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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8 15:11 (일)
기차에 올라탄 그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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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올라탄 그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을 감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6.2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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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분노의 눈이 있는 자는 조금 더 살것이다. 그래서 이 휴식이 마뜩찮다. 전쟁중에 휴식이라니. 그들은 아직 살아 있는 귀로 포성을 듣고 싶다. 그것이 아군이든 적의 포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차라리 이렇게 누워 있는 것 보다는 낫다. 방어하고 역공하고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죽음의 공포도 잊을 수 있다. 그것이 내게 유리해. 난 언제나 유리한 지점에 있었어. 공격할 때도 방어할 때도 그런데 지금은 아주 불리해. 불리하다고. 분노의 눈이 살아있는 자는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눈에 힘을 줄수록 살고자 하는 욕망, 산자들 편에 끼지못한 자신의 안타까움이 쉬지 않고 교차했다. 그는 옆자리 병사를 보았다. 곧 죽을 것이다. 부상병의 눈에도 상대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한 눈에 들어온다. 곧 죽을거야. 저 자리라 내 자리보다 좋은가. 그렇다면 오장이 들어오면 시체가 나간 자리에 자신이 대신 가게 해달라고 부탁해야지. 이건 쉬운 거야. 그러니 들어 주겠지. 그가 죽을 고비에 있을 때 내가 살려준 것을 기억한다면 말이야. 자리를 넘보는 자의 상태를 자신 주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저자도 오늘밤을 못 넘길거야. 그러지 않기 위해 눈에 핏대를 세워쓰나 점차 흐려져 가고 있어. 나도 그랬거든. 나 살아 있다고 눈을 부릎떳어. 그러니 죽은 자처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그런데 봐, 불과 몇 시간 만에 눈이 풀렸어. 정신도 연타래의 실처럼 마구 풀려나가. 죽기전에 저 자의 소원을 들어줄까. 난 저 자리가 탐이 나는데. 그들은 저승사자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이런 망상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는 그들을 비웃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적들이 셌어. 우리가 약한 것이 아니야. 우리도 강한 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먼저 달려들었어. 우리의 장점을 그들이 써먹은 거야. 우리가 할 것을 그들이 먼저했을 뿐이야. 말수와 여순은 모여 있는 부상병들을 순서대로 한 바뀌 돌았다. 많지 않았으나 죽음의 냄새가 여기 저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죽은 자는 병실에서 단 일분도 머물수 없다. 발견되는 즉시 밖으로 던져진다. 장례 절차가 생략된 것을 꼬집을 수 없다. 던져지는 그들도 알고 있다. 이게 좋아. 내 죽은 모습을 보고 있는 그들은 보는 우리들 기분은 어떻겠어. 그런 꼴 안 당하고 가는 거지. 떨어질 때는 갈매기가 내려 앉는 것처럼 가뿐하게. 그래 난 준비됐어. 말수와 여순과 눈이 마주치는 병사들은 의사가 어떤 말을 내뱉을지 귀를 기울였다. 괜찮아요. 곧 회복 될 겁니다. 처음 그 말을 들은 병사는 기쁜 나머지 소리지를 뻔 했다. 그러나 곧 그 말은 모든 환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는 허망함에 빠져들었다. 내 인생은 망가졌고 여기서 끝장을 보는군. 가려워. 시원하고 긁어 싶어. 죽는 마당에 피가 나도록 긁어 대고 싶어. 그러나 병사는 생각뿐 그 말이 의사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정말의 순간에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내려 놓음이었다. 눈에 힘을 준다고 누꺼풀 속에 그 힘겨운 노력을 숨겨놓고는 진작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회진을 돌고 나왔을 때 말수는 밀리 적어둔 1번, 5번, 9번, 11번 병상의 번호를 따라온 오장에 말하면서 사망했으니 어서 치우세요, 하고 말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전염 우려가 높아요. 오장은 그러지 않아도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서너명도 같은 신세일 겁니다. 

자신의 할 일을 마친 말수는 밖으로 나왔다. 여순도 따라 나오려고 했으나 마지막 병상의 환자가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애원하자 머뭇거렸다. 이 환자는 자신이 이전부터 여순을 알고 있는 것 처럼 행동했다. 여순은 뜨끔했다. 마치 섬에서 처음 온 병사처럼 내가 너를 알고 있어, 넌 그런 일을 했잖아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여순은 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 네가 보는 것은 막사의 여순이 아냐, 넌 나를 본 적이 없어. 이번이 처음이야. 설사 아는 사이였다고 치자. 그래서 네가 내 과거를 까발기겠다고. 어림없어. 그래봤자 네가 어떤 이득을 얻는데. 아냐, 병사는 그런 생각으로 나를 잡은 게 아냐.

여순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어가고 있어. 피는 멈추지 않아.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한다는 번화에 이 환자가 들어 있을거야. 나도 말수와 같은 생각이야. 죽음의 순간이 두려운 거야. 다른 누구보다도. 그래서 날 잡고 있어. 그래, 잠시 있어 줄게.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니. 나 안죽을 거죠. 안 죽죠. 처음에 여순은 그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했다. 다 일본말을 하는데 조선말이라니. 여순도 거의 조선말을 쓰지 않아 일본어가 익숙한 상황에서 불쑥 들려온 조선말에 화들짝 놀랐다. 여순은 병사의 손을 잡았다. 나 조선인이오. 의사 선생도 조선사람 맞죠? 여순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대신 조선 어디요? 하고 물었다. 고향을 애기 할 때 병사는 잠시 희미한 웃음이 검은 얼굴 사이로 스쳐갔다. 부산이오. 배타고 왔어요. 돈 많이 번다고 해서 황군에. 병사는 말하기가 어려운 듯 입을 힘겹게 벌렸다. 선생님이 말했어요. 입대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우리 조선사람도 천황을 위해 성스러운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어서 손을 들라고 했어요. 13명 중 제가 그 안에 낀 겁니다. 여순은 돈 벌러 간다는 말에 가슴이 매였다. 돈을 번다는 말에 속아서 여기까지 온 처지와 병사와 자신이 다르지 않았다. 저 쪽에서 오장이 다가오고 있다. 여순은 잡은 손을 놓고 일어섰다. 이 자는 조센징이오. 어찌나 용맹한지 다들 조센징 조센징 했어요. 조국 수호에 앞장선 조센징입니다. 오장이 여순에게 좋은 정보를 주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군요. 황군을 위해 열심히 싸우다 다쳤으니 후회는 없겠네요. 그렇다는 듯이 오장이 넉넉한 웃음을 넓은 얼굴 가득 담았다. 

여순은 말수가 나간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습한 기운이 덥쳤으나 바람이 불어 그런대로 시원했다. 이 와중에 조국을 꺼내는 구나. 조국은 너무 크고 위대하구나. 그에비해 병사의 인생은 너무나 가벼워. 말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순은 좀 쉬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사들이 이동하는 계단을 벗어나 함장과 장교들이 드나드는 통로 쪽에 자리를 잡았다. 딱히 선실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는 바람도 느낄 수 없고 혼탁한 공기 때문에 답답했다. 여기에 등을 기대로 있는 게 편해. 그 편함은 익숙함이었다. 포 사격이 벌어질 때 여순은 이곳에서 엎드린 채 상황을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래 몸이 반응하고 있어. 안전하고 편한 곳을 본능적으로 알차챈거지. 여순은 감탄했다. 쉬기에 좋다고 앉은 곳은 피난처였던 것이다. 그러자 이방인이라는 낯선 감정도 사라졌다. 며칠이나 됐다고 군함이 익숙해 지고 있다. 왠만한 파도에는 멀미도 없다. 몸이, 내 몸이 알아서 적응하고 있어. 그러고 보니 눈에 익은 것 같아. 이 손잡이.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손으로 잡고 있기에 편한 곡선은 어디서 많이 본 듯 했다. 군함은 정해진 길을 가는 여객선처럼 파도를 따라 조용히 흘러갔다. 적막만이 군함의 갑판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말수는 어디로 간거야. 그러나 여순은 그 생각을 오래 할 수 없었다. 피로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고 그래서 여순은 스스로 잠이 들었다. 꿈같은 것을 여순은 꾸지 않았다. 모르겠다. 자는 시간이 더 길었더라면. 그러나 여순은 곧 깨고 말았다. 다시 포성이 들렸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던 적이 다시 추격을 시작한 모양이다. 사이렌이 울린다. 갑판이 분주하다. 달리는 군홧발의 진동이 느껴진다. 

환자가 생기겠군. 여순은 본능적으로 부상당한 병사들이 지르는 고함을 떠올렸다. 그러나 웅크린 그 자세를 벗어나지 않았다. 몸이 그대로 굳어 석고상이 된 것처럼 손하나 까닥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손에 피가 마를날이 없어. 여순은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피 냄새는 없었다. 곧 맡게 되겠지. 향수보다 더 친근한 피냄새. 오분도 안됐지. 사이렌이 울린지. 그런데 벌써 갑판위는 분주하다. 병사들은 기계와 같다. 그들은 자다 말고 일어나 총을 잡았다. 대단해. 전쟁은 참 빨라. 둔탁한 소리가 들여. 무언가에 부딛치는 소리. 자신보다 강한 것을 밀어내는 동작. 그래 적의 총알이 갑판을 향해 날아오고 있어. 총알은 박히기도 하고 튕겨 나가기도 하고 정신이 없어. 연기가 나고 있어, 멀지 않은 곳이야. 그래, 내 추측이 맞았어. 냄새가 나잖아. 화약냄새. 익숙해. 익숙한 것은 친근한 것이거든. 여순은 깊은 숲속의 맑은 산소를 흠뻑 마시듯이 화약냄새에 취해 호흡을 길게 들이켰다. 저 자의 목소리는. 맞아 장교군아. 어디 있다 죽지도 않고 왔니. 그래 명령을 할 자가 제일 먼저 움직여야지. 옷을 털 시간이 어디 있어.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나면 될 것을. 

