눈에 망원경을 달면 죽마을이 보일 것만 같은 먼지 하나 없는 그런 푸르른 날이었다. 사이판의 날씨 중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인가. 아니면 어제가 더 좋았을까. 알겠지. 한 달 정도 지내보면. 오늘 날씨가 어떤지 평가를 내릴 수 있을거야. 어, 바람이 불어오네요. 우리 그쪽으로 가요. 창가로 가면 위험해. 군인들도 휴식을 취하고 있겠지요. 이런 날에 전쟁이라니. 말도 안돼. 시원한 그늘 나무 아래서 맥주 한 잔 하면서 인생을 즐기기도 시간이 부족해요. 안 그래요. 그렇지. 전적으로 동감이야. 내가 멈출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이런 날에 총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거야. 너무 극단으로 가지는 말아요. 징역형 집행유예 정도는 몰라도.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고 딱 좋아요. 피부가 그걸 느껴요.지금 상태가 좋다고. 그래, 전쟁도 이처럼 적당했으면 좋겠다. 적당히 끝내자. 여기서 끝내면 좋겠네. 그래 날씨도 좋은데 좋은게 좋은 거 아냐. 여순은 그런 의식을 따라갔다. 

시작했으면 맺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꼭 확실할 필요는 없어. 대충이라는 게 있잖아. 대충 그래 대충 마무리 짓자고. 그내야 나도 살고 너도 살지. 너무 길게 늘어지지는 말자.  지금까지 늘어진 것만 해도 충분해. 그러니 이제 다 왔어. 그래야지. 좀 쉬자. 나도 쉬고 그래, 나무 그늘에는 개들이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구나. 저곳이라면 쉬어도 좋을 만한 장소다. 목만 창쪽으로 내밀고 밖을 보고 여순이 말했다. 이리 와봐요. 저기 검은개가. 여기서도 보여. 그곳은 너무 위험해. 겁이 많기는. 둘 중에 하나라도 살아야지. 정말 그렇게 나올거예요. 미안, 혼자 살아서 무엇하겠어. 어디 보자. 말수가 여순 곁으로 다가왔다. 검은 개가 하얀 배를 드러내고 여유를 부렸다. 잠 투정을 하는지 간혹 네 발을 하늘로 쳐들기도 했다. 여순은 말수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내 걱정은 하들들 말드라고. 말수가 어깨를 들썩였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성공이야. 내려 오길 잘했어. 어제 저녁에 산에서 엄청난 폭발이 쏟아졌어. 우리가 있던 굴에 폭판이 떨어졌을지도 몰라. 당신이 호응안했으면 여전히 거기 있었을지 몰라요. 이렇게 말할 수 도 없고. 여순은 혼자된 느낌이 들었다가 자신이 이런 말을 하자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이 낯선 곳에서 그야말로 이국만리에서 혼자라면 얼마나 외로울까. 자유보다도 외로움이 더 심했을 거야. 때로는 누군가를 의식하는 것도 좋아. 그래도 간혹 혼자 있어야 해. 그러나 지금은 아냐. 말수의 존재는 나를 편하게 해. 그는 부담없는 존재야. 여순은 혼자가 주는 고독과 혼자가 주는 자유의 양면성을 느꼈다. 이런 감정도 전쟁과 비슷한가. 

자신을 이런식으로 추스르면 여순은 나갔던 정신이 온전히 들어왔음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말수의 존재가 더 없이 고마웠다. 언제나 생존본능이 뛰어난 사람. 그도 나처럼 나처럼 이런 고독과 이런 자유를 느꼈으면 좋겠어. 그랬으면 좋겠다. 어느 새 여순은 자신과 말수를 하나로 보고 있었다. 옆에 있어도 그립다고 하더니 지금이 그렇다. 거칠고 드세고 고집불통인 그의 안전을 내가 두려워 하고 있다. 여보, 너무 높아요. 몸을 내려요. 아니 이제 뒤로 물러나요. 저격병도 충분히 쉬었을 거에요. 어서요. 머뭇거리는 말수의 손을 잡고 여순이 끌었다. 그가 순순히 따라왔다. 이런 사람을 난 채로 까불어서 내쫓아야 할 사람으로 여겼어. 살가운 사람. 재지 않는 사람. 나를 위해서는 그러지 않아. 사람은 위기에서 본성을 드러내는데 그는 위험의 순간에도 나를 버리지 않아. 늘 챙겼지. 수통의 물처럼. 다시 성당의 중앙으로 왔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십자가쪽이 아닌 여전히 창문가였다. 기도한해. 부담이 돼요. 그리고 아까 했어요. 신부님을 모시고 갈때. 그럼 이번에 내 차렌가. 말리지 않을게요. 말수도 자신처럼 감정이 기복이 오고 있다. 그것은 이곳이 성당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두 손을 모으고 있어. 사진을 찍어놔야 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수가 없거든. 사람이 이렇게 변해도 되는거야. 갑작스런 변화는 신변의 이상과도 연관이 있다는데. 여순은 조금 기다렸다. 기도가 길어지고 있다. 이러면 안돼. 여순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만해요. 좋은 것도 빠지면 득 될게 없어요. 말수는 이번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내려가요. 우리. 여순은 잊었다는 듯이 지하실로 가는 계단쪽을 가리켰다. 어두어 질 거에요. 어차피 지하는 어두워. 그래도 미리 대비해야 지요. 안식처로 삼은 이상 오래 버틸 수 있는 찾아봐요. 이 정도 규모라면 지하실도 클 거에요. 우리가 들어가면 입구를 자연스럽게 막고 사람이 사는 흔적을 보여서는 안되요. 혹시 적이 들어올지도 모르니. 작전통 나셨네. 내가 할 말을 다 하면 나는 쓸모가 없어. 내 의견에 동조하는 거지요. 맞는 말인데 일부러 아니라고 할 위인은 아냐. 더 쪼그라 들기 전에 내려가서 무언가 먹을 것을 찾읍시다. 적어도 포도주는 있는 것이 확실하고. 가기 전에 저걸 떼고 가요. 부담스럽다고 외면 할 때는 언제고. 안 보이는 곳에 두고 있는 것 처럼 의식하면 돼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요. 부탁이지. 네. 그렇다면. 말수가 일어나서 식탁 앞에 섰다. 높은 곳에 있는 십자가를 떼기 위해서 그것을 옮길 장소를 물색했다. 바로 밑에 두어야 겠어. 그는 식탁을 옮겼다. 무거운지 들기를 포기했다. 여순이 도우려고 다가왔다. 그만둬요. 팔목에 힘을 쓰면 위험해. 뭐든 내가 하는 일은 위험해 보이지요. 그래도 안돼. 말수는 여순을 말리고는 식탁을 끌었다. 나무가 시멘트 바닥을 긁으면서 내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해요. 됐어. 말수가 십자가를 떼는 사이 여순은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이런 때는 신을 찾아야 한다. 무언가 절대적인 것,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필요했다. 막사의 음침한 구석에서 자신을 구해준 말수를 나쁘게 본 행위를 반성해야 했다. 그가 용서했어도 난 그럴 수 없어. 여순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말수가 십자를 잡아서 못에 걸린 줄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래 ㅣ신은 용서를 할 수 없어. 사람인 내가 직접 해야지. 그는 신따윈 믿지 않아.  조심스럽게 십자가를 다룬다고 해도 그건 나 때문이야. 그럼 난. 나도 그래. 나도 믿지 않아. 신이 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썩어가는데 가만히 있을까. 그러면 왜 무릎을 꿇었어. 혹시나 해서.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쩔 수 없는거야. 신이 없든 있든 기도하면 마음이 편해져. 그래 말그를 위해 기도하자. 생명을 향한 그의 처절한 노력, 살아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놀라운 정신력에 힘을 보태자.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어. 난 이제 겨우 스물 셋이야. 스물 셋이라고. 말수는 자기 나이를 말하지 않았어. 그러나 나보다는 많겠지. 두 살, 아니면 세 살. 그 보다 더 많을까. 나중에 물어봐야지. 그러나 영원히 묻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나를 걱정해. 사악한 인간이었다고 믿었던 그가, 아무때나 욕하고 자신보다 지위가 낮으면 깔보는 자가 나를 걱정하고 있어. 전쟁이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그는 확실히 무언가를 얻었어. 배운 거야. 죽어가는 생명앞에서 자신을 본 거야. 속에 있는 것을 찾아낸 거야. 나 모르게 그는 많이 울었을 거야. 간혹 그의 눈에 눈물자국이 어린 것을 봤거든. 그렇게 여린 사람이라고. 권총은. 잘 챙겼을까. 갑자기 여순은 권총이 생각났다. 막사로 찾아와 상기된 얼굴로 이걸 숨겨줘 하고 애타는 눈으로 날 바라 봤어. 그런 눈을 또 보기는 어려울 거야. 절마에서 벗어날 한가닥 희망이라도 되는 양, 권총을 꺼내 보였지. 여순아, 그가 날 부르고 있어.  나를 찾는 목소리가. 그는 용감했어. 군함의 갑판에서 정말로 의사정신을 발휘했지. 환자를 치료할 때는 의사보다 더 의사답지 않았나. 아냐 그는 의사야. 내가 아는 최고의 의사.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 함장도 말수를 신뢰했지. 그 신뢰는 스스가 한 행동에 대한 보답의 결과였어. 내가 산 것도 그 때문이고. 난 그를 도우려고 적극적으로 매달렸지. 나가야 될 때를 아는 훈련된 병사처럼 포탄이 떨어지는데도 말수곁으로 달려갔어. 훈장처럼 팔목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졸려. 눈을 감으니 잠이 오네. 종소리. 종소리가 들려. 여순은 스스로 감기는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쩌라고 잠은 이렇게도 계속 오는가. 배는 고파도 잠은 잔다. 총소리가 들려도 그렇고 굶주린 개가 다가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아도 잠은 온다. 그래 자자, 남는 건 잠 밖에 더 있더냐. 여순은 억지로 깨지 않고 그냥 그대로 오는 잠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내려가서 자자. 말수다. 희미하게 들여온다. 이거 받아. 가지고 가자며. 여순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십자를 받아든 여순이 말수의 뒤를 따랐다. 비몽사몽. 걸으면서 여순은 잠을 자고 있다. 종소리. 소리가 들린다. 종소리. 이번에는 깊은 숲속 무량사의 절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스님이 위에서 내려온 두 줄을 한 손에 하나씩 잡고 있다. 종과 정면에 서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서 줄을 뒤로 잡아당겼다가 어느 순간 힘을 주어 앞으로 밀었다. 끊어졌던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크게 울리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종소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여순은 그 소리를 들었고 또 들었다. 