여순은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와 같은 동작으로 갑판위의 상황이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 보고 있었다. 붕대를 감은 환자가 기관총을 잡고 있었다. 어라, 저러면 안 되는 거잖아. 하얀 붕대위로 붉은 피가 계속 흘러. 넌 가만히 있어도 죽는데. 그래, 어차피 죽는 거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장교는 부상병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절뚝 거리며 뒤늦게 대열에 합류한 병사를 향해 워커발을 날렸다. 늦은 것이 부상 때문이 아니라 꿈지럭 거리다가 늦은 것으로 판단했다. 발의 충격에 그렇지 않아도 중심잡기가 어려웠던 병사가 힘없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고사포를 맞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처럼 병사는 쓰러져서 일어나 않았다.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에게 쏟아지는 욕설을 그는 듣고 있을까. 빠가야로. 일어나라. 싸워야지. 황군의 병사가 이게 무어야. 장교가 다시 발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지르지 않았다.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이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화가 머리 꼭대기 까지 오른 장교도 시체에게 발길질을 하지 못했다. 그래, 그 자에게도 예절은 있어. 너무 나가지는 않았어. 다행이야. 여순은 중계방송 하듯이 갑판위 상황을 보면서 혼자 중얼 거렸다. 장교도 부상을 당하겠지. 발에 당하면 지르지 못할 거야. 그걸 더 후회할 걸. 자신이 당한 것 보다 부하들을 독려할 발이 말을 듣지 않는 걸. 장교가 부상을 당하면. 뭐, 똑같아. 살려달라고 애원해. 처음에는 애써 참으려고 하지. 그게 계급장의 위엄이거든. 그러나 죽음이 오고 있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매달려. 의사 선생 날 살려줘. 죽이지 않을 거지. 난 장교요, 장교라고. 

할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정도는 약과야. 부하에게라도 하겠지. 자신이 발로 찬 부하를 찾아 날 살려주시오. 아까 발로 찬 것은 고의가 아니었소. 살려만 준다면 당신에게 진 빚을 갚도록 내가 맞아 주겠소. 이런 말은 하루 종일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쓰러진 병사는 이제 갑판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갑판과 자신이 몸이 자석으로 연결된 것처럼 딱 붙어 있었다. 장교는 죽은 병사를 치우라면 명령을 잊었다. 그 사이 말수가 병사에게 다가갔다. 언제 나타났지. 말수는 언제나 자기 있을 곳을 안다니까. 정말 대단한 말수야. 저런 말수를 위해 박수를 쳐야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박수를 친다고. 브라보, 잘했어 말수, 나의 말수. 그가 쓰러진자의 목에 손을 대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느리지만 호흡이 느껴졌다. 그는 죽지 않았고 다만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목에 손의 감촉을 느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는 듯이 작은 흐느낌 같은 소리를 냈고 소리를 내기 위해 입을 벌리자 그 안에 고여있던 피가 비어져 나왔다.

우는 군. 다 큰 남자가 울어. 그렇게 울지 마. 넌 살 수 있어. 넌 용감한 군인었어. 장교가 발로 찬 것은 그것에 대한 증거야. 자신보다 잘난 군인을 용서할 수 없거든. 그렇지 않다면 왜 찼겠어. 말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다. 다독이는 것인지 그도 알지 못했으나 눈빛 만큼은 애처로움이 가득했다. 쓰러진 병사는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다. 말수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가볍게 껴안았다. 살아 있는 인간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가 눈을 떠서 말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갑자기 냉동에서 해동된 듯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말수도 그러는 그를 도와 상처난 곳이 어디인지 앞뒤로 손을 댔다. 총알이 뚫고 지나가거나 파편이 박혀 있지는 않았다. 잠시 기절한 것일까. 그런 경우가 종종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입에서 난 피는. 쓰러질 때 갑판과 부딫힌 때문이다. 그는 사망자도 중상자도 아니다. 다만 놀라 자빠져서 가볍게 입은 경상장 일 뿐이다.

이런 사실을 말수가 알았을 때 당사자인 그도 알아챘다. 그는 귀신처럼 사방으로 눈을 두리번 거리더니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저쪽이라는 듯이 대열을 향해 걸어갔다. 절뚝거리기는 했지만 걸었다. 집합할 때 보다 그는 더 정정해 있었다. 병사는 걸어보니 달릴수도 있었는지 마지막에는 달리듯이 빠르게 다가갔다. 사태파악을 한 그는 부끄러웠던지 장교에게 힘찬 경례를 올려 붙였다. 이제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남보다 더 열심히 움직여 잃었던 자존심을 만회하려고 앞장설 것이고 이는 자신을 발로 차서 고름을 빼내준 장교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보라, 아직 일본군의 군기는 죽지 않았다. 다시 포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포탄이 군함 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넘어가는 포탄이 순간적으로 보였다.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 것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떨어지면 문제가 심각하다. 적들은 포탄 지점을 확인하고 사거리를 조정한 다음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이때는 날아온 포탄은 아까처럼 갑판위를 넘어가지 않고 탄착 지점이 갑판위가 된다. 지금 포는 그냥 공갈포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수는 다음 성공을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사이렌 소리가 다시 갑판을 흔들었다. 저게 무슨 소용일까. 피하라는 신호일까. 이 상황을 모른 사람이 있을까. 병사도 알고 장교도 알고 부상병도 안다. 말수나 여순도 안다. 함장도 모를리가 없다. 그렇다면. 음, 쓸모없는 소음이군. 말수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우리는 타격할 원점을 확보했을까. 어디서 날아온지 알아야 반격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지점을 확인해야 한다.

장교가 분주히 움직였다. 그가 집어주는 지도끝이 타격점이다. 사수들은 지휘봉으로 찍은 표적을 재고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갑판 위는 뜨거운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처럼 끓어 올랐다. 포신을 빠져나온 탄피가 공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탄피는 굴러다니면서 연기를 뿌렸고 지지직 소리를 남겼다. 다시 화약냄새가 진동했다. 적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나. 그렇다면 직선포가 유리할 것이다. 곡사포로는 안 된다. 말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조준간을 잡고 있다면 무언가 변화를 주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텐데. 우리쪽의 공격이 빗나간 모양이다. 장교가 화를 냈다. 망원경을 눈에서 떼고는 다시 탄착점을 수정했다. 이때가 가장 위험하다. 적들이 노리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빗나간 것을 아는 것은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적들의 군함은 이때다 싶어 다시 포를 장전했고 그러기 전에 뱃머리에 달린 기관총을 난사했다. 아직 비명은 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 총을 잡고 있던 병사와 그 옆에서 보조하던 부사수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맞았다. 기관총 사수가 맞았다. 너, 나가서 대신 기관총 잡아. 부사수는 너야. 장교가 엎드려서 비슷한 자세에 있는 병사의 옆구리를 권총의 총구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말수는 직감적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그들이 곧 죽을 것을 알았다. 제대로 맞았기 때문이다. 소리로 말수는 알았다. 빗나가면 환자의 비명이 괴성에 가깝다. 그러나 정통으로 맞으면 갸녀린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불과하다. 쓰러진 병사는 그런 소리를 갑판의 다른 소음 사이에 섞어서 경우 뱉어냈다. 쓰러지 자들 가운데 한 명이 뭍에 올라온 고기처럼 배를 위아래로 펄떡였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말수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급히 그들 쪽으로 달려갔다. 여순도 고개를 숙이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지마, 여순아 넌 거기있어. 그러나 여순은 말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말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을 아는데.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두 명이잖아요. 어디 보자. 말수는 평소처럼 말했으나 두 손은 가슴에서 쏟구치는 피는 막고 서 있었다. 전투복과 손 사이로 피가 번져 나왔다. 다른 환자는요. 그 환자는 벌써 절명했다. 총구가 머리를 뚫고 나갔는지 머리의 반쪽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너무하군. 적에게 보여주고 싶어. 우리가 이렇게 당했어. 물어내. 이 환자도 틀렸어요. 여긴 위험해요. 저쪽으로 가요. 여순이 말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냐, 거기나 여기나 매 한가지야. 이번에는 저쪽이 타격이 될 수 있어. 말수는 미련이 남았는지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적의 공세는 계속됐고 말수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첫 번의 실수에서 탄착점을 확인한 적은 그곳에 무차별 포화를 집중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통나무처럼 무겁거나 지팡이처럼 가볍게 자빠졌다. 장교의 고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도 쓰러진 것일까. 말수는 그쪽으로 시선이 다가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게 전쟁터야. 본모습이 이런거라고. 가자. 이번에는 말수가 여순을 재촉했다. 숨고를 틈도 없이 말수는 이쪽의 상황이 두명이 죽은 저쪽 상황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 부상병이 많았다. 죽지 않은 병사는 아까 기관총 부사수 처럼 배를 위로 튀어 올렸다. 비늘대신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배는 더는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럴 반동의 힘조차 사라졌다. 말수는 쏟아지는 피를 막을 수 있는 붕대를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그럴 것 없소.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장교였다. 말수는 쓰러진 장교를 알아보지 못했다. 온통 피범벅인 군복이 장교 계급을 가렸기 때문이다. 말수는 손으로 어깨의 견장을 쓸었다. 드러난 견장은 그가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갑판 위의 장교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부상병을 돌보시오. 그것은 지시였고 명령이었다. 죽지 않은 그는 죽을때 까지 명령을 내렸다. 장교의 위신을 세워 죽어서도 멋있는 장교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말수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허벅지를 관통당했는지 피가 꾸역꾸역 뿜어져 나왔다. 말수는 급하게 지혈하기 위해 손바닥을 펴서 눌렀다. 여순이 다리 아래로 붕대를 넣고 감기 시작했다. 난 괜찮아. 총알 따위야, 뭐가 무서워. 말하지 마요. 그럴수록 더 힘드니. 말수는 환자를 제지했다. 이번에는 내가 명령을 내릴 차례다. 움직이지 마. 꼼짝하지도 마. 알았어요? 말수가 군인처럼 명령했다. 장교는 말잘 듣는 부하처럼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더 싸울 수 없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던 장교는 이러는 의사에게 화를 참아서는 안 되지만 그에게는 소리치거나 흥분할 힘이 없었다.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 제압당한 것이 상처의 고통보다 더 심하고 아팠다.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된 장교는 함장을 만나고 싶어했다. 마지막 순간을 의사의 손에서 죽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존경하는 함장에게 자신의 최후를 보고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끊어져 가는 생명줄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사무라이 전사로 깨끗하게 살아 명예롭게 죽는다고 최종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 그러고 싶소. 난 사무라이의 후예요. 그러나 그런 바람은 실천되지 않았다.