수평으로 선 아름드리 통나무가 앞으로 나가 부드러운 용의 몸통을 가볍게 쳐냈다. 그것은 성당의 종소리와는 달랐다. 처음엔 크고 강했으나 나중에는 여리게 여운을 남겼다. 연달아 땡땡땡 치지 않고 기다렸다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소리가 다 죽었다 싶으면 다시 스님은 두 손을 이용해 통나무를 뒤로 밀었다 앞으로 당겼다. 그 의식은 마치 장례를 집전하는 신부처럼 엄숙했다.하나의 의식은 이처럼 소중했다. 이 상태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절마당에 앉아 들려오는 아늑한 종소리를 들을 때처럼 편안한 정신을 유지하고 싶다. 그 때 몸은 또 얼마나 안정적이었던가. 흔들리지 않아. 똑바로 앉아 있어. 누가 밀어도 넘어지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환하게 피어났던 웃음의 의미를 여순은 꿈속에서나마 조금은 이해했다.

종소리가 끝났다. 여순은 절 마당을 뛰었다. 마당을 쓰는 스님의 빗자루를 피해 삼층석탑 주위를 돌기도 했고 대웅전을 건넜다가 다시 탑 앞에 서기도 했다. 사람들처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흉내를 냈다. 그 곳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 그래 그 모습은 엄마였다. 엄마는 간혹 절을 찾았다. 보자기에 쌀 한 됫박을 담아서, 어떤 날은 초를 세 개 사서 엄마는 여순의 손을 잡고 절에 가자고 재촉했다. 여순아, 오늘은 절에 가는 날이다. 알고 있지. 몰랐어도 여순은 알았다고 답했다. 어제부터 잠을 자지 못했는 걸. 내일이 절에 가는 날이라고. 그러면 아버지는 성당에 갔다가 절에 갔다가 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엄마는 개의치 않았다. 어디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절에, 내일은 성당에 간다고 신이 벌을 주겠어요. 신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사랑하는 신이 자신말고 다른 신을 찾았다고 시기하겠어요? 아니지요. 마음대로 해요. 그것은 아버지가 아닌 여순에게 하는 소리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는 안되고 여순은 된다는 말인가요. 하고 눈을 흘겼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여순은 가만히 생각했다. 엄마가 어떤 대답을 할까. 어떤 행동을 할까.