그는 곧 의식을 잃었다. 고개는 똑바로 있지 않고 부러진 것처럼 옆으로 푹 꺾였다. 말을 하려고 입밖으로 비어져 나온 혀는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 말수는 입을 벌려 혀를 제자리에 집어 넣었고 적에게 증오심을 보이던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뒤집어진 눈꺼풀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잘 감기지 않았으나 두 세번 하자 눈꺼풀은 눈동자를 가렸다. 말수는 장교의 품위를 지켜줬다. 지위에 맞는 행동을 했으므로 그것은 당연했다. 말수는 자신도 죽게 된다면 장교처럼 멋지게 가고 싶었다. 그러면서 죽을 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내 이름은 후쿠다 요시오가 아닌 마말수다. 이렇게 말하면 괜찮을 것이다.

함장님이 곧 와요. 여순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장교의 귀 가까이 입을 대고 말했다. 그런 거짓 동정을 바라지 않았던 장교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떨군 그 상태로 그대로 있었다. 그가 이렇게 죽은 것은 평소 그가 수없이 다짐한 결과였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비참하게 가는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마음먹은 대로 실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장교와는 달랐다. 특히 무릎을 꿇고 앉았던 병사는 하필 그 무릎에 총을 맞고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어디서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지 옆에 있던 동료가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살아서 그렇게 큰 소리를 쳤다면 총알도 피해갔을까. 그는 말수가 다가가자 옆에 있던 여순에게 총을 맞지 않아 자유로운 손을 내밀었다. 아니 뻗을 수 있을 때까지 뻗으면서 옷이든 몸이든 무엇이든 잡히는 것은 잡으려고 했다.

그런 동작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여순은 간호와 의사의 직업정신으로 내민 손을 잡았다. 무의적이었다.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그런 생각이 들기 이전에 저도 모르게 내민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손을 내밀 수는 있어도 다리를 움직일수는 없었다. 무릎을 관통한 총알의 위력은 강했다. 다리에서 무릎은 사라졌다. 갑판의 골을 따라 흐르던 피가 작넘쳐서 옆으로 번졌다다. 상체에서도 피가 나왔다. 파리 두 어 마리가 욍욍 거리면 다리쪽에서 열심히 피를 빨고 있었다. 이 정도 상처라면 굳이 부상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옷을 벗길 필요도 없었다. 장기의 드러났던 것이다. 말수는 저것이 더 나오기 전에 눌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으로 덮었으나 곧 그만 두었다. 미련한 짓이었다. 

여순은 말수가 체념을 보였으나 그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조금만 참아요. 살 수 있어요. 조금전에 했던 그 말을 다시 꺼내 들었던 것은 잡은 손에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여순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수가 피 묻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여순을 힐끗 보았다. 거기에는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인지 입에 발린 소리는 이제 그만하라는 것인지 여순은 그 역시 알지 못했지만 게의치 않았다. 지금이 중요하다. 부상한 병사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순은 여자의 본능으로 알아챘다. 살 수 있어요, 조금만 힘내요. 그녀는 힘내라는 말이 병사는 물론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듯이 손에 힘을 주면서 병사의 눈을 압박했다. 눈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계속 보게 할 수는 없었다. 여순은 할 때까지 해보바는 심산으로 주사기를 꺼내 아직 의식이 있는 그의 허벅지에 강하게 찔러 넣었다. 들어갈 때 근육이 저항하는 느낌을 잠시 받았으나 여순은 무시하고 약물이 다 들어갈 때까지 잡은 주사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시나마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그녀가 할 일었다. 진통의 효과가 몸에 퍼지자 그는 잠시 억지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난 알아요. 내 고향은 가고시마예요.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인지 여순이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병사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난 안다니까요. 내 고향도 알고 그리고. 내 상처도 알아요. 그러니 불쌍한 표정은 짓지 말아요. 그냥 손만 잡아 주세요. 고마워요. 날을 아끼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니 난 행복한 사내에요. 그렇지요. 하고 그가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지금까지 드러낸 적이 없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눈빛은 심지어 가장 존경하는 대상에게 바치듯이 아득하고 멀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안녕. 이 말을 남기고 무릎과 복부에 파편을 맞은 병사가 죽었다. 그는 여순에게 고맙다고 했다. 무엇이 고마운가. 자신의 최후를 지켜준 것은 고향도 따뜻한 엄마 품도 아니었다. 그것이 고마운가. 그래, 고마울 것이다. 누구나 죽을 때 옆에 있어 준 사람은 설사 그가 자신을 죽인자라고 해도 고마울 것이다. 

고마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죽음을 보내고 나자 연달아 또 다른 죽음과 여순은 마주했다. 그들은 죽으면서 여순에게 고마워 했고 전쟁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결같았다. 죽음을 가져온 것에 대해서는 증오하지 않았고 죽음을 지켜보는 자에게는 감사함을 느꼈다. 이것은 형용모순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능인가. 말수는 최후의 순간에는 자신보다 여순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더 어울렸다. 나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투박한 사내의 손을 잡고 저승길을 가는 것은 괴로울 터. 말수는 여순과 병사들의 주고 받는 눈길을 피했다. 아늑한 항해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차례에 걸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갈 수 있을까. 군함은 침몰하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말수는 담배를 꺼내들었다. 이런 때 한 모금의 담배 만큼 시련을 이겨내게 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있지. 그래. 말수는 담배를 다시 집어 넣었다. 그리고 급하게 몸을 돌려 가려곳으로 가려했으나 여순이 아직 환자 곁에 있자 시간을 더 주고 싶었다. 길어야 십분일 것이다. 상황은 다 끝났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여순은 죽은 병사가 동생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 순간 만큼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죽은 병사는 고향의 부모 형제 였으며 휴의이며 완용이었다. 어쩌면 점례였는지도 모른다. 여순은 그런 친근한 마음으로 죽은 자들과 이별했다. 한바탕 회오리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낮의 태양이 이글거렸다. 태양은 다 지켜보았으면서도 모른 척 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할 일만 했다. 야속했다. 타는 태양은 지독한 냄새까지 불러 모았다. 갑판 위의 병사들은 피할 그늘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산자들은 살아야 한다. 일부는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자기 발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부상병과 그렇지 못한 자들은 쏟아지는 태양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받았다. 죽은 자들은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수장됐다. 바다로 던져지기 전에 그들의 목에 걸린 인식줄이 수거됐다. 인식줄은 그들이 살지 않고 죽었다는 증표였다. 난 저걸 알아. 인식표. 저기에 병사의 기록이 다 있어. 저걸 보면 죽은자의 인전사항을 알 수 있지. 장교가 죽었으니 오장이 저걸 수거하네. 오장의 손에 가득해. 대체 몇 명이나 죽은거야. 

병사들만 지친 것은 아니었다. 말수와 여순도 지칠대로 지쳤다. 지쳤다기보다는 아주 몸이 녹아났다. 얼음이 물로 되고 있다. 여기서 더 있으면 그대로 통닭구이가 된다. 그들의 어깨로 쏟아지는 열기는 발다닥까지 뜨겁게 달궈 놓았다. 간혹 서풍이 불면 땀이 식는 듯 했으나 멈추면 이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였다. 우리도 좀쉬자. 쉬지 않으면 생으로 타 죽을 것이다. 피비린내는 피할 수 없어도 태양을 피할 곳을 찾자. 메스꺼움이 여순의 목근처까지 와서 간질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용케도 참아냈다. 이력이 붙은 것이다. 멀미는 조금 했으나 구토까지는 아니었다. 말수는 여순을 다독여 함장실 쪽의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그립다. 벌꺽벌꺽 숨도 쉬지 않고 한 바가지만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 담배 피지 말아요. 말수가 막걸리는 언감생심이라 생각했는지 다시 담배를 꺼내 들자 여순이 저지했다. 그러면 목이 더 탈거에요. 내려 갑시다. 아쉬운 대로 손이라고 씻고요. 말수는 여순의 그 말에 갑자기 내려가고 싶지 않다고 버텼다.