십자가가 부르면 십자가를 따라 가고요. 부처님의 자비가 떠오르면 절마당을 찾아요. 엄마는 이런 사람이었고 그것은 여순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나도 그래, 세상에 한 신만 믿다니. 그런 일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어. 나도 그런 생각이야. 생각은 그렇게 해도 말을 퍼트리지는 마. 지조 없는 사람으로 비칠지 몰라. 엄마는 그 말을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마음이면 정성을 들여도 효과가 없어. 끝내 아버지는 하지 않아도 될말을 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논에 갔다올게. 논으로 가면서 아버지는 그런 엄마가 못마땅 했다. 그러나 듣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어디든 가든 무슨 상관인가. 난 하늘보고 달보고 별보고 그래 이 삽에게 기도를 드리지. 올 농사 풍년들게 해달라고. 나도 이런데. 어디든 가든 이제 시비 붙지 말자고 아버지는 다짐했다. 그 후로 여순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신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신이났다. 엄마를 따라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면서 신을 섬기는 방법이 제각각 이구나. 그러나 하는 말은 비슷해. 악하게 살지 말고 착하게 살자. 그런 가슴에 닮고 밖으로 나올 때 여순은 행복했고 즐거웠다. 예쁘게 차려 입고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절에도 가고 성당에도 갔다.  그러나 엄마는 절에서는 성당이야기를, 성당에서는 절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런 엄마를 여순은 이해했다. 

그런 엄마는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줏대의 소유자였다. 그런 내면의 확실한 심지가 있어야 거기도 좋고 여기도 좋다는 것을 안다. 여순은 아빠보다는 엄마를 닮았다. 늘 엄마 손을 잡고 컸고 제법 커서도 슬그러니 엄마 손을 잡았다. 다 큰 계집애라고 놀려도 엄마손을 잡으면 안심이 됐다. 그래서 절에든 성당에든 어디든 가려는 낌새가 보이면 먼저 대문간에서 기다렸다. 거기는 집보다 넓고 뛰어다닐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생김새가 다르고 하는 말이 다르고 각양의 얼굴을 구경하면 기분이 좋았다. 여순은 지금, 절과 성당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감정의 동요를 가라앉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하나의 소리였을 뿐인데 종소리 하나로 여순은 기분전환에 성공했다. 난 다좋아. 성당의 종소리든 절의 종소리든. 자장가 처럼 종소리를 들으면 잠이 잘 오지. 불면증에 시달리면 종소리를 들어야지. 

그러나 그 기분은 보기좋게 깨졌다. 종소리가 비명소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유리창 깨지는 소리. 그것은 성당의 앞쪽에서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에서는 무언가가 비어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손이었다. 사람의 손.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가 동시에 손을 뻗었다. 손이구나. 손이 저렇게도 나올 수가 있구나. 나무 틈 사이로, 부서진 벽돌 사이로 손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내 손을 잡아줘. 여기서 꺼내 달라고요. 여순은 일어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는 일어나서 발을 옮겼다. 방금 전에 들었던 포소리. 그리고 잠잠했던 고요. 다음은 비명. 순서가 있구나. 그렇다면 신도들이 저편에 숨어 있었나. 말수가 내린 십자가 옆으로 난 쪽문 쪽을 여순은 눈으로 가만히 주시했다. 운이 좋았어. 우리도 당했뻔 했어. 말수는. 당신도 보았어. 저기야. 가자. 말수는 직감적으로 저들은 산자가 아닌 곧 죽을 자라는 생각을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수고 스러울 것이다. 적어도 네 명 정도.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나. 신부님은 정말 대단해. 자신의 무덤을 향해 스스로 걸어갔어. 비록 부축을 받을 지언정. 일단 그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잡아달라고나온 손을 끌어 당기는 것이 순서야. 말수가 먼저 손을 잡았다. 아직 온기가 있었다. 그러나 끌어 당길 수가 없었다. 몸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손을 놓고 아래로 처진 다른 잡았다. 말수는 손을 놓으면서 방근 전에는 따뜻했으나 지금은 차갑다고 느꼈다. 죽은 지 얼마 안돼. 일 분 아니면 십분 전. 이 손은. 말수가 세번째로 잡은 손은 팔뚝과 분리됐다. 어, 처참해. 포소리가 크지는 않았는데. 아마 모여 있는 사람에게 근거리서 수류탄을 던진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자. 여순은 말수가 떨어진 손을 다시 구멍속으로 밀어넣자 눈을 감았다. 이대고 고꾸라 질수는 없어. 일단 따뜻한 손부터 살려보자. 말수는 조심하면서 벽돌을 하나씩 빼냈다. 나무 쪼가리는 상처가 나지 않도록 밀거나 잡아 당겼다. 땀이 났다. 옷이 비에 맞은 듯 흠뻑 젖었다. 치우고 또 치웠다. 팔뚝이 드러나고 어깨가 나왔다. 어라 그런데 얼굴의 한 쪽이 없다. 차가워. 식었어. 얼굴이 사라졌다. 얼굴없는 몸을 여순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막사의 섬에서 군함의 갑판에서 숱한 환자를 봤지만 이런 환자는 처음이었다. 