그곳은 답답했다. 비록 이곳은 뜨겁고 습해도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다. 운 좋으면 갈매기도 볼 수 있고 뱃전에 부서지는 포말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말없이 달려들었다가 소리내며 사라지는 검푸른 바다도 볼 수 있다. 답답한 것보다 이런 것이 좋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온통 피칠갑한 얼굴이다. 누가 보면 우리가 총을 맞은 것으로 오해할거야.  그러게. 피가 굳으면서 얼굴이 당겨. 씻어야 겠어. 같이 가자. 그러나 그러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임시 처치한 부상병이 갑판의 열기과 수분부족으로 죽는 일이 벌어졌다. 오장이 소리쳤다. 이리 오세요. 여기도 죽었어요. 세 보니 세명입니다. 확인해 주세요. 말수는 그렇다고 죽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장이 소리치자 마지 못해 병사 두 셋이 그늘에서 기어나왔다. 

여기 시체가 있다. 치워라. 이제 시체들은 죽은 자의 예를 받을 수 없었다. 죽은 시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놓고 옥신각신할 사이도 없이 두 명의 병사는 힘겹게 시체를 끌어서 난간에 걸쳐 놓는 일단계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는 하나 둘을 외치며 시체를 바다에 밀어 넣었다. 전쟁터에서는 어떤 일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은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었다.  어느 새 또 다른 병사 하나가 합세했다. 그래서 두번째 시체를 던지는 일은 조금 수월했다. 셋은 시체를 들고 어영차 소리와 함께 바다로 던졌다. 어영차 소리는 돌격 앞으로 하는 소리와 비슷했다. 어영차 소리를 듣은 두 번째 시체는 운이 좋았다. 그런 소리라도 들었으니. 손을 털면서 그들은 동료의 시체가 굳어지기 전에 해치운 것에 만족한 것 같았다. 

여순은 시체와 물이 만나면서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점차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바다가 그를 수면 아래로 끌어내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 수면을 그려보았다. 그러자 정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나의 생명을 삼킨 바다는 전과 다를바 없었다. 무자비한 바다였다. 아니다. 자비를 베푼 것이다. 죽은 자의 수치심을 알아서 감춰준 것이다. 바다는 그 일을 말 없이 수행했다. 명령을 받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척척해냈다. 그 덕분에 바다로 던져질 때 장기를 드러냈던 무릎을 다친 병사는 부끄러운 모습을 감출 수 있었고 더이상 부끄러움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조금 남아 있던 병사의 젊은 피는 스펀지처럼 짠 물에 마지막으로 스며들었다. 장교의 애국심도 바다와 함께 가라앉았다. 병사들이 또 옷을 털었다. 손에 묻은 것을 턴 옷에 슥슥 비볐다. 해치웠다는 안도감이 손 끝으로 몰려왔다.

일을 마친 그들은 이제는 정말 지쳤는지 앉을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짐을 버린 홀가분한 기분으로 두 다리를 쭉 뻗는 자도 있었다. 일부는 그대로 드러 눕기도 했다. 상황이 일시 종료됐다. 그들은 편히 쉬어 자세로 있었다. 군기를 강요할 기력이 어디에도 없었다. 잠시나마 그렇게 그들은 군인에서 사람이 됐다. 여순은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꺾이지 않고 든 것은 힘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바닥보다는 하늘이 나았다. 다시 올려다 본 하늘은 금새 저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붉은 기운이 더해져 검은 피처럼 엉겨 붙었다. 장교와 병사들의 애국심이 저기에 가서 붙었을까. 그들의 애국심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라겠지. 나라. 나라가 밥먹여 주는 대신 목숨을 앗아 갔는데도 그들은 오로지 애국하나만을 붙잡고 있다. 그것을 강요하는 자들은 죽음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강요해서 얻는 이득은 참으로 컸다. 구름은 흩어지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구불구불한 마디마다 붉은 피가 엉겨 붙었다. 무릎을 관통당해 비명을 질렀던 병사의 드러난 장기가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구름은 서로 얼키고 설켜 꼬인 내장의 형태를 띄기도 했다. 피를 먹은 해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기가 막힌 풍경이 산과 산 사이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은 죽마을 해변이 아니었다. 거기서도 석양은 볼만 했으나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크기도 엄청나서 두 팔을 벌려도 다 껴안 수 없을 정도로 해는 엄청나게 컸다. 저리도 찬란한 경치 앞에서 젊은 넋들은 가차없이 쓰러졌다. 내 피도 저기에 묻었을까. 병사들은 이런 생각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스스르 잠에 빠졌다. 여순은 사람 형태도 갖추기 전에 떠나 보낸 뱃속의 아이를 생각했다. 그것은 죽어서 필시 하늘로 갔고 오늘 그 모습을 여순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멋있다. 내 자식. 하늘의 태양이 됐구나. 너무 뜨거울 때는 내려와 쉬려무나. 잘 살아라 라고 말하려다 여순은 입을 닫았다. 잘 살다니. 눈을 한 번 질끈 감는 것으로 여순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여순의 피. 또다른 나의 피. 그래, 하늘의 태양이 붉은 것은 억울한 피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기 때문이야. 군함은 나아갔다. 나아가도록 누군가가 그렇게 했고 그 명령에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이제 그곳이 필리핀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여순은 배가 정박하기만을 기다렸다. 멀미 때문이 아니었다. 멀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의 일이 된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누워 있지 않아도 속은 편안했다. 마치 평지에 있는 것처럼 여순의 몸과 마음은 빠르게 안정됐다. 멀미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지. 여순은 목을 들어 다시 불타는 태양을 올려다 봤다. 거기에는 태양 대신 함장의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함장이 운전을 잘하나. 흔들림이 없어. 그나저나 이번 전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지. 여순이 다시 현실로 다가왔을 때 저벅 거리는 박자국과 군도가 버클에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순은 억지로 일어섰다. 말수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부관과 함께 온 함장은 부상자들의 상태를 물었다.당연히 물어야 할 대상이 여순인 것처럼. 그때 정말로 바람처럼 말수가 나타났다. 필요할 때 제때 와주었어. 제 일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여순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말수가 나섰다. 6명이 죽고 14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사망자는 이미 처지가 끝났고 부상자들은 임시로 봉합했으나 모두 생명이 위중한 상태라는 사실을 말수는 머뭇 거리며 덧붙였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 양 말수는 그 말을 하고는 함장의 얼굴을 살폈다. 장교도 사망했습니다. 함장이 입맛을 다시는 듯이 입술을 혀로 핧았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보고 때문인지 원래 그런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함장은 말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변을 둘러 보았다. 얼굴은 그대로였다. 무표정한 것이 과연 함장다운 태도였다. 일희일비에 좌우되지 않는 그런 표정.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을 자세히 보면 방금 죽은 시체처럼 핏기가 없었다. 여순은 그가 지금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 있다고 여겼다. 더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심리적인 방어선을 치고 함장은 갑판을 서성였다. 아끼던 장교의 죽음은 그에게 남은 마지막 두려움마저 걷어갔다. 무언가 결정한 듯이 그는 턱수염을 만지다 지휘봉을 흔들며 올라왔던 계단쪽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상황파악이 끝났으니 할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부관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기억에 저장되기 전에 이런 음산한 광경은 지워야 한다는 듯이 여순이 그런 모습을 보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저런 식으로 지휘관이 화가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여순은 생각하지 않았다. 동물적인 본능이 살아날 때 나타나는 반응은 저런 것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여순은 두려웠다. 결과가 좋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여순은 자신도 표정관리를 해야지,생각했다. 좋든 싫든 그것을 얼굴에 바로 나타내지 않기로. 그러자 차분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달리는 군함보다 해는 더 빠르게 식기 시작했다. 산 기슭에 걸리고 물에 닿는가 싶었는데 어느 새 모습을 감춰버렸다. 어둠이 찾아왔다. 깊은 적막이 감돌았고 부상당한 병사들은 다시 괴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어둠을 향해 지르는 비명은 상당한 공포를 불러왔다. 다행인 것은 새로운 공포를 가져올 포성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적들은 다 죽었는가. 이쪽이 이 정도의 피해를 봤으니 적들도 어느 정도 피해는 봤을 것이다.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그들도 쉬고 있을 것이다. 다들 해처럼 지친 몸을 잠시 식히고 있어야지. 해도 쉬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그러나 함장은 쉬지 않았다. 함실로 내려간 그는 상대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해 답답했다. 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들은 사라진 군함을 찾기 위해 레이더를 가동했고 섬 사이로 숨은 군함은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더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일단 우리가 숨는 게 우선이야. 적을 발견하는 것은 둘째지. 함장의 결심은 적에게 들키지 않고 숨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오늘 밤에는 전투가 없을 것이다. 사력을 다해 도망자는 자를 어설프게 추격할 필요가 없다. 적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어쨌든 전투는 중단됐다. 소강 상태가 길어지고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고 사정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더 나빠질 수 있어 서로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함장은 적들의 이런 심리를 간파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 승기는 우리가 잡는다. 그러나 연합군의 전투기가 문제였다.  그것들이 목표물을 향해 태평양 상공을 빠르게 날고 있다면 함장이 꾸는 꿈은 헛된 것이다. 방향을 잘못 잡아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기를 기대하는 것이 속 편했다. 아니면 지금쯤 군함을 타격 거리에 두고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함장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무력감을 느꼈다. 더 큰 공격이 올 것을 대비하고 싶었으나 대비할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함장은 지도를 펴고 깊은 고뇌에 빠져 들었다. 도대체 육군은 뭐하고 있나. 우리가 이렇게 힘겹게 싸우고 있는데. 공군은 왜 이리 지원이 더딘지. 함장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괴로웠다. 우리가 공격 받을 때 공군의 지원이 있었다면. 육군이 함포 사격을 가했다면. 이런 가정을 하면 할수록 함장은 본토의 사령부에 대한 원한을 키워갔다. 