간신히 잡았던 여순의 의식은 저쪽으로, 얼굴없는 몸통으로 옮겨갔다. 여순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십자가쪽을 향해 성호를 그었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깜깜한 밤. 겨우 차린 정신은 저쪽으로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왔다. 정신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여서 여순은 지금 오락가락 하고 있다. 또다시 잠이 들었다. 기력이 달려서 인지 여순은 순간 순간 졸았다. 이번에는 접골 아주머니가 여순의 말상대였다. 작두위에에서 아주머니는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 여순아, 사탕가져왔다. 어여 손을 내밀어라. 여순이 말그대로 했다. 늘 듣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아주머니는 아버지의 먼 친척이었다. 주변에서 용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식 신내림을 받지 않았으나 그런 사람보다 낫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여순이 아프거나 집안에 우환이 들면 아주머니를 초대했다. 먼저 쌀 한 됫박을 가져가서 청하고 굿이 끝나면 얼마간 더 챙겨주었다. 그러면 그것에서 일부를 아주머니는 떼서 여순에게 무엇이든 사 먹으라고 용돈으로 주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색색의 사탕을 사왔다. 지금 그 아주머니가 여순 앞에서 웃고 있다.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서서 손을 내밀고 있다. 나 잡아봐라. 아주머니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웃음 뒤로 초가집이 보였다. 작은 마당이 있고 외양간에서 소가 울었다. 울음 소리에 맞춰 아주머니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선 작두 위에서 걸음을 걸었다. 걸으면서 머리를 빙빙돌렸다. 커다란 모자에 달린 방울이 울기 시작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주머니가 덩실덩실 춤을 출 때는 더 큰 소리가 났다. 손에 든 채에도 방울이 있어 위 아래서 울리는 땡그렁 거리는 소리가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흥건한 땀, 그리고 방울이 흔들리며 내지르는 소리가 왠지 낯설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순은 꾹 참았다. 이것이 지나가야 용돈이 생겼다. 그런데 오늘 접골 아주머니는 그전과는 달랐다. 여순에게 우리 여순, 우리 여순이대신 저년 썩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욕을 해대다니.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것이 몰려왔다. 그까짓 사탕 안먹어. 사탕보다도 우리 여순이를 듣지 못한것, 그리고 저년 이라는 욕이 여순의 여린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여긴 네년이 있을 곳이 못돼. 어여 썩 나가라. 덩더쿵 덩더쿵. 굿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작두를 타고 부채를 탁 펼쳐 균형을 잡고 있다. 그래, 이 장면이 끝나면 굿도 끝나. 여순은 그냥 문을 열고 뛰쳐 나가려다가 멈칫 거렸다. 다 끝났어. 엄마가 여순의 손을 잡았다. 조금 화가 풀리자 여순은 다시 눈깔 사탕의 맛이 혀를 감싸고 도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무당 아주머니는 한 술 더 떴다. 아까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이 서 세게 여순을 몰아붙였다. 귀신은 귀신끼리 살아라. 산 사람이 있을 곳이 못된다. 썩꺼져라 어서. 여순은 다시 파랗게 질렸다. 서운함과 배신감이 몰려왔다. 엄마는 그런 여순을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사탕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귀신이라고. 울음이 터졌다. 겁이 나기도 했고 변심한 것에 대한 실망에 여순은 더 크게 울어 제꼈다. 우리 여순은 어디 가고 저년이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귀신은 뭐가. 여기서 썩나가라니. 여긴 내 집일고. 나가면 어디서 살아. 따지고 싶었다. 아무리 굿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도 아주머니는 아랑곳 않고 정말 미친년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썩나가 귀신아. 나갈 사람은 내가 아냐. 이젠 싫어. 꼴보기 싫어. 아줌마 나빠. 여순은 방울 소리가 요란해질수록 욕 소리도 높아가는 것에 더는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밖은 더 무서웠다.

깜깜한 대지는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그믐날도 이러지는 않았다. 그녀는 신발을 찾는 것도 대문 앞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는 돌아섰다. 다시 굿이 열리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잡은 문고리는 열리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닫았는지 아무리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여순은 그대로 토방에 쓰러졌다. 그 위로 돌무더기의 팔이 따라왔다. 팔은 돌을 헤치고 나와 쓰러진 여순을 흔들어 깨웠다. 여기 누워 있으면 죽어. 어서 일어나서 달려가. 달려가라고 . 그래야 죽지 않고 살아. 여순이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기 보다는 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하늘에 무수히 많이 별들이 낮은 곳에 걸려 있었다. 여순은 그 날, 이처럼 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려올 때 아주머니를 배웅했다. 그래, 여순아. 이거 먹어. 그리고 이건 용돈. 상냥한 무당 아주머니는 언제나 처럼 여순의 작은 손에 사탕 몇개와 동전 서너 개를 주었다. 다시 돌아왔어.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이 어쩌면 저럴수 있지. 인사해야지, 여순아. 엄마가 말했고 여순은 내키지 않은 듯이 작은 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는 여순에게 다가가 이걸로는 과자 사 먹어, 우리 예쁜 여순아 하고 동전을 서너 개 더 주고는 전과 똑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안겼다. 

여순은 그런 아주머니가 보고 싶었다. 왜 굿 중에서 나쁜 년이라고 자신에게 욕했는지 묻고 싶었다. 죽은 사람을 칭하는 귀신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그런 물음은 그 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 욕을 해도 좋고 매로 때려도 좋아요. 나를 여기서 빼주세요. 죽마을로 데려가 주세요. 엄마가 지켜보고 있으니 굿을 해주세요. 그것도 큰 굿을요. 작두는 갈아 오세요. 시퍼렇게 아주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를 타주세요. 용돈은 필요없어요. 이곳에서는 쓸 수 가 없어요. 그러니 주지 않아도 되요. 사탕은. 목이 타네요. 그러니 사탕 몇개 정도는 주고 가도 좋아요. 더는 이 꼴을 보기 싫고 붕대도 소독약도 항생제나 주사도 지긋지긋해요. 그러니 제발 아주머니. 날 어떻게 해줘요. 난 자야해요. 여러 날 잠을 못잤어요. 나는 잠이 좋아요. 하루 열 시간 이상 자야 해요. 그래야 살아 있는 나를 볼 수 있다고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어제는 겨우 한 두 시간을 잤을까요. 그것도 자다 깨다 했어요. 이것도 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난 자고 싶어요. 

아주머니의 방울 소리가 듣고 싶다. 그 소리라면 뭐든지 잊을 수 있다. 그러자 정말 종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소리는 몇 번 울이다 말고 곧 그쳤다. 그 자리에 폭발음과 따발총 소리와 인간이 지르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인간의 소리는 성당의 잔해 속에서 나왔다. 비명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됐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였고 부서진 탱크 안에서 울부짖는 소리였다. 여순은 귀를 막았다. 이것은 지옥이다. 난 산 사람이 아니다. 죽은 귀신이다. 아주머니가 날 귀신이라고 부른 것은 앞날을 미리 보고 하신 말씀이다. 그래 산 사람이 이라면 이런 고통을 이겨 낼 수 없어. 난 죽었어. 잔해에 비죽히 나온 그 팔 가운데 하나가 나야. 내 팔. 여순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팔을 잡았다. 잡히는 구나.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아주머니가 날 밀어내고 있어. 여순아, 넌 더 살아야 돼. 귀신이 되기는 너무 억울해. 내가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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