용기와 무모함 만으로 전투를 이길 수 없어. 죽기밖에 더 하겠어. 함장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한 두 번은 가능해. 그러나 매번 그럴수 없다는 것을 함장은 숱한 전투에게서 깨닫았다. 본부의 지시는 지시일 뿐이야. 싸워서 이겨라. 누가 그걸 모르냐고. 그러고 싶어. 싸우는 족족 이기고 싶다고. 지시와 연장 사정은 달라. 그렇다고 책임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를 대면 끝이 없을 것이다. 지는 이유는 많다. 그러나 이기는 이유는 단 하나. 적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내가 뒤로 물러날 수는 없어. 다른 모든 장군이 그래도 나는 앞으로 나갈거야. 진군할 거라고. 싸우다 장렬하게 죽는거지. 적어도 태평양 사령부를 책임지고 있는 자는 그래야 해. 내 손에 대일본 제국의 운명이 달려있거든. 여기서 승기를 잡아야 한다. 패하면 어쩌면 본토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다. 그는 무전병을 불렀다. 그리고 갑판위로 전투기 두어 대가 앉을 수 있도록 암호를 쳤다. 운전을 잘 하면 빵구난 곳을 피할 수 이다. 두 어대. 그래 두 대면 호위할 수 있을 거야. 인근의 다른 군함에도 전투기들이 발진한다면적어도 함대를 더는 잃지 않을 거야. 

연료를 채워라, 실탄을 점검하라. 그는 명령했다. 나는 명령할 때 군인이다. 사색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 신호와 동시에 출격이다. 이것은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대비할 필요없는 선공을 때리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을 실행하려고 한다. 미국령의 한 섬을 폭격해 전선을 확대하면서 눈엣 가시 미군을 제거해야 한다. 그는 본국의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초조해 하지 않기 위해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함장의 얼굴에 알듯 말듯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한편 조선행 기차에 앉은 점례는 만감이 교차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도대체 삼 년도 채 안되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가. 백년은 더 지난 일처럼 느껴졌다. 일일이 손꼽아 보아도 다 헤아릴 수 없다. 큰 것만 골라도 열손가락이 부족하다. 죽마을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아. 점례는 과거를 회상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환희보다는 여기 저기 금이 간 인생전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나쁜 기억은 오래간다. 사라지기까지의 시간도 그만큼 걸린다. 그러니 당장 지울수는 없다. 지우개로 지우듯이 쓱쓱 없앨 수 없다. 나대로의 현실을 보자. 난 이전의 내가 아냐. 그러니 점례야, 넌 강해져야 해. 실제로 강하기도 하지만 더 강하게 살자. 점례는 그런 마음으로 기차안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 차가 나를 조선으로 데려다 준다는 거지. 가자, 조선으로. 내 땅으로. 그러나 난 환희의 기대보다는 어떤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기분이야. 왜 그런지는 몰라. 다만 유마가 그랬거든. 경성에 가면 삼촌을 찾으라고. 그게 내 임무야. 다른 건 몰라. 생각하기도 싫어. 삼촌을 만나자. 그러면 내 임무는 끝. 점례는 홀가분했다. 숙제를 받고 그것을 풀고 났을 때의 홀가분한 기분. 점례는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낯설기도 하고 친숙하기도 한 사람들. 간혹 알아 들을 수 있는 조선말이 들린다. 조선말. 그것은 익숙하기도 했으며 낯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점례의 의식을 전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점례는 성장해 있었다. 기차는 느렸으나 쉬지 않고 달렸다. 점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꼈다. 죽지 않고 살아서 고향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그녀를 생기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분은 계속 이어지지 않고 자꾸 샛길로 빠졌다. 의식의 혼란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점례는 멈추기를 포기하고 중간쯤에서 구경꾼처럼 서성였다. 두려움이 몰려온 것은 아니었다. 결과가 어떻든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시선이 필요했다. 그것이 필요했다. 여유가 없어도 억지로 챙겼다. 그렇다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자신을 들뜨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인 지금 이 상태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점례는 자신의 내면이 더 다듬어 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지난 시간의 시련이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일들이 점례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예고 없이 닥쳐도 점례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보다 더 한 일이 있을까 싶은 의구심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일은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도 아니다. 그저 인생은 현재를 받아 들이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이유였다. 받아 들이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점례는 사색하는 사람이 되어 운명이 자신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던지 순응하려고 마음먹었다. 잘 가던 기차가 뜸을 들였다. 역의 어느 곳에서 멈춘 기차는 언제 출발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아랑곳 없이 소음만 내면서 하염없이 그대로 있었다. 참을성 없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나 하고 두리번 거렸다. 귀를 세우고 누가 하는 말이 기차 출발과 연관이 있나 살폈으나 헛고생이었다.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도 연신 고개를 내밀고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래, 어쩐 일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말을 듣고서 대답해 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만큼 객실의 사람들은 기차가 어서 움직였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 있었다. 시간에 쫓겨 막 올라탄 사람은 식식 거리면서도 기차가 제 시간에 떠나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미리 올라탄, 초조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안도의 마음이 가시면 또다른 안도를 찾기 마련이다. 지연 출발로 기차를 탄 사람은 서둘러 빈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빈자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자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긴 시간 동안 덜 고생하게 될지 기댈만한 장소를 찾아 눈을 번득였다. 하나의 안도는 또다른 안도를 원한다. 이들은 일행이 없으면서도 행여 알고 있는 사람이 그쪽에 있는 듯이 밀치면서 막무가내로 안으로 들어가려고 힘으로 밀어댔다. 그만 밀어. 들어 갈 곳이 없어. 이렇게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려도 막무가내였다. 밀면 밀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사람들의 행동이었다. 그런가 하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즐겼다. 그러면서 무언가 자랑할 게 있는지 옆사람과  떠들어댔다. 기차안은 후끈 달아 올랐고 난장판과 다를바 없었다.

시골장터가 이랬지. 천웅 읍내의 오일장. 그래 2일과 7일이 장날이었어. 점례는 여순과 마찬가지로 천웅 장날을 생각해 냈다.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기대에 부풀어 어디론가 떠나는 자들의 소음을 알고 있어. 난 그 목소리가 정겨워. 무심하게 듣고 있지만 난 안다고. 그 시끄러움의 안도감. 여순은 상대적으로 느긋했다. 만주에서 부터 점례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를 안내했던 유마의 부하는 그녀가 좌석에 앉을 때까지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등석은 처음엔 여유로왔다. 그러나 승객이 넘쳐나자 일등석에도 입석 손님들이 밀고 들어왔다. 수가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어 철도 공안들도 모른 척 했다. 승객의 일부는 화를 냈으나 받아줄 승무원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은 앉아서 가는 것을 호사라고 여길 정도로 많은 승객에 기가 질렸다. 여순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가방을 열고 유마 호사카가 준 책을 펼쳐 들었다. 유마 호사카. 왜 내가 여태 그 사람 생각을 하지 않았지. 놀랍다는 듯이 점례는 미안한 기색으로 그를 떠올렸다. 
 

그는 내게 내내 친절을 베풀었다. 책을 주었고 연필과 물감과 스케치 북을 선물했다. 과자, 그래 일본 과자도 그가 아니었으면 입속에서 녹아 들었을 리가 없다. 세상에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그가 해준 것이 많다. 그래서 그는 이제 점례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그를 잠시 동안 잊었다. 객실내의 번잡함이 이유였다. 그래도 그렇지. 유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점례는 생각할 수도 없다. 이 기차안의 여유와 소란한 기분을 점례는 맛볼 수 없었다. 기차로 끌려와 기차로 해방된 기분을 점례 말고 누가 알까. 하나의 공포와 불안이 이제는 겨울날 코트속의 따뜻한 두개의 온기로 남아있다.

점례는 책의 중간 부분을 펼쳤으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산 속 관사에서 대장과 함께 했던 그 날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친절했어. 친절했다고. 그 말을 점례는 되뇌었다. 친절. 얼마나 다정한 말인가. 그 말을 생각할 때 점례는 자신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래야 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친절했던 적이 있었던가. 유마처럼. 점례는 다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책을 조심스럽게 처음부터 펼쳤다. 읽어야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중년의 남녀가 먼저 눈짓했다. 첫 장에는 유마가 떠나올 때 준 그의 부모가 환하게 웃고 있는 흑백 사진이 들어 있었다. 신사복을 입은 아버지는 근엄했고 통통한 어머니는 인자해 보였다. 정치를 한다고. 아버지는 참의원이라고 했다. 내조는 어머니 몫이었다. 유마는 자신은 정치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내 체질이 아냐. 그렇다고 군인도 아니고. 아빠는 아냐. 아마도 엄마를 닮았나 보다. 어머니는 여행을 좋아했고 그림을 보는 안목이 있었으며 이야기를 잘도 지어냈다. 어머니의 피를 유마는 받았고 그 때문에 점례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었다. 점례는 통통한 유마 어머니는 보면서 이렇게 단정 지었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앞쪽을 응시했으나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서로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듯이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을 지었다. 근엄함 속에 깃든 다정함이라고나 할까. 살찐 사람만이 갖는 느긋함이라고 해야 하나. 사진 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을 점례는 짐작했다. 그는 왜 이것을 부적처럼 간직하라고 나에게 주었을까. 부적이라면 나도 또 하나가 있다. 떠나올 때 엄마는 다니던 암자에서 받아왔다며 흰 창호지에 붉은 그림이 그려진 작은 종이 쪽지를 주었다. 엄마도 유마처럼 이것을 잘 간직하라고 했다. 그래 잘 간직해야지. 그래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잖아. 휴의가 준 나무조각상은 사라졌어도. 점례는 나무조각상을 생각하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야. 점례는 속옷의 안쪽에서 부적을 꺼내 들었다. 오래된 낡은 종이에서 나는 특유한 냄새와 함께 붉은 색이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났다. 간직하면 나에게 행운을 줄까. 안 그래도 괜찮아. 불행만 없다면. 행운을 가져다 주는 부적이 아닌 불행을 막아주는 부적. 딱이야, 나에게 딱이야. 

점례는 부적을 다시 제자리에 넣고는 사진 뒤에 적힌 경성의 한 가게 주소에 눈길을 주었다. 머릿속에 달달 외웠던 그 주소.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잊을 수 없다. 삼촌을 찾아가. 경성에서 화랑을 운영하고 있어. 잘 챙겨 줄거야. 그 분은 나에게 아버지와 마찬가지 존재야. 그러니 부담가질 필요없어. 떠나 올 때 유마는 삼촌이 운영하는 화랑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 삼촌에게 쓴 편지는 봉투에 담겨 있었으나 밀봉되지 않았다. 호기심이 일었다. 무슨 말을 했을까. 말한 것과 같은 부탁한다는 내용일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점례는 열어 볼까 말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전해 주라고 하면서 읽어도 된다거나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은 이상 언제든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읽을 시간은 많고 기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다. 급할 게 없다는 말이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면 그 때 열어 볼까. 그럴 것이다. 틀림없이. 마음속은 이미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경성역에 도착하기 전에 그것을 꺼내 읽어 볼 것을 확신했다. 이미 그렇게 결정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 있었다. 삼촌이 운영하는 화실은 인사동에 있다고 했다. 인사동은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화실을 어떻게 생겼을까. 아를의 고흐 화실 같을까. 혼자 사용할 수 있는 나만의 방이 있을까. 점례는 이런 저런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넌 조선 최고의 화가로 성공할 거야. 또 모르지. 파리 화랑에서 이름을 날리게 될지도. 점례는 가슴이 더 부풀어 올랐다. 내가 화가가 된다고. 그것도 최고가 되고 심지어 프랑스 파리까지 간다고. 점례는 장밋빛 스카프를 목에 걸고 세느 강변을 활보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 강은 사진에서 조차 본 적이 없지만 강이 뭐 별건가, 물이 있고 둑이 있으면 강이지. 점례는 그렇게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강물 처럼 넘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점례는 그 말을 곱씹었다. 화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녀는 소학교 미술 시간에 화가라는 말을 처음 들은 이후로 그것이 자신에게 붙어 올 줄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주에서 그 짓을 하리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화가는 점례의 인생에서 어떤 예비동작도 없었다.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지만 그것이 화가를 준비하는 전주곡은 아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의 연속이다. 점례는 경성에서 생활이 안정되면 기록으로, 그림으로 자신의 일을 남기고 싶었다. 그녀는 책 갈피에 낀 연필을 만지작 거렸다. 그가 잘 그릴 수 있도록 대검으로 깎아 준 연필심의 촉감이 살갗을 찌르는 듯이 느껴졌다. 유마, 그래 난 철저하게 유마에게 속해 있어. 이상한 일의 연속이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해.

점례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고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마을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부모님도 뵙고 싶고 휴의의 소식도 궁금했다. 완용은 순사가 됐는지 여순은 어디로 갔는지 수소문 해 보고 싶었다. 거기 가면 알 수 있는 단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생전에 고향땅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순수한 곳을 더럽혀진 내 발로 밟을 수는 없다, 뭐 이런 이유는 아니다. 그냥, 그곳은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동화책에서만 나오는 그런 곳으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곳으로.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모를 대할 용기가 없었다. 다 숨길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하다 보면 드러날 것이다. 그때는 그때가서. 미리 걱정하지 말자. 점례는 몸에 닭살이 돋아나는 듯이 몸을 움츠렸다. 거미나 더러운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아 소름이 확 끼쳤다. 내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나는 조선땅에서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나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사람이다. 만주로 가기 전의 점례는 대명천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상태로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것이 나, 바로 점례여야 했다. 

설명을 해야하는 일이 점례는 싫었다. 이런 저런 일을 했다고 거짓말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눈,  더 말해보라고 다그치는 그 눈동자를 대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선땅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그런 일을 한 사람이라고 떠벌일 이유가 없다. 내가 왜? 굳이 왜? 점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됐다. 과거는 없다. 내 인생은 지금부터가 진짜다. 가짜는 가고 진짜가 오고 있는 것이다. 복대 속에는 유마 호사카가 준 약간의 돈이 있다. 경성까지 갈 여비와 혹시 잘못되면 당분간 써야 할 필수품이다. 목숨같은 돈이다. 왜 그런 생각이 이제야 났지? 돈, 돈 보다 더 중한 것이 있을까. 점례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허리에 여러번 둘러서 맨 복대안에 든 현금을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배쪽을 눌러 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티나자 않게 가볍게 몸을 푸는 것처럼 하면서 묵직하게 다가오는 손의 맛을 확인했다. 

돈은 제자리에 있다. 그럼 그렇지. 그게 어디 갔을까.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을 알았는지 기차는 손님들의 속을 더 애태웠다. 무슨일일까. 혹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점례는 기차가 폭발하는 상상을 했다. 중국 항일 단체들이 설치한 폭약이 바퀴아래서 재깍 거리면서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건 이후로 철도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더 심해졌다. 첩보를 받은 일제가 일일히 바퀴 하나 하나를 뜯어서 살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소란이 일어났어도 점례는 차분하게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얻은 행운인데. 그녀는 유마의 말처럼 그림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고 싶었다. 화가. 내 그림을 감상하는 운집한 관객들. 하지만 그런 상상은 곧 멈췄다. 다급한 호각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점례는 일이 터진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그런 불안은 만주역에 도착해서도 실감했다. 일경은 역의 도처에서 수상한 자를 물색했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검문을 했다. 세련된 옷차림에 서양 백을 든 점례는 다행히 그것을 피하기는 했지만 만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선과 후방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점례는 여차하면 꺼내들 유마 호사카의 증명서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고 지켜줄 유일한 무기였다. 이것을 가진 자의 신분을 보증한다. 이 증이, 이 증 하나가 나의 목숨을 책임진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 목숨이 이 종이 한장 보다 못한 것이 전쟁터의 현실 아닌가. 호각 소리에 이어 한쪽에서 또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헌병이 검문을 위해 기차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또다시 호각을 불었다. 안에서 듣는 호각은 밖에서 나는 것과는 달랐다. 더 크고 더 위협적이었으며 마치 이곳에 호각을 분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는 것처럼 위험했다. 일등석에도 저런 무례한 자들이 날뛰고 있다. 그러나 승객들은 일등석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기차안의 시선이 일제히 헌병들 있는 그쪽으로 쏠렸다. 뒤이어 모두 꼼짝말고 제자리에 있으라는 고함소리가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 움직일 공간이 없을 것 같은데 헌병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일시에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모세의 기적이 따로 없었다. 헌병들은 승객들 사이로 거침없이 지나갔다. 걸리는 것은 자신의 잘못임에도 내 잘못이 아니라는 듯이 험악한 인상을 지었다. 헌병 세 명이 먼저 들어왔고 다시 세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맞은 편 통로에서도 같은 인원이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도합 12명이 한 객실을 점령했다. 그 많던 시끄러움은 일시에 정지됐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점례가 탄 일호실에 수상한 자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긴박한 순간이었고 모두가 땀을 죽여 그 상황이 어디로 흘러갈지 지켜봤다. 이런 상황에서 일등석을 들먹여서는 안 된다. 숨죽이는 적막이 흐르고 있다. 

그 때 한 남자가 점례에게 아는체를 하면서 급하게 인사했다. 조용한 목소리였으나 또렷했고 위엄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점례에게 조선사람이냐고 물었고 점례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작지만 간결하고 두려움 등 온갖 것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옆사람이 듣지 않을 수 있게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점례는 그 말을 그 말을 한 사람과 자신만이 들었다고 판단했다. 나에게 오빠가 있었나. 굳이 따지자면 있지. 휴의 오빠. 점례는 피식 웃었다. 손을 대고 웃었으나 얼굴 사이로 번지는 미소를 조선청년은 흘리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미소라.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난 이제 죽은 건가. 조선청년은 사태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 눈을 두리번 거렸으나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입에서 손을 뗀 점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생각 대신 위험에 빠진 그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채도 좋고 인상이 부리부리한 그는 검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눈에 띄는 복장이었고 젊었으며 누가봐도 투박한 촌사람은 아니었다. 세련된 그가 일제의 표적이 된 것이다. 그도 알고 점례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알 것이다. 아직 헌병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점례는 자신이 헌병이라면 바로 이 자를 끌어 내리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그만큼 그는 기차안에서 헌병이 찾는 불순범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 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런 어쩐다. 어쩌면 좋지. 서양식 양복에 중절모를 쓴 그가 조선 사람이고 같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내게 보호자가 돼달라고 간청한다. 자신도 헌병의 검문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점례는 당황했으나 호흡을 고르며 곧 진정했다. 

천원복.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순간 점례는 자신은 천점례여야 한다고 직감적으로 결정했다. 그 남자는 감색의 서류 가방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불룩했다. 만주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고 고향 경성으로 가기 위해 탑승했다고 그는 말했다. 점례 귀에만 들릴 정도로 아주 나직한 소리. 그러나 점례는 자신의 성과 이름을 한 번 더 외우고 있었다. 천점례. 그가 내 성과 일치하다니. 이럴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그가 진짜 오빠인지도 몰랐다. 엄마가 말했던가. 숨겨둔 오빠가 있다고. 점례는 그런 가상까지 끌어들이면서 천원복 이름을 외웠고 오빠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속으로 오빠 오빠를 여러번 불렀다. 

내 앞에서 비밀을 연달아 털어놓는 그 말은 나와 입을 맞추자는 신호였다. 성은 천씨고 아버지 장례 때문에 왔으며 집은 경성이다. 그녀가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으나 거기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있었다. 헌병이 바로 조선 청년 앞까지 다가왔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헌병은 점례의 코 앞까지 와서는 낯선 사내를 응시했다. 점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헌병대신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았다. 저런 눈빛을 점례는 알고 있었다. 더 갈 곳이 없어 구석에 몰린 조선 여자들의 표정이 바로 저 모습이었다. 난 거 갈 곳이 없어요. 구석에 몰렸거든요. 그러니 밀지 마세요. 나도 저런 표정이었지. 그래 저 남자의 눈에서 내 눈을 본거야. 

자신의 처지와 조선 청년의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자비를 받을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신에게 자선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그를 점례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애완동물처럼 보살펴 달라는 간절함이 청년의 얼굴 전체에 먹물처럼 번져 있었다. 점례는 흔들리지 않는 감정 조절이 필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청년의 이마에 작은 땀이 맺혔다. 헌병들은 앉은 사람은 서게 하고 선 사람은 몸을 수색했다. 수색하는 그들의 눈빛 역시 간절했다. 거기에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결심이 더해졌다. 그러니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간절한 것은 청년이나 헌병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는 잡히지 않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잡는다는 주체만 다를 뿐이었다.

헌병들은 하나의 수색이 끝나면 다른 하나로 옮겨 갔다. 그 동작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얼마나 많이 했으면 저런 유연함이 나올까. 의심이 가는 사람은 바로 현장에서 체포했다. 손을 뒤로 묶고 한 줄로 세웠다. 세 명이 그런 자세로 엮여 있었다. 엮인 사람들은 나는 아니라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통할리 없었다. 누구도 헌병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이 정해 놓은 질서였다. 질서를 깨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이 헌병과 같이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지금까지의 그들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이 변질되는 것이다. 아마 형체마저 사라질지도 몰랐다. 점례는 나 하나 몸도 건사하기 힘든데 짐을 하나 더 얹었다는 무게감을 느꼈다. 위에서 내리 누르는 힘은 셌다. 세 사람이 묶인 채 끌려 나갔다. 아니라고 무언가 항의하는 그들 가운데 한 명은 권총으로 뒷머리를 맞고 피를 흘렸다. 살벌한 풍경이었다. 으스스한 기운이 기차안을 맴돌고 떠돌았다. 

공포는 이처럼 순식간에 찾아와 기차안을 점령했다. 조선 청년이 점례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품에 든 것을 꺼내 앉은 점례의 의자 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빨리 어떻게 해보라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그는 눈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점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총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속성의 차가운 느낌을 점례는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그것을 꼼지락 거리며 복대 아래에 넣은 점례는 태연하게 자신의 검문 차례를 기다렸다. 어쩡쩡한 태도는 되레 의심을 살 만 했으므로 점례는 가능한 한 태연하기로 마음 먹었다. 할 게 있으면 하라는 당당한 태도였다. 조선청년이 허물없는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점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는 사람만이 취할 행동이었다. 무엇에 쫒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그가 점례의 어깨에 손을 댔다. 점례는 손을 들어 그 손을 맞잡았다.

점례는 그가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과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다는 두 가지 가정에서 자신은 빠져 있음을 알았다.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이 자신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점례는 어서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매를 먼저 맞았으면 좋으련만 그에게 선택권이 없어 그것이 아쉽기 까지했다. 마침내 헌병이 조선청년에게 다가오자 그는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웃음 짓지는 않았다. 웃음으로 모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볼 것이 무었인지 말하면 대답할 자세를 취했다. 어떤 경우도 속이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자신감을 헌병은 읽었다. 그런 표정은 위험한 자들에게서 늘 있는 일이었다. 일급 수배자도 다 저렇게 한다는 듯이 헌병은 어떤 동정도 베풀지 않겠다는 듯이 아주 사무적으로 나왔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헌병은 기선제압으로 상대를 몰아 부치기 위해 작은 눈을 더 반짝였다. 그 사이 다른 헌병 하나가 점례에게 통행증을 요구했다. 그는 기차표를 꺼내 보여 준 다음 유마 호사카의 신분 증명서를 내보였다. 차표외에 증명서를 내 보인 것은 기차안에서 점례가 유일했다. 청년을 검문하던 헌병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는 표정을 지었다. 점례가 입을 열었다. 저 신사분은 제 오빠고요. 그 말에 따라 점례에게서 청년으로 시선을 돌린 그들 중 하나가 이번에는 그에게 신분증과 탑승권을 요구했다. 그때 점례가 다시 나섰다. 제 오빠라고요. 친오빠. 신분증을 돌려 주지 않고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헌병이 대장님과는 어떤 사이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미 한풀이 꺾인 상태였다. 점례는 목소리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더 세게 나가야 한다. 혼인을 약속했다. 헌병에게 향하는 그녀의 말은 반말이었다. 

이것은 사전에 준비된 발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먹혀 들었는지 헌병은 잠시 주춤했다. 기차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더 확인한 단 말인가. 다른 사람처럼 체포해서 끌고 갈수는 없다. 자신에게 닥칠 경고를 그는 포승줄을 받듯 덤덤하게 받았다. 더는 질문을 하지 않고 헌병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정을 이야기 했으니 이제 앉아도 되느냐고 점례가 몰아 붙이듯이 말했다. 그것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겠다는 명령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헌병들은 약간 당황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대장의 보증은 그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몰라. 그들은 서로에게 이런 눈짓을 교환했다. 귀찮아. 그냥 내두자. 지금 전황이 어떻고 유마 대장이 있는 곳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는 그들은 더 묻는 대신 경례를 올리는 것으로 대장에 대한 예를 점례에게 했다. 점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가만히 있는 것으로 경례에 대한 답을 보냈다. 

헌병은 청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 더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다는 투였다. 앉았던 점례가 앉은 자리에서 그 분은 나의 친오빠라고 한 번더 말했다. 네 오빠라고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요. 점례는 묻지도 않은 이름을 대면서 천원복이 우리 오빠 이름이라고 했다. 검문을 하던 헌병은 더 실랑이 하는 것은 의미 없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려 붙이고는 다른 사람 앞으로 갔다. 그러나 곧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데도 무시하고 넘어가는 찜찜한 기분은 떨쳐 내기 어려웠다. 오랜 경험에서 오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 가던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한번 했다고 더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대신 한 번 더 검문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그래서 뒤로 돌아 점례쪽으로 몸을 향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점례는 복대쪽의 권총을 의식하면서 손을 배에 가져갔다. 그것이 헌병의 의심을 샀다.

그가 다시 와서 배쪽을 보면서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헌병은 말끝을 흐렸다. 순간 점례는 일어나는 반동을 이용해 헌병의 따귀를 갈겼다. 가타부타 말없는 행동에 다시 소란할 준비를 하던 기차안이 얼어 붙었다. 대일본 제국 대장의 아이가 여기 있다. 그래 확인해 볼테냐. 너 어디 소속이야. 점례 소리쳤다. 선수 치는 법을 그녀는 유마 호사카에게서 배웠다. 위기를 탈출할 때는 먼저 선공을 날려야 한다는 말을 기억해 내고 현실에서 써먹은 것이었다. 헌병은 완전히 기가 죽었다. 얼얼한 얼굴을 달래려는 시도도 없이 죽을 죄를 졌다며 용서를 빌었다. 오빠가 나서서 사람을 제대로 보고 검문하시라고 점잖게 타일렀다. 당신 헌병질 몇년 째야. 오빠가 훈계하듯이 말했다. 사람 가려서 검문해, 이 놈아. 젊은 놈이 눈이 삐었어.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사태를 수습했다. 

동생이 흥분한 것은 임신 때문이니 당신이 이해하고 얼른 용의자 색출을 마무리 지으라고 충고했다. 몸에 벤 군인정신을 가진 그 헌병은 그것을 상관의 명령으로 알고 따랐다. 네게 일어난 이 일이 행운일까, 불행일까. 모든 것이 정리된 즈음 점례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유마가 준 반 고흐가 동생 테오와 지인들에게 보낸 글을 읽기 시작했다. 글에는 그림도 섞여 있어 기분을 전환하는데 더 없이 괜찮았다. 오빠는 자신이 지금 목격한 그 광경에 기가 막혀 자신이 따귀를 맞은 듯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믿어지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이냐고 점례에게 묻는 듯한 눈에는 당황과 존경 어린 눈빛이 교차했다. 소란은 멈췄다. 그러나 다시 이어졌다. 아까와는 다른 내용으로 열차 안은 웅성거렸다. 서로를 쳐다보며 기차 테러라는 둥 테러범이 도망갔다는 둥 시끄러웠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러고는 또 잠시 조용해졌다.

테러는 없었으나 기차는 출발한다는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출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출발이 지연되자 청년은 다시 불안해 졌다. 그러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데는 도움이 됐다. 이제 헌병들은 다시 기차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안심한 그는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적당한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망설였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던 당찬 여자 앞에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왔던 조선 여자의 이미지가 깡그리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보다 결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은 소녀의 단단한 심장에 주눅이 들었다. 이국만리에서 자신도 어느 정도 맷집이 있다고 여겼는데 오늘은 초라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고맙다고 아까처럼 둘 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빠르게 말했다. 망설일수록 다가가기가 더 어려워 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점례는 살짝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좋은 물건을 싼 값에 샀을 때 느끼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그것으로 됐으니 그만하라는 식으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 눈빛이 꼿꼿했다. 자신을 위해 무언가 했다는 자부심이 여자의 가슴을 벅차 오르게 했다는 것을 오빠는 느꼈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고 더구나 그대로 있기가 거북스러워 창밖으로 무심한 듯 조선 청년은 눈을 돌렸다.

이런 일 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저 표정이 저렇게 말하는 군. 정말 그런가. 그렇지는 않을거야. 책을 보고 있는 여자를 청년은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예감을 받았다. 청년은 그녀가 자신의 삶 속에 들어와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직감했다. 바람 부는 들판의 불꽃처럼 그의 눈길이 그녀를 저절로 따라갔다. 눈이 멈춘 곳에는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반짝이는 까만 두 눈과 그보다 더 진한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 주위를 늘어진 버드나무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청년은 온 몸의 뼈가 새싹을 받치는 줄기처럼 곧추서는 것을 느꼈다. 진정으로 살아서 숨쉬고 있어. 어려운 문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주는 충만한 생명력 때문에 조선 청년은 깊은 숨을 계속해서 쉴 수 있었다. 호흡하자. 이렇게. 그렇지. 이렇게. 

그러자 자신의 영혼이 창공의 별처럼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의 끝에 그녀가 있었고 그래서 그녀를 만났기 때문에 청년은 자신의 운명도 거기에 맞춰질 것을 예감했다. 그러다가 너무 성급하게 나간 것을 알고는 잠시 부끄러워 눈을 감았다. 청년은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은 평생 두 번 찾아 오지 않는다고. 생명을 건지는 기적 같은 것은 결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눈을 뜬 채로 가벼운 한 숨을 내쉬었다. 검문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과 정보가 사전에 새 나간 것은 모두 자기 책임이라도 되는 듯이 자책했다. 밤을 세운 계획이 아침에 탄로난다면 그것을 계획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심하지 못한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없었다. 자책의 시간이 흘러갔다. 

바보 노릇은 오늘 하루로 충분했다. 자기 한 몸 알아서 챙기지 못했다. 그가 한탄으로 마음을 괴롭게 하고 있을 때 점례는 청년이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궁금했다. 세상은 넓고 하는 일은 많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중이지만 아직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휴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 그는 왜 조선땅에 있지 않고 만주에서 사는지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강인하지만 선한 눈빛은 타고나기를 악한 것과는 멀리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누구라도 때려 눕힐 듯이 달려들던 헌병의 음흉한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상대에게 고통을 줘서 즐기는 자가 아니었다. 점례는 인간을 헌병과 청년 두 조각으로 갈라 놓고 청년의 앞날을 걱정했다. 오지랖 넓은 행동이었다.

벌써 세 시간 째 열차는 기침환자처럼 쿨럭 쿨럭 거리는 소리만 간혹 울릴 뿐 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떠나지 못하면 못한다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객차안은 심란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내용을 알고 있는 기관사는 발빠른 사람이 아니었다. 승객을 알뜰히 챙겨주는 타입도 아니어서 상부로부터 당분간 기차는 역에 대기한다는 전달을 받고도 한동안 모른척하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부하에게만 알리고는 자신은 용변이 급해 먼저 하차했다. 그런데 부하는 아침에 부인과 다투고 나서 화가난 상태였으므로 화해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궁리중이었다. 그래서 승객은 사실 안중에 없었다.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고의성이 아니라 그만 깜박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도 용변이 급해 밖으로 나왔고 마침 점심을 먹기 위해 대기하던 기장과 함께 하면서 기차가 늦어지고 있다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기장은 승객은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도 나무라지 않았다. 인내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그런다고 해서 자신에게 손해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세시간 넘게 더 기다린 승객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역장은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기차는 내일 같은 시간에 출발한다고 고지를 내렸다.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안 기차안 사람들은 싸울 이유가 안 되는데 서로 삿대질 하면서 화를 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멋적은 악수를 하면서 옆사람과 화해를 청했다.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앞에서는 아무 소리 못하고 각자 모른척 했다.

점례는 내 몸이 많이 피곤해 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기차에서 내렸을 때 어디서 쉬어야 할지 걱정됐다. 예정에 없는 사고로 일정이 틀어지자 점례는 갑자기 길을 잃은 아이처럼 역에서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 그래도 살 만 했다. 하룻 밤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때 조선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사정이 점례와는 달랐다. 청년은 자신이 여기서 삼십 분 쯤 떨어진 거리에 거처가 있으니 거기서 쉬었다가 내일 떠나는 기차를 타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아무 생각없이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빚진 것을 갚는다는 투로 청년의 얼굴은 갑자기 활기가 넘쳐 흘렀다. 돈 내고 밥을 먹는 당당함이 있었다. 이제야 내 일을 한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기차 안과는 달리 전세가 바뀐 것을 알고 점례는 그 호의를 받아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오자 점례는 어쩌면 이것은 또다른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와의 관계는 유마 호사카와 그랬던 것처럼 위험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해 점례는 거부하기 보다는 운에 맡기기로 했다. 나, 나쁜 사람 아닙니다. 알아요.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걸. 망설이는 것으로 보아 혹시 자신의 제의를 거절 할까 두려웠던 청년은 점례의 말에 활짝 웃음을 지었다.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드리고 싶고요. 점례는 일어섰다.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말보다 먼저 몸이 답한 것이다. 이쪽인가요. 점례가 말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맞아요. 그쪽입니다. 조선청년이 급하게 화답했다. 그러나 점례는 그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가 하는 조선말이 거슬렸다.

일경이 쫙 깔린 역 구내에서 조선말은 생소했고 낯선 것은 경계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서로의 안전을 위해 일본어를 쓰자고 제의했다. 청년은 머리를 극적이며 하도 반가워서 그랬다, 나도 모르게 뛰어나왔다면서 그런 지적을 감사하게 받아 들였다. 자신보다 섬세하고 조심성 있는 그녀에게 청년은 자신이 오빠가 아닌 동생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생각지 않고 위험을 걸고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을 할 수 있어 청년은 좋았다. 청년이 마련해 준 안가에서 점례는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그는 점례에서 경성의 주소를 적어 주었다. 어려울 때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그 말을 하면서 청년은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으로는 자신을 구해준 것에는 턱 없이 못미친다는 투였다. 점례는 그만하면 됐다는 뜻으로 가볍게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하루를 쉰 기차는 예정대로 출발했다. 비록 시간은 지체됐지만 어제처럼 불발되지 않았다. 청년은 타지 않았다. 점례는 책 대신 청년을 생각하느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넓은 만주 벌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는 그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무모한 도전을 그쯤에서 멈추고 편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아직 어리고 수줍고 해야 할 일은 많은 청년은 자신의 목숨을 빨리 마치기 위해 안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점례가 보기에 어리석은 일이었다. 많은 것을 잃은 점례는 청년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점례는 청년인지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삶을 살 권리가 있어. 많이 잃은 사람에게는. 특히 위험한 일을 하면서 그렇게 된 사람에게는. 그녀는 청년이 준 종이를 펼쳐 보았다. 경성의 주소지였다. 두 개의 주소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적어도 경성에 내리면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점례는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가난한 고흐가 열정을 바친 그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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